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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2014. 4. 29. 선고 2013가합10285 판결
[손해배상(기)][미간행]
원고

원고 1 외 18인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유한) 화우 외 4인)

피고

대한민국 (소송대리인 정부법무공단 담당변호사 이산해 외 2인)

변론종결

2014. 3. 20.

주문

1. 피고는 원고 1, 원고 2, 원고 3, 원고 4, 원고 5, 원고 6, 원고 7, 원고 8, 원고 9에게 각 30,000,000원, 원고 10, 원고 11, 원고 12, 원고 13, 원고 14, 원고 15, 원고 16, 원고 17, 원고 18, 원고 19에게 각 40,000,000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2014. 3. 20.부터 2014. 4. 29.까지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 원고들의 각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3. 소송비용 중 60%는 원고들이, 나머지 40%는 피고가 각 부담한다.

4.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억 원 및 이에 대하여 1978. 1. 1.부터 이 판결 선고일까지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이유

1. 기초사실

가. 원고들은 모두 한센병을 앓은 적이 있는 사람들로서, 피고가 한센병 환자의 치료 및 격리수용을 위하여 운영·통제해 온 국립 소록도병원, 익산병원(소생원), 부산용호병원(상애원), 안동성좌원, 칠곡병원(애생원) 등(이하 ‘국립소록도병원 등’이라고 주1) 한다) 에 입원해 있던 사람들이다.

나. 2007. 10. 17 법률 제8644호로 제정된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그 전문은 별지 기재와 같다, 이하 ’한센인피해사건법‘이라고 한다)」에 따라 설치된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라고 한다)는 다음과 같이 원고들이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격리 수용되어 있는 기간 동안 피고로부터 강제로 단종, 낙태수술을 받았다는 등의 이유로 원고들을 같은 법에서 정한 한센인피해사건의 피해자로 인정하였다.

본문내 포함된 표
원고(생년월일) 사 유 피해사건명(주2) 결정, 통지일
1. 원고 1(생년월일 1 생략) 1950.봄에 한센병이 발병하여 1960.3. 국립소록도병원에 입원하여 중앙리에서 지내던 중,1976.11.경 결혼을 하기 위해 병원 외과에서 강제로 단종 수술을 받음 2조3호라목 2012.6.27.
2. 원고 2(생년월일 2 생략) 안동에서 가정을 꾸리고 생활하던 중 1977.경 소록도 구북리로 오게 되었을 때 직원에 의해 단종수술을 당하였음 2조3호라목 2012.6.27.
3. 원고 3(생년월일 3 생략) 1964. 한센병이 발병하여 1972.경 소록도병원에 입원하기 위하여 병원 외과에서 단종수술을 받았고, 단종수술 후 2달 정도 지나서 감금실에 4달간 이유도 없이 감금되어 직원에게 곡괭이 자루로 허리와 엉덩이를 폭행당함 2조3호라목 2012.6.27.
4. 원고 4(생년월일 4 생략) 1954.한센병이 발병하여 소록도 병원에 입원하였고, 1962.오마도 간척사업에 동원되어서 흙을 수레에 나르는 일을 하였고, 1969년에 결혼을 하려고 하자 병원 규칙에 의해 강제로 단종수술을 당함 2조3호다목, 라목 2012.1.12.
5.원고 5(생년월일 5 생략) 한센병 발병 후 국립익산병원에 입소하게 되어 가정을 이루고 딸을 낳았는데 직원에게 발각되어 1960. 단종수술을 당하였음 2조3호가목 2012.1.12.
6. 원고 6(생년월일 6 생략) 20세(1955.경) 국립소록도병원에 입소하여 생활하던 중 가정을 꾸려 아이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잠시 나가 살다가 1974.경 소록도로 다시 들어왔는데 젊어서 아이들을 더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병원 직원에 의하여 단종수술을 당함 2조3호라목 2012.6.27.
7. 원고 7(생년월일 7 생략) 1963. 발병하여 1973.국립소록도병원에 입원하여 지내던 중 1976.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의사에게 수술실에서 강제로 단종수술을 당함 2조3호라목 2012.9.26.
※원고 12의 남편
8. 원고 8(생년월일 8 생략) 1942. 발병하여 1946. 부산 상애원(국립 용호병원의 전신)에 입원하여 지내던 중 1955. 가정사를 신청하였다는 이유로 여수에서 파견된 의사에게 수술실에서 정관을 묶는 단종수술을 당함 2조3호가목 2012.9.26.
9. 원고 9(생년월일 9 생략) 1962. 32세경 칠곡 국립애생원 입원 후 아내가 임신 3개월일 때 애생원에서 아이를 낳고 같이 살 수 없으므로 여기서 살려면 유산을 시키고 단종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하여 아내는 애생원 의무실에서 유산을 시키고 본인은 약 4개월 후 보건사회부 과장 소외 24 의사에게 단종수술을 당함 2조3호가목 2010.6.24.
※원고 13의 남편
10. 원고 10(생년월일 10 생략) 1972. 애락원을 통하여 소록도로 강송되어 신생리에 살았는데, 1976. 20세경(실제 58년생이나 호적 늦게 올렸다고 함) 임신을 하니 신생리 의료 주임이 소록도에 살려면 강제로 낙태를 강요하여 주사를 맞고 낙태를 당한 후, 그해 연말 다시 임신되어 또 낙태를 할 수 없어 △△농원으로 정착하여 퇴원함 2조3호라목 2011.8.30.
11. 원고 11(생년월일 11 생략) 1962.부산에서 단속반에 잡혀 소록도에 강송되어 감금실에서 20일간 감금폭행을 당하고 1967. 21세경 임신을 하니 낙태를 강요하여 주사를 맞고 낙태 당함. 그 후 1968. 다시 임신이 되어 또 낙태를 강요하자 약 15일 정도 외출을 허가하여 사회에 나와서 낙태수술을 한 후 귀원함 2조3호목 2011.8.30.
12. 원고 12(생년월일 12 생략) 1966. 발병하여 1975.국립소록도병원에 입원해 지내던 중 1976. 아이를 임신하였다는 이유로 의사에게 병원 본관 수술실에서 마취되어 강제로 낙태수술을 당함 ※원고 7의 처 2조3호라목 2012.9.26.
13. 원고 13(생년월일 13 생략) 24세에 발병하여 고성 숭의원에서 결혼 3년 후 1962. 27세경 국립애생원 입원하여 1963. 가을쯤 첫 임신 3개월째일 때 애생원에서 아이를 낳고 같이 살 수 없으므로 애생원에서 살려면 유산시키고 단종수술해야 한다고 하여 애생원 의무실에서 강제로 낙태시술을 하고 약 4개월 후 남편이 단종수술을 당함 ※원고 9의 처 2조3호가목 2010.6.24.
14. 원고 14(생년월일 14 생략) 한센병이 발병하여 집을 나와 거리에서 생활하던 중 1950. 단속반에 의해 국립소록도병원에 끌려가 환자가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15일 동안 감금실에 갇혀 폭행을 당하였고, 1957. 임신을 하게 되자 강제로 낙태수술을 당하였음 2조3호가목 2012.3.30.
15. 원고 15(생년월일 15 생략)) 1954.경 발병, 1965.경에 소록도병원에 입원해서 1971. 소외 1과 결혼하고 임신이 되어 밖으로 나가서는 살 수 없어서 병원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치료본관 의료실에서 소외 2에게 마취를 하고 낙태수술을 당하였음 2조3호라목 2012.6.27.
16. 원고 16(생년월일 16 생략) 1940. 한센병 발병하여 1948.3. 익산소생원에 와서 지내던 중 1950.(실제나이 19세)에 임신을 하고 순창으로 피난을 갔다가 3달 만에 다시 소생원에 와서 소외 13에게 낙태수술을 받았고, 밥을 훔쳐 먹다가 공안대에 잡혀가 3일간 구금당하고 공안대원들에게 발로 차이고 연탄집게로 폭행 당함 2조3호가목 2012.6.27.
17. 원고 17(생년월일 17 생략) 1967. 20세에 안동 성좌원에 격리 수용되어 생활하던 중 결혼을 하였고 임신을 하자 임신 8개월 경 성좌원 원장의 지시에 의해 강제로 낙태수술을 당함 2조3호라목 2012.6.27.
18. 원고 18(생년월일 18 생략) 1960. 고창에서 발병하여 익산병원(소생원)에서 생활하던 중 1960.경 장사를 하기 위해 무단 외출을 했다가 공안부 직원에 의해 일주일간 감금당하고 몽둥이로 등,허리 등을 폭행당했으며, 1962.경 이름 모를 남자의사에 의해 수술실에서 낙태수술을 당함 2조3호가목 2012.6.27.
19. 원고 19(생년월일 19 생략) 1956.경 발병하여 결절이 심해져서 곽골이란 환자촌에서 골방생활을 하다가 1962.(19세)경 부산 용호병원에 입원함. 취로사업에 동원되어 돌 나르는 일을 하며 지내다 1964.~1967.사이 몰래 아이를 출산했다는 이유로 미스 김이라 불리던 간호사 등에 의해 지하실에 일주일 가량 갇혀서 주먹으로 머리 등을 구타 당하였고, 최소 2회 낙태수술을 당함 2조3호 라목 2012.6.27.

주2) 피해사건명

다. 한센병에 대하여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의학지식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⑴ 나균(Mycobacterium leprae)에 의해 감염되는 제3군 법정 감염병(전염병)으로, ‘나병(leprosy)(나병)’이라고도 한다. 주로 피부에 나타나는 침윤(침윤)·구진(구진)·홍반(홍반)·멍울〔결절〕 등과 지각마비(지각마비)를 가져오거나 말초신경을 주로 침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타 부위의 조직에 침범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는 가라(가라)·풍병(풍병)·대풍라(대풍라)라 하였고,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천형병)이라 하였다.

⑵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A.G.H.한센이 나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1874년 'Bacillus leprae'라 명명함으로써 유전병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한센이 1873년에 이 병의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나병’ 이라는 명칭 또한 차별과 편견이 서려 있다고 하여 최근에는 통상 ‘한센병’으로 불리운다.

⑶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은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균에 오랫동안 접촉한 경우에 발병한다. 그러나 전세계 인구의 95%는 한센병에 자연 저항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균이 피부 또는 호흡기를 통하여 체내로 들어오더라도 쉽게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특히 1941년 특효약 답손[dapsone, 4,4' - diamino - diphenyl sulfone(DDS)]이 발명된 이후 완치가 가능한 질병으로 분류되었고, 1948년 쿠바의 하바나에서 개최된 제5차 국제나학회에서 썰폰(sulfone)제인 답손(dapsone, DDS)을 한센병 치료제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센병 치료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1956. 4. 16. 로마회의에서 ‘나환자에 대한 차별적 법률폐지, 나병에 대한 계몽교육 강화, 나환자 조기발견 조기치료, 격리수용주의 시정, 나환자 자녀보호, 나병치유자 사회복귀 지원’ 등을 촉구한 “나환자의 강제격리 수용을 반대하고 사회 복귀를 결의하는 결의서(이른바 로마선언)”가 채택되었다(이 회의에는 우리나라도 참석하였다). 1970~80년대부터는 2~3종의 약을 복합적으로 단기간 내에 강력하게 투여하는 MDT(multidrug therapy, 답손, 크로파지민, 리팜피신 등의 약을 병용하여 치료하는 복합화합요법)를 사용하여 대부분이 완치되고 있고, 최근에는 나균을 배출하는 환자의 경우도 리팜피신(rifampicin) 600mg을 1회만 복용하여도 체내에 있는 나균의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전체 한센병 환자 중 극히 일부 환자만이 전염원이 되며, 약제 투여가 시작된 후에는 전염원이 될 수 없다. 초기발견 시에는 쉽게 치료가 돼 오늘날에는 일반 피부질환자와 같이 자유로이 생업에 종사하며 진료를 받고 있다. 한센병은 비록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⑷ 한센병은 피부과 영역의 질병이면서도 특별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나균은 만성적으로 세대증식을 하며, 9개월에서 20년에 이르는 긴 잠복기와 장기간의 경과를 가진다. 시험관 내 인공배양이 어려워 나병 퇴치의 의학적 발전이 더디게 진행되어 왔다. 나균은 신경을 특이하게 침범함으로써 신경손상에 따른 불구를 유발한다.

- 사람에게 특이하게 감염되는 질환으로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만 균을 옮길 수 있는데 피부나 호흡기를 통하여 감염된다. 한센균은 전염경로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여 역학적 관리로서 임상적인 환자 추적에만 국한된다. 병의 경과나 증세, 치료 등은 인간의 면역과 나균의 상관관계에 따라 좌우되는데, 자연치유되는 경우에서부터 몸의 일부에 국한되는 경우, 전신에 퍼지는 경우 등 다양하다. 나병은 질병 자체 외에 사회학적·정신과적 질환으로서 사회공동생활의 융화문제를 안고 있다.

⑸ 한센병은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후유증 없이 완치시킬 수 있다. 하지만 조기치료의 시기를 놓치면 병의 치료기간도 길어지고, 병의 진행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불구가 될 수도 있다. 의학적인 치료방법으로는, 항라제의 사용, 나반응 치료, 눈이나 손발의 불구 예방치료, 이미 불구가 된 부위의 교정수술이 있다.

- 항라제로는 프로민, 시바, 디아존 등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답손(DDS), 리팜피신(rifampicin), 람프렌(lamprene), 프로에치오나마이드(proethionamaide) 등을 사용하는데, 종래와 같이 단독요법에 의한 장기치료의 형태가 아니고, 2~3종의 약을 복합적으로 단기간 내에 강력하게 투여하는 MDT 방식의 치료 형태이다.

- 나반응치료는 직접적인 항라제 사용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나반응치료의 성패는 나병치료의 성패를 가늠하고, 불구의 정도를 결정할 수 있으며, 약제로는 진통제, 스테로이드 호르몬(steroid hormone)제제, 탈리도마이드(thalidomid) 등 다양하다.

- 불구예방치료에 있어 나균에 의해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1차성 불구는 나병치료의 효율적인 적용에 따라 좌우되며, 2차성 불구는 환자나 의사의 세심한 관찰과 물리요법으로서 예방이 가능하다.

- 기왕에 불구가 된 얼굴과 손발은 성형술 또는 정형재생술로 교정하며, 사회복귀를 위한 외모의 미화, 또는 노동력을 향상시킬 수가 있다.

⑹ 국내에서는 1947년경 DDS 요법의 프로민(주사제) 등이 도입되기 시작하여 1955년 경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보급되었다(썰폰제를 사용한 시기에 대하여 다소 논란이 있지만 1953년경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량 경구투여가 가능한 DDS요법인 답손(dapsone)의 사용으로 이동진료와 외래진료를 통한 재가치료가 가능해졌고 세균지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답손 단독요법으로 한센병이 완치된 경우가 많아 이 때부터 완치가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답손은 다소의 부작용과 2.5~6.8%의 내성이 알려졌고 드물게 재발하는 경우가 있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MDT 요법을 사용한 결과 나균의 99.999%가 살해되고, 재발율 또한 현저히 낮아져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센병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완치되는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 100% MDT를 시행하고 있으며, 1999년 기준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정의하는 한센병환자에 맞는 신환자가 1년 동안 21명 발생하고, 치료중인 전체 한센병환자는 704명으로, 신환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WHO의 단기치료 방침을 적용하면 치료가 완료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하므로, 기존의 MDT를 종료한 등록자들의 경우 역시 모두 환자가 아니라고 판정할 수 있다고 보고되었다. WHO 권고 규정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유병률이 15명 이하이면 한센병 퇴치국가로 분류되는데,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leprosy elimination)국가로 분류가 되었다.

(7) 국내 한센인 등록자 수는 1969년 38,229명으로 최대를 기록하였으나, 그 후 점차 감소하여 2004년에는 16,290명이 되었고, 2012년 현재 전체 한센인은 주3) 12,323명 이다. 그중 치료받는 한센병환자는 255명(2.1%)이고, 나머지는 모두 기존 병력자이다. 연령별로는 70대 이상이 7,521명(61%), 60대가 3,094명(25%), 50대가 1,383명(11.2%), 40대가 277명(2.3%), 30대가 41명(0.3%), 20대 이하가 7명(0.1%)이다. 2010년 현재 신규발생 환자는 6명으로, 이는 인구 10만 명당 0.01명에 주4) 해당한다.

【인정근거 : 다툼 없는 사실, 공지의 사실, 갑 제1 내지 3, 12 내지 30호증, 을 제1, 2, 4 내지 6호증의 각 기재(각 가지번호 포함), 증인 소외 3의 증언, 변론 전체의 취지】

2. 손해배상 책임의 발생

가. 당사자들의 주장

원고들은, 한센인피해사건법에 따라 설치된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조사·결정한 바와 같이 피고는 자신이 운영하는 국립소록도병원 등에 원고들을 격리수용하면서 그 병원 의사 등이 원고들에 대하여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강제로 단종 및 낙태수술을 시행하였으므로, 위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단지 한센인들에 대한 생활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여 주로 본인의 진술이나 전문증거에 의존하여 내려진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만 가지고 원고들이 강제로 단종, 낙태수술을 받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설령 당시 피고 소속 의료진들이 원고들에게 정관절제수술이나 낙태수술을 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모두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서 당시의 의료수준 아래에서 한센병의 전염을 예방하고, 병원의 수용한계 등을 고려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므로 위법성이 없다고 다툰다.

나. 판 단

1) 관련 법리

‘한센인피해사건법’은 한센인 피해사건에 관한 진상을 파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함으로써 이들의 인권신장 및 생활안정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제정되었고( 제1조 ), 그에 따라 설치된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러한 목적 아래에서 같은 법 제2조 제3호 에 해당하는 사건에 관하여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한센인 대표를 포함한 20인 이내의 위원들로 구성되어 국무총리 소속으로 둔 기관( 법 제3조 )으로서 같은 법에서 정한 피해사건 진상조사 및 피해자의 심사·결정은 그 목적 및 절차에 있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진상규명위원회의 피해자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인정 근거의 연관성이나 신빙성 등에 대해 심사를 할 것도 없이 그 대상자는 모두 불법행위에 의한 피해자라는 사실이 다툼의 여지 없이 확정된 것이고 그로 인한 국가의 불법행위책임이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보고서나 사실조사 결과서 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에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력한 증거자료는 될 수 있고, 대상사건 및 시대상황의 전체적인 흐름과 사건의 개괄적 내용을 정리한 부분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할 것이지만,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보고서나 조사관이 조사 내용을 요약한 사실조사 결과서의 내용만으로 사실의 존부를 판단할 것은 아니고, 기타 위원회에 제출된 참고인 등의 진술 내용이나 서류 등 원시자료를 개별적으로 검토하고, 그 밖에 소송과정에서 제출된 추가 증거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사실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 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2) 원고들이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정관절제수술 및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는지 여부

가) 우선, 원고들이 피고가 운영·통제하는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앞의 1. 기초사실 나.항의 각 사유란 기재와 같이 단종 및 낙태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의 진상규명 실무위원회 위원장이 원고들에게 보낸 결정 통지서, 실무위원회 위원장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출한 심사의견서, 실무위원회 조사관이 작성한 사실결과조사서(갑 제12 내지 30호증의 각 1 내지 4)의 각 기재는 모두 진상규명위원회의 공식적인 문서로서 위원회에 제출된 기초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심의·의결을 거친 것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사건 민사소송에서도 유력한 증거자료가 된다.

나) 그리고 진상규명 실무위원회 조사관이 원고들 및 보증인들에 대하여 문답한 내용을 기재한 각 면담조사서와 원고들이 진상규명 실무위원회에 작성·제출한 피해자신고서, 본인진술서, 보증인이 작성·제출한 피해사실 확인보증서, 원고들의 소송대리인이 원고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기재한 진술서(갑 제12 내지 30호증의 각 가지번호 중 일부)의 각 기재는 비록 원고들 스스로의 진술 및 원고들과 부부관계 또는 이웃이나 친지인 사람들이 주로 원고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진술하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원고들의 진술은 모두 자신들의 인생에서 한 두 차례 있었던 결코 잊기 어려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각자의 진술들이 매우 구체적이고 그 경위에 관한 설명에 설득력이 있으며,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은 모두 몸에 흔적이 남는 것으로서 그 수술을 받았다는 점 자체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 어렵다. 보증인의 진술들 역시 오래 전에 원고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것으로 보일 뿐 진상조사나 소송 등을 염두에 두고 원고들과 말을 맞추어 진술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것도 상당히 있어 대체로 믿을 수 있어 보인다. 비록 원고들이나 보증인들의 각각의 진술 내용 중 다소의 시차나 세부적인 내용에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지만, 모두 고령이고 교육수준이 높지 않은 사람들로서 수십 년 전인 1950년경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사이에 벌어진 사실을 기억해 진술하는 것인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적어도 원고들이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정관절제 수술을 받았다는 점이나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어서는 모순되거나 거짓 진술을 한다고 볼 만한 정황을 찾기 어렵다.

다) 그리고 국립소록도병원장의 입원확인서(원고 1, 원고 2, 원고 3, 원고 4, 원고 5, 원고 6), 가족관계등록부 기본증명서, 한센등록자 관리카드 등(갑 제12 내지 30호증의 각 가지번호 중 일부)은 원고들의 소록도병원 등 거주기간, 발병연월, 치료경력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서 모두 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과 원고들 및 보증인의 진술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것들인데, 그 입소시기 등이 그 진술들과 부합하고,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 약간의 착오 가능성은 있어도 원고들이 그 주장하는 시기에 소록도 병원 등에서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는 사실과 모순된다고 볼 만한 부분을 찾기 어렵다. 또한 원고 1, 원고 2, 원고 4, 원고 6, 원고 7에 관하여는 소록도병원 등에서 작성한 정관수술과 관련한 수술일지, 병상기록카드, 환자기록, 경과기록, 정관수술명단(갑 제31 내지 35호증) 등이 있는데, 이로써 위 원고들이 정관절제수술을 받은 사실 및 그 일시 등은 명백히 특정된다고 볼 수 주5) 있다.

라) 한편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갑 제1호증의 1,2),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소록도80년사’(갑 제2호증의 1 내지 3, 을 제1호증), ‘소록도 연보’(갑 제4호증의 1 내지 30), ‘예규집’(갑 제5호증의 1 내지 3)과 대한나관리협회에서 발간한 ‘한국나병사’(갑 제3호증의 1 내지 3, 을 제2호증)의 각 기재와 증인 소외 3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일제강점기 이래 피고가 한센인의 치료 및 격리수용을 위해 운영한 소록도병원 등에서 1990년대까지도 공식적인 규칙이나 예규, 정책 등에 의하여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 정관수술을 받을 것을 원칙으로 한 사실, 1993년경 국립소록도병원 운영규정에도 한센인들의 임신, 출산금지 조항이 명기되어 있는 등 병원 내에서 출산을 금지한 사실, 의사 또는 간호사, 한센인 중 일정 정도 의료교육을 받은 의료보조원 등에 의하여 1992년까지 공식적으로 정관절제수술이 이루어진 기록이 있고, 1980년대 후반까지 낙태수술이 공공연히 이루어진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다(이 항 인정사실에 관하여는 뒤에서 더 자세히 보기로 한다).

마) 위에서 든 각 증거들과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고, 라)항의 인정사실을 보태어 보면, 원고들이 아래와 같은 경위로 1950.경부터 1978.경 사이에 피고가 운영하는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그 소속의사나 간호사 또는 의료보조원 등으로부터 정관절제수술 또는 임신중절수술(또는 낙태시술)을 받은 사실 자체는 대체로 명백해 보인다.

(1) 원고 1은 1976. 6. 2. 소록도병원에서 처 소외 4와 결혼하기 위해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2) 원고 2는 1977. 7. 20. 소록도병원에서 처 소외 5와 결혼하기 위해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3) 원고 3은 1972.경 제주도에서 구걸을 하다가 처와 함께 소록도병원으로 주6) 강송 되어 온 직후 병원 외과에서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4) 원고 4는 1969.경 소록도병원에서 처 소외 8과 결혼하기 위하여 정관절제수술을 주7) 받았다.

(5) 원고 5는 1960.경 익산소생원에서 처 소외 6과 살다가 딸을 낳은 후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6) 원고 6은 소록도에서 지내던 중 처 소외 7이 임신하여 순천 ○○농장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1977. 7. 주8) 20. 소록도병원에서 아이를 다시 낳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7) 원고 7은 처인 원고 12가 임신하여 임신중절수술을 받았고, 자신도 그 무렵인 1978. 4. 주9) 28. 소록도병원에서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8) 원고 8은 1955.경 부산 상애원에서 소외 9와 함께 살 가정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9) 원고 9는 1963. 주10) 경 칠곡 애생원에서 처인 원고 13이 임신하여 낙태수술을 하고 4개월 후 자신도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

(10) 원고 10은 1976.경 소록도병원에서 남편 소외 10과 사이에 임신이 되어 소외 29 원장의 권유에 따라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11) 원고 11은 1967. 소록도병원에서 몰래 남편과 만나다가 임신하여 부락 의료주임 소외 25로부터 주사로 임신중절수술을 주11) 받았다.

(12) 원고 12는 1978. 주12) 경 소록도병원에서 남편인 원고 7과 사이에 아이가 생겨 병원 본관 수술실에서 의사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13) 원고 13은 1963.경 칠곡애생원에서 남편인 원고 9와 사이에 아이가 생겨 임신 4개월 무렵에 의무실에서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14) 원고 14는 1959. 주13) 경 소록도병원에서 남편 소외 11과 사이에 아이가 생겨 의무실에서 의사 소외 12 등으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주14) 받았다.

(15) 원고 15는 1971.경 소록도병원에서 소외 1과 결혼하고 임신이 되어 임신 5개월 무렵 치료본관 의무실에서 의료보조원 소외 2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16) 원고 16은 1950.경 익산소생원에서 남편 소외 26과 사이에 아이가 생겨 임신 6개월 무렵 의료보조원 소외 13으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17) 원고 17은 1967.경 안동성좌원에서 남편 소외 15와 사이에 아이가 생겨 임신 8개월 무렵에 소외 14 원장의 지시에 의해 의료보조원 소외 16으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18) 원고 18은 1962.경 익산 소생원에서 남편 소외 17을 만나 아이가 생겨 소외 18 원장 입회하에 의료보조원 소외 19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19) 원고 19는 1964.경부터 1967.경 사이에 부산 용호병원에서 남편 소외 20과 사이에 아이가 생겨 소외 21 원장으로부터 주사로 임신중절수술을 받았고, 이후 또 다시 임신이 되어 소외 21 원장으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주15) 받았다.

3) 피고 소속 의사 등이 원고들에게 정관절제수술 및 임신중절수술을 한 것이 위법한지 여부

가) 헌법과 법률상의 근거

(1)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 제10조 주16) ). 그리고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며( 헌법 제12조 제1항 주17) ), 신체의 자유는 정신적 자유와 더불어 헌법이념의 핵심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서 모든 기본권 보장의 전제조건이다( 헌법재판소 1992. 4. 14. 선고 90헌마82 결정 ). 신체의 자유의 일부로 이해되는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는 그 성질상 생명권과 더불어 인간생존의 기본적 권리이며, 이는 신체의 자유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하고,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가 있으며,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다( 헌법 제36조 주18) ).

(2) 다만 헌법 제37조 제2항 에 의하면,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주19) 있다. 하지만 이를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주20) 없다.

원고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위와 같은 헌법상의 권리를 단지 한센병을 앓았거나 앓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국가가 법률상의 정당한 근거 없이 침해할 수 없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사건 행위들이 있었던 1950. 내지 1978. 기간 동안 시행된 법률 가운데 전염병 예방이라는 측면에서 한센인들의 헌법상의 기본권을 일정 정도 제한할 수 있는 법률로 구 전염병예방법구 모자보건법 정도가 있었으므로, 과연 이 법률들에 근거하여 한센인들을 상대로 정관절제수술을 하거나 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살피기로 한다.

㉮ 1954. 2. 2. 제정된 구 전염병예방법(법률 제308호, 1957. 2. 28. 시행)에서는 ‘나병’에 관하여 이를 비교적 전염력이 낮은 제3종 전염병으로 분류(( 헌법 제2조 제1항 주21) ), 하면서도, 제3종 전염병 중에서 ‘나병’에 관하여만 환자발견·시체검안·전귀(퇴원, 치료, 사망, 주소변경 포함)시 신고의무( 제4조 제1항 , 제6조 ), 격리수용되어 치료받을 의무 및 탈출의 금지( 제29조 제1항 주22) , 제56조 ), 공중과 접촉이 많은 직업과 공중 집합장소 등에 출입 및 취학금지( 제30 내지32조 ), 시체 이동 금지 및 화장의무( 제34 , 35조 ), 강제처분(조사, 진찰, 동행하여 치료 또는 격리, 제42조 )의 대상이 되게 함으로써 한센병 환자의 기본권을 상당 부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다.

하지만 위 규정 중에서 어느 것도 한센병 환자에게 그 의사에 반하여 정관절제수술을 하거나 임신중절수술을 할 만한 법적 근거가 될 만한 것은 없다. 다만 위 법 제26조 에서 “제3종 전염병 요양소장은 주무부장관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입원환자의 질서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가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고, 이는 소록도병원 등에서 내부 규정을 정하고 기타 재량을 통하여 입원자 등에게 이른바 ‘징계검속권’을 가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원환자의 의사에 반하여 정관절제수술을 하거나 임신중절수술을 하는 것은 위 ‘질서유지에 필요한 조치’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본권 제한의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 피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 등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허용되기 어렵다.

더구나 구 전염병예방법은 1963. 2. 9. 개정(법률 제1274호, 1963. 3. 12. 시행)되면서, 위 규정 중 환자발견·시체검안·전귀(퇴원, 치료, 사망, 주소변경 포함)시 신고의무( 제4조 제1항 , 제6조 ), 전염할 우려가 없는 자에 대한 취학금지( 제32조 ), 시체 이동 금지 및 화장의무( 제34 , 35조 ), 강제처분(조사, 진찰, 동행하여 치료 또는 격리, 제42조 )의 경우 제3종 전염병이 모두 제외됨으로써 ‘나병’ 역시 제외되었고, 강제격리 규정은 “제3종 전염병 환자 중 주무부령으로 정하는 자는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 외의 전염병 환자는 자가에서 격리치료를 할 수 있다( 제29조 제2 , 3항 )”라고 주23) 완화되었다. 비록 제26조 에서 정한 요양소장의 질서유지조치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마찬가지로 개정된 구 전염병예방법에 의하더라도 국가가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 그 의사에 반하여 정관절제수술을 하거나 낙태수술을 할 근거는 없다.

㉯ 1973. 2. 8. 제정된 구 모자보건법(법률 제2514호, 1973. 5. 10. 주24) 시행) 에서는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질환이 있는 경우 의사가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제8조 제1항 제2호 ), 의사가 환자를 진단한 결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질환에 이환된 것을 확인하고 그 질환의 유전 또는 전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 자에 대하여 불임수술을 행하는 것이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보건사회부장관에게 불임수술대상자의 발견을 보고하여야 하며, 그 보고를 받은 보건사회부장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환자에게 불임수술을 받도록 명령을 발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고, 1973. 5. 28. 제정된 구 모자보건법시행령(대통령령 제6713호)에서는 그 전염성 질환을 전염병예방법 제2조 제1항 에 규정된 전염병을 말한다( 제3조 제3항 , 제4조 제1항 )고 하여 위 인공임신중절수술 및 불임수술의 대상 질환에 한센병을 비롯한 제1종 내지 제3종 전염병까지를 모두 포함시켰다.

이러한 구 모자보건법 및 시행령의 규정에 의하면, 한센병과 같은 전염성 질환에 이환된 사람의 경우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지만 반드시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불임수술의 경우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서도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의사의 보고 및 가족계획심의위원회의 심의( 시행령 제4조 제4항 )를 거쳐 보건사회부장관의 명령에 의하여야 하고, 그 시행도 소정의 자격을 갖춘 의사에 의하도록( 시행령 제5조 ) 되어 주25) 있다.

(3) 따라서 소록도병원 등 소속 의사 등에 의하여 원고들에 대하여 행해진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한하여 적법성을 가질 수 있다.

㉮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동의나 승낙이 있는 경우

- 정관절제수술의 경우, 국민 개개인이 자유로운 의사로 피임을 위하여 자신의 정관을 절제하는 것은 신체와 성 및 가족생활에 관한 자기결정권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서 설령 공무원이 이에 가공하거나 장려하였다고 하더라도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

- 임신중절수술의 경우, 1973.경 이후에 본인 및 배우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는 모자보건법상 전염성질환 예방 취지에서 위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위 시점 이전에는 설령 본인의 동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낙태는 그 자체가 주26) 범죄 이므로 공무원 역시 이에 가공하거나 장려하였다면 정범이나 교사 또는 방조의 죄책을 면할 수 없다. 다만 본인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었다면 신의칙상 국가에 대하여만 불법행위를 주장하여 손해배상을 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본인의 동의나 승낙이 없는 경우

- 정관절제수술의 경우, 1973.경 이후 1999.까지 사이에 본인의 동의가 없더라도 구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소정의 절차를 거친 보건사회부 장관의 불임수술 명령이 있고 위 장관이 지정한 의사에 의하여 시행된 경우 적법할 수 있다.

- 임신중절수술의 경우, 어느 시점이나 어느 경우에도 본인의 동의나 승낙 없이 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는 법률상 근거는 없다.

(4) 결국 피고 소속 의사 등이 원고들에게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을 시행한 것은, 정관절제수술이 구 모자보건법 소정의 불임수술 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지거나, 원고들 스스로 동의하거나 승낙하여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이 이루어진 경우가 아닌 한 정당한 법률상의 근거 없이 원고들의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나) 인정사실

갑 제1 내지 9, 36 내지 39호증, 을 제1 내지 5호증(각 가지번호 포함)의 각 기재와 증인 소외 3의 증언, 원고 1, 원고 19에 대한 일부 본인신문결과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할 수 있다.

(1)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6. 2. 24.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하여 나병 환자를 격리·수용하기 위한 시설 설립을 추진하여 같은 해 5. 17. 소록도에 주27) ‘자혜의원’ 을 설치하면서부터 한센병 환자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시작되었다.

(2)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주28) 단종수술 은 1915.경 일본에서 전염병예방과 우생학적 이유를 내세워 최초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경 여수 애양원에서 먼저 실시된 이후, 소록도병원에서는 1936.경 기존에 남녀 별거제를 엄격히 실시하던 방침을 바꾸어 부부 동거제를 허용하면서 ‘단종법’을 실시할 것을 조건으로 하면서 공식적으로 주29) 도입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용 환자들에 대한 징계의 일환으로 폭행, 협박, 주30) 감금 과 함께 단종수술을 시행하기도 주31) 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해방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어 1960년대 초반까지도 강제로 단종수술을 한 경우가 있었다.

(3) 소록도병원에서 해방 후 미군정 기간 무렵 소외 27 원장이 재임하던 1945.경부터 1947. 말경까지는 단종수술이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48. 대한민국 정부 출범 후 소외 28 원장이 취임한 다음 1949. 5.경 23개항의 ‘요양소 수용환자 준수사항’을 제정하여, 「남환자와 여환자를 엄격히 구분하여 수용하고, 부부생활을 희망하는 자는 당사자 승낙 하에 거세수술자에 한하여 인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처벌한다」는 등의 주32) 규정 을 두고, 그 무렵부터 다시 정관절제수술을 시행하여 수술을 받은 자에 한하여 부부가 동거할 방 내지 공간(부부사)을 제공하였다.

(4) 1954. 2. 2. 제정된 전염병예방법에서는 한센병 환자를 비교적 전염력이 낮은 제3종 전염병으로 분류하면서도 제1,2종 전염병과 동일하게 강제격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규정 등을 두었고, 요양소장에게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전염병예방법이 1963. 2. 9. 개정되면서 강제격리 규정 등이 완화되어 주무부령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격리수용하는 것으로 완화되었으나, 한센병 환자는 주무부령인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 주33) 등에서 규정한 ‘자가치료를 함으로써 타인에게 전염시킬 우려가 있는 자’ 또는 ‘부랑·걸식 등으로 타인에게 전염시킬 우려가 있는 자’로 분류될 여지를 남기고, 실제로는 여전히 격리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센인들에 대한 이러한 강제격리 방침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강송’제도가 1970년대 중반까지 존재하고, 1970년대 후반까지도 퇴원의 한 유형으로 ‘도주’가 공식통계로 분류되는 등 엄격히 유지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 강제격리 정책이 어느 정도는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미귀자’ 개념이 존재하고 외출과 외박을 엄격히 통제하는 등 거주 이전의 자유가 완전히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 후반이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본인이 원하는 경우 퇴원할 수는 있었다.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 강제격리를 할 수 있는 법령상 근거는 2006. 1. 17. 개정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보건사회부령 제345호)에서 제3군 전염병 격리수용환자의 범위에서 한센병을 제외함으로써 완전히 폐지되었다.

(5) 1963. 전염병예방법이 개정된 후 보건사회부에서는 1964. 9. 16. 그 후속조치로 나관리사업의 효율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 주34) 나병관리협의회 ’를 개최하고, 한센병 환자들에 대하여 ‘임신가능한 자에 대해서는 단종수술을 적극 장려하여 가족계획에 완벽을 기할 것’ ‘임신가능한 자를 항상 조사 파악하여 출산을 최대한 억제토록 할 것’ 등의 철저한 이행을 명하는 주35) 지시사항 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5개 국립병원장은 정관수술 후 동거허가제를 기존 방침대로 강력히 추진하고, 젊은 부녀자에 대하여 매월 정기적으로 임신여부에 대하여 의사 및 간호사의 검진을 받도록 하였다. 입원 중 원내에서의 출산은 금지되었고, 통상 임신한 환자가 출산을 원할 경우 퇴원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퇴원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임신중절 수술을 시행하였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출산하였을 경우에는 분만 즉시 신생아를 부모로부터 격리하여 영아원에서 양육하였다.

(6) 1973. 9. 6. 개정된 보건사회부 예규인 ‘국립나병원 운영규정’에는 「3. 출산제한 및 가족동반 입원의 금지 등 : 나병원에 입원 중인 자는 원내에서 출산할 수 없게 했고, 임산부가 출산하려 할 때에는 퇴원하여야 하되 출산 후 재입원을 금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1993. 8. 19. 보건사회부 훈령 690호 국립소록도병원 운영규정 제6조 금지사항에도 한센인들의 출입제한과 임신, 출산금지 조항을 그대로 명시하고 있었다. 이후 이 금지조항은 2002. 10. 24.에 이르러 국립소록도병원 운영세칙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7) 소록도병원의 연보에는 광복이후 1949.부터 1967.까지는 정관수술 통계기록이 존재하고, 1975.부터 1992.까지는 정관수술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 등 공식적으로 1949.부터 1992.까지 정관수술을 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1952.부터 1990.까지 연보에는 계속하여 ‘부부동거’ 항목이 나오는데, 대부분 부부동거를 음성환자에 한하여 허용하고, 정관수술을 받을 것을 조건으로 일제히 실시하거나, 권장하거나, 하도록 하고 있다는 취지로 기재되어 주36) 있다. 임신중절수술은 각 병원이나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자료 등에는 나오지 않지만 일제 강점기 이래 1980년대 후반 무렵까지도 소록도병원 등에서 공공연히 주37) 이루어졌다.

(8) 소록도병원 등에서 정관절제수술 및 임신중절수술(낙태수술 또는 시술)은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록도병원에서 운영하여 1기에서 8기까지 배출한 ‘의학강습소’ 출신 또는 의료조무원 교육을 받은 ‘ 주38) 의료보조원 ’에 의한 경우도 많았다. 의료보조원에 의하여 상당부분의 의료행위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들의 임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병원의 지침과 의사의 개별 지시 또는 포괄적인 위임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정관절제수술 및 임신중절수술은 원칙적으로 본인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지만, 1970년대까지는 명시적인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9) 1970년대 무렵까지도 한센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차별은 매우 심했고, 이러한 경향은 최근까지도 일부 계속되었다. 다른 전염병과 달리 한센병은 완치되고 나서도 외모에 변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표출하거나 반감, 또는 거리낌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 대부분의 한센인들은 발병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을 못 먹게 되고, 밥도 같이 먹지 못하며,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고립생활을 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한센병의 발병사실을 알게 되면 집단적으로 한센인 가정을 항의 방문하여 마을을 떠나도록 강요하기도 하고 회유, 협박을 하거나, 학대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떠나지 않는 경우 집기를 파손하는 등 직접적인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한센인들은 적절한 치료방법과 대책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동안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결국에는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몰래 마을을 떠나거나 쫓겨났다. ㉯ 가족과 고향을 떠난 한센인들은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생계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고향에서 쫓겨난 한센인들은 혼자서 또는 부랑한센인끼리 ‘짐자리’라는 곳에서 모여 살면서 구걸 등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주변의 폭행과 학대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결국 당국에 붙잡혀 소록도병원 등으로 강송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 한센인들은 치료를 마치고 나서도 사회적 서비스로부터의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음성환자들이 외출하는 경우에도 식당, 목욕탕, 이발소 등 대중시설 이용을 거부하고 차도 태워주지 않아 며칠 동안 걸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병이 나은 이후에도 한번 병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마땅한 생계수단을 찾기 어려웠다. ㉱ 음성 한센인들도 결국 일반 사회에 편입되어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정착촌을 형성해 한센인끼리 모여 살아야 했다. 해방 이후 한센인들의 정책촌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1962년경부터 정부의 본격적인 정착촌 정책이 시작되었지만, 대부분의 정착촌은 이웃 주민과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설립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센인들은 많은 물리적, 심리적 상처를 받았다. 특히 한센병의 전염을 두려워한 지역 주민들이 정착을 방해하거나, 정착한 후에는 이주할 것을 종용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 구타·폭력, 방화 등이 발생하였다. 당시 횡행해 있던 미신적 주39) 사고 로 인해 어린이가 실종이 되면 나환자촌을 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에 대한 한센인들의 반발로 때때로 인근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20여년 동안 한센인 자녀들과 일반 자녀들의 공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한센인들과 일반 주민들의 잦은 충돌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 정착촌의 운영방식은 보통 소록도병원의 운영방식에 준하여, 그 안에서도 소록도병원에서 존재한 징계검속, 감금실, 교도부 등이 대부분 정착촌에도 그대로 있었다. 정착촌에서는 주로 동료 한센인들에 의한 통제가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범죄행위 등에 대해서도 자체 징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부당하게 폭행을 하거나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소록도 병원 등 국립병원이나 다른 정착촌에서 이주하여 오거나, 일반사회로부터 복귀하여 오는 한센인들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 때로는 언론에서도 한센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센인들이 부랑환자로 떠돌아 사회적으로 무리를 일으켜 일제단속을 한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경우, 한센인들이 치료목적으로 어린이를 공격하거나 신체의 일부 또는 유골들을 훔쳐 치료에 사용하였다는 풍문이 보도되는 경우, 한센인들을 차별하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여과 없이 보여 주어 혐오감이나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하는 경우가 1970년대까지는 종종 주40) 있었다. ㉴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한센인들에게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의하여 발생한 대표적인 예로서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공식 인정한 피해사례들은 별지 ‘대표적인 한센인 피해사건’ 기재와 같다.

(10)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2005년 주41) 조사) 에 의하면, ㉮ 우리나라 한센인들의 발병시기는 0~10세가 12.7%, 11~20세가 56.1%, 21~30세가 24.7%, 31~40세가 4.4%, 41세 이상이 2.1%로 나타났고, ㉯ 한센병의 이환과정에서 얼굴에 후유증이 남았다는 비율은 48.9%, 손에 남았다는 비율은 48.9%, 발에 남았다는 비율은 58.7%로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한센인 표시가 난다고 응답한 비율은 75.5%에 이르렀으며, ㉰ 한센인들의 가구 구성은, 노인독거 가구가 28.3%, 노인부부 가구가 47.6%, 자녀동거 13.0%, 조손가구 3.3%, 기타 7.8%로 파악되었고, ㉱ 한센인 중 실제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은 87.6% 정도로서, 장애 정도에 따른 노동능력이 일반인과 비슷하다는 응답은 7.3%에 불과하고, 가벼운 노동수행 가능 11.8%, 건강인의 절반 정도 13.4%, 노동력은 없으나 도움 없이 거동가능 56.1%, 거동이 불편한 심한 장애는 11.5% 정도인데, 장애 유형은 지체장애가 88.9%로 절대 다수이고, 그 다음이 시각장애 13.2%, 기타 청각, 신장 등 장애가 1% 내외이며, ㉲ 생활비 확보 방법은 본인 노동에 의한 경우가 11.4%, 본인의 저축, 투자, 임대 등 소득이 있는 경우가 10.7%, 가족이나 친지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11.4%이나, 전체적으로 국가의 보호(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따른 생계비, 경로연금, 장애수당, 한센양로수당 등)를 받는 비율이 83.4%이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권자가 74.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1) 소록도연보에 따르면, 소록도병원 입원 한센인들의 학력 및 교육 수준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학 및 초등학교 졸업자가 87% 내지 94%에 이를 정도로 매우 낮은 것으로 파악되었고, 입소 전 직업은 무직이 47% 내지 53%이고, 그 밖에는 대부분 농업이나 수산업 종사자(28% 내지 44%)였던 것으로 주42) 나타났다.

(12) 한편 일제강점기에 한센인 치료 및 격리시설인 소록도병원 등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던 일본의 경우 2001. 5. 11.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에서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 격리정책의 법적 근거였던 ‘나예방법(1916년 제정 ~ 1996년 폐지)’이 일본국 헌법에 위반하는 위헌·위법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1인당 격리기간에 따라 800만 엔 내지 1,400만 주43) 엔 의 손해배상을 인용하는 판결을 선고하였다. 위 판결의 주요 판단 근거는 1949.경 DDS요법인 프로민이 일본 내에 널리 보급되어 한센병 치료에 큰 효과가 있었고 그로부터 10년이 경과한 1956.경에는 국제적으로 썰폰제의 평가가 확실한 것으로 되었고, 1950년대까지 개최된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센인에 대한 격리수용 정책을 반대하는 결의가 계속되는 상황이었으며, 1955. 이후 새로 발견된 환자 수가 현저히 감소하는 경향이었으므로 늦어도 1960.경에는 더 이상 한센병은 격리정책을 사용해야 할 정도의 특별한 질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격리정책을 유지한 나예방법은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위 판결에 항소하지 아니하여 확정되었고, 2001. 6. 22. ‘한센병요양소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한센인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복지수당 지급 및 기념사업 외에 입소기간에 대응하여 1인당 800만 엔 내지 1,400만 엔(위 판결과 같은 금액)을 일괄 보상하였다.

다) 판단

(1) 위와 같이 소록도병원 등에 입소한 한센인들에 대하여 피고 소속 의사 등에 의하여 적어도 1992년경까지는 정관절제수술이 이루어졌고, 1980년대 후반경까지는 임신중절수술이 이루어졌는데, 일제강점기이래 해방 후에도 1960년대 초반 무렵까지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강제로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개별적인 원고들에 대하여 강제로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한 증거는 모두 원고들 본인진술과 이를 바탕으로 한 보증인들의 진술 및 진상조사위원회의 사실인정이 있을 뿐이어서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달리 그 강제성을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따라서 피고 측에서 원고들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하여까지 강제적으로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2) 그러나 설령 원고들이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에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 또는 승낙하여 피고 소속 의사 등이 이를 시행하였다고 하더라도, 피고가 원고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은 그 표면적인 동의나 승낙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 1873년경 한센균이 발견된 이래 이미 1900년대 초반에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알려졌고, 국내에 DDS 치료기법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1950년대 초반부터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부터는 대부분의 환자가 완치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1950년대 이전부터 한센병에 관한 각종 국제회의에서는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격리정책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피고도 1954년에 이미 전염병예방법을 제정하면서 한센병을 비교적 전염력이 낮은 제3종 전염병으로 분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제3종 전염병인 결핵이나 성병 등과는 달리 유독 한센병에 대하여만 강제격리 정책을 유지해 왔다. 이는 한센병이 다른 전염병과 달리 외모에 변형이 생기고 이로 인하여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 심하다는 이유에 기인한 것으로 보일 뿐, 적어도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센병이 강제 격리정책을 유지할 정도의 특별할 질환이 아니었다.

㉯ 한센병은 대부분 젊은 나이에 발병하고(10대까지 68.8%, 20대까지 93.5%), 한센병 환자들의 교육수준은 매우 낮아 대부분 무학이나 초등학교 졸업자(1960년대부터 1990년까지 계속하여 87% 내지 94%)이고, 직업도 대부분 무직이나 농업, 수산업(같은 기간 90 내지 92%) 종사자들이었다. 따라서 한센인들이 스스로 한센병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거나 진지하게 인권에 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고 보아야 하고, 이러한 정보나 교육은 대부분 수용시설에서 피고에 의하여 제공받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피고는 한센인들에게 막연히 한센병은 치유된다는 교육만 하였을 뿐 엄격하게 격리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1963년에 전염병예방법을 개정하여 일단 법률상으로는 강제격리 정책을 폐기하면서도 그 시행규칙 등에 격리대상 질환을 위임하여 여전히 격리할 여지를 남기고, 1970년대까지 실제로는 격리정책을 유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센인 스스로도 한센병은 전염성이 강한 질환으로서 특히 자식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인식하고, 심지어는 유전되기도 하는 질환이라고 오해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격리수용 정책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었음과 동시에 한센인들에게는 열등감과 외부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 피고는 소록도병원 등에서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여 수용하는 정책을 유지하는 한편, 1949년부터 기존에 일제강점기에 시행하던 것과 같이 정관절제수술을 받을 것을 조건으로 부부동거를 허용하였는데, 음성환자에 한하여 정관절제수술을 받을 것을 조건으로 부부사를 제공하는 정책은 1990년대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부부동거를 원하는 남성은 정관절제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병원 내에서의 임신과 출산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정책 역시 1990년대까지 유지되어 여성이 임신하는 경우 일단 병원의 규율을 위반한 것으로 취급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주44) 보이고, 굳이 출산을 원한다면 퇴소를 하여야 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수용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직업을 선택할 자유도 없었던 한센인들로서는 갑작스럽게 부부가 함께 퇴소하여 정착촌이나 일반사회로 진출하기에는 자립능력이 부족했고, 여러 가지 편견과 차별이 상존하는 외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큰데다 기존의 생활터전을 잃는다는 상실감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퇴소를 선택하기는 힘들었고, 퇴소를 원하지 않는 임신 여성은 결국 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현실에서 설령 원고들이 결혼하기 위해 정관절제수술을 신청하거나 임신중절수술을 받는 것을 원하거나 승낙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진정한 의사에서의 동의 또는 승낙이라고 할 수 없다. 즉 피고가 정관절제수술을 조건으로 부부동거를 허용하고, 임신에 대하여 비난을 가하면서 퇴소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임신중절수술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원고들로서는 사실상 그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원고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인권에 대하여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으로서 한센병에 대하여 제공받는 정보와 교육이 거의 대부분 피고에 의하여 제공되었는데, 소록도병원 등에서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금지되고 임신한 것이 발각되어 이미 비난을 받고 있던 상황인 점을 고려하여 보면, 설령 원고들이 병원 측에 이러한 수술들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의 자의에 의한 선택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고, 원고들이 이와 같이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역시 피고가 제공한 잘못된 정보와 교육 때문이다.

㉲ 부부가 동거하고 자녀를 갖는 것은 인간 본연의 욕구이자 천부적인 권리이며, 이는 결코 죄악시될 수 없는 행복추구권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피고가 음성환자에 대하여만 부부동거를 허용하여 온 점에 비추어 볼 때 사실상 원고들에게 출산을 금지할 합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가 원고들을 비롯한 한센인들에게 인간 본연의 욕구와 권리인 부부동거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정관절제수술을 받도록 하고, 국가가 마땅히 보호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퇴소를 명하지 않는 조건으로 임신중절수술을 받도록 하는 것은, 강요된 행위 또는 반사회적인 조건이 붙은 동의 내지 승낙을 요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위 동의 내지 승낙이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원고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통상의 처분가능한 법익의 침해에 대한 동의 내지 승낙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피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3) 한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한센인이라도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는 법률상의 근거는 없고, 정관절제수술의 경우 구 모자보건법에 따라 1973.경부터 1999.경 사이에 소정의 불임수술 명령에 따른 경우에만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서도 이루어질 여지가 있었지만, 이 사건에서 피고가 구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보건사회부 장관의 불임수술 명령에 따라 원고 1, 원고 2, 원고 3, 원고 4, 원고 5, 원고 6, 원고 7, 원고 8, 원고 9에게 정관절제수술을 하였다는 점에 관하여는 아무런 주장·입증이 없다.

(4) 그 밖에 피고는 소록도병원 등의 환자수용 여건과 예산상 한계 및 가족계획 시책 등에 따라 병원 내에서 출산을 억제하는 것은 부득이한 정책이었다는 사유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원고들을 비롯한 한센인들 대부분이 오로지 국가의 보호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로서 소록도병원 등에서 일시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상당 기간을 지내야 하는 입장이고, 원고들이 죄를 짓거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해서 수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보면, 피고가 한센인들의 본질적인 욕구와 천부적인 권리에 대하여 합리적인 대책을 수립하지 아니하고 전면적인 출산금지 정책을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선택이다. 이는 피고가 한센인을 대등한 인간으로서 하나의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사회 일반에 만연한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동조한 것으로서 국가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한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할 의무, 보건에 관하여 국민을 보호할 의무와 모성을 보호할 의무를 모두 이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가족계획이란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으로 모자보건과 가정복지의 향상을 꾀하고자 자녀의 수와 터울을 조정하는 계획을 말하는 것일 뿐, 한센인들에 대하여 자녀 자체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이 결코 가족계획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

(5) 결국 피고 소속 의사 등이 원고들에 대하여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을 한 것은 국가가 정당한 법률상의 근거 없이 국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손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나아가 국가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한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할 의무와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 보건에 관하여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으로서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위법함을 면할 수 없다.

다. 소 결

따라서 피고 소속 의사 등이 원고들에게 정관절제수술 및 임신중절수술을 한 행위는 불법행위를 구성하고, 원고들은 이로 인하여 헌법상에 보장된 위와 같은 제반 권리를 침해당함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피고는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3.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에 대한 판단

가. 당사자들의 주장

1) 피고는, 설령 원고들에 대한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이 국가의 불법행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이루어진 후 5년 또는 원고들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때로부터 3년이 경과하여 이 사건 소가 제기되었으므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이미 시효가 완성되어 소멸하였다고 항변한다.

2)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재항변한다.

나. 판 단

1) 소멸시효 완성 여부

가)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하여 소멸한다( 민법 제766조 제1항 ). 그런데 이 사건에서 앞의 인정사실 및 뒤의 2) 나)항에서 살피는 바와 같이, 원고들의 경우 피고 소속 의사 등에 의하여 행해진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이 원고들에게 불법행위가 되어 손해가 된다는 사정을 진상규명위원회의 피해자 결정 통지가 있기 전까지는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들은 진상규명위원회의 피해자 결정 통지가 있었던 때에 손해 및 가해자를 알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원고들에 대한 피해자 결정·통지가 있었던 2010. 6. 24.부터 2012. 6. 27.경(앞의 기초사실)으로부터 3년 이내인 2013. 3. 18. 이 사건 소가 제기된 사실이 기록상 명백한 이상, 이 사건은 위 단기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나) 다른 한편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 동안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하고{ 구 예산회계법(1989. 3. 31. 법률 제4102호로 전문개정되기 전의 것) 제71조 , 구 재정법 (1961. 12. 19. 법률 제849호로 제정된 예산회계법으로 폐지되기 전의 것) 제58조 , 구 회계법(1921. 4. 7. 조선총독부법률 제42호로 제정되어 1951. 9. 24. 법률 제217호로 제정된 구 재정법 제82조 로 폐지되기 전의 것) 제32조}, 이는 위 3년의 단기소멸시효 기간과 달리 불법행위일로부터 바로 진행이 되므로 한센인피해사건법에 의하여 피해자임을 확인하는 결정이 있었던 경우에도 그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그 피해가 생긴 날로부터 5년이 경과한 때에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피고가 원고들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한 날로서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생긴 날은 각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이 이루어진 1950.경 내지 1978.경이라고 할 것인데, 그로부터 5년 이상 경과한 2013. 3. 18.에 이르러 이 사건 소가 제기되었을 뿐이므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이 사건 소 제기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2) 피고의 소멸시효 원용이 권리남용에 해당하는지 여부

가) 다만 채무자의 소멸시효에 기한 항변권의 행사도 우리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또는 일단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하였거나, 채권자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의 변제를 수령하는 등의 사정이 있어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대법원 2011. 6. 30. 선고 2009다72599 판결 , 대법원 2011. 9. 8. 선고 2009다66969 판결 등 참조).

나) 이 사건의 경우, 우선 피고의 불법행위 여부가 진상규명위원회의 한센인피해사건 피해자 인정 결정이 있기 이전까지는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이 아니었다. 피고는 실제로 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이 있은 후 이 사건 변론에 이르러서도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은 모두 원고들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서 당시의 의료수준 아래에서 한센병의 전염을 예방하고, 병원의 수용한계 등을 고려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므로 위법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한센병 또는 인권과 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지 아니한 일반인으로서는 국가인 피고가 한센인들의 부부동거를 허용하면서 정관절제수술을 하도록 하고 임신한 한센인들에 대하여 임신중절수술을 하는 것은 한센병의 예방을 위한 국가의 부득이한 조치이고, 정당한 법적 근거도 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오인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미 1950~1960년대 무렵에는 한센병이 거의 완치되는 질환으로서 국제 학술대회 등에서 격리정책에 반대하는 여러 차례의 권고나 결의가 있었고 피고는 이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격리정책을 1970년대까지 계속 유지하였고, 피고가 부부동거를 허용한 음성환자의 경우 전염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을 강요함으로써 일반인들은 물론 한센인들에게 까지도 한센병의 전염성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한센병에 대한 정보와 교육은 거의 대부분 국가인 피고에 의하여 제공되었으므로, 일반인들은 한센병에 대한 피고의 정책을 보고 한센병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 왔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록도병원 등에 수용된 한센인들은 일상생활을 피고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교육과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인식도 기대하기 어려운 낮은 교육수준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원의 방침에 따라 정관절제수술을 하고 부부동거를 허용받는 것을 별다른 저항의식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고, 병원의 정책과 달리 임신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낙태를 원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원고들을 비롯한 한센인들이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국가인 피고를 상대로 불법행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대가능성은 거의 없고, 이는 주로 피고의 잘못된 정책과 교육에서 야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피고가 한센병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일반에 만연된 편견과 차별을 불식시켜 나갔더라면 피고의 이러한 정책은 그 당시부터 심한 저항에 직면했을 것이고, 대부분의 일반인들도 한센인들에 대한 그와 같은 차별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경우는 채무자인 피고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인 원고들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센병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 역시 진상규명위원회의 한센인피해사건 결정이 있기 이전까지는 피고의 행위가 위법한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므로, 객관적으로 피해자가 권리행사를 할 수 없는 장애사유 즉 채권자가 아닌 제3자가 채권자의 입장에서 선다고 하더라도 권리행사가 불가능한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된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다) 또한 피고는 이 사건 위법한 정관절제수술 및 임신중절수술을 비롯한 한센인 피해사건에 대하여 5년의 소멸시효가 경과한 후로도 오랜 기간이 지난 2007. 10. 17.에 이르러 한센인피해사건법을 제정(시행 2008. 10. 18)하였다. 위 법에서는 한센인피해사건에 관한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의 대한 지원을 함으로써 이들의 인권신장 및 생활안정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1조 )고 천명하고, 국가의 행위로 인하여 한센인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에 대하여 그 유형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거나, 그 밖에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심의·결정하도록 하면서( 제2조 제3호 ), 피고 산하에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조사를 위한 관련자료의 수집 및 분석, 피해자 심사·결정,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 등 지급결정,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등 진상규명 활동을 하도록 하고( 제3조 ), 피해자에 대한 지원 방안으로 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 제8조 ), 의료지원금등 지급( 제9조 ), 한센인주거복지시설 등의 설치( 제10조 ) 등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처럼 한센인피해사건법은 그 적용대상 사건 전체에 대하여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왜곡되거나 오해가 있는 부분을 바로잡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도모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한센인피해사건에 관하여 개별 피해자를 특정하여 피해 경위 등을 밝히고 그에 대한 피해회복까지 염두에 두고 제정된 법률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록 한센인피해사건법에 개별 피해자에 대한 배상·보상에 대한 규정은 마련되어 있지 않고, 피해자 지원방안만이 규정되어 있을 뿐이지만, 피고가 한센인피해사건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국가에 의한 피해사건임을 인정하고 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하여 그 피해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개별적으로 조사·확정한 것은 그 피해의 배상·보상을 당연한 전제로 하는 것이고, 개별 피해자가 사법절차를 통하여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규정을 두지 아니한 이상 그 실행방법에 대하여는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아니한 것이다. 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피해자 등이 국가배상청구의 방법으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사법적 구제방법을 취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수용하겠다는 취지를 담아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파생된 법적 의미에는 구체적인 소송사건에서 새삼 소멸시효를 주장함으로써 배상을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취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피고가 한센인피해사건법의 적용 대상인 피해자의 진실규명신청을 받아 피고 산하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피해자로 확인하는 결정을 하였다면, 그 결정에 기초하여 피해자가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할 경우에, 국가가 적어도 소멸시효의 완성을 들어 권리소멸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신뢰를 가질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라) 만약 이와 달리 한센인피해사건법이 국가에 의한 한센인피해사건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조치로 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된 지원방안만 이행하고 손해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은 배제하는 취지라고 해석한다면, 이는 국가가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무에 대하여 뒤늦게 불법행위임을 인정하여 구체적인 피해조사를 거쳐 피해자 및 피해의 내용까지 확정해 놓고도 그 피해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은 거절하고 다만 의료지원금 등만을 지급하겠다고 표명한 것으로서, 피해자들에 대한 신뢰에 반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법 체계상으로도 정당성을 갖기 주45) 어렵다 .

더구나 앞의 인정사실 및 갑 제1, 7, 9, 36, 39호증(각 가지번호 포함)의 각 기재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① 일제강점기에 한센인 치료 및 격리시설인 소록도병원 등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던 일본의 경우 2001.경 기존의 강제격리정책이 위헌·위법이라하여 손해배상을 명하는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의 판결이 선고된 사실, ②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 2001. 6. 22. ‘한센병요양소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 사실, ③ 일제강점기 소록도에 입소하였던 한국 한센인들이 2004. 8. 위 법을 근거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금부지급결정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위 법이 일본 영토 내 입소자에 대한 보상을 정한 것이라는 이유로 패소한 사실, ④ 그러나 일본 정부는 위 법의 개정운동을 수용하여 2006. 2. 3. 국외 ‘외지’ 한센병 요양소 입소 한센인에 대한 보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센병요양소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을 일부 개정하여 일제강점기 한국 소록도 및 대만 낙생원에 강제격리된 한국 및 대만 한센인들에게도 800만 주46) 엔 씩 보상 해주기로 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 한센인들은 500명 이상이 보상을 받은 주47) 사실, 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이러한 일본에서의 소송 및 입법 경과 등을 바탕으로 한센인 단체, 변호인단, 학계와 인권 단체 등을 중심으로 한센인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보상 등에 관한 입법청원 운동이 일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2005.경부터 2006.경 사이에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를 하여 그 보고서 발간 및 보건복지부장관에 대한 권고 등을 통하여 한센인 인권침해 사건들의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등을 위한 법률의 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러한 여론 등이 반영되어 2007. 10. 17. 한센인피해사건법이 제정된 사실, ⑥ 한센인피해사건법 및 그 시행령에 의하여 피해자지원방안으로 의료지원금과 생활보상금이 지원되는데, 다른 법령과의 이중지급을 금지( 법 9조 1항 단서)함으로써 한센인 중 75%에 이르는 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자 등이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고, 다만 2012. 1.부터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에 대하여만 월 15만 원의 생활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는 사실 등이 인정된다.

이처럼 한센인피해사건법의 제정된 배경이 주로 한센인피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통한 피해회복을 바라는 여론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 일본 등 주변국에서 한센인 피해자들에 대하여(일제강점기 한국인 피해자 포함) 특별법 등을 제정하여 그 손해에 부합하는 상당한 금액의 보상을 하는 점, 한센인피해사건법에서 정한 의료지원금과 생활보상금은 피해에 대한 배상 내지 보상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성질일 뿐만 아니라 임의적인 주48) 규정 에 의한 것으로서 그 혜택 범위도 제한되고 금액도 미미한 점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가 소멸시효 기간이 지난 후에 한센인피해사건법을 제정하고서도 그 법에 손해배상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소멸시효를 원용하여 그 손해배상을 거부하는 것은 금반언의 원칙에 반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의를 추구하여야 하는 국가로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마) 결국 위와 같은 사정들을 모두 고려하여 보면, 이 사건에서 채무자인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3) 원고들이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였는지 여부

가) 채무자의 소멸시효 항변이 권리남용에 해당하는 경우에도 채권자는 그러한 장애사유가 소멸한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여야만 채무자의 소멸시효의 항변을 저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행사가 있었는지 여부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 신뢰를 부여하게 된 채무자의 행위 등의 내용과 동기 및 경위, 채무자가 그 행위 등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한 목적과 진정한 의도, 채권자의 권리행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그 ‘상당한 기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상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여 단기간으로 제한되어야 할 것이므로 개별 사건에서 매우 특수한 사정이 있어 그 기간을 연장하여 인정하는 것이 부득이한 경우에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경우 그 기간은 아무리 길어도 민법 제766조 제1항 이 규정한 단기소멸시효기간인 3년을 넘을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나) 이 사건의 경우, 공지의 사실 및 갑 제38호증의 1 내지 8의 각 기재와 변론전체의 취지에 의하면, ① 한센인피해사건법이 시행된 후 2010. 6. 24.부터 2012. 6. 27. 사이에 원고들에 대한 한센인피해사건 피해자 결정이 이루어졌지만, 그 보다 이전인 2009. 8. 6. 이미 국회에서 한센인피해사건법에 보상금 지급규정 등을 포함시키는 내용의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임두성 의원 등 81인 발의, 의안번호 1805674)이 발의되어 계류되어 있었으나 당해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된 사실, ②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2013.경 발행한 보고서에서 현행 법률이 국가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개입에 의한 한센인 피해사건 임에도 불구하고 그 조치는 국가배상이 아닌 의료지원, 생활지원과 기념관 건립 등에 그치고 있어, 결과적으로 국가에 의한 직·간접적 가해행위를 부인하고 있고, 피해자에 대한 생활지원은 그 실효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는 근본적으로 폭넓은 보상을 실시한 일본이나 대만과는 달리 생활이 어려운 한센인 피해사건 피해자에게 소액의 의료지원, 생활지원만을 규정한 한센인피해자법이 가지는 한계에 기인한다고 하면서 법 개정 등을 통한 실질적인 보상을 촉구한 사실 등이 인정된다.

이러한 경위 등을 보면 한센인피해사건법에 의한 피해자 결정을 받은 원고들이 법의 규정과 진상규명위원회의 건의 등에 따라 피고가 그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등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피고가 아무런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자 비로소 피고를 상대로 개별적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따라서 이 사건 소가 위 진실규명결정일로부터 길게는 2년 8개월, 짧게는 8개월 가량 경과한 후인 2013. 3. 18. 제기되기는 하였지만, 원고들이 진상규명위원회의 피해자 결정 이후 단기소멸시효의 기간 경과 직전까지 피고의 입법적 조치를 기다린 것이 상당하다고 볼 만한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할 것이고, 이를 감안하면 원고들은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제할 만한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행사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손해배상의 범위

가. 위자료 산정

1) 원고들에 대한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참작하기로 한다.

(가) 한센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냉대와 멸시는 그들에게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심한 정신적 고통과 모욕감을 주었다. 그러나 피고는 사회적인 차별과 편견에 의하여 고통받고 살아온 한센인들에 대하여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에 편승하여 한센인들을 엄격히 격리하고 자녀마저 두지 못하게 함으로써 원고들을 비롯한 한센인들에게 심한 열등감과 절망감을 심어 주었다.

(나)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은 원고들이 갖는 인간본연의 욕구와 기본적인 행복추구권을 정당한 법률상의 근거 없이 제한하면서 오히려 원고들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한 것으로서 반인권적·반인륜적 성격이 강하다.

(다)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대부분의 원고들이 노후를 보살펴 줄 자식도 없는 처지가 되어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금전으로나마 그 고통을 보상해줄 필요성이 크다.

(라) 이 사건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변론종결일부터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여 장기간 동안 배상이 지연된 사정을 위자료 원본을 산정할 때 참작할 필요가 있다.

(마) 다만 피고는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부터 적지 않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원고들을 비롯한 한센인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피고가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정책들 중 이 사건과 같이 일부 부적절하거나 반인권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 점만을 가지고 피고의 한센인 정책을 일률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바) 또한 이 사건은 이미 불법행위에 관한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피고가 한센인피해사건법을 제정함으로써 원고들의 피해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손해배상의 단초가 제공된 것으로, 비록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피고의 선의(선의)를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2) 위와 같은 모든 사정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 사건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원고 1, 원고 2, 원고 3, 원고 4, 원고 5, 원고 6, 원고 7, 원고 8, 원고 9(이상 정관절제수술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위자료는 각 30,000,000원, 원고 10, 원고 11, 원고 12, 원고 13, 원고 14, 원고 15, 원고 16, 원고 17, 원고 18, 원고 19(이상 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위자료는 각 40,000,000원 정도로 정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나. 지연손해금의 기산일

원고들은 위자료에 대하여 불법행위일로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피고가 원고들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불법행위를 한 날에 가까운 1978. 1. 1.부터의 지연손해금을 구한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에 대하여는, 불법행위가 없었더라면 피해자가 손해를 입은 법익을 계속해서 온전히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별도의 이행 최고가 없더라도 공평의 관념에 비추어 그 채무 성립과 동시에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불법행위 시와 변론종결 시 사이에 장기간 세월이 경과함으로써 위자료 산정의 기준이 되는 변론종결 시의 국민소득수준이나 통화가치 등의 사정이 불법행위 시에 비하여 상당한 정도로 변동한 결과 그에 따라 이를 반영하는 위자료 액수 또한 현저한 증액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변론종결 당일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9다103950 판결 , 대법원 2012. 3. 29. 선고 2011다38325 판결 등 참조).

그러므로 불법행위 시로부터 길게는 64년 짧게는 36년의 세월이 지난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4. 3. 20.을 기준으로 위자료를 산정하는 이 사건에서는 위 변론종결일부터 위자료에 대한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할 것이다. 결국 원고들의 위 주장 중 1978. 1. 1.부터 위 변론종결일 전날까지의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부분은 이유 없다.

5. 결 론

그렇다면 피고는 원고 1, 원고 2, 원고 3, 원고 4, 원고 5, 원고 6, 원고 7, 원고 8, 원고 9에게 손해배상금으로 각 30,000,000원, 원고 10, 원고 11, 원고 12, 원고 13, 원고 14, 원고 15, 원고 16, 원고 17, 원고 18, 원고 19에게 손해배상금으로 각 40,000,000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4. 3. 20.부터 이 판결 선고일인 2014. 4. 17.까지 민법이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20%의 각 비율로 계산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므로, 원고들의 청구는 위 각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인용하고, 나머지는 이유 없으므로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별지 생략]

판사 유영근(재판장) 강선아 정현우

주1) 각 시기별로 위 병원들 중 일부의 운영 주체가 지방자치단체가 되거나 준 사립의 재단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에 대한 정책 일반은 국가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피고가 각 병원을 직접 운영하거나 적극적으로 통제해 왔으므로, 이 사건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수술의 위법 여부로 인한 국가배상을 논함에 있어서는 피고의 책임 유무에 대하여 각 병원별 행위에 따른 구분을 두지 않기로 한다.

주2)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3. "한센인피해사건"이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건을 말한다. 가. 한센인입소자가 1945년 8월 16일부터 1963년 2월 8일까지 수용시설에 격리 수용되어 폭행, 부당한 감금 또는 본인의 동의 없이 단종수술을 당한 사건 〈위원회에서는 ‘이른바 한센인 격리·폭행사건’으로 칭함〉 나. 1945년 8월 20일을 전후하여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소록도 갱생원 직원에 의한 폭력으로 한센인이 사망, 행방불명 또는 부상을 당한 사건 〈위원회에서는 ‘이른바 84인 학살사건’으로 칭함〉 다. 1962년 7월 10일부터 1964년 7월 25일까지 전남 고흥군 도양면 봉암반도와 풍양반도를 잇는 간척공사와 관련하여 한센인이 강제노역을 당한 사건 〈위원회에서는 ‘이른바 오마도 간척사업사건’으로 칭함〉 라. 그 밖에 제3조에 따른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심의·결정한 사건 〈위원회에서는 ‘이른바 기간 외 한센인 격리·폭행사건’으로 칭함〉

주3) 2002년 18,014명, 2005년 15,770명, 2010년 13,316명, 2011년 12,847명, 2012년 12,323명

주4) 2001년 36명(0.17), 2002년 22명(0.13), 2003년 17명(0.09), 2004년 17명(0.09), 2005년 15(0.08), 2006년 15명(0.05), 2007년 12명(0.04), 2008년 12명(0.04), 2009년 5명(0.01), 2010년 6명(0.01)

주5) 다만 일부 원고들은 수술일지에 기재된 수술날짜와 원고들의 진술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정한 날짜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수술일지에 기재된 날짜가 정확한 수술일시에 더 부합할 것으로 보인다.

주6) 처는 돌아가고 소록도에는 혼자 남았는데, 단종수술을 받지 않으면 입원시켜 주지 않는다고 해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갑 제41호증의 5, 14).

주7) 원고 4 및 그의 처 소외 8는 위와 같이 수술을 하였지만 임신이 되어 다시 수술을 받았고, 1977.경 다시 임신을 하게 되어 1977. 12. 25. 아이를 낳은 후 다시 수술을 받는 등 3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위 진술들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만, 일단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정한 1969.경의 정관절제수술 사실만 인정하기로 한다.

주8)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1974.경으로 인정하였으나, 정관수술 명단(갑 제32호증의4)의 기재 날짜로 인정하기로 한다.

주9)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1976.경으로 인정하였으나, 수술일지(갑 제32호증의5)의 기재 날짜로 인정하기로 한다.

주10) 처인 원고 13이 1962.경 칠곡 애생원에 입원한 후 1963. 가을경 임신 3~4개월째에 낙태수술을 받았다고 하고, 원고 9는 1962.경 입원하였고, 처 원고 13이 낙태수술을 받은지 4개월 후에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따라서 원고 9의 정관절제수술 시기는 진상규명위원회가 인정한 1962. 보다는 처 원고 13이 낙태시술을 한 1963.경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주11) 원고 11은 1968.경 두 번째로 임신이 되자 외출허가를 받아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병원에 가서 낙태수술을 받고 귀원하였다고 진술하면서 이 또한 소록도 병원 측의 강요에 의한 낙태라고 주장하고, 진상규명위원회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주장 자체에 의하더라도 피고 운영의 소록도병원 등에서 낙태수술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일단 제외하고 위 사실만을 인정하기로 한다.

주12) 원고 12와 원고 7은 모두 정관절제수술 및 낙태수술을 받은 시기가 1976.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관수술명단(갑 35-1)과 수술일지(갑 35-2)에 원고 7이 1978. 4. 28.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는 점, 원고 12가 낙태수술을 받은 직후 원고 7이 정관수술을 받았다고 진술하는 점에 비추어 보면, 원고 12가 낙태수술을 받은 것은 1978.경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주13) 진상규명위원회에서 1957.경으로 인정한 것은 원고 14가 그 때 남편을 만났다고 한 진술을 낙태시기로 오해하여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주14) 원고 14는 이 소송에 이르러 제출한 진술서(갑 25-12)에서 1960.경에도 두 번째로 낙태수술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이는 위 원고가 진상규명위원회에 피해신고 당시 주장하지 않았던 내용이므로, 판단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주15) 원고 19는 위 2차례 외에도 수 차례에 걸쳐 낙태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특히 이 소송에 이르러 제출한 진술서(갑 30-12)에서는 9차례 가량 낙태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명백해 보이는 위 2차례의 낙태수술 사실만을 인정하기로 한다.

주16) 1962. 12. 26. 개정 헌법 및 1980. 10. 27. 개정 헌법에 의하여 명문으로 규정된 것이지만, 기본권 이념의 일반원칙이자 윤리적 내지 자연법적 원리를 헌법규법화한 것으로서 1948. 7. 12. 제정 헌법 당시부터 헌법의 기본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편 제정 헌법 당시부터 제28조에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는 규정(현행 헌법 제37조 제1항)을 두었다.

주17) 제정헌법 제9조에서부터 같은 규정이 있었다.

주18) 제정헌법 제20조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주19) 제정 헌법 당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은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한다(제28조)’고 규정되어 있었다.

주20) 본질적 내용 침해 금지 규정은 1962. 12. 26. 개정 헌법부터 규정되었다.

주21) 나병과 함께 규정된 3종 전염병으로는 결핵, 성병 등이 있고, 한편 콜레라, 페스트, 장지브스, 천연두 등이 제1종 전염병, 백일해, 마진, 유행성이하선염 등이 제2종 전염병으로 규정되었다.

주22) 제1종 전염병환자와 나병환자는 전염병원, 격리병사, 격리소, 요양소 혹은 특별시장 또는 시,읍,면장이 지정한 장소에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

주23) 그러나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무부령에서 한센병을 포함한 제3종 전염병에 대하여 계속 강제격리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유지하였고, 2006. 1. 17. 개정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부령 제345호)에 이르러서야 3군 전염병 중 한센병에 대하여 강제격리를 할 법률적 근거가 완전히 사라진다.

주24) 1973. 2. 8. 제정 모자보건법[법률 제2514호] 제8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되는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자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2.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질환이 있는 경우 제9조(불임수술절차 및 소의제기) ① 의사가 환자를 진단한 결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질환에 이환된 것을 확인하고 그 질환의 유전 또는 전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 자에 대하여 불임수술을 행하는 것이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보건사회부장관에게 불임수술대상자의 발견을 보고하여야 한다. ② 보건사회부장관이 제1항의 규정에 의한 보고를 받은 경우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환자에게 불임수술을 받도록 명령을 발할 수 있다. ③ 제2항의 규정에 의한 보건사회부장관의 명령을 받은 자가 불복이 있는 때에는 명령을 받은 날로부터 2주일이내에 그 명령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행정소송이 제기된 경우에는 제2항의 명령은 판결이 확정될 때 까지 그 효력이 정지된다. ④ 보건사회부장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의사를 지정하여 제2항의 규정에 의한 불임수술명령을 받은 자에게 불임수술을 행하게 하여야 한다. 1973. 5. 28. 제정 모자보건법시행령[대통령령 제6713호] 제3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③ 법 제8조제1항제2호의 규정에 의한 전염성 질환은 전염병예방법 제2조제1항에 규정된 전염병을 말한다. 제4조(불임수술대상자 보고 및 명령등) ① 법 제9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불임수술대상자는 제3조제2항 각호 1에 해당하는 질환에 이환된 자로 한다. ② 의사가 제1항에 규정에 의한 불임수술대상자를 발견한 때에는 보건사회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체없이 관할 보건소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여야 한다. ③ 제2항의 보고를 받은 보건소장은 보건사회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체없이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를 거쳐 보건사회부장관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여야 한다. ④ 보건사회부장관은 법 제9조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불임수술의 명령을 발하고자 할 때에는 가족계획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제5조(불임수술 담당의사의 지정) 보건사회부장관은 법 제9조제4항의 규정에 의하여 불임수술을 행할 의사를 지정하고자 할 때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의사중에서 하여야 한다. 1. 산부인과 전문의사 2. 비뇨기과 전문의사 3. 외과 전문의사 4. 기타 일정한 기간 불임수술에 관한 교육을 받은 의사

주25) 모자보건법상의 인공임신중절수술 허용 조항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지만(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 제2호), 불임수술 명령 조항은 1999. 2. 8. 법률 제5859호로 개정된 구 모자보건법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주26) 낙태죄는 1953. 9. 18. 제정 형법 제269조에 규정된 이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주27) 국립소록도병원은 다음과 같이 명칭이 변경되어 왔으나, 이하에서는 해당 기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소록도병원’으로 통칭하기로 한다. [1916. 2. 24. 소록도 자혜의원 / 1934. 10. 1. 소록도 갱생원 / 1949. 5. 6. 중앙나요양소 / 1951. 9. 29. 갱생원 / 1957. 12. 14. 소록도 갱생원 / 1960. 7. 1. 국립소록도병원 / 1968. 11. 8. 국립나병원 / 1982. 12. 31. 국립소록도병원]

주28) 남성 환자들에 대한 정관절제수술을 일제강점기에 ‘단종법’, ‘단종술’, ‘단종수술’ 등으로 표현한 이래 관용적인 표현으로 굳어져 공식적인 예규나 보고서 등에도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이므로, 이 항 인정사실에서는 ‘단종수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주29) 소외 22 원장은 1936. 4. 1. 총독부의 재가를 얻어 “1. 호적상의 부부인자. 2.호적상의 부부가 아닐지라도 정식 결혼식을 올려 사실상 부부인 자. 3. 일찍 수용 전부터 내연관계에 있는 자로 일반이 인정한 자. 4. 내연관계에 있는 자로서 확연하게 인정받지 못한 때에는 각 병사지구에 있는 사장 기타 유력환자 수명의 증명을 받은 자 5. 그 환자로부터 특히 동거를 원한 자에 대하여는 각 병사 지구에 있는 사장 기타 유력 환자의 인정을 받는 자로서 일반인으로부터 이의 없는 자”에 대하여 “6. 이상의 각 항을 구비한 자라도 그대로 동거시키면 격리수용의 의의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니, 미리 본인의 신고에 의하여 단종법(단종법:정관수술)을 실시한 뒤 동거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여 부부동거를 허가하였다.

주30) 일제강점기에 만든 감금실이 현재까지도 소록도에 유적으로 남아 있다.

주31) 일제강점기 소외 23이라는 한센인이 소록도의 감금실에서 출감하면서 단종수술을 받고 지었다는 “단종대(단종대)”라는 시 등에서 보듯, 단종수술이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 내 국부에 닿을 때... /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 오늘도 통곡한다. 』

주32) 1949. 5.경 제정된 23개항 ‘요양소 수용환자 준수사항’ 중 일부 13. 남환자로서 여병사에, 여환자로서 남병사에 출입을 요할 때는 사전에 자치위원장에게 신고하여 허가를 받아야 한다. 22. 부부생활을 희망하는 자는 당자의 응낙으로 거세수술자에 차를 인정한다. 25. 위 각항에 위반하는 자는 상당한 처벌을 한다.

주33) 1977. 8. 19. 제정된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보건사회부령 제570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제16조(제3종 전염병 격리수용 환자의 범위) 법 제29조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제3종 전염병환자중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할 자의 범위는 다음 각호와 같다. 1. 자가치료를 함으로써 타인에게 전염시킬 우려가 있다고 서울특별시장·부산시장 또는 시장·군수가 인정한 자 2. 부랑·걸식등으로 타인에게 전염시킬 우려가 있어 전염병 예방상 격리 수용하여 치료함이 필요하다고 서울특별시장·부산시장 또는 시장·군수가 인정한 자

주34) 보건사회부 보건국장, 소록도병원 등 5개 국립병원장, 국내의 나병권위자들로 구성되었다.

주35) 그 당시 지시사항 중 일부 ② 환자 자녀의 격리 : 각 국립병원에서 환자와 동거하고 있는 환자 자녀는 즉시 격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된 국립, 사립보육 시설에 수용보호함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여의치 못할 때에는 각 병원장이 그 어린이를 돌려보내는 방법을 강구 실천할 것이며, 이는 1964년 말까지 완료되어야 한다. ④ 가족계획의 철저 : 이 문제는 누차 지시한 바 있으나, 아직도 만족한 상태가 아니니 특히 다음 사항을 철저히 이행하여야 한다. - 임신가능한 자에 대해서는 이 사건 단종수술을 적극 장려하여 가족계획에 완벽을 기할 것 - 임신가능한 자를 항상 조사 파악하여 출산을 최대한 억제토록 할 것

주36) 1952년 소록도 연보 : ‘1937년부터 산아제한(정계수술) 조건 하에 동거를 허락하여 왔으나 해방 후 혼란기에 환자간의 자유결혼이 성행되어 정계수술이 전폐되어 3년간에 걸쳐 매월 8명의 출생율를 보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태는 실로 격리수용의 의의를 망각하고 나근절책에 배치되는 것이므로 1951년 10월에 미시행 동거자 및 신규 동거자에게 일제히 정계수술을 시행함으로써 현재에는 출산아동이 전무하게 되었다’ 1958년도 소록도 연보: ‘본원 환자는 독신요양생활을 원칙적으로 하며 남녀별거를 취하여 왔으나 해방 후 자유성생활이 성행됨에 따라 상당 수의 출생아 증가를 보게 되어 국민보건상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미감아 수용에 국가 재정 염출이 극난함에 감하여 당면과제로서 완전 격리수용과 산아제한 및 임신제한을 하고 있다’ ※ 소록도 연보에는 ‘미감아’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계속 등장하는데, 이는 아직 한센병에 감염되지 아니한 어린이를 뜻하는 것으로서, 한센병이 자식들에게 전이될 수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1978년도 소록도 연보 : ‘가임환자가 동거를 원할 때에는 불임시술 후 동거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며, 다만 양성환자에 대하여는 부부동거를 금하고 있다’ 1990년도 소록보 연보 : ‘가임환자가 동거를 원할 때에는 불임시술후 동거하도록 하고 있다.’

주37)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갑 제1호증의 1,2),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소록도80년사’(갑 제2호증의 1 내지 3, 을 제1호증), 대한나관리협회에서 발간한 ‘한국나병사’(갑 제3호증의 1 내지 3, 을 제2호증) 등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편 소록도병원에는 1995년 무렵까지도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낙태한 태아의 표본이 병 속 포르말린 액에 담겨 진열되어 있었다.

주38) 소록도병원에서는 1949. 의학강습소를 개설하고 환자 중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2년 간에 걸쳐 의학적 기초지식과 임상적 기술을 습득시켜 의료보조원으로 활용하였다. 보건사회부의 지원 아래 전국 나요양소의 환자들도 소록도병원의 의료강습소 교육을 받았다. 1949.부터 1956.까지 총 142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41명은 소록도병원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101명은 전국 각 요양소에서 의료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1962.경 음성한센인 정착사업이 시행된 이후에는 소록도병원에서 의학강습소가 운영되지 않았고 의료조무원 교육만 실시되었다. 의료보조원 중 비교적 알려진 사람은 소외 2, 소외 16, 소외 13, 소외 19 등이다.

주39) 사람의 간이 한센병 치료에 특효라고 하여 한센인들이 어린이를 잡아 먹는다는 풍문

주40) 심지어 1991.경에 이르러서도, 1982년 8월에 발생한 대구 어린이 실종사건과 관련하여 한센인 정착촌인 칠곡마을 지하실에 매장되어 있다는 익명의 제보 및 이를 수사하고 취재하는 과정에서의 한센인들과의 갈등이 많은 언론사를 통해 여과 없이 대서특필되어 한센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주41) 갑 제1호증의 1, 2

주42) 1963년 소록도 연보 : 전체 3,044명 중 무학자 1,105명, 초등학교 졸업자 1,533명, 중학교 졸업자 306명, 고등학교 졸업자 88명, 대학 졸업자 8명(무학 및 초등학교 졸업자가 87%), 입원 전 직업은 농업이 861명, 상업 30명, 수산업 286명, 광업 5명, 기타 225명, 무직 1,633명(무직 53%, 농업 종사자가 28%), 1978년 소록도 연보 : 3,040명 중 무학자 1,105명, 초등학교 졸업자 1,533명, 중학교 졸업자 306명, 고등학교 졸업자 88명, 대학 졸업자 8명(무학 및 초등학교 졸업자가 87%), 입원 전 직업은 농업이 861명, 상업 30명, 수산업 286명, 광업 5명, 기타 225명, 무직 1,633명(무직 53%, 농업, 수산업 종사자가 37%), 1990년 소록도 연보 : 전체 1,484명 중 무학자 996명, 국문해독자 173명, 초등학교 졸업자 228명, 중학교 졸업자 70명, 고등학교 졸업자 15명, 대학 졸업자 2명(무학 및 초등학교 졸업자가 94%), 입원 전 직업은 농업이 640명, 상업 109명, 수산업 14명, 공업 24명, 공무원 4명, 무직 693명(무직 47%, 농업, 수산업 종사자가 44%)

주43) 한화로 8,000만 원 내지 1억 5,000만 원 가량이다.

주44) 앞의 인정사실의 1952년 소록도 연보나 1958년 소록도 연보 등을 보면, 병원 내에서 임신하는 경우를 ‘격리수용의 의의를 망각’, ‘나근절책에 배치’, ‘해방 후 자유 성생활이 성행’, ‘국민보건상 악영향’, ‘미감아 수용에 국가 재정 염출이 극난함’ 등으로 기재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45) 한센인피해사건법과 유사한 구조로 진상규명과 함께 위로금 지원만을 규정한 법으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10143호, 2010. 3. 22. 제정)이 있다. 그러나 이 법은 근본적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경우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서, 불법행위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피해배상·보상 등을 배제하고 위로금의 지급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도 충분히 정당성을 갖는다.

주46) 약 8,000만 원 내지 1억 원 가량

주47) 2013. 1. 7. 현재 한국 한센 청구인 595명 중 571명(미결정자 24명), 대만 낙생원 거주 한센인 24명이 보상을 받았다. 한편 대만에서도 2008. 8. 13. ‘한센병병환 인권보장 및 보상조례’를 제정하여 한센인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의료, 설비지원 외에 1945. 이후 입소기간에 대응하여 강제격리 기간에 따라 1년 단위 대만 화폐로 8만 원 ~ 20만 원(대략 300만 원 내지 8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다(갑 제10호증의 1, 2).

주48) 한센인피해사건법 제9조 제1항에서는 ‘피해자로 결정된 한센인에 대하여 의료지원금등을 지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시행령 제8조에서는 ‘생활지원금은 예산의 범위 내에서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매월 지급할 수 있다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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