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항소인
원고 1외 2인(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창조 담당변호사 이덕우외 1인)
피고, 피항소인
대한민국
변론종결
2003. 11. 25.
주문
1. 제1심 판결 중 아래에서 지급을 명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 패소부분을 각 취소한다.
피고는 원고 1, 2에게 각 5,000,000원, 원고 3에게 2,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한 2000. 1. 9.부터 2004. 2. 17.까지 연 5%, 그 다음날부터 갚는 날까지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2. 원고들의 나머지 항소를 각 기각한다.
3. 소송비용은 제1, 2심 모두 이를 10분하여 그 9는 원고들의, 나머지는 피고의 각 부담으로 한다.
4. 제1항의 금원지급 부분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 및 항소취지
제1심 판결을 취소한다.
피고는 원고 1, 2에게 각 400,000,000원, 원고 3에게 20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한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갚는 날까지 연 25%의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이유
1. 기초사실
다음 각 사실은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제1, 2, 3호증, 갑 제7호증의 1, 7, 13 내지 17, 19, 24, 25, 28, 30 내지 34, 46, 을 제2호증의 1 내지 5, 을 제3호증의 1, 을 제4호증의 2, 3, 을 제7호증의 10, 11, 12, 을 제11호증의 1, 2, 을 제19호증의 20, 을 제20호증의 88, 을 제21호증의 6, 7, 9, 10, 19, 21, 23, 28, 42, 을 제22호증의 20, 21, 24, 을 제23호증의 5, 22, 26, 을 제24호증의 7, 8, 11, 12, 22, 을 제26호증의 19, 24, 25, 37, 을 제30호증의 1 내지 7의 각 기재, 갑 제7호증의 18, 을 제10호증, 을 제24호증의 27의 각 영상, 제1심 법원의 현장검증결과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이를 인정할 수 있다.
가. 김훈의 사망
원고 1은 김훈의 아버지, 원고 2는 김훈의 어머니이고, 원고 3은 김훈의 동생인바, 위 김훈은 유엔(UN)군사령부 공동경비대대 경비중대 2소대장으로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이하 ‘JSA’라 한다) 내 241GP(Guard Post)에서 근무하던 중, 1998. 2. 24. 12:20경 같은 소속 일병 소외 1에 의하여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위 241GP 내 3번 지하진지(bunker)에서 우측 관자놀이에서 좌측 관자놀이로 이어지는 관통총상을 입었고 그것이 사망원인이 되었다(이하 ‘이 사건 사고’라고 한다).
나. 김훈의 성장배경 및 군경력
(1) 원고 1은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라 한다) 제21기 출신으로서 1965. 2. 20.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제15사단 소대장, 수색대대장, 한미연합군사령부 기획참모부 기획처장, 제1군단 군단장 등의 보직을 거쳐 1997. 11. 30. 육군 중장을 끝으로 군 현역생활을 마감하고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2) 원고 1, 2의 장남인 김훈은 1973년생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군인으로 근무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많은 영향을 받아 여의도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90년 무렵부터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하였고 1992. 2. 25. 육사에 제52기로 입교하게 되었는데, 육사 재학시절 마라톤대회에서 2위로 입상하는 등 의지가 강하고 끈기 있는 생도로 평가되었고, 성적 또한 총 생도 234명 중 71등 정도로 우수한 편이었다.
(3) 김훈은 1996. 3. 11.경 생도교육을 마치고 육사를 졸업한 후, 1996. 3. 1.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1996. 3. 18.부터 1996. 6. 27.까지 기계화학교에서 초등군사반 교육을 이수하였는데, 교육을 마칠 무렵인 1996. 6. 26.경 1998년부터 JSA에서 근무할 소대장으로 선발되었고, 1996. 7. 1.부터는 육군 제20사단 61여단 110기보대대 1중대 3소대장의 보직을 받아 복무하였다.
(4) 위 제20사단 110기보대대 대대장은 1996. 11.경 소대장 복무기간이 만료되는 김훈을 대대 교육장교로 근무시키려고 하였으나, 김훈은 JSA 소대장으로 근무하기를 원하여 이를 사양하였고, 1996. 12. 10.경 사단장의 지시로 제20사단 평가단으로 파견되어 1997. 7. 8.까지 전술지도담당관으로 복무하다가 1997. 7. 14.경 JSA 소대장 복무를 위한 과정인 육군정보학교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같은 해 12. 16.경까지 교육을 받았는데, 김훈은 교육생 135명 중 17등의 성적을 거두고 군사영어반을 수료하였다.
(5) 김훈은 군사영어반에서 교육을 마친 후, 1998. 1. 5. 유엔군사령부 공동경비대대 경비중대로 발령받아 2소대 훈련에 참가하는 등 2주간 소대장 교육을 받았고, 1998. 1. 20. 경비중대 2소대장으로 취임하여 이 사건 사고 당시까지 JSA에서 근무 중이었다.
다. 241GP의 지리적 위치 등 현황과 2소대의 구성 및 근무실태
(1) 위 JSA 내에 위치한 241GP는 판문점(BRF)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1.5㎞, 대대본부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5.2㎞ 정도 떨어진 군사분계선 남측지역 최전방에 설치되어 있고, 그 내부에는 ① 지상시설로서 중앙부에 소대장실, 식당 및 아랫막사·윗막사가 있고 그 북쪽에는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9번·1번·3번 관측소(tower)가 설치되어 있으며, ② 지하시설로서 상황실(TOC)과 16개의 지하진지가 지하통로를 따라 연결되어 있다. 이 사건 사고 현장인 위 241GP 내 3번 지하진지는 반지하로 된 가로 2.56m, 세로 2.50m, 높이 2.40m(내부높이는 2.20m)의 정방형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지하통로를 따라 상황실로부터 약 72m, 소대장실로부터 약 5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 부근에 지상 3번 관측소로 나가는 통로가 설치되어 있다(이상 별지 도면 1. 참조). 이 사건 사고 당시 위 241GP에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2) 3번 지하진지의 내부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남쪽에 설치된 입구로 들어서면 남서쪽 및 북서쪽 벽에 접하여 시멘트블럭으로 쌓아 만든 가로 171㎝, 세로 167㎝, 높이 102.5㎝의 기관총(CAL-50) 거치대가 있고, 그 위에 모래주머니(가로 50㎝, 세로 30㎝, 두께 10㎝)가 2~3단 깔려 있으며, 남서쪽 및 북서쪽 벽에는 폭 30㎝인 총안구(firing port)가 가로로 길게 설치되어 있다. ② 기관총 거치대를 제외한 남동쪽 및 북동쪽 바닥은 각 88㎝ 내지 85㎝ 폭의 ㄱ자형 통로로서 바닥에 모래주머니가 1~3단으로 깔려 있고, 북동쪽 벽에는 폭 32㎝의 지상관측용 창문이 가로로 길게 설치되어 있으며, 북동쪽 벽을 따라 바닥에는 목재로 된 폭 46㎝, 높이 38㎝의 장방형 예비총열박스가, 예비총열박스 위 동쪽 구석에는 탄약통이 각 위치하고 있다. ③ 한편 북동쪽 창문 밑 벽과 서남쪽 벽에는 크레모아 스위치박스가 6개 또는 4개씩 일렬로 설치되어 있다(이상 별지 도면 2-1~4 참조).
(3) 한편, 위 경비중대는 4개 소대로 구성되어 있고, 위 공동경비대대 본부중대 예하에는 1개의 민정소대가 배속되어 있으며, 각 소대는 5일 주기로 판문점(BRF)근무, 241GP 근무, 기동타격대(QRF) 근무, 교육훈련 등을 순차로 각각 수행하게 되는데, 위 2소대는 1998. 1. 21.부터 5일 간격으로 순차 외박, 판문점(BRF) 근무, 241GP 근무, 훈련, 외박, 판문점근무를 거쳐 1998. 2. 20.부터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같은 달 24.까지 241GP에서 근무하였으며, 같은 날 16:00 이후 4소대에 241GP 근무를 인계하고 기동타격대(QRF)로 이동하여 근무할 예정이었다.
(4) 위 2소대는 김훈을 제외하고 총원 46명(부소대장 포함), 3개 분대로 구성되어 있는바, 평소 241GP에서의 근무는 일출·일몰시 각 45분간 소대원 전원이 벙커투입(stand to) 근무를 하나 그밖에는 분대별로 GP 외부 수색정찰과 주·야간 GP 내부 경계근무를 수행하며, 야간경계근무는 1개 분대가 22:00부터 다음날 06:00까지 수행하고, 주간경계근무의 경우 2개 분대가 8시간씩 나누어 06:00부터 14:00까지, 14:00부터 22:00까지 근무하되, 상황실에 2명, 1번 관측소에 3명이 각 배치되고 나머지 분대원은 교대를 위하여 대기한다. 이 사건 사고 당시에는 소대원 중 정기휴가자 등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36명만이 241GP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라. 이 사건 사고 발생 후의 정황
(1) 소외 1은 김훈의 사체를 발견한 직후 상병 소외 2를 만나 함께 사고 상황을 재확인한 후 식당으로 가서 위 2소대의 부소대장인 중사 소외 3 및 2소대원들에게 이 사건 사고사실을 전파하였고, 이에 소외 3은 곧바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김훈의 사망을 확인하고 소대원들에게 현장 출입통제 및 GP 자체비상을 지시한 후, 기관총 거치대 위에 놓여 있던 김훈의 무전기로 GP 상황실 근무 소대원에게 위 상황을 지휘계통에 따라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2) 위 공동경비대대 대대장 소령 소외 4는 12:40경 이 사건 사고현장에 도착하여 소외 3으로부터 김훈이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 대대장 운전병 소외 5로 하여금 병력들의 위 3번 지하진지로의 출입을 통제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사고현장에 도착한 대대 군의관 대위 소외 6을 통하여 김훈 중위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 후 대대 정보하사 소외 7이 정보장교 대위 소외 8와 함께 도착하여 12:55경 현장사진을 촬영하였으며, 대대장은 13:00경 대대본부에 김훈이 자살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 사실을 유선통보하였다.
(3) 미군 범죄수사대(CID)는 대대장으로부터 이 사건 사고사실을 통보받은 다음, 대대장에게 현장보존 및 부대출입통제를 요청하면서, 그 소속 중사 소외 9 등 수사관 5명을 출동시켰고, 위 수사관들은 같은 날 15:30경 이 사건 사고현장에 도착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권총, 탄피 등 사인규명을 위한 증거물을 확보함과 아울러, 현장상황을 촬영하고 현장도면(이하 ‘맥레이놀즈McReynolds 도면’이라 한다)을 작성하는 등 현장수사를 시행하였는데, 그 당시 조사된 현장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김훈은 머리 양쪽 관자놀이에 총창을 입고 동쪽 구석에서 남동쪽 벽에 등을 기댄채 양 발을 기관총 거치대 동쪽 모서리 부근에 모으고 주저앉아 있는 자세이다. ② 주요 혈흔은 기관총 거치대 동쪽부분 모래주머니 위에 1개, 북동쪽 벽 창문 높이에 2개, 남동쪽 벽 앉은 키 높이에 4개가 튀어 있다. ③ 김훈 오른발 앞 모래주머니 위에는 권총(M9 beretta 9㎜ 반자동 피스톨 총번 1140865, 이하 ‘사고 권총’이라 한다)이, 그보다 멀리 통로 북쪽에는 탄피가 떨어져 있고, 탄착점은 남서쪽 벽 5피트 6½인치(=168.9㎝) 높이에 있으며 그 아래에는 탄두파편 4개(기관총 거치대 위에 2개, 바닥 모래주머니 위에 2개)가 떨어져 있다. ④ 기관총 거치대 위에는 가죽장갑 1켤레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흰 종이로 구성된 수색정찰계획표(patrol package)가 몇 장 넘겨진 상태에서 위 장갑과 일부 겹쳐지도록 비스듬히 놓여 있으며, 김훈 오른쪽 예비총열박스 위에 전투모가 위치하고 있었다.
마. 군수사기관의 수사결과
(1) 육군 제1사단 헌병대는 1998. 2. 24.부터 미군 범죄수사대와 합동으로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였는데, 1998. 3. 27.부터는 수사본부가 제1사단 헌병대에서 제1군단 헌병대로 격상되어 수사권을 인계받은 제1군단 헌병대가 1998. 4. 29.까지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였고(이하 ‘1차수사’라고 한다), 위 수사기록을 송부받은 육군본부 검찰부는 1998. 6. 1.부터 1998. 11. 29.까지 이를 재수사하였는데(이하 ‘2차수사’라고 한다), 모두 자살로 처리되었고, 그 후 유족측의 의문제기로 국회진상규명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같은 소위에서 JSA 경비중대요원들의 대북접촉사실이 밝혀지면서 언론 등에서 김훈이 타살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국방부는 의혹해소를 위하여 특별합동조사단(단장 육군 중장 소외 10, 요원은 군검찰, 기무사, 정보사, 국정원, 민간검찰 등 요원 68명 및 변호사, 법의학자, 심리학자, 교수, 인권단체 구성원 등 25명의 자문위원으로 구성됨 ; 이하 ‘합조단’이라고 한다)을 구성하였으며, 이에 합조단은 1998. 12. 9.부터 김훈의 타살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건 사고에 관하여 전면 재조사한 후(이하 ‘3차수사’라고 한다) 1999. 4. 14. 김훈이 지급받은 권총을 이용하여 자살한 것으로 수사결과(이하 ‘합조단 수사결과’라고 한다)를 언론에 발표하였다.
(2) 합조단 수사결과 중 ‘타살로 볼 수 없는 이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이 사건 사고현장은 공간이 협소하여 2명이 동시에 자유롭게 운신하기 곤란하고, 김훈이 서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와 벽과의 공간 85㎝중 김훈의 어깨넓이 50㎝를 고려할 때 나머지 30~40㎝공간에서 권총을 발사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두정부와 천장 사이가 20㎝로서 둔기로 내려칠 공간이 없다. ② 격투나 반항의 흔적이 없고, 혈흔의 위치로 보아 김훈 좌·우에 아무도 없었으며, 공격을 받았다면 들고있던 무전기로 방어했을 것이나 무전기는 기능손상이나 파손이 없고, 전투모에 화약흔과 혈흔이 없으므로 제3자의 발사충격으로 벗겨진 것이 아니다. ③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이 없고, 내부인의 경우에도 소대원 전원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소대원과의 원한이나 갈등요소가 없었고, 우발적으로 살인이 일어날 만한 급박한 동기도 없으며, 북괴군 사주에 의한 살해가능성도 없다.
(3) 위 수사결과 중 ‘자살로 판단하는 이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유서는 없으나 자살동기가 충분하다. ② 김훈에게 지급된 총기와 실탄이 사용되었고, 총구를 오른쪽 관자놀이에 대고 거의 수직으로 발사하여 정확하게 왼쪽 관자놀이를 관통시켜 단 1발로 사망한 것은 권총 자살자의 전형적인 특징으로서, 왼손으로 반항했다면 두부를 수직으로 관통하기 어렵다. ③ 추운 날씨임에도 전투모와 장갑을 벗어 놓은 것은 총기조작을 위한 것이며, 장갑, 수색정찰계획표, 전투모, 무전기 등 유류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복장상태가 깨끗한 것은 모든 자살자의 공통된 현상이다.
(4) 위 수사결과의 ‘종합판단’에는, “김 중위는 전방 소대장경험 부족에 따른 중대장의 잦은 질책, 변용관 상위 귀순 이후 극도로 긴장된 JSA지역의 근무여건 등 급변해진 부대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평소 내성적인 성격관계로 타 소대장 및 소대원들보다 업무면에서 뒤지는 무력감과 소외감을 해소하지 못한 채 고민해오다가, 사고 다음날로 예정된 업무보고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자살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미화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통하여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고 사고장소인 한적한 3번 지하진지로 이동하여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장갑, 수색정찰계획표, 모자 등을 가지런히 기관총 거치대 위에 올려놓은 후, 자신의 지급 권총에 실탄 1발을 장전한 뒤 좌측 손으로 권총을 감싸쥔 채 총구를 우측 관자놀이에 대고 우측 손으로 격발, 단 1발의 두부관통총창을 입은 상태로 비틀거리다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자세로 사망한 것임”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2. 본안전 항변에 대한 판단
이 부분에서 당원이 설시할 이유는 제1심 판결 이유란 제2항의 기재와 같으므로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
3. 수사상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판단
가. 당사자들의 주장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의 실체가 김훈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하였던 것임에도, 합조단 등 군수사기관이 아래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사건 사고에 관한 수사 과정에서 고의로 그 진상을 은폐·조작하여 이 사건 사고를 김훈의 자살사건으로 처리하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타살임을 입증할 만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등 고의 또는 중과실로 진상규명을 위하여 필요한 수사를 다하지 않고 이 사건 사고를 자살로 몰아감으로써 원고들에게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주장하면서, 위 진상은폐행위 내지 수사상 하자로 인하여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배상으로 피고에게 청구취지 기재 금원 상당의 위자료 지급을 구한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군수사기관이 그 진상을 은폐·조작한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사고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장기간 다수의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여 유족들이 해명을 요구하는 사항들 모두에 대하여 성실히 수사하여 온 이상 수사상의 잘못은 없으므로, 손해배상책임은 성립하지 아니한다는 취지로 다툰다.
나. 배상책임 성립의 판단기준
일반적으로 수사는 범죄의 혐의 유무를 명백히 하여 공소제기와 그 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범인을 발견·확보하고 증거를 수집·보전하는 수사기관의 활동으로서, 국가로부터 공형벌권 행사의 기초가 되는 수사권 및 공소권을 독점적으로 위임받고 있는 수사기관으로서는 수사를 함에 있어 모든 국민의 법 앞에서의 평등권, 형사피해자의 재판절차에서의 진술권, 범죄피해 국민의 구조청구권 등을 보장한 헌법정신에 부합하고 공정한 수사권행사에 관한 국민적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사기관은 당해 사건에 있어서 수사를 개시하기에 족한 범죄의 혐의가 있는지의 여부를 성실히 판단하여야 하고 나아가 혐의가 인정되어 수사를 개시한 경우에는 법령의 규정을 준수하는 한편 필요하고 상당한 범위 내에서 관련된 제반 증거를 수집한 후 그에 대한 증거가치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여야 할 의무가 있고, 수사기관의 이러한 의무는 당해 사건의 피의자 내지 피고인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도 부담하는 것으로서 수사기관이 사건의 진상을 은폐·조작하는 등 이러한 의무를 고의로 저버리거나 게을리한 경우에는 피해자의 가족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인격적 법익의 침해로 인한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것이다. 한편, 이처럼 불법행위가 인정될 경우에는 그 수사가 다수인으로 구성된 국가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련의 절차임에 비추어 이에 관여한 개개의 행위자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아니하더라도 국가배상책임은 성립한다.
다. 진상의 은폐·조작 여부
군수사기관이 고의로 이 사건 사고의 진상을 은폐·조작한 경우에는 곧바로 김훈의 가족인 원고들의 인격적 법익을 침해한 피고의 배상책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바, 우선 이 사건 사고에 관한 군수사기관의 수사가 고의로 진상을 은폐·조작한 것이라는 원고들의 주장을 차례로 살펴본다.
(1) 자살동기 조작
원고들은, 합조단 수사결과 중에서 김훈이 상관으로부터 업무능력 부족이라는 지적을 자주 받자 이에 부담감과 무력감을 느끼던 중 자살을 미화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발표한 부분과 이 사건 사고 당일 6:10경 소대장실 앞 난간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일병 소외 11에 의하여 목격되었다는 부분, 그리고 김훈의 JSA 소대장 선발과정에 있어서 인사부조리가 있었다는 부분 및 김훈이 부모의 뜻에 따라 육사에 입교하는 등 과보호 속에서 성장하였고, 동기생이나 JSA 전입 배경을 알고 있는 동료장교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꼈으며, 영어실력 등이 소외 12에 비하여 부족하여 열등감을 느꼈다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게 진상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제7호증의 56, 을 제20호증의 88, 을 제21호증의 7, 을 제23호증의 28, 을 제24호증의 29, 을 제26호증의 16의 각 기재에 의하면, 육사 동기생 소외 13에게 비친 김훈은 재학시절 다소 내성적이나 쾌활한 성격으로 매사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생활태도를 가진 생도였고, 육사 훈육지도부에는 김훈이 적극적이고, 의지가 강하며, 체력이 우수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20사단에서 근무할 당시 함께 근무하던 대대장, 소대원들에게 김훈은 당시 열성적 근무자세로 책임감이 강하고 매사에 솔선수범하여 소대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으로 1, 2차수사에서 밝혀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갑 제9호증의 1 내지 9는 다른 육사 동기생들의 김훈에 대한 평가인데, 이를 전부 믿기는 어렵다), 한편, 갑 제7호증의 86, 을 제1호증, 을 제5호증의 1 내지 3, 을 제14호증, 을 제19호증의 5, 6, 54, 을 제20호증의 4, 78, 88, 90, 을 제21호증의 22, 29, 을 제22호증의 13, 18, 을 제23호증의 3, 을 제26호증의 21 내지 29의 각 기재에 의하면, 김훈에 대한 육사 훈육지도부에는 긍정적인 평가 외에도 김훈이 다소 마음이 여리고 자아가 확고하지 못하며 감정조절 능력이 부족하다는 취지의 상반된 평가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에 합조단은 육사 훈육지도부 및 소대원들의 진술(을 제5호증의 1 내지 5 참조)에 기초하여 김훈이 평소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평가하고, 김훈의 제20사단 평가단 근무와 관련하여 부친의 영향력으로 제20사단 사단장에 의하여 소대장 생활 약 4개월 10일만에 사단 평가단으로 비공식 파견된 후 영어공부만 하도록 특혜를 받은 사실을 근거로 소대장으로서의 경력이 부족한 상태에 있게 되었다고 파악하였으며, 김훈의 JSA 소대장 선발경위와 관련하여 미8군 한국군지원단 인사과장 등 관련자들의 진술과 당시 선발기록을 근거로 미8군 한국군지원단측이 김훈을 그 산하의 JSA 소대장으로 선발하기 위하여 선발기준을 변경하고 이미 선발되었던 육사 동기생을 탈락시킨 것을 확인한 다음 김훈이 육사 동기생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꼈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러한 김훈의 성격, 군경력, 업무능력과 근무상황 등을 근거로 하여 김훈이 상관으로부터 소대장으로서의 업무능력부족이라는 지적을 자주 받자 이에 부담감과 무력감을 느끼던 중 자살하게 되었다고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합조단은 관련자들의 진술, 훈육지도부 등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자살동기를 파악하면서 사고 당시 부대원들의 진술에 더 무게를 두고 김훈의 심적 상태 등을 추단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고 볼 것이고, 합조단이 판단의 근거로 삼은 위 자료들이 조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이상(갑 제14호증의 7의 기재만으로 인사특혜에 대한 진술서나 진술조서가 조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합조단이 판단의 자료로 삼은 증거들과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는 갑 제14호증의 7은 2002. 7. 31. 작성된 진술서로서 합조단이 수사결과를 발표할 당시에는 현출되지 않았던 증거이다) 이를 두고 자살동기를 조작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합조단 수사결과 중 김훈이 부모의 뜻에 따라 육사에 입교하는 등 과보호 속에서 성장하였다거나 소외감을 느꼈다는 부분과 위화감이 조성된 바 있다거나 열등감을 느꼈다는 부분은 관계인들의 진술 등에 기초한 가치판단이 내재된 평가로서 자살의 동기를 추단하는 과정 중에 인용한 것에 불과할 뿐이므로 이를 조작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또, 소외 12는 김훈보다 육사 수료 성적에 있어서는 훨씬 앞서는 성적을 거둔 바 있다 ; 을 제21호증의 10, 11 참조).
다만, 갑 제3, 4호증, 을 제5호증의 6, 7, 을 제21호증의 17의 각 기재에 의하면, 1차수사 당시 상병 소외 14는 군수사기관에서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하기 이틀 전 야간에 아랫막사에서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있었는데, 김훈이 자신도 예전에 이 책을 읽어보았다면서 소설 전체가 인간에 대한 섬세미가 넘친다고 얘기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소외 2는 김훈이 위 하루키의 작품을 추천하였다고 진술하였으며, 합조단은 위 진술들을 토대로 김훈이 자살을 미화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정보하사 소외 7이 사건 발생 이후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 당일 김훈의 책상 위에는 적극적 생활태도를 권장하는 내용이 담긴 일본 작가 나리와카 도요히코의 수필 ‘아침을 여는 3분 성공체크’가 놓여져 있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김훈이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는 합조단의 판단은 다소 무리한 추측이라 할 것이나, 앞서 본 바와 같은 김훈의 성격, 군경력 등이 자살의 주요동기로 추정된다는 취지로 발표하는 과정에서 위 ‘노르웨이의 숲’을 자살의 계기로 언급하게 된 것에 불과하고 이를 자살의 직접적인 동기로 결론 내린 것은 아니라 할 것이므로, 결국 합조단이 위 ‘노르웨이의 숲’과 관련하여 다소 무리한 추측을 하였다는 점만으로는 김훈의 자살동기를 조작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 갑 제3, 4호증, 을 제5호증의 8, 을 제22호증의 18, 을 제23호증의 19의 각 기재, 제1심 법원의 현장검증결과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일병 소외 11이 3차수사 과정에서 이 사건 사고 당일 06:10경 막사로 내려가다가 김훈이 소대장실과 식당 사이의 철제난간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을 2~3m 거리에서 목격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이에 기하여 합조단은 수사결과 9. ‘자살동기 조사’의 다. ‘김중위 사망전 특이행동’ 중 (1)항 ‘소대원에게 비춰진 김중위의 모습’에서 이러한 진술내용을 그대로 기재하였으나, 소외 11은 1차수사 당시 05:50경 막사에서 김훈을 보았다고만 진술하고 눈물을 글썽였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고, 2차수사 당시에는 05:30경에서 06:15경 사이에 김훈이 9번 지하진지에 들어 왔다가 아무말 없이 나갔다고 진술하였던 사실, 이 사건 사고 당일 문산 지역의 일출시간은 07:11이고 위 철제난간 부근에 별다른 외부 조명시설이 없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이에 반하는 을 제5호증의 9의 기재는 믿기 어려우며, 달리 반증이 없는바, 위와 같은 소외 11의 일관성 없는 진술태도, 그리고 이 사건 사고 당일의 일출시간 및 조명상태에 비추어 소외 11의 위 진술은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나, 소외 11의 위 진술조서가 조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이상 그를 토대로 한 합조단의 위 수사결과 발표를 조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므로(일병 소외 15의 진술에 의하여 인정되는 위 목격 시점의 소대장의 행적과 소외 11의 진술이 모순된다 하더라도 같은 이유로 이를 조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살동기 조작에 관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2) 권총발사자세 등 조작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의 경우 사입구 주변에 상당량의 매연이 부착되어 있고 탄도가 두부 후면 상방향이 아니며 권총을 발사하였다는 김훈의 오른손 대신 왼손바닥에 화약흔이 존재하는 등 권총자살자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없음에도 군수사기관이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권총발사자세를 조작하여 김훈이 오른손으로 총을 잡고 왼손으로 총열을 감싸안은 채 똑바로 선 부자연스러운 자세에서 스스로 권총을 발사한 것으로 발표하였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제2호증의 1, 2, 3, 갑 제7호증의 1, 29, 35, 36, 37, 41, 43, 44, 45, 59, 61, 62, 92, 갑 제8호증의 1, 2, 을 제1호증, 을 제21호증의 30, 을 제25호증의 4, 25, 27, 을 제26호증의 19, 34, 36, 38, 39의 각 기재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 후 부검을 담당한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감식관 대위 소외 16은 사입구 주변에 매연의 침착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사인을 접사에 의한 두부관통총창사로 판단하였고, 1차수사시 군수사기관은 미군 범죄수사대로부터 제공받은 화약잔재감정결과 등 미군측의 증거물 감정결과(단 김훈의 좌측손에 화약반응이 있다고 감정하면서도 근접해서 총을 발사한 사람의 손에 묻은 화약반응의 존재를 스스로 발사한 결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및 위 부검결과를 기초로 김훈이 왼손으로 사고 권총을 감싸쥐고 밀착접사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으나, 실제로는 사입구 주변에 상당량의 매연의 침착이 있었고, 다만 부검하기 전에 지워져 있는 상태였던 사실, 1차수사 후 미국 뉴욕주 법의관인 노여수는 ① 자살의 경우 총상의 기전은 통상 접사(접사, contact shot)인데 김훈의 경우 사입구 표피에 다량의 매연이 부착되어 있고 창강 내 매연축적이 불분명하므로 접사가 아닌 근접사(근접사, near contact shot)로 보아야 한다는 점, ② 권총자살자의 경우 탄도는 대체로 후상방을 향하게 되는데 김훈의 경우 탄도가 거의 수평이라는 점, ③ 김훈의 경우 오른손에서는 화약흔이 발견되지 아니하고 왼손바닥에서만 화약흔이 발견되었으므로 이는 방어흔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④ 김훈의 두정부에 나타난 혈종은 둔기에 의한 타격의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타살의 소견을 피력하였고, 그에 따라 유족, 시민단체 등이 계속해서 진상규명을 요구한 사실, 이에 육군본부 검찰부는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법의학교실에 두정부혈종에 대하여 감정을 의뢰한 결과 1998. 8. 31. 고려대학교 황적준 교수로부터, 1998. 9. 15. 서울대학교 이윤성 교수로부터 각 두정부혈종은 총창보다는 외부충격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의 회신을 받은 반면, 미군측 증거물 감정결과에 대하여 직접 감정하였던 미국방성 병리학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1998. 10. 6. 법의관 스펜서(Jerry D. Spencer)로부터는 노여수의 견해가 근거가 없다면서 김훈은 직립상태에서 자해에 의한 총상으로 사망한 것이라는 회신을 받았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미군측으로부터 야전상의 등 증거물품을 반환받아 감정을 의뢰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김훈 자신이 발사한 것인지 논단할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이 온 사실, 육군본부 검찰부는 위와 같은 감정결과 및 부검의 소외 16과 노여수 등에 대한 조사를 거쳐 근접사에 의한 자살이라고 2차수사결과를 발표한 사실, 그 후 합조단은 1999. 1. 15. 위 노여수, 소외 16 및 대한법의학회장 문국진,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수 이윤성, 고려대학교 법의학교수 황적준, 뉴욕시립대학교 법의학교수 노용면 등이 참석한 가운데 법의학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위 토론회에서 노여수를 제외한 나머지 법의학자들은 ① 김훈의 사입구가 파열상인 점 등에 비추어 총상의 기전은 접사이며 단발두부총창사로서 접사인 경우 대부분 자살이라는 점, ② 탄도는 머리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탄환이 두부를 수직으로 관통한 경우 자살로 보아야 한다는 점, ③ 피스톨을 발사한 손에서 화약이 발견되는 비율은 통계상 27% 내지 33%에 불과하고 왼손바닥의 화약흔은 뇌관 잔재물로서 먼 거리에서 방어자세를 취한 경우에는 나타날 수 없으며 김훈의 경우 왼손바닥에 화상흔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으므로 결국 왼손으로 사고 권총을 잡고 오른손으로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④ 두부총창의 경우 두피하출혈이 자주 일어나는데 김훈의 경우 전두부에도 출혈이 있었고 두정부에는 총창으로 인한 골절선이 이어져 있으며 모상건막하 출혈일 경우 출혈부위가 넓게 퍼질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위 노여수와 달리 자살소견을 각기 피력하였고, 그에 따라 합조단은 김훈이 좌측 손으로 권총을 감싸진 채 총구를 우측 관자놀이에 대고 우측 손으로 격발하였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비록 1차수사결과 발표 당시 부검의의 소견이 잘못된 자료에 기인한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기초로 한 권총발사자세 등에 관한 1차수사결과가 조작이라고 볼 수는 없고, 합조단의 수사결과는 이 사건 사고에 있어서 발사자세나 화약흔, 두피하출혈과 관련된 법의학적 문제점들 전반에 대하여 위 법의학토론회의 다수견해를 따른 것이라 할 것이므로, 그와 같은 결론을 채택함에 있어서 의문의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이처럼 합조단이 국내 권총사고 사례가 드문 현실에서 국내외 문헌과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아니한 가운데 법의학토론회를 개최하여 전문가의 다수견해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기초로 자살로 추정한 이상 적어도 이를 가리켜 발사자세 등을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원고들은 그밖에도, 사인이 밀착총상에 의한 것이라면 총열 밖에도 혈흔이 묻어 있어야 함에도 없는 점, 손에 혈흔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김훈에 의하여 권총이 발사된 것이 아니라는 점, 수사기관이 발표한 권총발사자세라면 탄피가 왼손에 맞을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수사기관이 사건을 조작하였다고 주장하나, 위 법의학토론회의 다수견해는 원고들이 주장하는 점을 모두 고려하여도 김훈이 권총을 발사한 것이라고 결론내렸고, 합조단은 위 결론을 따른 것으로서 결국 이를 조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원고들은, 3차수사시 합조단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총기발사에 따른 화약반응실험결과가 김훈의 사인이 타살이라는 점에 부합함에도 법의학토론회에서 이를 토의주제에도 넣지 않는 등 은폐하고, 화약잔재가 검출되었음에도 검출되지 않거나 빈도가 낮다고 조작하여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제3호증, 을 제6호증의 1, 을 제21호증의 47, 55, 59의 각 기재에 의하면, 2차수사 당시 육군본부 검찰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증거물품 감정 및 화약반응실험을 의뢰하여 1998. 10. 8. 야전상의 양어깨 부위에서 무연화학성분이 검출되었으나 제시된 증거물만으로는 발사자가 김훈인지 논단할 수 없고, 사고 권총에 의한 시사실험 결과 총기를 발사한 손의 손등 및 팔(엄지와 집게손가락 부근 손등과 팔, 손목에서 20센티 이내 거리)에서 화약성분이 관찰된다는 감정결과를 회신받았고, 합조단은 1998. 12. 18. 2차례에 걸쳐 총기발사시험을 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총기발사자의 야전상의, 양손바닥 및 양손 등을 닦은 거즈 등에 관한 화약잔재감정을 의뢰하여 1999. 1. 13.경 무연화학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감정결과를 접수하였으며, 다시 1999. 1. 25. 3명의 사격자에 의한 총기발사시험을 하고 의복, 손등 및 손바닥의 잔사를 채취한 테이프에 대한 감정을 의뢰한 결과 1999. 2. 4.경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오른손 손등과 전투복 팔 부위에서는 양성반응, 전투복 어깨부위에서는 음성반응의 일치된 화약반응결과가 나왔으나, 왼손의 손등과 양손바닥에서는 사격자에 따라 양성반응과 음성반응이 혼재되어 나왔다는 실험결과를 송부받은 사실, 합조단은 수사결과 발표당시 1998. 10. 8.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 중 야전잠바 양어깨에서 화약반응이 나왔고, 시사실험시 발사한 손등과 팔에서 화약입자가 관찰되었다는 내용을 원용하면서 어깨에서 나온 화약반응은 김훈이 직접 사격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1999. 2. 4.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에 대하여는 수사결과에 언급하지 아니하고, 1999. 1. 3.자 감정결과만을 인용하면서 화약잔재실험결과 화약잔재의 빈도가 낮은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합조단은 1998. 10. 8.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약반응실험결과를 수사결과에서 언급하였고, 다만 위 법의학토론회의 논의결과를 토대로 야전잠바 양어깨에서 나온 화약반응의 결과를 자살에 부합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이며, 또 미군측의 증거물 감정결과상 왼손의 화약반응결과에서 김훈이 총기발사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주의사항이 있었다거나 수사기관이 법의학토론회에 위 1998. 10. 8.자 실험결과를 제출하지 않고 수사결과 중 1999. 2. 4.자 감정결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위 실험결과를 법의학토론회에 제공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도 없다) 합조단이 채택한 법의학토론회의 화약반응 여부에 관한 다수견해는 화약흔의 검출 여부를 자·타살 감별에 있어 주요인자로 파악하지 않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이를 가지고 수사결과를 조작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3) 사고현장 조작
원고들은, ① 당초 사고 현장에 김훈의 두정부를 타격하여 살해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철모가 놓여져 있었는데 수사기관이 이를 은폐하였고, ② 사고현장인 3번 지하진지 바닥의 모래주머니는 최초 1단이었는데 두정부혈종이 외부의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님을, 즉 두정부를 타격할 공간이 부족함을 뒷받침할 목적에서 2단 내지 3단으로 변형하였으며, ③ 1차·2차수사는 권총과 사체와의 거리가 50㎝라고 결론지었는데 그 후 노여수가 자살자의 93%는 권총이 사체로부터 1피트 이내의 거리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하자 합조단 수사결과는 위 거리를 27㎝로 번복하였는바, 이러한 점들은 모두 사고현장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 먼저 철모 주장에 관하여 살피건대, 갑 제7호증의 18, 을 제3호증의 1, 을 제20호증의 49의 기재 및 을 제10호증의 영상에 의하면, 대대 정보하사 소외 7이 1998. 2. 24. 12:55경 이 사건 사고 현장을 최초로 촬영한 사진들 중 일부에서 위 김훈의 우측 발 앞에 미군용 철모(kevlar 타입) 1개가 뒤집힌 채 놓여 있는 장면이 나타나 있으나 같은 날 15:30 이후 미군 수사관들에 의하여 촬영된 사진과 비디오, 그리고 맥레이놀즈 도면 및 제1사단 헌병대가 촬영한 사진에는 위 철모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 한편, 갑 제7호증의 13 내지 17, 을 제7호증의 5 내지 7, 을 제11호증의 1, 2, 을 제21호증의 26, 을 제22호증의 25, 을 제31호증의 3, 9, 12, 23의 각 기재(다만, 을 제22호증의 25의 기재 중 뒤에서 믿지 않는 부분 제외)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후 최초로 군사법경찰관이 이 사건 사고 현장을 처음 목격하였던 소외 1, 2, 3에 대하여 조사를 하였는데, 소외 1 등의 진술에 의하면 사고현장에서 모토로라, 전투모, 장갑 등을 보았다는 진술은 있으나 위 철모를 보았다는 언급은 없는 사실, 1998. 2. 27. 미군 범죄수사대에 대대장 운전병 소외 5는 대대군의관 소외 6이 사고 당일 사고 현장에 도착하였고, 그 후 소외 7이 현장사진을 촬영하였는데, 소외 6으로부터 사고현장에서 철모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은 바 있으나 찾지 못하여 소외 6이 직접 찾아 온 사실이 있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대대장 소외 4는 소외 6이 이 사건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후에야 소외 7이 도착하였다는 취지로 각 진술한 사실, 군수사기관은 1, 2차수사 당시 위와 같은 진술에 기초하여 위 철모가 소외 6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에 관하여는 별다른 수사를 하지 않다가, 3차수사에 착수한 이후인 1999. 1. 4.경에야 미군 범죄수사대로부터 위 철모 사진을 입수하였고, 그 이후 위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된 유가족측의 문제제기로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하였는데, 그에 따라 대대장, 소외 6은 1999. 4.경 미군 범죄수사대에 소외 7의 사체주변 사진촬영 전에 대대군의관 소외 6이 자신의 철모를 벗어 김훈의 오른편에 놓고 김훈의 사체를 검안한 후 그대로 3번 지하진지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위 철모를 찾아왔다고 진술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이 사건 사고 직후 목격자들의 진술이 이 사건 사고와 철모와의 관련성이 문제가 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점에 비추어, 이 사건 사고 현장에 당초 철모가 존재하였는데 이를 군수사기관이 은폐하였다는 원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듯한 을 제13호증의 9, 을 제20호증의 49, 을 제31호증의 3, 11의 각 기재, 을 제22호증의 25의 일부 기재 및 제1심 증인 소외 17, 18의 각 일부 증언은 믿기 어렵고, 갑 제4호증, 을 제12호증의 각 기재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며,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고(갑 제27호증의 1, 2의 각 기재만으로는 소외 6 등에 대한 진술조서가 위조되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오히려 앞에서 인정한 사실에 의하면, 최초 소외 7 사진에 촬영된 철모는 소외 6이 사체 검안을 위하여 벗어놓은 철모를 다시 찾아 나오기까지 사이에 사체 주변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것에 불과하다고 볼 것이므로, 결국 위 철모와 관련하여 수사기관이 현장을 조작하였다는 원고들의 주장은 이유 없다.
(나) 다음으로 바닥 모래주머니 주장에 관하여 보건대, 갑 제7호증의 19, 을 제25호증의 28의 각 기재 및 제1심 법원의 현장검증결과에 의하면, 맥레이놀즈 도면상 이 사건 사고 현장 바닥 모래주머니는 1단으로 표시되어 있음에 반하여, 현재 지하진지 내부에는 통로부분을 제외하고는 3단으로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 한편 갑 제7호증의 19, 을 제25호증의 28의 각 기재, 갑 제7호증의 18, 을 제10호증, 을 제24호증의 28의 각 영상 및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 당시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기관총 거치대 위 모래주머니는 대부분 3단인데, 맥레이놀즈 도면상 모래주머니를 2단으로 표시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이에 비추어 맥레이놀즈 도면 중 모래주머니 층수 부분은 신빙성이 없다고 할 것이어서 앞서 인정한 사실만으로는 최초 현장 바닥 모래주머니가 1단으로 쌓여져 있었다고 추인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앞서 든 각 증거, 갑 제13호증의 1, 2의 각 영상 및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면,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사건 사고 당시 현장 바닥의 모래주머니는 입구부분 1단, 기관총 거치대 인접부분 3단, 나머지 2단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합조단이 현장 모래주머니의 층수를 조작하였다는 원고들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다) 마지막으로 권총과 사체와의 거리 주장에 관하여 보건대, 갑 제3호증, 갑 제7호증의 1, 2, 19, 을 제3호증의 2, 을 제4호증의 1, 을 제18호증의 87, 을 제21호증의 30, 61, 을 제23호증의 5, 을 제24호증의 28의 각 기재 및 갑 제7호증의 18, 을 제10호증, 을 제24호증의 28의 각 영상에 의하면, 맥레이놀즈 도면에는 사고 권총의 위치가 기관총 거치대 동쪽 모서리 부근으로부터 총구까지 17¾인치(=45.085㎝), 공이치기로부터 19¼인치(=48.895㎝)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도면만으로는 그 기준점이 동쪽 모서리인지 김훈의 오른발 군화 끝 부분인지가 불명확한데, 소외 9는 1998. 2. 25. 미군 범죄수사대에 현장검증결과 사고 권총이 김훈의 오른쪽 발에서 약 19인치 북쪽마루에 놓여져 있었다고 보고한 사실, 제1사단 헌병대는 미군측의 출입통제로 인하여 사고 당일 17:20경에야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10분간 약식으로 현장조사를 마쳤는데 당시 이미 권총 등 유류품이 수거되어 있어 이를 다시 현장에 위치시키고 사진을 촬영한 후 미군 수사관이 작성한 도면을 기초로 거리를 ㎝로 환산하여 도면을 작성하였으며, 그 결과 작성된 제1사단 헌병대 수사관 작성 현장세부모양도 및 인지보고서는 김훈의 오른발과 권총 사이의 거리를 50㎝로 표시하고 있는 사실, 그에 따라 1, 2차 수사결과 김훈의 오른발과 권총 사이의 거리가 50㎝라고 발표하였다가, 3차수사 당시 합조단은 맥레이놀즈 도면상 기준점을 기관총 거치대 동쪽 모서리로 보아야 함에도 이전의 수사결과가 도면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파악하고 기관총 거치대와 총구까지의 거리가 45.085㎝인데 소외 7 촬영사진상 김훈의 오른발 전투화가 거치대 모서리에서 ⅔이상 전진되어 있으므로 그 길이 18㎝를 뺀 27.085㎝가 김훈과 권총사이의 거리라고 판단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 제1사단 헌병대는 현장을 실측함이 없이 도면을 작성하였고, 비록 소외 7이 김훈의 오른발과 권총과의 거리를 19인치로 보고하기는 하였으나 맥레이놀즈만이 현장 상황을 실측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는 맥레이놀즈 도면이라 할 것인바, 위 도면의 기재형상에 의하면 권총의 위치는 위쪽으로 2방향, 아래쪽으로 2방향 등 모두 4가지 방향에서 측정되었는데 위쪽 2방향은 기관총 거치대의 북쪽 모서리를 기준으로 하였고, 아래쪽 2방향의 거리측정선이 기관총 거치대 동쪽 모서리를 향하고 있는데다 그 화살표 표시선 중 일부가 김훈의 발을 묘사한 선과 교차하고 있으며, 탄피의 위치 역시 벙커나 기관총거치대 모서리 등 고정된 지점을 기준으로 측정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결국 위 도면상 총구와의 거리 17¼인치(=45.085㎝)는 김훈의 오른발이 아닌 기관총 거치대 모서리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고, 나아가 앞에서 든 각 증거에 의하면 김훈의 오른발이 기관총 거치대 모서리로부터 상당부분 나아가 있음은 비교적 명백하게 인정되는 이상 합조단이 위 45.085㎝에서 전투화 길이 28㎝ 중 일부를 차감하는 방식으로 권총과 오른발 사이의 거리를 추정하는 것은 합리성 있는 판단이라 할 것이며, 따라서 이 부분 합조단 수사결과가 조작이라는 원고들의 주장 역시 이유 없다.
(4) 기타 주장
(가)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 권총이 김훈에게 지급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합조단이 이를 김훈에게 지급된 권총이라고 발표한 것은 사실의 은폐이거나 조작이라고 주장하므로 살피건대, 갑 제7호증의 58, 60, 을 제2호증의 1, 2, 3, 을 제26호증의 42의 각 기재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사고 권총의 일련번호는 1140865번(총기관리번호 204)으로서 이는 본래 소외 19의 권총이고, 김훈 권총의 일련번호는 1140862번(총기관리번호 201)인 사실, 제1군단 헌병대와 미군 범죄수사대는 이를 간과하고 김훈이 자신의 권총으로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며, 2차·3차수사 결과 이를 수정하여 김훈의 권총이 정비를 요하는 관계로 김훈에게 소외 19의 권총이 지급되었다고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 나아가 갑 제7호증의 60의 각 기재만으로는 김훈의 권총이 241GP 근무 이전에 이미 정비가 완료되었다거나 김훈에게 자신의 권총이 지급되었고 소외 19의 권총이 지급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갑 제7호증의 60, 64 내지 68, 80, 93, 을 제19호증의 8, 을 제20호증의 55, 57, 을 제25호증의 32, 을 제29호증의 20의 각 기재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사고 당시 2소대의 M9 권총은 모두 48정으로서 201번부터 248번까지 총기관리번호가 매겨져 있고, 그 중 201번이 김훈의 권총(일련번호 1140862번)이고, 202번이 부소대장 소외 3의 권총(일련번호 1140863번)이며, 203번이 일병 소외 20의 권총(일련번호 1140864번)이고, 204번이 소외 19 일병의 권총(일련번호 1140865번)이었던 사실, 미군 61정비대대의 총기순회점검 결과 김훈이 외박 중이던 1998. 2. 11. 김훈의 권총이 ‘worn sear’상태(고장은 아니나 격발기 고정판의 노후화로 정비를 요하는 상태)에 있다고 지적되었으나, 판문점 근무에 투입된 1998. 2. 14.부터 1998. 2. 20.까지의 기간 중에는 소대원 전원이 권총을 휴대하여야 하는데 김훈의 권총을 포함하여 2소대의 권총 중 총 12정이 수리를 요한다는 판정을 받아 여분의 권총이 없는 관계로, 1998. 2. 14.에는 김훈을 비롯한 소대원들은 위 경비중대 무기고 관리병 병장 소외 21의 승인 하에 각자 자신의 권총을 지급받은 사실, 그 후, 1998. 2. 20. 241GP 근무 투입시에는 소대장, 부소대장, 운전병 2명 등 총 4명만 권총을 소지하면 되므로, 정비대상 판정을 받은 소외 20의 권총을 제외하고 가장 총기관리번호가 앞서는 소외 19의 권총이 김훈에게 지급되었고, 김훈의 권총은 서류작업을 위하여 무기고(arms room)에 반납되어 보관되다가 1998. 3. 4. Camp Kyle에 수리의뢰되어 1998. 3. 16.에 수리가 완료된 사실, 2차·3차수사에서는 관련자들의 진술과 총기불출대장 등을 기초로 위와 같은 사실을 밝혀내고 이 사건 사고 당시 김훈에게 사고 권총인 소외 19의 권총이 지급되었다고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결국 사고 권총은 이 사건 사고 당시 김훈이 지급받아 소지하고 있던 권총임이 인정된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 원고들은, 국방부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요구한 총소리 청취보고에 관한 한미연합군사령부 상황일지를 조작하여 사고 당시 총소리가 청취되었다는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수사기관 역시 미군측 총성청취실험결과와 위 상황일지의 내용을 무시하고 총성청취부분을 기재한 중령 소외 22에 대하여 조사도 하지 아니한 채 아무도 총성을 듣지 못했다고 발표하였고, 사고 당시 총성을 청취한 인근 240GP의 병사들에게 강압적으로 총성을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다는 각서를 작성받는 등 총성청취에 관한 진상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하였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제7호증의 22, 25, 32, 33, 34, 갑 제26호증의 2, 3, 을 제2호증의 1, 을 제4호증의 각 기재 및 제1심 증인 소외 17의 증언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 직후 인근 제1사단에서 공동경비대대에 연락병으로 파견되어 근무하는 일병 소외 23이 작성한 상황일지, 제1사단 상황일지 및 한미연합군사령부 보고문서 등에서 총성이 청취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는 사실, 위 한미연합군사령부 보고문서를 작성한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지휘통제부 중령 소외 24는 1998. 4. 28. 국회 국방위원회에 동일 제목의 위 문서를 재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원본과 상이하게 총성청취와 관련된 부분을 삭제한 사실, 1차수사 당시인 1998. 4. 3. 상황실, 식당, 1번 관측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3번 지하진지에서 사고 권총과 동일한 권총을 발사하여 총성을 확인하는 총성청취실험을 한미 합동으로 실시한 사실, 당시 처음 발사시에는 총구앞에 장애물을 위치시키지 않은 채, 나머지는 엷은 거즈, 압박붕대 등을 밀착시키고 발사하였는데, 당시 미군 범죄수사대의 보고문서에 의하면, 첫 발사시에는 식당 및 1번 관측소에서 총성을 청취하였으나, 나머지는 총성을 청취하지 못하였다고 보고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 한편 갑 제7호증의 22, 63, 을 제2호증의 1, 3, 을 제18호증의 60, 112, 을 제19호증의 44, 45, 을 제20호증의 45, 46, 47, 92, 을 제21호증의 41, 47, 을 제22호증의 18, 을 23호증의 14, 19, 을 제26호증의 3, 12, 28, 29, 을 제31호증의 23의 각 기재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이 사건 사고 직후에 소대원들은 수사기관에 사고 당시 총성을 청취하지 못하였다고 진술하였고, 다만 일병 소외 25가 수색정찰 도중 총성을 들었다고 수사기관에서 진술하였으나 이는 241GP 쪽에서 들린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인 사격장 쪽에서 단발이 아닌 연발 총성을 들었다고 하여 이 사건 사고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진 사실, 사고 당시 판문점 근무에 투입된 1소대장 중위 소외 26은 2소대 상황실로부터 김훈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다는 보고를 받고, 대대 상황실에 실제비상발령을 알리는 암호(code word)인 Buffalo Stampede(판문점 지역에서 북괴군에 의한 비우호적인 사격)를 전파하였고, 대대 상황실에서 이를 확인한 제1사단 연락병 소외 23은 연락장교 중위 소외 27의 지휘 하에 제1사단 등에 상황보고를 하였는데, 소외 27이 보고과정 중에 총성청취라는 말을 사용하고, 소외 23이 이를 그대로 상황일지에 기재함으로써 총성청취부분이 제1사단, 한미연합군사령부 등 상급부대에 그대로 전달되었고, 그로 인하여 소외 24의 한미연합군사령부 보고문서에도 총성청취부분이 기재되게 된 사실, 소외 24는 위 보고문서를 국회에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고 2장 분량의 문서를 1장으로 요약하는 과정에서 위 총성청취부분을 누락하였으나, 그 이전에 유가족인 원고 1에게 요약한 문서가 아닌 원본 문서를 제시하였던 사실, 1998. 4. 3. 실시한 총성청취시험은 미군측의 장비를 이용하여 미군의 주도 하에 실시되었는데, 당시 한국군 수사관들은 총성을 청취하지 못하였고, 그에 따라 제1군단 헌병대는 1번 관측소는 바람소리, 식당은 비디오 소리 등으로 인하여 총성을 청취하지 못하였다고 1차수사결과를 발표하였으나, 2차수사를 맡은 육군본부 검찰부가 1998. 10. 27.에서야 미군이 촬영한 위 실험에 관한 비디오 및 오디오 자료를 미군측으로부터 입수하여 검토하고 당시 참여한 미군 수사관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 결과, 첫 발사시 총성이 청취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이를 2차수사결과에 반영하였으며, 합조단 역시 1998. 12. 18. 두꺼운 거즈를 댄 채로 총성청취실험을 하였는데 상황실, 식당, 1번 관측소 등에서는 총성이 청취되지 않았고, 다만 소대장실 안에서는 좌측쪽문에서 얇은 철판이 떨어지는 소리가 약하게 들렸으며, 1998. 2. 23. 실시한 총성청취실험에서도 사고 당시 아무도 없었던 소대장실을 제외하고는 아무 곳에서도 총성을 듣지 못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사고 당시 가장 현장에 가장 근접하여 있었던 소대원들의 일관된 진술에 비추어, 갑 제22호증의 기재는 믿기 어렵고, 각 상황일지에 총성청취라고 기재가 이루어진 경위 및 소외 22는 한미연합군사령부 보고문서의 작성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기재 경위에 비추어 그에 대한 조사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점, 소외 24가 허위의 새로운 문서를 작출하였다거나 기존의 문서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기존 문서를 요약하여 국회에 제출하였고 원본은 이미 공개된 상태였다는 점, 1차수사 당시 총성청취실험에 관하여 준비 소홀 등으로 미흡한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고 할 것이나, 2차수사에서 이를 바로잡았고 3차수사에서 두차례 더 총성청취실험을 한 점 등에 비추어, 총성청취에 관한 수사결과가 조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다) 원고들은 또, 합조단이 1분대원 11명의 경우 이 사건 사고 당시 수색정찰을 하였으므로 이들의 알리바이가 입증된다고 발표하였으나 2소대는 이 사건 사고 전일까지 수색정찰예규에서 정한 수색정찰을 모두 완료하였고, 이 사건 사고 당일의 수색정찰은 평소와 달리 인근 제1사단에 통지되지도 아니하였으며, 제1사단 수색대대 작전상황일지 및 제1사단 1일 정보요약보고서에 그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수색정찰예규상 수색정찰시에는 소대장 또는 부소대장 중 1인이 기동타격대 상황실에 위치하여 통제하여야 하고, 대대 의무병이 반드시 241GP에 대기하도록 명시되어 있음에도 이러한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로 수색정찰은 실시된 바 없으며, 통상 주간수색정찰의 경우 5명만이 참가하는데 사고 당일의 수색정찰은 1개 분대 병력인 소대원 11명이 참가한 대규모였다는 점 등에 비추어 위와 같은 발표는 진상을 은폐·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제20호증, 갑 제21호증의 1 내지 10, 을 제17호증의 기재 및 위 소외 17, 당심 증인 소외 28의 각 증언만으로는 위와 같은 수색정찰이 없었다고 단정하기에 부족하고, 오히려 갑 제7호증의 54, 71, 72, 73, 을 제13호증의 1 내지 9, 을 제16호증의 1, 을 제20호증의 92, 을 제21호증의 60, 을 제22호증의 18, 을 제23호증의 19, 21, 을 제25호증의 12, 을 제29호증의 4, 5의 각 기재에 의하면 당시 수색정찰에 참여하였다는 1분대원 11명 전원의 진술내용이 구체적이고 서로 일치하는데다 위 수색정찰에 참가한 중대정보병과 의무병의 각 진술도 이에 부합하고, 1분대장 병장 소외 29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조사결과 역시 거짓반응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으므로, 달리 이들 전원이 공모하였다고 볼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원고들의 위 주장도 이유 없다고 할 것이다.
(라) 원고들은, 합조단 수사결과 중 소외 30과 소외 31이 국회에서 진술한 바와 달리 합조단 수사과정에서 진술을 번복하였다는 부분은 수사관들의 협박 및 회유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에 부합하는 듯한 갑 제15, 16호증의 각 기재는 을 제15호증의 1, 2, 3, 5, 6, 을 제19호증의 29, 을 제20호증의 6, 7, 을 제22호증의 18의 각 기재에 비추어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렵고, 을 제15호증의 7, 8(비디오 테이프)의 각 재생결과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며,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으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마) 원고들은, 합조단이 감정결과 김훈의 전투모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으나, 미군 범죄수사대의 수사기록에 의하면 전투모의 외부에 명백한 핏자국이 있었다는 것이므로 합조단의 수사결과는 허위로서 조작된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하므로 살피건대, 갑 제7호증의 1, 갑 제26호증의 2, 3의 각 기재에 의하면, 미군 범죄수사대의 수사기록상 김훈의 전투모에서 혈흔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된 사실, 제1사단 헌병대의 1998. 5. 2.자 수사보고서(갑 제7호증의 1)상에도 사고자의 모자에 핏자국이 뿌려져 있었다는 기재가 있는 사실, 합조단은 전투모를 쓰고 있을 때 제3자가 발사하여 그 충격으로 전투모가 벗겨졌다면 전투모에 화약흔 및 혈흔 등 흔적이 나타날 수 있지만 감정결과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살이라는 결론의 근거로 원용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나, 한편 갑 제7호증의29의 기재에 의하면, 미군측의 증거물 감정결과는 김훈의 전투모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나왔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합조단이 위와 같이 발표한 것은 미군측의 위 수사기록을 입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또 위 수사보고서를 간과한 흠은 있으나 미군측의 증거물품 감정결과를 그대로 취신하여 위와 같이 판단한 것이라고 할 것이므로, 이를 조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할 것이고, 따라서 원고들의 위 주장 역시 이유 없다.
(바) 원고들은, 합조단이 이 사건 사고 현장에 장갑, 수색정찰계획표, 전투모, 무전기 등 유류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고 발표하였으나, 이는 진상을 은폐·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제3호증, 갑 제7호증의 13, 14, 16, 39, 40, 69, 78, 을 제7호증의 10 내지 12, 을 제19호증의 11, 12, 14, 19, 23, 24, 을 제20호증의 11, 12, 13, 을 제22호증의 9, 10, 11, 18, 을 제23호증의 19, 20, 30, 을 제25호증의 32, 을 제26호증의 2, 9, 11, 을 제29호증의 18의 각 기재, 갑 제4호증의 일부 영상 및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면, 소외 7이 현장사진을 촬영한 12:55 이후 이 사건 사고 현장은 기관총 거치대 위에 가죽장갑이 있고 그 위에 수색정찰계획표가 몇 장 넘겨진 상태에서 장갑과 일부 겹쳐지도록 비스듬히 놓여져 있었으며 전투모는 예비총열박스 위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던 사실, 이 사건 사고 직후 기관총 거치대 위에는 김훈의 무전기가 놓여 있었으나 소외 3이 상황전파용으로 사용한 후 계속 소지하고 있다가 다음날 부중대장에게 반납한 사실, 이 사건 사고 직후 이 사건 사고 현장을 목격하였던 소대원들 및 소외 3은 당시 유류품 중 전투모의 위치에 관하여 서로 상반된 진술을 하였는데, 소외 2는 1998. 2. 27. 기관총 거치대 위에서 전투모와 무전기를 보았다고 진술하였다가 1998. 3. 28. 기관총 거치대 위에서 전투모, 무전기, 그리고 장갑을 보았다고 진술하였고, 2차수사 당시에는 전투모 아래에 무전기와 장갑이 놓여져 있었으나 수색정찰계획표는 기억에 없다고 진술하였다가, 다시 3차수사에서는 전투모가 맨 위에, 그 밑에는 장갑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고, 다시 그 밑에는 검정색 육군수첩으로 보이는 수첩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으며, 소외 1은 1차수사 당시에는 전투모 위치와 관련한 진술이 없었다가 2차수사에 이르러 기관총 거치대 위에 전투모가 놓여져 있었고, 그 옆에 무전기가 있었다고 진술하였고, 합조단의 수사 당시 수사초기에는 전투모가 기관총 거치대 위에 장갑, 무전기와 같이 놓여져 있었다고 진술하였다가 1999. 1. 12.경에는 전투모와 장갑이 가지런히 기관총 거치대 끝 부분에 놓여져 있었고, 특히 전투모는 모자창 부분이 출입구 방향을 향하고 있어 지하진지를 왕래하는 사람에 의하여 건드려져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태였다고 진술하였으며, 일병 소외 32는 1차, 2차수사 당시까지는 사고 현장에 관하여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다가 1999. 12. 18.에 이르러서야 기관총 거치대 위에 전투모와 무전기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고 진술하기 시작하였으며, 소외 3은 1차, 2차수사에서는 수사초기부터 일관되게 기관총 거치대 위에 장갑, 수색정찰계획표, 그리고 무전기가 위치하여 있었고, 전투모는 김훈의 오른쪽에 있는 예비총열박스 위에 놓여져 있었다고 진술하였다가 3차수사가 개시된 후인 1998. 12. 22.에는 전투모가 뒤집힌 채로 놓여져 있었는데 바로 놓았다고 하였고, 1999. 1. 8.에는 여전히 예비총열박스 위에 전투모가 놓여져 있었다고 하면서도 소외 1과 소외 2의 진술에 비추어 자신이 기관총 거치대 위에 놓여져 있던 전투모를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고 진술한 사실(그러나 소외 3은 합조단 수사결과가 발표된 이후인 1999. 4. 20.까지도 여전히 전투모는 예비총열박스 위에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합조단은 수사결과 기관총거치대 모래주머니 상단에 검정색 가죽장갑 1켤레와 수색정찰계획표가 포개어져 있고 그 위에 김훈의 전투모, 우측에 무전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소외 3이 지하진지에 들어가 김중위의 머리와 맥박을 살피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전투모를 우측 통로에 떨어뜨렸다가 이를 뒤늦게 발견하고 예비총열박스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위 수색정찰계획표는 몇 장이 넘겨져 당일 수색정찰지역의 지도가 펼쳐진 상태로서 가죽장갑 위에 비스듬히 겹쳐져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므로, 적어도 이를 가리켜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목격한 내용을 더욱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유류품의 종류에 대하여 일관성 없이 진술한 소외 2나 2차, 3차수사에 이르러서야 전투모의 위치에 관하여 진술한 소외 1, 32의 각 진술서나 진술조서는 수사초기부터 일관되게 전투모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소외 3의 진술에 비하여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것이나(위 갑 제4호증의 일부 영상에 의하면 당시 장갑과 수색정찰계획표는 기관총 거치대 위의 모래주머니 1개 폭 이상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전투모가 장갑 위에 놓여 있었다 하더라도 소외 3이 사체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이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적다고 할 것이다), 합조단의 위 수사결과는 위와 같은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사고현장의 유류품의 위치에 관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는바, 증거가치의 평가가 이를 행하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견해가 나뉠 수 있다는 면을 고려할 때 목격자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가운데 어느 일방의 진술을 취신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사건 조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할 것이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소외 2, 1, 32는 위 장갑, 수색정찰계획서 등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고, 이를 토대로 유류품의 배치 형태에 관하여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고 결론지은 합조단 수사결과 역시 조작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 을 제7호증의 11, 을 제19호증의 19, 을 제31호증의 20 참조).
라. 수사상 과실 내지 위법성 여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결국 이 사건 사고에 관한 군수사기관의 수사가 고의로 진상을 은폐하거나 사건을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므로(그밖에 원고의 주장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제1심 증인 소외 33, 17, 18의 각 일부 증언은 의견 진술에 불과하므로 이를 채용할 수 없다), 아래에서는 이 사건 수사상의 직무상 과실의 존부 내지 그 위법성 여부에 관하여 살펴 본다.
(1) 인정사실
다음 각 사실은 갑 제3, 4호증, 갑 제7호증의 1 내지 10, 13 내지 17, 24, 31, 32, 35, 37, 39, 41, 47 내지 55, 57, 58, 59, 61, 82, 85, 86, 89, 90, 92, 을 제2호증의 1, 2, 3, 을 제4호증의 2, 3, 을 제5호증의 8, 을 제18호증의 9, 92, 108, 122, 125, 126, 을 제19호증의 8, 14, 21, 55, 을 제20호증의 9, 32, 53, 62, 을 제21호증의 27, 28, 41, 53, 을 제22호증의 9, 13, 14, 15, 17, 21, 23, 을 제23호증의 2, 3, 4, 8, 9, 14, 19, 29, 30, 을 제24호증의 11, 22, 27, 28, 을 제25호증의 12, 18, 20, 21, 26, 27, 28, 32, 을 제26호증의 16, 18, 21 내지 29, 34, 37, 38, 39, 을 제29호증의 22, 23, 을 제31호증의 23의 각 기재, 갑 제4호증, 갑 제7호증의 18, 을 제24호증의 28의 각 영상 및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이를 인정할 수 있다.
(가) 현장조사의 미흡 및 현장보존의 소홀
1)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후, JSA 내에서의 사건수사를 지역관할로 담당하고 있는 제1사단 헌병대는 14:50경 미군 행정과장 소령 소외 34로부터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였고, 위 헌병대 소속 조사계장 준위 소외 35 등 수사관 3명이 현장으로 출동하여 15:30경 위 공동경비대대 정문에 도착하였으나, 미군측이 이 사건 사고현장은 미군 지휘관이 지휘하는 작전지역임을 들어 한국군 수사관의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진입하지 못하고 대기하다가, 16:45경에서야 241GP에 도착하였다.
2) 당시 이미 사고현장에 도착하여 증거물품을 확보하고 현장상황을 촬영하는 등 현장조사를 진행 중이던 미군 범죄수사대는 제1사단 헌병대에게 자신들이 수사한 결과를 통보해 주겠다면서 현장확인차원의 조사만을 요구하였고, 이에 제1사단 헌병대는 이 사건 사고현장에 관한 조사는 위와 같이 미군에게 일임한 채 수사결과를 다음날 인계받기로 하고, 17:20경에서야 이 사건 사고현장인 3번 지하진지에 들어가 10분간 약식으로 현장조사를 마쳤는데, 당시 이미 권총 등 증거물품 등이 미군에 의하여 수거된 상태여서 이를 다시 현장에 위치시키고 사진을 촬영한 후 미군 수사관이 작성한 맥레이놀즈 도면을 기초로 현장도면만을 작성하고, 미군측이 수거한 증거물품 외에 김훈의 신분증 등 소지품을 확보하였다(군사법원법과 군검찰사무운영규정에 의한 변사자 검시조서 등을 작성한 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3) 한편, 대대장 소외 4는 사고 당일 현장조사가 끝날 무렵 미군 범죄수사대에 1998. 2. 26.로 예정된 미국 사절단의 사고현장 방문준비를 위하여 사고현장을 페인트로 도색해도 되는지를 문의하여 미군 범죄수사대로부터 승인을 받은 다음, 대대 작전장교 소령 소외 36에게 3번 지하진지 내의 혈흔 등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였고, 사고 당일 16:00경부터 241GP 근무를 인계받은 4소대장 중위 소외 37은 같은 날 19:00경 위 소외 36으로부터 대대장의 지시를 전달받고 4소대원 병장 소외 38, 상병 소외 39 외 1인과 함께 약 1시간에 걸쳐 거치대 모래주머니, 우측 총환구 상단벽면 등에 묻어 있던 혈흔을 물걸레로 지우는 등 혈흔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 후, 3번 지하진지 내부는 다음날 10:00경 대대 노무자들에 의하여 새로 도색되었고, 원고 1 등 유가족들은 수사초기부터 위와 같은 현장훼손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4) 또, 제1사단 헌병대는 미군측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현장훼손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의하거나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고, 다만 1998. 2. 25. 미군 범죄수사대에 한미 합동수사를 요청하여 미군측과 사이에 한국군과 미군이 공동으로 수사주체가 되어 합동수사를 하기로 협의하였는데, 미군 범죄수사대는 제1사단 헌병대로부터 미군 범죄수사대측이 조사 후 수거해간 증거물품인 권총, 유류탄피, 전투복, 손을 닦은 거즈 등의 회수요청을 받았으나, 총기가 미합중국이 지급한 권총으로서 미합중국 재산이라는 이유 등으로 증거물품의 반환을 거절하면서 다만 증거물품을 미군측 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의뢰하여 그 결과를 통보하여 주겠다는 회신을 하는 등 증거물품에 대한 조사는 미군에 의하여 주도되어 실질적으로는 공조수사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미군 범죄수사대는 현장에서 확보한 총기 등에 대한 감정의뢰를 위한 지문채취를 사전에 하지 않고 한국군측과도 공조가 되지 않아 한국군측의 부검이 실시된 후 입관 직전에 뒤늦게 김훈에 대한 지문을 채취한 바도 있다).
(나) 현장증거품 등에 대한 조사 미비
1) 그런데, 제1사단 헌병대가 현장조사를 할 당시 이 사건 사고 현장 북동쪽 벽에 일렬로 설치되어 있던 6개의 크레모아 스위치박스 중 오른쪽으로부터 2번째, 일련번호 13번과 16번 사이에 위치한 스위치박스(2차수사 당시에는 15번으로 복구되었다)의 덮개가 파손되어 김훈의 오른쪽 전투모와 탄약통 사이 예비총열박스 위에 엎어진 상태로 비스듬히 떨어져 있었고(크레모아 스위치박스의 번호는 덮개에 표시되어 있는데 위 스위치박스 번호가 일련번호 순으로 되어 있지 않으므로 덮개가 망실될 경우 당해 스위치박스의 번호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귀빈방문 및 근무지 인수인계가 예정된 상황에서 위 스위치박스에 대한 수리요청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파손된 스위치박스 덮개가 정리되어 있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예비총열박스 위에 엎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크레모아 스위치박스는 종전부터 파손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사고 당시 깨어져 떨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이 사건 사고 당시 김훈이 왼손에 착용하고 있던 손목시계의 덮개유리 9시부분이 6㎜×4㎜ 크기로 파손되어 있었는데(김훈의 시계유리는 감정결과 울퉁불퉁한 물체에 의하여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 을 제21호증의 53 참조), 제1사단 헌병대는 현장조사 당시 위와 같이 약식으로 현장조사를 마친 관계로 격투반항의 흔적으로서 타살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위와 같은 점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다.
2) 또, 이 사건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사고 권총의 일련번호는 1140865번(총기관리번호 204)으로서 이는 본래 소외 19의 권총이고, 김훈 권총의 일련번호는 1140862번(총기관리번호 201)임에도 제1사단 헌병대는 증거물품에 대한 현장조사를 정밀하게 하지 못하고, 김훈의 권총소지증에 대한 확인절차도 거치지 아니하여 이를 간과하였다.
3) 결국, 제1군단 헌병대와 미군 범죄수사대는 1998. 4. 29.경 위와 같은 크레모아 스위치박스의 파손, 손목시계 파손에 대하여 이를 간과하여 제대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김훈의 의복이나 사고 현장에서 격투반항흔적이나 물적 증거가 없으며, 외상이 없다면서 김훈이 자신의 권총으로 자살하였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고(한편, 1998. 2. 25. 실시한 부검에 관한 사체검안서나 부검소견서에는 오른쪽 손등에 2.5㎝ × 1.5㎝ 크기의 표피박탈이 관찰된다는 기재가 있었으나, 이 또한 1차수사 결과발표는 간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2, 3차 수사결과 이 사건 사고 후에 후송과정 등에서 생긴 사후손상으로 밝혀졌다), 원고 1 등 유가족측에서 1998. 9.경 문제를 제기하여 비로소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2차수사가 개시된 후에야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 수사초기의 형식적인 알리바이 조사
1) 한편, 제1사단 헌병대는 현장조사를 마친 다음 사고 당일 23:00경부터 그 다음날 02:00경까지 2소대 막사 복도에서 당시 241GP에서 근무하던 소대원 35명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 사건 사고 무렵 김훈의 상태와 사고 당일 김훈의 행적, 그리고 소대원들의 당시 임무 및 시차별 행적에 관하여 진술서를 받았는데, 당시 소대원들이 자신의 사고 당일 행적에 관한 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하자 수사관은 시간대별 행적이 30분 가량 차이가 나는 것은 상관없다면서 그 당시 같이 행동했거나 함께 근무한 소대원들과 시간을 상의하여 진술서를 작성할 것을 독려하였고, 또 부소대장은 소대원들에게 소외 1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여 비상을 건 시간이 12시 29분이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소대원들은 부소대장이 말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시간을 기억해 낸 소대원을 중심으로 서로간에 토론하듯이 시간대에 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사고 전후의 행적을 기재하였고, 그에 따라 식사차량이 도착한 시간, 비상이 발령된 시간 등 시간대별 행적에 관하여 서로간의 진술이 큰 차이 없이 대략적으로 일치하여 소대원들 행적이 대체로 확인되게 되었다.
2) 소대원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김훈의 사망추정시간은 11:50경부터 12:20경이라는 것이고, 이 사건 사고 당시 1분대원 병장 소외 29 등 11명은 중대본부 상병 소외 40, 의무대 일병 소외 41과 함께 주간 수색정찰을 하고 있다가 4소대장의 지시로 기동타격대에서 대기하다가 241GP로 복귀하였고, 2분대원 병장 소외 42 등 10명은 야간근무로 인하여 내무반 막사에서 취침 중이었으며, 3분대원 상병 소외 43 등 14명은 관측소, 상황근무, 교대대기 등 주간근무 중이었다.
3) 그리고, 제1사단 헌병대는 1998. 2. 27.에 이르러서야 직접 이 사건 사고 관련자들을 신문하기 시작하였는데, 1998. 2. 27.에는 소대원들 중 이를 처음 목격한 소외 1, 2와 부소대장 소외 3, 그리고 중대장 및 부중대장에 대하여만 수사관들의 추궁에 의한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후, 1998. 3. 6. 소외 1, 2, 3에 대하여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실시하여 그 진술에 거짓반응 없는 것으로 확인하고 소대원들로부터 평소 소대장에 대한 인상 및 소대장과 부대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진술서를 받았을 뿐, 소대원들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신문은 이루어지지 않다가 1998. 3. 28.경에이르러서도 소외 20 등 일부 소대원에 대하여만 진술조서를 받고 나머지 소대원들로부터는 진술서만을 징구하였다. 결국 1차수사 당시에는 소대원 전체에 대한 수사관의 실질적인 신문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2차수사가 개시된 1998. 9. 2.경에서야 육군본부 검찰관 등에 의하여 개별적인 신문이 행해졌다.
(라) 2소대 상황일지, 소외 3의 컴퓨터 등의 미확보
1) 241GP에서 근무하는 경비소대의 상황근무는 1번 관측소와 상황실 근무자가 상황메모지와 로그(LOG)지를 작성하여 북측의 동향과 241GP 내의 차량출입현황 등 시간대별 상황을 기록하도록 운용되었는데, 상황메모지는 241GP에서 발생한 각종 상황을 메모 형식으로 A4 용지에 낱장으로 기재하는 것으로서 당일 18:00경 이를 종합하여 필요한 사항을 소대일지(인원현황, 당일 시간별 실시사항 및 예정사항을 기재하게 되는데, 그 다음날 08:00경 소대장이 이를 이용하여 지휘보고를 하게 된다)에 이기된 다음 파기되고, 로그지는 북측 동향을 기록하는 별도의 상황일지로서 작성한 다음날 아침 중대본부 및 대대 상황실에 직접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2) 2소대도 이 사건 사고 당일 상황메모지와 로그지를 기록하였고,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후 2소대로부터 241GP 근무를 인계받은 4소대의 상황근무자 병장 소외 44는 당일 15:00경 2소대 상황 근무자로부터 사고 당일 출입자 명단 등이 기록되어 있는 상황메모지와 로그지 등을 전달받은 다음, 22:00경 소대일지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판단하여 상황메모지를 소각처리하였는데, 당시 1차수사를 담당한 제1사단 헌병대는 위 상황메모지 등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3) 또, 제1사단 헌병대는 1998. 3. 3. 미군 범죄수사대 소외 9로부터 사고 당일 241GP의 상황일지, 위 공동경비대대 대대본부 상황실 상황일지, 그리고 미군측이 대대장 등 미군들을 상대로 조사한 진술조서 및 사고보고서 등을 요구하여 받았으나, 당시 수사관은 위 소대일지에 관하여는 12:30경 비상이 걸렸던 것 외 특이사항이 없다고 보고한 후 이를 기록에 편철시키지 아니하였으며, 이후 위 상황일지는 분실되어 확인할 수 없게 되었고, 원고 1 등 유가족으로부터 1998. 3. 26. 식사차량 도착시간 등 시간대별 행적을 알기 위해 상황일지를 요구받았으나, 상황일지를 분실하였다고 답하였다.
4) 소외 3이 1차수사 당시부터 주장한 이 사건 사고 당시 알리바이는, 소외 3이 소대장의 업무보고 준비에 따른 군수분야 업무보고문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이 사건 사고 전날 22:00경부터 사고 당일 4:00까지, 다시 사고 당일 10:00경부터 12:00경까지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였다고 하는 것인데, 1차 수사기관이 업무보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중대장 소외 45에게 소외 3의 컴퓨터의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소외 45는 위 컴퓨터가 미군 재산이라는 이유로 대대장의 승인이 없어 컴퓨터를 수사기관에 제출하지 못하고 1998. 5. 11. 위 “업무보고” 문서를 화면으로 출력하여 사진촬영하는 방법으로 수사기관에 제출하였지만, 위 사진상 촬영된 ‘업무보고’에는 실제 작업내용이 거의 없었다.
5) 소외 3은 1998. 6. 19. 미8군 한국군지원단 본부로 전출될 당시 위 컴퓨터를 가지고 나와 1999. 8.경 용산에서 하드디스크를 포맷하여 결과적으로 위 작업내용을 복구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군수사기관은 그 이후에야 위 컴퓨터를 압수함으로써 결국 중요한 증거품을 확보하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바) 사인에 대한 예단 정황
1) 이 사건 사고 직후 사고 현장에 도착한 대대장 소외 4는 소외 3으로부터 김훈이 자살한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사체를 확인한 다음 김훈이 자살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 내용을 대대 상황실에 무선으로 알렸으며,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소속 중령 소외 24는 12:40경 미측 상황장교 소외 46으로부터 JSA지역 내에서 피아구분이 안되는 귀순자로 추정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 같다는 상황을 접수하고 위 공동경비대대 상황실에 확인한 후 다시 소외 46으로부터 이 사건 사고가 김훈의 자살인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통보를 받고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게 이를 보고하게 되었는데, 위 보고내용이 합참을 경유하여 국방부에 보고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사건 사고 정황이 언론에 알려져 당일 석간신문에서 김훈이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2) 김훈의 사체는 당일 18:20경 대대 의무실로 옮겨진 후 23:00경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수사가 개시된 다음날인 1998. 2. 25. 부검이 실시되었는데, 당시 군의관 소외 16은 부검 직후 사체검안서를 발급하면서 사망의 종류란에 ‘외인사’ 중 ‘자살’이라고 표기하였다가 유족측으로부터 수사관을 통하여 항의를 받자, ‘자살’ 표기를 삭제한 사체검안서를 다시 발급하여 주었고, 나중에 작성한 부검소견서에도 자·타살 여부를 기재하지 않았다. 당시 군의관이 자살이라고 판단하게 된 주요 동기 중 하나는 사입구 표피 부근에 매연의 침착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실은 사입구 주변에는 상당량의 매연이 부착되어 있었으나 후송 중에 지워진 것이었고, 이는 2차수사에서 유가족 측의 문제제기에 의하여 밝혀졌다.
(사) 군사법경찰관의 1차수사 결과발표
군사법경찰관은 1998. 4. 29. 미군측과 합동으로 이 사건 사고에 대하여 정확한 자살동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 241GP 내에 있던 소대원들에 대한 조사결과 혐의점을 찾을 수 없고, 김훈의 의복이나 사고장소 내에 싸운 물적 증거와 격투반항의 흔적이 없는 등 현장조사 및 증거물 감정결과 자살을 입증하고 있다면서 김훈이 자신의 권총으로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아) 2차수사 및 3차수사
1) 위 수사기록을 송부받은 육군본부 검찰부는 전담수사팀을 구성하고 1998. 6. 1.부터 수사를 개시하였는데, 1998. 6. 23. 부검의 소외 16에게 부검소견서에 대하여 사실조회를 의뢰하고, 다음달 30. 부검군의관을 소환조사한 다음 서울대와 고려대 법의학교실에 두정부혈종 등에 관하여 감정의뢰하는 등 부검상 의문점에 대하여 재조사하였고, 1998. 9. 2.에는 JSA에 들어가 현장검증을 다시 하고, 소외 3 등 소대원들에 대하여 시간대별 행적 등에 관하여 개별적이고 심층적인 신문을 실시하였다.
2) 군검찰은 1998. 9. 1. 유족들과 유족측 변호사 김형운 등이 참석한 가운데 노여수의 이견을 청취하고 슬라이드를 시청하였으며, 1998. 9. 8. 미군측으로부터 현장수거증거품을 반환받아 탄도, 화약반응에 대하여 감정을 실시하였으며, 1998. 10. 6. 유족측 요구에 의하여 미군측 감정결과 및 노여수의 이견에 대하여 미국방성 병리학연구소에 감정의뢰하였고, 또한 유가족이 제기한 사고 권총이 김훈의 것이 아니라는 의혹에 대하여 총기불출대장 등 관련서류를 검토하고 관련자들을 조사하였으며, 김훈의 고등학교 및 육사 재학시절에 대한 생활기록부, JSA 선발기록 등을 입수하고 관계인들의 진술을 확보하는 등 김훈의 경력, 평소 성격 및 생활태도 등에 대한 조사 또한 병행하였고, 1998. 10. 27.에는 미군측으로부터 총성실험 비디오, 오디오 자료를 입수하여 분석하는 등 유족들이 제시하는 의문점에 대하여 심층적인 조사를 한 다음 김훈의 사인을 자살로 판단하였다.
3) 그 후 제1의 마. (1)항에서 본 바와 같이 국방부는 1998. 12. 9. 특별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전면적인 재수사에 착수하였는데, 6회에 걸친 현장방문 및 조사, 17개 부대원들에 대한 참고인 조사, 계좌추적 및 거짓말탐지기 검사, 총기발사시험, 총성청취실험, 권총지문현출실험 등 각종 실험 및 시험 실시, 법의학토론회 개최 등을 통하여 위 제3의 가.항에서 본 바와 같이 유가족이 제기한 의문사항 및 초동수사에서 미흡하였던 부분을 재조사하고 타살가능성과 자살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한 후 김훈이 자살한 것으로 최종결론을 내렸다.
(2) 판단
(가) 일반적으로 수사기관이 직무상 의무를 위반하거나 게을리하였다는 이유로 과실이 있다는 판단에 있어서, 수사를 담당하는 요원들도 능력이나 지식에 한계가 있는 이상 실체적 진실을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는 없고, 인적·물적 설비에 제약이 있고 수사권한이나 제도상의 한계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밖에 수사관할권 내지 수사대상지역의 특수성 등에 비추어 수사상의 제한요소도 있을 수 있다는 점, 또 수사결과 나온 여러 자료에 대한 평가는 유일하고 절대적일 수 없고 이를 행하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견해가 나뉠 수 있는 판단작용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수사기관의 활동을 직무상 의무위반으로 단정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법치주의의 원칙상 수사기관의 활동 내지 판단이 외부의 영향 등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그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준사법적 기능의 측면이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수사기관의 당해 사건에 관한 수사상의 잘못이 객관적이고 명백한 경우에는 과실이 인정되고, 그로 인하여 권리나 법익의 침해가 있다면 그 위법성도 인정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의 특수조직인 군대 내부에서도 타당한 것이고, 따라서 군대 내부에서 범죄나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에도 수사기관은 위와 같은 범위 내에서 직무상 의무를 부담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군대는 국가의 직접 관리 하에 엄격히 통제되고 격리되어 있는 집단으로서 외부와 접촉 등이 차단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군대 내에서 어떠한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그로 인한 피해자가 있어도 가족 등 이해관계인들의 참여나 감시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사가 이루어지게 되고, 또 그에 관한 증거나 자료도 군대 내부에 있어 그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국민이 헌법상 부과된 병역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군대에 입대한 경우 국가는 그 장병의 신병을 가족 등 보호자로부터 인수하여 관리하게 된다 할 것이고, 이 때 국가는 장병의 생명·신체에 대한 보호와 배려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할 것이며, 만일 군에 입대한 장병이 어떠한 사건·사고로 인하여 생명·신체를 해하는 등 그 신상에 이상(이상)이 생긴 경우에 국가는 그 내용과 원인을 밝히고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국가 산하의 군수사기관 등에게 요구되는 직무상 의무의 정도는 일반 수사기관보다 높게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병역의무의 이행을 위하여 자녀나 피보호자를 군대에 보낸 부모와 보호자 등은 국가에 대하여 그러한 이상에 관하여 알 권리, 나아가 그 내용과 원인에 관하여 엄정하고 철저한 조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권리 내지는 인격적 법익을 침해당한 경우에 당해 장병을 부양·양육하여 군대에 보낸 부모나 보호자 등으로서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 이상이 군대 내부의 사망사건이라면 이를 조사하는 군수사기관은 유족들의 억울함이나 오해가 없도록 초동수사 단계부터 사고현장을 철저히 보존하고 사인과 연관되는 증거를 수집·판단하며 조그만 단서라도 소홀히 함이 없이 이를 포착하여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여야 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 할 것이고, 군복무 중 사망사건이 수사기관에 의하여 자살로 인정되는 경우 전사 내지 순직으로 인정되는 경우와는 달리 국가유공자등예우및지원에관한법률과 군인연금법 등에 따른 연금수급, 사회적 혜택과 국립묘지 안장 등 국가보훈 처우의 인정 여부에 사실상 큰 영향을 미치게 됨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군수사기관이 수사과정에서 위와 같은 직무상 의무를 위반하여 특정한 예단을 가지고 엄정한 수사를 하지 아니하여 사인을 미궁에 빠뜨려 부모 등의 의혹을 증폭시키고 그들의 명예감정이나 법적 처우에 관한 이해관계 등을 침해하는 정도에 이른 경우에는 인격적 법익의 침해로 인한 불법행위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다만, 국가기관의 위와 같은 직무상 의무는 일반적으로 확장될 수는 없고(재소자 등의 경우와 같이 국가가 신병을 인수하여 관리하고 그에 대한 보호의무를 인정할 수 있는 경우에 일부 유추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위에서 인정한 알권리나 조사요구의 권리 등의 인격적 법익은 자녀를 군대에 보낸 부모나 제1차적 보호자 이외에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가족에 한하여 인정되어야 한다(덧붙이건대 대한민국의 진정한 국민이라면 병역을 수행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명예롭게 복무할 수 있는 권리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바, 과거 군대 내 의문사 사건이 군수사기관의 일방적인 조사결과 자살로 처리된 예가 있다는 의혹이 있어 장병들이나 그들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나 보호자 등으로부터 병역의무의 수행과정에서 신변의 안전과 그 처리에 대하여 신뢰를 받아오지 못한 면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군 수사방식을 새로이 정립하고 국민에게 신뢰받는 군대로 거듭나기 위하여서도 군수사기관 등에게 위와 같은 직무상 의무를 요구함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그 후 국방부에 의문사처리과를 두고, 각 군본부에 조사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돌이켜 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이 사건 사고에 관한 군수사기관의 1차수사는 군사법원법 제264조 에 의한 변사자 검시 및 그에 이어지는 일련의 수사과정이었다 할 것이고, 따라서 변사자 검시를 담당하게 된 군사법경찰관으로서는 사체의 상태 및 현장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 변사의 의심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 군검찰사무운영규정 제24조 에 의하여 지체 없이 현장을 보존함에 필요한 조치를 하고 관련된 증거를 수집·확보하는 등 필요한 조사를 하는 한편 이를 검찰관에게 보고하여 그 지시에 따라 필요한 처분을 하여야 하며, 그와 같은 수사과정에서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직무상 의무를 부담한다고 할 것임에도, 이 사건 사고의 초동수사를 담당한 군사법경찰관은 사고지역이 유엔군사령부 관할이라는 이유로 미군측의 출입통제를 당하자 미군 범죄수사대에 현장조사를 미루고 뒤늦게 사고 현장에 임하여 타살임을 입증할 단서가 될 수도 있는 크레모아 스위치박스나 손목시계의 파손 등을 간과하고 유류품의 위치를 실측하거나 현장사진을 촬영하는 것도 소홀히 하는 등 제대로 된 조사 없이 10분만에 현장검증을 마치면서 현장보존에 관한 조치도 소홀히 하여 사건 현장이 도색되도록 하는 등 현장훼손을 방치하였고, 부검을 위하여 후송된 김훈의 사체를 사고 당시와 같이 보존하지도 아니하고 법의학적인 감정도 철저히 시행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이러한 점들은 이미 합조단의 수사결과에도 지적되어 있다. 갑 제3호증 참조) 소외 3의 컴퓨터 등 주요 증거품을 확보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소대원들에 대한 알리바이 조사에 있어서도 이 사건 사고 후 상당기간이 경과할 때까지도 형식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소대원들에게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또 시간별 상황을 알 수 있는 소대 상황일지 등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아니하여 241GP의 상황을 소대원들에 대한 진술에만 의존하게 함으로써 소대원을 상대로 한 알리바이 조사에 대한 신빙성을 한층 더 의심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소대원들에 대한 지문채취나 피복압수 등 타살의 물적 증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조사 역시 이루어진 바 없다), 나아가 1차수사 당시 군수사기관이 사고 권총이 누구의 권총인지 조차도 조사하지 아니하는 등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하여 제대로 수사하지 아니한 채 자살이라고 단정지음으로써 어떠한 예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게 하였는데, 만일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이를 소홀히 하여 사건의 실체를 불분명하게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이 사건 사고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히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하였으며, 나아가 그 후의 2차·3차수사 등 전면적인 재조사에도 불구하고 원고들로 하여금 제3의 가.항에서 주장한 바와 같은 진상은폐·사건조작의 의혹을 불식시키게 하지 못하였고 당초의 부실한 1차수사를 합리화하는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는 불신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피고 산하 군수사기관의 담당수사관들은 직무인 김훈의 변사사건에 대한 수사를 행함에 있어 그 직무상 의무를 소홀히 하여 군복무 중이던 김훈의 유가족들인 원고들로 하여금 사인에 대한 알권리나 명예감정 등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였다고 할 것이고, 자식 내지 형을 명예로운 장교로 군에 보낸 원고들이 의혹과 억울함에 빠지고 명예감정 등을 손상당하는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임은 경험칙상 넉넉히 추인할 수 있으므로, 피고는 위와 같은 직무상 의무위반으로 인하여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김훈이 사망하자마자 이 사건 사고가 미군측과 대대장 등 부대원을 통하여 자살로 성급히 판단되었고, 그에 따라 당일 언론을 통하여 김훈이 자살하였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부검을 담당한 군의관은 부검 직후 자살로 예단한 사체검안서를 작성하다가 이를 삭제하는 등 사건 발생의 초기부터 제대로 된 조사나 수사 없이 김훈이 자살한 것이라는 예단이 부대 내·외부에 지배적이었고, 그러한 정황이 수사기관의 수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바, 과연 군사법경찰관에게 진상규명의 의지가 있기는 하였던 것인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유엔군사령부의 작전관할지역에 속하는바, 위 지역에서 벌어진 범죄행위의 수사관할권 문제에 관하여 유엔군사령부와 피고 사이에서 명시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바도 없고, 대한민국과아메리카합중국간의상호방위조약제4조에의한시설구역및대한민국에서의합중국군대의지위에관한협정(SOFA) 제22조는 주한미군의 지위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를 유엔군사령부 작전관할지역에서 발생한 범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할 것인지에 관하여는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달리 위 지역에서의 수사에 관하여 확립된 수사관행도 없는 상황에서(다만 JSA에 근무하는 한국군은 육군본부 직속 한국군지원단 소속으로서, 한국군의 변사사건은 한국군 수사기관이 1차적 수사권을 행사함이 당연하나, SOFA 합의의사록 제22조 제10항에 의하면, 미군은 공여받은 시설구역 안에서 범인체포권을 보유하고, 한국은 미군의 사전동의가 없는 한 미군시설 내에서 압수, 수색, 검증을 할 수 없으므로, 1차적인 수사에 사실상의 제약은 있다고 보인다) 사고발생 초기 미군 범죄수사대에 의하여 최초의 현장조사가 이루어졌고 한국군 수사관측은 미군의 출입통제로 17:20경에야 현장조사를 할 수 있었던 점, 당시는 이미 미군에 의하여 사고 권총 등 현장유류품이 수거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점, 또 권총사고 수사의 경험이나 전문인력이 거의 없는 군수사기관의 현실상 총창이나 화약흔, 혈흔, 탄도 및 권총과 사체와의 거리 등 전문적 법의학지식에 기초한 현장조사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점 등의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군수사기관의 직무상 의무가 없어지게 된다거나 할 수 있는 직무상 의무를 다하였다고 인정할 수는 없고(이와 같은 JSA 내에서의 사건·사고의 조사에 관하여 사전에 적절한 한미공조수사체제를 구축하지 아니한 것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다만 그 의무위반의 정도에 관하여 참작할 사유가 될 뿐이다. 그리고, 군수사기관 나아가 국방부가 2차, 3차수사에서 유족들이 해명을 요구한 사항에 대하여 장기간 많은 인력과 비용을 투입하는 등 최선을 다하여 수사한 점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으나, 1차수사에 있어서 수사상 잘못으로 인하여 2차, 3차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이 명확히 규명되지 아니하였고 유족들의 의혹이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도 않은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바, 그렇다면 그 후 2, 3차수사가 시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초동수사에 있어서 군수사기관이 소홀히 한 직무상 의무를 다한 것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 역시 피고의 책임의 정도를 정함에 있어 참작할 사유가 된다고 볼 것이다.
(다) 그러나, 초동수사 이후의 2차 및 3차수사에 관하여는, 위에서 인정한 바와 같이 우선 군수사기관이 2차수사에서 부검을 직접 담당한 부검의 등 모든 관련자들에 대한 소환조사와 실험 및 감정을 거쳐 부검의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고, 국방부 합조단에 의한 3차수사에서도 심층적 조사를 거친 후 국내에서 흔하지 아니한 권총사고에 관하여 이례적으로 법의학토론회를 개최한 결과 법의학자들 다수가 자살로 소견을 피력하였고 이후 계속되는 수사과정에서 이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타살의 증거 역시 발견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그 다수의견을 채택하였는바, 이 사건 사고가 최전방이자 유엔군의 작전관할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공개수사에는 한계가 있는데도 초동수사 이후 육군본부 검찰부, 합조단이 원고들의 해명요구 항목들에 관하여 이례적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많은 인력과 비용을 투입하여 수사를 계속한 결과 나온 자료를 토대로 전문적 지식에 의하여 판단을 하였다고 보이며, 이 사건 사고를 자살로 단정짓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2, 3차수사 종결시까지 타살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타살 또는 단순 의문사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보면, 비록 원고들 측이 3차수사의 진행과정에서 합조단의 구성이나 일방적인 조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등 불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피고 측의 2차 및 3차수사의 과정은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이고 그 결론에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 만큼 피고로서는 위 2차, 3차수사의 과정 및 결과에 관하여 직무상 의무위반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진상조사의 요구 등에 관한 원고들의 인격적 법익의 침해가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할 것이다.
(라) 나아가 피고가 원고들에 대하여 지급할 위자료의 액수에 관하여 살피건대, 우선 김훈과 원고들의 연령, 김훈과 원고들 사이의 인적 관계 및 원고 1은 육사를 졸업한 군고위직 출신으로서 병역기피의 풍조가 있던 세태 하에서 자신의 아들 역시 육사에 진학시키고 적극적으로 병역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대를 이어 국가수호의 임무를 당하게 하였는데, 김훈이 육군장교로서 군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발생한 이 사건 사고로 인하여 위 원 소외 18 아니라 어머니인 원고 2와 유일한 형제인 원고 3이 상당기간 동안 억울함과 비탄에 빠졌고, 또 육군장교인 김훈에 대한 명예감정 등도 해한 것으로 인정되는 점, 다른 한편 이 사건 사고가 유엔군 관할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당시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조사는 미군 측이 하였고 미군의 비협조로 한국군의 수사기관이 적시에 수사에 착수할 수 없었으며, 이 사건에 관하여 군사법경찰관의 1차수사 이후에 최종 판단을 내리는 군검찰의 2차수사 및 국방부 합조단의 3차수사도 이루어져 피고 측이 원고들의 의문제기나 해명요구에 대하여 최선의 조사를 시행하였으며, 비록 1차수사상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미군 측의 조사내용에 의존하고 그 결론에 따른 것으로 보이고, 2, 3차 수사가 종결된 후에도 자살이라는 결론에 대하여 명백한 반증이 나오지 아니하여 그 결론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는 점 등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제반사정을 참작하면, 피고가 원고들에게 지급할 위자료의 액수는 원고 1, 2에 대하여 각 5,000,000원, 원고 3에 대하여 2,000,000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4. 명예훼손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판단
원고들은, 합조단장 중장 소외 10이 원고 1의 동기생들에게 “자살할 수밖에 없는 가정이다”, “김훈을 국립묘지에 보내려고 억지를 쓰고 있다”는 등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살피건대, 소외 10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후 그 정당성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에게 김훈의 JSA 소대장 전입경위 등을 설명한 사실이 있음은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으나, 나아가 소외 10이 구체적으로 원고들 주장과 같은 발언을 하였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고, 또한 위와 같은 발언을 언제, 누구에게 하였는지에 관하여 구체적인 내용의 주장·입증이 없으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5. 결론
그렇다면, 피고는 원고 1, 2에게 각 위자료 5,000,000원, 원고 3에게 위자료 2,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불법행위일 이후로서 원고들이 구하는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임이 기록상 명백한 2000. 1. 9.부터 피고가 지급의무의 존부 및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한 당심 판결 선고일인 2004. 2. 17.까지 민법이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갚는 날까지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이 정한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므로{원고들은 구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2003. 5. 10. 법률 제6868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3조 제1항 소정의 연 25%의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나, 위 구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제3조 1항 본문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이율' 부분에 대하여는 2003. 4. 24.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 있었고, 그 후 개정된 위 법률 조항과 그에 따라 개정된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제3조제1항본문의법정이율에관한규정(2003. 5. 29. 대통령령 제17981호로 개정된 것)은 2003. 6. 1. 이후에 적용할 법정이율을 연 2할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원고들의 이 부분 청구는 이유 없다},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이를 각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이를 각 기각할 것인바, 이와 결론을 일부 달리한 제1심 판결은 부당하므로 원고들의 항소를 일부 받아들여 제1심 판결 중 위에서 지급을 명한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 패소부분을 각 취소하여 피고에게 위 각 금원의 지급을 명하고, 원고들의 나머지 항소는 이유 없어 이를 각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