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시사항
[1]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라)목 에서 정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의 의미 및 이에 해당하기 위한 요건
[2]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라)목 에서 정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1]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라)목 에서 규정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라 함은,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 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킬 동기 내지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치·사회·문화운동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그 구체적인 행위형태는 작위, 부작위를 막론한다.) 참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당시의 실정법 체계를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유죄판결을 받기에 이른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고(면직 내지 학사징계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그 민주화운동이 그 자체로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의 내재적 목적활동이 되어 있거나 그러한 유죄판결의 범죄사실에 대한 동기 내지 그 행위유발의 적극적 동인( 동인 )으로서 작용하였음이 객관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2]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신청인이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신청인 스스로가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은 수사과정에서 자행된 가혹행위 등으로 인한 심리적인 압박상태에서 강요된 허위 자백을 근거로 조작되었다고 주장하여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사실관계와 자신과의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에 따르더라도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신청인의 활동이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에 내재된 목적활동이거나 그 동기 또는 행위유발의 동인( 동인 )으로서 작용하였음을 인정할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신청인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라)목 에서 정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 사례.
원고
원고
피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변론종결
2005. 7. 20.
주문
1. 제1심판결을 취소한다.
2.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3. 소송총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청구취지및항소취지
1. 청구취지
피고가 2001. 12. 11. 원고에 대하여 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신청에 대한 거부처분을 취소한다.
2. 항소취지
주문과 같다.
이유
1. 처분의 경위
가. 원고는 1979. 12.경 서울신문사에 수습기자로 입사하여 편집국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던 중 1980. 5.경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하였고, 신군부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발표에 항의해 신문제작거부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이를 이유로 1980. 8. 2. 강제 해직되었다(이하 '1차 해직'이라 한다).
다. 원고는 1988. 2. 16. 서울고등법원에서 형(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고, 그 무렵 위 판결은 확정되었으며, 원고는 위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후 복직하여 서울신문사에서 대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라. 원고는 2000. 10. 19.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1차 해직과 2차 해직 및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고에게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신청을 하였는데, 피고는 2001. 12. 11. 1차 해직에 대해서는 원고를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하여 원고의 명예회복신청을 인용하였으나, 2차 해직 및 유죄판결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원고의 명예회복신청을 기각하였다(이하 피고의 2001. 12. 11.자 처분 중 2차 해직 및 유죄판결과 관련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신청에 대한 피고의 거부처분을 '이 사건 처분'이라 한다).
[처분 사유]
원고는, 국가안전기획부가 1986.경 군사정권 반대세력인 원고를 제거하기 위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과명 생략) 교수인 소외 1이 간첩인 줄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아니한 채 계속 만나고, 동인의 북한찬양에 동조하였다고 조작함으로써 원고가 유죄판결을 받고 해직되었다고 주장하나, 원고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원고 주장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본건 유죄판결 및 해직의 원인이 되는 민주화운동의 구체적 활동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달리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 및 해직된 것이라 볼 입증자료가 없다.
마. 전심절차
원고, 2002. 2. 25. 재심청구
피고, 2003. 10. 30. 결정(재심청구 기각)
[인정 근거] 다툼 없음
2. 이 사건 처분의 적법 여부
가. 관계 법령
제2조 (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민주화운동"이라 함은 1969년 8월 7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을 말한다.
2. "민주화운동관련자(이하 '관련자'라 한다)"라 함은 다음 각 목의 1에 해당하는 자 중 제4조 의 규정에 의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심의·결정된 자를 말한다.
라.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해직 또는 학사징계를 받은 자
나.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의 법적 의미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하 '법'이라고만 한다)에서 '민주화운동'을 1969년 8월 7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정의하고( 법 제2조 제1호 ), 이러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에 대하여는 그 명예회복을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대통령에게 특별사면과 복권을 건의하고, 관련 관청에 전과기록의 삭제 내지 폐기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점( 법 제5조의3 ), 법 제2조 제2호 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서 규정하고 있는 (가) 내지 (다)목 의 유형은 그 사망이나 질병, 상이 등과 같이 생명 내지 신체에 발생한 장해 내지 불이익에 관해서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발생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유죄판결·해직 또는 학사징계 등 신분적 불이익에 대하여는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그러한 불이익을 받았을 것을 요구하여 그 규정내용을 달리 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법 제2조 제2호 (라)목 에서 규정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라 함은,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 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킬 동기 내지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치·사회·문화운동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그 구체적인 행위형태는 작위, 부작위를 막론한다.) 참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당시의 실정법 체계를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유죄판결을 받기에 이른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고(면직 내지 학사징계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그 민주화운동이 그 자체로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의 내재적 목적활동이 되어 있거나 그러한 유죄판결의 범죄사실에 대한 동기 내지 그 행위유발의 적극적 동인(동인)으로서 작용하였음이 객관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다. 인정 사실
(1) 원고에 대한 2차 해직 및 유죄판결의 경위
(가) 원고는 1975. 3.경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육계열에 입학하여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79. 12.경 서울신문사에 수습기자로 입사하였다.
(나) 원고는 1980. 8.경 신문제작 거부운동과 관련하여 1차 해직된 후, 1981. 3.부터 1985. 5.까지 봉천여자중학교, 석관고등학교에서 지리담당교사로 근무하다가 1985. 6. 1. 위 신문사에 복직하여 스포츠서울 문예부 촉탁기자로 근무하였다.
(다) 원고는 1986. 7.경 원고의 대학 은사인 소외 1의 간첩활동(서울대교수 간첩단 사건, 일명 진달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조사를 받은 후, 1986. 8.경 '원고가 1984. 1. 중순 일자미상 18:00경 소외 1 교수 연구실에서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활동을 찬양하여 이를 이롭게 하고, 1984. 7. 초순 일자 미상경 동인에게 포섭된 다음, 1986. 1. 초순경부터 1986. 6. 초순경까지 사이에 4회에 걸쳐 위 팔레스호텔 커피숍에서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은 소외 1과 회합하였다.'는 내용의 국가보안법위반(간첩 등)죄로 위 소외 1, 출판업자인 소외 2(당시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국장이었다.), 대학조교인 소외 3 등과 함께 구속 기소되었고, 이를 이유로 2차 해직되었다.
(마) 원고와 검사가 위 판결에 대하여 서울고등법원에 각 항소하였고, 항소심에서 원고는 수사기관의 불법감금과 협박에 의한 심리적인 압박상태에서 허위로 자백하였으므로 이에 기초한 원심판결에는 채증법칙을 위배하여 사실을 오인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고, 원심의 형이 지나치게 무거워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 검사는 항소이유서를 통하여 원고가 서울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신문기자와 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사람으로서 근무중이던 신문사에서 해직된 데 대한 불만을 품고 본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원심의 형이 너무 가벼워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바) 서울고등법원은 1988. 2. 16. 검사가 작성한 원고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임의성 및 신빙성이 없고, 원고의 자백이 허위자백이라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하면서, 다만 원심의 형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는 이유로 형(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한다는 판결을 하였다( 서울고등법원 87노 (사건번호 생략) 판결).
(2) 관련자들의 진술 등
(가) 국가인권위원회가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에 의뢰하여 작성한 '국가보안법 적용상에 나타난 인권실태'라는 제목의 2003년도 인권실태조사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소외 1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소외 1 교수 사례(서울대교수 간첩단 사건, 이른바 진달래 사건)의 경우 고문, 협박, 유도심문에 의한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다고 평가하였다.
(나) 당시 원고를 조사한 주무 수사관이었던 소외 3은 제1심법원에 제출한 진술서(갑7호증)에서 "원고는 소외 1의 수첩에 이름이 있던 수십 명 중 한 명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하였으나 소외 1과의 연결고리문제 즉, 지정관계, 반국가단체 또는 그 구성원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고 있으면서 회합을 하였는지 여부 등에 의문이 있어 추가조사를 하였음에도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아니하여 내부적으로는 훈방 또는 불구속 송치를 하려고 잠정결정을 하였으나, 외곽수사팀에 의해 원고가 서울신문사에 복직된 이후 행적이 보고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광주에서 있었던 민중학살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당시 문화공보부의 보도지침을 거부하고 민주언론으로서 정통성이 없는 5공정권을 타도해야 된다고 여기 저기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안정국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로서 정부의 기관지 격인 서울신문사에 원고를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수사방향이 급반전되었다. 이에 범죄사실에 당시 언론 상황에 대한 부분이 추가되면서 기소의견으로 구속 송치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다) 제1심법원의 원고본인신문에서 원고는, 소외 1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고, 소외 1을 세 번 만난 적이 있으나 모두 의례적인 만남이었을 뿐인데,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어 약 한 달 동안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조사관들이 원고로 하여금 옷을 모두 벗게 하고 "우리는 주구다. 네가 서울신문의 (원고 이름 생략)이냐. 이 새끼야. 야, 간첩."이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게 하였으며, 원고에게 남북분단의 원인, 세계관, 성장배경, 소외 1에 대해 아는 것에 대하여 쓰라고 요구하면서 조사관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쓸 때까지 무차별적인 구타를 반복하였고, 결국 이와 같은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조사관들이 요구하는 대로 허위로 자백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3) 복직 후 2차 해직까지의 원고의 활동 등
(가) 서울신문사에서 1980. 해직된 기자는 원고뿐이었다. 원고는 복직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배 기자들에게 1980. 광주의 참상과 검열거부 등 언론민주화운동의 경험을 말해 주면서, 문화공보부 등의 보도지침을 거부하고 정보원의 신문사 출입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원고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제동성당에서 운영하는 야학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그 곳 수녀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 1986. 7.경에는 6·10항쟁을 앞두고 각계의 민주화세력들이 그 역량을 결집해 가고 있었고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는데, 이 때 원고는 군사독재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이 불가피하고 민주화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적 열망을 확산시켜야 하며 이를 위한 언론민주화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인정 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3호증, 갑5호증의 1 내지 4, 갑6호증의 1 내지 3, 갑7호증, 을1호증, 을3호증, 을5호증의 각 기재, 갑4호증(을6호증과 같다)의 일부 기재, 제1심법원의 원고본인신문 결과, 변론 전체의 취지
다. 판 단
위 인정 사실에 의하면, 비록 원고가 1980년 신문제작거부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차 해직된 것과 복직 이후 언론민주화 등과 관련하여 활동한 행적이 당시의 수사기관에 포착되어 공소제기의 주된 동기로 작용하고 그로 인하여 위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2차 해직까지 당하게 되었기는 하지만, 원고 스스로가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은 원고의 조사과정에서 자행된 가혹행위 등으로 인한 심리적인 압박상태에서 강요된 허위 자백을 근거로 하여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사실관계와 자신과의 관련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더러,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에 따르더라도 1차 해직으로부터 복직된 후 2차 해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원고의 활동이 위 유죄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에 내재된 목적활동이거나(앞서 본 바와 같이 제1심법원의 원고본인신문에서 원고는 위 소외 1과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 그와의 만남은 모두 의례적인 것이라고 진술하여 위 만남이 자신의 언론민주화운동 등과도 관련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 동기 또는 행위유발의 동인(동인)으로서 작용하였음을 인정할 자료가 없다.
따라서 원고가 법 제2조 제2호 (라)목 에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 이러한 유죄판결의 범죄사실에 대한 공소제기를 이유를 2차 해직을 당한 이상 이것 역시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할 것이므로, 위 유죄판결과 2차 해직 부분에 관하여 원고가 민주화운동관련자에 해당하지 아니함을 이유로 한 이 사건 처분은 적법하다.
3. 결 론
그렇다면 이 사건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원고의 청구는 이유 없어 이를 기각할 것인바, 제1심판결은 이와 결론을 달리 하여 부당하므로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