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2013가합526685 손해배상(기)
원고
별지 1. '원고들 목록' 기재와 같다.
피고
대한민국
변론종결
2014. 12. 17.
판결선고
2015. 1. 14.
주문
1. 피고는 별지2. '인정금액표'의 '원고명'란 기재 각 원고들에게 같은 표 '인정금액'란 기재 각 돈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2014. 12. 17.부터 2015. 1. 14.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돈을 각 지급하라.
2. 원고 A의 청구 및 원고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의 각 나머지 청구를 각 기각한다.
3. 소송비용 중 원고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를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과 피고 사이에 생긴 부분은 피고가 부담하고, 원고 A와 피고 사이에 생긴 부분은 원고 A가 부담하며, 원고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와 피고 사이에 생긴 부분의 1/3은 위 원고들이, 나머지는 피고가 각 부담한다.
4.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들에게 별지 3. '상속관계 및 손해금액표'의 '일부청구액'란 기재 각 돈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1953. 7. 27.부터 이 사건 판결 선고시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이유
1. 인정사실
가. 대전형무소 희생사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정치·사상범, 징역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일반사범과 대전지역에서 예비검속되어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 6. 28.부터 1950. 7. 17.까지 사이에 대전 동구낭월동 산내초등학교 인근 산기슭 골령골에서 충남지구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절차 없이 집단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이하 '대전형무소 회생사건'이라 한다).
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정리법'이라 한다)에 따라 설치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정리위원회'라고 한다)는 대전형무소 회생사건의 관련자들로부터 진실규명신청을 접수하여 사건을 조사한 끝에 2010. 6. 22, (경정결정일 2010. 12. 7.) 별지 2. '인정금액표'의 '희생자'란 기재 36명 1)(이하 '망인들'이라 한다)이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어 1949. 7. 2.부터 같은 달 4.까지 사이에 각 7년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2), 한국전쟁 발발 후 1950. 7. 3.부터 같은 달 5.까지 사이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전 주둔 헌병과 대전 지역 경찰에 의해 법적절차 없이 집단총살당한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의 진실규명 결정을 하였다.
다. 당사자들의 신분관계
원고들은 망인들의 유족들이고 그 친족관계는 별지 3. '상속관계 및 손해금액표'의 '관계'란 기재와 같다.
[인정 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1 내지 37, 73 내지 86, 97호증(각 가지번호 포함, 이하 같다), 변론 전체의 취지
2. 손해배상책임의 발생
가. 청구원인에 관한 판단
1) 과거사정리법은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제정되었고(과거사정리법 제1조), 위와 같은 목적으로 설치된 정리위원회는 조사대상 사건 유족 등의 신청을 받은 다음 조사관들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신청된 대상자가 조사대상 사건의 희생자인지를 심의하여 위원 과반수의 결정으로 희생자 확인결정, 희생자 추정결정 또는 진실규명 불능결정을 하였는바, 과거사정리법의 목적과 내용, 정리위원회의 활동 방식, 조사보고서의 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 및 이를 통하여 개별 신청대상자가 각 조사대상 사건의 희생자라고 한 결정은 정리위원회 나름의 조사방식에 따른 자료조사 등을 거쳐 사실발견을 한 것으로서, 정리위원회의 희생자 확인결정 또는 추정결정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인정근거의 연관성이나 신빙성 등에 대한 심사를 할 것도 없이 그 대상자는 모두 군이나 경찰 등 국가에 의한 희생자라는 사실이 다툼의 여지가 없이 확정된 것이고 그로 인한 국가의 불법행위책임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에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력한 증거자료가 된다(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판결 등 참조).
2) 살피건대 앞서 든 인정사실, 앞서 든 증거들, 갑 제38 내지 72, 87 내지 96, 99, 100호증의 각 기재 및 영상과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 AC는 1949. 9. 30.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국가보안법(1949. 12. 19. 법률 제85호로 전부 개정되기 전의 것) 제1조 제3호 및 군정법령(1961, 7. 15. 구법령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 법률 제659호로 폐지되기 전의 것) 제19호 제4조 나항 위반의 점이 인정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 영등포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사실, ② 고등군법회의 명령문과 그 별지 형식의 수형인명부에는 AC를 제외한 나머지 망인들이 1949. 7. 2.부터 1949. 7. 4.까지 사이에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일률적으로 구 국방경비법(1962. 1. 20. 군법회의법 제1004호로 폐지되기 전의 것) 제32조 및 제33조의 적에 대한 구원, 통신연락 및 간첩의 점이 인정되어 각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사실과 함께, 그 '복형장소'로 대전형무소가 기재되어 있는 사실(수형인명부상 AD는 AE으로, AF은 AG으로, AH은 AI으로, AJ는 AK로, AL은 AM로, AN는 AO로 기재되어 있으나, 모두 본적지가 일치하고 당시 위 망인들이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이름으로 호칭되었다는 참고인들의 진술에 비추어 동일인임을 인정할 수 있다), ③ 망인들의 유족들이 망인들이 체포되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후 망인들이 대전형무소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거나 대전형무소에 면회를 가기도 하였으나 전쟁 발발후에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는 점에 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거나, 망인들처럼 제주 4·3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대전형무소에 수용되었다는 다른 희생자의 유족이나 이웃이 같은 마을의 희생자로 망인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들이 당시 같은 마을에 살다가 함께 체포되어 끌려갔다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점, ④) 한국전쟁 발발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 수는 약 4,000명이었고, 이중 2,000명 정도는 정치·사상범이었는데, 내무부 치안국은 1950. 6. 25.부터 같은 달 30.까지 전국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서 구금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의 비상통첩을 잇달아 하달하였고,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은 1950. 7. 1. 새벽 대전형무소에 '미명을 기해 대규모 공습이 있으니 공산당 우두머리를, 좌익의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하달하였으며, 1950. 7. 2. 대전에 주둔하던 제2사단 헌병대가 대전형무소 소장대리에게 '좌익수들, 즉 포고령, 국방경비법위반 등 주로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간첩죄, 보도연맹원, 그리고 10년 이상 강력범을 인도하라'고 요구하자, 대전형무소 소장대리는 국가보안법, 포고령, 국방경비법 위반 등 좌익사범과 징역 10년 이상의 형을 받은 일반사범을 분류하였고, 이렇게 분류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은 헌병들이 징발한 트럭에 실려 산내 골령골로 호송된 후 헌병과 경찰에 의해 집단 총살되었으며, 정리위원회는 위 진실규명 결정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대전형무소에서만 1950. 6. 28.경부터 1950. 7. 17. 새벽 사이 최소 1,800여 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한 점, ⑤ 나아가 위 집단희생 사건은 국가비상시기에 국가권력에 의해 다수의 재소자들이 적법절차 없이 집단적으로 살해된 사건으로,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사망 여부나 사망 경위 등에 관하여 명백히 알지 못한 경우가 많았을 뿐 아니라, 사건 당시로부터 이미 오랜 세월이 경과하여 유족들이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워 희생자인지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는 유족이나 관련자들의 진술 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점, ⑥ 이에 피고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 과거사정리법을 제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설치한 정리위원회에 강력한 조사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방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게 하였으며, 실제로 정리위원회는 진실규명신청인 측 참고인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피고 측 참고인에 대하여 조사하고, 현장조사를 하는 등 장기간에 걸친 조사활동을 통하여 얻은 자료들을 기초로 망인들을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하는 결정을 내린 점, ⑦ 현재 제주 4·3 공원에는 망인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망인들은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1950. 7. 초순경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집단 총살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3) 피고 소속 헌병과 경찰들은 정당한 사유 없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망인들(이하 '이 사건 희생자들'이라 한다)을 살해함으로써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된 신체의 자유, 생명권,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하였고, 이는 외형상 객관적으로 공무원인 군인의 직무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 결국 그와 같은 행위는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로 인하여 이 사건 희생자들 및 그 유족들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피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고 소속 공무원들의 사용자로서 민법 제756조[1958. 2. 22. 법률 제471호로 제정된 민법 부칙 제2조에 따라 구 민법(의용 민법)이 아닌 현행 민법이 적용된다]에 의하여 헌병과 경찰들의 위법한 사무집행으로 인하여 이 사건 희생자들 및 그 유족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4) 인정되지 않는 부분
가) 원고 H은 자신의 형인 망 AH이 이 사건으로 희생됨에 따른 자신의 고유한 위자료를 주장한다. 그러나 갑 제14호증의 1의 기재에 의하면 원고 H은 이 사건 이후인 DX 출생한 사실이 인정되는바, 원고 H의 정신적 손해를 인정하기 어렵다. 원고 H의 이 부분 주장은 이유 없다.
나) 원고 A는 자신의 양부인 망 AP가 이 사건으로 희생됨에 따른 자신의 고유한 위자료만을 주장한다. 그러나 갑 제21호증의 2의 기재에 의하면 원고 A는 이 사건 이후인 1989. 7. 28. AP의 사후양자로 입적된 사실이 인정되는바, 원고 A의 정신적 손해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원고 A의 청구는 이유 없다.
나. 피고의 주장에 관한 판단
1) 주장의 요지
원고들의 손해배상채권이 시효로 소멸하였고, 이 사건 진실규명결정 후 신의칙상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지도 아니하였으므로 시효항변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없다. 특히 망 AQ, AL, AR, AS, AT의 유족들인 원고들은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았으므로, 위 원고들에 대한 소멸시효 항변은 권리남용이 아니다.
2) 판단
가)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 동안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하고(1921. 4. 7. 조선총독부법률 제42호 로 제정되고, 1951. 9. 24. 법률 제217호로 제정된 구 재정법 제82조에 의하여 폐지되기 전의 구 회계법 제32조), 원고들의 소가 피고의 불법행위가 이루어진 1950년경부터 60년 이상 경과한 2013. 6. 18. 제기되었음은 기록상 명백하다.
나) 그러나 소멸시효를 이유로 한 항변권의 행사도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 후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이를 신뢰하게 하였고, 채무자가 그로부터 권리 행사를 기대할 수 있는 상당한 기간 내에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다면,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1. 9. 8. 선고 2009다66969 판결 등 참조). 그런데 피고가 과거사정리법의 제정을 통하여 수십 년 전의 역사적 사실관계를 다시 규명하고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그 실행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아니한 이상, 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피해자 등이 국가배상청구의 방법으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사법적 구제방법을 취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수용하겠다는 취지를 담아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파생된 법적 의미에는 구체적인 소송사건에서 새삼 소멸시효를 주장함으로써 배상을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취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과거사정리법의 적용 대상인 피해자의 진실규명신청을 받아 피고 산하 정리위원회에서 희생자로 확인 또는 추정하는 진실규명결정을 하였다면, 그 결정에 기초하여 피해자나 그 유족이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할 경우에, 피고가 적어도 소멸시효의 완성을 들어 권리소멸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신뢰를 가질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이에 불구하고 국가가 피해자 등에 대하여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그리고 비록 피해자 등으로부터 진실규명신청이 없었더라도 정리위원회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진실규명 사건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진실규명이 중대하다고 판단되는 때에는 이를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다'는 과거사정리법 제22조 제3항에 따라 직권으로 조사를 개시하여 희생자로 확인 또는 추정하는 진실규명결정을 한 경우에는, 과거사정리법의 입법 목적 및 위 조항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당해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그 희생자의 피해 및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수용하겠다는 과거사정리법에 의한 국가의 의사가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피해자 등에 대한 신뢰부여라는 측면에서 진실규명신청에 의하여 진실규명결정이 이루어진 경우와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 희생자나 유족의 권리행사에 대하여 국가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대법원 2013. 7. 25. 선고 2013다16602 판결). 그러나 한편, 위와 같이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이익을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신뢰를 부여한 경우에도 채권자는 그러한 사정이 있은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여야만 채무자의 소멸시효의 항변을 저지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행사가 있었는지 여부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 신뢰를 부여하게 된 채무자의 행위 등의 내용과 동기 및 경위, 채무자가 그 행위 등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한 목적과 진정한 의도, 채권자의 권리행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하고, 그 '상당한 기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상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여 단기간으로 제한되어야 할 것이므로 개별 사건에서 매우 특수한 사정이 있어 그 기간을 연장하여 인정하는 것이 부득이한 경우에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경우 그 기간은 아무리 길어도 민법 제766조 제1항이 규정한 단기소멸시효기간인 3년을 넘을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위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살피건대, 앞서 든 인정사실, 앞서 든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과거사정리법이 시행된 후인 2010. 6. 22.(경정결정일 2010. 12. 7.) 이 사건 희생자들 중 망 AQ, AL, AR, AS, AT에 대하여는 직권으로, 나머지 희생자들에 대하여는 진실규명신청에 의하여 이 사건 진실규명결정이 이루어진 사실, 이 사건 소가 이 사건 진실규명결정일로부터 약 2년 11개월이 경과한 2013. 6. 18. 제기된 사실은 인정되나, 한편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 8. 21. 국회와 대통령에게 한국전쟁 전후 희생사건에 대한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건의한 후 2010. 6. 30. 활동을 종료한 다음 과거사정리법 제32조에 따라 2010. 12.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한 종합보고서를 통해서도 같은 내용의 건의 의견을 제시한 사실, 국회에서도 2011. 11. 17.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의안번호 1813885호)이 발의된 사실 등에 비추어보면, 과거사정리법에 의한 진실규명결정을 받은 원고들은 과거사정리법의 규정과 과거 사정리위원회의 건의 등에 따라 피고가 그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등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그럼에도 피고가 아무런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자 비로소 피고를 상대로 개별적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따라서 이 사건 소가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을 토대로 위자료를 청구하는 비교적 단순한 사건임에도 그 진실규명결정일로부터 2년 11개월이 경과한 후에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위에서 본 것처럼 진실규명결정 이후 단기 소멸시효의 기간 경과 직전까지 피고의 입법적 조치를 기다린 것이 상당하다고 볼 만한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고 할 것이고, 이를 감안하면 이 사건 진실규명결정일로부터 3년 내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원고들은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제할 만한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행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피고의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이유 없다.
3. 손해배상책임의 범위
가. 위자료의 산정
이 사건 불법행위의 내용과 불법의 중대함, 이 사건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이 사건으로 겪었을 정신적 고통과 그 후 상당 기간 계속되었을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 장기간 동안 배상이 지연된 사정과 이 사건 희생자들의 사망 당시 일실수입 산정을 위한 통계소득 자료가 없어 그 일실수익을 산정할 수 없는 점,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 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불법행위가 있었던 때로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4. 12. 17.까지 6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이 경과하여 통화가치에 상당한 변화가 있으므로 예외적으로 지연손해금의 기산점을 이 사건 변론종결시로 삼은 점, 한편 이 사건은 전쟁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급 시기에 사회적 혼란이 야기된 상황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 단희생 사건이라는 특수성을 가지는 점, 그밖에 유사 사건과의 형평 등 이 사건 기록 및 변론에 나타난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희생자 본인의 위자료를 8,000만 원, 그 배우자의 위자료를 4,000만 원, 그 부모와 자녀의 위자료를 각 800만 원, 그 형제자매의 위자료를 400만 원으로 정한다.
나. 상속관계
1) 1960. 1. 1. 이전에 사망한 이 사건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재산상속에 관하여는 당시의 관습에 의하고(1958. 2. 22. 법률 제471호로 제정된 민법 부칙 제25조 제1항, 조선민사령 제11조 제1항), 1960. 1. 1. 이후 사망한 유족들의 재산상속에 관하여는 민법에 의한다.
2) 앞서 본 이 사건 희생자들의 가족관계에 따르면, 원고 A를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의 고유 위자료(원고 H 제외) 및 상속재산의 합계액은 별지 4. '희생자 및 유족가계도'의 '합계'란 기재와 같다(원 미만 버림).
다. 지연손해금의 기산일
원고들은 한국전쟁 정전시점인 1953. 7. 27.부터의 지연손해금을 구한다.
살피건대, 불법행위 시와 변론종결 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 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행위 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사실심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9다103950 판결 등 참조).
그러므로 불법행위일인 1950.경 무렵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4. 12. 17.까지 사이에 60년 이상의 장기간이 경과하고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으며, 그와 같이 변동된 사정까지 참작하여 이 사건 변론종결시를 기준으로 위자료를 산정하는 이 사건에서는 변론종결일부터 위자료에 대한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할 것이다.
원고들의 주장 중 1953. 7. 27.부터 이 사건 사실심 변론종결일 전날까지의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부분은 이유 없다.
라. 소결
피고는 위자료로 별지 2. '인정금액표'의 '원고명'란 기재 각 원고들에게 같은 표'인용금액'란 기재 각 돈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4. 12. 17.부터 피고가 그 이행의무의 존부와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이 사건 판결선고일인 2015. 1. 14.까지는 민법이 정한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각 지급할 의무가 있다.
4. 결 론
원고들 중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를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의 각 청구는 이유 있어 인용하고, 원고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의 각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인용하며, 그 나머지 청구 및 원고 A의 청구는 이유 없어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재판장판사한숙희
판사신일수
판사공두현
주석
1) 희생자 '3. AA'의 경우,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결정문에는 'AB'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희생자의 나이[희생 당시 22세로 AA의 나이와 동일함, 제적등본(갑 제4호증의 1, 2)], 수형인 명부[AA으로 기재되어 있음, 수형인 명부(갑 제87호증)], 제주 4.3공원 행불자 표석[AA으로 되어 있음, 사진(갑 제88호증의 3)] 및 AA의 형제인 AB은 1988. 2. 2. 사망한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결정문 상의 'AB'은 'AA'의 오기임이 분명함.
2) 희생자 '24. AC'의 경우, 1949. 9. 30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 영등포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