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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방법원 2010. 6. 11. 선고 2010구단851 판결
[국가유공자요건비해당결정처분][미간행]
원고

원고

피고

대구지방보훈청장

변론종결

2010. 5. 14.

주문

1.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청구취지

피고가 2009. 4. 22. 원고에 대하여 한 국가유공자 요건 비해당 결정처분을 취소한다.

이유

1. 처분의 경위

가. 원고 및 소외 24의 아들인 망 소외 5(이하 ‘망인’이라고 한다)는 1998. 5. 4. 공군에 입대하여 1998. 8. 15.경부터 공군 제△△전투비행단 □□□정비중대 항공기 기체정비병으로 근무하던 중 1999. 4. 24. 13:25경 중대내무반 지하화장실 출입문 문틀 가로대에 군용허리띠로 목을 매고 숨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나. 원고 및 소외 24는 2001. 3. 5. 피고에게, 망인이 국가유공자등예우및지원에관한법률 소정의 순직군경에 해당된다면서 국가유공자유족등록신청을 하였으나, 피고는 2001. 5. 17. 망인의 사망이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위 신청을 기각하는 취지의 국가유공자 비대상결정통보를 하였다(이하 ‘종전 처분’이라 한다).

다. 그러자 원고 및 소외 24는 종전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제1심 법원( 대구지방법원 2001구7535호 )은 2002. 6. 28. 위 처분의 취소를 명하는 원고 승소판결을 선고하였으나, 항소심 법원( 대구고등법원 2002누1688호 )은 2003. 1. 17. 망인의 자살은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제1심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내용의 원고 패소판결을 선고하였으며, 2003. 6. 13. 상고심( 대법원 2003두1325 )에서 상고기각되어 위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라. 원고는 2006. 4. 18. 군의문사진상위원회에 망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는데,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8. 12. 8. ‘망인은 지휘관의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임병들의 상습적인 구타, 가혹행위, 욕설 등 언어폭력과 부대원들에 의한 집단적인 따돌림, 중대장, 선임병 등의 위법한 지시에 따른 대리시험 발각 등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와 인격의 침해를 받고도 이를 피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사유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인정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국방부장관에게 망인의 사망 구분에 관한 사항을 재심의할 것을 요청한다.’라고 결정하였다.

마. 이에 원고는 2009. 2. 11. 피고에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문을 추가 자료로 제출하면서 다시 국가유공자유족등록신청을 하였으나, 피고는 위 결정문은 법원의 판결 내용을 변경할 만한 요건 변동 자료로 볼 수 없어 망인은 순직군경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의결에 따라, 2009. 4. 22. 원고에게 국가유공자등록을 거부하는 이 사건 처분을 하였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2호증, 갑 제3호증의 1, 2, 을 제1호증 내지 을 제7호증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이 사건 처분의 적법 여부

가. 원고의 주장

망인은 신병교육대에서 유급처리되어 15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추가로 받았고, 1998. 8. 15. 제△△전투비행단에 배속되어 부대 적응교육을 받은 후 같은 달 29. 위 비행단 예하의 군수전대 부대정비대대 □□□정비중대에 배속되었는데, 당시 망인의 소속비행단인 제△△전투비행단은 엄격한 군 기강 확립을 위해 강도 높은 군차려가 실시되었고, 공군본부 지휘검열이 예정되어 있었던 관계로 훈련평가, 학술평가 등 준비가 강도 높게 진행되었으며, 또한 망인이 소속되었던 위 □□□정비대대는 정비업무의 특성상 일과 관련된 구타 등의 가혹행위와 사병·하사관의 갈등과 고참들의 질책이 많아 망인이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망인은 느린 업무습득과 업무상 실수로 인한 집합 등으로 선임병으로부터 상습·지속적으로 구타 및 가혹행위를 당했고, 후임병들로부터도 무시당하거나 배척을 당하여 인격적 모멸감, 좌절감, 무력감 등을 느끼고 있었다.

망인은 이러한 심리적인 고통을 겪던 중 부득이하게 장병학술평가에 선임병을 대리하여 응시하다가 적발되어 후임병들이 보는 앞에서 시험감독관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하였고, 이후 대리시험 발각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중대원들에 대한 죄책감, 불안감 등으로 인해 정신질환에 준하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이른 나머지 정신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볼 때, 망인의 자살은 정상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자해행위로 볼 수 없으므로, 이와 달리 보고 한 이 사건 처분은 위법하여 취소되어야 한다.

나. 관계 법령

별지 기재와 같다.

다. 인정사실

⑴ 망인의 군생활 및 자살 경위

㈎ 망인은 1978. 11. 24.생으로 대구 ○○○대학교 기계계열과 1학년을 휴학하고, 1998. 5. 4. 공군 병529기로 입대하여 공군기본군사훈련단에서 5주간의 기본군사훈련을 받았으나 실기평가결과 3개 과목(태권도, 방어전기, 도수체조)에서 과락을 받는 바람에 같은 해 6. 2. 유급처리되어 후임 기수인 병530기와 같이 5주간의 추가기본군사훈련과 특기교육을 마치고 같은 해 8. 15. 제△△전투비행단 군수전대 부대정비대대 □□□정비중대에 전입하였다.

㈏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망인은 기본군사훈련에서 유급되어 후임 기수와 함께 수료한 것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소속부대에 전입된 후에도 업무처리가 미숙하여 선임병들로부터 무능하다는 이유로 자주 질책과 따돌림을 당하였으며, 후임병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등 군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였다.

㈐ 한편, 망인이 소속된 제△△전투비행단 단장은 소속 부대원들의 군 기강 해이를 이유로 전부대원들이 전투군장을 갖추고 총검술·구보 등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도록 하는 이른바 ‘군차려’를 자주 실시하였다.

㈑ 제△△전투비행단에서는 공군본부의 지휘검열에 대비하여 감찰실 주관으로 1999. 4. 19.부터 기지광장에서 소속 장병 전원을 상대로 장병학술평가시험을 시행하였는데, 망인의 소속 중대장인 대위 소외 1은 1999. 4. 23. KF-16 추가배치에 관한 회의로 인하여 당일 실시되는 장병학술평가시험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소속 중대원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리하여 시험을 치도록 지시하였고, 한편 항공기비상대기(ALT)의 야간근무조에 편성된 병장 소외 2와 소외 3도 그 무렵 후임병들에게 자신들의 대리응시자를 물색하라고 지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망인은 병장 소외 2를 대리하여 위 평가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 망인은 다른 응시자들과 함께 기지광장으로 가서 19:30경부터 20:20경까지 시험을 친 후 20:25경 시험지를 제출하던 중, 이름을 묻는 시험감독관인 중위 소외 4에게 ‘ 소외 2’라고 대답하였지만, 전투복 명찰에는 ‘ 소외 5’로, 출입증에는 ‘일병 소외 6’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소외 4의 추궁에 못 이겨 대리시험 응시사실을 토로하였고, 이에 소외 4는 망인의 소속부대를 확인한 후 인식표와 출입증을 빼앗고 중대로 복귀할 것을 명하더니, 기지강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다리를 잡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망인의 뒷머리를 오른쪽 손바닥으로 2, 3회 때리고,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옆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대원들 쪽으로 다가가 ‘시험이 장난이냐 이 새끼들아, □□□ 이거 개판 아니야’는 등의 욕설을 하다가 망인을 감찰실로 데려간 다음 21:05경 망인 소속중대의 일직사관인 준위 소외 7에게 대리시험 적발사실을 알리면서 망인에게 다음날 감찰실로 와서 조사를 받을 것을 지시하고 소속중대로 돌려보냈다.

㈓ 망인은 22:40경 소속 중대에 복귀하여 내무반에서 취침을 하지 아니하고 밤새도록 독서실에 있으면서 불침번 근무를 하고 있는 후임병들에게 3회에 걸쳐 중대분위기를 묻는 등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였고, 다음날인 같은 해 4. 24. 10:00경 감찰실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는데, 소외 4는 처음에는 망인에게 일주일간 무장구보를 할 준비를 갖추어 감찰실로 오라고 명하였다가 소령 소외 8의 충고에 따라 소속부대 실정에 맞는 재교육과 함께 일주일간 반성문을 제출하도록 하는 정도로 망인에 대한 처분을 종료하였다.

㈔ 망인은 같은 날 10:30경 감찰실을 나와 10:55경 중대에 복귀하여 내무반으로 내려갔고, 같은 날 13:25경 □□□무장중대 소속의 이병 소외 9에 의하여 중대 내무반 지하 화장실 우측 3번째 출입문 문틀 가로대에 군용허리띠로 목을 매고 숨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망인이 사망하기 직전에 자필로 위 화장실 조립식 칸막이 벽에 써놓은 것으로 보이는 유서에는 ‘이제 더 이상 남에게까지 피해주기는 싫다, 아버지 어머니께 미안하고, 군생활에 적응이 안 되고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 군수사기관에서는 망인의 사체에 대한 부검을 실시하기 위하여 원고들에게 부검일시, 장소 등을 통보하였으나 원고들이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1999. 5. 14. 15:05경부터 16:30경까지 사이에 국군원주병원 부검실에서 부검을 실시하였고, 사체부검 결과, 망인의 목 앞쪽에서 양쪽 옆을 지나 뒷머리를 비스듬하게 올라가며 소실되는 형태의 삭흔(삭흔)이 보이고, 이는 군용허리띠에 부합하여 삭상물에 의한 경부압박사를 고려하여야 하며, 삭흔의 양상으로 보아 의사(액사)로 생각되는 점, 안검결막 및 안와주위의 피부에서 일혈점(일혈점)이 나타나고, 심혈이 암적색 유동성이고, 내부 각 장기는 울혈상인 점 등 질식사 혹은 급사의 일반적 소견들이 나타나는 점, 이마 좌측에서 작은 두피하출혈을 보나, 두개골, 두개강, 뇌 등에서 특기할 소견을 보지 못하여 사인과 연관시키기 어려우며, 전신에서 경부삭흔을 제외하고는 특기할 손상이나 병변을 보지 못하고, 혈액검사상 특기할 약물이나 독물이 검출되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망인의 사인은 의사(액사)로 추정되었다.

⑵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

㈎ 원고가 2006. 4. 18. 망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라고 한다)에 제출하자, 위원회는 2006. 7. 19. 조사를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위원회는 망인과 함께 복무하였던 당시 부대원들인 소외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6, 20, 21 등을 만나 당시 부대의 복무환경 및 망인의 자살 경위 등에 대하여 조사하였는데, 위 부대원들 및 관련자들의 진술 중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소외 10 (후임병) : 사건 당일 05:50경 독서실에서 망인을 보았는데, 망인이 ‘분위기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당시 구타는 약간 있었다. 망인은 공구의 위치 등을 적어 놓은 공구수첩을 암기하거나 검사받는 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망인이 이병, 일병 시절일 때 질책한 사람은 소외 15, 25, 18, 14, 20 정도 기억난다. 질책하며 욕설을 한 기억은 없고, 분위기를 제압하기 위해 혼잣말로 욕설한 것은 있었다. 자신이 당한 얼차려로는 내무반에서 집합해서 엎드려 뻗쳐, 머리 박기 등이다. 사건 당일까지 집합은 거의 매일 있었다. 망인의 후임 기수인 30기들이 망인을 고참으로 잘 대우해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소외 11(후임병) : 당시 중대는 부대원들이 30명 정도였는데, 그 중 병장이 16명이어서 망인은 상병이라도 졸병이었던 셈이다. 본인도 누군가의 대리 시험을 치른 기억이 있다. 당시 시험을 치른 기지강당에는 감독하는 장교 1-2명에 보조하는 병들 4-5명이 있었는데, 형식적으로 시험을 치른다는 느낌이었다. 업무내용은 단순 반복, 지원 업무라서 조금 신경을 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군생활 중 힘들었던 것은 바로 위 고참인 30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아래의 후임병들까지 집합하여 같이 혼나는 거였다. 공식적인 집합에서는 때리지는 않았고 말로만 했다. 개별적으로 끌려가서 뺨을 맞든지 하였다. 망인으로부터도 질책을 당한 적이 있었다. 망인의 상병 진급 축하식 때 당시 최고참이 망인의 후임병들에게 ‘너희들 이제 상병 대우 똑바로 해줘라. 특히 30기 너희들은 맞먹지 말고’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망인의 경우 고참들이 보았을 때 일을 맡겨 놓아도 안심이 덜 되었던 것 같다. 대리시험 발각이 밤잠을 설칠 정도의 심각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대리시험을 시킨 사람은 병장이어서 심적 부담 자체가 다르다. 소외 18 상병은 화를 낼 때 화를 내고 아닐 때는 아닌 성격이었는데, 망인이 상병 진급할 때 축하한다는 말도 했고 30기들에게도 망인과 맞먹지 마라는 얘기도 하는 등 망인과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 소외 12(선임병) : 대리시험이 적발되어 망인이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고참들이 풀어 줘야 하는데 그런 걸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대리시험은 관행이었고 그날 시험도 아무런 부담 없어 대리로 보낸 것이었다. 중대분위기가 대리시험 적발 문제를 가지고 질책하는 분위기는 아니어서 당시 부대원들은 망인이 소외 4 중위에게서 받은 모욕감으로 괴로워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막연한 상황에 대해 걱정을 하였다고 생각했다. 우리 밑으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망인도 힘든 분위기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걱정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비중대의 업무특성상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라서 심리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구타나 욕설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자대 배치받으면 기본적으로 한 달은 공구수첩의 내용을 외우느라 거의 이틀에 한 번은 집합을 하고, 그때 힘들었다. 당시 하사와 병들 간에 알력도 있었는데 고참들이 자존심 때문에 졸병들을 많이 힘들게 했다. 암기를 제대로 못하면 ‘머리박아’를 했다. 본인의 동기인 소외 26이 도망한 사건 이후 집합도 많이 줄고 얼차려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팔굽혀 펴기, 앉았다 일어나기’ 정도로 했고, 518기 위로 병들 간 유대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망인은 30기들 세 명과 같이 중대로 전입했는데, 유급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성적인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30기들은 덩치가 있었고 성격도 붙임성이 있어 고참들은 망인을 특별히 더 신경을 썼다. 우리 동기인 소외 19가 특히 잘 챙겨 주었고, 망인이 배치된 2분대는 분대 중 가장 정이 많은 분위기였다. 영외자들은 망인을 많이 귀여워했다. 망인과 530기들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망인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긴 했지만, 일병 지나면서는 잘 어울린 것으로 기억되나, 크게 친하지는 않았다. 공군은 군대라고 하지만 직장개념이 더 컸고, 각자 업무를 마치고 저녁에 잠깐 보는 것 말고는 육군처럼 그런 유대관계는 없었다. 대리시험 적발 후 고참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건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지내다 보니 망인이 정말 심각하다고 느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소외 13(선임병) : 망인의 사망 전에 전역을 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해서는 모른다. 본인의 이등병 생활은 힘들었다. 기수표와 병·하사관의 관계, 공구수첩 암기 등의 교육을 받았는데 암기를 제대로 못하면 ‘머리박아’를 했다. 자신이 있을 때에는 구타도 많았다. 마대자루로 5대에서 10대 정도 엉덩이나 허벅지를 때리는 데 멍이 든다. 본인은 군생활하는 동안 10번 정도 맞고 10번 정도 때린 것 같다. 바로 밑 517기, 518기가 군기를 많이 잡았다. 기수표 외우기, 공구수첩 외우기, 병하사간 관계 교육 등은 조금씩 완화되긴 했지만 전역시까지 있었다. 그 외 가혹행위로는, 내무반 집합에서는 주로 ‘머리 박아’를 하거나 ‘엎드려뻗쳐’ 상태에서 발로 미는 정도였다. 보통 일병 3호봉이 되면 많이 풀어주고, 상병이 되면 혜택도 많아진다. 망인은 착하고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잘 웃곤 했는데 이등병 때는 웃는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다.

○ 소외 14(선임병) : 망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니 말수가 적었고, 겁도 많았으며, 행동과 말이 느려서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내무반을 사용한 적은 없다. 망인은 적응을 잘 못했던 것 같다. 같이 온 530기에게 고참 대우 받기를 원했는데, 대우를 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망인은 특별히 좋아했던 고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밉게 보지는 않았다. 조지면 주눅드는 스타일이라 덜 조졌다. 그나마 30기 애들한테 대우받도록 다들 신경을 썼다. 망인의 제일 큰 장점은 순하고 착하다는 것이었고 시키면 하려고 해서 그런 점은 다들 인정했다. 기수표 외우기, 영내 하사에게 경례 안 하기, 공구수첩 외우기 등 이등병 생활은 고달팠고 특히 □□□중대가 제일 군기가 세다고 소문이 났지만, 차차 적응이 되고 우리 중대는 계급이 올라가면 하나씩 풀어주고 하는 전통이 있다. 상병으로 진급하면 많이 대우를 받는다. 엎드려 뻗쳐 상태에서 엉덩이와 허벅지를 밀대 자루로 맞은 적이 한 번 있었다. 라인에서 정도가 심한 실수를 했다거나 하사에게 경례를 했다거나 하면 병장급들이 집합을 시키는데, 내무반에서는 주로 머리박아를 시키고 심하면 따귀 정도 맞는다. 정도가 심한 집합은 본인 기억으로는 3-4번 있었던 것 같다. 상병 이하 집합이었던 것 같은데 뺨을 때리기도 했고,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머리박기도 하였다. 망인이 실수로 비행기 흡입구 앞을 지나간 일로 인하여 집합한 적도 있다.

○ 소외 15(선임병) : 한동안 전입하는 병이 없다가 망인과 30기 3명 등 4명이 동시에 중대로 전입했다. 망인이 대리시험 때문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리시험이 적발된 날 중대 중사 1명의 음주사고가 있었는데, 사고 당일 예정된 대대장 교육은 위 대리시험 적발과 음주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대장 교육까지 잡혔다면 엄청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최소한 ‘군차렷’(단독군장 차림으로 근무하는 것)은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망인과 지내다 보니 좀 느리다는 느낌을 받았고 고참들이 30기와 비교하면서 망인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중대 내 고참들의 대화 속에서 망인이 상대적으로 굼뜨고 느리다는 사실을 자주 들었다. 라인 작업 중 영외자들의 지적이 있으면 병장들이 자존심 상해하면서 잔소리가 시작되는데, 망인은 그런 과정에서 의기소침해지고 위축되었던 것 같다. 18, 19기가 고참이 되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에는 하사와 병장 간의 갈등이 심해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졸병들이 극존칭을 쓰지 않도록 교육하고 작업할 때 병들이 잘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공구수첩 등을 악착같이 외우게 하였다. 당시에 졸병들은 고참과 하사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엄청 고생을 했다. 본인이나 망인이 힘들었던 것은 동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 소외 16, 17(후임병, 530기) : 내무반에서 졸병들이 하는 일은 기상맨, 화장실 청소, 대기실 청소 등이었는데, 망인은 일주일 정도만 했다. 어차피 망인은 고참이어서 처음부터 우리 30기 3명만 어울렸다. 망인에게는 고참 대접만 했다. 망인으로부터 맞아서 고막에 피까지 난 적이 있다. 망인은 하려고 하는 의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보통 졸병들은 힘들어도 상병만 달아봐라 하면서 지내온다. 당시 소외 18 병장도 군기 잡을 때는 그렇지만, 상병을 달면 대접을 해 준 사람이다.

○ 소외 18(선임병) : 중요한 시험이 아니라서 병장들은 후임병들에게 대리로 시험을 응시하게 하였다. 대리시험이 발각된 후 엄청 많이 짓밟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고 당일 새벽 중대 영외 하사의 음주운전 사고로 중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당일 아침 대대장 특별교육이 있다는 사실이 전달되었는데, 본인은 그 교육이 음주운전 때문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망인은 자신 때문이라고 오해를 한 것 같다. 망인은 업무 중 잦은 실수로 질책을 받았다.

○ 소외 19(선임병) : 망인은 업무를 많이 어려워했다. 업무 중 공구를 잘못 챙겨와서 질책을 당한 적이 있다.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한 번 만에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두세 번 반복한 적도 있다. 행동이 굼뜨고 해서 고참들이 많이 답답해하였다. 우리 중대의 경우 업무상의 실수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하게 했다. 당시 망인이 왔을 때만 해도 사소한 업무상의 실수가 있어도 수시로 집합을 했다. 자신이 망인과 같이 근무할 때에는 1주일에 2, 3회 정도는 집합했다. 고참들이 망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로 밑 후임들도 망인에게 고참 대우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망인은 졸병부터 상병이 될 때까지 계속 주눅든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병·하사 간 문제로 자신이 망인에게 지적한 것도 서너 번 된다. 우리는 많이 맞았고 22기까지는 때렸다. 보통 라인작업 끝나고 이글루 안에서나 분대 창고에서 밀대 자루로 맞았고, 성질 안 좋은 소병장의 경우는 공구인 쇠막대로 때리기도 했다. 내무반에서 머리박아 시키는 것은 일상이고, 가슴이나 뺨을 때리는 것도 다반사였다. 망인이 질책을 들을 때는 30기와 비교하는 말이 많았다. 고참들이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도 표정이 굳어지고 다른 사람보다 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망인은 ‘내놓은 쪽’에 속했다. 망인의 사망원인은 대리시험 발각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자신 같아도 아무 생각 없는 그런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빠졌지 않나 생각한다. 당시 망인이 상병진급을 했더라도 계급만 상병이었지 여전히 졸병 때의 모습이 남아 있어 고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 소외 6(후임병, 530기) : 망인이 529기여서 망인보고 고참 대우하라고 하여 뭔가 어색했다. 당시 우리는 8시에 항상 독서실에 집합을 했다. 주로 우리를 교육시켰던 사람은 23, 24, 25기들이었는데 말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노골적인 구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머리박아는 자주 했다. 어느 정도 적응기간이 지나고 망인이 우리 맞고참이라고 지시도 하고 청소상태를 검사하기도 했는데 사실 우리는 인정하기 싫었다. 군 생활 중 단독군장으로 운동장을 구보한 적이 없다. 망인이 낭심을 차이거나 구타를 당하거나 심한 구보를 하는 것을 본 적 없다. 당시 망인을 특별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고, 상병 달고는 아예 구타를 당할 일도 없었다.

○ 소외 20(선임병) : 다른 중대와 비교해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정비 중대의 업무 특성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었으며, 일을 잘하는 졸병이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망인은 사소한 일에 걱정을 많이 했다.

○ 소외 21(선임병) : 당시에는 대리시험이 관행이었다. 망인은 졸병 때 좀 어리버리했고, 다른 졸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주눅이 들어 있었다. 본인은 거의 매일 집합해서 머리박아를 했었고 구타도 자주 있었지만, 동기 중 한 명이 헌병대에 신고한 일 이후에는 노골적인 구타는 사라졌고 집합은 기본적으로 있었다.

○ 소외 25(선임병) : 당시 비행지원업무가 모든 것에 앞섰고, 대리시험이 관행이었다. 본인의 경우 사격을 대리로 가서 쏜 기억이 난다. 단에서도 공공연하게 다 아는 사실인데 시험 감독을 하는 그 장교는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리시험이나 대리사격 등 공공연하게 다 아는데 망인이 너무 예민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본인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부대의 특성상 정신없이 돌아갔고 고참이 되어도 쉴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망인이 주눅들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일병 말부터는 좀 웃었다. 상병을 달면 이제 큰 고생은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왜 그랬을까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망인이 친한 부대원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망인이 일병을 갓 달고 난 후 발로 망인의 엉덩이를 걷어찬 적이 있다. 망인은 사소한 업무상의 실수로 질책을 받았다. 보통 집합을 시켜서 군기를 잡을 경우, 망인이 겁을 먹고 몸을 약간 떠는 경우도 있었다. 일병 말까지는 그런 경향이 있었던 것 같고, 상병이 되면서부터는 조금씩 나아진 것 같았다.

○ 소외 27(선임병) : 고참들이나 장교들은 대부분 대리로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중대 비상대기 시간에 대리 시험자를 선발했다고 하는데 그런 자리에서 졸병이 거부를 못 한다. 대리시험 적발과 관련해 걱정을 해 주면서 별거 아니라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이 고인으로 하여금 폭풍전야의 상황으로 오해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고참들이 자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 ‘꼽창’을 만들었고, 소외 18과 같은 꼽창이 군기 잡는 역할을 했다. 간부들이나 하사관들이 보지 않는 이글루 안에서 밀대 자루로 때리기도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합을 시켜 졸병들을 갈구었다. 어쨌든 졸병시절에는 고달팠고, 상병을 달아야 좀 풀린다. 망인이 졸병 때는 자주 갈굼을 당했다. 일상생활에서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 중대는 상병을 달면 많이 풀어주는 분위기이나, 망인의 경우 상병을 달고도 경직된 모습을 오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망인은 고참들로부터 자주 질책을 들으면서 주눅이 들었다. 바로 밑 30기들과도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옛날처럼 노골적으로 구타를 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중대 분위기상 욕설을 듣고 ‘머리박아’ 상태에서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화가 난 고참에게 머리를 맞고, 발이나 손으로 가슴을 맞는 정도는 있었으며,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풀기도 해야 하는데 망인은 그럴만한 친한 고참이나 동기가 없어 힘들었던 것 같다.

○ 소외 28(선임병) : 당시 야간 비상대기자를 대신해 대리시험을 보았고, 대리시험은 업무 특성상 관행이었다. 단 본부에서도 알고 있기에 당시에는 대리응시행위 발각사실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대분위기는, 상병 4호봉을 달고 전입해서인지 모르나 대구 제◇◇전투비행단의 생활보다는 덜 힘들었다. 기장이나 영외자들이 졸병들의 업무 미숙을 병장들에게 지적하면 보통 집합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꼬투리로 군기를 잡았다. 장교와 하사관, 하사관과 병 사이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했고 따로 놀았다. 망인은 동기가 없어 힘들었던 것 같고, 530기 졸병들 군기 잡는 것도 어려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소외 2(선임병) : 사격이나 명단이 있는 행사의 경우 대리로 보내는 것은 관행이었다. 그날 아침까지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아침에 중대장도 대리시험을 지시했다는 것을 알았고, 근무자들을 대신해 대리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처벌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시험이 중요해서 시험 감독을 엄하게 하는 과정에서 대리로 응시한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모르나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이등병들이 저지르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인식을 하였다. 자신이 군생활 하는 도중에 군차렷은 2번 정도 한 것 같다. 대리시험으로 소외 3 병장과 같이 영창 15일의 징계를 받았다. 우리 중대에서 졸병이라 함은 일병 4호봉 정도까지는 말하는데, 고참들이 보기에 망인은 일병 말이나 상병을 달고서도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움츠러들고,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다. 그래서 고참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내무실 전체 집합에서 소외 13 병장이 망인에게 슬리퍼를 던진 것 같고, 소외 3 병장이 망인의 군기를 잡기도 하였으며, 그 외에도 밑 기수인 소외 29, 18, 25도 손을 좀 댔을 것이다. 망인은 업무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좀 느렸고, 집합할 때 다른 부대원들보다 더 군기가 든 모습을 보였다.

○ 소외 30(본부 감찰실 소속 업무보조) : 감찰실은 일반병들이나 하사관들이 접근하기 힘든 곳으로 감찰실에 출두한다는 것은 그만큼 병들에게는 두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망인이 대리응시한 시험은 공군본부 지휘검열을 대비한 장병학술평가이다. 이 사건 발생 이틀 전 학술평가에서 부정행위를 하다가 두 세 명이 적발되어 큰소리 좀 나고 이름이 적힌 일이 있었다. 감찰실에 오도록 해서 질책을 하고 재시험 명단에 추가시키는 것으로 처리를 한다. 그렇다고 크게 문제를 삼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망인의 부정행위가 일어나니까 깐깐한 소외 4 중위가 화가 났던 것이다. 망인의 사망원인은 지휘검열 대비 각종 교육·훈련과 시험에 대한 피로감과 스트레스, 대리시험 발각에 따른 부담감, 대리시험을 지시한 고참들의 질책이 잇따를 것이라는 불안, 최소한 외박이 중지되는 불이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했고, 혹은 ‘군차려’를 걱정했을 수도 있다. ‘군 차려’는 전 대대원이 단독군장 차림으로 근무를 하고 평소에 없던 구보나 총검술을 실시하며 정신교육도 수시로 실시하고, 더구나 영외하사관들도 영내에서 비상대기를 해야 한다. 당연히 장교나 하사관들의 정신적 긴장감이 더 할 것이고 그런 분위기라면 병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선임하사가 감찰실에 불려간다는 것은 중대사안이다.

○ 소외 31 중사 : □□□정비대대에서 병들이 하는 역할은 비행지원과 정비업무를 수행하는 부사관들의 조수 역할이다. 많이 바빴고 힘들었다. 망인은 내성적이고 소심했다. 정도가 보통 사람보다 심했다고 할 수 있다. 같이 온 30기 세 명과 비교할 때 느리고 서툴렀다. 공구를 제대로 챙겨오지 못하는 등의 사소한 실수나 안전사고와 관련된 실수가 다른 사람보다 잦았다.

○ 소외 1(당시 중대장) : 망인의 사망 당일 13시경 대대장 교육이 잡힌 것은 음주운전과 관련해서 교육을 잡은 것으로 기억한다. 대리시험의 관행에 대하여는 알고 있었다. 본인도 회의가 길어져 대리시험을 지시했다. 병들 간의 사적인 제재나 가혹행위, 구타행위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 한편, 위원회의 의뢰에 따라 망인의 심리상태에 대하여 좋은마음 인지행동치료연구소의 임상심리전문가 소외 22가 작성한 심리학적 소견에 따르면, ‘망인은 소심하고 순종적인 성격과 평소의 비난과 무시로 일관된 어리버리한 사람이라는 편견, 문제 발생 후 부정확했던 사후처리와 그에 따른 지시 내지는 위로가 없었던 상황에서 망인이 지속적으로 보여 온 위축과 긴장감에 대한 확대해석, 그로 인한 극단적인 공포와 공항상태로의 급격한 변화가 망인에게는 절망, 비관 그리고 분노를 자극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극단적인 자기 연민과 함께 가족이나 지인들에 대한 걱정끼침에 대한 자괴감이 동반되면서 적어도 망인에게는 자살이라는 불가피한 선택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기재되어 있다.

[인정근거] 앞서 든 각 증거, 갑 제1호증의 1 내지 83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라. 판단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제5항 제4호 에서 제외사유로 규정하는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이라 함은 그 문리적 의미상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사망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국가를 위하여 공헌하거나 희생한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응분의 예우를 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고 국민의 애국정신 함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의 취지( 법 제1조 )와 그 규정형식 등에 비추어, 군인이 상급자 등으로부터의 가혹행위 또는 직무수행 중의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직접적인 동기나 중요한 원인이 되어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사망이 아니라고 할 수 없고, 그 자살이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자살자의 나이와 성행 및 직위, 직무수행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자에게 가한 긴장도 내지 중압감의 정도와 지속시간, 자살자의 신체적·정신적 상황과 자살자를 둘러싼 주위상황, 우울증의 발병과 자살행위의 시기 기타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기존 정신질환의 유무 및 가족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히 판단하여야 한다( 대법원 2004. 3. 12. 선고 2003두10404 판결 , 2006. 9. 14. 선고 2005두14578 판결 등 참조).

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망인의 소속 중대의 군기가 다른 부대에 비하여 비교적 엄하였고, 선임병들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군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망인이 군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망인의 업무처리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잦은 집합 등을 통하여 망인을 자주 질책하였으며, 그 와중에서 구타나 가혹행위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한편 중대 내에 망인의 입대 동기는 없었고 후임병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였으며, 그 와중에서 원래 소심한 성격이었던 망인이 더욱 의기소침해지고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대리시험 적발 당시 망인은 상당한 인격적 모멸감과 수치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고, 그로 인하여 또다시 상급자들로부터 받게 될지도 모르는 질책과 소속 중대원들이 망인의 잘못으로 엄격한 군기훈련을 받게 될 경우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이나 위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절망감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 비추어 망인의 군 복무와 관련된 정신적 스트레스와 대리시험 적발로 인한 부담감이 망인의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는 보인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더라도 망인이 소속된 중대에서의 평소 망인에 대한 구타나 가혹행위, 집단따돌림의 정도가 망인이 도저히 수인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아니하고, 망인의 대리응시 행위로 말미암아 망인에게 가하여질 상급자들의 질책이나 시험감독관의 망인에 대한 처분의 정도 역시 통상의 군인이라면 충분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것으로 보여 위와 같은 스트레스 및 정신적 부담감이 망인으로 하여금 우울증 등으로 인한 심신상실 내지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삶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에 이른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고, 망인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 밖에 망인의 나이와 성행, 망인을 에워싸고 있는 주위상황, 가혹행위 등과 자살행위의 시기 및 장소의 근접성, 망인이 자살하기 전에 남긴 유서의 내용과 그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망인의 정신상태 및 심리상태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망인의 자살은 나약한 성격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것으로 보일 뿐, 그것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정신적 스트레스 및 부담감 등으로 인하여 정상적이고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망인의 사망은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이와 같은 전제에서 한 피고의 이 사건 처분은 적법하고, 이를 다투는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3. 결론

원고의 청구는 이유 없으므로, 이를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별지 관계 법령 생략]

판사 손현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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