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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서울고법 2005. 7. 15. 선고 2000재노16 판결
[국가보안법위반·반공법위반] 확정[각공2005.12.10.(28),2064]
판시사항

북한에서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위장귀순한 후 간첩활동을 계속하였다는 공소사실이 전부 유죄로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피고인의 재심청구에 대하여 수사에 관여한 사법경찰관의 고문사실이 증명되었음을 이유로 재심개시결정을 한 사안에서, 피고인이 검사 앞에서 한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고 유력한 증거인 첩보제공자의 진술은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달리 공소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 사례

판결요지

북한에서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위장귀순한 후 간첩활동을 계속하였다는 공소사실이 전부 유죄로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피고인의 재심청구에 대하여 수사에 관여한 사법경찰관의 고문사실이 증명되었음을 이유로 재심개시결정을 한 사안에서, 피고인이 검사 앞에서 한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고 유력한 증거인 첩보제공자의 진술은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달리 공소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 사례.

피고인

피고인

항소인

피고인 및 검사

검사

이장수

변호인

법무법인 지평 담당변호사 조용환 외 1인

주문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

이유

1. 사건의 경과

가. 피고인은 1983. 5. 18. 서울형사지방법원 83고합531호 국가보안법위반 및 반공법위반죄로 공소가 제기되었고, 원심판결은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나. 이에 대하여 피고인과 검사가 서울고등법원 83노2652호 로 항소하였는바, 재심대상판결은 원심이 일부 범죄사실에 대하여 보강증거 없이 피고인의 자백만을 유일한 증거로 하여 사실을 인정한 위법을 범하였다는 이유로 원심판결 전부를 파기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보강증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다시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다. 피고인은 이에 불복하여 대법원 84도378호 로 상고하였으나, 1984. 5. 29.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재심대상판결이 확정되었다.

라. 그 후 2003. 10. 28.에 이르러 이 법원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는 1999형제131012호 공소외 1에 대한 독직폭행 등 사건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공소외 1이 재심대상사건을 수사하면서 피고인을 고문한 사실을 밝히고, 그에 대한 공소시효가 1990. 3. 19.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1999. 12. 27. 불기소결정을 하였으므로, 재심대상판결에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 제422조 소정의 재심사유가 있다'고 하여 재심개시결정을 하였다.

2. 항소이유의 요지

가. 피고인 및 변호인의 항소이유의 요지

(1) 피고인은 1954. 4. 14 남파간첩으로 월남한 후 즉시 관계 기관에 자수하고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생업에만 종사하고 있었는데도 원심은 피고인이 위장자수를 하여 가볍게 처벌을 받은 후 그 때부터 간첩행위, 반국가단체 찬양 및 허위사실 유포 등 국가보안법위반과 반공법위반의 범죄행위를 자행하였다는 이 사건 공소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죄로 처단하였으니, 원심판결에는 판결에 영향을 미친 사실오인의 위법이 있다.

(2) 원심판결이 판시 범죄사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들고 있는 증거들 중에서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의 자백은 피고인을 장기간 불법으로 구금하면서 고문과 폭행을 가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낸 사법경찰관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로 인한 공포심과 억압된 심리가 계속된 상태에서 진술한 것으로서 임의성이 없으므로 증거능력이 없고, 사법경찰관사무취급이 작성한 참고인 공소외 2, 공소외 3, 공소외 4, 공소외 5, 공소외 6, 공소외 7에 대한 각 진술조서와 동인들 작성의 각 진술서는 모두 담당수사관이 동인들에게 피고인으로부터 미리 받아 놓은 허위자백에 들어맞는 진술을 강요하여 작성된 것으로서 임의로 된 것이 아니므로 이것 역시 증거능력이 없고, 원심법정에서의 동인들의 증언도 담당수사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포 속에서 진술한 것이므로 임의성이 없어 증거능력이 없으며, 원심증인 공소외 8의 증언은 애매하여 신빙성이 없고, 그 밖에 원심판결이 들고 있는 증거들만으로는 이 사건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심판결은 이와 같이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는 증거들을 채택하여 사실을 인정하였으니 원심판결에는 판결에 영향을 미친 채증법칙 위배의 위법이 있다.

(3) 원심 판시 제1, 5, 7, 11항의 각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증거로는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중 피고인의 자백 기재 부분이 있을 뿐이고 이를 보강할 다른 증거가 없으므로, 원심판결에는 피고인의 자백만을 유일한 증거로 하여 사실을 인정한 소송법위반의 위법이 있고 이는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4)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은 15년 이상 북한의 지령을 받거나 보고 또는 연락을 한 사실이 없이 단순히 일반인들도 쉽게 알 수 있는 군사정보를 탐지·수집하고 시국에 관하여 사실을 왜곡·유포하였을 뿐이어서 처벌가치가 크지 않다는 점 등 이 사건의 여러 정상을 참작하면, 원심이 피고인에게 선고한 무기징역의 형은 너무 무거워서 부당하다.

나. 검사의 항소이유의 요지

피고인은 가족을 찾아 남하하였다고 거짓으로 귀순하여 합법적인 토대를 구축한 다음 북한의 지령사항을 장기간에 걸쳐 수행하여 온 고정간첩의 본보기이므로 극형에 처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한 것에 그친 원심형량은 가벼워서 부당하다.

2. 판 단

먼저 피고인 및 변호인의 항소이유 (1) 내지 (3)의 점에 대하여 함께 판단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1983. 9. 14. 검사가 공소장변경신청을 하여 원심 제8차 공판기일에 변경이 허가된 것)은 별지 기재와 같은바, 그 요지는 "피고인은 1954. 2.경 북한의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공작기간은 남반부 해방시까지, 기본임무는 군사기밀탐지 및 군인포섭입북, 부차적 임무는 동조세력구축 등으로 하는 공작사명을 부여받고 1954. 4. 14. 휴전선을 넘어 남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남하한 부모형제가 그리워 임무를 포기하고 귀순하였다.'는 내용으로 위장귀순하여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소한 다음, 그 때부터 1983. 1.경까지 서울 등지에 거주하면서 북한의 지령사항을 수행할 목적으로 군사상 기밀을 탐지·수집하여서 간첩하고(공소사실 1~3, 5~8, 11, 12, 15항),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사항에 관하여 허위사실을 날조·유포 또는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고(공소사실 9, 10, 13, 14, 16항), 북한의 활동을 찬양하였다(공소사실 4항)"는 것이다.

그런데 공소사실에 기재된 구체적인 간첩행위 및 허위사실 유포 등의 행위가 국가보안법위반죄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가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한 행위'(1991. 5. 31. 법률 제4373호로 개정되기 전의 구 국가보안법 제4조 제1항 )일 것을 요하는바, 피고인은 원심 이래 당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여 위장귀순 및 간첩활동 계속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아래에서는 피고인이 1954년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처벌받은 후에도 계속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는 공작원이었는지에 관하여 원심이 유죄의 증거로 들고 있는 증거들과 그 이외에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공소사실 제4항의 반국가단체 활동 찬양으로 인한 구 반공법(1980. 12. 31. 법률 제3318호 국가보안법 부칙 제2조로 폐지되기 전의 것)위반의 점은 위 국가보안법위반의 점과는 달리 행위의 주체나 목적이 제한되어 있지 않은바, 이 부분에 대하여는 아래 바.항에서 다시 판단한다.

가. 사법경찰관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및 피고인 작성의 진술서

이에 대하여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그 내용을 부인하므로 모두 증거능력이 없다.

나. 사법경찰관 작성의 실황조사서

여기에는 피의자이던 피고인이 사법경찰관의 면전에서 자백한 범행내용을 현장에 따라 진술, 재연하고 사법경찰관이 그 진술, 재연의 상황을 기재하거나 이를 사진으로 촬영한 것 외에 별다른 기재가 없는바, 피고인은 법정에서 사법경찰관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진술내용은 물론 실황조사서에 기재된 진술내용 및 범행재연의 상황을 모두 부인하고 있으므로 위 실황조사서 역시 증거능력이 없다(재심대상판결에 대한 상고심 판결인 대법원 1984. 5. 29. 선고 84도378 판결 ).

다.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1) 우선 피고인이 성립의 진정함과 거기에 기재된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고 있는 제2회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의 진술 내용은 공소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서(다만 그 첫부분에 "전회의 진술은 사실대로인가요"라는 검사의 물음에 대하여 "예, 전부 사실대로입니다."라는 진술 기재가 있으나 이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기재사항으로 보이고, 또 수회에 걸쳐 "군사시설을 탐지한 사실이 있는가요"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였으나 그 답변 내용을 자세히 보면 단지 군사시설과 관련된 사항을 알게 되었다는 것일 뿐 간첩행위를 자백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므로, 아래에서는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하여 살핀다.

(2)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한 자백의 취지가 기재된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원심 및 당심 법정에서 '검사의 조사단계에서 직접 고문 등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실은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바,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검사 이전의 수사기관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의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하였다면 검사 앞에서의 자백도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대법원 1992. 11. 24. 선고 92도2409 판결 등 참조), 한편 자백의 임의성에 다툼이 있을 때에는 그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피고인이 입증할 것이 아니고 검사가 그 임의성의 의문점을 해소하는 입증을 하여야 할 것이다( 대법원 1998. 4. 10. 선고 97도3234 판결 등 참조).

그러므로 살피건대, 이 사건 기록에 편철된 피고인에 대한 구속영장(공판기록 52면), 정보사범발생 및 검거동행보고(수사기록 61면), 정보사범 신병처리 조종(수사기록 1315면), 수사지휘서(수사기록 1447면)의 각 기재와 서울지방검찰청 1999형제131012호 피의자 공소외 1에 대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독직폭행) 등 사건의 불기소사건기록 등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가) 1980. 5.경 북한에서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된 공소외 8로부터 다른 남파간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정보기관에서는 '개성에 살던 공소외 9이라는 교원의 남편이 1950년대에 간첩으로 남파되었는데 그는 전쟁 중에 한쪽 눈을 다쳐 실명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고, 이에 치안본부 대공수사과에서 장기간 내사를 벌인 결과 피고인이 개성 출신으로서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이고 1954년 간첩으로 남파되어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으며 공소외 9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피고인에 대한 미행과 행적수사 등을 계속하여 왔다.

(나) 그러던 중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은 1983. 2. 18. 09:00경 서울 종로구 연지동 소재 기독교회관 앞 노상에서 아무런 이유설명도 없이 피고인을 강제로 차에 태워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 소재 대공수사단 5층 조사실(일명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한 후, '간첩혐의자에 대하여는 장기간의 회유와 여타 연계조직에 대한 수사를 위하여 임의동행 형식으로 수사기관에 보호조치 하는 것이 대공수사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아니한 채 피고인을 구금하고 있으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차단하였다.

(다) 그러나 수사기록상으로는 1983. 3. 24. 10:00경 피고인을 검거하였다는 내용으로 검거보고서를 작성하였고, 같은 해 3. 31. '피고인을 구속수사하라'는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신병처리조종과 그 후 검사의 구속수사지휘를 거쳐 피고인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며, 이에 따라 같은 해 4. 4.에 이르러서야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의 구속영장에 의하여 피고인은 용산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후에도 이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기 전까지 매일 피고인은 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라) 위와 같이 피고인을 불법으로 구금한 상태에서 간첩혐의사실을 조사함에 있어 피고인을 직접 조사한 사법경찰관은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1과 소속 경위 공소외 1이었으며, 그 외에 같은 소속 경찰관인 공소외 10, 공소외 11, 공소외 12, 공소외 13, 공소외 14 등이 수사에 참여하였다.

(마) 연행 후 처음 약 1주일 동안 피고인 조사를 담당한 공소외 10은 피고인으로 하여금 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면서 출생 후 현재까지의 모든 행적에 대한 진술서 작성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피고인이 1954년 이후의 행적과 관련하여 혐의사실을 부인하자 공소외 1이 조사담당자로 투입되었고 그 때부터 ' 공소외 9가 재북처 아니냐, 너는 판문점 군사정전위에서 근무하지 않았느냐,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면서 군사기밀을 탐지한 내용과 동조자로 포섭한 사람들에 대해서 자백하라'고 강요하면서 수 회에 걸쳐 피고인의 얼굴, 몸통 등을 주먹과 발 및 몽둥이로 구타하고, 고문기구인 소위 '칠성판'에 피고인을 눕힌 채 몸을 묶어놓고 가슴에 올라타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다음 샤워기로 얼굴 부위에 물을 흘려보냄으로써 호흡곤란 등으로 고통을 받게 하는 속칭 '물고문'을 하거나 양발의 새끼발가락에 전선줄을 감고 불상의 기구로 전류를 흐르게 하여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속칭 '전기고문'을 가하였고, 이를 견디지 못한 피고인은 공소사실과 같은 내용의 자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 치안본부 대공수사과에서는 피고인과 참고인들에 대한 조사 및 간첩접선장소와 군사기밀을 탐지·수집한 현장에 대한 실황조사 등을 마친 후 1983. 4. 21. 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였는데, 송치 전날 공소외 1은 피고인에게 '내일 검사의 심사가 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공소보류도 받을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 조사받은 내용과 다른 말을 하면 다시 대공분실에 데려와 혼을 내겠다.'는 취지로 피고인을 위협하였고, 송치 당일에도 공소외 1 등이 직접 피고인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데리고 갔으며, 같은 날 피고인이 검사로부터 신문을 받을 때에는 공소외 1과 공소외 10, 공소외 11이 검사실 내에 앉아있었다.

(사) 검사는 위와 같이 이 사건을 송치받은 당일인 1983. 4. 21. 피고인을 신문하여 간첩혐의사실에 대한 자백의 취지가 기재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후 아무런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가 구속기간 만료를 며칠 앞둔 같은 해 5. 16.에야 피고인을 다시 불러 제2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였는데,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은 그 때부터 혐의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기 시작하였으나 검사는 추가조사 없이 같은 해 5. 18. 이 사건 공소를 제기하였다.

(아) 한편, 공소외 1은 재심개시결정 전 당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피고인을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위증을 하기도 하였는바, 1999년에 이르러 공소외 1의 이와 같은 위증 및 앞서 본 불법감금, 고문(독직폭행) 사건을 조사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는 위 피의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1990. 3. 19.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1999. 12. 16. 공소권 없음의 처분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5일간의 불법구금과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였고 그 후 검사의 제1회 피의자신문 단계에서도 그러한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바, 달리 그 임의성의 의문점을 해소할 만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결국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의 자백은 유죄의 증거로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라. 공소외 8의 진술(자술서, 사법경찰관사무취급 작성의 진술조서, 원심 제7차 공판조서 중 증인신문조서, 당심에서의 증언)

(1) 피고인과 관련된 공소외 8의 진술 내용

공소외 8은 북한의 대남공작원으로서 1980. 5. 16. 남파되었다가 같은 달 23. 수사기관에 검거된 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전향을 하여 1982. 8. 25.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사상전향을 단행한 후 고정간첩 조직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그 조직을 일망타진하는데 수훈을 세웠고, 그 밖에도 수십 건의 남파용의자 공작첩보 제보, 간첩에 대한 수사협조, 반공계몽강연 등 커다란 공적이 있고 앞으로도 대공수사 일선에서 남파간첩 검거를 위해 주요한 일익을 담당할 것이 기대된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자인바, 동인이 제보한 남파간첩 용의자에 대한 첩보 중에서 피고인과 관련된 부분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가) 1956년경 개성 제1중학교 민청지도원으로 임명되어 그 학교 지리담당교원으로 근무하던 공소외 9를 알게 되었는데, 동녀는 개성시 해운동에서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성분불순으로 북한정부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나) 공소외 9의 남편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그는 개성 출신이고 군사정전위원회 개성연락사무소에 근무하던 자로서 한쪽 눈을 실명한 영예군인(전투 중 부상을 당하여 제대한 인민군)인데 1950년대 초반에 남파되었다가 검거되었으나 남한에서 국군 중령인가 대령으로 있는 형이 신원보증을 서서 석방된 후 무사히 대남사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들었으며, 개성시당 조직부 담당지도원으로부터 " 공소외 9는 혁명가 가족(대남공작원의 가족을 뜻함)이니 대우를 잘 해주고 보호하라."는 지시도 받은 바 있다.

(다) 공소외 9는 매년 정초 및 김일성 생일에 김일성 명의의 격려서신이나 선물을 받았고, 군인상점에서 특별배급을 받았으며, 본인의 교원 월급 외에 별도로 혁명가 가족생활수당을 지급받고 있었다.

(라) 1961년 또는 1962. 1. 정초에 공소외 9의 집을 방문했을 때 공소외 9로부터 "얼마 전에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이 와서 가족사진―자기가 열여섯인가 열일곱살 때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갔는데 왜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바 있다.

(마) 1963년 겨울 공소외 9의 남동생 결혼식에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이 참석하였고 결혼비용을 당에서 부담하였다.

(바) 1964. 5.경 공소외 9의 부친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안전부에서 가족이주명령이 내려졌으나, 개성시당 조직부에서 '혁명가 가족을 이주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안전부에 연락하여 이주명령을 취소하도록 한 일이 있다.

(사) 1978. 8. 대남공작원 교육을 받던 중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 장모로부터 " 공소외 9의 남편은 남에서 투쟁하고 있으며 내가 담당했기 때문에 잘 안다. 공소외 9의 부화(간통)사건이 중앙당에 보고되었으나 혁명가 가족이기 때문에 처벌을 하지 않고 다른 학교로 전근시켜 계속 보호하고 있다. 남편은 남에서 잘 싸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 북한에서 1950년대까지는 남파된 모든 공작원의 가족을 혁명가 가족으로 대우하였으나, 1960년대 초부터는 남한에서 계속 활동중이거나 전향하지 않은 공작원의 가족을 제외하고 나머지 자수자, 전향자 또는 검거되어 신문 등에 보도된 자 등의 가족은 빠짐없이 자강도 등으로 이주시키고 물질적인 대우도 중단하였다. 그런데도 공소외 9는 1980년경까지 계속 혁명가 가족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다.

(2) 공소외 8 진술 내용의 검토

(가) 우선, 피고인의 원심 및 당심 법정에서의 진술과 공소외 15, 공소외 16의 진술, 피고인이 1954년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처벌받은 사건 관련 수사보고(수사기록 1323면) 및 이에 첨부된 검거보고서, 자술서, 사건송치서, 의견서, 판결문 각 사본의 기재를 종합하면, 피고인은 1931년 개성에서 태어나 계속 거주하던 중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 8.경 개성을 점령한 북한 의용군에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같은 해 10.경 왼쪽 눈을 실명하는 부상을 입는 바람에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후 1951. 7.경 영예제대를 한 사실, 그 후 학교에 다니다가 1952. 2.경 개성으로 돌아갔으나 가족들이 모두 남하해버리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자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피고인의 집에서 가까운 공소외 9의 집에서 동녀와 동거하였던 사실, 그러던 중 1954. 2.경 남파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약 2개월간 교육을 받은 다음 같은 해 4. 14. 휴전선을 넘어 남하하였다가 곧바로 미군초소에 귀순한 사실, 이에 따라 미군부대에서 약 1개월간 조사를 받은 후 원주 소재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같은 해 5. 20.경 강원도 경찰국에 의하여 구속되어 간첩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기 시작한 사실, 그 당시 피고인이 작성한 자술서에는 '현재 개성 시내에 있는 애인을 임무를 달성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생활보장을 하여 준다는 것을 강조함, 경기도 개성시 (상세 주소 생략) 공소외 9(21세, 고려인민학교 교원)'이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사실, 한편 피고인의 형 공소외 15는 그 무렵 속초에 있는 첩보부대 지구대 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 지구대장이 공소외 15의 사촌매형인 공소외 17이었던 사실, 피고인이 원주에서 조사를 받고있는 것을 알게 된 공소외 15는 피고인을 면회한 후 공소외 17에게 선처를 부탁하였고 이에 공소외 17은 공소외 15와 함께 부하직원을 보내어 수사관계자를 만나보고 변호인을 면담한 다음 첩보부대장 명의로 피고인의 신원을 책임지겠다는 내용의 서류를 만들어 주기로 한 사실, 결국 피고인은 1954. 8. 23. 춘천지방법원에서 '1950. 8.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민주청년동맹에 그 정을 알면서 가입하고, 1954. 2.부터 4.까지 대남공작책임자 공소외 18로부터 장래 인민공화국이 승리한다는 설명을 듣고 남하하여 반공청년을 가장하고 괴뢰집단을 위하여 동지를 획득할 것을 동인과 협의하였다.'는 국가보안법위반의 범죄사실이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소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위 인정 사실에 의하면, 공소외 8이 진술한 '개성 출신, 교원으로 근무하던 공소외 9의 남편, 전쟁 중 한쪽 눈을 잃은 영예군인, 1950년대 초반에 간첩으로 남파된 자'가 곧 피고인이라고 보아도 그것이 무리한 억측으로 여겨지지는 아니하고, 달리 위와 같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 공소외 9의 남편'이 따로 존재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피고인의 애인'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공소외 9로서는 피고인이 남파된 후인 1956년 무렵에 북한 당국으로부터 위 (1)의 (다)항과 같이 남파간첩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물질적 대우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 그러나 공소외 8의 진술 중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특히 ' 공소외 9가 1980년경까지 혁명가 가족으로서의 대우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편이 남한에서 계속 활동중인 것으로 확신한다.'는 부분은 동인의 진술 자체 또는 다른 증거들에 나타나는 아래와 같은 사정들에 비추어 볼 때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① 피고인을 남파간첩으로 특정하게 된 주요한 요소 중 하나인 피고인의 형들의 신분 및 1954년 당시 피고인의 석방과정에 관하여 공소외 8은 "남파되었다가 붙들렸으나 남한에서 국군중령인가 대령으로 있는 형이 자기 동생의 신원을 보증할 테니 내달라고 하고 보증을 서서 빠져나와 무사히 활동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으나(수사기록 192면 진술조서), 동인이 작성한 자술서에는 이에 관하여 아무런 내용도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또 원심 법정에서는 "첩보대에 있는 사람이 힘을 써서 석방되었다."고만 진술하였다(공판기록 276면). 그런데 당심에 이르러서는 " 공소외 9의 남편이 남쪽에 와서 붙잡혔다가 풀려났다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누가 이야기를 하여 들은 듯하며 북쪽에서 들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가 계속 추궁을 받자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을 할 수 없다."고 진술을 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소외 8의 진술 내용, 특히 진술조서를 작성할 때부터의 진술 부분에는 자신이 북한에 있을 때 들은 내용과 남한에 온 뒤 이 사건 조사과정에 관여하면서 수사관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내용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② 공소외 9가 혁명가 가족으로서 받은 물질적 대우와 관련된 공소외 8의 진술은 " 공소외 9가 개성 선죽중학교에서 1956~1965년 기간 근무하였는데 그 당시 월급은 교원으로서 70원이었고 혁명가 가족생활수당으로서 100원을 매월 중앙당으로부터 지급받았다."(수사기록 165- 166면 자술서), "1956. 10.부터 1960. 4.까지 개성 제1중학교 교원으로 재직중 공소외 9는 학교를 통하여 자기 월급 30원 외 혁명가 가족으로서 월 50원을 지급받고 있었다."(수사기록 198면 진술조서), 또는 "당시 교원의 월급이 70원이었는데 공소외 9는 특별수당격인 30원을 추가 100원을 받았다."(공판기록 276면)는 것으로서 그 진술 내용이 일관되지 아니하며, 언제까지 그러한 대우를 받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더구나 자술서 첫부분에는 "1968. 12. (대남공작원으로) 소환 후 1975. 4.까지 개성에 가족이 살고 있었으므로 6개월에 한번씩 휴가를 나와 개성에서 선죽중학교 교장 공소외 19과 교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사실이 있는데 본인이 선죽중학교 민청지도원으로 근무 당시 인민반 4학년 담임이었던 공소외 9의 남편이 1954년경 간첩으로 남파되어 혁명가 가족 대우를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내용을 정보기관에 제보하였다."(수사기록 153-154면)고 기재되어 있고, 2004. 2. 23. 이 법원에 제출한 증인불출석사유신고서에는 "1970년대 북한에서 개성 모 중학교에 근무 당시, 교장과의 대화 과정, 그는 말하기를 '본교 교원 공소외 9의 남편이 눈 하나가 없는 애꾸눈인데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됐다.'면서 그가 또한 정전위원회에 근무한 바도 있다고 말하였음"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과연 공소외 8이 1956년경 공소외 9를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부터 공소외 9가 남파간첩의 아내이고 그와 관련하여 우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여 알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③ 또 공소외 8은 1961년 또는 1962년경 공소외 9로부터 얼마 전에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이 와서 자신이 어머니 등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그것은 남한에 거주중인 공소외 9의 남편과 다른 사람을 접선시키는데 필요한 증거로 사용할 목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진술(수사기록 205면, 공판기록 278면)하였음에 반하여, 위 2004. 2. 23.자 증인불출석사유신고서에는 " 공소외 9와 대화에서 '연락부 지도원이 언니와 형부의 사진을 가져간 바 있다.'고 실토한 바도 있음"이라고 기재하였고, 당심 증언에서도 " 공소외 9가 '형부가 남한에 있는데 자기 집에 있는 언니와 형부의 사진을 가지고 나갔다.'고 하였으며 원심 및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가족사진도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진술을 완전히 번복하고 있다.

④ 1963년 겨울 공소외 9의 남동생 결혼식과 관련된 진술을 보면, 처음에는 " 공소외 9의 남동생 결혼식에 초대되어 가정 방문시 공소외 9의 이야기가 당중앙에서 동생 결혼비를 부담하였다고 하면서 감사함을 표명한 바 있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수사기록 160면 자술서)는 것이었으나 그 후 " 공소외 9의 집에서 있은 그의 남동생 결혼식에는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이 참석하고 결혼비용 등을 당의 명의로 부담한 사실 등이 있다."(수사기록 199면 진술조서), "남동생 결혼시 비용 등을 당이 직접 들여 주선했다."(공판기록 276면)라고 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정적인 진술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당시 공소외 9의 남편이 남파간첩으로 활동중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공소외 8은 이 부분에 대하여 당심에서는 "오래된 일이라 공소외 9의 남동생 결혼식에 참석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⑤ 1964. 5.경 공소외 9 가족의 강제이주명령과 관련하여 공소외 8은 자신이 직접 공소외 9로부터 그러한 사정을 듣고 개성시당 조직부에 연락하여 혁명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주명령이 취소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한 바 있으나, 그 구체적인 정황에 관해서는 "본인이 학교에 출근하는데 공소외 9와 만나게 되어 함께 가며 말하기를 개성시 안전부 지시로 아버지의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이주명령을 받고 이삿짐을 싸놓고 대기중이라면서 '지도원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눈물 흘리며 말하기에 본인은 당에 보고해 보겠으니 결론을 받아 행동하라고 말하고 개성시당 조직부 대남가족 담당 부부장에게 전화로 이상 내용을 보고했더니······"(수사기록 161~162면 자술서)라고 하거나 "학교에 나가자 공소외 9가 지도원실로 찾아와서 개성시 사회안전국에서 부친이 성분불순으로 처단되었으므로 가족은 이주명령이 내려 짐을 싸놓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기에 나는 즉석에서 전화로 개성시당 조직부에 내려와 있는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에게 공소외 9는 혁명가 가족인데 왜 이주시켜야 하느냐고 문의하자······"(수사기록 193~194면 진술조서)라고 하여 다소 다른 취지의 진술을 하였고, 원심 법정에서는 "부의 성분 때문에 자강도 이주명령을 받았는데 중앙당 지시로 취소된 바 있다."(공판기록 276면)라고만 진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당심에서의 진술은 그 내용이 전혀 다른바, 즉 "부의 성분 때문에 자강도 이주명령을 받았는데 중앙당 지시로 취소된 바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종종 그런 예는 있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로 간다고 그런 것을 이야기 한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하였고, 또 "이주명령에 관한 내용은 모두 기록이 되어 있어 조직책임자였던 증인이 알게 된 것이다. 공소외 9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한 기억은 없다. 이주명령을 증인이 노력하고 나서서 취소를 시켜준 적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위와 같은 종전의 진술은 그 신빙성이 극히 의심스럽다.

⑥ 끝으로 1978. 8.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으로부터 " 공소외 9의 남편은 남에서 잘 싸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부분에 관하여 보건대, 자술서와 진술조서에 기재된 이 부분 진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그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경위가 사뭇 다르다.

"휴식시간에 지도원에게 '나는 집이 개성인데 휴가로 집에 갔더니 나와 과거에 같이 학교에서 일하던 왕 교장이 집에 놀러와 대화 중 공작원 가족인 공소외 9 교원이 자기 시동생과 부화사건으로 아이를 분만하게 되어 이주시켰다고 하더라'고 하자 지도원은 나에게 ' 공소외 9를 어떻게 아는가'라고 하여 '나와 함께 개성 선죽중학교에 같이 있었다.'고 하니 지도원은 '아, 나는 그런 줄 몰랐다.'라고 하기에 나는 다시 '지도원 동무는 어떻게 공소외 9를 아는가'라고 하니 '내가 담당했기 때문에 잘 안다. 공소외 9는 재주가 좋아 글도 잘 쓰고 문장력도 있기 때문에 중앙당에서 몇 번 데려다가 남파 공작원의 가족에게 무료 배포되는 월간 잡지 <혁명가의 아내>에 여러 번 글을 써서 투고한 바 있다. 원래 모범가족이며 남편도 지금 남에서 일 잘하고 있다.'고 하였고, 계속하여 '지난번 공소외 9의 부화 사건이 중앙당에 보고되었는데 당중앙에서는 그가 혁명가 가족이며 또한 아이도 없이 혼자 늙는 것을 고려하여 처벌치 않기로 하고 공소외 9를 위해 평남도 증산군 한천의 모 중학으로 전직시켰다.'고 하였다"(수사기록 163~165면 자술서).

"지도원에게 '나는 집이 개성인데 선죽중학교에 있을 때 여교원 하나가 부화사건으로 쫓겨난 일이 있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고 하자 지도원은 '그것이 공소외 9가 아니냐'고 하기에 '그렇다'고 하자 ' 공소외 9의 남편은 남에서 투쟁하고 있으며 그의 가족은 우리 가족으로서 내가 담당하고 있는데 공소외 9는 재주가 좋아서 붓글씨를 잘 쓰고 문장력이 좋아서 중앙당에서도 몇 번 데려다가 일을 시켰고, 개성에서 중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부화사건이 있어 중앙당에서 보고를 받고 처벌하려고 하였으나 혁명가 가족이기 때문에 처벌을 하지 못하고 평안남도 증산군 한천중학교로 전근시켜서 계속 보호를 하고 있으며, 공소외 9의 남편은 남에서 잘 싸우고 있다.'는 등의 말을 들은 일이 있다"(수사기록 195~197면 진술조서).

뿐만 아니라 ① 공소외 8은 당심에서 "1978. 8.경 중앙당 연락부 장지도원이 공소외 9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공소외 9의 근황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지도원이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요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대남공작을 하는 중앙당 연락부 지도원이 지방학교 선생에 불과한 공소외 9에 대하여 물어보는 것을 보고 추측한바 ' 공소외 9의 남편이 공작원으로 나간 것이 확실하구나, 전에 교장이 이야기 한 것이 틀림없구나'라고 확인하게 된 것일 뿐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진술의 번복은 단순히 오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기억이 흐려졌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② 공소외 9가 자기 시동생과 부화(간통)하였다는 것은 피고인에게 남동생이 없다는 사실(변호인이 제출한 증 제7-1 내지 4호증 각 제적등본 및 호적등본)과 맞지 않으며, ③ 피고인의 자백 및 이에 따른 공소사실에 의하더라도 피고인은 1968년 이후 북한과 연락한 사실이 없는데 그로부터 10년이 경과한 후 북한의 대남공작 담당 지도원이 피고인에 대하여 "남에서 잘 싸우고 있다."고 하였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3) 이상의 사정을 종합하면, 위 (2)의 (가)항에서 본 바와 같이 공소외 8의 진술이 전적으로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 공소외 9가 1960년대 이후 1980년경까지도 남파간첩 가족으로서의 대우와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진술 부분{그 중 "1980년 검거될 때까지 공소외 9가 보호되고 있었다."(공판기록 277면)라는 진술의 근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다}에는 공소외 8이 북한에 있을 때 공소외 9의 남편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내용, 남파간첩의 가족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일반적인 우대 현황, 남한에 와서 피고인에 대한 수사과정에 관여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사항 등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른 진술의 모호함 내지 진술들간의 불일치, 객관적인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의 존재, 당심에 이르러서의 전반적인 진술 번복 등에 비추어 볼 때 결국 위와 같은 공소외 8의 진술 부분은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마. 그 밖의 참고인 진술 등

앞서 본 공소외 8의 진술 이외에 원심이 증거의 요지로 들고 있는 참고인들의 진술로는 원심 증인 공소외 2의 진술, 원심 제5차 공판조서 중 증인 최희보, 공소외 3, 공소외 4, 공소외 5, 공소외 6, 공소외 7의 각 진술기재, 사법경찰관 사무취급 작성의 공소외 15, 공소외 16, 공소외 21, 공소외 22, 20, 공소외 3, 공소외 4, 공소외 2, 공소외 5, 공소외 6, 공소외 23, 공소외 7에 대한 각 진술조서의 진술기재, 공소외 15, 공소외 16, 공소외 21, 공소외 22, 20, 공소외 3, 공소외 4, 공소외 2, 공소외 5, 공소외 6, 공소외 23, 공소외 7 작성의 각 진술서의 진술기재가 있고, 한편 재심개시결정 전 당심에 제출된 증거로는 제3, 5, 6차 각 공판조서 중 증인 공소외 1의 각 진술기재와 상공부장관 작성의 1983. 12. 15.자 사실조회회보의 기재가 있으므로, 이에 관하여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공소외 1의 진술은 이 사건 수사과정에 관한 진술에 불과하여 피고인에 대한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재심대상판결에 대한 상고심 판결, 더구나 위 다.의 (2)항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진술 중 '피고인을 고문한 사실이 없다.'는 부분은 위증에 해당함이 이미 밝혀졌다}.

(2) 공소외 15(피고인의 형), 공소외 16( 공소외 15의 처), 공소외 24( 공소외 16의 고모)의 각 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동인들의 진술에 사법경찰관 작성의 수사보고(수사기록 1416면)의 기재를 종합하면, 피고인은 1955. 10.~11.경 이중간첩 공소외 25( 공소외 16의 아버지로서 개성과 강화를 왕래하며 장사를 하던 자인바 남한과 북한 양측으로부터 공작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가 서울에 있는 자신의 동생 공소외 24의 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동인을 찾아가 만난 사실은 인정되나, 위 공소외 25는 피고인이 남파되기 전 개성에 살고 있을 때 피고인에게 남하한 가족들의 소식을 알려준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과 동거하였던 공소외 9의 소식도 알고 있고 공소외 9가 피고인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까닭에 피고인을 만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편 공소외 25가 서울에 체류하고 있을 때에는 강화경찰서의 대공담당 형사들이 항상 동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 비추어보면, 위와 같이 공소외 25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피고인이 위장귀순한 후 북한의 지령을 받으면서 간첩활동을 계속하였다고 인정하기는 어려우며, 달리 공소장에 기재된 것처럼 피고인이 그 당시 공소외 25로부터 과업지령을 받고 공작금을 수수하였다거나 그 밖의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만한 부분이 동인들의 진술에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3) 공소외 21(피고인의 누나), 공소외 22(피고인의 전처)의 진술에도 피고인이 남파간첩으로서 계속 활동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며, 다만 공소외 22에 대한 진술조서 및 동녀 작성의 진술서에는 '1966. 11.경부터 공소외 26의 집에 세들어 살 때 피고인이 라디오를 사가지고 왔다.'는 부분이 있어 피고인이 라디오를 이용하여 북한방송의 전문을 수신하였다는 공소장 기재 사실에 부합하는 듯하나, 이러한 진술 부분은 '피고인이 공소외 26의 집으로 이사하기 전인 1966. 11. 1.경 공소외 27의 셋방에서 라디오를 이용하여 북한의 지령을 수신하였다.'는 공소장 기재와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소외 22이 원심 법정에 출석하여 '피고인과의 결혼생활 동안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고, 만약 있었다고 하더라도 단칸방에서 자신이 모르게 수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사기관에서의 진술 중 라디오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는 이상 위와 같은 진술기재 부분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4) 그 외에 20, 공소외 3, 공소외 4, 공소외 2, 공소외 5, 공소외 6, 공소외 23, 공소외 7의 각 진술은 피고인이 군사기밀을 탐지·수집하였다고 할 때의 상황 및 행동 또는 피고인과 만난 자리에서 피고인으로부터 들었던 말에 관한 것인바, 동인들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진술들은 피고인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그러한 행동이나 말을 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는 되지 아니한다. 더구나 이 법원에 제출된 공소외 28, 공소외 4, 공소외 6, 공소외 23 작성의 각 사실확인서(변호인이 제출한 증 제3-1 내지 4호증)의 기재에 의하면, 동인들은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로부터 피고인의 자백에 부합하는 진술을 강요당하였다는 것인바, 위 공소외 15, 공소외 24도 재심개시결정 전 당심에서 비슷한 취지로 진술한 바 있으며,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에 대한 가혹한 고문이 행해지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동인들을 포함한 이 사건 참고인들의 진술은 그 임의성조차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 끝으로 상공부장관 작성의 1983. 12. 15.자 사실조회회보의 내용은 1950년대에 비닐(공소장 기재에 따르면, 1954년 피고인이 남파될 때 이미 무인포스트를 이용한 연락방법 약정에 비닐이 언급되었다는 것임)의 국내 수입 및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것으로서, 그것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되기에 부족하다.

바. 공소사실의 인정 여부

결국, 검사가 제출한 모든 증거를 종합해보아도 이 사건 공소사실의 모두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 전제사실, 즉 피고인이 1954년 남파되어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처벌받은 후에도 계속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지령을 받는 공작원'으로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여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덧붙여, 피고인이 군사기밀을 탐지·수집하고 허위사실을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였다는 공소사실의 구체적인 행위 내용을 살펴보아도, 단순히 군사시설 주변을 지나가게 되는 일반인들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거나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이상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탐지행위가 있었다거나 고향친구들 또는 사업상 관계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대화 중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를 넘어 북한을 찬양하거나 허위사실 유포 또는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어느 모로 보나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공소사실 제4항의 "피고인이 1978. 6. 중순 공소외 4에게 '이대로 가다가는 조그마한 공장은 다 쓰러지고 만다. 정부에서는 서민층이나 중소기업을 육성한다고 말로만 하고 있다. 큰 회사들은 빽 좋은 사람들과 손잡고 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어 잘사는 사람은 더욱 잘살고 없는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된다. 하루빨리 썩은 정치가는 물러나고 이들과 손잡고 치부하는 사람들은 없어져야 한다. 차라리 이북처럼 골고루 사는 사회가 오히려 낫다'라고 말하여 북괴의 대남선전활동을 찬양하였다."는 구 반공법(1980. 12. 31. 법률 제3318호 국가보안법 부칙 제2조로 폐지되기 전의 것)위반의 점은 피고인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대남간첩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범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에 관하여 살피건대, 위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로는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사법경찰관 사무취급 작성의 공소외 4에 대한 진술조서 및 공소외 4 작성의 진술서의 각 진술기재가 있으나, 위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의 자백은 임의성이 없는 것이어서 유죄의 증거로 할 수 없음은 앞서 본 바와 같고, 공소외 4는 원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차라리 이북처럼 골고루 사는 사회가 좋다."는 말은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어 이에 반하는 위 진술조서 및 진술서의 각 진술기재 부분은 그대로 믿기 어려우며, 위와 같은 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만으로는 구 반공법 제4조 제1항 소정의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모두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는 증거에 의하여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하고 말았으니, 이 점을 지적하는 피고인 및 변호인의 항소논지는 이유 있다.

4. 결 론

그렇다면 피고인의 항소는 이유 있으므로, 피고인과 검사의 양형부당 항소이유에 대하여 나아가 판단할 것도 없이 형사소송법 제364조 제6항 에 의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변론을 거쳐 다시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은 별지 기재와 같은바, 제3항에서 본 바와 같이 이는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판사 이호원(재판장) 김관중 엄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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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급 사건
-서울형사지방법원 1983.9.29.선고 83고합531
-서울고등법원 1984.1.30.선고 83노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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