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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희,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2조 등 위헌소원 등", 결정해설집 10집, 헌법재판소, 2011, p.
[결정해설 (결정해설집10집)]

- 친일재산 국가귀속 사건 -

(헌재 2011. 3. 31. 2008헌바141 , 2009헌바14 ㆍ19ㆍ 36ㆍ247ㆍ352, 2010헌바91 (병합), 판례집 23-1상, 276)

이 황 희*1)

【판시사항】

1.‘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를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대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친일재산귀속법’이라 한다) 제2조 제1호 가목(2006. 9. 22. 법률 제7975호로 개정된 것, 이하 ‘이 사건 정의조항’이라 한다)이 법률의 명확성원칙에 반하는지 여부(소극)

2. 러ㆍ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하 ‘친일재산’이라 한다)으로 추정하는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2호 후문(2005. 12. 29. 법률 제7769호로 제정된 것, 이하 ‘이 사건 추정조항’이라 한다)이 재판청구권을 침해하고 적법절차원칙에 반하는지 여부(소극)

3. 친일재산을 그 취득ㆍ증여 등 원인행위시에 국가의 소유로 하도록 규정한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 본문(2005. 12. 29. 법률 제7769호로 제정된 것, 이하 ‘이 사건 귀속조항’이라 한다)이 진정소급입법으로서 헌법 제13조 제2항에 반하는지 여부(소극)

4. 이 사건 귀속조항이 재산권을 침해하는지 여부(소극)

5. 이 사건 귀속조항이 평등의 원칙에 반하는지 여부(소극)

6. 이 사건 귀속조항이 연좌제금지원칙에 반하는지 여부(소극)

【심판대상조문】

이 사건 심판대상은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1호 가목, 제2호 후문, 제3조 제1항 본문(이하 위 조항들을 모두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라 한다)의 위헌여부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대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하 “친일반민족행위자”라 한다)”라 함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

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제9호에 규정된 참의에는 찬의와 부찬의를 포함한다). 다만,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작위(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으로 제4조의 규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결정한 자는 예외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2.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이하 “친일재산”이라 한다)”이라 함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를 받은 재산을 말한다. 이 경우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은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한다.

제3조(친일재산의 국가귀속 등) ① 친일재산(국제협약 또는 협정 등에 의하여 외국 대사관이나 군대가 사용·점유 또는 관리하고 있는 친일재산 및 친일재산 중 국가가 사용하거나 점유 또는 관리하고 있는 재산도 포함한다)은 그 취득·증여 등 원인행위시에 이를 국가의 소유로 한다. 그러나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

【사건의 개요】

1. 심판청구에 이르게 된 경위

(가) 망 민○휘(1852. 5. 15. ~ 1935. 12. 31. 이하 ‘민○휘’라고 한다)는 한일합병에 기여한 공으로 일본국으로부터 1910. 10. 7.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11. 1. 13. 은사공채 50,000원을 지급받았으며, 1912. 12. 7. 종4위에 서위된 후 1919. 12. 27. 정4위, 1928.경 종3위로 각 승급되었고, 사망 즈음 정3위로 추서되었다.

민○휘는 1918. 6. 20. 식민지 경제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3. 5. 21. 황국신민화 교육을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총독의 자문기구로 설치된 조선교육회의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0. 3.경 일선(日鮮)융화철저 등을 목적으로 조선실업구락부를 창립한 후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1921. 1.경부터 일선융화단체인 대정친목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민○휘는 위와 같이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으로 1928. 11. 16. 쇼와대례기념장을, 1928. 11. 22. 은배 1개를, 1935. 10. 1. 은배 1조를, 사망 즈음 금배 1개를 각 수여받았다.

(나) 민○휘가 사정받은 토지들은 일련의 토지 취득경위 및 소유권 변동 경위를 거쳐 청구인 민○기 외 19명에게 소유권이전등기가 경료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이 사건 조사위원회’라고 한다)는 위 토지들이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1호에서 정한 친일재산인지 여부에 관한 조사를 거쳐, 2007. 11. 22. 민○휘가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1호 가목에서 정한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대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하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한다)에 해당하고, 위 토지들은 같은 조 제2호에서 정한 친일재산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에 의해 그 법 시행일인 2005. 12. 29.자로 취득원인행위시에 소급하여 위 토지들이 국가로 귀속된다는 결정을 하였다.

(다) 이에 위 청구인들은 이 사건 조사위원회를 상대로 위 국가귀속결정의 취소를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으며(서울행정법원 2008구합9034), 위 소송

계속중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내지 제5조가 소급입법으로서 헌법 제13조 제3항, 제23조 제1항에 위반되는 등 위헌적인 법률이라는 이유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서울행정법원 2008아1084)을 하였으나, 2008. 10. 14. 기각되자, 같은 해 11. 19.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 이상은 2008헌바141 사건의 경위인바, 이 경위상 드러난 쟁점은 그 외 6건의 나머지 병합사건의 쟁점과 유사하므로 나머지 사건의 경위는 생략한다)

2.청구인들의 주장, 법원의 위헌제청신청 기각이유 및 이해관계인의 의견 요지

가. 청구인들의 주장요지

(1)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이 사건 조사위원회가 친일재산으로 결정한 재산을 그 취득·증여 등의 원인행위시에 국가의 소유로 귀속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소유자들로부터 소급하여 재산권을 박탈하는 것이므로 헌법 제13조 제2항에 위반된다.

(2)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함으로써 재산권을 침해한다. 즉, 위 법률조항들은 친일파 후손들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 ‘정의’, ‘민족의 정기’ 등을 구현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과잉금지원칙상 수단의 적절성 원칙에 반한다. 민족의 정기나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이 약 60여 년간 소유하고 있던 토지소유권을 환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친일행위를 직접 한 사람이 아닌 그 후손들에까지 불이익을 가하고 있고 그 불이익의 범위가 과도하며, 이 사건 추정조항을 통하여 재산을 환수당하는 개인에게 입증책임을 전가하여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고, 러·일전쟁 이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단지 토지사정부에 늦게 기재하여 러·일전쟁 이후에 소유권을 취득하게 된 것 같은 외양을 갖춘 토지까지 친일재산으로 보고 있으므로, 피해의 최소성 원칙에도 위배된다. 또한, 친일재산귀속법에 의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공익보다 침해되는 사익이 더 중대하여 법익의

균형성에 위배된다.

나아가 친일재산귀속법은 소급입법을 통하여 소유권을 박탈하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으므로, 헌법 제23조에서 정한 재산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산권은 모든 기본권의 기초를 이루는 기본권이므로 위와 같은 재산권의 침해로 인해 헌법 제10조에서 정한 행복추구권 및 제34조 제1항에서 정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도 침해된다.

(3) 이 사건 정의조항에서 정하고 있는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자’라는 요건은 불명확한 규정이어서 죄형법정주의원칙에서 비롯되는 법률의 명확성 원칙에도 위배된다.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불특정 다수인을 규율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만을 규율하고 있는바 이는 처분적 법률에 해당하므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배되고, 또한 구체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정기간 동안 취득한 재산을 모두 친일재산으로 추정하므로 이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합리적인 이유 없이 당해 재산의 소유자들을 차별하는 것이어서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반된다. 선조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한다는 이유만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박탈당하는 것은, 사회적 특수계급을 인정하는 것을 금지하고 훈장 등 영전의 효력을 이를 받은 자 이외에까지 인정하는 것을 금지한 헌법 제11조 제2항, 제3항 및 연좌제를 금지한 헌법 제13조 제3항에 위반된다.

(4)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로부터 토지의 소유권을 박탈하여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은 형법상 재산형인 몰수와 유사하므로 헌법 제12조 제1항의 ‘처벌’에 해당하지만,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 따르면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몰수형이 집행되는 것이므로 헌법 제12조 제1항 후문의 적법절차원칙에 위반되고 헌법 제27조 제1항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며, 특히 이 사건 추정조항은 헌법상 무죄추정원칙에도 반한다. 또한, 1948.경 이미 친일재산귀속법과 같은 취지의 법률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시행된 바 있으므로, 친일재산귀속법을 다시 제정하여 시행하는 것은 이중처벌로서 허용되지 않는다.

나. 법원의 위헌제청신청 기각이유 요지

(1) 일본제국주의 재산과 부적자(附敵者)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을 규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제3장, 해방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 가능성을 규정한 제헌헌법 제10장 부칙 제101조, 현행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시한 현행 헌법의 전문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이들 규정은 과거 일제강점기동안 일제에 협력하여 우리민족을 부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친일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권 등을 보호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민족정기를 회복하여 국가 이념을 공고히 하려는 국민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단지 친일재산을 소급하여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사정만으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 재산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한편, 예외적으로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거나 기존의 법을 변경하여야 할 공익적 필요는 중대한 반면 개인의 신뢰를 보호하여야 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 등 진정소급입법이라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경우가 존재하는바, 친일반민족행위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중대한 반역행위이므로 이를 통해 취득한 재산을 환수할 공익적 필요성이 중대하고, 나아가 그러한 환수가 헌법이념과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인 반면, 그로 인한 사익의 침해는 미비하므로 개인의 신뢰이익을 관철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박탈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13조 제2항에 위반되지 아니한다.

(2)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의 이념에 부합하므로 입법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국권이 침탈되기 시작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만을 대상으로 하는 점, 그러한 재산의 취득과 관련하여 추정 규정을 활용하고 있기는 하나 이는 입증책임의 분담에 관한 것일 뿐 친일재산의 내용과 범위에 실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후손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내력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있고 취득에 관한 근거자료들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점 등에 비추어 수단의 적절성도 인정된다.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진상규명법’이라고 한다)에서 정한 여러 유형의 친일반민족 행위 중에서 사안이 중대하고 범위가 명확한 네 가지의 행위를 원칙적인 적용대상으로 하고 다른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자는 친일의 정도가 지극히 중대하다고 인정한 자로 한정하고 있고 거래로 인한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는 규정을 마련함으로써 침해의 최소성에도 위반되지 않고, 친일재산 환수의 공익적 필요성이 중대한 반면 환수 대상은 친일재산에 국한되고 헌법 이념상 예상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법익의 균형성 원칙에도 위반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헌법 제37조 제2항의 과잉금지원칙에도 반하지 않는다.

(3)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재산환수의 대상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또한 위 법률조항들은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친일재산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처분적 법률에 해당되지 않는다. 평등의 원칙 위반과 관련하여 엄격한 심사기준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과잉금지원칙의 네 가지 원칙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헌법 제11조 제2항이 말하는 사회적 특수계급이란 귀족제도와 같은 봉건적 제도를 말하고, 동조 제3항은 영전의 세습제를 배제하는 것이므로, 헌법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친일재산을 환수하려는 이 사건 법률조항들과는 무관하다. 또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 정하고 있는 친일재산은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 그 자체이므로, 본래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 및 그 후손이 소유해서는 안 될 재산의 귀속을 국가로 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친일재산에 관하여 ‘친족의 행위와 본인 간에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헌법 제13조 제3항의 연좌제 금지에 위반되지 않는다.

(4)조사위원회의 결정에 의한 재산의 국가귀속은 행정처분일 뿐 형벌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위 결정이 형벌임을 전제로 한 적법절차 위배 주장은 이유없고, 그와 같은 조사위원회의 결정에 대하여 행정심판 및 행정소송 등을 허용하여 법관에 의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헌법 제27조 제1항에도 위반되지 않는다. 이 사건 추정조항의

후문은 단순한 입증책임 전환에 불과하여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것’을 정한 헌법 전문의 내용에 비추어 입법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친일반민족행위를 대가로 취득한 재산권을 제한하는 입법을 제정할 의무가 있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재산귀속법이 이중처벌로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

다. 이해관계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의견요지

(1) 제헌헌법의 전문 및 부칙 제101조를 비롯하여 역대 개정헌법에서3·1운동의 독립정신 계승을 규정한 바 있고, 현행 헌법의 전문 역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무력에 의한 일제강점은 불법이고, 따라서 친일행위에 대한 과거청산은 헌법적인 의무로서 실현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친일재산은 민족에 대한 반역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강령을 통해 국가로의 몰수를 선언한 이상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재산권의 범위에 포함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친일재산은 확정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부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는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공익적 중대성은 친일재산의 신뢰보호라는 사익보다 우월하므로 이러한 소급입법을 위헌으로 볼 수 없다. 설혹 위 법률조항을 진정소급입법으로 보더라도 친일재산은 일제패망시 당연히 환수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신뢰보호의 요청에 우선하는 일제청산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진정소급입법이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2)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입법목적이 정당하고,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은 그러한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대상을 진상규명법에서 정한 자 중에서도 친일행적이 명백한 네 가지 경우 및 친일의 정도가 지극히 중대하다고

위원회가 결정한 경우로 한정하고 있고, 위 네 가지 경우에 해당되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은 예외로 하고 있으며, 재산거래로 인하여 발생한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피해의 최소성 원칙도 준수하고 있고, 앞서 본 대로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 추구하는 공익이 친일재산에 대한 신뢰하는 사익보다 크므로 법익의 균형성 원칙도 충족한다. 나아가 이러한 국가귀속에 대하여 보상이 없다 하여 재산권의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하였다고 볼 수도 없다.

(3)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상속·증여받았다는 ‘일반적 추상적 요건’을 충족한 경우에만 적용하는 것이므로 처분적 법률로 보기 어렵다.

평등의 원칙 위반과 관련하여 엄격한 심사기준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과잉금지원칙의 네 가지 원칙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친일재산을 중심으로 파악하여 그 재산의 귀속에 관련한 법적 이해관계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므로, 이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대우하는 것이라거나 영전의 효력에 관한 헌법 제11조 제2항 및 제3항에 반하지 않고, 과거청산을 위하여 친일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어야 함을 규율하고 있을 뿐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별도의 불이익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므로 연좌제를 금지한 헌법 제13조 제3항에도 위반되지 않는다.

(4) 친일재산의 규명 문제는 이미 1세기가 경과된 일이므로 국가가 입증자료를 수집하는 것은 힘든 반면, 친일반민족행위자 및 그 후손이 관련 자료를 보유 내지 수집하는 것은 용이할 것이므로, 추정규정을 통한 입증책임의 전환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또한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 의한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은 몰수라 볼 수 없고, 재산귀속법 제21조, 제22조에 따라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행정심판 및 행정소송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헌법 제27조 제1항에 위반된다고 볼 수도 없다.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 이중처벌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법원의 위헌제청신청기각 이유 요지 중 해당 부분의 내용과 대체로 같다.

【결정요지】

1. 이 사건 정의조항 중 반민규명법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의 행위를 한 자’로 규정한 부분이 불명확하다고 할 수 없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부분은 ‘일제 강점하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에 의욕적이고 능동적으로 관여한 자’라는 뜻이므로 그 의미를 넉넉히 파악할 수 있다.

2.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 해방 이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친일재산 여부를 국가측이 일일이 입증하는 것은 곤란한 반면, 일반적으로 재산의 취득자측은 취득내역을 잘 알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 또한 이 사건 추정조항이 친일반민족행위자측에 전적으로 입증책임을 전가한 것도 아니고, 행정소송을 통해 추정을 번복할 수 있는 방도도 마련되어 있으며, 가사 처분청 또는 법원이 이러한 추정의 번복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는 처분청 또는 법원이 추정조항의 취지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 결과이지 추정조항을 활용한 입법적 재량이 일탈ㆍ남용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 사건 추정조항이 재판청구권을 침해한다거나 적법절차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

3. 이 사건 귀속조항은 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지만, 진정소급입법이라 할지라도 예외적으로 국민이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경우와 같이 소급입법이 정당화되는 경우에는 허용될 수 있다. 친일재산의 취득 경위에 내포된 민족배반적 성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선언한 헌법 전문 등에 비추어 친일반민족행위자측으로서는 친일재산의 소급적 박탈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친일재산 환수 문제는 그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역사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공동체적 과업이므로 이러한 소급입법의 합헌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진정소급입법이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는 충분히 불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 귀속조항은 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나 헌법 제13조 제2항에 반하지 않는다.

4. 이 사건 귀속조항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ㆍ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입법목적이 정당하고, 민법 등 기존의 재산법 체계에 의존하는 방법만으로는 친일재산의 처리에 난항을 겪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사건 귀속조항은 위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된다. 위 조항은 반민규명법이 정한 여러 유형의 친일반민족행위 중에서 사안이 중대하고 범위가 명백한 네 가지 행위를 한 자의 친일재산으로 귀속대상을 한정하고 있고,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은 예외로 인정될 수 있도록 규정해 두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측은 그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여 얼마든지 국가귀속을 막을 수 있고, 선의의 제3자에 대한 보호 규정도 마련되어 있으므로 이 사건 귀속조항은 피해의 최소성원칙에 반하지 않고, 과거사 청산의 정당성과 진정한 사회통합의 가치 등을 고려할 때 법익의 균형성원칙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이 사건 귀속조항은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5. 친일재산은 이를 보유하도록 보장하는 것 자체가 정의 관념에 반하고, 귀속대상을 사안이 중대하고 범위가 명백한 친일재산으로 한정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귀속조항이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

6. 이 사건 귀속조항이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의 재산 중 그 후손 자신의 경제적 활동으로 취득하게 된 재산이라든가 친일재산 이외의 상속재산 등을 단지 그 선조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은 아니므로, 연좌제금지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

재판관 김종대의 별개의견

헌법재판소가 헌법 제13조 제2항에 대하여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도 허용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새로운 헌법적 내용을 형성해 내는 것이므로, 타당한 헌법해석이라고 볼 수 없고 권력분립원칙에도 반한다.

우리 헌법의 정신과 법통, 그 제정 배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친일재산은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과 그 극복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헌법에 규정된 ‘재산권’ 조항으로써 보호될 수는 없다. 다만,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라 하더라도 친일재산의 선별과 국가귀속의 절차 등에 관하여 헌법적인 한계를 준수해야 하나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문제가 없다.

재판관 목영준의 일부별개의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것을 규정한 현행 헌법의 전문, 국가에 대한 반역죄 등을 규정한 대한제국의 형법대전 등을 살펴 볼 때, 친일재산에는 취득 당시 반사회적 가치 내지 범죄성이 내재하고 있었고, 과거사 청산절차를 밟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그 반사회성 및 범죄성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보이므로,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은 현재 진행 중인 사실관계 또는 법률관계에 작용하는 부진정소급입법이다.

재판관 이동흡, 재판관 목영준의 일부한정위헌의견

우리의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제도는 일제에 의해 1912년 토지사정부 등이 작성되면서 이루어졌으므로, 사정되기 이전에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하게 취득하였던 토지라고 하더라도 위 시기에 취득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 결과 이 사건 추정조항에 따라 친일재산으로 추정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위 추정을 번복하려면, 해당 토지를 1904년 이전에 실제로 취득하였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나, 토지사정부가 작성되기 이전에는 토지소유권에 관한 대세적 공시방법이 마련되지 아니하였고, 100여년 전의 사실관계를 입증하기도 어려우므로, 이 사건 추정조항에 의해 친일재산과 무관한 재산까지도 박탈당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사건 추정조항 중 ‘취득’에 ‘사정에 의한 취득’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한 헌법에 위반된다.

재판관 이강국, 재판관 조대현의 일부위헌의견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단죄하고 친일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작업은 헌법에 합치하는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 사건 귀속조항은 진정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의 박탈에 해당된다. 그런데 헌법 제13조 제2항은 4ㆍ19민주혁명과 5ㆍ16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각종 소급입법에 의한 정치적ㆍ사회적 보복이 반복되어온 헌정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도입된 것으로서 예외를 두지 않는 절대적 금지명령이다. 따라서 이 사건 귀속조항은 별도의 헌법적 근거 없이 진정소급입법에 의해 재산권을 박탈하므로 헌법 제13조 제2항에 위반된다.

【해 설】

1. 식민지 과거사 청산의 사례들

가. 우리나라의 일제 과거사 청산 입법 개관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1941. 11. 28.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은 여러 독립운동 세력의 견해를 종합하여 민족국가 설립의 기본원칙으로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을 의미하는 삼균주의를 성문화한 건국강령을 제정하였다. 이 건국강령 제3장 중 인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제4항의 ㈅은 ‘적에 부화(附和)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건국강령을 반대한 자와 정신이 결핍한 자와 범죄판결을 받은 자는 선거권 피선거권이 없음’이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경제정책의 원칙을 규정한 제6항의 ㈁은 ‘적의 침략침점 혹은 시설한 관·공·사유 토지와 어업·광산(……) 등의 산업과 기지 토지 및 경제·정치(……)에 관한 일절 사유자본과 부적자(附敵者)의 일절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재산과 부적자의 재산은 몰수하여 국유로 함을 경제 정책의 8개 원칙 중 하나로

규정하였다.2)

(가)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이라 한다)은 제헌헌법 부칙 제101조에 근거하여 1948. 9. 7. 국회에서 통과되고(재석 141, 가 103, 부 6), 같은 해 9. 22. 대한민국 법률 제3호로 공포되었다. 반민법은 전문 32조로 구성되었는데, 그 골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라 한다)가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하여 특별검찰부에 송치하고, 특별검찰부의 공소로 특별재판부가 심판한다는 내용이며, 공소시효는 공포일로부터 2년으로 규정되었다.

(나) 주요 내용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하고(제1조),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하며(제2조), 일본치하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는 점(제3조) 및 습작한 자, 중추원부의장, 고문 또는 삼의되었던 자, 칙임관이상의 관리되었던 자,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

적이 현저한 자,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 개인으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는 점(제4조)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이상, 훈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는 점(단, 기술관은 제외함, 제5조)등을 규정하였다.

(다) 경과

특별재판부는 1949. 3. 28. 첫 공판기일이 열린 이후, 같은 해 8. 31.까지 총 41건의 재판을 하여 사형 1명(김덕기, 경시), 무기 1명(김태석, 중추원 참의 및 고등계형사), 징역형 13명, 공민권 정지 18명, 형 면제 2명, 무죄 6명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특별재판부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13명 중 이기용(자작, 일본귀족원 의원)은 징역 2년 6월 및 재산 1/2 몰수형, 이병길(이완용의 증손자로 작위를 습장, 중추원 참의)은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 및 임야 1/2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반민특위를 반대했던 의원들이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1950. 9. 22.에서 1949. 8. 31.까지로 단축하자는 개정안을 제안하였고 이는 그대로 통과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반민법은 전쟁 중인 1951. 2. 14. 법률 제176호로 폐지되었다. 반민법 폐지법률 부칙은 반민법에 의하여 공소계속 중인 사건은 폐지법률의 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보고, 폐지된 법률에 의한 판결은 폐지법률의 시행일로부터 그 선고의 효력을 상실한다고 규정하여, 위 특별재판부가 이미 선고한 판결은 모두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

(가) 17대 국회 이전

1993. 2. 9. 14대 국회에서 여·야 의원 15명이 ‘매국노후손 토지 환수 저

지를 위한 의원모임’을 결성하고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였으며, 1993. 5. 10. 국회의원 186명이 ‘매국노 재산 몰수를 위한 특별법 제정’에 서명하였다. 이후 1993. 12. 17. 국회특별법제정 법안소위 위원장 장기욱 외 170명은 ‘민족정통성 회복 특별법’을 제안하였지만, 14대 국회의 임기가 만료되어 위 법안은 폐기되었다.

또한, 2003년 국회의원 최용규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안된 상태에서 이를 바탕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고환수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하였고, 2004. 2. 18. 국회의원 최용규 외 54인의 서명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환수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하였으나,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지 못한 채 16대 국회의 임기 만료로 위 법안 역시 폐기되었다.

(나) 17대 국회

2004. 9. 17. 친일재산환수법의 제정을 위한 입법공청회를 개최하여 여러 의견을 수렴하고, 2005. 2. 24. 국회의원 최용규 외 169명의 여·야 의원이 서명함으로써 재산귀속법의 초안이 발의되었고, 2005. 4. 19. 법제사법위원회의 심사 및 2005. 6. 17. 공청회 개최 등의 절차를 거쳐 2005. 12. 8. 재산귀속법이 국회본회의의 재적의원 155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에 재산귀속법은 2005. 12. 29. 공포되고 시행되었다.

나. 해외의 과거사 청산 사례3)

(1) 독일

독일의 경우 패전 직후 사법적으로는 연합국의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국제법상 처음으로 반인류범죄를 규정하여, 나치의 침략전쟁, 유대인 및 민간인 학살의 책임자를 기소·처벌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탈나치화 숙청작업을 실시하였다. 일반 독일인들의 경우에는 전후 나치즘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흐름이 사회에 잔존하여 2차례의 사면법으로 나치의 주요 인물들을 사회나 직장에 복귀시키는 입법이 있기도 하였으나, 루드비히스부르크

(Ludwigsburg)에 ‘나치 범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사법조사와 연구를 위한 본부’(Zentrale Stelle für Landesjustizverwalting zur Aufklärung nationalsozialistischer Verbrechern)가 설치되어 홀로코스트에 대해 독일인이 스스로 반성하고 사법적으로 처벌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 전범 아이히만(Eichmann)에 대한 재판을 토대로 독일 내 자발적인 나치즘 청산작업이 본격화되었고, 1945년을 패전이 아닌 나치즘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990년까지 총 98,042건의 기소와 심리가 행해졌고, 6,48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12명이 사형, 162명이 종신형, 6,197명이 징역, 114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한편, 그 후 독일은 통일 이전까지 유대인 등 나치정권의 피해자에게 독일연방배상법에 따라 84조억 원을 배상하였으며, 2000년에는 약 570만명에 이르는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의 나치정권 기간 동안의 임금과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을 위하여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출연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라는 이름의 재단을 세우기도 하였다.

(2) 프랑스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지배를 당한 약 4년간의 독일강점기(1940. 6. 22.~ 1944. 8. 25.) 동안 드골을 중심으로 한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와 독일 점령 지역의 비시(Vichy)정부의 두 정부로 나누어졌다. 대독협력자에 대한 최초의 청산은 재판소가 아니라 거리에서 혹은 숲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른바 ‘약식처형’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초법적 숙청이라 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1948년과 1952년, 두 차례에 걸쳐 약식처형에 관한 통계를 발표한 바 있는데, 1만명 안팎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약식처형에 대해서는 그 감정적 처단에 몰두한 나머지 프랑스인들 역시 야만적인 과오로서 반성하고 있다는 시각과4)이러한 약식처형은 사법적 청산 기구들이 마련되기 이전 단계에서 유

일한 부역자 청산 방식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여타 국가들에 비해 사법적 청산의 강도가 약화되었다고 보며 이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시각이5)있다.

그 후 드골의 임시정부는 초법적 청산을 사법적 청산으로 이행하고자 하였는데, 그 방도로는 ① 죄형법정주의와 불소급의 원칙에 의해 기존 형벌조항(반역죄 등)을 새롭게 해석하여 대독협력자를 처벌하는 방안이 시도되었고 이는 일정부분 효과가 있었으나, 전례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대독협력 행위를 처벌하기에는 이렇게 해석에 의존하는 방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에 의견이 모아졌다. ② 다음 방안으로는 ‘1944. 8. 26.자 명령’을 통해 ‘프랑스 국내외에서 자발적으로 독일이나 그 동맹국들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었거나 국민통합 혹은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에 해를 끼친 죄’를 ‘국민부적격죄’(l'indignité nationale)라는 새로운 범죄로 규정하여 이를 대독협력행위에 소급적으로 적용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위 명령의 전문(前文) 격으로 삽입한 이유서에 따르면, 국민부적격죄는 “엄밀한 의미의 형법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정의(正義)의 영역에 속”하므로 “불소급원칙이 적용될 수 없”었다고 하여, 그 “명령이 소급적인 형태를 띠”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혔다.6)

또한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부역자 재판소(cour de justice)와 ‘국민부적격죄’ 유무만을 판단하는 공민재판부(chambre civique)를 별도로 설치하고, 대독협력의 최고 책임자들인 비시 정부의 주역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고등법원(Haute Cour de justice)을 설시하였다. 부역자 재판소 및 공민재판소의 재판결과 집계에 따르면, 123,613명이 이 두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았고, 부역자 재판소에서 판결받은 55,331명 가운데 6,763명(12.2%)은 사형을, 38,266명(69.2%)은 징역이나 금고형을, 3,578명은 주형으로 공민권 박탈형을 각각 선고받았고, 6,724명(12.2%)은 무죄로 풀려났다. 사형 선고를 받은 6,763명(궐석재판이 3,910명) 중 실제 처형된 사람은 767명이었다. 공민재판

부에서는 69,282명의 부역 혐의자 가운데 2/3가 유무기의 공민권 박탈형을 선고받았고, 3,184명은 ‘레지스탕스 활동’이 인정되어 그 형을 면제받았으며, 19,453명(28.1%)은 무죄석방되었다. 108명의 최고위급 부역자들의 죄상을 심리한 고등법원은 1945. 3.부터 1949. 7.까지 재판 전에 사망한 8명을 제외한 100명에 대하여 판결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 42명이 레지스탕스 활동을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았고, 18명이 사형선고를, 22명이 징역 및 금고형 선고를, 15명이 주형으로 공민권 박탈형을, 3명은 무죄를 각 선고받았다.

한편, 비시정부에 복무했던 공무원 150만명 중 2만 2천 내지 2만 8천명이 ‘행정적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징계를 받았고, 그 중 거의 절반이 해임, 파면 등의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또 지역별로 ‘부당이득몰수위원회’와 ‘업종간 연합숙청위원회’가 설치되어 대독협력 행위를 한 기업주들과 기업간부들을 상대로 ‘경제적 청산’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3) 중국

1945. 8.경 일제가 패망하자 중·일전쟁 중 일제에 협력한 중국인들, 특히 일제가 남경에 세운 괴뢰정부인 소위 남경정부의 관련자들이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친일반역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칭하였는데,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전후 1945. 12. 징치한간조례(懲治漢奸條例)를 제정하여 한간을 재판하였다. 국민당 정부의 한간 처벌은 만주국과 몽고자치정부 관련자, 남경정부군 지휘자로서 종전 후에 국민당 정부의 치안유지 임무를 수행한 자는 한간에서 제외하고, 기타 남경정부 관련자라도 주모급이 아닌 자 등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벌을 한다는 원칙에서 탄력적으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소급입법에 의한 처벌금지와 같은 서구식 법원칙이 통용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단지 전후 전범처리의 한 과정으로서 일제부역자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한간처벌은 1946.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14,932명이 처벌받았는데 그 중 396명이 사형, 979명이 종신형, 13,370명이 유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 이 사건 추정조항의 위헌여부

가. 문제의 소재

이 사건 추정조항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받은 재산을 친일재산으로 규정함에 있어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추정을 번복하기 위해서는 짧게는 60여년전, 길게는 100여년 전에 있었던 재산취득 경위를 당사자가 입증해야 하는바 그 입증이 사실상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사건 추정조항이 당사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인지 여부가 문제된다.

나. 법정의견

법정의견은, 입증책임규범에 관한 입법재량을 인정한 선례를 언급하면서(헌재 2007. 10. 25. 2005헌바96 , 판례집 19-2, 467, 477 참조), 이 사건 추정규정이 입법재량을 일탈하지 않았다고 판시하였다.

『(1) 이 사건 추정조항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한 반민족행위자가 그 당시 친일반민족행위로 축적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킴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사실상의 식민통치기구로서 만든 조직에 참여하거나 고등문관 이상의 고위 관직을 제공받는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은 그러한 행위를 통해 일제와 유착된 상태에 있었거나 그러한 상태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지위는 친일재산을 형성하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위와 같은 행적 중에 취득한 재산이 친일재산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인다. 그리고 러·일전쟁은 일제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도한 침략전쟁으로서 위 전쟁의 결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친일재산의 성립가능시점을 러·일전쟁의 개전시로 보는 입법

자의 인식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2)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라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해방 이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사이에 한국전쟁 등이 발발하여 부동산의 소유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멸실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사적 현실과 시대적 상황 등 우리 사회가 처해있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이 사건 추정조항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재산이 친일협력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인지 여부를 국가측이 일일이 입증하는 것은 심히 곤란한 상태인 반면, 일반적으로 재산의 취득자 또는 그 후손들은 재산취득과 관련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거나 그 재산의 취득내역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으므로, 재산 취득자 측에게 재산 취득 경위를 입증하도록 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

(3) 이와 같이 이 사건 추정조항의 현실적 필요성이 상당함에 반해, 위 추정조항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측이 부담하는 입증책임의 범위는 과도하다고 보기 어렵다.

우선, 위 추정조항에 따르면 당해 인물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한다는 사실 및 당해 재산이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 사건 조사위원회가 입증하여야 하므로, 위 추정조항이 친일반민족행위자측에 전적으로 입증책임을 전가하였다고 볼 수 없다.

다음으로, 앞서 본 바와 같이 위 추정조항은 국권침탈을 통하여 일제의 지배가 본격화되었다고 보이는 일정기간, 즉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재산으로 추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록 그와 같은 추정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친일반민족행위자측은 그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여 언제든지 위 추정을 번복시킬 수 있다. 결국 규범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위 추정이 친일재산의 내용과 범위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종국적이고 비가역적인 역할을 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4) 나아가, 실무적으로 제반 헌법적 가치를 조화롭게 구현하면서 위 추정

조항을 운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실제로도 이 사건 조사위원회는 이 사건 추정조항의 적용대상을 합리적인 범위로 제한하여 적용하고 있다고 보이므로 이러한 실무적 운영을 통해 위 추정조항이 과도한 범위로 적용되어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이를테면, 이 사건 조사위원회는 지방 유지로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자가 그 임명 이전에 도참사, 군참사 등을 역임하였다 하더라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기 전의 직위에서 취득한 재산은 (비록 친일행위의 대가로 볼만한 사정이 충분하다 할지라도) 추정조항의 적용범위에서 제외하였고, 관료에서 중추원 참의로 된 자의 경우에도 그 임명 이전에 하급 직위에 있을 당시 취득한 재산을 추정조항의 적용범위에서 제외하였다. 이러한 결과, 일응 이 사건 추정조항에 따라 친일재산에 해당되는 외관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면밀한 조사를 거쳐 친일의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던 상당한 수의 사례에서 이 사건 조사위원회의 조사개시결정은 취소되었다(2010. 3. 5. 현재 조사개시결정이 내려진 총 5,572건 중 조사가 진행 중인 사건을 제외할 때 국가귀속결정 또는 친일재산확인결정이 내려진 사건이 2,078건, 조사개시결정이 취소된 사건이 2,818건이다). 이처럼 이 사건 추정조항의 실무적인 운용례는 위 추정조항이 이 사건 조사위원회의 합리적인 해석에 따라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 설령 이 사건 조사위원회에서 추정이 번복되지 않아 그 재산이 국가로 귀속되는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는 행정소송을 통한 구제의 방도가 마련되어 있으므로 사법적 교정의 여지 또한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 가사 처분청 또는 법원이 이러한 추정의 번복을 쉽게 인정하지 않아서 위 추정이 사실상의 간주와 같이 기능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는 입법자가 단지 ‘추정’의 법률효과만을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률을 집행하는 처분청 또는 이를 심사하는 법원이 그와 같은 입법취지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추정조항을 활용한 입법적 재량이 일탈·남용되었다거나 그 법률이 위헌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입법권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아닐 수 없다. 무릇 법률의 집행에 오류가 있다고 하여 그 법률의 제정이 위헌이라고 보는 것은 헌법이 정한 권력분립원리

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사건 추정조항이 사실상 간주조항으로 기능하므로 위헌이라는 주장은 해당 법률의 구체적인 집행에 오류가 있을 때마다 그 법률을 위헌으로 선언하라는 주장과 같으므로 수긍할 수 없다.

(6) 나치 등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겪었던 다수 국가들이 외세의 지배를 극복한 이후 행하였던 과거사 청산에 관한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러 입법례들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때 그 재산이 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되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이를 몰수할 수 있도록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통하여 반민족행위로 축적된 재산 내지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은 결코 보호되지 않는다는 사회적 정의 관념을 구현하였고, 나아가 설령 그들의 일부 재산이 스스로의 경제적 성과를 통해 손수 획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배반했던 공동체가 이룩한 국가질서 안에서는 그와 같은 경제적 이익의 향유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강력한 경고를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 사건 추정조항은 비록 추정의 형식을 통해 입증책임의 일정부분을 재산소유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추정을 번복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보장함으로써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에 한정하여 국가귀속을 도모하고 있으므로, 위와 같이 반민족행위의 대가 여부를 불문하는 여타 국가들의 과거사 청산 입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절제되고 합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보인다.

(7) 나아가 과거사 청산의 정당성, 사회정의의 실현 및 진정한 사회통합의 가치 등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 추정조항이 추구하는 정의의 구현, 민족정기의 복원, 3·1운동의 헌법이념이라는 공익적 중대성은 위 추정조항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측이 부담하는 불이익에 비해 우월하다.』

다. 한정위헌의견

재판관 이동흡, 재판관 목영준은 이 사건 추정조항 중 ‘취득’에 ‘사정에 의한 취득’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한 헌법에 위반된다고 보았다.

즉, 우리의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제도는, 토지소유자는 조선토지조사령(1912. 8. 13. 제령 제2호) 제15조에 의해, 임야소유자는 조선임야조사령

(1918. 5. 1. 제령 제5호) 제8조에 의해 사정이 확정되면 해당 토지 내지 임야를 원시취득한 것으로 인정되었다(대법원 1965. 11. 30. 선고 64다1508; 대법원 1984. 1. 24. 선고 83다카1152 등). 그러므로 사정은 1912년 및 1918년 이후의 사정 당시 누가 토지 또는 임야를 소유하였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뿐이지, 그가 실제로 언제 토지 또는 임야를 취득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건 추정조항에 의해, 사정되기 이전에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하게 취득하였던 토지라고 하더라도 위 시기에 취득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 결과 이 사건 추정조항에 따라 친일재산으로 추정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위 추정을 번복하려면, 해당 토지를 1904년 이전에 실제로 취득하였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나, 토지사정부가 작성되기 이전에는 토지소유권에 관한 대세적 공시방법이 마련되지 아니하였고, 100여년 전의 사실관계를 입증하기도 어려우므로, 이 사건 추정조항에 의해 친일재산과 무관한 재산까지도 박탈당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사건 추정조항 중 ‘취득’에 ‘사정에 의한 취득’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한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라. 해설

(1) 법정의견이 선례로 언급하고 있는 사건은 채권자취소권에서 수익자에게 부여된 입증책임의 위헌여부에 관한 사건인바, 이러한 민사사건에서의 판시가 이 사건 심판과 같은 재산귀속 사건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형사법상 무죄추정 이외의 영역에서 입증책임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규율한 바 없으므로, 이 부분은 결국 1차적으로 입법자에게 형성의 권한이 있는 점(달리 설명하자면, 입증책임분배의 결정은 1차적으로 입법자의 몫일 터이나 헌법상 무죄추정원칙에 따라 적어도 형사재판에서는 입증책임에 관한 입법재량이 0으로 수축하게 될 것임), 우리 재판소는 보호감호나 과태료와 같이 당사자에게는 형벌과 유사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형벌이 아닌 이상 형벌과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형벌과 동일하게 규율되지 않는다고 보는 점,7)법정의견 역시 친일재산의 국가귀속

처분이 형사처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점,8)재산귀속처분이 사인 간의 분쟁에 비해 침익적 성격이 큰 점은 인정되나 이러한 사정은 입법재량의 범위를 상대적으로 축소함으로써 형평을 추구할 수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법정의견의 논리에 충분히 수긍할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2) 이 사건 추정조항 중 ‘취득’에 ‘사정에 의한 취득’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한정위헌의견의 논지에는 수긍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의 번복이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친일재산귀속의 역사적 의미에 비추어 충분한 공익적 필요성도 가지는 것이며, 특히 법정의견은 비교법적으로 볼 때 식민지 과거사 청산에 관련된 대다수의 법률들은 반민족행위에 대한 대가여부를 불문하고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박탈하였다는 점에 근거하여 이러한 추정번복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청구인들의 권리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듯 보인다.

3. 이 사건 귀속조항의 재산권 침해여부

가. 문제의 소재

우리 헌법 제13조 제2항은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친일재산이 우리 헌법상 재산권으로 보장된다면, 위 조항의 위반여부를 검토해야만 한다.

만약, 친일재산이 헌법상의 재산권으로 보장된다고 한다면, 이 사건 귀속조항이 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는 것인지, 부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는 것인지가 문제된다. 왜냐하면, 헌법 제13조 제2항의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금지는 진정소급입법에 한하여 적용된다고 해석되는 까닭이다.

나. 친일재산이 헌법상의 재산권으로 보장되는지 여부

(1) 법정의견

법정의견은, 친일재산이 비록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된 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그 당시의 재산법 관련 법제에 의하여 확정적으로 취득된 재산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제헌 헌법이 친일재산을 환수할 수 있

헌법적 근거인 부칙 제101조를 마련해 두었던 것은 친일재산의 환수가 헌법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 이러한 문제를 미리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재판관 김종대의 반대의견

그러나 재판관 김종대는 이러한 법정의견에 대한 반대의견을 개진하였다. 즉, 친일재산은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과 그 극복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헌법에 규정된 ‘재산권’ 조항으로써 보호될 수는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 사건 귀속조항은 합헌이라는 것이다.

이 의견은, 먼저 헌법 제13조 제2항에 대한 해석을 통해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금지의 예외를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헌법제정자들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을 금하고 있는 헌법 제13조 제2항을 규정하면서 어떠한 예외조항도 두지 않았다. 이는 위 헌법규정이 천명하고 있는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의 금지가 어떠한 예외적 상황도 없이 일률적이고 일의적으로 관철되어야 할 가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헌법 제13조 제2항을 해석하면서,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도 허용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헌법제정자들이 금지해 둔 내용을 번복하여 새로운 헌법적 내용을 형성해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 타당한 헌법 해석이라고 보기 힘들고, 권력분립의 원칙에 비추어 보아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다음으로, 친일재산의 헌법적 성격을 분석한 후, 이 사건 귀속조항의 합헌성을 논증하였다.

『친일재산이 우리 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재산권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친일재산에 대한 우리 헌법의 태도 혹은 친일재산과 우리 헌법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의 헌법은 일본 제국주의 체제에 대항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비로소 탄생하였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36년간의 식민지배 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치열하고 끈질긴

해방운동을 펼쳐왔다. 비록 해방의 과정에서 일제를 패망시킨 연합국의 역할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안위를 희생하며 투신했던 해방운동을 통해 표출되었던 민족적 역량과 그로 인한 성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점도 엄연한 사실이다.

(……) 따라서 우리 헌법의 법통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규정한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의 정신을 헌법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 헌법의 정신과 법통, 그 제정 배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친일이라는 반민족적 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친일재산은 우리 헌법에 의해 보호될 수 없다. 친일재산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자 그 개인에게는 유용한 ‘재산’으로서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 및 그 극복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헌법에 규정된 ‘재산권’ 조항으로써 보호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유지·강화를 위해 복무하고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힘썼던 민족의 선인들을 억압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을 봉쇄하고 지연시키려 했던 대가로 취득한 친일재산은 오히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해야 옳다.

(……) 따라서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 만큼 친일반민족성이 짙어 우리 헌법 하에서 재산으로서 보유되도록 허용되기 곤란한 재산이라면, 제헌 헌법 이후의 헌법이라 할지라도 국회는 친일재산의 박탈을 위한 특단의 입법을 할 수 있다 할 것이다. 』

다. 이 사건 귀속조항이 진정소급입법인지 여부

(1) 법정의견(진정소급입법으로 보는 견해)

법정의견은, 친일재산이 비록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된 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그 당시의 재산법 관련 법제에 의하여 확정적으로 취득된 재산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친일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행위는 진정소급입법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다.

(2) 재판관 목영준의 별개의견(부진정소급입법으로 보는 견해)

재판관 목영준은 이 사건 귀속조항을 부진정소급입법으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설시하였다.

『친일재산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였거나 그러한 상태에서 상속된 재산이므로, 비록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친일재산이 법적으로 취득되었다고 하더라도, 규범적인 측면에서 친일재산이 헌법상 재산권으로서 확정적으로 보장되어야 할지는 우리 헌법의 이념 및 재산 취득 당시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하여야 한다.

현행 헌법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되었다는 점 및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배격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헌법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임시정부의 이념에 반하여 우리 민족을 부정하고 식민통치에 협조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은 반사회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또한 1905. 4. 29. 반포된 대한제국의 형법대전은 국가에 대한 반역죄(제190조 내지 제192조), 내란죄(제195조), 외환죄 및 국권손괴죄(제200조) 등을 규정하였는바, 비록 위 형법대전은 1912. 3. 18. 조선총독부법령 제11호로 폐지되었으나 이는 일제의 부당한 지배에 의해 그 적용이 배제되었던 것일 뿐 위 법전의 규범적인 효력은 잠재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존속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이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행위는 위 반역죄 등에 해당될 수 있고 이에 대한 대가로 취득한 친일재산은 취득 원인에 중대한 범죄성이 결부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이처럼 친일재산에는 취득 당시 반사회적 가치 내지 범죄성이 내재하고 있었고, 다른 유사한 국가들과 달리 과거사 청산절차를 밟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그 반사회성 및 범죄성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으므로, 친일재산의 소유권 귀속에 관한 사실관계 또는 법률관계가 이미 종료되었다고 할 수 없다. 결국 일정한 조건 하에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을 규

정하고 있는 이 사건 귀속조항은 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사실관계 또는 법률관계에 작용하는 부진정소급입법이라고 할 것이다.』

라. 이 사건 귀속조항이 진정소급입법으로서 위헌인지 여부

(1) 법정의견(합헌론)

법정의견은, 이 사건 귀속조항을 진정소급입법으로 보면서, 진정소급입법이라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예외를 해석에 의해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소급입법은 새로운 입법으로 이미 종료된 사실관계 또는 법률관계에 작용하도록 하는 진정소급입법과 현재 진행중인 사실관계 또는 법률관계에 작용하도록 하는 부진정소급입법으로 나눌 수 있는바, 부진정소급입법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만 소급효를 요구하는 공익상의 사유와 신뢰보호의 요청 사이의 교량과정에서 신뢰보호의 관점이 입법자의 형성권에 제한을 가하게 되는 데 반하여, 진정소급입법은 개인의 신뢰보호와 법적 안정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국가원리에 의하여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헌법적으로 허용되지 아니하는 것이 원칙이나 예외적으로 국민이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거나, 법적 상태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웠거나 하여 보호할 만한 신뢰의 이익이 적은 경우와 소급입법에 의한 당사자의 손실이 없거나 아주 경미한 경우, 그리고 신뢰보호의 요청에 우선하는 심히 중대한 공익상의 사유가 소급입법을 정당화하는 경우에는 허용될 수 있다.』

그에 이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 사건 귀속조항은 진정소급입법이 허용될 수 있는 예외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가) 현행 헌법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3·1운동’의 정신은 우리나라 헌법의 연혁적ㆍ이념적 기초로서 헌법이나 법률해석에서의 해석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헌재 2001. 3. 21. 99헌마139 , 판례집 13-1, 676, 693 참조).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헌법 전문의 의미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희생을 바탕

으로 이룩된 것이라는 점(헌재 2005. 6. 30. 2004헌마859 , 판례집 17-1, 1016, 1020) 및 나아가 현행 헌법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배격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헌법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부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행위에 대하여 그 진상을 규명하고 그러한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공적으로 회수하는 등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겪었던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함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며 진정한 사회통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헌법적으로 부여된 임무라고 보아야 한다.

(나) 또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친일재산의 소급적 박탈은 일반적으로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던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하며, 그로 인해 발생되는 법적 신뢰의 침해는 우리 헌법의 이념 속에서 용인될 수 있다고 보인다.

첫째, 친일재산은 국제법규를 위반하여 우리 민족을 강압으로 제압하고 불법적인 통치를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하여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다. 따라서 친일반민족행위자측의 입장에서는 그 재산의 취득 경위에 내포된 민족배반적 성격에 비추어 향후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여 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를 건립하였을 때에는 그러한 친일재산을 보유하고 후대에 전수하여 자신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부귀를 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둘째, 앞서 본 바와 같이 친일재산을 환수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는 일은 제헌 헌법 이래 우리의 모든 헌법 속에서 면면히 계승된 가치이자 헌법적으로 부여되었던 당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권자이자 수범자로서 그 헌법 아래에서 살아온 모든 국민들에게 친일재산의 환수를 포함한 일제 식민지 역사의 청산 작업은 언제든지 현실로 성립될 수 있는 이른바 ‘잠재적 현실’이었다.

셋째,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을사조약에 동조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행

위로 인해 국권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친일행위로 인해 징용되거나 일본군위안부로 강제동원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민족 자결의 주장을 펼치며 일제의 부당한 통치에 항거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생명과 신체의 안전 등을 포함한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침해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역사적 상흔의 상당 부분들은 해방 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반민법에 따른 일제과거사 청산 작업도 실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역사적·법적으로 엄중히 평가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현재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즉, 일제과거사의 청산 문제, 그 가운데에서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의 처리 문제는 오늘에까지 우리 사회의 비중있는 사회적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그간의 우리 사회내 논의 상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친일재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져 친일재산의 사회적 환수 요청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다) 한편, 일반적으로 소급입법이 금지되는 주된 이유는 문제된 사안이 발생하기 전에 그 사안을 일반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입법을 통하여 행위시법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에 의해 사후에 제정된 법을 통해 과거의 일들이 자의적으로 규율됨으로써 법적 신뢰가 깨뜨려 지고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과거사 청산에 관한 입법들은 그 사안이 발생하기 이전에 일반적인 규율 체계를 갖출 수 없었던 경우가 대다수였다. 역사상 과거사 청산에 관한 다수 입법들에서 소급입법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용인되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컨대, 우리 제헌헌법은 부칙 제101조에서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서기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이에 따라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 등에 대한 중형과 재산의 몰수 등을 규정한 반민법을 제정한 바 있고,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에서도 종전 후에는 나치의 괴뢰정권인 비시(Vichy)정부를 위해 복무한 자들과 나치

협력자들을 소급적으로 처벌하였다.

(라) 지난 세기 인류사회를 휩쓸고 갔던 강대국의 식민지배와 약탈 현상은 제국주의 및 파시즘의 발호에 기인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식민지배의 극복 후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과거사 청산의 작업들은 그와 같은 이념에 대한 동조와 추종을 단죄하여 공동체를 보호하고 그 과오와 폐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문명사적 반성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다시는 공동체 내에서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결의와 성찰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일제 과거사 청산으로서의 친일재산 환수 문제는 그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하고 이례적인 공동체적 과업이라 할 것이므로, 설령 이러한 소급입법의 합헌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계기로 진정소급입법이 빈번하게 발생해 그로 인한 폐해가 만연될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는 충분히 불식될 수 있다.』

(2) 재판관 이강국, 재판관 조대현의 반대의견(위헌론)

법정의견에 대해서, 재판관 이강국과 재판관 조대현은 반대의견을 개진하였다. 즉, 헌법 제13조 제2항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금지를 예외없이 규정하고 있으므로, 해석에 의해 그러한 예외를 인정하는 법정의견의 입론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 귀속조항은 진정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의 박탈에 해당되므로 헌법 제13조 제2항의 명문규정에 위반된다.

(가) 우선, 우리 헌법사에 있어서 진정소급입법에 의한 처벌이나 재산권의 박탈, 참정권의 제한 등은 헌법상의 기본권 보장이나 법의 일반원칙에 위반되므로 별도의 헌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헌헌법 이전부터의 일반적·보편적 인식이었다.

그리하여 제헌헌법 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고 친일재산을 박탈하며 그들의 공민권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었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시행된 바 있지만, 이는 제헌헌법 부칙 제101조가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서기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

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고 규정해 두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1960년 11월 29일 제4차 개정헌법 부칙은 “이 헌법 시행 당시의 국회는 단기 4293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 부통령 선거에 관련하여 부정행위를 한 자와 그 부정행위에 항의하는 국민에 대하여 살상 기타의 부정행위를 한 자를 처벌 또는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지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으며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에 대한 행정상 또는 형사상의 처리를 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부정축재처리법 등을 제정함으로써 부정축재자들의 재산을 환수할 수 있었다.

(나) 그러다가 1962년 12월 26일 제5차 개정헌법 제11조 제1항에서는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규정하고, 같은 조 제2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 또는 재산권의 박탈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우리 헌법사상 처음으로 소급입법에 의한 참정권의 제한이나 재산권 박탈을 금지하는 명문의 헌법규정이 신설되었다.

위 규정이 신설된 취지는, 4ㆍ19민주혁명과 5ㆍ16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그때마다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정치활동정화법, 부정축재자처리법, 부정축재처리법 등의 각종 소급입법에 의하여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과 재산권이 수시로 제한되거나 박탈됨으로써 정치적ㆍ사회적 보복이 반복되어온 헌정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향후에는 소급입법에 의한 참정권의 제한이나 재산권의 박탈을 절대적으로 금지하겠다는 헌법개정권력인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위 헌법규정은 조문의 위치와 표현을 약간 달리 하였을 뿐 거의 동일하게 현행헌법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지되어 왔다.

(다) 그러므로 헌법 제13조 제2항은, 헌법 자체에서 (진정)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을 제한하거나 재산권을 박탈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금지명령을 직접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위 규정의 헌법적 의의는, 참정권이나 재산권도 일반적으로는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는 것이지만, 헌법 제13조 제2항에 의하여 소급입법의 방식으로는 이를 제한하거나 박탈할 수 없다는 헌법적 금지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비록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소급입법에 의하여 이를 박탈하는 것은 위 헌법규정에 정면으로 위반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 이 사건 귀속조항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하여 재산권을 침해하는지 여부

법정의견은 이 사건 귀속조항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하여 재산권을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1) 입법목적의 정당성 및 수단의 적절성

이 사건 귀속조항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한 반민족행위자가 그 당시 친일반민족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킴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써 이는 정당한 입법목적이라 할 수 있다.

민법 등 기존의 재산법 체계에 따를 때에는 비록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친일재산이라 하더라도 우리 법제상 정당한 재산으로 보호될 여지가 있는데, 이는 3·1운동 정신의 계승을 선포한 현행 헌법의 이념과 달리 우리 실정법은 오히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후손이 대대로 부귀를 누리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모순적 상황임이 분명하다. 이 경우 민법 등 관련 조항의 해석 및 적용에 의존하는 방법만으로는 사회정의와 민족정기에 입각한 친일재산의 처리에 난항을 겪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 후손이 친일재산의 이익을 향유할 수 없도록 규제할 수 있는 특별한 조치의 필요성이 강하게 요청되었고, 친일재산을 국가로 귀속시켜 이를 독립유공자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30조) 이 사건 귀속조항은 이러한 규범적 요청의 일환으로서 앞서 본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라 할 것이다.

(2) 피해의 최소성

(가) 이 사건 정의조항과 귀속조항을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사건 귀속조항을 통하여 국가에 귀속되는 친일재산의 대상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규명법’이라 한다)이 정한 여러 유형의 친일반민족행위 중에서 사안이 중대하고 범위가 명백한 네 가지 행위, 즉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반민규명법 제2조 제6호),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동조 제7호),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동조 제8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동조 제9호)를 한 자의 친일재산으로 한정하고 있고, 설사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은 예외로 인정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다.

(나) 앞서 본 바와 같이 비록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재산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추정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친일반민족행위자측은 그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여 언제든지 위 추정을 번복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 또한, 친일재산귀속법은 친일재산의 거래로 인하여 선의의 제3자가 발생할 경우 이를 보호하도록 하는 규정을 둠으로써 이 사건 귀속조항의 소급적 적용에 따른 법적 안정성의 훼손을 최소화하고 있다{한편, 대법원은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 단서에 정한 ‘제3자’는 친일재산귀속법 시행일 전에 친일재산을 취득한 자뿐만 아니라 친일재산귀속법 시행일 이후에 친일재산을 취득한 자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는데(대법원 2008. 11. 13. 선고 2008두13491 판결), 이러한 해석을 통해 법적 안정성의 훼손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라)강제징용자 및 일본군위안부 등 가혹한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우리 사회에 새겨진 상처들이 여전히 상존하는 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후손들에 의한 재산환수소송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망하거나 연로해져 사회적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소수자의 차가

운 지위로 내몰리는 반면, 재산환수 소송을 제기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의 일부는 그 재산을 되찾은 후 거액을 받고 이를 매도한 다음 외국으로 도피하고 있는 모순적 현실이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전에 이 사건 귀속조항을 입법함으로써 친일재산을 소급적으로 국가로 귀속시켜 친일반민족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박탈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며 부당한 과거사를 바로 세워 궁극적으로 사회통합을 추구하고자 한 것은 친일재산귀속법의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요최소한의 방도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본다면, 이 사건 귀속조항이 헌법상 재산권을 필요이상으로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볼 수 없다.

(3) 법익의 균형성

과거사 청산의 정당성, 진정한 사회통합의 가치 등을 고려할 때 정의를 실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며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이 사건 귀속조항의 공익적 중대성은 막중하다 할 것이며, 설사 청구인들의 주장대로 이 사건 귀속조항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측의 재산권이 제한될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친일재산 환수의 역사적인 당위성, 환수대상 범위의 합리적 설정, 선의의 제3자 보호 등 제반 사정들에 비추어 그 제한의 정도가 이 사건 귀속조항에 의하여 보장되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귀속조항은 공익과 사익간의 균형성을 도외시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법익의 균형성의 원칙에 반하지 아니한다.』

바. 해설

(1) 친일재산에 내포된 하자에 대한 법리적 구성

친일재산은 그 취득과정에서 민족배반적 성격을 내포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하자를 포함하고 있다. 법정의견이나 별개의견 혹은 반대의견은 모두 이 점에 있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자가 법적 효과로 발현되는 지점을 선택함에 있어서 각 의견들은 서로 달리 판단하고 있다.

(가) 재판관 김종대는 친일재산에 내포된 하자를 근거로 하여, 친일재산의 재산적 성격을 부인하고 있다. 이렇게 볼 경우,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은 재산

권 침해의 문제 혹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 재판관 목영준은 친일재산에 내포된 하자를 근거로 하여, 친일재산의 재산으로서의 확정적 성격을 의심하고 있다. 즉, 친일재산에는 취득 당시 반사회적 가치 내지 범죄성이 내재하고 있었고, 다른 유사한 국가들과 달리 과거사 청산절차를 밟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그 반사회성 및 범죄성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어서 친일재산의 소유권 귀속에 관한 사실관계 또는 법률관계가 이미 종료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친일재산의 국가귀속행위는 부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므로, 그 위헌성에 대한 판단은 공사익의 형량이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다) 법정의견은 친일재산에 내포된 하자를 근거로 하여, 그 소급적 박탈이 진정소급입법의 예외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친일재산에 결부된 하자로 인해 친일행위자 혹은 그 후손이 그 재산에 대한 소급적 박탈을 예상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론을 할 경우, 친일재산의 국가귀속행위는 진정소급입법의 예외에 해당될 수 있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에 해당된다는 점이 엄격히 논증되어야 한다.

(라) 재판관 이강국, 재판관 조대현 역시 친일재산에 내포된 하자를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재판관들은 헌법 제13조 제2항에 대한 연혁론 및 법문에 대한 해석론을 전개하면서 현행 헌법하에서는 친일재산의 그와 같은 하자에 대하여 법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평가한다.

요컨대 위에서 살펴본 입론들은 모두 친일재산에 내포된 하자를 공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①, ②, ③의 입론들은 이 사건 귀속조항의 정당화 논증에서 그 하자의 법리적 배치방식을 달리 구성함으로써 논증방식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2) 진정소급입법론의 논거들

법정의견이 이 사건 귀속조항을 진정소급입법으로 이해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들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재판관 이동흡과 재판관 목영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제도는 일제의 토지정리사업에 의하여 토지사정부가 작성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를 대한민국이 소유권의 원시취득 원인으로 인정함으로써 현행 헌법 체제 내로 계승되었다. 비록 그 취득 원인에 치명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간 우리 사법부가 정상적인 소유권의 대상으로 인정해 온 점, 형사법에서의 공소시효나 재산법에서의 제반 시효 제도와 같이 우리 법제는 법적 안정성을 위한 시간적 매듭을 마련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취득한지 60년 내지 100년이 지난 재산을 불확실한 재산이었다라고 하는 것은 그간의 법실무 관행과 여타 법제도적 디자인에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 특별법에 대한 국회 심사보고서에서도 특별법이 진정소급입법임을 전제로 위헌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점9)에서 입법자의 의사 역시 진정소급입법의 형식으로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을 도모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해방 후 우리 제헌헌법은 부칙 제101조에서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친일청산과 관련하여, 첨예한 문제로 불거질 수 있는 친일재산의 환수 작업이 헌법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여,10)친일재산을 소급적으로 환수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입장은, 적어도 당시에 친일재산이 그 소유자에게 귀속된 상태였다는 인식에 보다 근접해 있다.

넷째, 대한제국의 형법대전은 1912. 3. 18. 폐지되었으므로 그 이후에는 효력이 없고, 폐지되기 전이라 하더라도(혹은 일제강점이 무효이므로 여전히 그 당시의 실효적인 규범이라 하더라도) 이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과는 헌법제정권력을 달리하는 입헌군주국인 대한제국 하에서의 형법이므로 대한민국에까지 규범력이 연속된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1. 11. 28. 제정한 건국강령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부적자(附敵者)의 공민권 박탈과 아울러 그 재산의 몰수를 명시한 바 있는데(건국강령 제3장

제5호 제2항), 이 역시 그 제정 이전의 시점까지 효력을 미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소급입법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3) 헌법 제13조 제2항의 예외라는 해석론

헌법 제13조 제2항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을 금지하면서 어떠한 예외요건도 규정해 두지 않았다. 그러나 법정의견은 이러한 점을 의식하면서도 그에 대한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는 해석론을 개진하였다. 법정의견이 토대로 하고 있는 헌법해석론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고 보인다.

첫째, 헌법은 국가의 기본질서를 규정하는 근본법이다. 그러나 헌법도 성문의 법전인 이상, 한정된 규범들로 채워지기 마련인데, 그러다 보니 결국 헌법의 개별 규범들은 추상적이고 개방적인 형태를 지니게 되고, 법전화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을 통해 여러 이해관계를 녹여내게 된다. 이로 인해 헌법의 규범들은 유동성, 추상성, 개방성, 미완결성 등의 특징을 가지게 되고,11)필연적으로 해석에 의해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현실에 적용된다는 일종의 숙명 혹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둘째, 헌법은 가치를 새겨둔 문서이다. 따라서 헌법해석은 본질적으로 가치연관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가령, 공용침해의 목적과 관련하여, 우리 헌법은 “공공필요”를, 일본국 헌법은 “공공을 위하여”(公共のために)를, 미국헌법은 “공적 사용”(public use)을, 독일 기본법에서의 ‘공공복리’(Wohle der Allgemeinheit)를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상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의 헌법은 기실 공용침해의 목적으로 실질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해석함이 타당할 것이다. 만약, 문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위 요건들의 개념적 차이에 천착하는 것은 헌법해석론으로서 채택하기 곤란할 것이다.

셋째, 헌법이 어떠한 가치를 담고 있다고 하여, 그 가치들이 개별적인 조문 하나하나 속에서 완결적으로 규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하나의 조문에서 해당 가치가 완결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없다. 어떤 가

치의 지향은, 헌법의 여러 장소에 배치되어 있는 제반 가치들 간의 상호적 연관관계속에서 도출되기도 한다(text as a whole).

가령, 우리 헌법상 표현의 자유는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해 제한될 수 있지만, 나아가 헌법 제1조 민주공화국 규정과 연관지어 해석하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정치적 표현을 최대한 넓게 보장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도출할 수도 있고(엄격한 심사기준), 다른 한편 헌법 제4조(통일조항)와 연관지어 해석하면 이적(利敵) 표현 등을 상대적으로 크게 제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도출할 수도 있다(완화된 심사기준). 하나의 조문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다른 조항(혹은 가치)과 관련지어 파악하느냐에 따라 규범의 의미, 권리보장의 강도는 상이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넷째, 이러한 과정 속에서, 헌법해석을 통해 필요한 규범적 요건들을 추가적으로 도출해 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 헌법재판소가 기본권 제한심사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과잉금지원칙은 우리 헌법의 명문규정상 존재하지 않고, 나아가 피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 같이 이를 위반할 경우 위헌으로 선언되는 핵심적인 규범요건들도 모두 재판소의 해석을 통해 도출하여 사용해 왔다. 또한, 이른바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서,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 탄핵사유가 될 수 있음을 규정한 헌법 제65조 제1항을(‘탄핵심판청구가 이유 있는 때 파면결정을 한다’는 헌법재판소법 제53조를 해석하는 형식으로) 우회적으로 해석하면서,12)헌법 명문에 없는 “중대한 법위반”이라는 요건을 추가하여 “직무집행에 있어서 중대한 헌법이나 법률 위반이 있는 경우”로 해석한 바 있다.

나아가, 비교법적인 예로서, 해석을 통해 법전화되지 않은 헌법규정을 도출하는 보충적 해석의 예로는, 명문의 규정없이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권한을 이끌어 낸 미국연방대법원의 사례, 명문의 규정없이 헌법개정에 대한 위헌심

사권한을 도출한 미국연방대법원,13)독일연방헌법재판소,14)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15)등의 사례 등이 있고, 심지어 헌법의 명문규정에 반하는 해석을 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등의 헌정 가치를 수호하고자 시도한 예로는, 불가리아 헌법재판소의 자유인권당(the Movement for Rights and Freedoms) 사례,16)헌법개정에 대한 위헌심사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해 헌법개정의 위헌성을 심사하여 무효화시킨 인도대법원의 사례17)등이 있다.

요컨대, 각각의 구체적인 사건에서 헌법재판기관의 위와 같은 해석이 타당했는가라는 질문과는 별개로, 헌법재판기관은 다른 사법기관과는 달리 헌법이라는 규범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그리고 보충적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헌법해석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와 같은 헌법의 핵심 원리, 가치들을 실효적으로 구현해 내기 위하여 헌법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헌법은 충분히 개방적이고 여전히 미완결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헌법해석은 일반 사법작용에 비해 정치적인 특성을 갖는다. ‘미처 쓰여지지 않은 조항의 의미’를 도출해 내는 보충적 해석은, 결코 남발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헌법해석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헌법이라는 미완결적 체계를 해석함에 있어서 필요한 해석방법의 하나로서, 우리 헌법재판소 및 외국의 여러 헌법재판기관이 지금껏 활용해 온 해석론이다.

법정의견은 위와 같은 해석론을 통하여 헌법 제13조 제2항에 대한 예외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해석을 행하였다고 평가된다.

(4) 선례에 대한 평가

법정의견은, 진정소급입법의 예외에 관한 법리를 설시한 96헌가2 등 결정과 97헌바76 등 결정을 원용하고 있다. 96헌가2 등 사건에서 위 법리가 재판관 4인의 의견에 불과했던데 반해, 97헌바76 등 결정에서는 위 법리를 법정의견이 정식으로 채택하였다(즉, 96헌가2 등 결정을 원용하지 않음). 그렇다면, 위 법리는 후속 결정을 통해 법정의견으로 채택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법정의견이 위 두 결정을 순차로 적시한 것은, 이 법리에 그와 같은 연혁이 있음을 보여준 취지라고 생각된다.

(5) 헌법 제13조 제2항의 연혁론

재판관 이강국, 재판관 조대현의 반대의견은, 헌법 제13조 제2항의 도입

취지에 비추어 친일재산이라고 할지라도 소급입법에 의하여 박탈할 수 없다고 본다. 즉, 헌법 제13조 제2항은 4ㆍ19민주혁명과 5ㆍ16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각종 소급입법에 의한 정치적ㆍ사회적 보복이 반복되어온 헌정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도입된 것으로서 예외를 두지 않는 절대적 금지명령이라는 것이다(헌재 2011. 3. 31. 2008헌바141 , 판례집 23-1상, 276, 279).

그러나 이 반대의견 안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헌법 제13조 제2항의 도입배경에는 1960년 11월 29일 제4차 개정헌법 부칙18)에 의해 입법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정치활동정화법, 부정축재자처리법, 부정축재처리법 등과 같이 단순한 정치적 득실에 터 잡은 정략적 소급입법이 남용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 놓여있다. 이 반대의견 또한 “정치적ㆍ사회적 보복이 반복되어온 헌정사를 바로잡기 위함”을 위 조항의 도입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해관계나 당파적 갈등을 떠나,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역사청산의 과제와 밀접한 친일재산의 환수와 관련된 (소급)입법까지 헌법 제13조 제2항에 의해 금지된다고 보는 것은 위 조항의 도입배경에 부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4. 이 사건 귀속조항의 평등 원칙 위반여부

가. 이 사건 결정문의 논증

이 결정은 이 사건 귀속조항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합리적인 이유 없이 당해 재산의 소유자들을 차별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심사에 있어서, 헌법 제11조 제1항 후문에서 예시된 사유로 인한 차별에는 완화된 심사기준이 적용된다고 보면서(헌재 2010. 11. 25. 2006헌마328 , 공보 170, 2106, 2110 참조), 그 차별취급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이 사건 귀속조항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 친일재산은 그 주체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든 그 후손이든 이를 보유하도록 보장하는 것 자체가 정의 관념에 반하는 점, 국가에 귀속시키는 친일재산의 대상은 반민규명법이 정한 여러 유형의 친일반민족행위 중에서 사안이 중대하고 범위가 명백한 네 가지 행위를 한 자의 친일재산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설혹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은 예외로 인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친일재산의 거래로 인하여 선의의 제3자가 발생할 경우 이를 보호하도록 하는 규정도 두고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비록 이 사건 귀속조항이 다른 재산과는 달리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을 규정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취급에는 수긍할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므로, 이를 두고 자의적인 차별로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하기는 어렵다.』

나. 해설

(1)헌법 제11조 제1항 후문에 예시된 차별금지 사유를 위반한 법률에 대하여, 2006헌마328 결정 이후 우리 재판소는 완화된 심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사건 결정은 위 2006헌마328 결정의 취지를 승계한 것으로 평가된다.

(2)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라는 점이 사회적 신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즉, 학설상 선천적 신분설과 후천적 신분설이 대립하고 있다.19)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는 “사회적 신분이란 사회에서 장기간 점하는 지위로서 일정한 사회적 평가를 수반하는 것을 의미한다”(헌재 1995. 2. 23. 93헌바43 , 판례집 7-1, 222, 235)고 하면서 전과자도 사회적 신분에 해당된다고 보므로(위 93헌바43 결정), 이러한 취지에 비추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라는 점 또한 “사회에서 장기간 점하는 지위로서 일정한 사회적 평가를 수반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신분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보인다.

5. 이 사건 귀속조항이 연좌제 금지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

가. 이 사건 결정문의 논증

『헌법 제13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친족의 행위와 본인 간에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아무런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친족이라는 사유 그 자체만으로’ 불이익한 처우를 가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헌재 2005. 12. 22. 2005헌마19 , 판례집 17-2, 785, 792).

그런데 이 사건 귀속조항에서 국가귀속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친일재산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받은 재산을 말하는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는 위 친일재산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소유한 재산 중에서 그 후손 자신의 경제적 활동으로 취득하게 된 재산이라든가 친일재산 이외의 상속재산 등을 단지 그 선조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이 아닌 한, 위와 같은 친일재산에 한정하여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은 ‘친족의 행위와 본인 간에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아무런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친족이라는 사유 그 자체만으로’ 불이익을 입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 귀속조항이 헌법 제13조 제3항에서 정한 연좌제 금지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

나. 해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의 재산
친일반민족행위자로부터 상속받은 재산
후손이 형성한 재산
(a)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친일 대가로 형성한 재산
(b)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친일의 대가와 무관한 재산
(c) 스스로 형성한 재산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의 재산에는 다음의 세 종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특별법이 환수하고자 하는 재산은 (a)에 한정된다. 그러나 식민지 역사청산에 임했던 외국의 다수 입법례나 우리 제헌헌법 하에서의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부역행위자를 형벌에 처하고 그의 재산을 전부 혹은 일부 몰수

하는 형을 부과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즉, (a)와 (b)까지 모두 국가가 박탈해간 셈이다.

헌법 제13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친족의 행위와 본인 간에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아무런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친족이라는 사유 그 자체만으로’ 불이익한 처우를 가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헌재 2005. 12. 22. 2005헌마19 , 판례집 17-2, 785, 792). 만약 연좌제 금지 원칙에 위반되기 위해서는 위 표에서 (c)재산을 가져간 경우에 해당되어야 한다{⒝재산을 국가로 환수할 경우 이를 친일행위자에 대한 제재로 본다면, 이것이 친일행위자 후손에 대한 연좌제 금지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에 관하여 견해의 대립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a)재산은 선조의 친일행위가 없었다면 자신이 상속하지 못했을 재산인바, 친일행위를 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부당한 재산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친일청산의 대의에 따라 국가에 귀속시킬 수 있는 대상이고, 오히려 국가가 이러한 (a)재산을 후손이 보유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정의감에 반하는 일이 된다고 생각한다.

6. 결정의 의의

가. 이번 결정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 금지라는 헌법 제13조 제2항을 중요한 헌법적 가치로 인식하면서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배경(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과 그 극복을 지향하는 일련의 노력 속에서 건국됨), 헌법전문의 내용(3ㆍ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해방이후의 역사적 현실(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일제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였다고 보기 힘든 현실)20)등을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 예외적으로 재산권에 대한 소급적 박탈이 가능하다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나. 이 결정은 헌법 제13조 제2항과 같이 예외를 두고 있지 않은 조항에

대하여, 헌법해석을 통하여 예외를 도출해 낼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헌법의 규정 체계를 완결적으로 보고 헌법을 해석해 왔던 결정들, 예컨대, 사전검열을 절대적인 검열로 해석하였던 2008헌가25 결정 등의 해석례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 향후 관심이 모아지는 부분이다.

다.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은, 애당초 대개의 우리 선조들 즉, 피지배 민족으로서 식민지배의 부당성에 공감하고 우리민족의 일원이라는 자긍심을 간직하며,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일제에 적극 가담하여 같은 민족에게 고난을 안기며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면서 살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티며 해방을 맞이한 사람들의 존재를 감안해 볼 때, 이를 보유하도록 내버려두는 자체가 이미 형평성에 어긋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60여년이 흘러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친일재산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일이 필요하고 또한 현행헌법 하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임을 이 결정은 논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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