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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대구고법 1969. 3. 21. 선고 69노26 형사부판결 : 확정
[강도살인등피고사건][고집1969형,49]
판시사항

자백의 진실성이 없다고 인정된 사례

판결요지

무릇 살해사실인 무거운 사실을 자백하는 사람은 그 보다 가벼운 사실(그의 수단이 되는 범죄 또는 그 범행의 경위 기타 주변 사실)에 관하여 숨기지 않고 자백하는 것이 경합율인 바, 그 주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끊임없이 변경 추가되는 경우 합리적 특단의 사정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 무거운 사실(살해사실) 그 자체에 관한 자백도 허위자백으로 보는 것이 채증의 정도이다.

참조조문
피고인, 항소인

피고인 1외 6인

원심판결

제1심 부산지방법원(68고6039,6384,6408 판결)

주문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등은 각 무죄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다.

이유

피고인들 및 피고인들 변호인들의 항소이유의 요지는 원심이 채증을 잘못하여 사실을 잘못 인정하여 무고한 피고인들이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부당하다고 함에 있고 검사의 항소이유의 요지는 피고인 2, 3, 4, 5에 대한 원심양형이 가벼워서 부당하다고 함에 있는 바 살피건대, 원심은 후에 설시하는 바와 같이 증거취사를 잘못하여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마른 허물이 있으므로 형사소송법 364조 제6항 에 의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동조 제4항 에 의하여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당원이 다시 판결하기로 한다.

이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제 1. 피고인 2는 대구교도소 교도로, 피고인 3은 동소 교도보로 각 복무중

1. 피고인 2는 1967.9. 중순 일자미상경 대구시 서구 비산동에 있는 옥호 "부엉이"라는 닭계장집에서 공소외 1로부터 폭력행위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0월의 확정판결을 받고 동 교도소에 복역중인 상피고인 1을 그해 10.17. 하루만 불법출소시켜주면 부산에 가서 큰일 하나 해결하여 크게 한몫을 주겠다는 내용의 청탁을 받고 이를 승낙 찬동하여 이에 관한 보수로서 뇌물을 수수할 것을 약속하고 후술 제1의 3 사실과 같이 피고인 1을 그해 10.17. 10:00경 위 교도소로부터 불법출소시켜 도주케 함으로써 부정한 행위를 하고

2. 피고인 2는 위와 같이 피고인 1을 도주시키기 위하여 행사할 목적으로 1967.10.17. 09:30경 위 교도소 기결 1사(기결 1사 14방에 피고인 1 재감중)에 대한 인원점검을 실시한 다음 위 교도소 보안과 사무실에 인원점검표를 작성함에 있어서 그날 기결 1사의 출정인원이 6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1이 출정하는 것처럼 합법을 가장키 위하여 1명을 더 증원하여 그 인원점검표의 제1사 인계점검란에 출정인원을 7명이라고 허위기재하여서 공문서인 1967.10.17.자 위 교도소 기결관구 인원점검표를 허위 작성하고 그 무렵 허위 작성된 위 인원점검표를 위 교도소 보안과에 제출 비치케 하여서 이를 행사하고

3. 피고인 2는 공소외 1과 피고인 1을 도주시킬 것을 공모하고 다시 위 교도소 정문 근무자인 피고인 3과 공모하여 같은 해 10.17. 10:00경 다른 기결수와 같이 기결 2사와 3사 사이에 있는 운동장에서 목욕대기중이던 피고인 1의 수인번호 제1135번을 불러 피고인 1을 연행하여 위 교도소 제3 접견실을 통과 위 교도소 정문에 이르렀던 바, 피고인 2는 정문근무 감독교도 피고인 3은 정문 근무자로서 교도관 직무집행 규정에 따라 수형자 1명만을 출문시킬 때에는 반드시 정복 교도관 2명이 계호하여야 하고 보안과 당직주임이 발행하는 출문증이나 연출부에 의하여 이를 확인하여 출문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위배하여 피고인 2가 불법출소시키려 할때 피고인 3은 그 정을 인식하면서 이에 동조하여 피고인 1에 대할 출문증이나 연출부에 의한 출문확인을 함이 없이 피고인 2가 피고인 1을 데리고 위 교도소 정문옆 소문을 통과 출문토록 묵인 방치함으로써 법률에 의하여 구금된 자인 피고인 1을 도주토록 원조하고

제 2

1. 피고인 4는 1967.1.17. 위 교도소 당직주임 근무에 당하였던 바, 당직주임 근무자는 교도관 직무집행규정에 따라 보안업무전반에 걸쳐 보안과장을 보좌하며 부하직원을 지휘 감독하고 휴일 또는 야간에는 소장을 대리하되 특히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는 소장이나 과장에 연락하고 교도소 직원의 점검은 물론 수시로 교도소내외 기타 근무배치 개소를 순시 감독하여 이상이 발견될 때는 적당한 조치를 취하고 입소 및 출소자의 신상을 확인하며 소정 회수에 따라 재소자의 인원을 점검하여 그 결과를 소장에게 보고 하는등 재소자의 인원을 상시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그 재소자 인원파악의 방법으로 매일 개방 점검, 조간점검, 인수인계점검, 서간 점검, 폐방점검등을 당해 점검교도로 하여금 실시케 하여 인원 점검표에 기재토록 하므로써 재소자 인원을 확보함이 그 주된 직무임을 잘 인식하면서 1967.10.17. 16:30경 위 교도소에 실시하게 된 석간 점검시간에 당직주임이었던 피고인은 각 관구별로 점검교도로 하여금 재소자의 점검을 실시한 후 인원점검표의 소정란에 점검인원을 기재토록 하고 점검교도로 하여금 책임있는 날인을 하도록 하여 재소인원을 집계 파악하게 되었던 바, 그날 석간점검을 실시한 결과 수용자 1인이 부족한 사실(기결 1사 14방에 수용중이던 피고인 1이 그날 10:00경 불법 출소하여 도주하였음으로)을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교도관 직무집행규정에 따라 보안과장 또는 교도소장에게 재소자 인원중 1명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긴급보고하는 등으로 부족된 수용자를 빨리 발견 또는 체포할 수 있도록 적당한 조치를 취하여야 할 임무에 위배하여 수용자 1명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목비하는 동시에 그 사실이 발견되지 않도록 석간인원점검표의 작성확인을 고의로 이행치 않음으로써 그 직무를 유기하고

2. 피고인 5는 교도보로서 대구교도소 보안과에 근무하면서 기결 1사에 대한 당직근무에 종사하던 자인 바, 사방당직 근무를 맡은 자로서는 재소자의 구금확보를 위하여 재소자에 대한 감시 및 사내의 질서유지, 배식급여의 감시 감독을 하고 재소자의 인원파악을 위하여 근무교대시 및 종교, 목욕, 운동등을 위한 출방과 입방시에 각 방별로 인원수를 확인하여 재소자를 감호하는 직무에 종사하던 자로서 앞에 적은 판시 제1의3 사실과 같이 1967.10.17. 10:00경 위 교도소 기결 1사 14방에 수용되었던 피고인 1이 상피고인 2의 부정행위로 인하여 위 교도소를 불법출소하여 도주한 사실이 있었던 바, 그 사방근무 교도보였던 피고인은 그날 10:30경 목욕을 마치고 입방하는 재소자 수를 확인한 결과 1명이 부족한 사실을 발견하였으므로 교도관 직무집행규정에 따라 그 사실을 보안과에 보고하여 부족한 수용자를 시급히 발견 또는 체포할 수 있도록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위배하여 위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묵인하므로서 그 직무를 유기하고

제3

1. 피고인 6은 앞에 적은 바와 같이 일정한 생업없이 중앙지업사를 경영하는 매부인 부산 서구 동대신동 1가 (지번 1 생략)에 사는 공소외 2에게 의지하고 살아오면서 그동안 여러번 생업자금을 도움받았으나 아무러 생활토대도 잡지 못한 채 수시로 생업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고 부유하게 사는 매부로부터 증오 멸시당하여 그에게 음주 행패를 부리면서 감정을 품어 오던중 과거 공소외 2의 밀수품을 여러번 운반하여 주고 배신당하여 원한을 품고 있는 공소외 1과 그의 하수인인 상피고인 7등과 뜻이 맞아 평소 그들의 공소외 2에 대한 원한을 푸는 동시 재물을 강취하는 수단으로 공소외 2의 장남인 피해자 공소외 3(당시 11세)을 살해하여 완전히 생사조차 모르게 한 후 약취한 것처럼 꾸며 협박 수법으로 공소외 2로부터 금원을 강취하기로 상호합의하여 범행탄로시에 대비하려고 상피고인 7과 약 15년간의 친구로서 재물을 마련하기 위하여는 어떤 일이라도 같이 하기로 이미 내통되어 있는 상피고인 1이 그때 대구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으므로 완전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범행을 은폐할 수 있다고 믿은 나머지 피고인 1을 불법 출소시켜 범행에 가담시키기로 합의하고 피고인 7은 하수인으로 공소외 4(군법회의 계류중)를 포섭하여 1967.9.중순 일자미상 19:30경 공소외 1의 집으로 가장한 대구시 서구 비산동 3구 (지번 2 생략) 공소외 5의 집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공소외 14의 방에서 피고인 6, 공소외 1등을 상면하여 공소외 4를 인사소개한 후 그때쯤 대구시 달성동 (지번 3 생략)에 있는 공소외 6 경영의 부엉이 닭계장집에서 피고인 6, 7, 공소외 1, 4등은 피해자 공소외 3을 살해하여 금원을 강취할 것을 상호 공모하는 일밤 공소외 1과 피고인 6은 그때 대구교도소에 근무하던 상피고인 2를 매수하여 피고인 1을 불법출소시켜 그 사람이 출소하는 날을 기하여 공소외 3을 살해키로 하고 같은해 9.21. 19:30경 공소외 1, 4, 피고인 7등은 공소외 3의 집을 답사 확인하는 동시에 같은해 10.12.경부터 1.15.경까지 여러번에 걸쳐 공소외 3의 인상과 그가 과외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는 통로 및 시간등을 확인하고 살해 및 사체유기의 수단방법과 장소를 선정하기 위하여 현장을 사전 답사하고 공소외 1, 피고인 7등은 같은해 10.17. 10:00경 불법 출소한 피고인 1을 데리고 위 부엉이 닭계장집에 가서 피고인 6과 상면하여 피고인 1과 같이 공소외 3을 살해하여 금원을 강취할 것을 다시 상호공모한 후 그중 피고인 1, 7, 공소외 1등은 그날 13:30분경 위 부엉이 닭계장집에서 약 60미터 떨어진 공소외 7이 경영하는 옥호없는 고물상에서 미제 링겔볼박스 1개를 구입한 후 이를 소지하고 피고인 1, 7등은 그날 14:30분경 대구발 부산행 열차를 타고 그날 17:25경 부산진역에 도착하여 즉시 이미 서로 약속되어있던 위 역앞 광장 노점담배포 앞에서 공소외 4과 상봉하여 부산 동구 범천 2동 8. 11통 6반 공소외 8이 경영하는 옥호가 진주상회인 술집에 들렀다가 자리를 옮겨 다시 그날 19:30경 위 범천동 8. 10통 2반 공소외 9가 경영하는 돼지국밥집에서 공소외 4는 직접 공소외 3을 살해하여 유기키로 하고 피고인 1, 7등은 현장에서 망을 보기로 모의하여 그곳에서 공소외 4는 피고인 7로부터 이미 피고인 1이 범천시장에서 가정필수품상을 하고 있는 공소외 10의 상점에서 구입해온 살해용 칼과 노끈 그리고 변장용 운동모와 공소외 3이 과외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을 맞추기 위한 흑색문자판 팔뚝시계 등을 받아 이를 각 소지하고 위 3인이 같이 그날 20:50경 코로나 택시를 타고 그곳을 출발하여 21:20경 공소외 3집으로부터 약 200미터 떨어진 부산 서구 보수동에 있는 속칭 검정다리 근처에 온 후 하차 즉시 피고인 7은 위 볼박스를 들고 부산 동대신동에 있는 화랑국민학교 앞 공소외 3의 집 입구 골목에 와서 피고인 1에게 볼박스를 인계하고 피고인 1은 공소외 3의 집 대문에서 약 15미터 떨어진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소외 4에게 그 볼박스를 펴서 건너준 후 그곳 부근에서 피고인 7과 같이 망을 보고 공소외 4는 그날 21:40경 과외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는 피해자 공소외 3을 발견하고 그 사람의 배후에서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조르고 손수건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그곳에서 약 16미터 떨어진 위 동대신동 1가 321 심서분 조산원의 집 대문앞 골목까지 끌고가서 이미 소지하고 있던 칼을 주머니에서 꺼내 왼손에 쥐고 공소외 3의 흉부우측 제3늑골 연골부를 1회 세게 찔러 심장 첨자에 의한 흉강내출혈로 즉사케 하여 그를 살해하고 즉시 이미 가져온 위 볼박스안에 공소외 3의 시체를 담아 넣고 노끈으로 그 박스를 묶어들고 위 화랑국민학교 정문기둥옆에 그 박스를 은익해두고 그부근 검정다리 근처 길가에 달려가서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공소외 11이 운전하는 부산영 880호 시발택시를 잡아타고 위 학교 정문앞으로 돌아와서 공소외 3의 시체가 담긴 볼박스를 그 차에 담아싣고 그날 22:05경 부산 중구 대교동에 있는 대동여인숙 앞에서 하차한 후 그 곳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경남냉동주식회사옆 해변통로에 들어다놓고 바다속에 투기하려고 인적이 없는 기회를 엿보던중 이러한 공소외 4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긴 공소외 11의 신고를 받고 그곳으로 추적한 부산 중부경찰서 광복동 파출소 근무 순경 공소외 12에게 발각되어 그때쯤 그 곳에서 그 시체를 방치해둔 채 도주하므로서 이를 유기하고 공소외 3의 시체가 발각되므로서 공소외 2로부터 재물강취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2. 피고인 1은 1967.2.25. 부산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죄로 징역 10월의 판결선고를 받고 그 무렵 그 형이 확정되어 대구교도소에서 그형을 복역중 1967.10월 초순경 앞에 적은 공소외 1과 내통하여 같은달 17. 오전중에 불법출소 할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이에 찬동하고 그날 09:50경 위 교도소 기결 1사 14방에서 다른 수용자 10명과 같이 목욕하기 위하여 출방하여 기결 제2사와 제3사 사이에 있는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10:00경 앞에 적은 판시 제1의 3 사실과 같이 상피고인 2가 피고인의 수인번호 1135번을 불러 피고인을 연출하여 그의 인도로 위 교도소 제3접견실을 통과하고 위 교도소 정문옆 소문에 이르러 피고인 2와 내통된 상피고인 3의 묵인으로 용이하게 그 문을 통과하여 위 교도소 밖으로 빠져나가 대구교도소의 감독을 이탈하여서 도주한 것이다라고 함에 있다.

제일.

피고인 1, 2, 3, 6, 7에 대한 공소사실을 살피 건대,

일. 피고인 1의 진술을 본다.

1. 1968.5.9.자 검찰진술조서(동월 3월 8자 자백서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다)에 의하면 피고인 1의 진술요지는 피고인은 전과수범인데 1967.4.중순 부산교도소에서 진주교도소로 이감되던 날 기차안에서 피고인 7을 만났을 때 피고인이 출소하는 날을 기하여 살인행위를 하자는 내용의 쪽지를 받았고 동년 10.초순경 박씨가 자기가 수감중인 대구교도소에 면회와서 피고인 7의 안부를 전하고 두번째 와서는 피고인 7이 말하던 건을 출소하는 날 하자고 해서 이에 응했고 1967.10.16일 만기출소하는 날 7:00 위 교도소밖에 피고인 7와 같이 와서 박씨와 피고인은 전매청 부근 목욕센타에서 목욕을 한 후 3인이 닭계장집에서 술 한잔하고 최씨도 거기와 있었고 피고인은 박씨를 따라 박씨가에 가서 술과 밥을 먹고 나오다 최씨를 다시 만났고 다시 닭계장집에 갔는데 피고인 7도 거기 있기에 공소외 3 살해모의를 했으며 모의내용은 피고인 7이 공소외 3을 죽여 「볼박스」에 넣어서 바다에 버리고 살아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협박편지를 내어 돈을 가져오게 하자고 제의하고 본인은 유인하여 돈하고 바꾸는 방법으로 하자고 제의했는데 피고인 7이 부산에 가면 공소외 13이 있으니 자기 주장대로 하자고 고집하니 박씨가 이에 동조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는데 돈은 그집 사정을 잘 아는 최씨가 가져오도록 하고 범행일은 최씨가 피고인 7 이름으로 대구 사창가에 가서 자게 하여 피고인 7의 알리바이를 만들기로 했고 그 집을 나와 고물상에서 박씨, 피고인 7, 피고인 3인이 「박스」를 사서 피고인 7에게 주고 최씨를 다시 만나 닭계장집에 갔고 피고인과 피고인 7은 시간이 되어 그집을 나와 대구역에 가서 차를 타고 17:30 부산에 도착, 역전에서 공소외 13과 상면하여 교통부앞 불고기집에서 술을 먹고 범천시장안에 있는 돼지국밥집에서 3인이 같이 국밥을 사먹고 21시 10분전 교통부앞으로 걸어와서 코로나차를 타고 공소외 13이 가자고 하는대로 보수동 검은다리앞에서 3인이 내려 피고인 7이 박스를 갠 채로 들고 화랑국민학교앞으로 걸어가고 본인은 피고인 7을 따라 올라오고 본인 뒤에 공소외 13이 따라 왔으며 위 국민학교앞에서 공소외 3집에 들어가는 골목입구에 피고인 7로부터 박스를 받아 펴 가지고 골목을 약 10미터 못간 지점에 서있는데 어떤 부인이 오기에 공소외 3집 들어가는 골목길로 오니 공소외 13이 있어 그에게 박스를 주고 공소외 13이 망을 볼 필요가 없으니 검은다리 있는 곳에서 기다리라고 하기에 본인은 그 길로 검은다리를 향하여 간다는 것이 마음이 불안하여 반대방향으로 올라와 보니 공소외 13이 보이지 않기에 그 길로 부산진역에 갔으며 가보니 미리 기다리기로 하였던 피고인 7도 보이지 않기에 차를 타고 대구로 왔다.

살해용 칼은 피고인 7이 구하였거나 공소외 13 자신이 사전에 준비한 것으로 안다.

당시 공소외 13의 착의는 흑색 맘보바지, 색깔이 잘 기억나지 않는 잠바를 입고 모자는 본인과 같이 앞창이 긴 운동모자를 썼는데 모자의 색깔은 기억에 없고 정은 야광판 시계를 찼으며 본인은 22시 기차를 타고 대구에 와서 해방골목에 있는 사창가에서 자고 뒷날 아침 일찍 박씨집에 갔다가 박씨와 닭계장집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사창가에 있었고 16시경 박씨가 자기를 데리러 와서 닭계장집에 갔더니 피고인 7이 와 있었고 피고인 7이 경찰에 발각되었다고 말했으며 그때 최씨가 그곳에 왔는데 박씨와 최씨가 속삭였고 박씨가 돈 7,000원에서 몇백원 모자라게 주었다.

박씨가 최씨가 부산에 갔다 올 때까지 대구에 있으라고 하여 다른 사창가에 옮기고 최씨와 피고인 7은 그날 17시 넘어서 갈라지고 10.18. 최씨가 대구에 와서 17.경 닭계장집에서 본인과 최씨와 박씨 3인이 만났는데 박씨가 본인에게 부산가도 좋다고하여 2,000원 받아가지고 부산에 갔다가 그날밤 경주로 가서 자고 아침 즉 19일 6시경 통근열차를 타고 부산에 오니 9시 넘었더라 그후 공소외 13을 4,5차 피고인 7은 종종 상면하여 술먹고 사창가에도 갔다.

공소외 13은 왼손잡이다.

박씨는 약 40세되는데 그 집에 가본 즉 장물을 취급하여 먹고 사는 것같았고 공소외 13은 공소외 4의 일명이고 자기가 10.16. 만기 출소한 것을 10.17. 출소한 것 같이 박씨가 만들어서 알리바이를 만든다고 말하였다는 취지인 바

2. 1968.5.13.자 검찰진술조서에 의하면 16일 잤다는집이 사창가 부근의 참새구이집이고 닭계장집은 부엉이, 닭계장집이라고 자세히 진술하고 범행후 부산에서 대구로 왔을 때는 통금시간에 걸려 역에서 기다리고 해제된 후 참새구이집에서 잤다고 진술을 정정하고

3. 1968.5.18.자 진술서에 의하면 박스를 산 것은 위 3인뿐 아니라 공소외 4도 같이 가서 샀다고 진술을 정정하고

4. 1968.5.26.자 진술조서와 5.29.자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만기출소날은 67.10.16.이라고 말했다가 11.17.이라고(11.17일이 정확한 만기 출소날자다)정정하고 피고인 2교도의 도움으로 10.17. 불법출소하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백하고 그 경위에 관하여 67.10. 초순경 공소외 1이 면회와서 전에 피고인 7하고 이야기한 일이 있지요 해서 있다고 하니 몸은 편하오 하기에 「예」라고 대답하였더니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 갔는데 67.10.17. 9:20경 공소외 1이 본인을 면회와서 몸은 무사한가 하기에 잘있다고 하고 집주소나 알자고 했더니 알리지요 하면서 이제 14일 남았읍니다하고 갔는데 기결 1사 14방에 들어오니 문을 열어놓고 수용자들이 전부 밖으로 나가므로 본인도 그속에 끼여 밖으로 나가서 2사와 3사 사이에 있었더니 썬그라스를 낀 신사복을 입은 교도관으로 생각되는 40세 가량의 사람이 본인의 죄수번호 1135번을 부르기에 그 사람을 따라서 2사를 통하여 밖으로 나가 1사 뒤를 돌아 중문에 있는 제3접견실을 거쳐 정문앞으로 가서 그곳에서 그 신사가 정문 담당교도관에 조그만한 표쪼가리를 주니 아무 말없이 문을 열어 주어 동일 10시경 신사복과 같이 정문 맞은편 옥호없는 식당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죄수복을 벗고 박이 가져온 국방색 작업복 상하와 흑색운동화를 신고 앞창있는 밤색 운동모자를 쓰고 신사는 정문쪽에서 우측에 있는 매점쪽으로 가버렸다고 진술하고 그 무렵 피고인 7이 왔음으로 공소외 1이 가지고 온 자전거에 박은 앞에 본인은 뒤에 각 타고 피고인 7은 걷고 노동회관에 있는 목욕탕에 갔으며 박이 14일 남았읍니다라는 말은 범행시간이 14시간 남았다는 말로 알아 들었고 박이 10.17. 전에 2회 면회온 것도 사실이며 공소외 1, 본인, 피고인 7 3인이 대구역에 가서 14:20경 기차표 2장, 입장권 1장을 사서 피고인 7과 본인이 완행열차로 부산에 가서 돼지국밥집에 들려 동일 19:00경 범행의 행위 분담을 하였다.

그 내용은 하수는 공소외 4가라고 피고인 7이 화랑국민학교앞까지 볼박스를 들어다 주면 본인이 받아서 현장 부근까지 가지고 가서 공소외 4에게 주고 2인은 망을 보기로 하고 피고인 7은 본인의 대구까지의 기차표를 사기로 했다고 범행분담에 관하여 구체적 진술을 하고 피고인 7이 칼, 노끈, 야광시계를 공소외 4에게 주었다고 추가 진술하고 돼지국밥집에서 현장으로 출발한 것은 10.17. 20:50경이며 현장에서 공소외 3군을 본 일은 없고 부산에서 대구로 와서 참새구이집에서 04:20경부터 그집 큰아들과 같이 잤다 입소한 것은 1967.10.18. 8:20이고 입소당시 수인복은 공소외 1이 가지고 왔다고 입소경위를 진술하고

5. 1968.5.27.자 진술조서는 위 진술과 별 차이가 없고

6. 1968.6.1.자 증거보전시는 위 5.26.자 질술조서와 5.29.자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와 같은 내용의 증언을 하고

7. 1968.6.5.자 제2회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이 사건은 공산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며 공소외 1, 위에 피고인 6, 그 위에 김마담, 그 위에 황선생이 있고 자기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공소외 3군의 부 공소외 2를 공산당으로 몰아 돈벌기로 한 것이라는 말을 위시하여 기타 장황한 진술을 하고,

8. 1968.6.6.자 제3회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계속 공소외 2를 공산당 관계인물이라고 진술하고

9. 1968.6.10.자 제4회 피의자진술조서에 의하면 위 공산당 관계는 허위라고 진술을 정정하고 수사 각도를 흐리게 하기 위한 것이였다고 진술하고 67.10.17. 불법출소하여 박의 집에 갔을 때 빤스를 갈아 입었으며 공소외 1과 공소외 14는 형제간인 것같고 공소외 14가 살고 있었다고 정정 내지 첨가 진술하고

10. 1988.6.17.자 제5회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갈취 내지 강취분배에 관하여 자세히 진술하고 67.10.18. 최가 부엉이 닭계장집에 있었다는 것은 잘못된 진술이고 67.10.17 불법출소하여 공소외 1과 한 일을 11.17. 만기 출소하여 공소외 14와 이를 똑같이 되풀이(수의복 갈아 입은 점, 볼박스건, 피고인 7이 없었던 점은 제외)하였다고 추가 진술하고 공소외 1이 이섭이라는 사람인지 모른다.

1967.9.하순과 10월초에는 공소외 1이 피고인을 면회왔고 1967.10.17.과 11.4.은 공소외 14가 면회왔다고 정정 진술하고 1967.10.18. 7:30 부엉이 닭계장집에는 본인, 피고인 7, 공소외 1 3인이 있었다고 진술하고

11. 68.7.18.자 진숱조서에 의하면

「칼」과 「노끈」은 자기가 샀다고 정정 진술하고

12. 공소외 15에 대한 검찰진술조서(68.7.18.자)에서 공소외 15가 피고인 1이 공소외 14가에서 빤스를 갈아 입었다고 진술하자 피고인 1은 1967.11.7. 대질하면서 1967.10.17.과 11.17. 2차에 걸쳐서 공소외 14집에서 빤스를 갈아 입었다고 위와 같이 진술을 정정하고

13. 1968.8.2.자 진술조서에 의하면 피고인이 1967.10.17. 19시경 돼지국밥집에서 피고인 7과 공소외 4와 같이 있다가 약 40분간 밖에 나가서 공소외 10 점포에서 범행에 사용한 칼과 나이롱 노끈을 구입하였으며 위 칼과 노끈을 돼지국밥집에 다시 가서 피고인 7에게 주었다고 진술을 추가하고 이제 전부 자백했다.

지금까지 일부들 숨긴 것은 혹시 살 구멍이 있을까 하고 그랬다고 변소하고 불법출소할 때 피고인이 갈아입은 죄수복은 피고인 2가 가져가고 입소할 때도 피고인 2가 죄수복을 가져와서 입고 들어갔다. 입출소 당시 다른 사람은 없었고 공소외 1은 실은 공소외 4에 들으니 이섭이라는 사람이다 라고 진술을 정정하고

14. 1968.8.9.자 진술조서에 의하면 부산 공소외 10 상회에서 「칼」과 「노끈」을 사기 전에 감방에 있을때 알게된 공소외 16을 상면하여 태복선술집에서 같이 진로소주 1병을 마셨고 이모(40세)도 만나 인사를 했으며 공소외 16에게 한달 후에 취직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고 진술을 추가하고

15. 68.8.21.자 진술조서에 의하면 동 피고인은 또 빠진 것을 보충한다고 말하고 67.10.17.밤 부산에서 출발 18일 0:45경 대구역에 도착 0:50좀 넘어서 태평로 1가 1번지에 있는 사창가에 있는 성은 여인숙집 구석방에서 피고인 7의 이름으로 자고(최는 17일 부산에 갔음으로) 4시경 약 10미터 떨어진 참새구이집인 공소외 17가에 자게 되어 1인 2역을 하고 10.18. 0:50경 참새구이집에 갔더니 공소외 17이 골목부근에 있기에 주인 아주머니 ( 공소외 17의 모)를 찾았더니 사망하였다고 하였고 위 구석방으로 탁주 2승과 안주를 갔다달라고 하였더니 위 사창가 대문쪽 1칸방을 떼여서 창녀와 같이 누어 있던 공소외 1을 불러내어 맨 안쪽방에 가서 범행사항을 말하고 10.18. 1:00지나서 피고인 2가 박형하고 공소외 1을 찾기에 본인이 피고인 2에게 들어오게 하였으며 공소외 17이 탁주 2승과 갈비, 곱창등을 가져와서 같이 술을 마시고 더 자세한 것은 피고인 2의 진술에 따라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고 피고인 2와 20분 내지 25분 같이 있었으며 피고인 2가 나간 후 30분 후에 공소외 17의 동생인 학생이 술그룻을 가지러 왔기에 다시 진로 2병과 생선 뎀뿌라를 가져오게 하여 공소외 1과 같이 먹었고 공소외 17과 같이 잤고 10.18. 7시경 공소외 1과 피고인 7이 왔기에 닭계장집에 갔다고 진술을 정정 내지 추가하고

16. 1968.10.4. 진술조서에 의하면 또 빠진것을 보충한다고 진술하고 1967.10.17. 불법출소 당시 피고인이 목욕 또는 일광욕대기중에 피고인 2에 면출되어 따라 나왔다 함은 결국 빤스바람으로 나왔다는 결론인데 실은 피고인 2가 불러서 1사 14방에 들어가서 죄수복을 입고 나왔던 것이고 이것이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제 자백한다고 정정 내지 추가 진술하였고 원심 공정에 이르러서는 위 정정된 사실에 입각한 자백을 하다가 1968.10.28일 제10회 공판시부터 불법출소한 사실 강도살인을 한 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부합되게 진술한 것은 허위이며 공소외 1이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허위자백한 사실중 1967.10.17. 대구에서 하였다는 일련의 행위는 실은 11.17. 만기 출소후에 한 행위이며 위와 같이 허위 자백한것은 검찰청직원 공소외 18(일명 구사범)이 시키는대로 맞추어서 진술하였고 검찰에 70일간이나 끌려다녔고 검사가 자기에게 가벼운 형을 구형하기로 했고(자기를 자수로 취급하여) 보상금도 3분의 1을 자기가 받기로 하였으며 자기에 대한 항소심은 대구 아닌데로 관활을 변경하여 주기로 하였고 (교도관들을 물고 들어갔으니 대구교도소를 피하자는 의도) 이견이 발단된 경위는 전과자의 말을 믿지 않기에 수사관을 골탕먹이기 위하여 자기가 68.3.경 부산 서부경찰서에 공소외 3사건을 알려면 피고인 1에 물어보라는 투서를 한데서 발단된 것이며 공소외 19가 피고인 7이 아니고 공소외 13이 공소외 4도 아니며 모두 가공인물이며 위와 같이 피고의 행위가 이렇게까지 발단할지는 천만 몰랐다고 변소하고 공소외 4(군인)에 대한 군법회의 기록검증의 결과에서도 피고인 1이 증인으로 나가서 검찰의 호의를 받았고( 피고인 1의 영치금 대장기재를 보면 검사와 공소외 18이 피고인 1에게 각 1,000원을 차입한 사실을 규지할 수 있다) 검찰수사 무능을 시험에 보았으며 구형은 10년 이하로 하여주고 보상금을 받기로 했다는 취지증언을 하고 있다.

이에 피고인 1의 진술 및 증언을 검토하건대, 피고인 1은 검찰 제1회 진술시 공소외 3살해에 가담했다고 자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 설시와 같이 모의 경위 살해 당시의 경위 기타 주변적 사실에 관하여 위 설시와 같이 7전, 8전하고 있는 바 그 중요부분을 보면

① 자기가 1967.10.16. 만기 출소하였다고 진술하였다가 만기 출소날을 1967.10.17.로 정정하였고 다시 동년 11.17.이라고 정정하고( 피고인 1은 만기 출소날짜를 1967.10.16.로 알았다고 변소한다)

② 피고인 6과 1967.10.17일 18일에 대구에 있었고 대구 사창가에서 잤다고 하다가 이를 정정하고 ( 공소외 2가 검찰진술 또는 원심증언에 의하면 69.10.17.을 전후하여 각 1개월씩 부산 공소외 2가에 나타났음을 인정할 수 있다)

③ 1967.10.17. 교도소에 면회하러 온 것이 공소외 1이라고 주장하다가 동일 면회온 사람은 공소외 14가고 공소외 1은 그전에 세번 왔다고 정정하고 (접견표와 공소외 14의 검찰 및 제 1심 증언에 의하면 후단 설시와 같이 1967.10.17. 동년 11.4. 공소외 14가 자기가 전과자이어서 공소외 1이라는 가명으로 면회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④ 위와 갚이 황당무계한 공산당 관계를 진술하다가 철회하고

⑤ 피고인이 불법 출소할때 벗어놓은 죄수복은 공소외 1이 가져갔다고 했다가 피고인 2가 가져 갔다고 했고

⑥ 칼과 노끈도 피고인 7이 입수했다고 하다가 자기가 샀다고 정정하고

⑦ 1967.10.17. 불법출소하여 공소외 1가에서 빤쓰를 갈아 입었다고 했다가 실은 1967.10.17.과 11.17.(만기출소날) 공소외 1이 가서 2회 모두 빤쓰를 갈아 입었다고 정정하고

⑧ 부산에서 대구에 도착하여 통금에 걸려 해제될 때까지 역에 있었다고 했다가 해제를 기다리지 않고 여인숙에 갔다고 말하고

⑨ 공소외 1과 공소외 14는 형제간 갔다고 했다가 공소외 1이 이섭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가 공소외 1은 이섭이라고 정정하고

⑩ 또 주변적 사실에 관하여 추가 진술을 하고 있음은 위 설시와 같다.

무릇 살해사실인 무거운 사실을 자백하는 사람은 그 보다 가벼운 사실(그의 수단이 되는 범죄 또는 그 범행의 경위 기타 주변적 사실) 등에 관하여 숨기지 않고 자백하는 것이 오인의 경험율인 바, 위 주변적 사실들에 관한 진술이 끊임없이 변경 또는 추가되는 경우 그 변경 추가가 진실을 향한 것이 되려면 그것이 변경 또는 추가하여야 할 합리적인 특단의 사정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발견되지 않은 경우는 무거운 사실(살해사실)그 자체에 관한 자백이 필경 허위자백이라고 보는 것이 채증의 정도라고 할 것이므로 이 사건에서 위 특단의 사정이 있는가의 여부를 보건대 그 변경 또는 추가되는 진술이 공소 사실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을 뿐인 바, 피고인 1은 실은 살 구멍을 남겨 놓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털어 놓게된 것이라고 자백이 진실한 것처럼 합리화 하려고 하나 그와 같은 경우는 무거운 사실을 숨겨두고 가벼운 사실을 자백하던 자가 점차 무거운 사실을 자백하여야 가는 경우에 해당하는 이론이고 이 사건과 같이 먼저 무거운 사실을 자백한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으며 달리 수긍할만한 사유를 발견할 수 없는 이 사건에 있어서는 도시 가벼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한 자가 공소사실에 맞추어가는 과정이며 이는 필경 무거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한 자가 허위 자백하는 경우라고 보아진다. (그 자백의 동기가 전과자가 사직당국을 우롱하기 위한 것이였건 엄문에 기인한 것이였건 타인을 범인으로 물고 들어가고 자기는 가벼운 형을 받고 보상금을 받기로 하였건 이 점은 여기에서 깊이 따질 필요가 없다)

이. 피고인 2 및 피고인 3의 진술을 본다.

1. 피고인 2에 대한 1968.5.26.자 제2회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검사의 「피의자는 반국가단체의 조종을 받은 조직에 흡수되어 본의아닌 범행을 했는가」라는 「문」에 대하여 「그런것이 아니고 일시 편의를 봐 주었다」고 답을 하므로써 불법출소시킨 사실을 시인하기 시작하여 피고인 1의 5.26.자 진술과 같은 내용으로 불법출소시켰다고 하면서 만기 출소자의 명패를 정문근무자에 주고 출소시켰고 공소외 1과 사전에 연락되어 있었고 돈 10,000원을 받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주지않고 있다고 진술하고

2. 1968.5.28.자 증거보전시는 1967.10.17. 자기가 인원점검을 마치고 다른 사람과 사전에 약속이 있어서 당일 출정인원(법원 검찰에 소환되어 나가는 인원)이 6명인데 당일 9.20.경에 점검표에 인원을 7명으로 허위 기재하고 피고인 1을 데리고 정문을 통과시 정문교도인 피고인 3에게 피고인 1을 당시 정문옆 관사 하수구 공사작업 인부라고 말하고 출소시켰으며 피고인 3에게 쪽지를 던져주었고 당시 피고인 2는 사복을 입고 색안경을 썼으며 피고인 1도 공소외 1이 가져온 사복으로 갈아입고 출소하였고 18일 입소시에도 다시 수인복과 갈아 입히고 입소시켰으며 입소시는 그 전날 출소시킨 후 피고인 3에게 알렸으므로 입소시에도 피고인 3은 아무말이 없었으며 17일 폐방 점검후 미입된 출정 미입자들이 들어올때 들어온 것으로 하여 당직주임에게 보고하여 처리하였고 18일 아침 개방 점검는 부족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해서 처리했다고 증언하고

3. 1968.5.31.자 제3회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불법 출소시킬때 피고인 3에게 무어라고 말한지 기억없고 67.10.18. 개방점검 기결 1사에 대하여 공소외 20교도가 점검했고 기결 6,7,8사에 대하여는 본인이 실시했는데 기결 1사에 대하여 253명으로 점검하여 왔기에 본인이 기결 1사에 예출 1명이 있다고 했더니 공소외 20교도가 254명으로 확인 날인했다.

예입 예출이라 함은 수인끼리 같이 둘 수 없는 사정이 발생할 때 교도가 임시로 다른 사방에 수감했다가 익일 배방계에 보고하여 정식 처리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으며

4. 피고인 3은 검찰에서 부인하다가 1968.6.10.자 증거보존시 1967.10.17. 10:00경 피고인 2가 수인 1명을 데리고 교도소 정문앞에 있는 매점까지 잠깐 다녀온다 하여 정문 옆문을 열어준 일이 있고 공소외 21 교도가 당시 정복을 착용했는지 모르겠으며 다음날 귀소했으리라고 생각된다고 증언하고 있는 바 피고인 2가나 피고인 3은 원심공정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피고인 2는 검사가 막스·레닌주의 운운하면서 협박하고 일면 타인(교도소직원 공소외 22등을 지칭하는 취기다)이 허위 자백만 하면 직무유기 정도로 가볍게 해준다고 해서 사상범으로 몰릴까봐 허위 진술했다고 변소하고 피고인 3은 증거보존시에도 그렇게 이야기한 일이 없다고 진술한다 살피건대, 죄수들의 인원파악, 도주방지등을 임무로 하는 피고인 2가 특별히 출소시켜 줄만한 사유도 없이 (검사의 기소 요지는 공소외 1로부터 피고인 1을 1일 불법 출소시켜 주면 부산에 가서 큰일하나 해결하고 크게 한몫 주겠다고 하여서 이를 승락했다고 되었으나 이러한 막연한 약속은 그 사유로 삼기 어렵다) 다시 되돌아 온다는 보장도 없는 수인을 불법 출소시킬 가능성이 희박하고 또 피고인 2의 변소와 같이 피고인 2는 위 설시와 같이 검사의 반국가단체 운운의 문에 대하여 비로소 자백하기 시작한 흔적이 있고 원심변론에서 피고인 2는 증인 공소외 22에게 자백하면 직무유기로 해서 불구속으로 해주겠다고 말한 일이 있지 않느냐고 문한 바 「기억이 없다」고 피하는 대답을 하고 있으니 피고인 2로서는 그 변소와 같은 심리상태에 들어 감즉한 바 있고 또 불법 출소시킨 사실을 자백하는 피고인 2가 정문통과시 정문교도 피고인 3에 대하여 아무말없이 만기 출소자의 명패를 주고 나갔다고 했다가 관사 하수구 공사 인부를 데리고 나간다고 말했다고 하다가 다시 무어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불법출소라는 무거운 사실에 관하여 자백한 자가 그 수단방법에 지나지 않는 정문통과경위에 관하여 그렇게도 진술이 왔다 갔다 하는가 공소외 1을 3차 만났다는 자백도 후술하는 바와 같이 공소외 1이 가공인물이라고 인정되는 바이고 피고인 2가 1967.10.17.의 출정인원을 6명인데 7명으로 기입하였다는 사실은 동 피고인이 시인하는 취지이나 인원점검표 69압제3호증(증제6호) 기재에 의하면 처음부터 7명으로 기재한 것이 아니고 14명으로 기재하였다가 다시 7명으로 정정 기재한 사실을 엿볼 수 있고(주간 점검당시도 8명으로 기재하였다가 7로 기재하였고 기결 2사 주간 점검때도 43로 기재했다가 42로 기재한 흔적이 있으나 이 점은 문제되어 있지 않다)

피고인 2는 총인원이 253명으로( 피고인 1 미 입소임으로) 된 것을 자기가 공소외 23에게 예출 미입이 1명 있다고 하여 254명으로 기재날인( 공소외 20이 날인하였다는 취지)하였다고 하나 위 인원점검표 기재에 의하면 기결 1사의 67.10.17. 개방점검 당시의 인원은 257명이고 폐방점검인원이 256명임을 규지할 수 있어 피고인 2의 말을 믿을 수 없고 이상을 종합하면 위 7명 기재는 피고인 2의 그후(자백을 번복할 때)의 변소와 같이 착오에 의할 것이라고 믿음직한 바 없지 않고 위 설시와 같이 피고인 1의 진술을 믿을 수 없는 이 마당에 있어 피고인 2의 위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진술부분은 모두 믿을 수 없고 사정이 여사할진대, 피고인 3의 증거보존시의 위 간단한 진술 역시 유죄의 증거로 삼기 어렵다.

삼. 피고인 6의 진술 및 피고인 7의 진술을 검토하면

1. 피고인 6은 단 한번 1968.5.28.자 피의자신문조서에서 자기는 1966.3.경 황선생 권유로 북괴노동당에 가입하고 황씨로부터 자기의 매부 공소외 2의 아들 공소외 3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피고인 7에 살해지시하여 피고인 7이, 공소외 13, 피고인 1을 선택하여 공소외 3을 살해하였다고 진술한 바 있으나 일건 기록에 의하면 수사기관에서도 공산당관계는 허무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중단한 것으로 보여지고 공산당관계를 전제로 한 위와 같은 자백은 문득 믿을 수 없다. ( 피고인 6은 엄문에 못이기기에 허위 자백했다고 변소하고 그후부터는 계속 부인하고 있다)

2. 피고인 7은 동시일관 부인하고 있다.

사. 피고인 1을 1967.10.17. 만나고 재워주었다는 부분을 입증하는 듯하는 참고인들 및 증인들의 진술 및 증언( 피고인 1에게 볼박스 또는 칼과 노끈을 팔았다는 점에 관한 인증포함)들을 검토한다.

1. 피고인 1에게 볼박스를 팔았다는 참고인 공소외 7의 1968.5.10.자 진술조서 기재 및 원심에서의 증언을 보면 결국 피고인 1에게나 공소외 1, 피고인 7등에 박스를 팔은 기억이 없다고 하고 있고

2. 피고인 1에게 칼과 노끈을 팔았다는 참고인 공소외 10이 위 1968.8.2.자 검찰의 피고인 1에 대한 진술조서에서 대질시에 1967.초가을에 피고인 1이 칼과 노끈을 사간 기억이 난다는 정도이고 다시 이인모는 검찰진술조서(68.8.2.자)에서 이사건 칼(69앞제4중 증제2호)을 보고 자기가 1967.10.경에 팔은 칼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러나 칼 그 자체를 피고인 1에게 팔았다는 취지는 아니고 그와 같은 칼을 팔았다는 취지다). 원심에서 증인으로 나와 위 증2호는 증인이 공소외 25로부터 샀고 칼과 노끈을 67년 초가을에 피고인 1에 팔았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위 설시와 같이 공소외 10의 진술이 점점 피고인 1에 불리한 방향으로 더 자세하여지고 있는 점 원심에서 피고인 1의 「자기가 그렇게 칼과 노끈을 샀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듣고 증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반대신문에 부닥치자 그런 사실도 있고 또 피고인이 그렇게 이야기해서 안 것이라고 일보 후퇴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위 진술 및 증언은 문득 믿을 수 없으며

3. 부산 돼지국밥집에서 피고인 1을 보았다는 돼지국밥 주인 공소외 9의 1968.6.3.자의 검찰진술조서에 의하면 피고인 1을 안다.

피고인 7도 2,3회 술먹으러 와서 아나 공소외 4는 모른다.

1967.가을에 피고인 1 외 2명이 와서 포도주인지 매실주인지를 마시면서 돼지고기(불고기)를 먹고 11.말경 또 와서 늦었다고 거절하여 보낸 기억이 있다. 가을에 온 것이 피고인 1 외 2명이나 피고인 7이 왔는지 기억없고 공소외 3사건을 라디오에서 들었으나 그전날 온지는 모른다.

( 피고인 1이 환기시킨 혼적이 있다)고 진술하고 원심법원에 증언으로 나와 피고인 1은 그전부터 다녔고 피고인 7은 사돈이다. 1967.가을에 피고인 1이 온 것은 기억나나 타인은 기억없다고 증언하고 있는바 피고인 7을 사돈이라고 하면서 1967.가을에 피고인 1이 온 것은 알면서 피고인 7이 온지는 모르고 있고 공소외 3 살해사건을 보도하기 전날이니 기억함직도 하는데 모르고 있고 원심에서 증언시에도 시아버지 제삿날도 모르고 있는 점등으로 보아 동인의 진술내지 증언은 문득 믿을수 없고

4. 피고인 1이 67.10월에 들렸다는 부산소재 진주상회주인 공소외 8의 1968.5.24.자 검찰진술조서에 의하면 자기는 부산에서 술, 담배, 밥등을 팔고 있는데 피고인 1은 혼자 10여차 왔고 피고인 7이와는 3회가량 왔는데 1967.10월경 피고인 7과 피고인 1이 빨간티샤스 입은 20세 가량의 사람과 왔다 볼박스는 못보았다라고 진술하고 원심증인으로 또 공소외 4의 군법회의 증인으로 나타나(기록검증결과) 위와 대동소이한 진술을 하고 있음으로 보건대, 위 진술 내지 증언중 67.10.경 들렸다는 부분은 믿기 어렵고 (동인은 위 군법회의 증인으로 나와 그것이 공소외 3 살해사건 발생전인지 후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5. 피고인 1이 67.10.17. 진주상회를 나와서 태복상회에서 같이 음주했다는 공소외 16의 1968.8.13.자 진술조서에 의하면 67.10.중순경 피고인 1을 만나 태복상회에서 19:30분경부터 약 20분간 술을 같이 했는데 피고인 1은 한달 후에 취직이나 시켜달라고 하였고 피고인 1이 만난 약 5일후에 공소외 27로부터 공소외 3사건을 들었는데 67.10.17. 밤 죽였다면 피고인 1을 만난 것이 10.17.이라고 진술을 하고 있고 원심에 증인으로 나가 그날이 67.10.17.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로 이사건 범인들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어(검찰 68.10.31.자 진술에서 68.5월달에 신문보았다고 진술한다) 계산하면 술대접한 것이 67.10.달이 틀림없으며 피고인 1이 한달 후에 온다고 말한 일이 없고 나중에 온다고 했다고 부진하고 있는 바 검토컨대, 범인들이 체포되었다면 피고인 1이 체포된 후일 것이고 그때는 피고인 1이 불법출소 사실을 자백하고 있으니 이미 67.10.17. 불법출소한 것으로 보도되었을 것이고 이 사실을 하나의 기정사실로 전제로 하고 계산하면 자기가 만난 것이 10.17일 것이라고 믿어질 수 있으므로( 피고인 1은 11.17.경 만기출소후에 만났다고 변소하는 취지다) 공소외 16은 착각에서 그와 같이 진술 또는 증언을 할 수 있다고 할 것이고 더구나 원심에서 동 증인은 그날 코트를 입었었다고 말하고 또 부산은 10.28.경까지 코트입은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 진술이 착오진술임이 보강된다. 위 증언이 있은 후, 검찰은 위 증인에 대하여 다시 진술을 받고(68.10.31자) 코트를 입지 않았고 피고인 1의 협박에 그렇게 증언했다고 진술하고 다시 원심증인으로 세워 위와 같이 그 점을 석명하고 있으나 문득 믿을 수 없다.

6. 참고인 공소외 27의 검찰진술(68.8.12.자)이나 원심증인으로서의 증언은 공소외 16이 1968.5.하순경 13:30분경 신문을 보고 공소외 3사건 범인을 읽어 내려가다가 피고인 1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그놈이 67년 가을에 자기가 태복상회에서 술사준 놈이라고 하고 7개월되었는데 10월달이라고 하였고 증인도 수사정보를 제공코자 편지까지 썼다가 찢었다는 취지로서 이는 위에서 설시한 바와 같이 신문에 보도된 불법출소 사실 따라서 피고인 1이 10.17. 범죄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계산을 하니 10월달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 논리가 전혀 거꾸로 된다( 공소외 16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7. 참고인 공소외 28의 검찰진술(68.8.24.) 및 원심에서의 증언중 공소외 16과 피고인 1이 만난 일자가 67.10.17.이라는 취지의 진술(또는 증언)은 피고인 1과 공소외 16이 태복상회에서 술을 먹을 때 잠간 올려 보았다는 정도의 증언으로서 공소외 16, 27의 진술(또는 증언)이 위와 같이 배척되는 이 마당에 문득 믿을 수 없다.

8. 1967.10.17.밤 피고인 1과 같이 잤다는 공소외 17 및 그 동생 공소외 29의 진술 또는 증언을 검토한다.

공소외 17의 1968.5.10.자 검찰진술에 의하면 자기는 동생 공소외 29와 어머니와 참새구이집이라는 이름으로 술등을 팔다가 1966.10.29. 어머니는 별세하고 형제가 사는데 1967.10. 17.04:30경(이때는 피고인 1이 1967.10.16. 출소했다고 진술하던 때이다) 피고인 1이 본인이 자고 있던 방에 와서 같이 잤는지 기억이 없고 피고인 1이 잤다고 하면 잤겠지요라는 취지의 진술 정도이어서 ( 피고인 1은 자는 공소외 17을 깨우면서 어머니 어디 갔느냐고 찾으니 돌아가셨다고 대답해서 같이 자자고 하고 그날 같이 잤다고 한다)이 말은 1967.10.18일 04:00에도 잤다는 취지도 아니므로 증거로 삼을 수 없고 공소외 17은 1968.8.21.자 검찰진술에서는 먼저 진술을 번복하고 67.10.17일이 자기집세 지급할 날인데 1967.10.18. 01:00경 피고인 1과 그 사람 친구 2명이 있었던 성인 여인숙(자기집에서 약 10메타 상거)에 자기 동생 공소외 29를 시켜서 술을 배달해 주었고 피고인 1이 그날 자기와 잤는데 들어와서 자는 것은 못보았고 자다 아침 일찍 일어나니 자고 있었는데 자기는 시장갔다 09:00경 돌아오니 없었다.

그 당시 피고인 1의 친구 2명중 한명은 피고인 2 같다( 피고인 2 대면하고)고 진술하고 있고 동인은 원심에 증인으로 나가 위 진술과 대동소이한 진술을 하고 있으며 공소외 17의 동생인 공소외 29는 1968.8.23.자 검찰진술조서에서 피고인 1이 온 날이 1967년 가을이다 그날이 집세주는 날이다.

성인여인숙에 있는 피고인 1에게 술을 갔다 주었다.

그날 형 공소외 17과 피고인 1이 같이 잤다고 진술하고 제1심 증인으로 나가서도 그와 같은 취지의 증언을 하고 집세내는 날이 10.17.로 안다고 부인하였음으로 살피건대, 무릇 증언은 시간적으로 가까울수록 신빙성이 있고 시간이 많이 흐르면 기억이 희박하여지는 것이 우리의 경험율인데 공소외 17의 경우는 그와 반대이니 어찌하여 반대현상이 일어나는지 합리적인 사정이 없는 한 시간이 경과한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인 바, 공소외 17은 처음에는 피고인 1이 어머니와도 알고 자기도 아는 사람인데 수갑을 차고 와서 측은한 마음이 생겨 날자를 안대주었으나 사건이 사건이니 만큼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 설명 가지고는 위 사정의 설명이 안된다.

공소외 17이 피고인 1을 1967.10.17.에 만났다고 하면 불법출소가 된다는 사실을 그 당시 알고도 동침한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하여 불법출소 사실을 숨겨준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불과 17세였고 공소외 17의 동생인 공소외 29의 위 진술내지 증언도 믿을 수 없다.

9. 공소외 30에 대한 1968.8.23.자 검찰진술조서에 의하면 공소외 17 모가 경영하는 참새구이집은 자기 것인데 1964.10.17. 공소외 17의 모로부터 삭월세를 1년에 30,000원 받기로 하고 임대했는데 10.17일이 삭월세 받는 날이다.

1967.10.17.부터는 35,000원을 받기로 했는데(자기 생각인지 합의가 되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동일에는 삭월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원심공정에서도 동지의 증언을 하고 다시 이야기가 발전하여 그 날자를 기억하는 것은 달력에 표를 해두어서 안다고 하였으나 그 달력이 있느냐고 물으니 없다고 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진술이 점점 발전하다가 달력에 표했다고 하는 물적 증거인 달력이 없다니 위 진술인의 집세받는 날이 10.17.이라는 진술(또는 증언)을 문득 믿을 수 없으며 가사 그날이 집세받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그날 피고인 1이 공소외 17가에서 잤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소사실에 부합되는 공소외 4의 진술(진술서 또는 자백서 포함) 또는 증언을 검토한다.

1. 공소외 4의 최초의 진술서(일자가 없으나 피고인 1의 1968.5.13.자 진술조서 다음에부터 있다-검찰기록 제125정-)의 의하면 1967.10.17. 21시 40분경 공소외 3집 앞골목에서 30세 되는 사람으로부터 공소외 3이 살해되어 담겨져 있는 볼박스를 받아 화랑국민학교앞에 두고 차를 잡으러 갔다 검정다리앞에서 시발택시를 잡아 타고 위 국민학교앞에 다시 와서 박스를 싣고 있는데 사람이 오기에 도망쳤다. 그때 도망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영도다리 있는 곳으로 가서 겁이나서 버리지 못하고 있던중 순경이 와서 10시를 넘어서 도망했다.

내 짐작에는 이 사건을 30∼40세 정도의 사람이 조정하고 있는 성싶다라고 진술하고 약도를 제출 첨부하고 있는 바,

2. 다음 진술서(이것도 날자는 없고 위 진술서의 바로 뒤에부터 있다-위 기록 128정-)에서는 본인이 입었던 옷은 밤색 비니루지 잠바, 곤색에 가까운 배추색 쓰봉을 착용, 야광시계를 차고, 신은 구두모양의 콤비를 신었고 위 잠바와 쓰봉은 밀양 본인가에 있다로 되어 있고,

3. 3차의 진술서(위 기록 다음에 붙어있는 1968.5.18.자 작성)에 의하면 공소외 3집앞 골목에서 30세 가량의 사람으로부터 야광시계를 차라고 주기에 받아 찼고 모자는 나이가 많이 먹어 보이는 사람이 현장에서 주기에 받아 썼고 차 타고 갈 때는 쓰지 않았고 하차하여 다시 썼다. 모자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도망했다고 자세하여지고

4. 1968.5.19.자 검찰 제1회 진술조서에 의하면 위 진술서기재와 같이 진술하다가 본인의 별명은 공소외 13이고 그 별명은 그 공소외 3사건에 가담한 사람만 안다.

자기의 착의는 빨간색 티사쓰(티샤쓰를 첨가)위에 위 잠바를 입었고 그날 순경에 발각되어 도망하여 남포동 입구 공보관옆에 있는 마이크로뻐스 주차창에서 마아이로 뻐스를 타고 대신동으로 왔는데 부산여고를 지나 서구청으로 돌아가는 첫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동대신동 2가 (지번 생략) 공소외 31집에서 잤고 야광시계는 시계를 준 위 30세 되는 사람에게 하차하여 공소외 31가에 가는 도중의 동신양과자점 옆골목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주었다고 진술을 추가하고

① 피고인 1이 볼박스를 주었다는데 여하

② 피고인 1과 피고인 7은 같이 크라운빠에 갔다는데 여하

③ 야광시계를 공소외 32로부터 받았다는데 여하라는 문에 대하여 이를 모두 시인하므로써 앞서의 30세 가량의 사나이를 피고인 7로 특정시키고 피고인 1과 공소외 32 본인 3인이 진주집에서 술 먹고 범천동 돼지국밥집에서 공소외 32로부터 야광시계를 받았다고 시인하여 시계받은 장소를 변경 진술하고 3인이 코로나택시를 타고 보수동 검은다리 부근에서 하차하여 공소외 32가 박스를 접친 채로 들고 먼저 올라가고 피고인 1이 약 10메타 떨어져서 가고 그뒤 본인이 갔는데 화랑국민학교앞 골목에서 공소외 32가 피고인 1에게 박스를 넘겨주고 피고인 1이 그것을 받을 동안에 공소외 3집 앞에 있으니 피고인 1이 박스를 펴서 본인에게 주어서 받았고 기다리고 있으니 피고인 1이 「 공소외 3」이라고 말하여 주기에 본인이 공소외 3에게 인상을 쓰면서 오른팔로 공소외 3의 목을 조르고 골목안 캄캄한 곳까지 끌고 들어가서 본인이 미리 준비하였던 칼을 왼손에 쥐고 공소외 3의 심장부를 한번 힘차게 찌르고 칼 꽂인대로 두고 볼박스를 펴고 그안에 공소외 3을 넣었고(신발도 넣었다) 공소외 3의 가방은 당황하여 거기에 떨어뜨렸으며 공소외 3을 볼박스에 넣을 때 젊은 여자가 보았고 박스를 들고 나올때 본 학생이 있고 시발택시를 타고 운전수에게 국제시장까지 가자고 했다가 "이리꼬도가" 있는데로 가자고 했다가 영도다리를 넘어가자고 하였더니 차를 세울 수 없다고 하기에 시청뒤 영도다리 있는 곳에서 하차했다고 범행방법을 자세히 추가 진술하고 칼과 노끈 및 모자는 돼지국밥집에서 공소외 32가 주었다고 받은 장소를 변경 진술하고(모자에 관해서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다가 공소외 32로부터 받았다고 하여 준 사람도 변경 진술하고) 1967.9.중순 본인, 공소외 32, 최씨, 박씨 4인이 대구달성공원 뒤에 있는 박씨 집에서 만나서 그길로 닭계장집에 와서 최씨가 "부산에 큰 구찌가 생겼는데 자네 해 볼란가" 하기에 '한번 해 봅시다'라고 답하니 박씨가 그러면 잘 되었다라고 말했고 음주하다가 "자갈마당" 사창가에서 4.5일 쉬다가 공소외 32와 같이 부산에 왔다고 공소외 32가 대구에 큰 구찌가 있다고 해서 같이 대구에 갔었다고 진술하므로서 모의에 가담한 자 및 모의 일시, 장소, 내용을 추가하여 자세히 진술하고 피고인 6의 사진을 제시하니 공소외 4가 붉은 싸인펜으로 최의 오른손가락에 표시를 하므로써 최씨를 뚜렷이 끌어들이고( 피고인 1이나 공소외 4는 그후 자백을 번복하면서 부터는 수사기관이 암시를 주어서 그렇게 했다고 변소한다)

5. 위 진술조서 뒤에 붙은 1968.5.19.자 공소외 4의 진술서에 의하면 위 진술조서 기재중에 공소외 3 사체가들은 박스를 차에 싣고 올때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점(당시의 운전수 공소외 11의 진술에 맞는)사전에 공소외 3집을 알아 두었다는 진술을 추가하고 죽을 죄를 졌으니 앞으로 사실대로 밝혀 드린다고 되어 있고,

6. 1968.5.28.자 검찰 제1회 피의자 신문조서에 의하면 1967.9.21.경 공소외 3집을 박씨 안내로 박씨 본인 피고인 7 3인이 알아보았다.

1967.10.초에는 피고인 7과 본인이 공소외 3이 과외공부하는 것을 알고 2인이 공소외 3뒤를 따라 자기집 가는 것 및 시간을 확인하고 살해방법에 관하여 피고인 7이 공소외 3을 살해하여 박스에 넣어 바다에 버리면 너의 의무는 끝난다고 했고 칼을 찌르고 힘을 주고 조금 있으면 피가 응결되어 밖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가르켜 주었고 67.10.16. 피고인 7이 대구에 가면서 17일 17:00차편에 피고인 1을 데리고 올 것이니 같이 하자고 해서 그 시각에 부산진역 광장 답배가게앞에서 기다려서 만났고 거기서 인사하고 진주상회에 가서 술을 먹고 다시 돼지국밥집에 가서 술을 먹으면서 대기하니 18시가 넘었는데 피고인 1이 약 4:50분쯤 나갔다 왔다고 추가진술하고 20:50경 현장으로 향하여 출발했는데 ① 출발전 약 5분전에 피고인 7로부터 칼, 노끈을 받았으며 공소외 3과 입을 막았던 손수건은 본인 것으로 기억하며 박스를 가지고 영도다리 밑에 갔을때 16,7세되는 아이(경찰관파출소 급사)에게 무엇하러 왔느냐, 재미보러 왔느냐라고 말한 사실이 있고 신발은 논산훈련소에 입대할 때 통일화로 바꿔 신어서 없어졌다.

공소외 3의 목을 조를 때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고 다시 추가 진술하고

7. 1968.5.31.자 제2회 피의자 신문조서에 의하면 1967.10.17.오후 부산진역 광장 담배포 앞에서 피고인 7이 자기를 피고인 1에게 소개하면서 공소외 13이라고 부르라고 하여 그때 공소외 13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동일 돼지국밥집에서 3인이 살해모의한 내용은 공소외 4가 하수하고 피고인 1은 현장 근처에서, 피고인 7은 화랑국민학교 근처에서 각 망을 보고 살해 후 박스에 넣어 학교까지 가지고 오면 3인이 같이 차를 타고 "이리꼬도가" 뒤 해안에 갔다 버리기로 했다.

살해 현장에서 피고인 1이 "큰 구찌다 최고로 해주게 하면서 본인의 어깨 툭툭치면서 잘 하도록 하라고 했으며 피고인 1에게 내가 해치울테니 안심하고 가라고 한 일이 없고 피고인 1과 피고인 7은 그후 간데가 없었다고 다시 추가 진술하고

8. 1968.6.4.자 제3회 피의자 신문조서에 의하면 공소외 3의 부 공소외 2가 북괴의 자금을 쓴 공산당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황당무계한 여자간첩 무전기, 권총등에 관한 진술을 하고 있고( 피고인 1도 6.5일자에 위 설시와 같이 진술하였다가 철회했다)

9. 1968.6.10.자 제4회 피의자 신문조서에 의하면 황당무계한 공산당관계 진술을 철회하고 "박"이 시켜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1967.9. 중순경 부엉이 닭계장집에서 공소외 1, 피고인 6, 7, 본인이 만나서 공모한 후에 피고인 2교도가 왔다.

피고인 2가 공소외 1에개 한, 두사람 더 삶아야겠는데라고 말한 사실이 있고 피고인 2를 연대시키니 그때 피고인 2가 왼손을 상위에 짚을때 보니 손이 곱고 왼손 엄지손가락 위에 흉터가 있더라고 진술하므로서 피고인 2를 개입시킨 후 공소외 3이 사전 답사에 관한 더 자세한 진술을 하고 범행동기에 대하여 공소외 3을 죽이고 공소외 2를 공산당으로 몰아서 협박하여 돈을 뜯어 낼 작정이었다고 진술을 변경하고 공소외 14의 사진을 보고난 후 공소외 14가 공소외 1이 아니라고 진술하고(후에 설시한 바와 같이 공소외 14가 공소외 1이라는 이름으로 피고인 1을 면회했다)

10. 1968.6.11.자 제5회 피의자 신문조서에 의하면 공소외 4는 위 공산당 건을 허위라 하고 공소외 4의 범행의 모의사실에 관한 진술 및 피고인 1의 위 사실에 관한 진술에 관하여 피고인 6과 대질시켰으나 공소외 4 및 피고인 1은 위 진술을 되풀이 하고 피고인 6은 계속 부인했으며

11. 1968.6.17.자 제2회 진술서에 의하면 1967.7.중순 및 20일경 부엉이 닭계장 집에서의 피고인 6과 박이 공소외 3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던 사항중 최가 공소외 2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고 공소외 1도 감정있는 것 같이 말하고 피고인 7도 본인과 자면서 밀수종이를 공소외 2에게 운반하여 주었어도 공소외 2는 약속된 돈의 반밖에 안주었다고 말하고 공소외 1도 운반해 주었는데 한푼도 안주었다고 하는 것으로보아 자기 생각에 피고인 7과 이섭(지금까지 공소외 1이라 진술한 자다)이 공소외 2에 감정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고 자기에게 200만 원이 올지 알았다고 진술함으로서 범행의 동기에 관한 진술을 추가하고 범행현장에서 피고인 1은 공소외 3이 온다고 말하지 않고 「애」가 온다고 말했다고 앞의 진술을 정정하고 공소외 4가 원심증인으로 나와 지금까지의 진술내용(정정된 것은 정정된대로)과 같이 증언하고 칼(69압제4호, 증2호)에 관하여 검사가 물으면 틀림없다고 답하고 변호인이 물으면 술 취하여 잘 모른다고 답하고 위와 같이 공소외 4는 위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진술 또는 증언을 하다가 그가 피고인이 되어 군법회의 (제1회 변론 68.11.28.)에서 (피고인 공소외 4에 대한 군법회의 기록검증결과에 의한다) 공소사실에 일부 부합하는 진술을 하여 가다가 진술을 거부하고 피고인 1, 6, 공소외 1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공소외 13은 자기의 별명도 아니며 자기의 3촌의 이름이며 피고인 7은 영남상고 재학시부터 알고 공소외 19(검찰청 촉탁)는 고등학교시대에 유도사범 이다.

1967.10.17. 밤은 부산소재 서부극장 뒤에 있는 대신탁구장에서 영철이라는 친구와 탁구를 했고 지금까지 공소사실에 부합되는 진술을 하였으나 이는 부장검사와 공소외 18이 인간적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고 이미 피고인 1이 공소외 13, 32가라는 가공인물을 만들어 두사람을 찾으면 공소외 3사건은 해결된다고 투서하고 공소외 18이 본인을 가르치면서 이 사람이 공소외 13이지 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여 그후부터 계획대로 되어 버려서 허위자백을 하였고 징역도 조금만 준다고 하여 (당원에서 증인으로 조사시에는 공소외 18이 군대생활하는 정도로 교도소에 있으면 된다고 기망하여 속았다고 변소한다) 허위자백한 것이나 오늘 법정에서 어머니를 뵈니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생겨나서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변소하고 있다.

이에 위 진술 및 증언을 검토하건대, 공소외 4는 제1회 진술에서 공소외 3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그 앞의 진술서에서는 하수했다는 말은 없으나 살해현장에 가서 공소외 3의 시체가 들은 볼박스를 받아다가 영도다리 밑에서 버릴려다가 밭각되었다고 함으로써 살해사실에 직접 가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후에 수차의 진술에서 위 설시와 같이 모의경위와 살해당시의 경위 기타 주변적 사실에 관하여 추가 또는 7전, 8전하고 있는바, 변경 진술중 그 중요한 부분을 보면

① 현장에서 도망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다가 피고인 1이 " 공소외 3" ( 공소외 3이 온다는 뜻)하고 알려주었다고 하다가 " 공소외 3"이 온다고 말하지 않고 "애"가 온다고 하더라고 정정하고

② 현장에 차고 갔다는 야광시계도 공소외 3집 앞 골목에서 30세 가량의 사람으로부터 모자는 나이가 많이 먹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각 받았다고 했다가 시계는 범천동 돼지국밥집에서 공소외 32로부터 받았다고 했다가 다시 운동모자도 피고인 7로부터 받았다고 정정하고

③ 칼은 자기가 미리 준비하였었다고 했다가 칼과 노끈은 돼지국밥집에서 공소외 32로부터 받았고

④ 공소외 3의 입을 막은 손수건에 관하여 상당한 기간 이야기가 없다가 위와 같이 자기것으로 기억한다고 추가 진술하고,

⑤ 공소외 1은 이섭이라고 하고

⑥ 황당무계한 공산당 이야기를 했다가 또 철회하고

⑦ 군법회의 검찰조사시 ( 공소외 4가 지금까지의 진술을 번복하고 범행을 부인하기 전) 공소외 4가 쓴 수기(69합제4호중 15호)에 의하면 자기는 망을 보기로 하고 현장에서 공소외 3을 살해한 것은 피고인 1이었고 자기는 박스를 운반하기로 하였으며 공소외 3의 입은 자기가 막았고 공소외 3사체를 피고인 1과 본인이 같이 박스에 넣었고 자기가 묶었으며 피고인 1이 박스를 운반하기 위하여 차를 부르러 갔는대 피고인 1이 오지 않아 자기가 차를 불러타고 지금까지의 진술과 같이 버렸다고 진술을 변경하고 그밖의 추가진술을 하고 있음은 위 설시와 같다.

무릇 살해사실인 무거운 사실을 자백하는 사람이 그 주변적 사실인 가벼운 사실을 사실대로 자백하게 됨은 오인의 경험율이고 주변적 사실이 수차 변경 또는 추가되는 경우는 합리적인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무거운 사실에 관한 자백도 허위자백이라고 보아야 함은 피고인 1의 진술을 판단할 때 설시한 바와 같은 바, 공소외 4의 경우도 기록에 의하여도 위 특단의 사정을 발견할 수 없고 단지 진술이 공소사실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변경 또는 추가되어 가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이는 숨겼던 사실을 점차 자백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러한 경우는 가벼운 사실을 일부 자백하고 무거운 사실을 숨겼던 자에 해당하는 이론이고 이 사건과 같이 무거운 사실을 자백한 경우는 도시 가벼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한 자가 공소사실에 맞춰가는 과정이며 이는 필경 무거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한 자가 허위자백한 경우라고 볼 것임은 피고인 1의 경우와 같다.

더구나,

① 후술하는 바와 같이 공소외 1이라는 사람은 가공의 인물이고 실은 공소외 14의 일명에 불과한 점

② 공소외 4의 위 진술과 그의 의사에 의하여 한 공소외 4의 공소외 3을 살해 모의하는 현장검증 (검찰 제4책 1327정 제60호 사진등 참조) 조서기재 및 위 사진에 의하면 공소외 4는 피해자 공소외 3을 뒤에서 우수달로 목을 조르고 뒤에서 좌수에 칼을 쥐고 앞에 선 공소외 3의 좌측 가슴에서 우측 방향으로 동 칼로 찌르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 바 ( 공소외 4의 범행사실 부인 후인 당심증언에 의하면 공소외 4는 왼손잡이고 양손을 모두 쓰나 좌수를 더 많이 쓴다고 되어 있다) 1967.11.13.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교실 전임 강사 공소외 33, 조교 공소외 34 작성의 공소외 3사체 감정서기재에 의하면 사체의 우측 제3늑골의 연골이 흉골과 접하는 부위의 흉벽에 길이 2.4센치의 좌상의 좌입구가 있고 좌창관은 우측 제3늑골의 연골부를 절단하여 흉벽을 뚫고 우패의 상엽내 하연파 심낭을 관통하여 좌출구는 심장 후면의 좌심방벽에 관찰되고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폭 2.4센치 길이 12센치 이상의 끝이 예리한 칼이고 좌창관의 방향은 사체의 장축에 수직방향이나 좌측으로 비스듬하다고 기재되어 있고 위 기재 및 당심증인 공소외 33의 증언에 의하면 결국 공소외 3의 상처는 우측 가슴에선 좌하후측으로 뚫린 상처이며 위 검증사진의 범행모습은 전혀 반대로 되어 있고 그와 같은 범행모습으로는 감정서기재와 같은 상처가 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공동감정인 공소외 34는 검찰에 나와 위 찔린 각도는 약 80도 각도라고 진술하고 있고 칼이 들어간 방향 위치로 보아 좌수로 찔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진술하고 있으나 후반부분 진술은 피해자의 정면에서 찔렀다면 좌수로 찔렀을 것이라는 진술로 해석된다)

피해자의 목을 뒤에서 조르고 칼로 찔렀다면 우수로 찔러야만 오인의 실험칙에 들어 맞는 것이다(감정서기재에 보면 피해자의 경부에 손톱자국으로 생각되는 피부손상이 경부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있고 경부에 색구는 없으며 결막하 점상 출혈은 질식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고 범인의 팔 또는 어떤 물건으로 목을 조르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입은 피부손상이며 그것이 범인의 손톱자국인지 피해자의 그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사인은 심장 천자에 의한 흉각 내출혈이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공소사실에 들어맞는 방향으로 진술하여 오던 공소외 4가 가장 중요한 하수 장면을 이렇게 틀리게 연출할 수 없다고 보여지는 점 이상 두가지 사실은 공소외 4가 그의 진술과 같이 공소외 3을 살해하였다는 자백의 허위성을 보강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 공소외 4가 피고인 2의 손등에 있는 상처를 알아 맞추는 행위는 동인이 당심에서 사전에 검사실에서 보아두었다고 변소하는 바, 당시는 그가 공소사실에 맞춰가는 방향으로 진술을 발전시키던 때이니만치 수긍이 못가는 바 아니다)

육, 공소외 3 살해사건 직전, 직후를 통하여 범인같다 또는 범인이라는 취지의 공소외 11, 12, 35, 36, 37등의 검찰진술 및 원심증인 공소외 11, 12, 35의 군법회의에서의 증언(당원의 기록검증결과)등은 그것들이 1967.10.17. 21시 내지 22시경까지 사이에서 얼핏 본 인상착의에서 공소외 4를 범인이라 진술(엄격히 말해서 판단)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문득 믿기 어렵고

칠, 공소사실 그 자체에서 오는 불합리 점 또는 이 사건에서 석연치 않는 점으로서

1. 망을 보이기 위하여 교도소에 재감중인 피고인 1을 불법 출소시켜 아리바이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수인이 체포되면 망본 자의 아리바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피고인 1, 7, 공소외 4 3인이 1967.10.17. 20:50경 돼지국밥집에서 나와 영업용 코로나택시를 타고 21:20경 검정다리 근처(현장 부근)에서 하차하였다는 자동차 또는 그 운전수가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고 있는 (수 백명의 용의자가 수사선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점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팔. 도리어

공소외 14외 검찰진술(68.9.11.) 및 원심증언 및 접견표(69압제3호중 25호 대구교도소 자체감사기록에 있는 접견표 사진-173정-)을 종합하면 공소외 14는 장물에 관한 죄등으로 전과4범인데 동 죄로 1967.2.초에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67.10.13. 만기출소했는데 교도소에서 피고인 1을 알게 되어 출소 후 제1차로 1967.10.17. 제2차로 11.4일에 위 교도소에 있는 피고인 1을 면회간 일이 있고 당시 면회신청인 명의를 자기가 전과자이기에 공소외 1이라는 가명을 썼고 (68.6월경에도 오토바이 1대를 32,000원에 사고 영수증을 공소외 1명의로 떼어준 일도 있다)

담화내용은 제1차는 「몸 무사한가」, 「잘 있읍니다. 집주소나 알려주시요」로 제2차는 수형자 「이제 14일 남았읍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러면 그전에 한번 오겠다」, 수형자 「기다리겠읍니다」로 되어 있고 (11.4일에 14일 남았읍니다라는 말은 11.17. 만기 출소일자를 말한다) 67.11.17. 피고인 1이 만기출소날은 자기가 교도소까지 나가서 피고인 1을 맞이하여 자기집에 데려와 빤스를 갈아 입히고 목욕을 시켜주고 막걸리를 사주고 사창가에 재워 주고 여비등 1,500원을 빌려주었던 사실( 공소외 14는 원심 법원에서 증언을 하고난 후 다시 검찰에 불려가서 1968.11.17. 면회는 출소 후 한번 간 일밖에 없다고 질술하고 있으나 이는 위 접견부기재에 저촉되므로 믿을 수 없고 공소외 14는 이 사건이 일어나자, 1968.6.21. 국제신보사에 자기는 공소외 3사건과 무관하다고 호소하였다. (검찰기록 7책2056정 참조)

2. 피고인 6이 위 인정과 칼이 이사건 범행전 후를 통하여 매일 공소외 2가에 와 있었던 사실

3. 배차표에 대한 감정결과에 의하면 1967.10.17. 6:40분 차를 피고인 7이 배차하고 그 당시까지 부산에 있었던 사실

4. 원심에서의 증인 공소외 38의 증언과 검찰에서의 1968.5.31.자 공소외 39의 진술(교도관계 검찰기록)에 의하면 1967.10.17. 피고인 1은 공소외 38과 같이 위 교도소 기결 제1사14에서 같이 잤다는 사실

5. 원심증인 공소외 20의 증언에 의하여 1967.10.17. 폐방점검 동월 18일 개방점검때에 이상이 없었던 사실을 각 인정할 수 있고

6. 피고인 1이 1967.10.17. 대구에서 또는 부산에서 돌아다녔다는 장소 상면한 사람들에 관한 허위자백(부엉이 닭계장집, 참새구이집, 성은여인숙, 진주상회, 돼지국밥집, 태복상회 관계)은 동 피고인의 변소취지와 같이 동 피고인이 대구교도소에 입소하기 전 또는 1967.11.17. 만기출소 후의 행위라고 인정된다. (1967.10.17.과 1967.11.17. 대구에서는 똑같은 행각을 하였다는 피고인 1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10.17. 피고인 1을 만났다는 참고인 내지 증인들이 두번 만났다고 말하여야 할 터인데 두번 만났다는 진술 내지 증언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

제이, 피고인 4, 5에 대한 공소사실(직무유기)도 피고인 1이 위 공소사실 적시와 같이 도주하였음을 전제로 대구교도소 교도관인 피고인 4, 5가 이를 알고도 이 사실을 위 교도소 보안과에 보고하여 부족한 수형자를 시급히 발견 또는 체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조치를 취하지 않고 피고인 4는 이 사실이 발견되지 않도록 1967.10.17. 석간 인원점검표의 작성확인을 이행치 않고 피고인 5는 이 사실을 묵인함으로써 각 직무를 유기하였다는 것이므로 피고인 1이 도주한 사실이 인정되지 않은 이 사건에 있어서 피고인 4, 5의 직무유기 사실도 이를 인정할 수 없다.

제삼, 따라서 이사건 피고인등에 대한 공소사실을 뒷바침하는 증거는 없음에 돌아가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김태현(재판장) 권영목 최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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