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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부지방법원 2020.11.12. 선고 2019고합288 판결
준강간
사건

2019고합288 준강간

피고인

A

검사

최종경(기소), 김재환, 김지연, 이주희(공판)

변호인

법무법인 클라스

담당변호사 강동세, 박현상

법무법인(유한) 서평

담당변호사 김성문

판결선고

2020. 11. 12.

주문

피고인은 무죄.

이유

1. 공소사실의 요지

피고인은 2018. 10. 27. 09:00경 서울 용산구 B에 있는 피고인의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할로윈 파티를 한 후 술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피해자 C(가명, 여, 24세)의 음부에 피고인의 성기를 삽입하여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피해자를 간음하였다.

2.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장 요지

피고인은 공소사실 기재 일시, 장소에서 피해자와 성관계를 가진 사실은 있으나, 이는 피해자와의 합의에 의한 것이다. 피해자는 주취에 따른 이른바 블랙아웃 증상으로 인하여 성관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기억력 외에 다른 신체적·정신적 상태는 정상적이었고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으므로 피고인에 대하여 준강간죄가 성립할 수 없고, 준강간의 고의도 인정되지 않는다.

3. 판단

가. 관련 법리

1) 형법 제299조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를 형법 제297조, 제297조의2, 제298조의 강간, 유사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죄와 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항거불능의 상태라 함은 형법 제297조, 제297조의2, 제298조와의 균형상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 때문에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의미한다(대법원 2012. 6. 28. 선고 2012도2631 판결 등 참조).

2) 형사재판에서 공소제기 된 범죄사실에 대한 증명책임은 검사에게 있는 것이고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하므로,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대법원 2015. 8. 27. 선고 2014도8722 판결, 대법원 2010. 11. 11. 선고 2010도9633 판결 등 참조).

나. 구체적 판단

1) 인정사실

이 법원이 적법하게 채택하여 조사한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는 사실관계를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준강간죄의 보호법익 및 해석론

가) 형법 제299조(이하 '본조'라 한다)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를 같은 법 제297조, 제298조의 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죄와 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본죄는 정신적 또는 신체적 사정으로 인하여 성적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대법원 2000. 5. 26. 선고 98도3257 판결 등 참조). 이러한 견지에서 본조에서 말하는 '심신상실'이란 정신장애 또는 의식장애 때문에 성적 행위에 관하여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항거불능'이란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 때문에 상대방의 성적 시도에 대하여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용'이라 함은 피해자가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고 이를 간음을 용이하게 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대법원 2019. 3. 28. 선고 2018도16002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한편, 본조에서 말하는 심신상실은 행위자의 책임능력 결여를 표징하는 형법 제10조 제1항의 심신상실, 즉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상태'와는 일응 구분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데, 형법 제10조 제1항의 심신상실은 정신장애 등 생물학적 사유를 기본 출발점으로 하지만 본조의 심신상실은 성적인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그 밖의 사유들도 모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형법 제10조 제1항에 정한 심신장애 이외의 사유로 본조의 심신상실에 해당하는 예로는 피해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 또는 술에 만취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본조는 그 행위 태양으로서 심신상실 상태를 이용한 간음행위만을 규정하고 있는 점, 형법은 심신미약자에 대한 간음행위를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행한 행위에 한정하여 벌하고 있는 점(형법 제302조) 등에 비추어 보면, 사람의 심신미약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한 행위는 원칙적으로 본조의 적용범위에서 제외된다고 볼 것이다.

나) 앞서 본 바와 같이 본조에서 말하는 '항거불능'은 심신상실 이외의 사유로 인하여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의미하는 데, 이는 피해자가 상대의 성적 시도나 행위에 맞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거나 행사하기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함축한다.

그런데 본조가 '심신상실' 상태와 '항거불능' 상태를 병렬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항거불능' 상태는 심신상실 상태에 준할 정도로 피해자의 의사형 성능력이나 저항능력이 결여 내지 현저히 저하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죄형법 정주의에서 파생된 엄격해석원칙에 부합하는 해석이다.

다) 이처럼 본조는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 자체를 행사할 수 없거나 (설령 상대에게 성관계 거부의 의사를 표명하였더라도) 상대방의 요구에 맞서 성적으로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결여 내지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피해자의 이러한 상태를 인식하고 이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행위에 나아가는 행위를 처벌하는 형벌규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조의 이러한 입법 취지와 목적을 감안하여 볼 때, 피해자가 불완전하게나마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였다고 볼 여지가 있거나 성적 자기방 어능력이 결여 내지 현저히 저하된 상태라고 보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때에는 본죄가 성립하지 아니한다.

3) 피해자의 블랙아웃 가능성

가) 피고인은 수사기관 이래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와 단 둘이 남게 되자 피해자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스킨십을 하게 되었고, 스킨십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침실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침대에서도 스킨십을 하다가 성관계를 하게 되었다. 피해자에게 성관계를 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피해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성관계를 진행하려고 하니 피해자가 저에게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되냐고도 물어보았다. 피해자에게 아프냐고 물어보았는데 피해자가 처음이라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자 당황하여 성관계를 중단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면서, 피해자가 이 사건 당일 주취에 따른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black out, 알코올이 임시 기억저장소인 해마세포의 활동을 저하시켜 정보의 입력과 해석에 악영향을 주지만, 뇌의 다른 부분은 정상적 활동을 하는 현상) 증상으로 인하여 성관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 변소하고 있다.

반면, 이 사건 공소는 '피해자가 피고인의 집에서 열린 할로윈 파티에서 술에 취하여 정신을 잃자 피고인이 피해자의 음부에 성기를 삽입하였다'는 내용으로 제기되었는데, 피해자는 이 사건 전후의 다른 내용은 대체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하얀색 침대위에서 눈을 떴는데 시야 앞에 알몸인 상태로 성관계를 하고 있는 피고인이 보였고, 자신은 상의를 입은 채 치마와 속옷이 벗겨진 상태였으며 그 상태에서 다리를 틀어 몸을 벽쪽으로 돌렸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가 공소사실 기재대로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고인과 성적 교섭을 거쳐 성관계에 이른 것임에도 블랙아웃 증상으로 인하여 이를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이 사건 공소사실과 양립하기 어려운 사정이 되므로, 피해자의 블랙아웃 가능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나) 이 사건에서 문제되는 알코올 블랙아웃이란 알코올의 선택적 효과가 뇌의 특정 시스템(해마 기능)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알코올이 특수한 신경전달 수용체와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과 뇌의 특수한 영역들이 선택적으로 알코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 의학계의 여러 실증적 연구로 증명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알코올에 의해 기억형성이 붕괴된 결과로서의 알코올 블랙아웃은 ① 인코딩(encoding, 자극에 대한 최초의 기록과 해석, 저장), ② 저장(storage, 인코딩된 자극의 통합과 유지), ③ 회상(retrieval, 저장된 자극의 검색과 복원)으로 이루어지는 기억 형성 과정에서 알코올의 독성이 해마 기능을 손상시킴으로써 회상이 불가능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다) 이 법원이 적법하게 채택하여 조사한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피해자가 피고인의 성관계를 전후하여 알코올로 인한 블랙아웃 상태였을 가능성을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배제하기 어렵다.

○ 나름의 정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기억능력만이 제한되는 블랙아웃의 특성상,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가 정상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이러한 정상적 행동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블랙아웃을 겪고 있었다고 볼 여지가 크다.

○ 그런데 피해자는 다트 게임과 플립컵 게임을 하였던 상황, E이 귀가하고 6명 정도 남아 있던 상황에서 밖에 잠시 나갔고 그 곳에서 그네를 탔는데 누군가 담배를 피웠고 그 당시 키가 180cm 정도 되고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고 회계사인가 세무사인가 하는 사람(인상착의, 직장에 비추어 피고인의 집에 도착한 G로 보인다)이 있었던 상황이 화면처럼 드문드문 기억이 있다고 하면서도, 02:54경 플립컵 게임이 끝난 이후 피고인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과 소파에 앉아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던 상황, 파티 장소인 지하실에서 그네와 정자가 있는 밖으로 나가는 계단의 존재에 대하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기억도 친구들로부터 파티 상황을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을 받아 보고 떠올린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 한편, 피해자의 친구 중 가장 늦게 귀가한 E은 귀가할 당시 '피해자의 상태가 취해 보였지만 몸을 못가누고 누워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주저앉는 등의 행동을 본 적은 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해서 피해자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으나 피해자가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제가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나왔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G은 '귀가하기 직전에 피고인과 마당으로 나와 두 차례 담배를 피운 적이 있는데 두번 다 피해자가 따라 나왔고 피해자가 영어를 많이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첫 번째 나왔을 때는 확실히 피해자가 그네를 탔다. 피해자가 제 직업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파티장소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계단을 올라가거나 그네를 타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비틀거리거나 타인의 부축을 받은 적은 없던 것 같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H은 '4~5시 이후 사람들이 많이 빠졌을 시점에는 거의 술을 안 마셨기 때문에 피해자가 충분히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같이 장난도 치며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렇게 크게 취하지는 않은 분위기였으며, 피해자가 오랫동안 피고인 옆에서 웃으면서 대화를 하기도 하였다. 파티장소에서 그네가 있는 마당으로 나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피해자가 비틀거리거나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I은 '피해자가 만취상태는 아니었다. 피해자가 서서 걸어가는 것을 봤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봤다. 제가 술에 취해 방에서 쉬다가 친구가 집에 가자고 해서 집을 나서는데 피해자가 저에게 "언니 괜찮아요?"라는 말을 했는데 그렇게 만취한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저는 2018. 10. 27. 05:00경(이하 2018. 10. 27.의 특정 시각을 지칭하는 경우 날짜의 표시는 생략한다) 피고인의 집에서 나왔는데 피해자가 저보다 멀쩡해 보이기는 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J는 '피해자 혼자 끝까지 남아서 술을 마셨고, 인사불성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즐겁게 웃다가 간 것 같다. 제 친구 I이 술에 취해서 다른 방에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피해자는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도 없었고, 혀 꼬이고 그런 것도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 위와 같은 피해자가 피고인과 단 둘이 남게 되기 전까지 피고인의 집에 남아있던 제3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피해자는 05:51경까지도 외견상 일상적인 범주 내에서 말하고 행동한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지하에 있는 파티장소에서 야외 마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거나 야외에서 그네를 타기도 하는 등의 사정이 엿보이는데, 피해자는 그러한 내용에 대하여 단편적인 기억만 있을 뿐 전체적인 상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바, 피해자가 이 사건을 전후하여 블랙아웃 증상을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강하게 의심할 만한 정황이 존재한다.

○ 특히 피해자는 피고인의 집에 방문하기 전날에도 새벽까지 술을 마신 사실이 있는데, 알코올 사용의 높은 빈도와 많은 양은 블랙아웃 경험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단일요인이라는 취지의 이 법원의 L단체에 대한 사실조회회신결과에 비추어보더라도, 블랙아웃 증상이 피해자에게 발생하였을 개연성이 상당히 있어 보인다.

○ 한편 피해자는 수사기관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성관계 전후의 다른 내용에 관하여는 대체로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하얀색 침대 위에서 눈을 떴는데 시야 앞에 알 몸인 상태로 성관계를 하고 있는 피고인이 보였고, 자신은 상의를 입은 채 치마와 속옷이 벗겨진 상태였으며 그 상태에서 다리를 틀어 몸을 벽쪽으로 돌렸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고, 이러한 진술은 언뜻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진술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전후 맥락 없이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기억인 점, 피해자가 의식을 잃은 채 피고인에게 성폭행을 당하다가 정신을 차린 것이라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거나 그 직후의 정황을 좀 더 상세히 기억하였을 것으로 보임에도 그에 관한 기억이 구체적이지 않은 점, 피해자는 성관계 직후 피고인이 주는 옷을 입고 침실에서 소파로 나와서 09:00경부터 10:30경까지 최소 1시간 가량 피고인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도 두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고 진술하는 점 등에 비추어보면, 설령 피해자의 위 진술이 신빙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진술만으로는 피해자가 블랙아웃 증상으로 인하여 일상적 범주 내의 언행을 하는 상황에서 기억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피고인에게 준강간 범행을 당하였다고 단정하기는 부족하다.

4)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 및 그에 대한 피고인의 인식 여부

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관계 직전에 나름의 의식하에 행동하였음에도 블랙아웃 증상으로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피해자와의 명시적 내지 묵시적 동의 아래 성관계를 맺었다는 피고인의 변소를 쉽사리 배척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알코올의 독성이 단지 행위자의 장기 기억능력에만 악영향을 미치고 다른 뇌기능에 영향을 주지 아니하는 블랙아웃 현상이 있을 수도 있지만, 행위자의 몸 상태와 알코올 수용도, 알코올의 섭취량이나 시간 등에 따라서는 이성적 의사결정능력을 주관하는 전두엽 등 다른 뇌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정상적 의사결정능력이 사실상 와해되는 이른바 '패싱아웃(passing out)' 상태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따라서 설령 피해자가 성관계 직전 의식을 완전히 잃지 않은 상태에 있었더라도 성적 자기결정권 및 자기방어권을 행사하기 현저히 곤란한 항거불능 상태에 놓여있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 피해자는 평소 주량이 소주 1병 내지 1병 반 정도인데 피고인의 집에 방문하기 전에도 와인 몇 잔을 마신 상태였고 피고인의 집에서는 칵테일, 와인, 맥주 등을 마셨으며 평소 주량보다는 많이 마셨다고 진술하고, E도 피해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많이 웃는 하이텐션 상태로서 과음한 상태로 보였다고 진술하는 등 이 사건 당시 피해자는 평소 자신의 주량에 비해 과도한 음주를 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귀가하던 택시를 탄 후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무렵에 급하다고 하면서 택시기사에게 세워달라고 하여 도중에 하차한 후 택시요금을 계산하지도 않고 현장을 이탈하는 등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음을 의심케 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피해자와 피고인은 이 사건 당일 처음 본 사이였고, 피해자는 이 사건 발생 전에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성관계를 가진 사실은 없었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 당시 피해자가 과다 섭취한 알코올의 영향으로 인하여 사리분별능력이나 의사결정능력이 상당히 저하되었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다) 그러나 이 법원이 적법하게 채택하여 조사한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고려하여 보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이 사건 당시 피해자가 어느 정도 사리분별능력이나 의사결정능력이 저하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정도가 본조에서 말하는 항거불능 상태에까지 이르렀음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적어도 피고인이 피해자의 항거불능상태를 인식한 상태에서 준강간의 고의를 가지고 피해자와의 성관계를 가졌음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 앞서 본 바와 같이 피해자는 피해자가 피고인과 단 둘이 있기 직전인 05:51까지 주변의 도움 없이 일상적인 수준의 말과 행동을 하였고, 친구들이 모두 떠난 이후에도 파티장소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E이 04:00경 피해자에게 함께 귀가하자고 권유를 하였으나 피해자는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는 취지로 답변하여 파티장소에 좀 더 남아있고자 하는 의향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E이 피고인의 집을 떠난 이후 6~7명 정도가 남아있는 상황(피해자 스스로 6명 정도 남아있는 상황은 기억하고 있다)에서도 피해자는 곧바로 귀가하려는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정들에 비추어보면, 피해자는 어느 정도 스스로의 의사로 친구들이 모두 떠난 이후에도 파티장소에 남아서 좀 더 파티를 즐기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의 이와 같은 선택을 두고 당시 피해자의 의사결정능력이 사실상 결여되었음을 추단할 수 있는, 그 자체로 현저히 불합리한 결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피해자의 성경험이나 가치관 등에 비추어보면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관계에 동의하거나 이에 응할 특별한 이유나 동기는 없어 보이고,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관계에 응하였다면, 이는 피해자의 진지한 의사에 터 잡지 않은 무의식중의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체내에 흡수되어 뇌기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알코올로 인하여 이성적 판단능력이나 통제능력이 상당히 저하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볼 때, 사람이 과도한 음주를 하게 될 경우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 혹은 술에 깨고 나서는 후회할 행동을 하게 될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떠한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행위자가 평소 그와 같은 행위를 할 이성적 동기나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후적인 판단만으로 그러한 행위의 책임을 행위자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고 보거나, 무의식상태에서의 행위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 피고인은 수사기관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피해자와 단 둘이 남게 되자 피해자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스킨십을 하게 되었고, 스킨십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침실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침대에서도 스킨십을 하다가 성관계를 하게 되었다. 피해자에게 성관계를 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피해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성관계를 진행하려고 하니 피해자가 저에게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되냐고도 물어보았다. 피해자에게 아프냐고 물어보았는데 피해자가 처음이라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자 당황하여 성관계를 중단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다. 또한 피고인은 성관계를 중단한 이후에는 피해자와 함께 다시 거실로 자리를 옮겼고 화이트와인과 와인잔 2개를 가져오면서 피해자와 1시간 이상 대화를 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피해자에게 성관계시 통증의 유무를 묻거나, 추가적으로 피해자에게 술을 권하는 행동들은 만약 피고인에게 피해자가 술에 만취하여 항거불능상태에 있었음을 인식하고 이를 이용하여 성관계를 하고자 하는 준강간의 고의가 있었다면 쉽사리 나아가기 어려운 행동들로 보이기도 한다.

다. 소결론

이 사건과 관련하여 기억나는 부분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은 대체로 진실한 것으로 보이는 점, 피해자가 사건 당일 처음 만난 피고인과 성관계를 가질 만한 별다른 이유나 동기가 발견되지는 않는 점, 파티 참석자들이 피고인의 집을 떠나고 피고인이 피해자와 성관계를 하기 까지 약 3시간 정도의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는 점 등에 비추어보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이 사건 당시 블랙아웃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볼 만한 정황이 다수 존재하는 상황에서 성관계를 전후하여 피해자의 기억이 없다는 사정만으로 피고인이 이 사건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술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피해자를 간음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사건 당시 피해자가 성관계에 대한 의사를 형성하거나 성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여지가 있기는 하나, 피해자의 상태가 심신미약을 넘어, 본조에서 정한 항거불능 내지 항거가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이르렀는지에 관한 합리적인 의심을 해소할 정도로 검사의 증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비동의간음죄를 처벌하는 법제에서는 범죄를 조각하는 피해자의 동의가 단순한 '예스'나 '노'를 넘어서 성적 상호작용에 관한 편안한 수준의 진행 중인 대화를 전제로 할 것을 요하지만, 형법 제302조(심신미약자 등에 대한 간음)와 구분하여, 본조를 통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피해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우리 법제에서 피해자의 성관계에 대한 동의가 하자 있는 의사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준강간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없고, 당시 피해자의 의사결정능력이 결여 내지 현저히 저하되었다는 점까지 인정되어야 한다.

결국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사정과 근거에 비추어보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이 사건 공소사실 기재와 같은 범행을 저질렀음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4.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따라 무죄를 선고하되, 피고인이 무죄판결공시의 취지에 동의하지 아니하므로 형법 제58조 제2항 단서에 따라 무죄판결의 요지는 공시하지 아니한다.

판사

재판장 판사 이정민

판사 이영미

판사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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