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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
서울중앙지방법원 2006. 5. 26. 선고 2001고단9724,2005고단7068(병합) 판결
[국가보안법위반(찬양·고무등)][미간행]
피 고 인

피고인

검사

오영신

변 호 인

법무법인 한결 담당변호사 백승헌외 2인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에 처한다.

이 판결 선고 전의 구금일수 52일을 위 징역형에 산입한다.

다만 이 판결확정일로부터 3년간 위 징역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범죄사실

피고인은 1972. 2. ○○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81. 8.경 미국에 유학하여 1987. 12. □□□ 대학에서 ‘남한의 농지개혁의 재조명 - 미군정하의 남한, 필리핀과 북한 비교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후, 1988. 1. △△대학교 및 ○○대학교 강사, 1989. 3. △△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를 거쳐 1997. 9. 같은 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어 현재까지 재직해 오고 있다.

피고인은 1994. 7.경 민족통일의 실현을 위해 평화협정의 체결, 남북한 상호군축, 외국 군대의 단계적 철수 등을 실천 강령으로 조직된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정책위원장, 1998. 4.경 ‘평화주의자 공소외 1 [1993. 10. 8. 국가보안법위반(간첩)죄로 무기징역 확정] 석방대책위’ 발기인, 1999. 5. 7.경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철수, 평화협정 체결, 연방제 통일방안의 합의·확산을 4대 정치적 과제로 하여 결성된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약칭 자통협)’ 공동의장, 2001. 3.경 ‘2001년 8·15 민족대축전’을 앞두고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 평화협정체결 등 평화통일, 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 실현을 목적으로 설립된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약칭 통일연대)’의 공동대표(현재 지도위원), 2002.경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비핵 군축 등 전쟁반대의 목적으로 설립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약칭 평통사)’의 지도위원, 2004. 9.경 위 평통사 부설 평화·통일 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각종 반미 집회에 참석하여 ‘주한미군 철수, 미국에 의한 한반도 전쟁위기 고조’ 발언을 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피고인은, 북한 공산집단이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 단체로서 대남 적화통일을 기본 목표로 설정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관에 서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계급투쟁으로, 대한민국의 현실을 미제국주의의 강점하에 그들이 내세운 파쇼정권을 통하여 종속된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서 모든 인민이 수탈당하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인민해방을 위해서는 남한의 노동자·농민·진보적 청년학생·진보적 지식인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도시소시민·애국적 군인·양심적 민족자본가·반제 애국인 등 각계각층의 인민을 보조역량으로 삼아 반미·반정부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폭력·비폭력, 합법·비합법·반합법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파쇼정권 및 매판자본가를 타도함으로써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제시절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부각, 찬양하는 반면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평가절하하고, 6·25 전쟁을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항거한 조국(민족)해방전쟁이라고 왜곡하면서 통일방안으로는 소위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내세워 국가보안법 폐지, 북미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공산주의 활동 합법화 등이 그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선전·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1. 2000. 10.경 피고인의 주거지에서 “한국전쟁과 민족통일”이라는 논문을 집필하였는 바, 그 주요내용은

○ 5단계로서의 한국전쟁이라는 소제목 하에

- 전쟁주체를 중심으로 본 한국전쟁은 외세와 외세의존 국내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민족자주세력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민족해방전쟁 또는 내전의 형태를 띠었다.

- 1948. 2. 7.구국투쟁에서 비롯된 1단계 작은전쟁은 남한 좌익혁명세력이 주도했고 동시에 4·3항쟁이나 여순항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한 민중세력이 적극 호응한 전쟁이었다.

- 한국전쟁이 단순히 1950년 6월 25일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쟁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남북분단을 저지시켜 민족통일을 이룩하려는 통일전쟁이었다.

- 2단계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비롯된 북한이 제한적으로 전쟁을 확대하여 서울 긴급점령하고 공소외 7 정권을 무너뜨려 통일정부 수립을 꾀한 제한 확대전쟁이고 흔히들 6·25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본질은 순수내전이다.

- 3단계는 2단계의 제한확대전인 순수내전에 미국이라는 외세가 즉각적으로 참전하여 지리멸렬하는 외세 의존, 반민중세력을 긴급 수혈하면서부터 시작된다.

- 전쟁은 순수내전의 의미는 퇴색하고 남의 순수내전에 ‘불법적’으로 개입한 미국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민족해방전쟁이 지배적인 성격이 된다.

-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남한군은 패전을 거듭해 한 달내에 남한의 90%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미국이 제한확대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을 경우 몇 주내에 민족통일이 북한주도로 이뤄졌을 것임을 입증한다.

○ 한국전쟁의 민족 중심적 인식이라는 소제목하에

- 작은 전쟁이 통일전쟁이었음을 보여주듯이 6·25전쟁이라 일컫는 제한확대전쟁 또한 통일전쟁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 6·25전쟁은 새로운 전쟁이라기보다는 1948년 2. 7 구국투쟁에서 시작된 ‘작은전쟁’의 연속이었으며, 작은전쟁만으로는 통일을 성취하기 힘들다고 보았기 때문에 ○○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통일을 성취하려고 전쟁을 확대시킨 확대전쟁이었다.

- 이 전쟁 확대는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갑자기 북한이 남침을 한 기습적인 침략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

- 6·25 제한확대전쟁은 한반도에서 진행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중주권 상황에서 전개된 순수내전이었다.

- 이 내전에 외세인 미국이 한쪽인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무력개입을 꾀한 것이야말로 침략행위이다. 순수내전으로 시작된 6·25 제한확대전쟁이 외세의존, 반혁명, 반민중세력의 절멸로 마무리되려는 시점에서 미국이라는 외세가 무력 개입함으로써 전쟁주체가 바뀌고 전쟁의 성격도 순수내전에서 조국(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환한다.

- 남의 내전에 외세가 무력 개입한 결과로 북한이 추구한 제한적 무력에 의한 조국통일은 좌절된다. 좌절될 뿐 아니라 민중세력이 오히려 외세에 의해 와해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 중국은 우방인 북한이 붕괴되는 시점에서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국의 참전은 다분히 방어적인 성격이었다.

- 소련이 6·25 확대전쟁에 관계한 것은 어디까지나 북한주도의 확대전쟁에 동맹적 수준에서 동의와 지원을 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련은 처음부터 이를 내전이라 규정하며 불간섭입장을 천명하고, 직접적인 전쟁개입을 자제했다.

○ 한국전쟁의 극복과 통일이라는 소제목 하에

- 김일성 전쟁책임론은 분단과 전쟁을 넘어 통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민족사적 여정에 걸림돌만 될 뿐이다.

- 김일성에게 전쟁발발의 전적인 책임을 지우는 것은 한국전쟁을 6·25 확대전쟁 이후로 한정시키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총체적 구도를 포착하지 못한다.

- 6·25 확대전쟁의 책임문제를 거론할 수 있겠으나 전쟁원인을 행위자 개인이나 집단의 의도적 결과로만 보는 설명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 사회형성론에 의한 한국전쟁의 기원은 해방이 되면서부터 사회주의로 지향하던 조선의 내재적 역사방향을 거꾸로 돌린 외세, 특히 미국에 의해 주도된 민족분단에 있다.

-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의 시발인 작은전쟁과 6·25확대전쟁에서 전면전쟁으로 비화된 데 대한 전쟁책임론은 미국에게 돌아가야지 김일성이나 공소외 7 등에게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 맺음말이라는 소제목 하에

- 한국전쟁은 해방당시의 민족사적 핵심과제인 친일파 청산, 민족통일국가 수립 등이 미국에 의해 좌절된 상태에서, 이를 늦게나마 구현하려는 민족민중지향 통일혁명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외세와 이 외세와 동맹한 반혁명세력 간의 공식적인 무력투쟁이었다. 곧 통일혁명전쟁이었다. 물론 이런 원인을 제공한 것은 미국이었다는 등

6·25전쟁은 1948. 2.부터 개시된 전쟁으로서 민족자주세력과 외세의존세력간 조국통일해방전쟁의 성격을 띤 내전임에도 미국이 ‘불법하게’ 개입하였고, 따라서 미국은 침략자이며 이제 반해 소련이나 중국의 개입은 정당하다고 왜곡하고, 6·25전쟁에 대해 김일성에게 전적인 책임을 지울 수는 없고 오히려 미국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남한을 외세의존 및 반민중 세력이라고 기술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6·25 전쟁을 조국통일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과 남한에 전쟁책임이 있다고 선전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할 목적으로 위 표현물을 제작하고, 그 무렵 “경제와 사회” 겨울호에 게재함으로써 이를 배포하고,

2. 가. 2001. 4. 초순 ○○대 총학생회측으로부터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하여 주체사상의 형성, 발전과정에 대해 발표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수락한 다음, 그 무렵 피고인의 주거지에서 “주체사상은 어떻게 형성·발전되었는가”라는 자료를 제작하여 미리 ○○대 총학생회측에 전달하여 주고, 같은 달 4. 23.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대학교 문화관에서 개최된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하여 약 150여명의 학생 및 일반인 등을 상대로 위 자료를 토대로 강연하면서,

○ 공화국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주사의 거대일반이론 내용만 강조하여 ‘철학적 원리’등에서 자귀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분석철학적 방법론으로 주사를 분석, 비판하는 것은 일면적 접근으로, 주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이 형성, 발전되어온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제한 후,

○ 90년대 초반 동구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라는 도미노 상황에서 공화국이 생존권을 누릴 수 있었고, 극에 달한 식량난과 경제난, 미국의 대공화국 압살정책, 김일성 주석의 유고 등이 겹친 고난의 행군 기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체사상 때문이고,

○ 현 시기는 6·15 공동선언으로 본격적 통일시대 또는 통일성취시대로 진입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으나, 현 통일정세를 분석함에 있어

- 외적으로는 미국은 부시정권 등장이후 신제국주의와 황야의 무법자적인 폭력중심의 세계지배질서를 강요하고, 북한에 대한 강경일변도의 대북 적대정책 기조를 재현하고 있으며

- 내적으로는 종속적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따라 공기업의 해외매각화로 국민경제의 터전이 무너져 통일의 결정적 시기에 자원을 동원하여 통일사업을 전개하여야 할 국가가 자원동원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 위와 같은 외적·내적 통일 정세가운데 주체사상의 현재적 과제와 주체사상의 역할로서는

- 첫째, 남북 주도를 통한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라는 대내적 주체노선을 강화하여야 하고,

- 둘째, 제2의 친일파 청산의 차원에서 사대주의 세력에 대한 배척과 청산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이 있으며

- 셋째, 신자유주의에 부화뇌동할 것이 아니라 대내적 주체노선을 지향하여야 하며

- 넷째, 분단과 반통일의 주범인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자주노선을 견지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 다섯째, 주체사상의 핵심인 대외적 자주노선과 대내적 주체노선은 오늘날 통일성취시대에 기본적인 길잡이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주체사상을 긍정적으로 부각시키는 한편, 외적·내적 통일정세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통일을 위해서는 자주적 주체노선의 입장에서 외세 및 남한 사회의 친미사대주의 세력을 척결하여야 한다고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고,

나. 2001. 5.초순 ●●대 총학생회측으로부터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수락한 다음, 그 무렵 피고인의 주거지에서 “이북사회 자주노선의 의미와 그 배경”이라는 자료를 제작하여 미리 ●●대 총학생회측에 전달하여 주고, 같은 해 6. 13.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대학교 경영관에서 개최된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하여 약 200여명의 학생 및 일반인 등을 상대로 위 자료를 토대로 강연하면서

○ 주체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외적 자주노선 또는 대내적 주체노선은 해방공간의 민주개혁에서 건국사상총동원 운동을 통하여 민족자긍심과 자존을 높이면서 정권초기부터 추구되었고, 1955년 12월부터 본격화 되어 1956년 8월에 발생한 종파사건에서 절정화 되었고, 이어 1958년 3월 제1회 당대표자 대회에서 마무리되어 전후복구 및 사회주의 건설노선에서 주체노선이 정착되었다.

○ 이 결과 북한은 자주 또는 주체의 나라라는 명성을 얻었고 제3세계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지만 투쟁 대상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으로부터는 악의에 찬 ‘악당국가’라는 낙인을 받아 엄청난 시련을 받고 있다.

○ 항일무장세력이 주축인 북한정권은 조선사회의 내적인 동력과 소련의 방조에 힘입어 민족사적 과제였던 친일파 숙청과 일제잔재 청산을 최대의 과제로 설정하여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였다.

○ 더 나아가 북한은 단순한 친일파 청산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라 북한권력 핵심의 두 기둥인 노동당과 인민정권에서 항일민족해방투쟁에 직접 참여한 세력들이 압도적 구성을 이룸으로써 반제 자주노선과 민족정통성의 굳건한 터전을 이룩하였다.

○ 북한은 6·25 전쟁이라는 민족내부의 내전에 외세로서 전쟁발발 사흘만에 개입하였던 미국을 한달만에 거의 물리치고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해방과 통일과업을 이루어 반미자주화 투쟁을 마무리하려고 하였으나 이 시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복병을 만나 1950년 10월 평양이 미군에 점거 당하는 정권소멸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때 바로 항미원조보가위국이라는 명분하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도움으로 미군에게 사상 최초로 대 패전을 안겨주었다.

○ 북한의 대미 자주화 투쟁은 지금 현시점에서도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는 진행형이다. 이 힘들고 험난한 대미 자주화 투쟁과정에서 북한은 끈질기게 고난을 헤쳐 나갔고 의연하게 이를 극복하여 확고한 자주노선의 전통과 체질화가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등으로 고립무원인 상태에서 동구사회주의의 도미노 몰락에서도 사회주의를 보전할 수 있었고,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90년대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이 극에 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여전히 대내적 및 대외적 자주노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 후

마지막 결론부분으로서 공화국 ‘자주노선의 함의’ 라는 제하에 위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주체사상 토론회에서와 마찬가지로 6·15 공동선언 이후 통일성취시대에 진입하였음에도 현재 미 제국주의 중심의 외세와 사대주의 반민족 세력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분석한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주도를 통한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라는 대내적 주체노선을 강화하고 주체사상의 핵심인 대외적 자주노선과 대내적 주체노선이 오늘날 통일성취시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해방후 북한이 민족정통성이 있는 정권이라고 서술하고, 반미자주화의 관점에서 주체사상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김일성 및 이를 계승한 김정일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통일을 위해서는 자주적 주체노선의 입장에서 외세 및 남한 사회의 친미사대주의 세력을 척결하여야 한다고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고,

다. 2001. 7. 말경 ▲▲대 총학생회측으로부터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수락한 다음, 그 무렵 피고인의 주거지에서 “주체사상이 이북사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자료를 제작하여 미리 ▲▲대 총학생회측에 전달하여 주고 같은 해 8. 8. ▲▲대학교 전산소에서 개최된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하여 약 100여명의 학생 및 일반인 등을 상대로 위 자료를 토대로 강연하면서,

○ 공화국은 노동당과 인민정권의 주축이 항일투쟁 세력으로 이루어져 민족정통성을 확립하였고, 농지와 더불어 보조적 생산수단까지 재분배하는 혁명적 토지개혁을 완수함으로써 민중성을 확보하였다.

○ 공화국 정권은 권력핵심부가 항일무장투쟁세력이라는 권력뿌리의 정당성을, 남한에서 연판장 선거로 선출된 약 200여명의 남한 인민대표와 북한에서 선출된 100여명의 대표가 조선 전체 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북의 인민정권을 출범시킴으로써 제한적이나마 권력창출의 정당성을, 토지개혁·남녀차별금지법제정·노동법제정·중요재산국유화 등 반제반봉건민주개혁을 실천하여 권력행사의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전쟁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미 반외세자주화투쟁은 공화국에게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권을 위한 투쟁의 연속으로 위 ○○대 및 ●●대 주체사상 토론회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주체사상의 대외적 자주노선을 유지, 강화함으로써 힘들고 험난한 대미 자주화 투쟁과정에서 공화국은 끈질기게 고난을 헤쳐 나갔고 의연하게 이를 극복하였다면서, 마지막 결론부분으로 역시 위 ○○대 및 ●●대 주체사상토론회에서와 같이 주체사상이 통일성취시대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북한을 민족정통성 및 정당성을 갖춘 정권이라고 서술하고 주체사상을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통일을 위해서는 자주적 주체노선의 입장에서 외세 및 남한 사회의 친미사대주의 세력을 척결하여야 한다고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고,

3. 2001년 8·15 민족대축전을 준비하기 위해 구성된 「6. 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라 함)측은 위 대축전의 서울·평양 동시개최가 바람직하다는 정부 입장에 따라 북측 준비위와 위 대축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2001. 7. 18~19, 7. 31~8. 3, 두 차례에 걸친 실무접촉에서 서울· 평양 동시개최 및 남북 상호방문을 주장하였으나 북측이 서울 방문은 곤란하다고 주장하자 민간교류의 활성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 등을 감안, 북측의 입장을 받아들여 행사를 남북에서 동시에 개최하되 남측에서만 300명 상당이 방북키로 합의하였으나, 장소에 관하여 북측은 계속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이하 3대 헌장탑이라함)앞에서의 행사를 고수하였는바,

○ 위 3대 헌장탑은 북한이 ‘조국통일 3대헌장’(이하 3대헌장이라 함)을 선전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서

- 위 3대헌장은 북한이 1994. 7. 8.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의 통일지도자상 부각 등 통치체제의 공고성을 대내외에 선전하고, 남,북,해외의 친북반한 세력을 규합,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철폐 등 우리의 안보 무력화 공세를 적극 전개하는 한편 대남선전선동에 활용, 대남 적화통일 노선을 구축하기 위해 1997. 8. 4. 기존의 ‘조국통일 3대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연방제 통일방안’ 등 3개의 통일노선을 묶어 ‘민족의 통일 강령’이라 발표한 것인데,

- 첫째, 위 ‘조국통일 3대원칙’은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발표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통일 원칙과 표현만 같을 뿐, 북한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들의 통일원칙으로 선전·선동하고 있는 것으로 실질적인 내용은

·‘자주’의 원칙은 「주한미군 철수」 및 「미국의 내정 불간섭」이 선행되어야 하고

·‘평화’의 원칙은 남한내 「핵무기 철거」, 「군사훈련 중지」등이 선결조건이며

·‘민족대단결’의 원칙은 「국가보안법 철폐」 및 「폭압기구 철폐 후 전민족적 연공통일전선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 둘째,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은 통일문제에 남한 당국을 배제하고 반정부세력들의 합법공간을 마련,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통일전선 전략의 일환이고,

- 셋째, ‘연방제 통일방안’은 국가보안법과 폭압기구 철폐, 제정당 단체 합법화,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등을 선결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통일방안으로 연공합작 통일기반 조성을 위한 위장평화술에 불과한 것이므로

위와 같은 의미가 담긴 3대헌장을 선전하기 위한 3대 헌장탑 앞에서 북한이 개최하는 행사에 우리 방북단이 참석하는 것은 북한의 통일방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북한의 정치적 선전·선동에 이용당할 우려가 있고,

○ 통일부에서도 위와 같은 판단 하에 위 장소에서의 행사개최는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2001. 8. 13. 추진본부측에 방북불허통보를 하였다가 민간교류를 활성화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본부측의 거듭된 방북허가요청을 받아들여 조건부로 방북을 허용하기로 하되,

- 방북승인 조건으로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 관련 행사 참여 금지 등 3가지로 부여하고,

- 위 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 공소외 2 등 4명으로부터는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관련행사 참여 및 북한의 통일방안이나 정치적 주장에 동조하는 행위 금지 등 3개항을 조건으로 하는 ‘확약서’를 제출받고,

- 2001. 8. 14. 21:00경부터 22:00경까지 ◎◎성당 3층 카톨릭회관에서 방북시 유의사항으로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을 훼손시키는 언동 삼가, 무분별한 통일논의 자제, 군사안보문제 등 남북관계에 부담을 주는 합의 자제, 방북기간 중 활동은 추진본부 집행부의 통제에 협조하고 개별적으로라도 3대 헌장탑행사 참가는 금지한다」는 내용을 교육하고,

○ 이에 따라 위 공소외 2 신부도

- 위와 같은 교육 직후, 이번 방북이 「3대 헌장탑 행사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등 의 조건하에 승인된 것이라고 교육 참석자들에게 재차 강조하였고

- 피고인과 함께 탑승한 북한행 비행기 안에서도 위 조건부 방북 승인의 점에 대해 탑승객들에게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 또한, 8. 15. 16:00경 북한 도착후 평양 고려호텔 1층 로비에서 방북단을 향해 3대 헌장탑 행사는 참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지하였는바,

평소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피고인으로서는 위 3대 헌장탑의 의미와 성격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위 3대 헌장탑앞에서의 행사를 금지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또한 위 방북 전 교육 등을 통해 3대 헌장탑앞에서의 행사 금지방침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평양 고려호텔에서도 3대 헌장탑앞 행사참가를 두고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2001. 8. 15. 18:20경 방북단 중 약 150여명과 함께 평양 고려호텔에서 북한측이 미리 준비한 버스를 이용하여 고려호텔을 출발, 19:00경 통일의 거리에서 하차한 다음 그 곳에서부터 3대 헌장탑까지 ◇◇◇과 ◆◆◆ 등의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면서 ‘조국통일’, ‘민족자주’ 등을 연호하는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답례하고, 같은 날 19:20경 3대 헌장탑 앞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되어 있는 연단 앞 좌측 좌석에 앉은 후 곧바로 시작되어 개막선언, 축하연설, 기념식수, 문화공연 순으로 진행된 대축전 개막식에서,

북측준비위원장 공소외 3의 개막선언에 이어 등단한 공소외 4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자주성이 민족의 생명이며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민족의 최고이익”이라고 연설하고, 계속하여 공소외 5 조평통 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러에 앞서 미군철수와 6·15 선언 이행을 강조하신 것은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 의지의 원칙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라는 연설을 하자 이에 호응하여 박수를 치는 등,

김일성이 제시한 조국통일방침을 찬양·선전할 목적으로 건립된 위 3대 헌장탑앞에서의 행사에 참가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 민주적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남한 방북단이 대축전에 참가한 기회에 위 3대헌장에 입각한 통일원칙을 선전·선동하려는 반국가단체인 북한 및 그 구성원의 활동에 동조하고,

4.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피고인으로서는, 북한은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를 북한을 방문하는 자들이 필수적으로 들러야할 관광장소로 조성한 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경력 및 그 이후 혁명활동에 대해 찬양·선전하는 장소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만경대와 김일성, 김일성과 주체사상은 분리하여야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소 통일을 위해서는 주체사상의 대외적 자주노선을 수용하여 외세 특히 미국의 간섭이나 개입을 배격하고, 주체사상이 통일시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바,

2001. 8. 17. 16:30경부터 약 40분간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하여 북측 안내원으로부터 만경대의 유래, 김일성의 일생 및 업적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그 안내에 따라 김일성 생가, 기념관을 차례로 둘러본 후, 방명록이 있는 테이블까지 걸어가 그 곳에 비치되어 있던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고 기재하여,

피고인의 평소 소신대로 자주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김일성 정신 내지 주체사상을 의미하는 만경대 정신을 계승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김일성을 찬양하면서 통일을 위해서는 주체노선을 견지하여야 한다고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고,

5. 2002. 6. 29.경 제2차 서해교전에 대한 글을 「 ⊙⊙⊙⊙」지에 기고하기로 마음먹고, 그 무렵부터 2002. 8.경까지 서울 중구 중림동 (지번, 동호수 생략) 소재 삼성사이버빌리지아파트 110동 1302호 피고인의 집에서 ‘서해교전과 맹목적 냉전성역의 허구성’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작성한 후, 같은 해 8. 말경 「 ⊙⊙⊙⊙」편집실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전송하여 「 ⊙⊙⊙⊙」2002년 가을호(13호)에 게재되도록 하고, 같은 해 9. 24.경 △△대학교 인터넷서버 피고인의 홈페이지 중 ‘짧은 글 모음’란에 위 글을 게재하였는바,

그 주요 내용은,

○ 1차 서해교전에 이어 2차 서해교전에서도 남한사회는 냉전에 마비된 맹목성과 극단성을 보이고 있다. 남한측 피해가 1차보다 더 커서인지 오히려 이번 2차 서해교전에서는 더 심한 것 같다. 교전이 발발하자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막무가내식의 북한의 계획적인 도발론, 선제공격론, 확전론이 즉각적으로 등장했다.

○ 북방한계선이 영해선이나 군사분계선이라는 냉전성역이 허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단순히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유엔해양법과 정전협정을 위배하고 있다.

○ 남한의 대부분의 언론과 군과 정치인은 이러한 (정전협정, 유엔해양법) 위배를 인정하기 보다는 1차 교전 때 차영구 국방부 대변인처럼 북한이 과거 묵시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수용하고 실제적으로 관할해 왔다면서 남한이 국제법상 실효성의 원칙과 응고된 원칙에 의해 북방한계선은 군사분계선이고 영해선이라는 억지주장을 펼쳐왔다.

○ 1950 - 60년대와 달리 1970년대에는 유엔해양법이 12해리 영해를 채택하면서 북방한계선이나 서해 5도 주변해역은 1950 - 60년대에는 유엔해양법상 공해하였지만, 1970년대는 북한의 영해로 분류될 수 있게 된 것이다

○ 북한은 1999년 9월에는 새로운 해상군사분계선을, 2000년 3월 23일에는 남한의 서해 5도로 하여금 자신들이 설정한 두 개의 수로로 통항하라는 서베를린식 〈5개 섬 통항질서〉를 선포했다. 서로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북방한계선을 그 관련 준거틀인 유엔해양법, 정전협정, 서베를린 국제관례를 기준으로 삼아 진단한다면 북한의 통항질서 선포는 합당하다. 또한 남한이 북방한계선을 영해선이나 해상군사 분계선 및 해상포위선으로 설정하는 것은 마치 남의 집 안마당에 무단으로 줄을 그어 그 한쪽을 불법점거한 셈이 된다.

○ 2003년 한반도 전쟁위기를 획책할 것으로 보이는 미국이 서해교전의 우발적 충돌을 악용해 전쟁의 빌미로 삼을 것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 (북한의 선제공격설에 대하여) 제1차 서해교전에서 실제적으로 선제공격을 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다. 선제공격으로 북한의 선제사격을 유도하고는 이에 대해 선제포격으로 과잉대응을 하겠다는 면밀한 사전 시나리오를 암시한다. 냉전성역을 극복한 올바른 인식하에 분석한 1차 서해교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다음과 같다. 북한배의 정당한 월선(꽃게잡이 때문에 생긴 우발적이든 북방한계선의 불법성을 보여주기 위한 계획적이든 상관없이) → 남한의 불법영해침해 규정 → 남한의 밀어붙이기식의 충돌선제공격 → 북한의 선제사격 → 남한의 선제 포격 → 북한 배 퇴각이 1차 서해교전이라는 인과고리속에서 남한은 첫째, 북한 배의 정당한 월선을 영해침범이라고 규정하는 불법성을, 둘째, 밀어붙이기식의 충돌성 선제공격을, 셋째, 북한의 선제사격에 대한 선제포격이라는 과잉대응을 함으로써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북한의 남한의 밀어붙이기식의 선제공격에 기관총의 선제사격을 감행한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고, 남한의 선제포격에 대해 옹진반도에 있는 미사일이나 해안포로 응사하지 않는 자제력 있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 제2차 서해교전에서도 역시 북한의 계획적 선제공격론이 자명한 것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주장에 불과할 뿐 그 객관적 근거가 없다. 2차 서해교전의 인과사실은 아래와 같다. 북한 배의 정당한 월선(꽃게잡이 때문에 생긴 우발적인 것이든 북방한계선의 불법성을 보여주기 위한 계획적이든 상관없이) → 남한의 불법영해침해 규정 → 남한의 밀어붙이기식의 차단기동(400미터 정도 접근했으나 충돌공격은 하지 않은 상태였음) → 북한의 선제포격 → 남한의 대응 포격 → 북한 배 퇴각

○ 서해교전의 근본요인도 바로 북방한계선의 ‘위배 및 불법성’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라는 등 인바,

위와 같이, 북방한계선은 북한의 영해에 불법적으로 설정된 것이고, 북한의 서해 5도 통항질서 선포는 정당하며, 서해교전은 불법적인 북방한계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측에서 밀어붙이기식 선제공격을 가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등으로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북방한계선은 북한의 영해에 미군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비법적인 선이고, 서해 5도 통항질서는 정당하며, 서해교전은 한국의 선제공격에 의한 것으로 한국의 호전세력과 미국이 주도하여 한반도 전쟁위기를 조장한다는 등으로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고,

6. 2004. 2.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주한미군이 우리 안보를 지켜준다고’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작성하여 2004. 3. 1.경 「 ■■■」(도서출판 ‘ ▷▷▷’ 발행)에 게재되도록 하였는바, 그 주요내용은,

○ ‘자발적 노예주의‘라는 소제목하에,

- 미국이 우리를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표면적으로 보면 미국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조선 땅에서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해방 전에 소련군은 조선 땅에서 일본관동군을 물리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려 직접적으로 조선의 해방에 도움을 주었다.

- 만약 미국이 주도해서 조선을 분단시키지 않았다면 6·25 전쟁이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응당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통일전쟁은 분단 때문에 일어났기에 분단을 주도한 원흉인 미국이야 말로 6·25 전쟁의 원인 제공자 곧 기원인 셈이다.

- 6·25전쟁은 그때 외국군이 한반도에 없었기에 내전이었고,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 만약 집안싸움인 이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 끝났을 테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전쟁피해는 없었을 것이고 통일은 이룩되었을 것이다.

-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남북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공사주의를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해방공간에 만약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남북을 통틀어 조선사회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은 우리 역사의 필연이었다.

○ ‘주한미군 불가피론’이라는 소제목 하에,

- 1990년대 이후 미국이 전쟁을 주도한 것은 서해교전을 뺀 여섯 번으로 미국주도의 한반도 전쟁위기 주도 확률은 8분의 6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전쟁위기 주도 확률은 각기 8분의 1로서 북한이 전쟁위기를 주도하였다는 북한 전쟁위협론은 허위이고, 오히려 한반도 전쟁위기를 불러오는 주범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 곧 주한미군이다.

- 국방부나 극우신문이 들먹이는 남한군 열세론은 허구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남한군이 북한군에 비해 훨씬 우세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 동북아 세력균형론의 허구성을 들춰보겠다. 세력균형은 해양세력인 남한·일본·미국과 대륙세력인 북한·중국·러시아 사이의 군사적 세력균형을 말한다. 그러나 군사비를 보면 미국은 4천억 달러, 세계 2위인 일본이 500억, 남한이 160억으로 해양세력 전체가 4천 600억 달러 안팎이다. 대조적으로 중국 250억, 러시아 200~250억, 북한 15억으로 대륙세력은 고작 600억도 채 되지 못한다. 진정한 세력균형은 4천억짜리 미국을 빼버리는 것이다.

○ ‘미군주둔을 간청하는 정치인들’이라는 소제목 하에,

- 미국은 100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 비용을 ‘한국측 비용 전액부담’형식으로 부담시키는 강도행위를 완벽하게 해냈다. 우리 관리들은 주인 행세는 커녕 강도를 돕는 공범자 구실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미군을 완전 철수시키고, 미국에 대해 주권국가로서 자주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설정해 자존을 지키고 숭고한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의 대업을 일구어 갈 주체는 우리 시민·민중사회일 수밖에 없다. 자발적 노예주의에 매몰된 한국의 주류나 이 주류 못지않는 노무현 정부에게 기대할 수도 없거니와 맡길 수도 없다. 단지 그들을 견인하거나 강제하는 길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라는 등인 바,

위와 같이 조선의 해방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고, 미국이 주도하여 한반도를 분단하였기 때문에 6·25 전쟁이 발생한 것이며, 6·25 전쟁은 내전으로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으므로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달 이내로 전쟁이 끝나 남북이 공산화 되었을 것이고 이는 역사의 필연이었으며, 북한이 아니라 주한미군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불러오는 주범이므로 철수하여야 한다는 등으로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6·25 전쟁을 조국(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하면서 제국주의인 미국에 한반도 분단 및 6·25 전쟁의 책임이 있고, 주한미군의 존재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짓밟고 한반도 전쟁위기를 조장하고 있으므로 즉각 철수시켜야 한다는 등으로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고,

7. 2005. 3. 16.경 위 피고인의 집에서 ‘그래 주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말하마’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작성하여 같은 날 인터넷 신문 「 ◁◁◁」에 게재되도록 하였는바, 그 주요내용은,

○ 군부, 관료, 언론, 정치, 학술, 경제 등의 고위직을 대부분 점유하는 이 땅의 기성 주류들은 일제식민지배 35년, 미국의 신식민지배 60년, 도합 100년 가까이 대를 이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또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처럼 행세해 왔다. 그들은 식민지 생활을 하도 오래하다 보니 자신들이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내면화한 자발적 노예주의라는 불치병에 완전 감염됐다는 것이다.

○ 미국 주도의 외세에 의해 분단과 전쟁을 강요당했던 우리 민족이 또 다시 미국 때문에 이런 길을 되풀이 하는 일이란 상상조차 허용될 수 없다. 제네바 협정을 75% 가까이 위배해 북핵문제를 야기한 부시 미국이 이제 이를 빌미로 우리 민족을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야금야금 몰아넣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빠뜨리는 끔찍한 음모의 덫을 우리 민족에게 걸고 있다.

○ 직격탄에는 MD처럼 맞받아치는 직격탄이 제격이다. 그래 주적은 바로 너 미국이다. 왜냐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켜 우리 민족을 죽이려는 전쟁주범이 바로 우리의 주적인데, 그게 바로 미국 너희 나라이기 때문이다.

○ 냉전기간인 1953년부터 1989년까지 한반도에는 세 번의 전쟁위기가 있었다. 68년의 미국간첩선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69년의 미국스파이 비행기 격추사건, 76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다. 76년의 경우 b-52에 핵폭탄을 싣고 한반도 주위에 접근할 정도로 핵전쟁 일보 직전이었다. 68년의 1·21사태는 위기였지만 미국만이 전쟁을 최종 결정할 수 있었기에 전쟁위기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 탈 냉전시기인 1990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무려 여덟 번의 전쟁위기가 있었다. 1991-1992년 120일 전투시나리오와 공소외 8 국방장관의 엔테베 작전 언급 등 제2의 한국전쟁위기, 1994년 6월 영변핵위기, 엉터리 미국의 인공위선 사진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단정 짓고 핵전쟁 실전연습까지 벌였던 1998-1999년 금창리 핵위기, 98년 여름 대포동 인공위성 발사를 계기로 발발한 미사일위기, 휴전 이후 최초의 정규군에 의한 무력충돌이라는 99년 1차 서해교전, 2002년 부시의 악의 축 전쟁위협, 2002년 2차 서해교전, 또 2003-현존의 전쟁위기 등이다.

○ 이렇듯 휴전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무려 11번의 전쟁위기가 있었고, 이 가운데 남과 북이 잘못해서 전쟁위기가 생긴 것은 서해교전 각각 한번이다. 나머지 9번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 곧 이 땅의 전쟁주범은 북한이나 남한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게 명백해 진다.

○ 2004 국방백서는 한반도 분쟁시 미군 69만, 군함 160척, 비행기 2,000대가 투입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공소외 6은 우리 민족의 요구사항으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다.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것은 한반도를 완전 초토화시킬 이런 가공스런 미국의 군사력이 아니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데 미국의 방해책동을 막는 것이다.

○ 북한이 한반도 전쟁의 주범이거나 주적이 아니라 미국이 바로 주범이고 주적이다.

○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한미연합지휘체제와 같은 중심고리로 공고화된 구조를 하나하나 허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이 땅의 주인으로 대미 예속적 고리를 군사영역에서부터 끊기 시작해 전 사회영역으로 확대시켜야 할 것이다. 라는 등인 바,

위와 같이, 우리나라는 미국의 신식민지 지배하에 있고, 미국에 의해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이 강요되었으며, 미국이 북핵 위기를 야기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의 위기에 몰아넣고 있으므로 미국이 우리나라의 주적이라는 등으로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로서 자주성을 상실하였으므로 반미자주화 투쟁을 힘차게 벌여 나가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미국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조장하여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하고 있으므로 민족공조로 미제국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여야 한다고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고,

8. 2005. 6. 30. 19:30경 인천 중구 답동 3가 소재 ☆☆☆ 회관 (호수 생략)에서 개최된 ▶▶▶ 주최 ‘한국전쟁의 역사적 재조명과 맥아더의 재평가’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맡아 “6·25 전쟁은 통일전쟁으로 분단 때문에 일어났기에 분단을 주도한 원흉인 미국이야말로 6·25 전쟁의 원인제공자이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에서 최소한 4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생명은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통일 이후 숙청대상이었으나 미국으로부터 목숨을 구한 친일민족반역자에 불과하다. 맥아더의 본색을 알면 당장 맥아더 동상을 부숴야 한다.”라는 등으로 주장하고,

2005. 7. 26. 피고인의 주거지에서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작성하여 그 무렵 인터넷 신문 「 ◁◁◁」에 게재 되도록 하였는바, 그 주요내용은,

○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 맥아더’ 라는 소제목 하에,

- 한반도는 936년 고려의 통일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분단된 적은 없다.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이주하면 최소한 50년은 더 머물겠다하니 이대로 되면 분단이 최소한 110년은 된다는 얘기다.

- 이 민족비극의 원조인 38선은 미국이 이미 45년 7월 중에 계획을 세웠고, 최종 확정은 8월 11일 공소외 9라는 중령이 미 국무성 한구석에서 지도로 확정지었다. 우리 조선사람 누구와도 상의 한마디 없이 또 연합국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바로 집행한 당사자가 맥아더이다. 8월 15일 일반명령 1호로 선포해 38선에서 하루아침에 우리의 조국을 두 동강 내어버린 것이다.

○ ‘식민지 총독과 같은 점령군 사령관’ 이라는 소제목 하에,

- (미군과 소련군의 포고문을 각 제시하면서) 완전히 식민지 총독부임과 같은 서슬 퍼런 모습으로 점령군의 면모를 발휘한 맥아더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사령관 공소외 10은 하늘과 땅 차이다.

- 미군이 직접적인 군사통치를 자행한 남쪽은 점령 3년 동안 1946년 대구 10월 항쟁, 1948년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등 인민항쟁과 야산대와 유격대 투쟁 등 수많은 항쟁과 전투와 폭동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 1950년 6·25 전쟁 직전부터 무려 10만 명의 희생이 발생했다. 곧 이미 한국전쟁의 시발인 작은전쟁의 연속이었다.

- 반면에 간접적인 점령정책과 조선인에 의한 자치정부를 시행한 북쪽에서는 이런 진통과 혼란이 없이 안정을 누렸으며 친일청산과 대대적인 사회경제개혁이 이뤄져 친일파가 더욱 기승을 부린 남쪽과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 ‘분단세력과 동북아 파시스트 후견인’ 이라는 소제목 하에,

-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강제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38선의 지리적 분단에서부터 신탁파동의 이념적 분단, 5·10단정단선의 정치적 분단 등을 주조하고 강요했다.

- 분단 국내비호세력인 정치·관료 친일세력의 대부가 공소외 7이었다. (맥아더는)미 국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소외 7을 상해임정의 공소외 11이나 다른 민족인사들보다 먼저 군용기편으로 한국에 데려와 공소외 7 영웅 만들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더 나아가 대만의 장개석과 연대해 맥아더-장개석- 공소외 7 동북아 파시스트 연결망을 형성해 중국 본토 탈환을 노리고 소련에 대한 봉쇄나 격파의 첨병을 자원하고 자행했다. 이런 기조가 6·25 전쟁에서 이 전선을 중국과 소련까지 확장시켜 3차 대전까지 몰고 가려는 과대망상을 하는 전쟁광의 형태로 나타났다.

○ ‘원자탄 26개로 한반도 종말을 기도한 사람이 생명의 은인으로 둔갑되는 난장판’이라는 소제목 하에,

-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는 아무리 많아야 남북한 합쳐 1만명 미만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약 3백 99만명이 더 죽게 되었다는 의미다.

○ ‘민간인 학살책임자가 생명은인이라니’라는 소제목 하에,

- 미국의 민간인 학살은 적과의 전투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하거나, 결코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착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 그(맥아더)의 임기 중에 발생한 공소외 7 정부의 민간학살에 대한 궁극적 책임도 그의 몫이다.

○ ‘분단과 전쟁의 주도자가 보은론으로 칙사대접받는 복마전’이라는 소제목 하에,

- 6·25 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 곧 당시 외국군이 한반도에 없었기에 집안싸움이었다. 곧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모두 삼한통일의 대의를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 이 같은 성격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외세인 미국이 사흘만에 개입해 전쟁주체가 된 셈이다. 만약 집안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 맥아더는 남의 집안싸움인 통일내전 사흘만인 27일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미국정부에 개입을 요구하고, 곧바로 소사 등에 폭격을 감행한 전쟁광이었다.

- 결론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없었다면 민족의 분단과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미국이라는 존재는 보은론과는 정반대로 우리에게 비극과 질곡, 전쟁, 지난 6월 전쟁위기설과 같이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한반도 전쟁위기를 몰고 왔고 또 몰아오고 있는 주범인 것이다. 여기에 맥아더는 그 첨병의 역할을 초기에 집행한 집달리인 셈이다.

- 극소수 인명살상에 그쳤을 6·25 확대내전에 그토록 많은 살상과 파괴가 미국 때문에 일어난 것을 보면 미국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다. 원수를 은인으로 보는 이런 역사왜곡, 곧 대미보은론은 이제 탈냉전 통일시대를 맞아 완전히 폐기돼야 한다. 물론 맥아더동상도 함께 역사속으로 던져버려야 한다. 라는 등인 바,

위와 같이, 미국이 점령군으로서 직접적인 군사통치를 한 남쪽은 그에 반대한 좌익의 투쟁으로 혼란의 연속이었고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통성을 결여하였다는 취지로 폄하하는 반면 소련이 해방군으로서 간접적인 통치를 한 북쪽은 혼란 없이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미국이 주도하여 한반도를 분단하였기 때문에 6·25 전쟁이 발생한 것이며, 6·25 전쟁은 내전으로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으므로 만약 미국이 제국주의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달 이내로 전쟁이 끝나 피해가 최소화되었을 것인데 맥아더라는 전쟁광 때문에 수백만이 더 죽게 되었다는 등으로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도, 미군은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자주성을 훼손하는 제국주의 첨병으로서 점령군인 반면 소련군은 우리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도움을 준 해방군이고, 일제에 이어 미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남쪽은 민족사적 정통성이 없는 반면 해방 이전 김일성의 독립투쟁을 이어 받아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성공한 북쪽이 정통성 있는 정권이며, 6·25 전쟁을 조국(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하면서 제국주의인 미국에 한반도 분단 및 6·25 전쟁의 책임이 있고, 주한미군의 존재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짓밟고 한반도 전쟁위기를 조장하고 있으므로 즉각 철수시켜야 한다는 등으로 선전·선동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였다.

증거의 요지

판시 제1 내지 제4의 사실( 2001고단9724 )

1. 피고인의 일부 법정진술

1. 제1회 내지 제3회, 제6회, 제8회 공판조서 중 피고인의 일부 진술기재

1. 피고인에 대한 각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중 일부 진술기재

1. 공소외 12, 13, 14에 대한 각 증인신문조서 사본

1. 경찰 압수조서

1. 각 토론자료(수사기록 847쪽에서 855쪽까지, 946쪽에서 956쪽까지, 1123쪽에서 1129쪽까지)

1. 한국전쟁과 민족통일(수사기록 1160쪽에서 1177쪽까지)

1. 각 수사보고(8·15행사관련 통일뉴스내용입수, 수사기록 778쪽, 825쪽)

1. 수사보고(인터넷자료검색, 수사기록 2914쪽)

1. 수사보고(북한중앙TV자료, 수사기록 2924쪽)

1. 수사보고(저서발췌, 수사기록 3205쪽)

판시 제5 내지 제8의 사실( 2005고단7068 )

1. 피고인의 일부 법정 진술

1. 피고인에 대한 각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중 일부 진술기재

1.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수사기록 267쪽에서 273쪽까지, 이하 쪽수만 표시함), 통일내전주장이 뭐가 문제냐(286쪽에서 289쪽까지), 주한미군이 한국의 안보를 지켜준다고?(721쪽에서 726쪽까지), 사회주의식 통일은 통일 아니냐(803쪽, 804쪽), 그래 주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말 하마(854쪽에서 858쪽까지), 그래 주적은 바로 너 미국이다(1153쪽에서 1157쪽까지), 민족의 생명권과 통일(1983쪽에서 2011쪽까지), 6·25필화사건을 되돌아보며(2170쪽에서 2183쪽까지)

1. 조선통사(하) 일부(수사기록 409쪽에서 414쪽까지, 2786쪽에서 2793쪽까지, 이하 쪽수만 표시함), 인민(636쪽에서 646쪽까지), 현대조선역사(505쪽에서 516쪽까지), 맥아더논쟁관련, 한총련 긴급선전지침(959쪽에서 963쪽까지), 한민전 신년메세지(1266쪽에서 1281쪽까지), 민중의 소리(1582쪽에서 1585쪽까지), 위대한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신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1739쪽에서 1774쪽까지, 2799쪽에서 2805쪽까지), 김정일장군 조국통일론연구(1775쪽에서 1788쪽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헌법(2188쪽에서 2192쪽까지), 조선로동당규약(2193쪽에서 2203쪽까지),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 리론(2206쪽에서 2283쪽까지),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리론(2284쪽에서 2295쪽까지), 각 북한언론매체자료(2362쪽에서 2370쪽까지), 각 북한신문내용(323쪽에서 327쪽까지, 380쪽에서 381쪽까지, 384쪽, 385쪽, 407쪽, 408쪽, 480쪽에서 483쪽까지, 2375쪽에서 2406쪽까지, 3047쪽에서 3051쪽까지, 3226쪽에서 3229쪽까지, 3263쪽에서 3275쪽까지), 각 한민전 신년사(3518쪽에서 3529쪽까지), 한총련 자료(3696쪽에서 3969쪽까지), 구국전선홈페이지싸이트(3979쪽에서 4008쪽까지)

1. 한국전쟁(수사기록 416쪽에서 427쪽까지, 이하 쪽수만 표시함), 호국전몰용사공훈록(428쪽에서 440쪽까지), 동아일보기사(767쪽), 통일연대게시물(793쪽에서 795쪽까지),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1953쪽에서 1980쪽까지), 북한의 대남전략론(2297쪽에서 2333쪽까지), 평화번영을 위한 대북정책(2336쪽에서 2361쪽까지), 국방백서(2412쪽에서 2591쪽까지), 북한50년사(2867쪽에서 3017쪽까지), 1946년경 남한주민의 사회인식(3020쪽에서 3044쪽까지), 북방한계선의 법적성격(3067쪽), NLL은 분명한 군사분계선(3068쪽), 북방한계선에 관한 우리의 입장(3069쪽에서 3092쪽까지), 서해 북방한계선 분쟁 해결방법 연구(3093쪽에서 3099쪽까지)

1. 각 사진(수사기록 2701쪽에서 2706쪽까지)

법령의 적용

1. 범죄사실에 대한 해당법조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 , 제1항 (판시 1의 이적표현물 제작·반포의 점)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판시 2 내지 8의 반국가단체활동 동조의 점)

1. 경합범 가중

1. 자격정지형의 병과

1. 미결구금일수 산입

1. 집행유예

유죄 및 양형 이유

1. (1) 대한민국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으로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학문의 자유에 있어서 내심의 영역인 연구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나 연구결과를 외적 활동으로 표현하는 자유의 보호는 상대적이어서 일정한 제한이 가능하다. 헌법 제37조 제2항 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 가능성 및 그 한계를 규정하고 있다.

한편,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 제5항 은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규정으로 남용된다면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가능성이 많다. 이에 따라 1990. 4. 2. 89헌가113호 헌법재판소의 결정 과 1991. 5. 31. 법률 제4373호 법 개정을 통해 주관적 요건으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를 추가하였는바,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및 법 개정 취지에 비춰볼 때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 제5항 은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가할 위험성이 있는 경우로 제한하여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2) 위 범죄사실에 나타난 피고인의 주장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피고인은 해방당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고 북한이 태생적으로 민족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북한이 6·25전쟁으로 민족통일을 시도하였는데 민족내전에 미국이 불법하게 개입하여 북한이 민족통일을 이루지 못하였고, 남한은 출발부터 민족정통성이 없고 현재 미국의 신식민지 지배하에 있으며,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의 대내적 주체노선과 대외적 자주노선을 받아들여 주체사상이 민족통일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통일대업을 이끌어 갈 주체는 시민·민중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만약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은 한 달 이내에, 1만명 미만의 희생자만 내고 끝났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는데, 위 추론의 또 다른 결과는 만약 미국을 포함한 유엔연합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이 달성되어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과에 이르게 됨이 명백함에도, 피고인은 그러한 결과가 오히려 정당하다는 주장을 한다. 이와 같은 피고인의 주장은 1948년 건국되어 현재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존재 및 존립의 영속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것이다(피고인은 위 결과의 옳고 그름은 각자가 판단할 몫이고 자신이 위 결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변명하나, 미국의 참전을 불법적인 침략행위로 규정하는 점, 미국의 참전이 없었다면 발생했을 결과를 인류의 공동선에 부합하는 전쟁의 빠른 종식과 적은 희생자발생만으로 추론한 점 등에 비춰보면 피고인은 위 결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피고인은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을 강요한 주적이고 현재의 한국사회는 미국의 신식민지 지배하에 있다고 하면서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의 대내적 주체노선과 대외적 자주노선을 수용하여 연방제통일을 지향하고 통일대업을 일구어 갈 주체는 시민·민중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피고인의 이러한 주장은 주체사상에 의한 미제 식민지지배 청산 및 경제침탈 반대, 남한 정권의 민중압살정책 반대투쟁,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하면서 민중의 힘을 조직, 동원하여 자주적 통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동하는 북한의 대남적화혁명론에 동조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주장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

위와 같은 피고인의 전체적인 주장에 덧붙여 피고인이 위 주장들을 잡지나 대중집회, 인터넷매체 등을 통하여 표현한 점, 대한민국 또는 미국에 대하여는 ‘불법개입’, ‘불법점거’, ‘불법성 및 위배’, ‘원수’, ‘전쟁광’, ‘주적’, ‘학살책임자’ 등으로 표현하고, 북한에 대하여는 ‘민족정통성’, ‘정당한 월선’, ‘합당’ 등으로 표현한 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인의 위 주장들은 내용이나 표현 방식에 있어서 학자의 입장에서 냉철하고 합리적인 학문적 논의를 이끌기 위한 화두를 던졌다고 볼 수 없고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동조하거나 친북적인 주장을 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이 사건 범죄사실에 나타난 피고인의 행위 및 주장은 대한민국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가할 위험성이 있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이라고 판단되고, 피고인의 평소 성행, 전력, 학력·지식의 정도, 직업 등에 비추어 피고인도 그러한 정을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2. 양형에 관하여 살펴보면, 대학교수인 피고인이 2001년 국가보안법위반죄로 구속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된 후에도 기소된 범죄사실과 동일, 유사한 주장을 더욱 자극적인 방법으로 계속 반복한 결과 추가기소가 되고, 또한 이 법정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어 엄격한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숙고해보면, 북한이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여전히 우리나라와 대치하면서 적화통일정책을 완전히 포기하였다는 징후를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피고인의 위와 같은 주장의 국가의 존립·안전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위험성이 인정되어 유죄로 판단함은 앞서 본 바와 같으나, 민주사회에서 어떤 주장이나 표현의 해악을 시정하는 1차적 기능은 우리 사회의 사상의 경쟁시장에 의하여야 하고 국가의 개입은 다른 사상이나 표현에 의하여 그 해악을 해소할 수 없거나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리기에는 그 해악이 너무 심대한 경우로 제한하여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발전과 체제경쟁의 우위에서 포용할 수 있는 표현의 폭이 넓어진 결과, 피고인의 주장을 건전한 사상의 경쟁시장에서 논의하고 검증한다면 그 해악을 시정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피고인의 주장으로 인해 국가의 존립·안전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위험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평가할 정도로 건강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점, 이러한 건강함과 자신감에 기인하여 이 사건 범죄사실에 적용되는 국가보안법 규정에 관하여 한동안 개폐논의가 진행되는 등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기도 한 점, 남북에 대한 정통성 평가에서 피고인이 북한의 발생적 결정론과 남한의 몰역사적 결과론에 대해 모두 비판하는 시각도 보이는 점, 피고인의 주장이 일부 이적단체에서 원용되고 있기는 하나 이 사건 이외에 피고인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폭력시위 등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은 없는 점, 피고인에 대하여 유죄를 선언하는 것 자체로도 처벌의 상징성이 있고 이로 인해 신분적인 불이익을 입게 될 것인 점 등 이 사건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정상을 참작하면 피고인에 대하여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하되, 위 징역형의 집행을 3년간 유예함이 상당하다.

판사 김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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