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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2015.5.1.선고 2014나2028266 판결
손해배상(기)
사건

2014나2028266 손해배상(기)

원고항소인

A

피고피항소인

대한민국

제1심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2014. 7. 15. 선고 2013가합527527 판결

변론종결

2015. 3. 6.

판결선고

2015. 5. 1.

주문

1. 제1심판결 중 아래에서 지급을 명하는 원고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48,888,888원과 이에 대한 2015. 3. 6.부터 2015. 5. 1.까지는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 원고의 나머지 항소를 기각한다.

3. 소송 총비용 중 70%는 원고가, 나머지는 피고가 부담한다.

4. 제1항의 금전 지급 부분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및항소취지

제1심판결을 취소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119,444,444원과 이에 대한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이유

1. 기초 사실

다음 사실은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제1, 4호증의 기재와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할 수 있다.

가. 한국전쟁 중인 1950. 9. 1. 14:00경 포항 앞바다에서 해안봉쇄 및 지상군의 함포 사격지원을 수행하던 미 태평양함대 소속 구축함 헤이븐호(DD 727 DE Haven)가 10여분 동안 포항시 북구 환여동에 있는 모래사장(송골해변)으로 함포 15발을 포격(이하 '이 사건 포격'이라 한다)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 위 모래사장에 있던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되었다(이하 '포항 미군함포 사건'이라 한다).

나. 원고는 망 D의 아들이며, 망 E의 형이다.

2. 손해배상책임의 발생

가. 망 D와 망 E가 포항 미군함포 사건으로 사망하였는지 여부

1)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정리법'이라 한다)의 목적과 내용, 이에 의하여 설치된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정리위원 회'라 한다)의 활동 방식, 조사보고서의 내용 등을 종합하여 보면,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에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유력한 증거자료가 되지만, 조사보고서나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처분 내용이 법률상 '사실의 추정'과 같은 효력을 가지거나 반증을 허용하지 아니하는 증명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조사보고서 중 해당 부분을 개별적으로 검토하는 등 개별 당사자가 해당 사건의 희생자라는 점을 증거에 의하여 확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더구나 조사보고서 자체로 개별 신청대상자 부분에 관하여 판단한 내용에 모순이 있거나 스스로 전제한 결정 기준에 어긋난다고 보이거나, 조사보고서에 희생자 확인이나 추정 결정의 인정 근거로 나온 유족이나 참고인의 진술 내용이 조사보고서의 사실 확정과 불일치하거나, 그것이 추측이나 소문을 진술한 것인지 또는 누구한테 전해 들은 것인지 아니면 직접 목격한 것인지조차 식별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등으로 그 진술의 구체성이나 관련성 또는 증명력이 현저히 부족하여 논리와 경험칙상 조사보고서의 사실 확정을 수긍하기 곤란한 점들이 있다고 보이는 경우에는 참고인 등의 진술 내용을 담은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원시자료 등에 대한 증거조사 등을 통하여 사실의 진실성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 2014. 5. 29. 선고 2013다217467, 217474 판결 등 참조).

2) 갑 제1, 3, 4, 6호증의 기재와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다음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①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포항 미군함포 사건을 조사하여 2010. 6. 22. 망 D, 망 E(이하 '망인들'이라 한다)를 위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하는 결정을 하였다.

② G는 "원고의 아버지와 동생이 송골계곡에서 변을 당했나요"라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의 질문에 "A의 집안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직접 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직접 볼 경황은 없었던 것이고, 다만 어디서 어떻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직접 본 사람이 말해서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인데, 한 동네에서 없던 일을 말할 수 없고 그런 사실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라고 진술하였고, H도 망인들의 희생 목격 또는 제삿날이 같은 시기 등 희생자에 속하는 사실을 진술하였다.

③ 원고는 1940. 11. 19. 생으로 이 사건 당시 이 사건 피격 현장에 있었는데, 폭격 전후 상황을 말하라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의 질문에 "계곡 중간에 약간 푹 들어간 지점에 아버지가 동생 E를 안고 돌들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파편이 날아와 동생의 배를 치고 아버지의 왼쪽 갈비뼈를 치고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동맥이 터졌는지 피를 많이 흘리고 말할 힘도 없으신 중에 동생을 돌보라고 겨우 말하시고 바로 운명하였고, 동생은 배가 갈라졌는데 말도 못하는데 목이 마른지 자꾸 물을 달라고 했다. 집으로 옮겨서 응급조치로 솥의 속 검정을 긁어서 흰 실에 묻히고 바늘로 찢어진 부위를 어머니가 꿰맸는데 동생은 따갑고 아프다고 아우성이고, 우리는 피비린내 때문에 얼굴을 돌리고 있는데, 그래도 어머니가 빠져나온 창자를 어떻게 배에 다시 넣고 몇 군데라도 꿰매고 옷가지로 꽁꽁 묶어 매어 두었는데, 며칠을 물을 달라고 하여 수건에 조금씩 주다가 3일째는 어머니도 포기하시고 물이라도 실컷 먹으라며 물을 주니 물을 먹고 나더니 조금 있으니 바로 죽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한 사실이 있느냐"는 조사관의 질문에 "아버지는 해변에 돌아가셔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웃집 아저씨가 땅을 파서 겨우 시신을 가릴 정도로 파서 묻고 급히 동생을 안고 집으로 피했던 것입니다. (중략) 집으로 와서 I의 아버지와 J씨를 불러와서 시신을 수습해서 지금 여남곶 등대 바로 밑에 매장했습니다. 동생은 오후 6시에 운명했는데 어머니가 산 밑말뚝에 묻었는데, 개와 짐승이 시신을 훼손해서 어머니가 다시 시신을 수습해서 우리 집 뒤쪽 산위 밭 있는 계곡에 다시 묻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④ 망 D의 제적등본에는 사망일시가 1954. 7. 18.로 기재되어 있고, 망 E의 제적등 본에는 사망일시가 1964. 2. 15.로 기재되어 있다. "호적에는 희생자들의 사망일시가 어떻게 기재되어 있나요"라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의 질문에 원고는 "사실과 다르게 기재된 것은 당시 전쟁과 군 입대 등 경황이 없어서 그렇게 늦게 신고하여 다르게 기재된 것입니다."라고 진술하였고, 이에 대하여 H이 사실과 일치한다고 진술하였다.

3) 위와 같은 사실을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살펴본다.

G는 망인들이 사망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망인들의 사망 당시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사람으로서 자신이 보거나 듣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어, 전문 진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원고도 사건 당일 상황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으며, H도 희생을 목격하였거나 제사일이 같다는 점을 확인하여 주고 있으므로, 각 진술의 신빙성이 있다. 그 밖에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상 망인들에 대한 판단 부분에 모순이 있거나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스스로 전제한 결정 기준에 어긋난다고 보이거나, 조사보고서에 희생자 확인이나 추정결정의 인정 근거로 나온 유족이나 참고인의 진술 내용이 조사보고서의 사실 확정과 불일치하거나, 그것이 추측이나 소문을 진술한 것인지 또는 누구로부터 전해 들은 것인지 아니면 직접 목격한 것인지조차 식별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등 그 진술의 구체성이나 관련성 또는 증명력이 현저히 부족하여 논리와 경험칙상 조사보고서의 사실 확정을 수긍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망 D는 이 사건 포격 당일인 1950. 9. 1., 망 E는 포격 후 3일이 지난 1950. 9. 4.경 이 사건 포격으로 사망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나. 피고의 손해배상책임

1) 앞서 든 증거에 의하면 다음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① 국군과 유엔군은 부산을 지키기 위해 1950년 8월 초경부터 9월 중순경까지 '낙동 강방어선'을 형성하고 결전을 벌였다. 낙동강방어선의 북동쪽을 담당한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쪽으로 5개 사단(제1, 제6, 제8, 제3, 수도 사단)을 배치했고, 방어선의 남서쪽을 담당한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남쪽으로 3개 사단을 배치했다.

② 1950년 8월경부터 9월경에 있었던 포항전투는 대구를 함락하고 부산 교두보를 탈취하려는 인민군 작전의 일환이었다. 이 사건 포격 당일(1950. 9. 1.)에는 인민군 5사단과 국군 3사단 제23연대 간에 천마산(93고지)을 두고 16차례나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천마산은 이 사건 포격이 행해진 송골해변으로부터 서북쪽 3~3.5m에 위치한다.

③ 미 해군 주도의 유엔 해군은 북한군의 해상에서의 일체의 활동을 봉쇄하는 기본적인 작전에 더하여 함재기와 함포 사격을 통해 지상군에 대한 근접지원 작전도 전개하고 있었다.

지상군에 대한 해군의 전형적인 함포지원 체계는 다음과 같다. 해군의 화력 지원함정 등에 위치하는 포술장교는, 각급 육군 제대에 나가 있는 함포사격연락장교(NGLO) 및 지상에 나가 있는 해군 관측자(spotter)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함포지원요청을 접수하고 함포사격을 통제한다. 지상군에 위치하는 육군포병장교 중에서 임명된 함포사격장교 (NFO)는, 해군에서 나온 함포사격연락장교의 보좌를 받아 해군의 화력지원을 계획, 요청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연대나 대대급에는 해군장교인 함포사격연락장교나 해안사격 통제반(SFCP)이 파견되어 함포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포항 인근 해역 함포지원 체계는 위와 같은 전형적인 편성과 달리 운영되었다. 1950. 8. 26. ~ 9. 24. 사이 헤이븐 호가 속한 96.5 기동전대의 중요한 임무는 동해 안에서 인민군 5사단과 대적하던 국군 3사단 등에 대한 근접함포지원이었는데, 96.5 기동전대는 숙련된 해군의 항공정찰과 자격을 갖춘 해안사격통제반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당시 야간 사격이나 기 계획 요청 1) 수행에 국군 3사단에 파견됐던 미 군사고문단 F 중령 등이 한국말을 쓰는 지상군과 영어를 쓰는 해군 함대 간의 의사소통 및 합동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화력지원에 대한 통제는 해군 헬리콥터가 수행한 것이 아니라 육군 L-5 연락기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관측병 이 동승하여 수행했다.

④ 이 사건 포격이 있기 10여 일 전인 1950. 8. 20.경부터 환호동과 여남동 주민 및 인근 포항 북부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피난민들이 송골해변에 모여 있었다. 피난민은 약 1,000여 명이었는데, 주로 어린아이, 노인, 여자들이었다. 당시 송골해변은 폭 20m의 모래톱이 펼쳐진 백사장의 뒤에 경사가 80도인 가파른 절벽이 있고 바다 쪽으로 노출된 지형이었다. 피난민들이 송골해변에 모여 있는 동안, 앞바다에는 미군의 군함이 정박해 있었고, 정찰기가 해변을 따라 자주 날아다녔다. 1950. 9. 1. 이 사건 포격 직전에도 정찰기가 송골해변을 정찰하였는데, 그 정찰기는 국군 3사단 소속이었다.

⑤ 화력지원함의 역할을 맡은 96.5 기동전대 소속 구축함 헤이븐 호는 1950. 9. 1. 6:27 경부터 국군 3사단 함포사격반에 의해 작성되어 전날 미리 요청받은 기 계획 요청에 따라 함포사격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헤이븐 호는 같은 날 14:00경 갑자기 국군 3사단(또는 3사단 소속의 어느 연대)의 해안사격통제반으로부터 함포사격 명령을 받았다. 헤이븐 호의 함포지원반이 표적을 확인해 본바, 함포사격 지점이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송골해변이었다. 이에 헤이븐 호의 함포사격반은 해변의 표적은 피난민들이라고 알리면서, 그 함포지원 요청에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지 표적의 재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군 3사단의 해안사격통 제반을 구성한 일원인 해군연락장교는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으면서도 표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며, 피난민 중에 적군이 섞여 있다는 육군의 정보가 있고 육군이 포탄을 발사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고 하면서 재차 함포사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헤이븐 호의 함포사격반은 10여 분 동안 15발의 포탄을 발사하였다. 헤이븐 호에서 발사된 포탄은 5/38구경 AAC 5발과 5/38구경 VT 10발이었다. 그리고 해변 정찰을 수행하던 국군 3사단의 정찰기에 무선 교신하여 포격 결과를 문의한바, 정찰기는 피격된 사람이 대부분 민간인임을 확인하여 주었고, 이 보고를 받은 해안사격통제반이 포격중지에 동의했다.

⑥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서는 이 사건의 발단을, 송골해변에 있던 피난민들이 무리를 지어 남쪽으로 급히 이동하려는 움직임을 국군 방어선 부근을 경계하고 있던 정찰기가 발견하였고, 이 움직임을 보고받은 해안사격통제반이 '피난민 중에 북한군이 섞여 있다'는 육군의 정보 또는 작전지침에 따라 함포사격을 결정하였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2) 위 인정 사실과 앞서 든 증거에서 알 수 있는 아래 사정을 종합하면, 미 해군이 망인들에게 이 사건 포격을 개시한 데에는, 피고 소속 군인이 피난민 가운데 북한군이 섞여 있으므로 포격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피고는 이 포격을 요청함에 있어서의 중대한 과실로 말미암아 미군과 공동으로, 헌법에 보장된 망인들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 생명권 등을 침해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망인들과 유족인 원고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피고는 제헌헌법(1948. 7. 17. 제정되어 1960, 6. 15. 개정되기 전의 것) 제27조("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받은 자는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대하여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에 따라 소속 공무원들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말미암아 망인들과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① 이 사건 포격 발생 당시, 포항 93고지 주변에는 국군 3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헤이븐 호가 속한 96.5 기동전대의 중요한 임무는 인민군 5사단과 대적하던 국군 3사 단 등에 대한 근접함포지원이었다. 헤이븐 호는 국군 3사단 함포사격반에 의해 작성된기 계획요청에 따라 함포사격을 수행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국군 3사단(또는 3사단 소속의 어느 연대)의 해안사격통제반으로부터 함포사격 명령을 받았다.

그 당시 미군사고문단 소속 F 중령이 국군 3사단의 해안사격통제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위 해안사격통제반이 이 사건 포격을 결정함에 있어서 국군의 의사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재량권을 가지고 이를 결정하였다고 볼 만한 자료는 없다.

해안사격통제반은 육군과 해군으로 함께 구성되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육군이 포격 여부를 결정하고 해군은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으며(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 제126쪽 참조), 국군 3사단의 해안사격통제반도 육군의 요청이 있다는 이유로 이 사건 포격을 재차 명령한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포격은 국군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봄이 타당하다.

② 이 사건 포격이 있기 10여 일 전부터 송골해변의 개방된 장소에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고, 해상에는 미군 함정이 정박하여 있었으며, 국군 3사단 소속 정찰기가 수시로 그곳을 정찰하고 있었으므로, 국군 3사단과 미 해군은 이 사건 포격 현장에 모여 있는 피난민들이 대부분 비전투원이고 민간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더욱이 헤이븐 호는 이 사건 포격 당시 송골해변에서 약 800m 떨어진 해상에 정박하면서 기 계획요청에 따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그 위치에서는 해변에 있던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고, 또한 이들이 민간인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헤이븐 호는 해안사격통제반으로부터 함포사격 명령을 받자, 해변의 표 적은 피난민들이므로 함포지원 요청에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재확인 요청을 하였다. 그런데도 현장에 있지 않았던 해안사격통제반에서는 다시 확인도 않은 채 피난민 중에 적군이 섞여 있다는 육군의 정보가 있고 육군이 발사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는 이유로 재차 함포사격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헤이븐 호에서 표적 재확인까지 요청한 상황이라면, 설령 피난민 가운데 인민군이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군과 미군으로서는 정찰기 등을 통해 다시 한 번 송골해변을 살펴봄으로써 그 정보가 정확한지, 인민군의 수는 어느 정도 되는지를 파악하여 공격의 방법을 충분히 달리 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피난민들이 무리를 지어 급히 이동한 것은 당일 오후 갑자기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일 뿐, 그들 사이에 인민군이 섞여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 안사격통제반이 포격 결과를 확인한 정찰기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곧바로 포격 중지에 동의하였던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당시 송골해변 주변은 적과 직접 대치한 교전지는 아니었고, 정찰기가 저공비행으로 피난민들 상공을 정찰한 후 조금 지나 포격이 실시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국군이나 미군은 포격을 실시하게 되면 피난민들이 상당수 희생될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헤이븐 호에서 발사된 ACC와 VT포탄은 모두 과녁 부근에서 폭발하여 콩알처럼 크고 작은 파편이 넓은 범위에 확산되는 폭탄으로 정확성 및 파열효과가 양호하여 포격 시 인명살상 효과가 크다. 이에 비추어 보면, 결국 미군도 송골해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피난민으로서 민간인임을 충분히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목적으로 소리만 요란하거나 빛만 번쩍이는 공포탄을 먼저 발사하는 등 조치를 하지 아니한 채 곧바로 인명살상용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국군과 미군은 이 사건 포격을 요청하고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국제인도법과 전쟁법의 근본 취지를 위반한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③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서는 포항 미군함포 사건에 관하여 '치열한 전투 중에 발생한 과실에 의한 우발적 결과가 아니고, 상부명령과 결합되어 발생한 피난민에 대한 고의성이 있는 행위'였고, '전쟁수행방법에서 전쟁과 관련이 없는 자에 대한 살해 및 불필요한 공격행위를 한 것'으로서, '군사적 필요의 요건인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적 이익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다.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완성 여부

1) 피고의 항변과 이에 대한 원고의 주장

피고는, 망인들이 사망한 1950년 9월경으로부터 5년이 경과한 2013. 6. 21. 이 사건 소가 제기되었으므로 원고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가 완성되어 소멸하였다고 항변하고, 이에 대하여 원고는 피고의 이러한 항변은 권리남용이라고 주장한다.

2) 판단

가)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 동안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하게 되고(1921. 4. 7. 조선총독부법률 제42호로 제정되고, 1951. 9. 24. 법률 제217호로 제정된 구 재정법 제82조에 의하여 폐지되기 전의 구 회계법 제32조), 이 사건 소가 망인들이 사망한 1950. 9. 1.경 또는 1950. 9. 4.경으로부터 5년이 경과한 2013. 6. 21. 제기되었음은 기록상 명백하다.

나) 다만 소멸시효를 이유로 한 항변권의 행사도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 후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이를 신뢰하게 하였고, 채무자가 그로부터 권리 행사를 기대할 수 있는 상당한 기간 내에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다면,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1. 9. 8. 선고 2009다66969 판결 등 참조).

피고가 과거사정리법의 제정을 통하여 수십 년 전의 역사적 사실관계를 다시 규명하고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그 실행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아니한 이상, 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피해자 등이 국가배상청구의 방법으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사법적 구제방법을 취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수용하겠다는 취지를 담아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파생된 법적 의미에는 구체적인 소송사건에서 새삼 소멸시효를 주장함으로써 배상을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취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위와 같이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이익을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신뢰를 부여한 경우에도 채권자는 그러한 사정이 있은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여야만 채무자의 소멸시효의 항변을 저지할 수 있는데, 이때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행사가 있었는지 여부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 신뢰를 부여하게 된 채무자의 행위 등의 내용과 동기 및 경위, 채무자가 그 행위 등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한 목적과 진정한 의도, 채권자의 권리행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하고, 그 '상당한 기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상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여 단기간으로 제한되어야 할 것이므로 개별 사건에서 매우 특수한 사정이 있어 그 기간을 연장하여 인정하는 것이 부득이한 경우에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경우 그 기간은 아무리 길어도 민법 제766조 제1항이 규정한 단기소멸시효기간인 3년을 넘을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다) 위와 같은 법리에 비추어 살피건대, 원고는 피고가 망인들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을 하여 피고가 소멸시효의 이익을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신뢰를 부여한 2010, 6. 22.부터 3년이 경과하기 전인 2013. 6. 21.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는바, 앞서 인정한 사실과 이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다음 사정, 즉 피고가 과거사정리법을 통하여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 및 유가족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천명하여 원고로서는 피고가 한국전쟁 전후 희생사건에 대한 배·보상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등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하였으리라고 보이는 점, 그럼에도 피고가 현재까지 아무런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자 원고는 비로소 피고를 상대로 개별적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에서는 원고가 진실규명결정 이후 단기소멸시효의 기간 경과 직전까지 피고의 입법적 조치를 기다린 것이 상당하다고 볼 만한 매우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원고는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제할 만한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 행사를 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은 이유 없다.

3. 손해배상의 범위

가. 위자료의 액수

망인들과 그 유족인 원고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겪었을 정신적 고통, 그 후 상당 기간 계속되었을 경제적 어려움, 이 사건 불법행위의 내용과 정도, 유사 사건과의 형평, 망인들의 사망 당시 일실수입 산정을 위한 통계소득 자료가 없어 망인들에 대한 일실수익을 산정할 수 없는 점, 다만 이 사건은 전쟁 수행 중, 특히 인근 지역에서 적군과의 치열한 교전이 치러지고 있었던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점, 피고보다는 민간인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포격을 한 미군 측에 더 주도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 등 이 사건 기록과 변론에 나타난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망인들에 대하여는 각각 4,000만 원, 유족인 배우자에 대하여는 2,000만 원, 부모와 자녀에 대하여는 400만 원(다만 망 E에 대하여는, 본인 사망에 대한 위자료를 인정하고 망 D 사망 후 3일 만에 사망하였으므로, 부친 망 D의 사망에 대한 위자료를 따로 인정하지 않는다), 형제자매에 대하여는 200만 원을 위자료로 정함이 상당하다.

나, 상속관계

1) 망 D가 1950. 9. 1. 사망한 사실, 망 E가 1950. 9. 4. 사망한 사실은 앞서 보았고, 갑 제2, 6호증의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망 D가 사망할 당시 호주는 K인 사실, 망 D의 처이자 망 E의 모인 L이 1986. 11. 10. 사망한 사실, 원고, 망 E 외에도 C, B이 망 D와 L의 직계비속인 사실, B은 1963년경 혼인한 사실이 인정된다. 2) 위 각 사망에 따른 상속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망 D의 위자료에 대한 상속관계: 1960. 1. 1. 민법이 공포시행되기 전에는 조선민 사령 제11조의 규정에 의하여 친족 및 상속에 관하여는 관습에 의하도록 되어 있었고, 호주 아닌 가족이 사망한 경우에 그 재산은 동일 호적 내에 있는 직계비속인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상속된다는 것이 당시 우리나라의 관습이었다(대법원 1990, 2. 27. 선고88다카33619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따라서 망 D 사망은 호주 아닌 가족의 사망이므로 그 직계비속인 원고, C, B, 망 E가 망 D의 위자료를 1/4 지분씩 상속한다. ②. 망 E의 사망에 따른 상속관계: 호주 아닌 미혼의 가족이 사망할 경우 그 유산은 동일 가에 있는 부가, 부가 없을 때에는 모가, 모가 없을 때에는 호주가 상속하는 것이 1960. 1. 1. 민법이 공포시행되기 전 우리나라의 관습이다. 따라서 망 E의 경우 가족인 미혼 남자의 사망이고, 당시 부친인 망 D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동일 호적 내에 있는 모친 L이 단독으로 망 E의 재산[망 E 본인 위자료 4,000만 원, 부친 망 D의 위 자료에 대한 상속분 1,000만 원(= 4,000만 원 × 1/4)]을 상속한다. ③ L의 사망에 따른 상속관계: 구 민법(1990. 1. 13. 법률 제4199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009조(법정상속분) 제2항에 의하면 동일가적 내에 없는 여자의 상속분은 남자의 상속분의 4분의 1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L의 사망으로 인한 재산은 원고, C가 4/9 지분씩, 당시 혼인하여 동일가적 내에 없었던 B은 1/9 지분을 상속한다. 3) 결국 원고는 다음과 같은 위자료를 상속한다.

① 망 D의 사망으로 인한 상속분 10,000,000원(= 망 D의 위자료 4,000만 원 × 1/4) ② L의 사망으로 인한 상속분 32,888,888원[= {망 D의 사망에 대한 위자료 2,000만 원 + 망 E의 사망에 대한 위자료 400만 원 + 망 E의 사망에 따른 상속재산 5,000만 원(4,000만 원 + 1,000만 원)} X 4/9, 원 미만 버림]다. 소결론

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48,888,888원[= 상속 위자료 42,888,888(10,000,000원 + 32,888,888원) + 고유 위자료 6,000,000원(망 D의 자로서 4,000,000원 + 망 E의 형제로서 2,000,000원)과 이에 대하여 당심 변론종결일인 2015. 3. 6.부터(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9다103950 판결 참조) 피고가 이행의무의 존부와 범위에 관하여 다툼이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당심 판결 선고일인 2015. 5. 1.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4. 결론

원고의 청구는 위 인정 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이를 기각하여야 한다. 제1심판결은 이와 일부 결론을 달리하여 부당하므로, 원고의 항소를 일부 받아들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재판장판사이진만

판사정재오.

판사장철익

주석

1) 함포지원 요청은 기 계획요청과 긴급요청으로 구분된다. 전형적인 기 계획요청은 지상군 중대 대대 연대 사단 군단에 이르는

지휘계통으로 요청하며, 지상군 군단에서 해군 함대사와 협조하여 지원하는 것이다. 긴급요청은 사전에 기획할 수 없는 임시

표적이나 기 계획 요청에서 누락, 지연된 표적에 대해 요청되는 형태로서 함포사격연락장교 또는 해군 관측자에 의해 요청되

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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