판시사항
가. 형사소송법 제309조 에 규정된 피고인의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들이 예시적인 것인지 여부
나. 자백의 신빙성 유무에 대한 판단기준
판결요지
가. 형사소송법 제309조 는 "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 바, 위 법조에서 규정된 피고인의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는 원칙적으로 예시사유로 보아야 한다.
나. 자백의 신빙성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첫째로, 자백의 진술내용자체가 객관적으로 합리성을 띠고 있는가 둘째로, 자백의 동기나 이유 및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가 어떠한가 셋째로, 자백외의 정황증거중 자백과 저촉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없는가 하는 여러점 등을 심사숙고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참조조문
가. 형사소송법 제309조 , 나. 형사소송법 제308조
피 고 인
피고인
상 고 인
검사
변 호 인
변호사 김형준
주문
상고를 기각한다.
이유
검사의 상고이유를 판단한다.
1. 원심이 유지한 1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거시증거 등을 종합하여 이건 피해자 윤경화(71세), 동 강경연(19세), 동 윤수경(6세)이 1981.7.22경(정확한 일시는 알 수 없다)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128의 14 소재 위 윤경화의 집에서 윤경화는 머리에 5군데를(좌측늑골 1번부터 9번까지 우측늑골 6번부터 8번까지 골절도 겸함), 강경연은 머리에 8군데를(좌측전완부에 방어흔적으로 보이는 타박상도 있음) 쇠망치로 각 얻어맞고 그 목이 녹두색 나이롱줄(증 제 10,11호)에 각 졸라 매여져 살해되고, 윤수경은 머리에 2군데를 쇠망치로 얻어맞고 그 목이 백색 전기줄(증 제12호)에 매여진 채로 살해된 사실을 확정하고,
피고인은 검찰수사 3차 피의자신문조서(1981.9.1) 작성시부터 원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여 위와 같은 범행을 범한 사실이 없고 이건 공소사실 기재의 범행시간에는 서울 소공지하상가에서 아들 공소외 1의 티샤쓰를 사고 그곳에서 시청앞 무교동을 지나 청진동 입구까지 걸어가서 그곳 옷가게에 들려 스타킹 2개와 여자용 런닝 2점을 산 다음, 조계사쪽으로 걸어가다가 그 부근의 견지식품 앞길에서 주인여자 염옥순을 만나 외상값 독촉을 받고 조계사에 들려 포교원장 김현홍 무진장 스님을 만나 인사하고, 수요 청년법회에 참석했다가 다시 법당을 나와 카텐보살(김정열)을 만난 후 약 30분간 탑돌이를 하고 그곳을 나와 화신근처 주택은행옆 약방에서 박카스와 판피린 1병을 사마시고 그 근처에서 16번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다가 아리랑고개 시장 앞에서 내려서 도시락 반찬거리를 산 후 다시 5번 버스를 타고 집(성북구 정릉동 290의41)에 돌아왔다(귀가시간 22:30 내지 23:00경)고 주장하면서 피고인은 이건 발견 당일인 1981.8.4. 21:30경부터 용산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하여 1981.8.6. 02:30경 잠깐 풀려 나왔다가 동일 10:30경 다시 강제 연행된 이래 호텔등을 7차례나 옮겨다니면서 잠도 안재우고 계속되는 고문을 견디다 못하여 경찰에서 이건 범행을 허위자백 하였으며 검사앞에 가서도 위 범행을 자백하지 않으면 다시 데려다가 고문을 계속하겠다는 경찰관의 위협이 두려워서 검찰에 송치된 직후인 1981.8.26자 검찰수사 1차 피의자신문조서 작성시까지 위 범행을 자백하는 허위진술을 하였다는 변소를 적시하고 난 후 (1) 피고인의 경찰에서의 이건 공소사실 내용과 같은 범죄사실을 시인하는 자백진술은 피고인이 이를 증거로 함에 동의하지 아니하고 또 피고인이 15일 가량 경과된 이건 범행당일 1981.7.22 특히 20:30경부터 22:30까지의 행적을 정확히 대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직접적인 증거나 결정적인 단서도 없이 피고인의 신체가 부당하게 장기간 구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건 범행을 자백한 것이므로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사유가 되어 증거능력이 없고, (2) 피고인의 검찰에서의 자백진술(송치 당일 1981.8.24 1차 피의자신문조서와 8.26 2차 피의자신문조서)과 피고인의 자백진술을 녹취한 녹음테이프(증 제48호)에 대한 1심 법원 검증조서중 피고인의 진술기재는 범행현장의 객관적 상황과 모순되고 객관적인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어 사리에 반하며 허구적인 사실이 포함되어 있고 그 진술에 일관성이 없어서 신빙성이 없고 (3) 피고인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같은 수용자에게 이건 범행을 자백한 진술은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스러워 이건 범행을 인정할 자료가 되기에 부족하다 하여 피고인의 모든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어 유죄의 증거로 할 수 없고, (4) 이건 범행에 부합되는 수사경찰관 하영웅, 천정기, 최용섭, 고무송 등의 각 1심 법정에서의 증언과 (5) 기타 거시 정황증거들은 설사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이건 범행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달리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고,
원심판결은 위 1심 법원의 판단이 정당함을 긍인하여 피고인의 경찰에서의 자백은 피고인이 이를 증거로 함에 동의하지 아니하므로 배척하고, 검찰에서의 자백은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배척하고, 피고인의 자백녹취서는 임의성이 없고, 검찰이 2심에서 새로히 제출한 망치자루에서 검출된 혈흔과 이건 현장에서 압수된 의자 쇼파 카바(증 제9호)에 찍힌 장갑 혈흔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모른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그 증명력을 배척하는 취지로 1심 판결 조처가 정당한 것으로 긍인 판단확정하였다. 먼저 자백의 임의성과 신빙성에 대한 상고 논지를 살펴보면 논지와 같이 형사재판에서의 자유심증주의는 법관의 자의를 허용하거나 또는 순수한 자유재량을 인정한 것이 아니며 증거의 평가는 경험칙과 논리칙에 따른 합리적, 과학적 심증주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는 개념상, 논리상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논지와 같이 형사소송에 있어서 공소사실은 소송의 진전에 따라 그 실체면이 점차적으로 발전 형성되어 가는 것임을 지적한 점 또한 정당한 주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건에서의 원심이나 원심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드린 1심의 피고인의 자백진술에 대한 판단조처가 경험칙과 논리칙에 어긋나지 않고, 합리적, 과학적 자유심증주의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정당한 조치임을 긍정할 수 있고 따라서 원심판결이 결코 자유심증주의의 오용 내지 남용이 아님은 다음에서 설시하는 바와 같다.
형사소송법 제309조 는"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바, 위 법조에서 규정된 피고인의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는 원칙적으로 예시사유로 보아야 하고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방법등은 일응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의 예시에 불과함은 같은 법조 의 문리적 해석의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며 문면상 " 기타의 방법" 은 또한 다종다양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위 피고인의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는 개별 독립적이던 2개 이상 경합적이던 간에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건을 일건 기록에 비추어 개관하면 피고인이 1981.8.4부터 적법한 절차에 따른 법관의 구속영장이 발부 집행된 1981.8.17까지 불법적으로 신체구속이 장기화된 사실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므로 1심 판결에서 언급한 이건 수사경찰관의 피고인에 대한 고문이나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경합된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를 아울러 고려한다면 피고인의 경찰에서의 이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자백진술은 피고인 이 증거로 함에동의 유무를 불구하고 유죄의 증거로 할 수 없음은 헌법 제11조 , 형사소송법제309조 등의 법이념상 당연한 해석귀결이며 형사피고인의 자백이 " 증거의 왕" 의 위치로부터 퇴위된 것도 우리의 형사소송법이 1954.에 제정된 이래 30년이 경과된 현금에 이르러서는 현저하며 더욱이나 형사소송제도 운영의 민주법치화를 기하고 국제인권규약 가입 비준을 고려하기에 이른 현시점에서는 단언을 요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형사소송법 제309조 해석상 유의할 점은 같은 법조 에서 규정한 피고인의 진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사유가 없는 경우의 자백의 임의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그 자백이 엄격한 증명자료로서 사용될 자격 즉 증거능력까지도 당연히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대저 임의로운 진술은 진실을 반영하는 개연성이 큰 것으로 인정되지만 범죄혐의 를 받은 자는 임의로운 상태에서도 진실에 합치하지 않거나 또는 진실에 반하는 자백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특히 범죄혐의를 받은 자가 외부와 격리되어 가족이나 변호인의 면접, 선임 등 방어방법이 차단된 채 위법된 장기구속상황하에서 자기를 진범이라고 확신하는 경찰관원들로부터 교대하여 집중적이며 야간에도 잠을 재우지 않는 등 방법으로 범행 당일의 피고인의 행적에 대하여 12회나(경찰기록447정)진술을 번복하는 등 조사를 받은 이 건에 있어서와 같은 경우(경찰기록 784정기재 허언탐지 시험 피험자 고숙종은 정신적면 및 육체적면, 시험조건에 극히 미달된 점 참고)에는 통상인으로서는 스스로 방어의 의사를 포기하고 될대로 되라는 심리가 형성되어 경찰관원의 의도에 수순하는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 건에서와 같이 피고인의 자백이 주된 증거가 되어있는 이상, 피고인의 자백진술의 신빙성 측면을 신중하고 면밀하게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건에서 피고인이 검찰에서 한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구체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첫째로, 자백의 진술내용 자체가 객관적인 합리성을 띠고 있는가 둘째로, 자백의 동기나 이유 및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가 어떠한가 셋째로, 자백 외의 정황증거중 자백과 저촉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없는가 하는 여러 점등을 심사숙고하여 판단하여야 하며, 피고인의 검찰에서의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함에 있어 이미 증거능력이 없다고 배척한 피고인의 경찰자백내용을 그 일부로 보아 판단하고 있음은 상고논지와 같으나 이건 공소사실의 기재내용, 1심법정에서의 검사의 피고인에 대한 신문방법, 신문대목, 입증방법 등에 비추어 보면 검사스스로 검사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각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되지 아니한 상세한 부분에 관하여는 그 부분에 대한 경찰에서의 진술을 토대와 골자로 하여 이건 공소유지하고 있음을 규지할 수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정당하고도 타당한 공소유지방법으로 인정된다 할 것이므로 이러한 취지와 견해에서 1심이 검찰자백의 신빙성을 판단함에 있어 검찰의 자백진술에 표출되지 아니한 상세한 부분에 대하여는 경찰에서의 자백진술을 원용하여 판단한 조처에 어떠한 잘못도 없다는 원심견해를 당원도 정당한 것으로 유지할 것이며, 오히려 이런 견해는 현행 형사소송 진행상 필요함은 물론 그렇게 하므로써 실체진실 발견에 접근된다고 확신한다.
경찰 및 검찰에서 한 이 건 범행에 대한 자백내용을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1단계로 경찰 초동수사착수 후 최초로 범행을 시인한 피고인의 자필 진술서(경찰기록 318정 이하, 1981.8.9.01:00 작성된 것으로 작성시간 01:00로 기재된 부분의 잉크색이 다름, 위 323정 이하, 1981.8.10.14:00 작성), 진술조서(경찰기록 418정 이하 ; 주로 피고인의 1981.7.22의 행적진술)에서 한 자백, 2단계로 경찰수사 1차피의자신문조서(경찰기록 453정 이하;1981.8.12 작성자 하영웅 순경)에서 한 자백, 3단계로 경찰수사 2차, 3차 피의자신문조서(경찰기록 498정 이하 및 530정 이하; 각 1981.8.13 작성)에서 한 자백, 4단계로 경찰수사 4차 피의자신문조서(경찰기록 662정 이하; 1981.8.14 작성)에서 한자백, 5단계로 경찰수사 5차 피의자신문조서(경찰기록 766정 이하; 1981.8.16작성)에서 한 자백, 6단계로 경찰수사 6차피의자신문조서(경찰기록 924정 이하;1981.8.21 작성)에서 한 자백 등에 이어 7단계로 검찰수사 1차피의자신문조서(검찰기록 1정 이하 ; 1981.8.21 작성)에서 한 자백, 8단계로 검찰수사 2차 피의자신문조서(검찰기록 17정 이하 ; 1981.8.26 작성)에서 한자백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위 각 단계에서의 자백진술이 여러차례 변동되고 특히 피고인의 이건 범행일시로 추정된 1981.7.22. 20:30부터 22:30까지의 행적진술은 전술한 바와 같이 12회나 진술이 번복되는등 위 각 단계에서 극심한 진술변동이 된 점과 위 각 단계에서의 자백진술 사이에 여러 점에서 진술변경과 차이가 있고 너무나 일관성이 없음이 발견되고 있으니 이하 상고논지 각 점을 기록에 따라 순차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범행동기
경찰수사단계에서는 피고인이 피해자 윤경화에게 아파트를 사달라고 조르다가 거절당하여 불현듯 윤경화를 살해해 버리고 피고인 자신도 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자백 진술하고 있으나 위 경찰의 범행동기 수사는 단적으로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건과 같은 살인사건 그것도 피해자 강경연(19세)를 포함한 3인을 살해한 강력사건에서의 범행동기가 지나치게 평면적, 우발적으로 지적된 점은 수긍하기 어렵고 더욱 경찰에서 검찰에 송치한 강도 살인죄의 범행동기 즉 피해자 윤경화의 재물강취 동기에 대하여는 명백한 자백진술이 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피고인은 검찰에서 이 건 범행의 동기에 대하여 (1) 그날 점심대 윤경화가 기분이 좋은 것을 보고 밤에 찾아가서 아파트를 사달라고 조르다가 거절당하자 순간적으로 윤경화를 죽이고 자기도 죽어 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건 범행을 범하였고, (2) 윤경화는 평소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피고인의 남편에게만은 유산을 물려준다고 말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날 윤경화가 재산을 한 푼도 물려줄 수 없고 전재산을 사회단체에 희사하겠다고 말하여 상속재산에 대한 강한 집착에 윤경화를 살해하였으며, (3) 윤경화에게 속아서 결혼하였으면서도 자식들에게 만은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하면서 윤경화를 위해 헌신해 왔으나 앞으로는 찾아오지도 말라고 하므로 20년간 윤경화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이때까지 속아온 울분이 한꺼번에 끌어올라 순간적으로 이 건 범행을 범하게 되었으며, (4) 처음 윤경화를 죽이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자신도 죽으면 그 만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윤경화를 죽인 후 식모 강경연이가 사람 살리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치는 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자신의 범행이 탄로날까하여 겁이 나서 순간적으로 강경연, 윤수경까지 죽이게된 것이라고 자백진술하고 있는데 대하여 원심은 거시증거에 의하여 피고인은 남편 공소외 2와 결혼한 후 동인의 고모인 피해자 윤경화와 함께 살기도 하면서 불구인 동인을 4년간 부축하여 건국대학교 야간부를 졸업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동인이 조계사 신도회 회장을 할 수 있도록 보좌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위 윤경화도 피고인을 양자며느리라고 하여 다른 조카며느리들보다 더 가까이 지내면서 매월생활비를 보조하여 주기도 하는 등 윤경화와 피고인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처럼 지내는 관계에 있는 사실이 인정되고 이러한 사실등에 비추어 보더라도 위 피고인의 자백진술과 같은 동기만으로는 피해자 윤경화를 포함한 세 사람을 살해할 만한 동기가 된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1심조처를 정당한 것으로 긍인하고 있으니 살피건대 위 범행동기 (1)내지 (3)은 그 기조가 상속재산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는 바, 피고인과 같이 고등교육을 받은 자가 피상속인을 살해할 경우 그 범인이 피고인이 된 이상 그 남편 또는 자녀들에게 정상적으로 재산이 상속되리라고는 믿지 않게 됨이 통상적인 사회통념이라 할 수 있으므로 결국 위 (1) 내지 (3)은 이 건 범행동기로서 합당치 못하며, 더욱 경찰에서 추송된 기록과 1,2심에서의 피고인의 변호인 등이 제출한 검사논고에 대한 답변서등 중 해당란 기재 등을 보면 피해자 윤경화의 조카는 15명이나 되어 공동 상속비율이 많치 않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현재 살고 있는 서울 성북구 정능동 소재 집도 윤경화 소유명의인 사정을 고려하면 그러한 상속관계하에서 피고인이 이 건과 같이 피해자 윤경화 외 2인을 순간적인 범행동기하에 그것도 단시간내에 살해한 동기로서는 부족하다 함이 오히려 사리에 맞고 사회통념상 기울어질 수 있는 견해라 할 것이다. 논지와 같이 이 건과 같은 살인등 중범죄에 있어서는 범행동기도 교묘하게 가장되어 있는 때가 많으므로 피고인의 자백진술만으로 피상적이고 기계적으로 판단하려는 잘못을 범하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주장자체로서는 일리 있다하겠으나, 일건 기록을 검토하여도 피고인의 가장된 범행동기를 판단하기 어렵다 할 것이므로 이 점 이유없고, 또한 피해자 강경연, 윤수경을 살해한 범행동기로 피해자 윤경화를 살해한 범행을 은폐하기 위하여 각 살해하고 위장된 살해동기는 강경연은 윤경화를 도와온 피고인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어 피고인이 윤경화로부터 배척당하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윤수경은 윤경화의 양녀로서 윤경화의 상속재산 일부를 차지할 경쟁자라는 질투심이 작용하지 않았느냐는 논지는 검찰주장 자체가 추측한 것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처럼 추측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비현실적인 독단으로서 받어 들여질 여지가 없으므로 논지는 이유없다.
3. 범행경로와 도구
피고인은 피해자 윤경화를 죽이고 자신도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들고 뒤뜰로 나가 나이롱 줄 약 2미터 가량(2개)를 끊어 가지고 오다가 쇠망치(전장 33센티미터, 중량 650그람 : 증제14호)를 보고 나이롱 줄과 쇠망치를 동시에 들고 들어가 이 건 범행을 범하였다고 자백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1심은 위와 같은 범행경로의 현장상황에 대하여 피고인은 위와 같이 부엌에서 뒤뜰로 나갈 때 그 사이에 있는 사잇문 2개와 후정 출입문이 모두 열려 있었으며 나이롱 줄을 끊어 가지고 되돌아 올때에도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왔다고 진술 또는 범행재연한 점에 대하여 1심증인 박영희, 조영복, 이문갑의 각 증언과 위 이문갑의 경찰에서의 진술기재(경찰기록 240정 내지 270정)에의하면 피해자 윤경화는 언제나 문단속을 철저히 하여 출입문을 꼭꼭 잠가 두며 이 건 당일에도 그 집 운전수인 이문갑이 19:50경 그 집에서 퇴출하면서 후정 출입문과 후정에서 주방에 이르는 사잇문 2개를 모두 숟가락으로 고리에 빗장을 하여 잠가 두었다는 것이고, 1심증인 최용섭의 증언과 경찰수사보고서(추송된 경찰기록 555정, 556정)의 기재에 의하면 이 건 발견 당시에도 위 사잇문 2개는 모두 고리에 숟가락이 꽂혀져 잠겨 있었다(다만 후정 출입문만은 고리가 잠겨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피고인의 위 이 부분 자백 진술은 범행현장의 객관적 상황과 서로 다른 모순이 있고 또 이 건 범행당시 방에는 윤경화, 강경연, 윤수경등 3인이 있었다는 피고인의 자백진술과 아울러 살펴볼 때 그러한 상황하에서 피고인이 이 건 나이롱 줄 2개만 끊어왔다는 것 자체가 선뜻 납득하기 어렵고, '나이롱 줄을 끊어 가지고 오다가 보니 망치가 보여 나이롱 줄로 목을 조이는 것보다 양손에 장갑을 낀 후 망치로 머리를 때려 죽이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망치를 들었다'고 한다면 그 망치만을 들고 가서 범행을 감행함이 통례라 할 것인데도 그 망치와 줄을 동시에 양손에 들고가서 이 건 범행을 감행하였다는 자백진술은 경험칙에 비추어 이례적인 것이어서 그 진술을 믿기 어렵다 하여 배척하였고, 원심은 검사 항소 논지와 같이 피고인이 이 건 범행당시 극도의 흥분상태하에서 문을 잠갔는지 여부를 기억할 수 없었다면 바로 기억할 수 없다고 진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진술하고 있는 점이 믿을 수 없고 그 진술내용이 객관적 현장상황과 모순된다고 판시하고, 다시 검사 항소논지와 같이 나이롱 줄이 2미터짜리 1개라면 피해자가 3인이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더욱 납득하기 어렵고, 범행당시 피고인에게 피해자들을 확인 살해하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봄이 자연스럽다 하겠거늘 검사 항소논지와 같이 피해자들을 확인 살해키 위하여 망치를 범행도구로 택하면서도 나이롱 줄을 버리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한 상고논지는 피고인의 진술이 범행당시 극도의 흥분 상태하에 있었을 것이므로 문을 잠갔는지 여부를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므로 이를 진술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진술내용이 객관적 현장상황과 일치하여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리에 반하고 나이롱 줄에 대하여도 그것이 뒤뜰에 있던 끈의 일부라는 것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결과 밝혀져 있는 이상 그것을 2미터 가량 끊어왔는지 그것은 두 개로 잘라왔는지는 별다른 의미가 없고, 망치를 범행도구로 택하면서도 끈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도 처음에 끈을 사용하여 범행을 계획하였다가 망치를 범행도구로 삼았으므로 끈도 함께 가지고 가서 범행을 한다는 것이 경험칙에 합당할 것이라 함에 있으나 대저 이건 공소사실과 같이 피고인단독으로 피해자 3인을 살해할 것을 범행현장에서 결의하였다면 범행 도구를 택함에 있어 가격도가 강한 둔기인 망치나 예기인 식칼(증 제15호) 등을 먼저 생각함이 사리에 맞는다 하겠는데 피고인은 우선 그 범행 도구를 끈으로 선택하였다는 점이 이례적인 것으로 인정되며, 범인이 누구이던 간에 범행당시 극도의 흥분상태하에 놓여지게 된 실정과 그런 흥분상태하에서 이 건 나이롱 줄을 뒷뜰에서 약 2미터 가량(2개)를 끊어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올 때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들어올 것이 또한 사리에 맞는다 함은 논지와 같으나 피고인의 이 부분 자백진술은 범행일로부터 18일이 경과된 1981.8.9. 01:00에 작성된 진술서(경찰기록 318정 이하)에서 비로소 기재 표출된 수사과정과 이 건 나이롱 줄은 피해자 윤경화, 강경연의 목에 감겨져 있는 채로, 망치와 식칼이 각 범행현장에서 1981.8.4. 21:00경 발견 압수된 사실(경찰기록122정 이하) 및 의사 구행남이 1981.8.5 작성한 피해자 윤경화의 사체검안서(경찰기록 32정)에 의하면, 교살로 추정기재된 내용 등을 아울러 검토하면 경찰이 초동수사단계에서 나이롱 줄을 범행도구로 우선 파악하고 난 다음 식칼, 망치 등을 고려하는 등 수사초점이 변동되어 나간 점을 인정하기에 어렵지 않고 따라서 피고인의 이 부분 자백진술도 바뀌어져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신빙성이 희박할 뿐만 아니라 이 건 범행현장의 객관적 상황과 서로 다른 모순이 인정되는 이상 조신하기 어렵고 또한 나이롱 줄을 2미터 가량 끊어왔는지 그것을 두 개로 잘라왔는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서 부당함은 물론 이 건과 같은 강력사건의 공소제기 내지 공소유지에 큰 영향을 끼칠 것임은 당연하므로 이 점을 1, 2심에서 판단한 조처는 필요 타당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 결국 이 점에 대한 논지는 이유없다.
4. 범행시 사용하였다는 장갑
1심에서는 피고인은 부엌옆 식모방 줄에 걸려 있던 나이롱 장갑을 양 손에끼고 망치자루를 쥐어보니 미끄러워 망치 옆에 있던 면장갑을 오른손에만 겹쳐 끼고 이 건 범행을 한 후 피묻은 장갑을 낀 채로 주방에 가서 형광등 불을 끌 때 그 곳에서 면장갑을 버렸는데 그 버린 장소는 어딘 줄 모르겠으나 목욕탕에 들어가서 보니 손에 면장갑은 끼어 있지 않아서 나이롱 장갑만 목욕탕에 벗어 놓고 나왔다고 자백 진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우 적어도 속에 낀 나이롱 장갑보다는 겉에 낀 면장갑에 혈흔이 더 많이 묻어 있어야 할 터인데 압수된 나이롱장갑(증 제13호)을 보면 온통 피가 묻어 있는 반면 그 위에 꼈다는 면장갑이라 하여 주방 근처의 식모방 맞은편 복도 병 모아둔 뒤쪽에서 수거하였다는 면장갑(피해자 윤경화의 혈액형과 같은 혈흔이 검출된 것)은 압수되어 있지 아니하여 현존하지는 아니하나 위 면장갑의 혈흔을 감정한 바 있는 1심증인 조달제의 증언에 의하면 위 면장갑에는 손바닥 안쪽 부위에 손가락 1마디 정도의 피밖에 묻어 있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니 이 점에 관한 위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현저히 사리에 반하여 도저히 믿기 어렵고, 피고인의 자백진술에 의하면 윤경화와 강경연을 망치로 치고 나이롱 줄로 동인들의 목을 각 감아맨 다음 윤수경이를 죽이려고 피묻은 장갑을 낀 채 다시 위 망치를 들고 2층으로 가서 동인을 살해하였다는 것이므로 과연 그렇다면 위와 같이 피묻은 장갑을 낀 채 들었던 위 망치의 손잡이 부분에는 당연히 많은 피가 묻었다고 보아야할 터인데 감정인 조달제의 1심에서의 감정증언에 의하면 위 망치에는 머리부분에만 혈흔이 조금 묻어 있을 뿐 그 손잡이 부분에서는 전혀 혈흔이 검출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도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사리에 맞지 아니하여 믿기 어렵다 하고, 1심증인 박명찬의 증언과 압수된 쇼파카바 1조각(증 제9호)의 현존 및 동 현장사진의 영상(경찰기록 60정)에 의하면 이 건 현장 피아노방 입구 응접실에 있던 쇼파카바에는 둘째 손가락부터 다섯째 손가락까지의 4개의 손가락 핏자국이 찍혀있는데 감정인 박종철 작성의 감정서(경찰기록 569정)의 기재에 의하면, 위 손가락 자국은 면장갑에 의한 자국이라는 것인 바, 1심증인 문국진의 증언과 위 쇼파카바가 놓여져 있는 현장 위치 동 쇼파카바에 찍혀져 있는 4개의 손가락 자국중 각 손가락의 길이, 방향, 간격, 형태 및 위 4개의 손가락 자국 중 가장 우측 손가락 및(외손의 경우 엄지손가락이 닿는 부분)에 찍혀져 있는 혈흔자국 등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위 손가락자국은 왼손 자국으로 보여지므로 그렇다면 오른손에만 면장갑을 겹쳐 끼고 이 건 범행을 범하였다는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객관적 현장상황과는 일치하지 않아 이를 믿기 어렵고, 또한 피고인의 자백진술 중 피고인이 이건 범행후 주방으로 불을 끄려고 나갔다가 그곳에서 면장갑을 버렸는데 그 버린 장소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주방의 불을 끄고 목욕탕에 들어가 손을 씻을때 보니면 장갑이 손에 끼어 있지 않아 나이롱 장갑만 목욕탕에다 벗어놓고 나왔다는 자백진술 부분도 1심 증인 장영순, 박명찬, 최용섭의 증언과 이 건 기록에 편철된 각수사보고서(현장수색관계)등의 각 기재를 종합하면 이건 범행 발견 이후 범죄공용물을 발견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현장정밀수색이 실시된 사실이 인정되는 만큼 피고인이 주방의 불을 끄러 나갔다가 그곳에서 아무렇게나 버렸다는 피묻은 면장갑(주방근처의 식모방 맞은 편 복도 병 모아둔 뒤쪽에서 수거하였다는 면장갑 제외)이 위와 같은 수차의 현장정밀 수색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하였다는 점 등에 비추어 그 자백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하고 원심은 검사 항소논지 중 손가락 1마디 정도에만 피가 묻은 면장갑은 피고인이 이건 범행에 사용한 장갑으로 증거제출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는 경찰기록 288정 및 558정에 의하면, 소론 장갑은 경찰이 피고인이 범행에 사용후 버렸다고 자백진술하고 있는 위치 부근인 피해자 윤경화 집의 식모방 맞은편 복도 병모아 둔 뒤쪽에서 수거한 것인데 그 후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그 면장갑에 부착된 혈흔이 이 건 피해자의 혈흔과 동일한지 여부 및 기히 감정의뢰한 소파 카바의 혈흔과 대조할 것을 감정의뢰하여 피해자 윤경화의 혈액형과 동일하다는 감정회보를 받아 그 감정회보서를 제출하고 있으므로서 그 장갑이 이건 범행에 사용된 여부에 관하여 의심이 있을 수 있어 1심이 위 면장갑에 대하여 판단한 조처는 정당하다고 긍인하고, 또 1심 판시 망치의 자루에 대하여 혈흔감정을 함이 없이 그 자루에 혈흔이 없다고 가볍게 판단한 잘못이 있다는 항소 논지부분에 대하여는 위 망치를 감정한 증인 조달제의 1심에서의 증언에 의하면 " 망치에는 어디에 어느 정도 피가 묻어 있던가요" 라는 질문에 망치의 자루에는 혈흔이 없었다는 취지가 포함된 표현으로 " 망치 머리 부분에만 조금 묻어 있었읍니다" 라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음을 들어 이와 취지를 달리하여 위 망치 자루에서도 에이(A)형의 혈흔이 검출되었다는 원심 증인 최상규의 진술이나 동인 작성의 감정서의 기재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부분 항소 논지를 배척하고, 다음 1심판시 쇼파카바에 찍힌 손자국 혈흔이 왼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인정이 잘못이라는 항소 논지에 대하여는 증인 문국진의 1심에서의 증언과 위 쇼파가 놓여져 있는 현장위치, 그 쇼파카바에 찍혀 있는 4개의 손가락 자국중 각 손가락의 길이, 방향, 간격, 형태 및 위 4개의 손가락자국 중 가장 우측 손가락밑(왼손일 경우 엄지손가락이 닿는 부분)에 찍혀져 있는 혈흔 자국 등을 종합하여 위 쇼파카바에 찍혀있는 손가락 혈흔자국은 왼손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판시한 조처는 정당한 것으로 수긍하고, 검사가 원심에서 제출한 박종철 작성의 감정서의 기재와 동인의 원심에서의 증언은'위 혈흔자국이 왼손에 의한 것인지 오른손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취지로써 1심의 위 사실인정에 방해가 되지 아니하고 그외 이 부분 항소논지가 지적하는 점을 배척하고 있는 바, 기록과 대조하여 살펴보면 원심의 판단조처는 정당한 것으로 수긍되고 거기에 채증법칙을 어겨 사실을 오인한 위법이 없다. 더욱 1심에서의 증인 고무송의 증언(공판기록 1110정 이하)에 의하면, 위 쇼파카바(증 제9호) 수거장소가 부엌 냉장고 앞이라고 진술함에 대하여 1심증인 박명찬 진술은 쇼파카바는 피아노방 우측에 있었다고 상치된 증언을 한 것에 비추어 보면 이 건 쇼파 카바의 수거장소 조차 분명치 못한 것임을 지득할 수 있고, 위와같이 이 건 범행도구인 망치에는 머리부분에만 혈흔이 조금 묻어 있었다는 것인 바, 도시 피고인의 자백 진술대로라면 위와 같이 그 망치로 피해자 윤경화, 강경연, 윤수경의 각 머리를 5회, 8회, 2회 강타한 것인데 망치머리부분에만 혈흔이 조금 묻어 있을리가 만무하고 가사 위 원심증인 최상규의 진술이나 동인작성의 감정서 기재와 같이 위 망치자루에서도 에이(A)형의 혈흔(피해자 윤경화의 혈액형이 에이형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위 망치자루의 혈흔이 윤경화의 혈액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자료도 없다)이 검출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하여도 거기에는 최후로 가격 당한 피해자 윤수경의 혈액인 비(B)형의 혈흔이 검출된다던가 또는 위 윤수경의 혈액인 비(B)형의 혈흔에 피해자 강경연의 혈액인 오(O)형의 혈흔이나 피해자 윤경화의 혈액인 에이(A)형의 혈흔이 같이 검출되어야 할 이치인데 그렇지 못한 모순이 발견되어 사리에 맞지 않아 조신키 난하고, 이건 면장갑이 현존하지 못한 사실을 살피건대, 의혹없이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고 공소유지상 결정적인 증거가 수집되지 못하였다는 평을 면할 수 없어 결국 논지는 이유없다.
5. 범행장면
1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피고인은 검찰수사(검찰기록 9정)에서 쇠망치로 윤경화의 머리 뒷꼭지 부분을 3, 4회 가량 치니까 그때 식모 피해자 강경연이가 사람 살리라고 하면서 2층계단으로 도망치기에 뒤따라 올라가서 망치로 머리를 여러번 치니까 계단아래로 굴러 떨어져 식모가 떨어진 쪽으로 따라 내려와보니 윤경화가 계단난간 사이에 몸이 끼어 있었는데 상반부는 계단 위에 놓여있고 하반부는 마루에 놓여 있어 계단난간 사이에 끼어 있는 윤경화를 발목을 잡고 세게 당겨 겨우 빼서 피아노방에 옮기고 다시 식모도 끌어다가 같은 방에 옮긴 후 안방에 갖다둔 나이롱 줄로 각각 목을 졸랐다고 자백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위 피고인의 자백진술대로라면 윤경화의 사체는 머리를 피아노 방문쪽으로 하고 다리는 그 반대쪽으로 하고 있어야 사리에 합당할 터인데 1심에서의 증인 최용섭의 증언과 이건 현장 사진영상(경찰기록 67정)에 의하면 위 윤경화의 사체는 다리를 피아노 방의 출입문 쪽으로 하고 머리를 그 반대쪽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니 이 점에 관한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객관적인 현장상황과는 맞지 않는 점이 있어 이를 믿기 어렵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의사 서재관의 1심에서의 증언과 동인이 작성한 윤경화에 대한 사체감정서의 기재(경찰기록 816정)에 의하면 윤경화는 전두골에 1개소, 두정골에 1개소 좌측두골에 1개소, 후두골에 2개소가 각 직경 3센티미터 가량씩 함몰 골절되어 있고 좌측늑골이 1번부터 9번까지 우측늑골이 6번부터 8번까지 골절되어 있다는 것이고, 증인 문국진의 1심에서의 증언과 1심법원의 현장검증조서의 기재에 의하면 피고인의 자백진술에서 말하는 윤경화가 끼어 있었다는 이건 계단난간은그 폭이 약 25.5센티미터이고 그 대각선의 길이가 긴쪽이 82.5센티미터, 짧은쪽이 41센티미터이며 그 계단의 높이는 높은쪽이 60센티미터, 낮은쪽이 36센티미터인 사실이 인정되고, 위 문국진 및 서재관의 1심에서의 증언과 대한신경외과 학회 회장 조성옥 작성의 1982.1.8 사실조회에 대한 회보서의 기재등을 종합하면 피해자 윤경화가 피고인의 자백진술과 같이 쇠망치로 얻어 맏아 위와 같은 정도의 5개소 함몰골절상을 입은 경우에 동 피해자가 가격당했다는 장소인 피아노 방으로부터 스스로 걷거나 기어서 위 계단 난간있는 곳까지 갈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그 몸이 위와 같은 계단난간 사이에 끼어서 상반부는 계단위에 놓여있고 하반부는 마루에 놓여있는 상태로 된다는 것은 거의 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고, 설사 의도적으로 머리를 들여 밀고 몸을 비틀면서 들어가 의식적으로 그와 같은 작태를 작출하였다 하더라도 그 발목을 잡고 세게 당겨 빼내는 동작에 의하여서는 좌측늑골이 1번부터 9번까지 일률적으로 골절될 수는 없다(이유인즉 1번늑골은 쇄골밑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러한 동작에 의하여 쇄골골절 없이 1번늑골이 골절되지는 아니한다는 것이다)는 것이니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위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객관적 합리성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어 이를 믿기 어렵다 하고 증인 박영희, 조영복, 최용섭의 1심에서의 각 증언과 1심법원의 현장검증조서의 기재에 의하면 이건 현장의 안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로는 안방뒤쪽으로 해서 안방 목욕탕을 지나 후정 출입문쪽으로 가는 평상시 사용한다는 통로가 있으며 이건 발견당시에도 위 통로문은 잠겨있지 아니하였다는 것인바, 이러한 점 등을 고려하면 피해자 윤수경과 강경연이 이건 당시 피아노방의 안쪽에 있는 안방 특히 강경연은 위 통로가가는 안방주방에 있다가 피아노방에서 피고인이 윤경화를 살해하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친다면 당연히 범인으로부터 멀어지는 뒤통로 쪽으로 달아나는것이 사리에 합당할 터인데 쇠망치를 들고 있는 범인쪽으로 다가와서 범인이 있던 피아노 방 더구나 안방과 피아노 방 사이에는 미닫이 문이 있는 것을 경유하여 범인 옆을 지나 2층 계단으로 도망쳤다는 피고인의 위 자백진술은 경험칙상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이를 믿기 어렵다고 판시한데 대하여 검사항소 논지 중 윤경화가 2층 계단 난간 사이에 끼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부분에 관한 피고인의 자백진술 내용은 " 윤경화가 2층 계단의 난간 사이에 몸이 끼어있었는데 몸의 상반부는 계단위에 놓여 있고 하반부는 마루위에 놓여 있었다" 는 것인바, 위 항소논지 지적의 1심에서의 증인 문국진의 진술은 " 윤경화가 2층계단 난간사이에 끼일 가능성은 있는데 두부가 끼일 정도의 가능성일 뿐 몸의 상반부 전부가 끼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는 취지로 받아 들이고, 또 대한신경외과학회 회장명의의 사실조회의 대한 회보서의 기재내용에는 " 즉사가 아니면 계단 난간사이에 끼어들어 갈 수도 있었을 것임" 이라고 되어 있을뿐 몸의 어느 부분까지 끼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으나 위 회보서를 직접 작성한 증인 이인수의 원심에서의 증언에 의하면 " 머리 정도를 들이미는 것이 가능하다" 는 것으로 피고인의 자백진술내용과 같은 상태로 피해자 윤경화가 위 난간사이에 끼일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만약 위 자백진술내용과 같은 상태로 윤경화가 위 난간사이에 끼었다면 2층에 이르는 첫번째 계단에 같은 사람의 상해부위 및 정도에 비추어 많은 피가 쏟아져 있었을 터인데 현장사진영상(경찰기록 90정)에 의하면 위 첫번째 계단에 약간의 혈흔만이 부착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니 피고인의 이 부분 자백진술이 객관적 현장상황과 모순되고 객관적 합리성을 현저히 결여하여 조신키 난한다는 이유밑에 1심판단조처의 정당함을 긍인한 것인 바, 위 거시증거들을 기록과 대조하고 피해자 윤경화의 사진(경찰기록 635정)영상에서 보여주는 비대체격임을 아울러 살펴 보아도 원심조처에 채증법칙을 어겨 사실을 오인한 잘못이 없고 상고논지도 항소주장을 되풀이함에 그쳤을 뿐 위 원심판단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자료제출도 없으므로 이 점 논지 이유없다.
6. 범행순서, 범행장소에 이른 경로, 범행후 도주 경로
1심 판결이유에 의하면, 피고인의 이건 범행순서에 관한 자백진술을 살펴보면, 전시 1기재 1,2단계 경찰수사시에는 피고인은 쇠망치로 윤경화의 머리를 치니까 그대로 넘어지기에 나이롱 줄로 그 목을 1번 졸라메어 죽이고 나니 그때 식모가 사람살리라면서 2층으로 달아나기에 뒤쫓아가서 머리를 마구치니까 계단아래로 굴러 떨어지기에 따라 내려와 그 목을 나머지 나이롱줄로 묶은 다음 식모를 끌어다가 윤경화옆에 나란히 눕힌후 이불을 그 위에 씨웠다고 진술하다가, 3단계 경찰수사시에 이르러는 쇠망치로 윤경화를 수회 치니까 그 소리에 식모가 2층으로 도망치기에 따라가 머리를 치니 계단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따라 내려와 머리를 잡고 피아노 방으로 끌고 들어간 다음 윤경화를 엎드려 눕히고 목에 나이롱 줄을 감아매고 다시 식모를 같은 방법으로 감아매었다고 진술하여 그 순서가 바뀌어지다가, 5단계 경찰수사시에는 그때 식모를 끌어다 눕히고 다시 윤경화를 눕히려고 보니 윤경화가 목욕탕 문까지 나와 있는것을 보았다고 모순되는 진술을 하고, 6단계 경찰수사시 및 7단계 검찰수사시에 이르기까지는 윤경화의 머리를 치니까 그 소리에 식모가 2층으로 도망치기에 따라 올라가 망치로, 여러번 치니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따라 내려와보니 윤경화가 거기까지 나와있어(계단 난간에 끼어) 윤경화를 끌어다 눕히고 나서 다시 식모도 끌어다 눕힌 다음 윤경화, 식모 순으로 목을 졸라매었다고 진술하고 있어, 피해자 윤경화의 목을 졸라 매었다는 시기, 장소나 상황및 피해자 강경연을 쫓아갔다는 시기와 목을 졸라 매였다는 시기, 장소, 상황 등이 계속 변경 진술되어 일관성이 없음은 물론, 윤경화가 쓰러졌다는 장소도 처음에는 망치로 치니까 그 자리에서 옆으로 쓰러지기에 바로 목을 졸라 매었다고 하더니 점점 그 쓰러졌다는 장소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나중에는 계단난간 사이에 끼었다는 것으로까지 발전되는 등 과연 피고인이 스스로 경험한 사실을 자백진술한 것인지 의심스러워 그 진술을 믿기 어렵다 하고, 다음으로 피고인이 윤수경을 살해하였다는 자백진술내용을 살펴보면 위 1단계 경찰수사시에는 윤수경이를 망치로 때려 죽게 했다고만 간략히 기재되어 있고, 2단계 경찰수사시에는 망치로 쳐죽이고 건너방(2층 법당)에 있는 전기줄로 목을 졸라맨 다음 이불을 덮고 내려왔다고 기재되어 있고, 특히 망치로 머리를 친 후 전기줄로 목을 졸라 맨 다음 이불을 덮었는데 그 전기줄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기재되었다가 3단계 경찰수사시(3차 피의자신문조서)에서는 윤경화와 강경연을 살해하고 이불을 씌우고 나서보니 윤수경이가 보이지 않아 그 근처를 보니 전기줄들이 많아 그 중 한토막을 줏어 들고 2층에 올라가서 망치로 두번 치고 가지고 간 전기줄로 목을 2번 감았다고 하여 그 진술이 바뀌더니, 1981.8.21 검사의 자백진술녹취시에는 밑에 쇼파 거기에 늘어져 있는 전기줄, 1981.8.22 실시 경찰현장검증시에는 복도에 있던 전기줄이라고 각 진술하다가 다시 위 7단계 검찰수사시에 이르러서는 윤경화, 강경연을 죽이고 나서 2층으로 올라가 윤수경이를 침대 밑에서 끌어내어 망치로 2번 치니까 쓰러지기에 혹시 살아날까 걱정이 되어 1층에 내려와서 끈을 찾았더니 약 1미터정도 되는 전기줄이 보이기에 가지고 올라가서 그 줄로 목을 졸라 매었다고 진술하고 있어 위 각 자백진술들을 살펴보면, 망치로 머리를 친 사실, 전기줄로 목을 조른 사실, 이불을 덮어 둔 사실(이건 발견 당시의 상황) 외의 그 나머지 사실 즉 윤수경의 목을 졸라 맨 전기줄은 어디 있던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구하였는지, 처음부터 전기줄을 망치와 함께 들고 2층으로 올라갔는지 아니면 망치만 들고 올라가 머리를 치고 나서 1층으로 내려와 전기줄을 구해가지고 다시 올라가서 목을 졸라 매었는지 등의 사항들에 관한 진술이 끊임없이 변경 추가되는 등 그 자백진술의 일관성이 없으며, 또 피고인은 윤수경을 엎어놓고 전기줄로 목을 감아 매었다고 자백진술(범행재연)하고 있으나 (경찰기록 862정, 907정) 이건 현장사진의 영상(경찰기록 104정 내지 106정)에 의하면, 윤수경은 천정을 향하여 똑바로 눕혀져 있어 피고인의 위 자백진술이 객관적 현장상황과도 배치되는 점 등에 비추어 이를 믿기 어렵다고 판시하고
다음 피고인의 이건 범행장소에 이른 경로, 범행후 도주경로에 관한 자백진술을 살펴보면, 1단계 경찰수사시에는 미도파 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윤경화의 집으로 갔다고 진술기재되어 있고, 이어 한국은행 본점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갔다는 사실이 추가되었다가, 다시 미도파앞 지하상가에서 피고인의 상의내의 메리야스와 공소외 3이의 반팔 티샤쓰를 산 사실과 공중변소에서 입고 있던 분홍색 원피스를 밤색원피스로 갈아입은 사실이 추가되고 1981.8.12 작성 메모형식의 진술서(경찰기록 477정이하)에서는 지하상가에서 박정순을 만나 빽값을 지불한 사실이 추가되었다가 위 3단계 경찰수사(3차 피의자신문 조서)에서는 박정순을 만나 빽값을 지불하였다는 사실이 빠지고 그 대신 공중변소에서 밤색원피스만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 새로 산 부라자형 메리야스도 갈아 입었다고 진술이 바뀌었다가, 그후에는 다시 밤색원피스만 갈아 입었다고 변경하고(1981.8.21 녹음녹취시), 7단계 검찰수사시에는 한국은행 본점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건 다음 바로 윤경화의 집으로 간 것으로 진술되는 등 미도파앞에서 내려서(버스) 윤경화의 집에 가기까지의 행적진술 자체가 일관성이 없어 과연 피고인의 위 각 자백진술이 어느 정도 진실성이 있는지 의심스럽고, 공중변소에서 입고 있던 분홍색원피스를 밤색원피스로 갈아 입었다는 점에 대하여도 그 진술 자체의 일관성이 없어 믿기 어렵거니와 피고인의 자백진술처럼 집을 나설 때 윤경화의 집을 방문할 생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밤색원피스를 입고 나서는 것이 상례라 할 것임에도 이를 핸드백에 넣어 가지고 나와 나중에 공장변소에서 이를 갈아 입는다는 것 자체가 경험칙상 이례적인것으로서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아 그 자백진술을 믿기 어렵고,
다음 피고인의 이건 범행후 도주경로에 관한 자백진술을 살펴보면, 위 1단계경찰수사시에는 이건 범행후 택시를 타고 가다가 청파동에서 신발(슬리퍼) 등을 버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집(정능동)에까지 갔다고 진술 기재되어 있는가하면 위와 같이 청파동에서 집에까지 타고 간 택시요금은 2,000원이었으며, 그전에 피고인이 이건 범행을 부인하면서 사건 당일 아리랑 고개의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샀다고 진술한 것은 범행을 은폐하려고 거짓 진술한 것이라고 진술기재되어 있는데(경찰기록 418정 이하), 그 익일인 1981.8.12 위 아리랑고개의 식품가게(신흥상회)에서 피고인이 반찬거리를 사갔다는 사실이 그 주인 신계화에 의하여 확인되자(경찰기록363정) 위 2단계 경찰수사시에는 그 진술이 바뀌어 택시합승하고 가다가 아리랑고개의 시장에서 하차하여 식품가게에서반찬거리를 사고 5번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고 진술하고, 그 이후의 경찰수사시에서도 위와 똑같은 진술을 계속하다가 위 7단계 검찰수사시에는 택시합승하고 집으로 갔다고만 간단히 진술하고 있어 그 자백진술에 일관성이 없어 그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판시하였는 바, 원심은 피고인의 범행시 갈아입었다는 밤색 원피스에 대하여는 원심증인 윤미경, 윤보영의 진술에 의하면 피고인은 외출때 입었던 분홍색원피스(체크무늬)를 그대로 입고 귀가하였다는 것이므로 피고인의 위 자백진술은 객관적 사실에 반하고, 범행시 밤색원피스를 입었다면 그 옷에 많은 피가 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도 감정한 결과 밤색원피스에서는 혈흔이 검출되지 않고 있으니 이 점에 관한 피고인의 자백진술을 선듯 믿기 어렵다는 1심 판단조처를 정당한 것으로 긍인하고, 다시 항소논지인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하면서도 객관적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범행시 입었던 옷에 대하여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또 피고인 진술과 같이 범행시 입은 옷이 위 밤색원피스라 하더라도 범행 후 범행발견시까지 15일이나 경과되었으므로 그 사이에 혈흔이 검출될 수 없도록 수차 세탁하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 역시 이유가 없으며 1심이 위 자백진술을 배척함에 있어 거친 증거나 그 사실인정은 정당하고 그 인정사실에 의하면 피고인의 위 검찰에서의 자백진술 역시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하였다.
상고논지는 살인과 같은 중범죄에 있어서는 범인이 참회하여 스스로 자백하는 경우 이외에는 자백을 할 경우에도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때 비로소 자백하는 것이 통례이며, 자백을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자기의 죄과를 가볍게 할려고 하거나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할려는 것이 인간심리라 할 것이고 그리고 피고인이 범인이라면 범행당시에는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었을 것이므로 범행의 중요부분 외에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우며 사리에 맞는 것이라 함에 있으나 살피건대, 위 논지는 일반론으로서는 성립될 수 있다 하겠으나 이 건에서의 구체론으로서는 성립되기 어렵고 이 건에서 피고인의 자백진술이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합리화하려는 심리변화가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논급한 바 없으며 달리 이를 인정할 자료도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논지는 이유없다.
7. 범행현장 상황(안방상황, 스위치에서 혈흔검출, 소등상황)
1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피고인은 이건 범행당시 피해자 윤경화가 칼라텔레비젼을 안방에 놓고 피아노 방에 방석을 깔고 앉아 안방문을 열어놓고 텔레비젼을 시청하고 있었으며 윤경화는 백색 런닝셔쓰에 흰 속치마를 입고 있었다고 자백진술하고 있으나(경찰수사 2차, 3차, 5차 피의자신문조서, 경찰현장검증조서) 1심증인 박명찬, 최용섭의 각 증언과 사진영상(경찰기록 67정 내지 74정)에 의하면, 이건 발견당시 윤경화가 앉아 있었다는 피아노방에는 방석이 놓여져 있지 아니하였으며, 피해자 윤경화는 위 자백진술과 같은 속옷바람이 아니라 푸른색과 빨간색의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어서 이 점에 관한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객관적 상황에 맞지 않고, 피고인이 이건 범행당시 윤수경이를 죽이려고 2층에 올라갈 때 2층 복도입구의 불을 켰다가 죽이고 내려오면서 껐으며 그리고 밖에서 누가 볼까봐 주방에 켜 있는 불(피고인 이 뒤뜰로 나갈 때 켜놓은 것)을 껐으며 그 집을 나오면서 현관의 등을 껐는데 그 이외의 전등은 피고인이 켜거나 끈 것이 없다고 자백진술하고 있고(검찰기록13정, 경찰기록 530정 이하, 766정이하, 924정 이하 및 자백진술 녹음테이프), 검사는 위 자백진술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증거로서 주방에서 수거한 형광등스위치에서 피해자 윤경화의 혈액형과 같은 에이(A)형의 혈흔이 검출되었다는 점(경찰기록 553정, 574정)을 들고 있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인 최상규, 이종익 작성의 감정서(경찰기록 574정)의 기재에 의하면, 이건 범행후 피묻은 장갑을 낀 채 먼저 켰다는 2층복도 입구의 형광등 스위치에는 아무런 혈흔도 묻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주방에 있는 2개의 형광등 스위치중 흑색 스위치에서는 에이(A)형의 혈흔이 검출되었고 갈색 스위치에서는 예비시험(벤다진, 루비놀시험)에서는 양성으로 반응되고 본 시험(허모크로모겐 시험)은 시료부족으로 시행하지 못하였다는 것인바, 위와 같이 피묻은 장갑을 끼고 제일먼저 껐다는 2층복도 입구의 형광등 스위치에서는 오히려 아무런 혈흔도 묻어있지 않았다는 점은 피고인의 위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의심케 하는 것이고, 피고인이 껐다고 자백진술한 주방의 형광등스위치가 흑색스위치와 갈색스위치중 어느 것인지도 밝혀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막연히 주방에 있는 형광등스위치 중의 1개에서 혈흔이 검출되었다는 점만으로는 위 피고인의 자백진술의 진실성을 담보하기에는 부족되고, 오히려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피고인이 이건 범행후 주방의 불을 끄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피묻은 스타킹과 신고 있던 슬리퍼를 씻고 다시 마루에 나와 신문지가 있기에 슬리퍼와 스타킹을 쌌다고 하나, 1심 증인 박영희, 조영복, 윤영배의 각 증언 및 1심 법원의 현장검증조서의 기재에 의하면, 이건 집은 낡은 일본식 가옥으로서 낮에도 가옥 내부가 어두워 밤에는 불을 켜지 않으면 마루나 특히 목욕탕안에서는 물건을 분별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이 인정되는데, 그렇다면 피고인은 위 자백진술과 같이 주방에 있는 불도 끈 깜깜한 상태의 목욕탕 안에서 어떻게 피묻은 스타킹과 슬리퍼를 씻고 다시 마루에 나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스타킹과 슬리퍼를 쌀 신문지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고, 또 피고인은 처음에 이건 범행을 범하기 위하여 뒤뜰에서 나이롱줄을 끊어오다가 주방에서 쌀통 위의 망치를 보고 줄로 목을 조르는 것보다 망치로 때려 죽이는 것이 쉽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방 옆에 있는 식모방에 들어가 줄에 걸려 있는 나이롱 장갑을 끼고 나와 망치를 들었다고 자백진술하고 있는바, 1심증인 최용섭의 증언에 의하면 이건 현장발견 당시 위 식모방에는 불이 켜있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니 그렇다면 피고인은 밤중에 불도 안켜진 식모방에 나이롱 장갑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들어가서 어떻게 어둠속에서 그 장갑을 끼고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인지도 납득이 가지 아니하며, 또한 피고인이 윤경화, 강경연을 살해한 후 윤수경을 죽이기 위하여 2층에 올라가서 2층 복도 입구의 불만 켠 어두운 상태에서 어떻게 윤수경이 방안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깜깜한 두방을 뒤져서 윤수경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 납득이 가지 아니한다고 판시하였고, 원심은 위 이 부분 자백 진술은 1심판시와 같은 여러 사유에 비추어 객관적 현장상황과 모순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사리에 반하며 일관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1심의 사실인정을 정당한 것으로 긍정하고 항소논지를 배척하였다.
상고논지는 원심에서는 방석이 안방과 피아노방 사이에 놓여져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니 피해자 윤경화가 방석을 깔고 앉아 피아노 방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는 검찰주장이 오히려 객관적 상황과 일치하고, 피해자 윤경화의 옷차림에 대하여는 피고인 스스로 식모가 입었던 옷과 착각하였다고 정정진술(경찰기록 768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윤경화가 피고인에게 외출하자는 말을 한 사실(경찰기록 194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윤경화가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피해자 윤경화 집 2층 복도스위치는 벽에 부착되어 있는 스위치로 그 작동방법이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간편한 것이므로(경찰기록577정) 피가 묻지 않을 수도 있고, 이건 범행발견후 여러 사람이 드나들어 위 스위치를 만졌으므로 혈흔이 지워질 가능성이 있다 하겠으며, 피고인이 그 후에 껐다는 주방의 스위치는 경찰기록 552정, 압수목록 및 압수물 증 제18호, 현장검증사진(경찰기록 910정)에 의하면 그것이 40왓트짜리 큰 형광등의 스위치임을 알 수 있으니 그곳에서 윤경화의 혈흔과 같이 에이(A)형의 혈흔이 채취된 것은 감정서(경찰기록 577정)에 의하여 입증되고, 범행현장의 소등상황에 관하여는 피고인이 범행후 어떻게 어느 불을 껐고 어느 불을 켰는지 상세히 기억할 수 없음이 당연하고, 2층 복도에 불을 켜두면 첫번째 방안은 그 안이 환히 들여다 보이고 그 다음 방은 밖으로 향한 문이 전부 유리창문이므로 길가점포(경찰기록 906정)의 불빛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어 밝았을 것인바, 동일 상황에서 현장검증도 함이 없이 막연한 추축만으로 판단한 것은 심리미진이라 함에 있다. 일건기록에 의하여 살피건대 원심에서 방석이 안방과 피아노방 사이에 놓여져 있는 것을 1심판시와는 다르게 인정하고 있음은 소론과 같으나 그 것만으로서 곧바로 피해자 윤경화가 공소장기재와 같이 살해 직전에 그 방석을 깔고 앉아 피아노방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따라서 소론 객관적 상황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이라는 평을 면하기 어렵고, 피해자 윤경화가 살해당시 입고 있던 옷이 전술한 것과 같다면 외출에서 돌아와 위 방석에 앉아 텔레비젼을 시청하는 상황하에서 어찌하여 평상복으로 갈아 입지 않았는지 의심이 있고 범행당시는 무더운 여름 초저녁인 것을 감안하면 더욱 납득이 가지 않고, 피고인 스스로 피해자 윤경화의 옷차림에 대하여는 식모가 입었던 옷과 착각하였다고 정정진술된 것은 전기 5단계 경찰수사시 한 진술로서 그 임의성과 신빙성이 없는 것이며, 또 피해자 윤경화가 범행직전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을 가능성이있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고 달리 이를 확정함에 족한 자료가 없다.
범행현장의 소등상황에 관한 소론은 기교적 논리전개에 지나지 않고 이 건 범행발견후 혈흔이 지워질 가능성이 있음은 긍정된다 하겠으나 이는 결국 초동수사시 증거보전을 잘못한 결과를 시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이 점에 대한 원심긍정의 1심판시는 지극히 논리정연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소론이 지적하는 것처럼 동일상황에서 현장검증도 하지 않고 1,2심에서 판단한 것은 아쉬운 점이 있다고는 하겠으나 이는 검찰에 거증책임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건 원심심리 과정과 제출된 자료를 아울러 살펴보면 소론과 같은 현장검증실시없이도 이 부분 판단을 할수 있는 형사소송진전 상태임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거기에 심리미진의 위법이 있다 할 수 없어 결국 논지는 모두 받아들여질 수 없다.
8. 패물을 강취하였다는 점(공소제기 되지않음)
1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거시증거를 종합하여 피고인은 1981.8.5. 19:00경 이건 현장 내실 캐비넷 등의 수색에 참여하게 되어, 거기서 나오는 유류품들을 받아가지고 다시 용산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그 익일인 1981.8.6. 02:30경 위 경찰서에서 나올 때 위 범행현장 수색시 보관받았던 유류품들의 일부(이건 패물)를 피고인의 핸드빽에 넣은 채 그대로 가지고 나와 동일 03:00경 이건 현장(윤경화집) 앞에 도착하여 그 부근 박순자의 집에서 잠을 잔 후 윤영권, 차점자 등 유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차점자 등과 그 부근 음식점에서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동일 09:00경 그들과 헤어져 그 길로 위 핸드빽(패물)을 가지고 피고인의 집(성북구 정능동)에 가서 이건 패물들을 집에다 두고 동일10:00 내지 10:30경 다시 이건 현장에 되돌아온 사실 등을 인정하여 피고인이 이건 패물을 강취하였다는 자백진술은 객관적 사실에 반하여 믿을 수 없다고 확정하고, 원심은 이부분 역시 1심판시와 같은 여러 사유에 비추어 객관적 합리성이 결여되고 피고인의 자백진술이 일관성이 없음을 이유로 배척하였는바, 이 점에 관한 상고논지는 위 사실은 검사가 기소하지 않은 것임을 유의시키는 가운데 피고인이 1981.8.13 이건 패물이 피고인의 집 베개 속에서 경찰관에 의하여 발견되자 위 패물은 이건 범행 직후 훔쳐온 것이라고 자백하였다가 다시 1981.8.5 최용섭 형사와 윤경화 집 캐비넷을 수색할 때 최용섭 형사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부인하다가, 다시 검찰 송치전에 위 패물강취사실을 시인하고 피고인이 1981.8.21 검사앞에서 자백진술(녹음)할 때에도 역시 시인하고, 1981.8.24 검찰 1차 피의자신문조서 작성시에 시인한 바 있다. 그러나 전기 4단계경찰수사에(경찰기록 232정) 의하면, 위 패물은 1981.8.5. 18:00경부터 18:30경까지 사이에 가지고 나온 것이 틀림없으며, 위 3단계 경찰수사시에는 " 범행직후에 패물을 가져온 것으로 시인한 것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 그까짓것 틀리면 어떠냐는 생각에서였다" 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피고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그후 위와 같은 녹음때와 검찰 1차 피의자신문조서 작성때 시인한 것은 피고인이 위 패물을 이건 범행 직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윤경화의 수표와 돈을 가져온 것이 틀림없으므로 위 패물강취 사실까지 자백진술한 것으로 추측되고, 피고인은 검찰 2차 피의자신문조서 작성때부터 윤경화의 수표 100,000원권 1매는 훔쳐온 것이 아니고 1981.7.22 윤경화와 함께 점심식사 후 윤경화의 자가용차를 타고 피고인 집에 돌아올 때 차 안에서 윤경화가 피고인에게 옷 사입으라고 준 것이라고 변명하나, 당시 그 자동차 뒷좌석에 윤경화와 피고인 사이에 탄 피고인 막내딸 공소외 3이는 경찰수사시 윤경화가 피고인에게 수표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경찰기록 807정)하고 당시 위 차의 운전사 이문갑도 그런 사실을 보지 못했다고 하고, 윤경화는 수표를 줄 때는 반드시 배서를 한 후 주는 것이 습관인데도 동 수표에는 배서가 없는 점을 미루어 보아도 납득할 수 없으며, 또한 위 사실에 대해서 검사가 기소를 하지도 않았고 더구나 법원에 제출한 바도 없는 증 제25호 내지 제35호를 1심 판결문에 증거물로 인용하였음은 명백한 채증법칙 위배의 위법이 있다고 함에 있으나 원심이 인용한 1심판결 거시증거를 기록에 대조하여 살펴보면 원심조처는 정당하게 긍인되고 거기에 위 소론과 같이 채증법칙에 위배하여 사실을 오인한 위법이 있다할 수 없고, 또한 상고논지 중 자기앞수표 100,000원권 1매에 대하여 피고인이 가져온 것이라고만 막연히 기재되어 있는 만큼 그 뜻하는 바가 극히 불분명하지만 이를 이 건 범행 직후 피고인이 피해자 윤경화 집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하는 취지로 보아 이 점에 관하여 일건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건 자기앞 수표 100,000원권 1매(경찰기록 410정 수표사본)는 1981.8.8 진술인 고숙종 작성의 진술서(경찰기록 239정 이하) 중 시청앞 식품가게(중앙식품, 이군식경영)에 1981.7.22. 19:00경 가계수표 10만원권 1매를 주고 외상값을 갚으려고 하니까 잔돈이 없어서 그 식품 가게 옆 뉴코리아빌딩 지하 전원다방(주인 김복례)에서 같은날 20:30경부터 21:00경 사이에 현금과 교환한 사실을(경찰기록 265정) 기재하므로서 경찰의 수표추적수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이어 위 이군식, 문은순의 각 1981.8.9 작성진술서(경찰기록 263정, 264정)의 기재와 같이 수표 10만원권 1매의 현금교환요청 일시가 1981.7.25(토요일) 19:00경임을 확인하게 되어 수표추적수사는 진전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1981.8.9. 14:00 그레이스 호텔에서 작성된 진술인 고숙종에 대한 진술조서 (경찰기록 269정)에서 " 남편( ) 월급에서 생활비로 탄 발행은행 불상의 10만원권 자기앞수표 1매를 전원다방에서 현금으로 교환한 것이다" 라고 진술하고 1981.8.10 작성 진술인 고숙종 작성의 진술서(경찰기록 296정) 역시 위 같은 취지로 진술 기재되고 1981.8.11.17:20 작성 진술인 고숙종에 대한 진술조서(경찰기록 418정)에서는 전원다방에서 수표를 교환하였다는 진술은 사실상 교환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설마 날짜까지를 기억할까 하는 생각에서 진술했다고 하고 1981.8.12 작성 위 전원다방주인 김복례 진술서(경찰기록 407정)에서 고숙종에게 수표 10만원권을 현금교환해 준 일시가 1981.7.25(토요일) 19:00경임을 확인한 후 계속 동 수표 추적수사를 하여 위 경찰기록 410정에 편철된 자기앞수표(사본)를 가려 내기에 이르렀으나 동 수표에 대하여 그것이 피해자 윤경화에게 소급되는 추적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나오다가 1981.8.16 작성 경찰 5차 피의자 신문조서(경찰기록 766정 이하) 중 전원다방에서 교환한 10만원권 자기앞수표 1매는 1981.7.22. 16:00경 피해자 윤경화가 정능동으로 오던 차중에서 피고인에게 주어서 받은 것임을 진술하게 되고 1981.8.21 작성 경찰 6차 피의자신문조서 (경찰기록925정 이하)에서 위 수표 1매는 전원다방에서 1981.7.25 저녁에 교환하여 사용한 사실을 진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검찰송치 1일전인 1981.8.23경 위 원덕희, 경사 김운해, 경장 천정기, 순경 하영웅, 동 이부영, 동 최상옥 공동작성의 종합수사보고서(경찰기록 931정)에서 돌연 위 자기앞수표 10만원권 1매(한국외환은행 발행)를 다른 금품과 같이 강취한 사실을 보고하고 1981.8.24 고숙종을 강도살인죄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그리하여 검찰 수사 1차 피의자신문조서(검찰기록 12정)에서 역시 위 수표 10만원권 1매를 다른 금품과 같이 가져온 사실을 시인하고 검찰수사 2차 피의자신문조서(검찰기록 20정)에서는 동 수표는 1981.7.22 진고개식당에서 점심식사 후 윤경화의 차를 타고 정능집으로 돌아올 때 차 안에서 윤경화가 피고인에게 옷 사입으라고 주는 것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바, 위 증거들을 살펴보면 도저히 소론과 같이 위 수표가 이건 범행당일 피고인이 피해자 윤경화집에서 가져온 것임을 인정할 수 없고 공소외 3, 이문갑의 진술은 믿기에 부족하고 윤경화의 배서가 없는 점만으로 동인이 피고인에게 임의로 교부한 수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한편 피고인의 학력과 직업을 고려할 때 수표거래의 실상을 알고 있는 피고인으로서 이건 범행 당일 강취한 수표를 이건 범행발견 전에 평시부터 외상거래를 할 수 있는 지면자에게 교환행사한다는 것은 범죄심리상 상상하기 어렵다함이 오히려 통상적이라 할 것이고, 또한 소론 중 증 제25호 내지 제35호를 검사가1심 법원에 제출도 하지 않았는데 이를 1심판결에 증거물로 인용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나 1심 판결을 살펴보면 증 제31호(백색 4각 레베카손목시계 1개)를 들었음을 알 수 있고 위 시계도 1981.8.5 피고인을 참여시킨 가운데 이건 범행현장의 내실 캐비넷 등을 수색하다가 거기서 나온 유류품 중 하나로서 수색경찰관 최용섭이 피고인에게 주어 보관케 한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그 사실인정에 위 시계(증제 31호)를 거시한 조처에 어떠한 잘못도 없으므로 결국 논지는 모두 이유없다.
9. 범행시의 착의관계
1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피고인은 이건 당일 분홍색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외출하여 이건 범행장소에 이르기 전에 밤색원피스로 갈아 입었다고 자백진술하고 있고, 이건 범행 이후에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 식품가게에 들려 반찬거리를 사가지고 바로 집으로 갔다고 진술하고 있는 바, 그렇다면 피고인은 이건 범행 후 집에 귀가할 때에 밤색원피스를 입고 있었어야 사리에 합당할 터인데, 피고인이 가족들과는 격리되어 있었음이 기록상 명백한 1981.8.11 작성의 윤미경, 윤보영의 각 진술(경찰기록 327정 이하, 333정 이하, 354정 이하)에 의하면 피고인은 이날 외출할 때 입었던 분홍색 체크무늬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귀가하였다는 것이므로 이 점에 관한 피고인의 자백진술들은 객관적 사실에 반하고, 전후가 모순되는 점이 있어 그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고 하겠고, 1심증인 최영섭, 하영웅의 증언과 이건 현장 사진들의 각 영상 및 1심 법원의 현장검증조서의 기재를 종합하면, 이건 범행 발견 당시 현장의 피아노 방 입구, 목욕탕 앞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은 온통 피로 뒤덮여 있었고, 2층 계단과 벽에는 여기저기 피가 튀여 있었던 사실과 2층 계단에서 가격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자 강경연의 좌측 전완부에는 방어흔으로 보이는 타박상이 있었던 사실(경찰기록 200정)등이 인정되고, 1심 증인 문국진, 서재관, 조달제 등의 증언에 의하면 위와 같은 현장상황이라면 범인의 옷에도 피가 묻었을 것으로 보여지고, 피고인의 자백진술대로 펌프물에 1번 하이타이로 빨았다고 하더라도 혈흔이 부착되어 있다면 혈흔감정에서 그 시험반응이 양성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인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인 최상규, 이종익이 작성한 감정서(경찰기록584정 이하)의 기재와 위 증인 문국진, 조달제의 증언에 의하면 피고인이 이건 당일 외출할 때 입었다는 분홍색 원피스에서는 물론 이건 범행당시 입었다는 밤색원피스에서도 인혈이 전연 부착되어 있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므로 이러한 점도 피고인의 위 자백진술을 선뜻 믿기 어렵게 하는 사유 중의 하나라고 설시하였는바, 원심에서는 이 점에 관한 1심 조처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1심판시와 같은 여러사유에 비추어 객관적 현장상황과 모순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사리에 반한다고 판단하고 이외에 1심이 위에서 본 자백진술을 배척함에 있어 거친증거나 그 사실인정 과정은 정당하고, 그 인정사실에 의하면 피고인의 위에서 본 검찰에서의 자백진술 역시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하여 이 점에 관한 항소논지를 배척하였다.
상고논지는 피고인이 이건 범행시 입은 옷이라고 경찰수사시 진술한 밤색원피스는 피고인이 1981.8.6 용산경찰서에 용의자로 연행될 때 입은 옷이라 하여 1981.8.13 피고인 집에서 압수된 것으로서 과연 그 밤색 원피스가 이건 범행시 입은 옷인지는 의심이 가니 피고인이 이건 범행시 입은 옷이라면 그 옷을 입고 범행현장에 나타나서 수사경찰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일반범죄자의 심리와는 상치되므로 피고인이 이 건 범행을 자백진술하면서도 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많고 설사 피고인의 자백진술과 같이 범행시 입은 옷이 위 밤색 원피스라 하더라도 이건 범행 후 집에 돌아와서 즉시 하이타이로 1번 빤 후 이건 범행발견시까지 15일이나 시일이 경과하였으니 범행시 입은 옷을 그후 빨지 않았다는 것도 수긍이 가지 않으며, 하이타이로 1번 밖에 빨지 않고 이건 범행현장에 입고 나온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함에 있으나 소론주장 자체에서도 긍인하는 것처럼 밤색 원피스가 이 건 범행시 입은 옷인지 의심이 감은 물론 범행시 입었던 옷을 몇번을 빨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입고 범행현장에 나타나고 수사경찰관들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통상 있을 수 없음은 논지와 같으나 그렇다고 이건에서는 범행시 착의관계에 대하여 피고인이 허위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자백진술한다는 것을 인정케하는 자료를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피고인의 자백진술처럼 집에 돌아와서 즉시 하이타이로 1번 빤 후 그 옷을 다시 빨았다는 점을 입증할 자료도 발견할 수 없어 결국 이 점에 관한 논지도 이유없다.
10. 녹음테이프(증 제48조)와 감방동료에게 한 자백진술
1심판결에 의하면 검찰송치전에 검사앞에서 한 피고인의 자백진술을 녹취한 녹음테이프에 대한 1심법원 검증조서 중 피고인의 자백진술기재는 범행현장의 객관적 상황과 모순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어 사리에 반하며, 허구적인 사실이 포함되어 있고, 또 진술의 일관성이 없어 신빙성이 없고, 피고인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같은 수용자 1심 증인 김윤자, 이영배에게 이건 범행을 자백한 진술은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스러워 이건 범행을 인정할 자료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여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어 유죄의 증거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심에서는 위 점에 대한 1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수긍하고 피고인의 위 자백진술 녹취녹음테이프는 임의성이 없고, 위 감방 동료에게 한 자백진술이 경찰에서의 위축된 심리상태가 계속된 상태하의 진술이라고 하여 역시 임의성이 없다고 판시하였다.
상고논지는 위 녹음테이프에 녹취된 자백진술 내용은 검사앞에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피고인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자백한 것이 틀림없고 1심 증인 김윤자, 이영배는 " 피고인이 구치소에 입감하는 날 세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고 세 사람을 죽인 혐의로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고 변호인이 여러번 다구쳐 물었으나, 피고인은 들어올때 울면서 망치로 두 사람은 1층에서 죽였고, 애기는 2층에서 죽였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 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바, 위 피고인의 자백진술은 경험칙과 사리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를 배척할려면 반드시 타당한 원칙과 조리에 맞는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런 이유도 밝힘이 없이 막연히 배척하였음은 자유심증주의원칙의 악용이란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 함에 있으나 피고인이 전기 1에서 설시한 바와 같은 상황의 장기구속하에서 허위자백을 계속하던중 검찰송치전인 1981.8.21 그레이스호텔에서 이루어진 검사앞에서 한 자백진술 녹취 녹음테이프 2개가 작성되기에 앞서 수사경찰관 하영웅등이 검사앞에서 자백진술하도록 강요하고 한편 도청장치까지 인지케 하는등 위축된 심리상태에서의 자백진술은 임의성이 없고, 이 건 검찰송치일인 1981.8.24 위 하영웅 등 3명의 수사경찰관이 피고인과 함께 같은 차에 동승하여 오는 등 상황하에서 피고인으로서는 위축된 심리상태가 계속된 가운데 그날 서울구치소의 같은 감방동료 김윤자, 이영배에게 이건 범행을 자백진술한것은 임의성이 없다고 못 볼바 아니므로 이 점 등에 대한 원심조처는 정당하므로 논지는 이유없다.
11. 정황증거
1심 판결에 의하면,
(1) 피고인이 남편 공소외 2에게 윤경화의 소식이 없다고 걱정을 하면서도 칠석날인 1981.8.6까지 기다려 보자는 등의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지연시킨 점
(2) 피고인이 1981.8.2. 13:00경 김복례와 함께 윤경화의 집까지 가서 윤경화가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도 " 어머니는 분명히 집에 계시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고 없는 체 하는 것" 이라고 말하고 또 김복례가 경찰서에 신고하자고 했으나 경찰서가 옮겼기 때문에 그냥 가자고 한 점
(3) 피고인이 1981.8.4.20:30경 윤경화집 이웃 김경자의 집에 찾아가서 뒷창문으로 집안을 들여다보면서 냄새를 맡은 후 다시 김정자에게 냄새를 맡아보라고 하여 동인이 썩는 냄새가 난다고 하자 윤경화의 시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다'면서 울고불고하며 슬픔을 과장하여 나타낸 점.
(4) 피고인은 범행 다음날인 1981.7.23.18:00 경 평시 윤경화의 호감을 사기 위해 피고인의 집 마루벽에 10년간 걸어두었던 동인의 사진을 떼어낸 점 (5) 피고인의 1981.7.22의 행적이 20:00까지는 피고인의 주장과 일치하나 범행추정시간인 동일 21:00경부터 23:30경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알리바이를 주장하였으나, 그것이 전부 허위임이 들어나고 정확하게 그 행적을 대지 못한 점 등의 정황사실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만으로는 피고인이 이 건 범행을 범하였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원심은 1심의 판단조처가 정당하다고 긍정하였다.
이 건 정황증거에 관한 상고논지는 주로 위 (5)에 대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 바, 이는 상기 1.을 중심으로 논급을 하였으므로 중복된 설시를 피하기로 하거니와 소론 피고인이 아들 공소외 1의 티샤쓰를 구입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 공소외 1의 법정에서의 피고인의 변소에 부합되는 취지의 증언은 동 증인이 아들로서 객관적 진설성이 없으며, 백양메리야스 상회 주인 유경연, 점원 이현숙의 1심 법정에서의 증언은 피고인측 가족 등이 찾아와 티샤쓰를 1981.7.22에 7,500원에 판 것은 확실하나 판 시간을 모르겠다고 증언해 달라고 한 사실이 입증된 만큼 피고인의 위 주장은 근거가 없고, 견지식품 주인 염옥순의 1심 법정에서의 증언은 허위이거나 일자의 착각이라고 주장하나 위 주장들을 받침할 자료가 충분치 못하며 가사 소론과 같은 시간대에 관한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실인정의 대세에 별다른 영향을 끼칠 것이 못되고, 또한 이건 범행장소의 구조의 복잡, 범행에 사용된 도구가 그 집에 있었던 것, 범인이 남긴 족적이 그 집에서 사용하던 슬리퍼와 동형의 슬리퍼 족적인 점, 이건 피해자 3인의 살해방법이 동일한 점 등을 아울러 살펴보면 면식범의 소행이 확실한 데 다른 면식자는 혐의없음이 밝혀지고, 피고인이 1981.8.5 둘째 동서 차점자에 대하여 한 언동, 남편 공소외 2가 처 고숙종을 윤경화 살해범으로 의심을 가진 점, 피고인이 진범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실을 진술한 점 등 을 고려하면 피고인의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는 주장 역시 이건 일건 기록에 나타난 다른 증거들에 비추어 받아들여지기에는 부족하고, 상고논지 (1) 내지 (4)는 피고인에 대하여 불리한 정황증거임은 인정하나 총체적으로 피고인의 자백진술만을 위주로 거증한 이 건에 있어서 검찰에서의 피고인의 자백진술을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입장에서 달리 피고인의 자백진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나 단서조차 없으므로 위 (1)내지 (4) 등 정황증거가 있다 하여 1심과 원심이 배척한 피고인의 자백진술의 신빙성을 확고하게 담보한다고 보기 어렵다 할 것이므로 이 점에 관한 상고논지도 이유없음에 귀착되어 원심이 인용한 1심의 위 정황증거 등은 설사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건 범행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조처는 결과적으로는 정당하다.
12. 직권촌고
이건 경찰초동수사가 형사소송법규에 따른 충실한 것이 되지 못하였음은 전기한 바이지만 특히 압수수색에 허점이 발견되고 전기한 것처럼 순경 하영웅이 압수한 면장갑과 " 오인천" 영화관계 문서 등이 없어져 법정에 제출되지 못한 점, 순경 최용섭이 1981.8.5 피해자 윤경화 집에 캐비넷 등에서 나온 패물(증 제25호 내지 증 제35호)을 수색에 참여한 피고인에게 보관시킨 결과 이건 수사에 혼란을 일어나게 한 점 및 범행현장에서 압수된 피해자 강경연의 팔목시계가 7.23. 12:54에서 머물고 있던 것을 순경 하영웅(수사 중 피해자 윤경화의 예금통장을 몰래 빼내어 그 예금을 찾으려 든 행위로 구소 공소제기되어 유죄확정)이 임의로 24일 4시 57분으로 돌려논 점 등 결정적인 하자가 발견되었음은 큰 유감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이상을 요컨대, 결국 원심이 피고인의 자백진술과 다른 관계증거들의 신빙성(위 10 설시증거는 임의성)을 판단함에 있어서 채증법칙을 위배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을 저지른 것이라는 논지는 모두 이유없으므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기로 관여 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