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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법원 2006. 1. 26. 선고 2005구합21859 판결
[난민인정불허결정취소][미간행]
원고

원고 1외 6인(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소명 담당변호사 경수근외 5인)

피고

법무부장관

변론종결

2005. 12. 22.

주문

1.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원고들의 부담으로 한다.

청구취지

피고가 2003. 5. 12. 원고들에 대하여 한 각 난민인정불허가결정을 취소한다.

이유

1. 처분의 경위

아래 사실은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제1호증의 1 내지 갑 제2호증의 6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할 수 있다.

⑴ 원고들은 콩고민주공화국(D. R. Congo, 이하 ‘콩고’라 한다) 국민으로서 원고 4, 6, 7은 본인의 여권으로, 나머지 원고들은 별지 1 목록 기재와 같이 성명이 위조되거나 생년월일이 위조된 콩고 여권을 소지하고 우리나라에 별지 1 목록 ‘입국일’ 기재일과 같이 1999. 10. 9.부터 2000. 9. 13.까지 사이에 각 입국하였는데, 입국 후 여자인 원고 5, 6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은 안산시 등지에서 공장노동자 등으로 생활하다가 2000. 11. 27. 피고에게 출입국관리법 제76조의2 에 의한 난민인정을 신청(이하, ‘이 사건 신청’이라 한다)하였다.

⑵ 피고는 원고들이 1951년 난민의지위에관한협약(이하, ‘난민협약’이라 한다) 및 1967년 난민의지위에관한의정서(이하, ‘난민의정서’라 한다)에서 난민의 요건으로 정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가진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2003. 5. 12. 원고들의 난민인정을 불허하는 결정(이하, ‘이 사건 각 처분’이라 한다)을 하였다.

2. 이 사건 각 처분의 적법 여부

가. 원고들의 주장

⑴ 절차적인 하자

피고가 원고들에게 행한 이 사건 각 처분은 원고들이 난민협약에서 정한 박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인정되지 않는다고만 하고 있을 뿐이고 어떠한 법적 근거 혹은 사실상의 사유도 제시하고 있지 아니하므로, 이유 부기의 하자를 포함한 이러한 절차상 하자는 독자적인 취소사유가 된다.

⑵ 실체적인 하자

㈎ 콩고의 일반적인 인권상황

콩고의 인권문제는 1965년부터 1996년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모부투 독재정권의 탄압과 그 이후 투치족과의 갈등에 의하여 발생한 장기간에 걸친 내부 무장 세력간의 충돌과 이를 이용한 주변 국가들의 침략으로 국내외 무장 세력들이 통제 없이 민간인을 학살, 학대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법률상 병역의 의무가 없는 콩고 내의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단체(이하, ‘반군’이라 한다)뿐만 아니라 정부군 내에서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소년병까지 무차별적으로 징집이 이루어지고, 강제징집을 거부할 때에는 본인과 함께 그 가족들에 대하여서까지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여자의 경우 정부군과 반군에 의하여 강제로 납치된 후 심지어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또한 콩고 내에서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어 정부와 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밝힌 언론인들이 체포, 감금되어 고문이나 협박, 폭행 등을 당한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 이 사건 각 처분의 위법성

위와 같은 콩고의 현 상황하에서 원고들은 아래의 각 사유로 이 사건 신청을 하게 된 것으로, 이를 거부한 이 사건 각 처분은 난민인정의 요건인 ‘박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에 관한 법해석을 그르친 위법한 결정이다.

① 원고 1의 경우

원고 1은 민간 방송국인 KTM(Kinshash Television Malibu)에서 카메라맨으로 근무하면서 8년이 넘게 자행되어 온 소년병 강제징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TV에 방영되었다. 그 후 민간 비디오 촬영회사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던 중 위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들을 찾는 정부군에 의하여 체포되어 위 다큐멘터리에 관하여 심문을 받으면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한 백인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원고 1의 아버지는 현 카빌라 정권 이전 모부투 정부에서 감사직을 지냈는데, 현 정권이 들어선 후 살해되었고, 모부투 정부에서 대사로 일하던 그의 삼촌 또한 최근에 살해되었으며, 한편 원고 1의 여동생인 지나 비웨사(Gina Biwesa)는 2003년 영국 런던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따라서, 원고 1이 본국으로 송환된다면 자신의 반정부적인 표현행위와 함께 아버지와 삼촌의 경력으로 인하여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원고 2의 경우

원고 2는 고마지역에 거주하면서 1999년 드로이츠 트 롬므 인 고마(Droits te L'homme in GOMA)라는 인권단체를 위해 콩고 지역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 자료를 제공하고 그 단체를 돕던 중 위 인권단체 구성원들 5~6명과 함께 납치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탈출하여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한국에 오게 된 것으로, 함께 탈출한 인권단체 구성원 중 여러 사람이 노르웨이나 벨기에에서 난민의 지위를 얻은 바도 있다. 원고 2의 형은 1998년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했고, 남동생은 징집을 피해 탄자니아로 피난간 상태로, 원고 2의 인권단체를 위한 활동과 정치적 표현행위 및 본국을 탈출한 사실에 의해 본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존재한다.

③ 원고 3의 경우

원고 3은 킨샤사에 있는 교회에서 평일에 청소년들에게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 군대에 징집되면 형제와 자매를 죽이는 것으로 옳지 않고 기독교 정신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는데, 1999년경 군인들에 의하여 납치되어 폭행을 당하다가 풀려난 후 교인들의 도움으로 1999. 10. 9. 킨샤사를 떠나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원고 3이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그의 정치적인 의사 표현으로 인해 생명에 대한 위협 혹은 비인간적인 행위 강요 등의 박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존재한다.

④ 원고 4의 경우

원고 4는 고마의 한 교회에서 청소년들에거 반전 설교를 한 바 있고, 1999년 초경 반군이 원고 4에게 군 입대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원고 4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약 1년간 도망다니다가 교회 신부님 등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으로, 그의 정치적 의사 표현 및 군에 강제징집될 경우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를 강요받을 것이 확실하여 박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존재한다.

⑤ 원고 5의 경우

원고 5는 우간다의 지원을 받은 반군에 의해 점령, 봉쇄된 동부 북 키부(Kibu) 지역 베니(Bene)시에서 살던 중 1999년 초 4명의 반군으로부터 징집에 응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고, 그 후 원고 5의 집으로 찾아온 반군은 그들의 무례함에 호통을 치는 원고 5의 아버지를 총으로 사살하였으며, 이에 원고 5는 도망한 후 친구에게 미화 3,000달러 상당의 돈을 주어 구한 여권과 비행기 표로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으로, 원고 5는 강제징집 거부로 인하여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등 생명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 있고, 박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존재한다.

⑥ 원고 6의 경우

원고 6은 1996년경 고마에서 원고 4와 결혼하였는데, 1997년 그 남편이 반군으로부터 군대에 들어올 것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한 후 보복이 두려워 도주하였고, 원고 6 역시 고마에 있는 친구의 집을 도주하였는데, 1998년경 반군이 원고 6의 친구를 위협하여 원고 6의 소재를 알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녀원으로 도망한 후 아시아인 수녀의 도움으로 한국에 와서 남편을 만나 함께 이 사건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원고 6이 콩고로 돌아간다면 언제라도 반군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박해에 대한 충분한 공포가 존재한다.

⑦ 원고 7의 경우

원고 7은 친구와 함께 킨샤사 중심가에서 신원미상의 군인들에 의하여 남자 35명과 원고 7을 포함한 여자 15명과 함께 납치된 후 징집에 응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불응하였고, 이에 군인들은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원고 7을 포함하여 잡혀온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그곳에서 탈출한 후 아시아인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인데, 만약 콩고로 돌아간다면 강간당한 여성으로서 가족과 사회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을 것이고, 또 다시 무장단체에 잡혀 성노예로 자유를 유린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이는 여성이라는 지위에서 받는 정치적, 사회적 차별이자 명백한 박해에 해당한다.

나. 관련 법령

별지 2 관련 법령 기재와 같다.

다. 인정사실

아래 사실은 위에서 든 각 증거와 갑 제3호증 내지 갑 제8호증, 갑 제14호증 내지 갑 제18호증, 갑 제20호증, 을 제1호증, 을 제4호증의 1 내지 을 제11호증의 2, 을 제15호증의 1 내지 을 제22호증의 2의 각 기재 및 증인 맘바호우 아멜 에이메 5세(MAMBAHOU ARMEL AIME Ⅴ)의 증언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다.

⑴ 콩고의 일반적인 상황

㈎ 콩고는 아프리카 중부에 위치한 나라로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였고, 1965년경 모부투(MOBUTU)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그에 의한 1인 독재가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1994년 이후 콩고의 이웃에 위치한 르완다에서 일어난 후치족과 투치족간의 종족 분쟁으로 인해 많은 난민들이 콩고의 국경을 넘어오자, 모부투 정권은 투치족을 대량학살하였고, 이에 반발한 투치족에 속하는 바냐물량게족이 중심이 된 범반정부조직인 콩고해방민주세력연합(ADFL)이 1996. 10.경 결성되어 모부투의 콩고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 후 로랭 카빌라(LAURENT KABILA)가 이끄는 ADFL 반군이 1997. 5. 17. 콩고의 수도 킨샤사(Kinshasha)를 점령함으로써 내전이 일단락되었으나, 1998. 7.경 로랭 카빌라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을 도운 르완다 투치족을 비롯한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다시 악화되기 시작한 내전은 로랭 카빌라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그 아들인 조셉 카빌라(JOSEPH KABILA)가 집권한 이후인 2002년경까지 계속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러한 내전 중이던 1998년에서 2000년경까지 사이에 콩고에서는 정부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어른들 및 아이들에 대한 강제징집이 이루어졌고,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었으며, 반대당 의원들에 대한 가혹행위 및 인권운동가들의 탄압이 이루어졌고, 다른 한편 르완다군과 RCD―고마군 등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국경 근처의 지역의 주민들에 대하여는 반군에 의한 인권유린 및 강제징집 등이 이루어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 그러나 콩고는 2002. 7. 30.경 르완다와의 사이에 콩고가 르완다 반군을 무장해제한 뒤 본국으로 송환시키고 르완다는 콩고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4년 넘게 지속된 내전이 일단락되었다. 2003. 6.경 콩고의 정부군과 반군인 콩고해방운동(MLC) 및 콩고민주연합(RCD)은 권력을 공유하는 과도정부 구성과 통합군대 구성에 합의하였고, 2004. 6. 25. 콩고와 르완다 대통령은 2002년에 맺은 평화협정을 재확인하고 협정의 이행을 위한 합동조사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콩고의 대통령은 2005. 5. 16. 에는 2006년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하는 내용을 포함한 새 헌법 채택을 공식선언하였다. 그러나 2004년에는 콩고 정부군이 통제하는 지역에서는 소년병 징집이 해제되기는 하였으나 여러 인권침해 사례가 보도되고 있고, 내전 동안 여러 반란 단체에 통제되었던 지역들에서는 여전히 인권상황이 나쁜 상황이며 이러한 지역 일부에서 반군이 계속 활동하고 있는 사실이 보고되고 있고, 2005년에도 콩고 정부에 의한 여러 인권 침해 사례가 보도되기도 하였다. 한편, 2005년에 콩고에서는 UN 평화유지군이 그 때까지도 분쟁이 계속되어 온 동부지역에 주로 파견되어 반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있고, 2004. 6.경 국제형사사법재판소는 2002. 1. 이후 콩고의 이투리(Ituri) 지역에서 행하여진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으며, 2005. 10.경 최초로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된 12명의 병사에 대한 전범재판소의 심리가 시작되기도 하였고, 서부 탄자니아의 캠프에 살고 있던 콩고 난민들의 실험적인 귀환이 시작되었다.

⑵ 원고들의 인적 배경

㈎ 원고 1의 경우

① 원고 1은 1972. 3. 15. 출생(여권기재상 생년월일 : 1976. 3. 15.)한 자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사이에 개인적으로 비디오카메라 1대를 가지고 결혼식, 장례식, 종교행사 등에 출장 나가 비디오를 찍어 주고 돈을 받거나 사건 현장을 찍어 방송국에 파는 일을 하였고, 그 중간인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사이에는 신생방송국인 KTM 방송국과 전속계약이 이루어져 카메라맨으로 1년 정도 일하기도 하였다.

② 원고 1은 여동생 MUWILA MATSHINGI(1976년생)를 포함하여 7남 3녀의 형제자매 중 넷째로 태어나, 아직 미혼이고, 아버지는 1991년 사망하였다.

③ 원고 1은 2001. 7. 2. 서울사무소 난민면담실에서 이루어진 난민면담시 KTM 방송국은 1999. 10.경 콩고의 카빌라 정권이 7~8세의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약을 먹여서 반군과의 전쟁에 나가도록 한다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는데, 원고 1은 위 다큐멘터리를 본 적 조차 없어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고 1이 위 다큐멘터리를 촬영하였다고 오해 한 콩고 정부군에 의하여 1999. 10. 23. 18:00경 콩고의 수도 킨샤사에 있던 위 원고의 집 근처에서 체포·구금된 후 고문을 받기도 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④ 원고 1은 위 면담조사시 이 사건 신청의 사유에 대하여 콩고는 내전상태이므로 돌아가게 되면 생명이 위태롭다고 생각되어서라고 진술하였다.

㈏ 원고 2의 경우

① 원고 2는 1968. 10. 16. 킨샤사에서 태어나,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킨샤사 의과대학을 다녔으나 이를 마치지는 못하였고, 그의 형이 콩고 정부의 첩보원(Guard Civil) 임무 수행을 위하여 온 가족이 고마(GOMA)로 이사한 이래 1998년까지 감자와 콩을 구입하여 킨샤사에서 이를 판매하는 농산물 관련 유통업사업을 했으며, 밤에는 수학과 화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고, 고마 지역의 축구선수로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② 원고 2는 콩고(KONGO) 족으로, 종교는 기독교이며, 그의 가족은 영양사인 그의 처와 죽은 형의 아들 2명 및 원고 2의 동생 2명이다.

③ 원고 2는 2000. 10.경 난민조사 결과 작성된 진술서에서는, 정부군은 원고 2가 1998년경 정부군에 의해 죽음을 당한 형과 간음 당한 후 정신이상으로 죽은 형수의 죽음과 관련하여 인권기구와 접촉하였다는 사유로 1999. 9.말 체포되어 위 사유와 정부군에 가입하여 싸울 것을 강요당하면서 1개월 정도 고문을 당하다가 반군인 ‘마이마이’에 의하여 구출된 적이 있다면서, 콩고 내에서 반정부활동을 한 적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④ 그런데 원고 2는 2001. 12. 17. 면담조사시에는, 1999. 8.경 인권사무실에 가던 중 반군에 의하여 납치되어 인권단체 직원 여부를 신문당한 후 반군 가입을 종용당하면서 맞거나 위협을 당하였으며, 정부군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외국인 반군을 아주 싫어하는 ‘마이마이(Mai-Mai) 용사’들에 의하여 구출된 적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⑤ 원고 2는 2001. 12. 26. 면담조사시 이 사건 신청의 사유에 관하여 콩고가 내전 중이라서 안전을 찾아서 본국을 떠나 왔고, 아직도 내전 중이어서 귀국할 경우 군대에 가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콩고에 귀국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 원고 3의 경우

① 원고 3은 1969. 12. 2.(여권기재상 생년월일 : 1967. 6. 7.) 킨샤사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거주한 자로 198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킨샤사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금 원료를 판매하였으며, 그 후 교회에 다니며 생활하였다.

② 원고 3는 MONGALA 족으로 기독교 신자이고, 그의 가족은 부모와 1998년 결혼한 아내 및 형제자매 4명이다.

③ 원고 3은 2001. 3. 9.과 2001. 8. 13. 및 2001. 9. 10.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난민면담에서 1999. 9. 1.경 거리에서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된 후 징집을 요구당하였으나 거부하였고, 군대징집 거부로 인하여 박해를 받았으며, 콩고 정부에 대하여 적대적 의견을 표명한 사실도 없고, 2001. 8.경 콩고로부터 온 편지에 따르면 원고 3을 특별히 찾고 있지는 않으며, 1999. 11. 22.부터 1999. 12. 6.까지 사이에 제천 소재 양계장에서 닭 잡는 일을 하다가 적발된 후 청주출입국에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보호조치되어 출국명령을 받았으나 국내에 계속 체류하면서 취업하기를 희망하여 출국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④ 원고 3은 위 난민면담시 이 사건 신청의 사유에 대하여 젊은 사람은 군대에 징집되어 종족간에 싸움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군대에서 싸우거나 죽는 것이 두려워서라고 진술하였다.

㈑ 원고 4의 경우

① 원고 4는 1967. 3. 30. 출생하였고,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사이에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고마에서 거주하였다.

② 원고 4는 LUBA 족으로 기독교와 카톨릭을 믿으며, 원고 6과는 콩고에 있을 때 약혼식을 하였고, 2000. 10. 27. 결혼식을 하였으나 콩고대사관에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은 상태이며, 콩고에 부모님과 남동생 1명, 여동생 1명이 있다.

③ 원고 4는 2001. 5. 31. 실시된 난민면담시 정부군을 지지하는데, 체포나 구금된 적은 없으나 르완다 반군으로부터 반군 가담을 종용받고 거절하자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도망다녔다고 진술하였다.

④ 원고 4는 위 난민면담시 콩고를 떠난 주된 이유는 르완다 반군으로부터 동물 같은 죽음을 당하기 싫어서이고, 이 사건 신청의 동기에 대하여는 신변안전과 보호를 받기 위해서라고 진술하였다.

㈒ 원고 5의 경우

① 원고 5는 1970. 7. 3. 출생(여권기재 생년월일 : 1974. 5. 11.)하여, 1990년 킨샤샤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아마츄어 축구선수로 활동하면서 베니(BENI)에서 거주하여 왔다.

② 원고 5는 MONGO 족으로, 가족으로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부모와 여동생 3명, 남동생 1명이 있으나, 부모는 2000년경 모두 살해당하였다.

③ 원고 5는 2001. 7. 1. 난민면담시 위 원고의 거주지역은 우간다 반군의 지배 지역인데 2000년경 정부군에 대항하는 우간다 반군으로부터 강제로 반군에 가입할 것을 종용받았고 이를 거절하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였으나, 반군은 다시 위 원고를 찾으러 왔다가 부모를 살해하였으며, 친구에게 2000불을 주고 여권 등을 마련하여 국내에 입국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④ 원고 5는 위 난민면담시 이 사건 신청의 경위에 대하여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콩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라고 밝히면서, 콩고의 현 상황이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살기 힘들어 본국을 떠나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 원고 6의 경우

① 원고 6은 1974. 12. 21. 출생하여, 1995년 킨샤사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96년부터 고마에서 거주하고 있다.

② 원고 6은 BWISHA 족으로 종교는 카톨릭이었으나 원고 4와 사귀면서 기독교도 함께 믿게 되었고, 가족으로는 부모와 2명의 남동생 및 2명의 여동생이 있으며, 원고 4와는 고마의 교회에서 알게 되어 가족들 앞에서 약혼식을 올린 후 2000. 10. 27.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③ 원고 6은 2001. 5. 31. 난민면담시 체포나 구금된 적은 없으나, 약혼자인 원고 4가 르완다 반군에 가담하지 않고 행방을 감추었다는 사유로 폭행당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④ 원고 6은 위 난민면담시 이 사건 신청의 사유에 대하여 남편의 의견을 따라 신청하게 된 것이고, 콩고를 떠난 이유도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진술하였다.

㈔ 원고 7의 경우

① 원고 7은 1974. 9. 27. 출생하여 킨샤사에 거주하면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슈퍼마켓 점원으로 근무하였다.

② 원고 7은 MUTETELA 족으로, 가족으로 부모가 있으나, 아버지는 1990년 사망하였으며, 등록외국인기록표(을 제15호증의 1, 7)상 원고 1의 배우자이자 2003. 3. 17. 출생한 DANIEL ELI KASHAMA BIWESA의 부모로 기재되어 있다.

③ 원고 7은 2001. 9. 14.과 같은 달 18. 난민면담을 받으면서 약혼자인 맘바호우 아멜 에이메 5세와 함께 2000. 4. 19. 길에서 정부군에 의하여 체포되어 여자들도 군대에 합류할 것을 강요하고 약혼자를 군대에 합류하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강간을 당하였다고 진술하였다.

④ 원고 7은 위 면담시 콩고에 돌아갈 경우 다시 성폭행을 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 귀국하고 싶지 않다고 진술하였다.

⑶ 원고들의 국내 입국 경로 및 난민신청 경위

㈎ 원고들은 스와힐리어와 불어를 모국어로 하면서 난민면담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였을 정도로 영어와 프랑스어 모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자로서, 외국인 선교사나 목사, 또는 신부의 도움을 받거나(원고 1 내지 4, 원고 6, 7의 경우), 친구에게 미화를 주고 구한 비행기표와 여권으로(원고 5의 경우) 콩고에서 출국한 것으로, 그 이후 국내에 입국하게 된 경로에 대하여 모두 일치하여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 원고들은 국내 입국 직후 한국까지 동행한 인솔자들이 여권을 가지고 가 버리거나 국내에서 분실하여(원고 1의 경우) 원고들의 국적과 성명을 포함한 인적 사항과 중도 경유국 또는 체재국이나 그 나라에서의 체재기간 등 입국 경로를 알 수 있는 여권을 소지하고 있지 아니하다.

㈐ 원고들 모두는 국내에 입국한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생활하여 오다가 안산에 있는 동산교회 목사의 도움을 받아 2000. 11. 27. 단체로 피고에게 난민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⑷ 외교통상부장관이 2003. 3. 4. 콩고 거주 우리 교민들을 통해 파악한 내용에 기하여 피고에게 보낸 ‘콩고 민주공화국인 난민인정신청 관련 사실관계 조사’에 의하면, 반군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기지를 이탈한 경우 신변위협의 가능성은 적고, 콩고 정부에서 원고들의 난민신청 여부를 알 수는 없으며, 국민성에 비추어 보면 과거를 들추어 내어 철저히 처벌할 가능성은 적고, 일반 국민의 해외여행은 여권발급 규제를 통하여 규제받고 있으며, 조셉 카빌라 대통령의 통치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라. 판단

⑴ 절차적인 하자에 대하여

행정청이 처분을 하는 때에는 일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사자에게 그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여야 한다( 행정절차법 제23조 ). 위 인정사실에 의하여 보건대, 원고들이 출입국관리법 제76조의2 의 규정에 의하여 난민인정을 신청한 이 사건 신청에 대하여, 피고는 원고들이 제출한 자료와 진술 및 그 진술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원고들은 각 출입국관리법 제2조 제2의2호 가 그대로 원용하고 있는 난민협약 제1조가 정하는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라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사유로 그 난민신청을 불허하는 이 사건 각 처분을 한 사실을 알 수 있는바, 사정이 이와 같다면 피고가 그 처분시 법적 근거인 출입국관리법의 위 제반 규정을 설시하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위 출입국관리법의 제 규정에 의하여 난민인정을 신청한 원고들로서는 피고의 위와 같은 이 사건 각 처분만에 의하더라도 자신들의 난민신청이 거부된 근거와 사유를 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피고는 이 사건 각 처분시 행정절차법 제23조 의 규정을 적법하게 이행하였다 할 것이다. 이에 반하는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⑵ 실체적인 하자에 대하여

㈎ 난민협약의 난민 요건과 출입국관리법상 난민인정행위의 성격

㈀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는 그 적용대상이 되는 난민을 ‘① 인종, 종교, 민족,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②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③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러한 난민의 요건은 우리나라 출입국관리법 제2조 제2의2호 에서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

㈁ 한편, 난민협약상 난민의 요건은 선언적인 규정이지 창설적인 규정은 아니므로 위 요건을 충족하면 당연히 난민협약에서 정한 난민에 해당한다 할 것이나{난민의 지위에 관한 1951년 협약과 1967년 의정서에 의한 난민지위 인정기준 및 절차편람(이하 ‘편람’이라 한다) 28조, 갑제15호증}, 난민협약은 체약국으로 하여금 협약에서 정한 난민에 대하여 항상 이를 받아들여 비호(비호, Asylum)를 부여하도록 의무지우고 있지는 아니하며(난민협약 제12조 제1호 참조), 난민에게 비호를 부여할 것인지, 부여한다면 그 법률상 지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 여부는 일반적으로 각 체약국의 주권적 결정사항으로 이해되고 있다.

㈂ 한편, 출입국관리법 제76조의2 제1항 은 외국인으로부터 난민의 인정에 관한 신청이 있는 때에 그 외국인이 난민임을 인정할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그에 따라 인정되는 난민에게 어떠한 국내법적 지위가 부여되는지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도 두고 있지 않으나, 이는 위 난민인정행위에 의하여 해당 외국인에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적법한 국내체재자격을 부여하는 비호의 취지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함이 상당하다 할 것이고, 따라서 위 규정에 의한 피고의 난민인정행위를 단순히 신청자가 난민협약 등에서 정한 난민의 요건을 갖추었는지 확인하는 의미에 그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이 부분에서는 피고의 재량이 인정될 여지가 없다), 오히려 난민의 요건을 갖춘 외국인에게 일정한 권리를 부여하는 설권행위(설권행위)로서 이에 관하여 피고에게 일정한 재량이 부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따라서 피고는 외국인에 의한 난민인정신청이 있을 경우 먼저 난민협약 등에서 정한 난민으로서 요건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확정한 후, 그 요건을 갖춘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이를 기초로 그를 출입국관리법 제76조의2 제1항 의 난민으로 인정하여 적법한 국내체재자격 부여 등 일정한 비호를 부여할 것인지, 아니면 난민으로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제3국으로 강제 퇴거시키거나 보호상태를 계속할 것인지 여부에 관한 적정한 재량을 행사하여야 하고(난민을 그 생명 또는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국적국 등의 국경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하는 것은 난민협약 제33조 제1호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다), 만일 위 재량권의 행사에 앞서 난민협약 등에서 정한 난민의 요건을 갖추었는지 여부에 관한 사실인정을 그르쳐 필요한 재량권 행사를 전혀 하지 않은 경우라면 그 처분은 위 사유만으로 위법하여 취소를 면하지 못한다 할 것이다.

㈏ 난민협약상 난민 요건의 충족 여부

㈀ 인정의 기준과 방법

① 난민협약은 난민의 인정 요건으로 인종, 종교, 민족,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들고 있는데, 이 때의 박해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하여는 확립된 견해는 없지만 일응 생명 또는 신체의 자유와 같은 중대한 인권에 대한 침해행위가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고(편람 51조 참조), 그밖에도 일반적으로 문명사회에서 허용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부당한 차별, 고통, 불이익의 강요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이러한 난민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신청인이 위와 같은 박해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공포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요구한다. 이는 신청인의 주관적인 심리상태가 객관적 상황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함을 의미하는데(편람 38조), 합리적인 통상인이 신청인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총체적 경험과 상황 속에 놓이는 경우 박해에 대한 공포를 느낄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 공포는 충분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신청인에게 주어진 총체적 경험과 상황을 판단함에는 신청인의 국적국 내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인권상황을 고려하여야 함은 물론이지만, 나아가 그와 같은 신청인의 국적국에 관한 일반적인 상황이 어떠한 구체적 사정 속에서 신청인에 대한 박해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며, 이 점에 관한 사실관계는 일차적으로 신청인 자신에 의하여 제공되어야 한다(편람 195조). 다만 난민은 그 성격상 박해의 내용이나 가능성, 원인에 관한 충분한 객관적 증거자료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 할 것이므로, 그 입증의 정도에 있어서 난민에게 객관적 증거자료에 의하여 주장사실 전체를 입증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고 단지 그 진술의 전체적인 신빙성만 수긍할 수 있으면 된다 할 것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신청인의 주장사실 자체로서 일관성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과 상반되어서 안 된다(편람 204조).

③ 또한 난민협약은 다시 그 박해의 원인이 일정한 사회적, 정치적 지위와 관련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박해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정치적 지위로서 ‘인종(종족), 종교, 국적(민족),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이는 난민이 위치한 사회적, 정치적 지위로 인하여 사실상 국적국과 그 사회의 주류적 위치에 있는 구성원으로부터 타자로 간주되어 국적국의 보호가 미치지 않게 된 사람을 국제사회의 보충적 보호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나타낸다. 난민인정의 요건으로 문제되는 위 박해와의 관련성은 신청인이 염려하는 박해가 신청인의 사회적·정치적 지위에 따른 ‘차별성’을 띠고 있는지를 검토하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적 또는 국내적 무력충돌의 결과로 출신국을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는 자는 협약상 원인에서 비롯된 분쟁이라 하더라도 신청인이 처한 위험이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에서 비롯된 위험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면 신청인이 협약상 열거된 사회적, 정치적 지위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없어, 난민협약이나 난민의정서에 의한 난민으로 볼 수 없다. 그러한 자는 1949년 제네바 협약 및 국제적 무력충돌 희생자의 보호에 관한 1949년 제네바 협약에 추가된 1977년 의정서에 규정된 보호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절차편람 제164조).

㈁ 원고들의 난민 요건 충족 여부

① 원고 1에 대하여

원고 1은 이 사건 소송에서 KTM 방송국의 카메라맨으로 소년병 강제징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정치적 견해의 표현으로 인하여 심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아버지가 모부투 정권에서 감사직을 지내 현 정권이 들어선 후 살해되었으며, 같은 상황에 있는 동생 지나 비웨사가 영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점 등을 들어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원고 1은 위 주장과는 달리 이 사건 신청을 한 이후 이루어진 난민면담시 본인 스스로 1996년경부터 1997년경까지 1년 동안만 KTM 방송국과 전속계약을 맺어 카메라맨으로 일하였을 뿐이고 1998년까지 나머지 기간 동안은 개인적으로 결혼식 등에서 비디오를 찍어주는 일을 하였다고 하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지 아니하였고, 그 내용조차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고 있어 그 주장 자체로 일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원고 1이 위와 같이 1997년경까지 1년 동안만 KTM 방송국에서 일한 것 뿐인데도 그로부터 무려 2년이 지난 1999. 10.경에도 본인의 신분증 대신에 KTM 보도증을 소지하고 다니다가 그를 사용하여 여권을 만들게 하였다는 진술을 하고 있어(을 제5호증 참조), 뒤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원고 1의 주장부분이 허위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원고 1이 위 다큐멘터리와 관련한 오해로 인하여 체포되어 고문받았다는 진술 부분도 믿기 어려운 점, 원고 1의 아버지는 모부투 정권이 통치할 때인 1991년경 이미 사망하였고(위 난민면담시 위와 같이 말하였고, 원고 1의 아버지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조차 없었다), 갑 제9호증에 의하면, GYNA MATSHINGI MUWILA가 영국으로부터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사실은 인정되나, 동인의 여권 및 난민인정서의 기재에 의하면 생년월일이 1998. 12. 29.로 원고 1의 동생인 MUWILA MATSHINGI은 1976년생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원고 1의 ‘성(성, Family Name)’은 '비웨사(BIWESA)'로 보이는데 위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자의 이름과 원고 1의 성은 다른 것으로 보여 위 양자를 동일인으로 볼 수 없는 등 원고 1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점을 종합하여 보면, 난민협약상 난민요건에 관한 원고 1의 주장은 이를 믿기 어렵다.

② 원고 2의 경우

㉮ 원고 2의 각 난민면담시의 주장과 이 사건 소송에서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 주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원고 2에 대한 박해의 주체가 반군인지 정부군인지, 또 그러한 박해의 원인에 대하여 진술에 일관성이 없고, 더구나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원고 2는 2001. 12. 17. 및 2001. 12. 26. 난민면담시 1999. 8. 말경 고마의 인권단체 사무실 부근에서 반군에 의하여 납치된 적이 있는데, 그 때 인권단체에 있는 친구도 만나고 인권단체가 반군들에 의하여 청년들이 무작위로 체포되어 가는 상황을 국제적으로 알려 줄 것을 요청하러 가는 길이었고, 반군은 원고 2에게 인권단체 직원인지에 관한 심문을 한 후 반군 가입을 종용하였다는 것인바, 위와 같이 반군이 원고 2에게 새삼스레 인권단체 직원인지에 관한 심문을 한 것을 보면 원고 2의 이전의 행위 등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던 상태에서 무작위로 원고 2를 납치한 사정을 알 수 있고, 원고 2 스스로가 난민면담시 이 사건 신청의 사유에 관하여 귀국하면 군대에 가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귀국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까지 더하여 보면, 원고 2의 주장한 바대로 그가 인권단체에 협력하였다거나, 그 협력을 사유로 원고 2가 박해를 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어, 원고 2의 이에 관한 주장을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위 각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원고 2는 콩고에서 발생한 내전이라는 상황 자체에서 비롯된 강제징집의 위험을 사유로 콩고를 탈출하여 국내에 입국한 자에 불과하여, 난민협약상 열거된 정치적·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 또한 콩고 탈출 및 난민인정신청에 따른 박해의 가능성에 관하여 보더라도, 원고 2는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콩고를 출국하였고,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 난민인정 신청을 한 것은 사실이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원고 2가 인권단체에 협력하였다고 볼 수 없고, 콩고 정부도 원고 2에게 이러한 의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이상, 콩고 정부가 원고 2의 콩고 출국이나 난민인정 신청 사실에 특별히 주목하여 통상적인 심문이나 조사과정, 제재를 넘어서 차별적인 가혹한 처벌을 가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콩고 출국 후 사정을 이유로 원고 2에 대한 박해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③ 원고 3에 대하여

원고 3은 이 사건 소송에서 교회에서 설교 등을 통하여 징집거부를 내용으로 한 정치적 표현행위를 하였다고 주장하나, 위와 같은 주장과는 달리 2001년경 수차례 있었던 난민면담시에는 다만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징집에 응하지 않는다는 사유로 교회에서 돌아가던 다른 1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정부군에 의하여 납치되었다고만 진술하고 있고, 박해사유는 군대징집거부이며, 콩고정부에 대한 적대행동이나 또는 적대적 의견을 표명한 사실 유무도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및 이 사건 신청의 사유에 대하여 원고 3이 군대에서 싸우거나 죽는 것이 두려워서라고 밝히고 있는 점을 종합하여 보면, 정치적 표현행위로 인한 박해에 대하여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존재한다는 원고 3의 이 사건 소송에서의 위 주장은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원고 3은 콩고의 내전이라는 상황자체에서 비롯된 위험을 사유로 콩고를 탈출하여 국내에 입국한 자로, 난민협약상 열거된 정치적·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④ 원고 4에 대하여

원고 4는 이 사건 소송에서 교회에서 설교 등을 통하여 징집거부를 내용으로 한 정치적 표현행위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군에 의하여 군 입대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여 박해의 위험이 현존한다고 주장하나, 위와 같은 주장과는 달리 원고 4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을 뿐이고, 2001. 5. 31. 난민면담시에 르완다 반군으로부터 반군 가담을 종용받고 거절하자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보면, 원고 4에게 징집거부라는 정치적 표현행위로 인한 박해의 위험성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는 없고, 다만, 원고 4가 그 주장처럼 콩고에서 발생한 내전 중 반군에 대한 징집거부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 위험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차별화된 가중된 위험에 해당하지 아니하므로, 난민협약상 열거된 정치적·사회적 지위로 인한 박해의 위험성을 가진다는 난민인정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

⑤ 원고 5에 대하여 .

원고 5가 그 주장대로 우간다 반군으로부터 강제징집의 요구를 받고도 이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살해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위험이 원고의 정치적·사회적 지위에 기한 것이 아닌 콩고의 내전 상황에서 야기된 일반적인 위험에 해당할 뿐이라 할 것이고, 콩고의 현재 상황이 원고 5가 콩고를 출국할 당시와는 달리 내전이 일단락되어 외국군들의 철수가 대체로 이루어진 상태로 다만 주변국의 지원을 받는 무장단체가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콩고에서 내전이 한참 진행 중이던 시기와 같이 콩고의 일부 국경지역을 점령한 채 중앙정부의 군사력 등이 전혀 미치지 아니하는 것으로까지는 보이지 아니하는 상황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원고 5가 느끼는 위 위험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차별화된 가중된 위험으로서 협약상 원인을 이유로 한 박해라고 볼 만한 차별성이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난민인정의 요건을 충족시킨다고 볼 수 없다.

⑥ 원고 6에 대하여

원고 6은 콩고에 있을 당시 이미 결혼을 한 남편인 원고 4의 징집거부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나,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콩고에 있을 당시 원고 4와는 약혼만 한 상태로 부모님 및 동생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2001. 5. 31. 난민면담시 다만 르완다 반군에 가담할 것을 거부한 약혼자로 인하여 폭행당한 적이 있고, 콩고를 떠난 이유는 약혼자를 만나기 위하여서이며, 이 사건 신청의 사유도 남편의 의견을 따라 신청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보면, 원고 6은 난민인정의 요건인 난민협약상 열거된 정치적·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⑦ 원고 7에 대하여

원고 7이 그 주장대로 길에 서 있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부군에 의하여 체포되어 강간당하면서 징집에 응할 것을 강요당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박해의 경위를 살펴보더라도 콩고의 내전 상황에서 야기된 일반적인 위험에 해당할 뿐이고, 이 사건 신청 이후 콩고 내에서 여전히 인권침해행위 등이 근절되고 있지 않고 정치적 상황도 불안한 것이 사실이지만 주변국들과의 협정 체결 등에 기하여 내전이 일단락됨에 따라 정부군에 의한 소년병의 징집이 해제되는 등 최소한 정부군에 의한 무차별적 강제징집의 사례는 보고되지 있지 아니하며, 정부군의 범죄행위 일부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정까지 감안하면, 원고 7이 느끼는 위와 같은 위험은 사회 일반으로부터 차별화된 가중된 위험으로서 협약상 원인을 이유로 한 박해라고 볼 만한 차별성이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난민인정의 요건을 충족시킨다고 볼 수 없다.

㈂ 소결

따라서 원고들은 모두 난민협약에서 말하는 ‘인종, 종교, 민족,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어 출입국관리법 제2조 제2의2호 에서 정한 난민에 해당하지 아니한다.

3. 결론

그렇다면, 피고가 원고들의 출입국관리법 제76조의2 에 의하여 난민인정을 신청한 이 사건 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이 사건 처분은 적법하다 할 것이므로, 그 취소를 구하는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모두 이유 없어 이를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별지 1 목록 생략]

판사 조해현(재판장) 박순영 신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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