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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2006. 2. 14. 선고 2005나27906 판결
[손해배상(기)] 상고[각공2006.4.10.(32),1008]
판시사항

[1] 중앙정보부 청사에서 발생한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과 관련하여 그 유족들이 국가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이 최 교수를 불법구금하고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하여 최 교수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사망 원인에 대한 진상을 은폐하고, 나아가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조작, 발표함으로써 최 교수와 최 교수의 유족들인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판단하여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사례

[2] 소멸시효가 진행하지 않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의 의미

[3] 국가가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 시행함으로써 의문사 및 민주화 운동 관련자의 국가배상청구에 대한 소멸시효의 이익을 포기한 것인지 여부(소극)

[4]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에 관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의 은폐·조작행위로 인하여 최 교수의 유족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에 불과할 뿐, 불법행위가 계속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한 사례

[5] 30여 년 전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에 의하여 발생한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에 관하여 그 유족들이 국가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유족들에게 그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정이 있었거나 소멸시효를 인정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으므로,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1] 중앙정보부 청사에서 발생한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과 관련하여 그 유족들이 국가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이 최 교수를 불법구금하고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하여 최 교수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사망 원인에 대한 진상을 은폐하고, 나아가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조작, 발표함으로써 최 교수와 최 교수의 유족들인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판단하여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사례.

[2] 소멸시효는 객관적으로 권리가 발생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기간 동안은 진행하지 않는 것이나, 여기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라 함은 그 권리행사에 법률상의 장애사유, 예컨대 기간이 도래하지 않거나 조건이 성취되지 않는 등의 사유가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단순한 사실상 장애사유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3]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발생된 각종 의문사 사건 등의 진상을 파악하여 불법행위자를 처벌하고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명예회복 및 보상의 절차와 방법을 규정하고 있기는 하나, 이는 국가의 손해배상의무 이행에 갈음하여 피해자들을 위하여 법정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으로서, 이것만으로는 대한민국이 그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상 손해배상채무의 시효이익까지 포기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4]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에 관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의 은폐·조작행위로 인하여 최 교수의 유족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에 불과할 뿐, 불법행위가 계속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한 사례.

[5] 30여 년 전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에 의하여 발생한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에 관하여 그 유족들이 국가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유족들에게 그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정이 있었거나 소멸시효를 인정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으므로,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한 사례.

참조판결
원고, 항소인 겸 피항소인, 부대항소인

원고 1외 7인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지평 담당변호사 조용환외 1인)

피고, 피항소인

대한민국

피고, 항소인, 부대피항소인

피고 2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하나 담당변호사 최종우)

변론종결

2005. 10. 25.

주문

1. 제1심판결 중 피고 대한민국에 대하여 아래에서 지급을 명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 1에게 659,034,934원, 원고 2에게 519,678,311원, 원고 3에게 419,678,311원, 원고 4, 5, 6, 7, 8에게 각 5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1973. 10. 19.부터 2006. 2. 14.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2. 원고들의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나머지 항소와 피고 2에 대한 부대항소 및 피고 2의 항소를 각 기각한다.

3. 소송 총비용 중 원고들과 피고 대한민국 사이에 생긴 부분의 50%는 원고들이, 나머지는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과 피고 2 사이에 생긴 부분의 90%는 원고들이, 나머지는 피고 2가 각 부담한다.

4. 제1항 중 금원지급을 명하는 부분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 항소취지 및 부대항소취지

1. 청구취지

가.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 2에게 1,942,144,384원, 원고 1에게 2,326,433,152원, 원고 3에게 1,442,144,384원, 나머지 원고들에게 각 20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1973. 10. 19.부터 2003. 5. 31.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나. 피고 2는 원고 2, 1, 3에게 각 100,000,000원, 나머지 원고들에게 각 4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2002. 2. 20.부터 2003. 5. 31.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2. 항소취지

가. 원고들 : 제1심판결을 취소한다.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 2에게 1,500,000,000원, 원고 1, 3에게 각 1,000,000,000원, 나머지 원고들에게 각 10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1973. 10. 19.부터 2003. 5. 31.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나. 피고 2 : 제1심판결 중 피고 2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그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 청구를 기각한다.

3. 부대항소취지

제1심판결 중 피고 2에 대하여 아래에서 지급을 명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2는 원고 2, 1, 3에게 각 45,000,000원, 나머지 원고들에게 각 9,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2002. 2. 20.부터 2003. 5. 31.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이유

1. 기초 사실

다음 각 사실은 갑1호증 내지 갑4호증, 갑6호증 내지 갑20호증의 각 기재(각 가지번호 포함), 제1심 증인 소외 1, 2, 3의 각 증언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된다.

가. 최종길의 약력 및 원고들의 지위

(1) 최종길은 1931. 4. 28. 출생하여 1951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 3.경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스위스 취리히대학을 거쳐 1958. 4.경 독일 쾰른대학으로 옮겨 1961. 9.경 그 곳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 그 후에는 쾰른대학 부설 국제사법 및 외국사법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1962. 8.경 귀국하여 1962. 9.경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1964. 5. 15.경 위 대학의 민법교수로 임명받았다.

(3) 1967. 8.경부터 1969. 8.경까지는 위 대학 학생과장으로 재직하였고, 1970. 3.부터 1972. 3.경까지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방문교수로 체류하였으며, 그 후 서울대학교에 복귀하여 계속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이하 ‘중앙정보부’라고 한다)로부터 소환을 받고 조사를 받던 중 1973. 10. 19.경 사망하였다.

(4) 원고 2는 최종길의 처로서 최종길의 사망 당시 37세였고, 원고 1은 최종길의 아들로서 당시 9세, 원고 3은 최종길의 딸로서 당시 6세였으며, 나머지 원고들은 최종길의 형제, 자매들이다.

나. 중앙정보부에서 최종길을 조사하게 된 경위

(1) 1971.경 중앙정보부의 제5국 공작과 소속 수사관으로 근무하던 피고 2는, 자신이 간첩 혐의를 두고 조사하고 있던 소외 4로부터 당시 유럽 유학생들을 포섭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네덜란드 체류 간첩 소외 5가 최종길과 고등학교 동창으로서 최종길의 스위스 및 독일 유학 중에 절친하게 지냈다는 정보를 입수한 다음, 최종길에 관한 자료를 만들어 이를 보존하고 있었는데, 1973. 10.경에 이르자 중앙정보부는 피고 2에게 최종길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도록 명하였다.

(2) 위와 같이 하여 피고 2가 최종길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였는데, 그 무렵까지 중앙정보부에서는 위 소외 4의 제보 이외에는 최종길이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것에 관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었다.

다. 최종길의 중앙정보부 출석 및 그에 대한 조사

(1) 중앙정보부는 위와 같이 5국 공작과(10과)로 하여금 최종길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게 하고,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최종길의 동생 원고 7을 통하여 최종길로 하여금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에 출석하도록 하였다.

(2) 최종길은 원고 7과 함께 1973. 10. 16. 14:00경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에 출석하였는데,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구속영장 등을 발부받지 않은 채 그 무렵부터 같은 달 18. 혹은 19.경까지 최종길을 위 청사에 구금하여 수사를 계속하였다.

(3) 당시 최종길에 대한 주무 수사관은 피고 2었고, 참여 수사관은 소외 6이었다가 같은 달 18. 저녁 무렵 소외 7로 교체되었다.

(4) 피고 2는 위 청사 지하 26호실에 최종길을 구금한 상태에서 진술서를 반복하여 쓰게 하고, 진술의 내용이 앞의 진술 내용과 다른 부분을 중심으로 추궁하였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같은 달 17.경에는 최종길의 주택에서 소외 5가 최종길에게 보낸 편지와 프랑스 파리를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소외 8의 주소가 기재된 수첩을 압수하여 왔고, 이를 기초로 최종길의 독일 유학 당시 소외 8과 소외 5와의 관계에 관하여 더욱 강도 높게 추궁하였다.

(5) 최종길은 위와 같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 같은 달 18. 자정 무렵 또는 같은 달 19. 새벽 1시 40분경 사망하였다.

라. 중앙정보부 감찰실의 최종길 사망사건에 대한 감찰조사

(1) 최종길 사망 직후인 1973. 10. 20. 중앙정보부 감찰실은 5국 공작과에 대하여 최종길의 사망경위에 관한 감찰조사를 하였고, 그 조사 과정에서 5국 국장 소외 9, 5국 수사단장 소외 10, 5국 공작과장 소외 3, 5국 공작과 1계장 소외 11, 주무 수사관 피고 2, 참여 수사관 소외 7 등을 상대로 진술을 들었는데, 그들이 진술한 내용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그러나 그 감찰 조사 결과가 기록된 문서는 국가정보원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존안기록을 송부하기 전까지는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아니하였다).

(가) 피고 2가 최종길을 위 청사 지하 26호실에서 조사하였으나, 최종길은 처음에는 자신과 소외 5나 소외 8과의 관계, 동베를린에 다녀 온 사실 등을 모두 부인하였다.

(나) 이에 조사환경을 바꾸어 설득할 목적으로, 같은 달 18. 오전 무렵 7층 합동신문실로 장소를 옮긴 다음 휴식을 취하게 한 후 18:00경부터 다시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그때부터 최종길은 유학기간 중 소외 5와 소외 8을 만난 적이 있고, 동베를린에 다녀 온 사실이 있다고 자백하였다.

(다) 그러던 중 같은 달 19. 01:40경 최종길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므로 참여 수사관 소외 7이 최종길을 데리고 7층 화장실에 갔는데, 최종길이 용변을 본 후 변기에 2~3회 구토를 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소외 7이 고개를 돌린 사이에 최종길은 그곳 소변기를 딛고 창문턱 위로 올라서서 몸을 창문 밖으로 빼고 양손으로 벽을 잡은 상태로 있었다.

(라) 나중에 최종길이 창문턱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한 소외 7이 최종길의 발목을 잡고 내려오라고 설득하였으나, 최종길이 “놓지 않으면 뛰어 내리겠다.”고 하므로, 당황한 소외 7이 발목을 놓고 피고 2와 경비원을 소리쳐 불렀는데, 이에 피고 2가 달려 와 그 현장을 목격하고 최종길에게, 가족을 생각하라고 설득하면서 다가갈 즈음에, 최종길이 갑자기 밖으로 뛰어 내렸고, 즉시 피고 2와 소외 7이 내려가 보았으나 이미 최종길은 사망한 상태이었다.

(2) 위 감찰조사에서 피고 2는 특히, 최종길을 고문하였는지 여부를 묻는 감찰실 조사관의 질문에 대하여, “17일 밤 10시경 지하 조사실에서 최종길로 하여금 벽에 등을 대고 무릎을 반쯤 구부리도록 해서 세워 놓기도 하고, 발로 양쪽 엉덩이를 몇 회 걷어찬 일도 있으며, 야전침대의 몽둥이를 무릎 사이에 끼워 꿇어 놓는 방법으로 고문을 하였다.”고 답변하였다.

(3) 그리고 피고 2를 비롯한 수사관들은, 최종길이 수사과정에서 평양에 다녀왔다거나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취지의 자백을 하였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지 아니하였다.

(4) 중앙정보부는 위와 같은 감찰 조사 결과를 토대로 피고 2와 소외 7을 징계위원회에 부쳐, 피고 2에 대하여는 견책, 소외 7에 대하여는 1개월 감봉처분을 하였다.

마. 중앙정보부의 사건 서류 조작

그 후 중앙정보부에서는 소외 10, 3, 피고 2 등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최종길이 사망할 때까지 수사와 관련하여 작성한 서류는 피고 2가 신문과정에서 작성한 A4용지 2~3장 분량의 간단한 메모에 불과하고 다른 수사서류를 전혀 작성하지 아니한 사실이 그대로 발표될 경우 외부로부터 불법수사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종길의 사망원인이나 경위에 관하여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될 우려가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고, 이에 수사관련 서류 일체를 조작하기로 결정한 다음, ‘국가보안법위반 피의사건 인지 동행 보고서’, ‘긴급구속장’, ‘압수조서’ 등을 작성하고, 조사자가 피고 2로 되어 있는 ‘피의자신문조서’도 작성하였는바,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국가보안법위반 피의사건 인지 동행 보고서’에는 “네덜란드 거점 간첩 소외 5와 연계 혐의가 있는 최종길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 피의 사건을 인지하여, 1973. 10. 17. 10:00경 임의동행의 형식으로 최종길을 중앙정보부 청사에 인치하였다.”고 기재하고, ‘긴급구속장’에는 구속·인치 일시를 1973. 10. 17. 10:00로, 구속·인치장소를 중앙정보부로 기재하였다.

(2) ‘압수조서’에는 “1973. 10. 17. 13:00경 최종길로부터 유학기간 중 지인들의 이름 및 주소 등이 기록되어 있는 수첩이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로부터 가정부에게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찾아가면 집을 살펴볼 수 있도록 협조해 주라는 쪽지를 써달라고 하여 그 쪽지를 받아 최종길의 자택을 수색한 결과,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동한 북한 공작책 소외 8의 주소가 기록되어 있는 수첩 및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활동한 공작책 소외 5 앞으로 최종길이 쓴 편지가 발견되어 이를 압수하였다.”고 기재하였다.

(3) ‘피의자신문조서’는 당시 간첩혐의를 받던 다른 유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내용을 각색하여 작성하였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가) 최종길은 1958. 1.경 프랑스 파리를 방문, 그곳 대학에서 유학생들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해 주는 방법 등으로 유학생들을 포섭하여 간첩활동을 하고 있는 소외 8을 만나, 그로부터 북한의 발전상을 듣고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간행물을 받아보면서 그의 노선에 동조하였다.

(나) 1958. 10. 하순경 소외 8과 함께 동베를린에 도착, 그 곳 소재 아파트에서 약 10일간 체류하면서 북한 공작책임자 소외 12 등으로부터 북한체제 등에 대한 교육을 받는 한편, 유학생을 포섭하여 동베를린으로 데리고 오라는 지령을 받고, 여비로 미화 300달러를 받고 돌아왔다.

(다) 1960. 5.경 동베를린을 출발, 모스크바와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17일간 체류하면서, 노동당에 입당하고 주체사상 등의 교육을 받았으며, 한국에 귀국한 후 대학교 내에 침투하여 학생들에게 반정부 의식을 고취시켜 데모를 선동하는 등으로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제자를 포섭하여 제3국을 통하여 월북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왔다.

(라) 최종길은 위와 같이 진술한 다음 담배 2대를 연거푸 피우다, 1973. 10. 19. 01:30경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므로 소외 7로 하여금 함께 다녀오게 하였는데, 용변을 마친 최종길이 화장실 유리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내려 사망함으로써 조서 작성을 중지하였다.

바. 사건 송치 및 종결

(1) 중앙정보부는 앞서 조작한 서류와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외 13 명의의 ‘사체인수증’, 1973. 10. 19. 04:30경 최종길 투신 현장을 검증하였다는 사법경찰관 수사관 소외 14 작성의 ‘현장검증조서’(이 역시 직접 현장검증을 하고 작성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소외 10, 피고 2 등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근거로 하였다), ‘수사보고’, ‘검거보고’, ‘신문보도안’ 등을 작성한 다음, 1973. 10. 22. 최종길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간첩 등의 죄명으로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사건을 송치하였다.

(2) 위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방검찰청은 1973. 11. 23. ‘피의자 사망으로 인하여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처리하였다.

사. 중앙정보부의 기자회견 및 발표

(1) 중앙정보부는 위와 같이 검찰에 사건을 송치한 다음, 1973. 10. 25. 유럽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고 하면서, 신문사 기자 17명, 통신사 기자 6명, 방송사 기자 14명, 외신기자 5명, 대한뉴스기자 2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개최하였고, 이 때 “구라파 거점 학원침투 거물간첩 검거”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는데, 최종길의 자살동기와 경위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하여는, “최종길이 초기에는 일절 부인하다가 가택 수색에서 압수한 수첩 등에 의하여 모든 것을 자백하고 소변을 빙자,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하였다.”고 답변하였다.

(2) 당시 중앙정보부가 최종길 교수와 관련하여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 전문은 아래와 같다.

“중앙정보부에서는 화란을 거점으로 한 간첩단 수사과정에서 동백림을 경유 입북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 학원에 침투·암약 중이던 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최종길(42세)을 지난 10. 17. 검거한 사실이 밝혀졌다.

중앙정보부에 의하면, 본적을 경기도 (상세 주소 생략)에 두고 현재 서울 (상세 주소 생략)에 거주하는 최종길은 1951. 9. 본적지인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교)를 졸업, 1957. 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거쳐 동대 대학원 법률학과를 수료하고 동년 4월에 출국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1년간 수료 후 1958. 4. 서독으로 건너가서 쾰른대학 법과에 입학 연수, 1961. 2. 동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획득, 1962. 6. 동교를 수료하고 동년 8월에 귀국하여 서울법대 강사로 침투 합법토대를 구축, 서울법대교수로 재직 중이던 자로서,

간첩 최종길은 도구(도구) 후 1957. 8. 인천중학교 동창이며 기히 북한공작원으로 활동하는 소외 8(43세)을 불란서 파리로 방문, 대화 도중 동인과 함께 한국 실정에 대한 비판을 노골화하면서 이에 은연중 동조하여 오던 중 1957. 11. 소외 8을 재차 방문시에 동인에게 포섭되어 1주일간에 걸쳐 동인으로부터 남한의 정세비판과 북한의 선전간행물인 ‘등대’, ‘회상기’, ‘빨치산투쟁대’, ‘김일성선집’ 등을 탐독하면서 사상교양과 북한의 발전상, 공산주의 우월성에 대한 교양을 받고 이에 감화되어 공산사상을 흠모하여 오다가 1958. 4. 지도원 소외 8의 지시로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서 서독 쾰른대학으로 전학 후 약 2개월 간에 걸쳐 전후 8차 접촉하면서 장차 남한에서의 혁명투쟁방법 등을 토의한 바 있고,

1958. 10. 하순경 지도원 소외 8의 안내로 항공편으로 쾰른을 출발 서백림에 도착, 그곳에서 택시로 동물원 옆에 있는 명미평 역에서 기동차를 이용하여 동백림에 도착, 그곳 주재 북한대사관에 연락, 성명 불상 북한대사관원의 안내로 승용차에 편승 동백림 소재 비밀아지트에 수용되어 동일 소외 8의 소개로 북한 대남 공작원 소외 12(당시 47세 가량), 담당지도원 유모(43세 가량) 등과 인사교환 후 최종길은 단신 아지트에 수용 약 10일간 유모 지도원으로부터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철학)’, ‘항일빨치산 회상기’, ‘맑스레닌주의 이론’, ‘노동신문’ 등을 통하여 자습형식으로 교양을 수한 후 북한영화 ‘건설상’ 등 문화영화 4편을 관람하고, 친지를 포함하여 포섭 대상자 32명의 명단을 제출하고 유학생을 동조자로 포섭할 것을 지령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300불과 안착신호용 그림엽서 1매를 받고 서독으로 복귀, 학업을 계속하면서 유학생들의 포섭을 시도하다가,

1960. 5. 동독 주재 북한공작원 소외 12의 지령에 의거, 상기 동일한 경로로 단독 동백림에 도착 비밀 아지트에 3일간 수용되어 1차 수용시 교양받은 내용의 사상교양을 재차 교습하여 오다가 유모 담당지도원과 함께 동독을 출발 이들과 모스크바, 북경 경유 입북 평양에 도착, 평양시 용성구역에 위치한 중앙당연락부 아지트에 안내되어 그곳에서 20일간 체류하면서 친지, 구라파 지역에 유학 중인 동료 교수 및 학생을 포함하여 포섭대상자 24명의 명단을 제출, 동 명단에 대한 개별부호를 부여받고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사회체제의 우월성, 김일성 항일투쟁사, 조국의 평화통일 방안, 주체사상 등의 사상교양과 A-3 수신 해득방법, 암서요령, 접선방법 등의 간첩교육을 받았으며, 장차 동조자를 포섭하여 정보기관 내에 공작거점을 설치하여 정보망을 조직, 귀국하면 서울대 내에 지하써클을 조직, 반정부 활동을 선동할 것, 학원 내에 동조자를 포섭, 정부기관 내에 침투 합법토대를 구축하라는 등의 지령과 공작금으로 미화 2,000불을 수수하여, 동년 6. 1. 항공편으로 동독 경유 서독으로 귀환 후 학업을 계속하면서 화란 소재 북한공작원인 소외 5, 불란서 주재 북한공작원 소외 8 등과 수시 서신으로 연락을 계속하면서 재구라파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수행하여 오다가, 1961. 11.경 서독 여인 ‘ 소외 15(25세)’와의 스캔들로 인하여 공작금을 위자료로 지불하여 공작금을 낭비하자 상기 소외 8로부터 혁명사상이 확고하지 못하다고 비판받은 사실이 있으며,

1962. 7. 쾰른대학교 부속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북한의 지령에 의해 1962. 8.경 국내에 잠입, 현재까지 서울법대 강사, 학생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북한의 A-3 지령을 전후 15회에 걸쳐 받은 후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의 학생데모 활동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국내 정세 및 학원동향정보 자료수집, 보고를 해왔는데, 이와 같은 사안보고는 1962. 8. 구라파에서 귀국 후 상부선인 지도원 소외 8로부터 약정된 음어에 의하여 불란서 파리 시내 빠빌롱 G동 안토니아파트 소외 16의 주소지를 편의주소로서 이용하에서 총 6회 대북보고, 북의 공작지령은 암기식 A-3 해득방법에 의해 지령사항을 받음,

최종길은 귀국하여 9년 후인 1970. 8. 3.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교환교수로 도미하게 됨을 계기로 서독에서 북한 공작지도원 소외 8과 재접선하라는 지령을 받고, 2년간 도미타가 72. 6. 하순경 구라파로 건너가 가족과 함께 약 1개월 간에 걸쳐 체독 중, 가족을 기만하면서 소외 8과 쾰른시내 명불상 호텔방에서 접선, 기간 중 공작보고 및 수집한 정보를 제공하고, 동인으로부터 여비조로 미화 700불을 수수, 동년 8. 28. 국내로 잠입한 활동사항을 자백하고, 국내 관련망 등 계속 여죄를 추궁받자,

“끊었던 담배를 7년 만에 피워 본다.”고 말하면서 연이어 두 가치를 피우고난 후 용변을 구실로 7층 화장실 창문을 통하여 투신자살하였음을 발표하면서, 국내 조직의 파괴로 초래되는 북당(북당)에 대한 사명감과 자신은 물론, 가족 친지 등에까지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남기게 됨을 비관 자살한 것을 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국내 관련 조직망에 대하여서는 계속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다. 끝”

(3) 위와 같은 보도자료 및 중앙정보부의 발표를 근거로 방송과 신문사들은 위 기자회견 당일 또는 그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25일 유럽을 거점으로 암약하던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아울러 최종길이 중앙정보부에서 간첩임을 자백, 여죄를 조사받던 중 화장실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을 덧붙여서 보도하였다.

아. 1988년 서울지방검찰청의 내사

(1) 진정서 접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1988. 10. 6. 서울지방검찰청에, 최종길 사망 사건과 관련된 중앙정보부 수사관 및 사망현장을 검증한 검사,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의사 등을 피진정인으로 하여, 피진정인들이 최종길을 고문하던 중 사망하게 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투신자살한 것이라고 조작하였다는 내용의 진정을 하였다.

(2) 내사 진행

당시 내사를 담당하였던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의 질문에 대하여 관련자들이 진술한 내용의 요점은 아래와 같다.

(가) 최종길의 사체를 부검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의사 소외 17은, “최종길은 두부, 흉부, 요부 및 좌우 상, 하지에 거대한 둔적 외력이 작용하여 심장이 파열되고 두개골 골절로 인한 출혈이 동반되어 사망한 것으로, 상당히 높은 건물에서 떨어질 경우 그와 같은 상처를 입고 사망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 밖에 전기적인 충격, 익사, 질식사 등으로 볼 수는 없고, 사망 후 외력이 작용한 흔적도 없으며, 양쪽 엉덩이에서 발견되는 주먹 크기 정도의 피하출혈반은 구타당한 것이 아니라 골반뼈가 부러지게 된 것과 동일한 충격으로 인하여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고 진술하였다.

(나)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5국 국장 소외 9, 수사단장 소외 10은, “최종길은 남산 분청사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18일 저녁 무렵에 독일 유학 당시 동베를린 및 평양을 방문, 그곳에서 북한 공작책으로부터 북한체제의 정당성 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고 자백하였고, 이에 최종길을 7층 신문실로 옮겨 조사하도록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당시 공작과장 소외 3과 주무 수사관 피고 2는, “최종길은 지하 조사실에서는 18일 저녁 때까지 동베를린에 다녀온 사실을 인정하였고, 7층 신문실로 옮긴 이후에 동베를린 및 평양에 가서 교육을 받고 노동당에도 입당하였다는 사실을 자백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다) 피고 2는 또, “최종길이 모스크바,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에 가서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 과장 등을 만났고, 17일 동안 용성구역에 있는 초대소에 수용되어 있으면서 이름을 모르는 지도원으로부터 교양을 받고, 노동당에도 입당하고 공작금을 받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사실이 있다고 자백을 했다.”고 진술하였다(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고 2는 후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최종길이 위와 같이 구체적인 사실을 진술한 적이 전혀 없는데, 1988년 검찰 조사 과정에서는 자신이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하였고, 이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라) 당시 소외 10, 9, 7, 피고 2 등은 “절대로 최종길에 대하여 고문을 한 사실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마) 당시 현장 검증조서를 작성하였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소외 14는, “19일 오전 8:30경에 출근하여 보니 대공수사국 수사2계장 소외 18, 수사과장 소외 19 등이 ‘오전 4:30경 소외 20 검사의 지휘를 받아 현장 검증을 이미 실시하였다.’고 하면서, ‘참여자의 진술을 듣고 검증조서를 작성하라’고 지시를 하여, 그들의 말과 소외 7, 피고 2 등의 진술을 듣고 검증조서를 작성하였고, 직접 현장 검증에 참여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3) 내사 결과 발표

서울지방검찰청은 위 피진정인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된 다음날인 1988. 10. 19. “현재까지 수사 결과 최교수의 사망과 관련하여 피진정인(당시 중앙정보부 직원)들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단서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또한 최교수가 타살되었다는 증거도, 자살하였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 최교수가 간첩이었는지 여부에 대하여도 현재로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밝혔고, 1989. 8. 22. 최종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최종길이 중앙정보부에서 소외 7의 신병감시하에 피고 2로부터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한 사실은 인정되나, 피진정인들은 최종길 교수가 간첩활동을 하였다고 자백을 한 후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므로 소외 7이 데리고 나갔는데, 소외 7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화장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사망한 것이라고 변소하고 있는바, 소외 17 작성의 사체감정서, 사체 사진 필름 32매를 감정한 소외 21 작성 감정서 기재, 사건 발생 당시 7층 복도 경비원 소외 22의 진술 내용, 실황조사 결과에 의하여 나타난 화장실의 소변기 및 창문턱의 구조와 위치,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 작성한 내부문서인 간첩 용의자 자살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의 기재 내용 등이 위 변소 내용에 부합하고, 1988. 10. 18.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하여 내사를 종결한다고 발표하였다.

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1) 원고 1 등의 진정

2000. 11. 23. 최종길의 아들인 원고 1 등 348명은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라고 한다)에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 직원의 고문에 의하여 타살된 것이니 그 진상을 밝혀 달라.”는 취지로 진정하였다.

(2) 의문사위의 조사 및 그 결과

(가) 의문사위는 위 진정에 관하여 2000. 12. 9. 조사 개시 결정을 한 다음, 이 사건 발생 당시의 중앙정보부 수사관, 경비원, 군의관, 간호사,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원, 부검의, 최종길과 관련하여 중앙정보부에 제보한 자 등을 조사하여 그들로부터 진술을 듣고,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최종길에 대한 존안기록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부터 내사사건기록 및 형사피의사건기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부검감정서를 각 제출받아 검토하였으며,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를 직접 방문하여 조사하였다.

(나) 의문사위는 모든 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2. 5. 27. 최종길의 사망원인과 관련하여, 최종길이 심한 고문을 받아 소생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자 중앙정보부의 수사관들이 최종길을 7층에서 바닥으로 던졌거나, 고문으로 인하여 이미 사망한 최종길을 자살로 가장하기 위하여 상당한 높이까지 사체를 운반한 다음 아래로 추락시켰거나, 또는 수사관들이 사체를 바닥으로 운반한 다음 발바닥에 둔기 등으로 외력을 가하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심한 고문과 협박을 당하던 최종길이 이에 항거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스스로 뛰어내려 죽음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렇다면 최종길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발표하였다.

2.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행위 책임 여부

가. 청구원인의 요지

원고들은 이 사건 청구원인으로, 피고 2 등의 고문으로 인하여 최종길이 사망하였고, 그 고문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최종길을 추락시켰으며, 나아가 그 모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최종길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웠으므로 피고 대한민국은 피고 2와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사용자로서 원고들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고(소위 적극적 불법행위 책임),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국가는 생명, 신체, 재산 등에 있어서 절박한 위험에 처한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여기에는 국가에 의하여 위법하게 자행된 인권침해에 대하여 회복조치를 취할 의무도 포함되므로, 피고 대한민국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위법한 공권력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은 최종길에 대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간첩 조작 발표의 위법상태를 시정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바, 최종길의 사망 직후부터 의문사위가 최종길을 의문사자로 결정한 2002. 5. 29.까지의 기간 동안 원고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라고 요구하였고,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의 고발 등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피고 대한민국은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러한 피고 대한민국의 부작위는 국가의 국민 보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서 위법한 것이고, 원고들은 피고 대한민국의 이러한 위법한 부작위로 인하여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입었으므로, 피고 대한민국은 그러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소위 소극적 불법행위 책임)고 주장한다.

나. 대한민국의 소극적 불법행위책임 여부

(1) 먼저, 피고 대한민국에게 소극적 불법행위 책임이 있는지 여부를 보기로 한다. 법령에 명시적으로 공무원의 작위의무가 규정되어 있는데도 이를 위반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에 대하여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하는 것을 본래적 사명으로 하는 국가가 초법규적·일차적으로 그 위험 배제에 나서지 아니하면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할 수 없는 경우에는 형식적 의미의 법령에 근거가 없더라도 국가나 관련 공무원에 대하여 그러한 위험을 배제할 작위의무를 인정하고 이를 위반하였다고 하여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가 있을 것이나, 그와 같은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가 아닌 한, 원칙적으로 국가나 공무원이 관련 법령대로만 직무를 수행하였다면 그와 같은 국가나 공무원의 부작위를 가지고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에 위반’하였다고 하여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대법원 1998. 10. 13. 선고 98다18520 판결 등 참조).

살피건대,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이 사건의 진상을 공식적으로 규명하거나,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는 등의 보호조치를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형식적 의미의 법령이 존재하지 아니하였음은 명백하다.

또한, 우리 민법은 불법행위의 피해자에 대한 구제방법으로써, 일반적으로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손해를 금전적으로 배상할 의무( 제750조 )를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다만 명예훼손의 불법행위에 대하여는 피해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이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도록 규정( 제764조 )하고 있을 뿐, 그 밖에 다른 피해 회복 의무 등을 부과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결국 불법행위를 한 자는 자신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피해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여야 할 의무를 부담하는 이외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위법상태를 제거하여야 할 법률상의 의무까지 부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 밖에 피고 대한민국에 대하여 원고들의 주장과 같은 작위의무를 인정할 만한 다른 법령상의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원고들은 인권범죄의 피해자에 대하여 적정한 보상을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국제적 인권법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사건에서도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에게 최종길의 고문치사로 인하여 입은 원고들의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나, 위와 같은 국제 인권법 원칙이 주창되고 있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곧바로 국가의 직접적·구체적 배상의무가 발생한다 할 수 없다).

(2) 또한, 원고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사건 불법행위의 특수성(권위주의 정권이 그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에 대하여 위법한 국가 공권력을 행사하여 탄압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대규모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국민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그 유족들이 가족을 잃은 슬픔에 더하여 간첩의 가족이라는 불명예를 지닌 채 고통받으며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사유로 인하여 국가가 초법규적·일차적으로 원고들에게 발생한 위험의 배제에 나서지 아니하면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없다.

(3) 따라서 이와 다른 견해를 전제로 한 원고들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다. 피고 대한민국의 적극적 불법행위책임 여부

(1) 불법구금 및 고문치사 여부

(가) 불법구금 행위 여부

최종길이 1973. 10. 16. 14:00경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에 임의출석하였는데,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구속영장 등을 발부받지도 않은 채 그 무렵부터 같은 달 18. 혹은 19.경까지 최종길을 위 청사에 구금하여 수사를 계속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은바, 이는 긴급구속의 사유가 없음에도 긴급구속을 한 경우에 해당할 뿐 아니라 영장 없이 구금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경과하여 구금한 불법구금에 해당한다.

(나) 고문이 있었는지 여부

1) 고문이 있었다는 진술

① 1973. 10. 18. 중앙정보부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최종길을 만난 소외 23은, 당시 최종길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다(갑6호증의 12의2, 갑14호증).

② 당시 중앙정보부 5국 공작과에서 근무하면서 최종길에 대한 신문과정에 참여하였던 소외 24는, 자신이 최종길의 신문에 직접 참여한 1973. 10. 17. 저녁 8시부터 10시 사이에 보조수사관이던 소외 6이 최종길을 벽에 양손을 대고 엎드리게 한 후 몽둥이로 엉덩이를 3~4회 때리고, 피고 2는 “이 새끼 제대로 불지 못해”라고 욕하면서 몇 차례 발로 최종길을 걷어차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몽둥이는 조사실 야전침대에서 뺀 것으로 길이는 1m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 두께는 3~4cm 정도이고, 당시 최종길은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6, 갑8호증의 13).

③ 당시 중앙정보부 공작과 계장이던 소외 11은, 자신이 지하 조사실을 들어갔을 때 최종길이 30분 넘게 벽면을 보고 무릎을 꿇고 있었고, 자신이 피고 2에게 “혼을 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라고 말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28).

④ 피고 2는, 사고 직후인 1973. 10. 20.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 조사받으면서 최종길을 고문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조사관 소외 25의 질문에 대하여, “10. 17. 22:00경 무릎을 반쯤 구부리게 하고 서 있도록 한 다음 발길로 양쪽 엉덩이를 2회 정도 차면서 사실대로 진술하라고 하였고, 무릎을 꿇고 앉게 한 후 무릎 뒤에 몽둥이를 끼여 넣어서 고통을 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갑7호증의 46, 갑10호증의 17).

⑤ 소외 7 역시 위와 같이 감찰실에서 조사받으면서 최종길을 고문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조사관 소외 26의 질문에 대하여, “ 피고 2는 최종길이 거짓말을 한다고 책망하면서 정 거짓말을 하면 재미없다고 하며 손바닥으로 그 자 안면을 두 번 밀어대는 것을 보았습니다.”고 진술하였다(갑7호증의 43, 갑10호증의 18).

⑥ 피고 2는 1988년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최종길을 조사하는 동안 잠을 재우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였다(갑11호증의 8).

⑦ 피고 2의 상관으로서 최종길에 대한 신문과정에 여러 차례 관여한 공작과장 소외 3은, “최종길이 지하조사실에 있을 때 팬티와 속옷 차림으로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조사받았다. 조사받을 때 초췌한 모습이었다. 피고 2가 ‘사실대로 대라’라고 소리치고, 최종길이 ‘어이구 어이구’하면서 아픈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갑8호증의 2, 16, 22).

⑧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하였던 경비원들은, 중앙정보부 지하조사실에서 두 책상 사이에 긴 봉을 걸쳐 놓고 피신문자의 양손과 발 사이에 봉을 끼워 넣고 물을 먹이는 일명 통닭구이라는 고문, 주먹과 발로 폭행하는 고문이 이루어지는 것을 빈번하게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다(갑6호증의 29, 31).

2) 부검감정서에 대한 재감정 결과

의문사위에서는 국내외 법의학 전문가들인 홍윤식, 황적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모아(JJ More), 영국의 피터 반치스(Peter Vanezis), 일본의 카미야마에게, 사건 당시 작성된 부검감정서, 부검 사진,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작성한 현장검증서, 사체 사진 등에 대한 재감정을 의뢰하였는데, 최종길에게 고문이 가해졌는지 여부에 관하여, 홍윤식 교수는, “추락 전 상하지의 손상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황적준 교수는, “둔부의 피하출혈과 찰과상은 추락과 관계없이 둔체에 의해 생긴 손상으로 구타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모아 교수는, “오른쪽 다리 뒷부분의 찰과상은 각진 것으로 맞아서 생긴 것이다.”, 피터 반치스 교수는, “둔부 상처 중 몇 가지는 고문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가미야마 교수는, “슬와부의 찰과상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상태에서 슬와부에 각재 같은 물체를 취하였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좌측 하퇴 전면, 좌측 대퇴 하부의 외측부, 좌측 전완의 피하출혈은 각재, 곤봉에 의한 구타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다.”는 감정의견을 제출하였다.

3) 소 결

위와 같은 여러 증거들에 의하면, 피고 2를 비롯한 조사관들이 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종길에 대하여 강도 높은 조사를 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등의 고문을 가한 사실이 인정되고, 특히 최종길의 경우 중앙정보부가 파악한 소위 유럽 간첩단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소외 5 및 소외 8과 동창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외 5의 편지와 소외 8의 주소가 기재된 수첩이 발견된 터라 그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더욱 심한 고문이 행하여졌던 것으로 추인할 수 있다.

(다) 고문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는지 여부

이 사건에서 원고들은 최종길이 위와 같은 고문으로 인하여 사망하였고, 피고 2와 소외 7이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이미 사망하였거나 의식불명 상태에 있던 최종길을 7층에서 던졌다고 주장하고, 이에 대하여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이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고, 간첩조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는바, 아래에서는 사망과정에 대한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 자살의 동기, 사망 후의 조치 등에 대하여 검토함으로써 양측 주장 중 어느 쪽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추락과정에 대한 목격자들의 진술에 대한 검토

① 1973. 10. 20. 중앙정보부 감찰실 조사시의 진술

- 소외 7은 감찰실 조사관의 질문에 대하여, “최종길이 구역질하는 것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서 고개를 바깥쪽으로 돌리고 있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최종길은 변기를 딛고 높이 1.5m 창문틀에 양발을 올려 양손으로 좌우 창문을 쥐고, 머리 부분을 창밖으로 구부린 자세로 창밖으로 뛰어 내릴 것 같은 상태로 있음을 발견하고, 당황한 본인은 황급히 달려들어 최종길의 우측 발목을 양손으로 움켜잡으며 ‘내려오시오. 이 거 무슨 짓이오’ 하였는데 최종길이 ‘안 놓으면 뛴다,’ ‘물러나라’고 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고 2보 뒤로 물러서며 순간적으로 화장실 입구로 나와 사무실쪽을 향하여 ‘차선생, 차선생’을 연거푸 부르고, ‘경비원’을 불렀는데, 최종길은 내려오지 않고 몸을 쭈구리더니 창밖을 향하여 몸을 던졌고, 그 순간에 피고 2가 달려 왔는데 피고 2도 화장실 문 앞에 온 순간에 뛰어 내렸기 때문에 최종길이 뛰어 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고 진술하였다(갑9호증의 28, 갑10호증의 8, 18).

- 반면, 중앙정보부 감찰실 조사관의 질문에 대하여 피고 2는, “고함소리를 듣고 화장실에 달려갔더니 최종길 교수가 창문에 올라가 있었고, 최종길을 잡고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소외 7이 손목을 잡으면서 말리기에 직감적으로 생각하기에 혹시 충격을 주면 뛰어내릴까봐 1보 후퇴하고, 1~2분 가량 최종길의 동정만 주시하고 있는 순간 최종길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다(갑10호증의 7, 17).

② 1988년 검찰 조사시의 진술

- 소외 7은 검사의 질문에 대하여, “최종길이 구역질을 하는 것을 보고 잠시 시선을 돌려 창문쪽을 보았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거리니까 창문 위에 있는 최교수를 발견, ‘방호원, 방호원’이라고 다섯 번 부르니까 피고 2가 방호원과 함께 뛰어왔고, 떨어지는 최종길을 엉겁결에 잡으려고 하였으나 바짓가랑이를 스칠 정도로 손이 닫기만 하였다. 최종길이 창문에 올라가는 동안 전혀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갑 11호증의 4).

- 반면, 피고 2는, “복도쪽에서 고함소리가 크게 나서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화장실로 뛰어가니 소외 7이 화장실 문 있는 데서 새파랗게 질려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키면서 문에 뛰어 갔는데, 제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화장실 창문 위에 밖을 보고 서 있던 최교수가 뛰어 내렸고, 그 순간 소외 7이 잡으려고 뛰어 갔으나 발을 잡았는지 안잡았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은데 그대로 뛰어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다른 직원들도 몇 사람 따라왔던 것 같은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고 진술하였다(갑 11호증의 8).

③ 의문사위에서의 진술

- 피고 2는, “최종길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나간 뒤 고함소리가 나서 복도로 나가 보았더니, 소외 7이 화장실에서 복도로 나와 손가락으로 화장실쪽을 가리키며 ‘조기, 조기’하면서 말을 더듬거렸고, 그 때 화장실 입구쪽으로 가니 최종길이 이미 밖으로 몸이 나가 있는 상태이었습니다. 소외 18 계장과 다른 수사관, 경비원 등 최소한 5명이 추락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이 때 소외 7은 자신의 뒤를 따라 화장실에 들어 왔기 때문에 소외 7은 최종길의 발목을 잡거나 전혀 저지를 한 적이 없습니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27, 갑8호증의 27).

- 당시 7층의 경비원으로서 출입자들을 감시하고 있던 소외 22는, “7층 조사실에서 사고나기 3~4시간 전에 소외 7과 최종길이 밖으로 나간 것을 보았으나 사망 5분 전에는 조사실 밖으로 나간 것을 본 적이 없고, 고함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1988년 검찰 내사시에는 피고 2의 지시를 받아 사고가 나기 직전에 조사실에서 나와 화장실로 나가는 최종길을 보았다고 허위 진술을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갑8호증의 42).

④ 소 결

최종길의 사망경위에 대한 위와 같은 진술을 비교하여 보면, 사고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다는 소외 7과 피고 2의 진술 사이에, 소외 7이 추락 직전 실제로 최종길을 제지하였는지 여부, 피고 2가 화장실에 온 후 추락시까지의 시간 등에 관하여 현저한 차이가 있고, 같은 진술자의 진술도 그 시기에 따라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아울러 당시 7층 경비원들은 일치하여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발표된 시간에는 7층 화장실에서 특별한 소란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추락경위에 대한 소외 7과 피고 2의 진술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2) 자살의 동기에 관한 의문점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이 자살한 동기에 관하여, 국내 조직의 파괴로 초래되는 북한에 대한 사명감과 자신은 물론 가족 친지 등에까지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남기게 됨을 비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였는바, 최종길이 과연 사망하기까지 최종길이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거나, 최종길이 간첩행위를 하였다고 자백한 자료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 1973. 10. 20.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의 조사시 진술

- 피고 2는, 중앙정보부 감찰실 조사관 소외 25의 질문에 대하여, “최종길이 처음부터 혐의 내용을 완강하게 부인하다가 18일 새벽에 소외 27과 함께 동베를린에 다녀온 사실을 인정하고, 소외 8과 연락을 한 사실이 있으며, 네덜란드에 있는 소외 5를 방문한 사실이 있다는 자백을 하였으나 다른 범행을 부인하였고, 최종길이 소변을 보겠다고 하면서 화장실에 간 후 당시 야근을 하고 있는 소외 18 계장에게 들려 최종길의 진술과정을 설명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최종길은 간첩이 틀림없는 놈으로 보아 왔다. 고생이 되겠지만 끝까지 추궁하여 보라’고 하였다.”고 진술하였다(갑10호증의 17).

- 소외 7은, “최종길의 혐의점에 대한 내용에 대하여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나 혐의점을 완전 해소시키지 못하고 사고가 난 데 대하여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고 진술하였다(갑10호증의 18).

② 의문사위에서의 진술

- 피고 2는, “당시 최종길이 간첩이라는 아무런 물증은 없었고, 소외 4의 진술이 있었을 뿐이며, 최종길이 평양에 2번 갔다 왔고 공작금을 받았다는 사실 2가지만 자백하였는데, 최종길이 북한에 가서 연락부부부장, 과장 등도 만나고 이름을 모르는 지도원으로부터 용성구역에 있는 초대소에서 17일간 수용되어 있으면서 교양도 받고 노동당에도 입당하고 공작금 2,000불을 받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돌아왔다고 자백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26).

- 공작과 계장 소외 11은, 18일 밤 10시에 자신이 퇴근할 무렵까지 피고 2로부터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갑8호증의 1).

- 공작과장 소외 3은, 18일 오전에 동백림 갔다 왔다는 자백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 날 저녁 8시경에 7층으로 옮겼으며, 피고 2는 최종길이 평양에 갔다 왔다, 또는 공작금을 받았다는 등의 보고를 과장인 자신에게 한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29, 갑8호증의 2).

- 중앙정보부 수사관 소외 24는, 최종길이 사망하기 직전인 1973. 10. 18. 피고 2와 소외 11 계장이 소외 3 과장에게 보고할 때 최종길이 동베를린에 다녀왔다고 자백했다는 말은 하였으나, 간첩이라고 자백하였다는 보고는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6, 갑8호증의 13).

- 수사관 소외 28은, 같은 날 저녁 퇴근할 때까지 최종길이 간첩이라고 자백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18).

- 사고 직후 소외 7을 조사한 중앙정보부 감찰실 조사관 소외 26은, 소외 7에 대하여 사고경위에 관한 질문을 할 때, 최종길이 사망 직전까지 간첩임을 자백하지 아니하였다고 답변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43).

- 피고 2를 조사한 감찰실 조사관 소외 25는, 당시 피고 2에 대하여 질문하였더니 최종길이 사망 직전까지 간첩혐의에 대하여 완강하게 부인하였다고 답변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갑7호증의 46).

③ 소 결

위 각 진술을 종합하면, 중앙정보부 발표와 달리 최종길이 사망 당시까지 동베를린에 다녀 온 사실을 자백하였을 뿐이고, 소외 5와 소외 8과 고등학교 동창관계에 있어서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최종길이 간첩이었음을 인정할 아무런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최종길이 사망한 사실이 인정된다.

3) 부검 결과에 대한 감정인들의 재감정 결과에 대한 평가

최종길의 부검사진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중 일본인 카미야마 시케타로의 소견은, 최종길의 부검 사진상에 나타나는 왼쪽 족저부의 상처, 전두부 골절, 양팔의 골절 등에 응혈과 혈종이 나타나지 않는 등 다른 상처들과 발생한 시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며 이것은 명백한 사후손상이고, 위와 같은 사후손상은 외표에 손상을 남기지 않고 외력을 가하는 방법으로 최종길을 사망하게 하고 추락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사체를 바닥에 던지거나 망치 등으로 외력을 가하여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다른 국내외 법의학자들은 최종길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추락하였을 것이라는 소견을 보이고 있다{다만, 최종길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추락하였다면 최종길의 왼쪽 족저부에 응혈(피엉김)현상이 발생하였어야 할 터인데, 실제 최종길의 사체에서는 그와 같은 응혈현상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하여는 감정전문가들 사이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재감정 의견들은 당시 최종길의 부검을 직접 담당하였던 소외 17의 부검감정서를 토대로 간접감정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판단의 정확성에 있어서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위 각 의견은 대체적으로 최종길이 추락하였다는 것만을 확인할 뿐 최종길이 스스로 추락하였는지, 아니면 외력에 의하여 추락하였는지를 단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최종길의 사체에 대한 부검감정서와 이에 대한 재감정 의견으로부터는 원고들의 주장과 중앙정보부의 주장 중 어느 쪽에 신빙성이 있는지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를 얻기 어렵다.

4) 추락과정에 관한 소외 3의 진술

최종길 사망 당시 최종길을 조사한 7층 조사실 옆에 있는 방에서 자고 있던 소외 3은, “최종길이 7층으로 옮겨진 후에도 피고 2가 ‘사실대로 대라’라고 소리치고, 최종길이 ‘어이구 어이구’하면서 아픈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 지난 새벽 1~2시에 두 사람 정도가 우당탕 소리가 나면서 뛰어 왔고, 소외 18 계장이 나를 깨우면서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 7층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나가 좌측의 한 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서 밀어 버렸어’라고 양손으로 최종길을 밀어뜨리는 동작을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갑8호증의 16, 22, 제1심 증언).

5) 사고 후 처리 과정의 의문점

① 이 사건 사고 발생 후에 중앙정보부는, 감찰실에서 사건발생경위를 조사하기도 전에 사체를 현장에서 치우고 물로 씻어냈고, 의사가 사망 여부를 확인하지도 아니한 상태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사체를 보내 당일 곧바로 부검을 실시하도록 하였고, 유족들의 입회를 막았다(갑6호증의 28 등).

② 당시 최종길이 추락하였다는 화장실 소변기에는 발자국이 전혀 없었는데 나중에 현장검증사진에는 소변기에 발자국이 있었다(갑6호증의 28, 갑7호증의 39).

③ 중앙정보부 감찰실 감찰과장 소외 29는 1973. 10. 19. 원고 6을 만나 중앙정보부에서 보상금으로 3,000만 원(당시 아파트 2채 값 정도 되는 돈)을 주고, 자녀들 교육도 책임지고 간첩이라는 사실도 발표하지 않겠다고 회유하였고, 소외 10, 9 역시 막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갑6호증의 24, 32, 갑7호증의 1).

(라) 소 결

보건대, 최종길의 사체가 발견된 지점이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 건물의 비상계단에서 약 3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상당한 체중의 최종길의 사체를 소외 7과 피고 2가 추락지점까지 던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 당시 중앙정보부의 경비 상황 등에 비추어 다른 직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사체를 건물 밖으로 던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 원고들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정이 있기도 하나, 한편, 앞서 든 각 증거를 종합하면,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에 대한 내사 결과 아무런 간첩 혐의를 발견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길을 간첩으로 조작하거나 공작에 이용할 목적으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채 최종길을 중앙정보부 남산 분청사에 구금한 다음, 잠 안재우기, 모욕 등 언어폭력, 발길질, 각목을 무릎에 끼워 허벅지를 발로 짓밟기 등의 고문을 가하면서 간첩활동에 대한 자백을 강요한 사실이 인정되고, 더 나아가 최종길이 위와 같은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사망하였거나, 고문 등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여 이를 피하려는 과정에서 사망하였거나, 또는 고문 등 가혹행위에 따라 의식불명 상태에 이른 최종길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 피고 2, 소외 7이 건물 밖으로 던졌을 것으로 인정된다{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동베를린에 갔다 오면 거기를 경유하여 모두 평양까지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길이 조사받던 중 18일 오후(또는 오전)에 동베를린에 갔다 온 것을 인정하자 최종길의 간첩혐의를 확신하고(갑 7호증의 25에 기재된 피고 2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수사관들 사이에는 ‘물건이 되겠다’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더욱 수사를 강하게 진행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그런 과정에서 최종길은 수사관들이 예측할 수 없었던 원인으로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 은폐 및 조작행위

앞서 든 각 증거에 의하면, 중앙정보부는, 자체 감찰 조사 결과에 의하여 수사관들이 최종길에게 고문을 하였고, 최종길은 간첩혐의를 시인하는 자백을 한 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하고 7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하였다.”는 내용으로 피의자신문조서, 긴급구속장, 현장검증조서, 압수수색장 등의 서류 일체를 허위로 작성하여 사건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송치하였고, 나아가 1973. 10. 25.에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방송과 신문기자들을 상대로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하면서,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후 여죄를 조사받던 중 조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변소 창문을 통하여 투신자살하였다.”는 내용을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3) 피고 대한민국의 배상책임의 발생

따라서 피고 대한민국은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의 최종길에 대한 불법구금 및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고, 최종길의 사망 원인에 대한 진상을 은폐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도 없고, 그가 간첩임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송과 언론에 최종길이 간첩이라고 조작하여 발표함으로써 최종길과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하여 최종길과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3. 소멸시효와 관련한 주장 및 판단

가. 피고 대한민국의 주장 및 이에 대한 판단

(1) 피고 대한민국의 주장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들의 주장에 의하더라도 이 사건 소는 불법행위가 있은 날인 1973. 10. 19.로부터 28년 7개월이 경과한 이후인 2002. 5. 29.에서야 비로소 제기되었으므로, 이 사건에 관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로 인하여 소멸하였다고 주장한다.

(2)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소멸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가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민법 제766조 제1항 )이 지나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 예산회계법 제96조 , 1989. 3. 31. 법률 제410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구 예산회계법 제71조 )이 지나면 시효로 소멸한다.

피고 대한민국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이 사건 소가 불법구금 및 고문 또는 고문치사 행위에 대하여는 최종길이 사망한 날로 보이는 1973. 10. 19.부터, 은폐·조작 행위에 대하여는 중앙정보부가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날인 1973. 10. 25.부터, 각 5년이 훨씬 경과한 2002. 5. 29.에서야 제기되었음은 기록상 분명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들의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권은 모두 시효로 인하여 소멸하였다.

나. 소멸시효와 관련한 원고들의 주장 및 이에 대한 판단

(1) 소멸시효 기산점에 관한 주장에 대한 판단

(가) 원고들의 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에는 박정희 정권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사건과 관련하여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1979년에 이르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에는 이미 국가배상소송에서의 소멸시효 기간이 만료됨으로써 역시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바, 결국 원고들은 이러한 법률상·사실상의 장애로 인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고들은 의문사위의 의문사 여부 및 보상에 관한 결정이 있었던 2002. 5. 2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사건 손해배상에 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은 그때로부터 기산되어야 한다.

(나) 판 단

소멸시효는 객관적으로 권리가 발생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기간 동안은 진행하지 않는 것이나, 여기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라 함은 그 권리행사에 법률상의 장애사유, 예컨대 기간이 도래하지 않거나 조건이 성취되지 않는 등의 사유가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단순한 사실상 장애 사유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원고들이 들고 있는 위와 같은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근거로 한 권리행사의 장애 사유는 법률상 장애사유가 아닌 사실상의 장애사유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장애사유 역시 늦어도 원고들이 사건 소를 제기한 2002. 5. 29.로부터 역산하여 5년이 되는 1997. 5. 29. 이전에는 모두 소멸하였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들이 주장하는 사유가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법률상의 장애사유에 해당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 원고들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2) 피고 대한민국이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는지 여부

(가) 원고들의 주장

피고 대한민국은 2000. 1. 15. 법률 제6170호로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2000. 1. 12. 법률 제6123호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각 제정하고 시행함으로써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되는 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명예회복 및 피해회복을 선언하였는바, 이는 권위주의 정권 치하에서 그 진상규명 및 위법행위에 대한 배상이 불가능하였던 각종 의문사 중에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 그 진상이 밝혀진 피해자에 대하여서는 국가가 법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므로, 이로써 피고 대한민국은 의문사자 및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국가배상청구에 대하여는 소멸시효 이익을 포기한 것이다.

(나) 판 단

살피건대, 위 각 특별법에서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발생된 각종 의문사 사건 등의 진상을 파악하여 불법행위자를 처벌하고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명예회복 및 보상의 절차와 방법을 규정하고 있기는 하나, 이는 국가의 손해배상의무 이행에 갈음하여 피해자들을 위하여 법정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으로서, 이것만으로는 피고 대한민국이 그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상 손해배상채무의 시효이익까지 포기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도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3) 계속적 불법행위로서 시효 미완성이라는 주장에 대한 판단

(가) 원고들의 주장

최종길에 대한 간첩 혐의 조작 발표 이후 원고들은 간첩의 유족이라는 낙인이 찍힘으로써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으며, 이러한 손해는 의문사위의 결정으로 그 진상이 밝혀진 2002. 5. 24.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이 사건 은폐·조작행위는 계속적 불법행위에 해당하여 그에 따른 손해배상채권은 아직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

(나) 판 단

그러나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최종길의 사망 직후에 검찰송치서류 등을 허위로 작성하였고, 1973. 10. 25. 방송과 신문기자들을 상대로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후 투신자살하였다.”는 내용의 발표를 하였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이와 같은 은폐·조작에 의한 불법행위는 그 행위가 실제로 있었던 1973. 10. 25. 종료되었고, 그 이후에는 이와 같은 은폐·조작행위로 인한 피해 상태가 계속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들이 주장하는 위와 같은 정신적인 피해는 1973년 당시 중앙정보부의 서류 조작 빛 발표 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고, 이후 그러한 피해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에 불과할 뿐 이를 들어 불법행위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은폐·조작행위가 계속적 불법행위임을 전제로 한 원고들의 이 부분 주장 역시 이유가 없다.

(4) 소멸시효 항변이 권리남용에 해당하는지 여부

(가) 원고들의 주장

박정희 정권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사건 최종길의 사망과 관련하여, 박정희의 재임기간 동안에는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1979년에 이르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에는 이미 국가배상소송에서의 소멸시효 기간이 만료됨으로써 역시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바, 결국 원고들은 이러한 객관적인 장애로 인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음에도 그 가해 당사자인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의 이 사건 손해배상 청구에 대하여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거나 권리의 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다.

(나) 판 단

1)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신의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관한 일반적인 판단 기준

채무자의 소멸시효에 기한 항변권의 행사도 우리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①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②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③ 또는 일단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하였거나, ④ 채권자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의 변제를 수령하는 등의 사정이 있어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대법원 2002. 10. 25. 선고 2002다32332 판결 등 참조).

아래에서는 특히 위 ②, ④ 요건과 관련하여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2) 객관적으로 원고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는지 여부

① 위 요건의 해석과 관련하여서는 그 의미와 범위를 확정하기가 쉽지 아니하나, 일단 권리자 이외의 제3자가 권리자의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② 1972년에 공포·시행된 유신헌법에 기초한 권위주의 정권이 그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동원하여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국민을 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최종길이 당시 체제수호를 담당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의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인하여 희생되었다면, 원고들로서는 그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에는 피고 대한민국에 대하여 사법절차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적어도 최종길이 사망한 날로부터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헌법에 기초한 권위주의 정권이 종료된 1979년과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제5공화국의 존속기간인 1987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원고들이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장애사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③ 그러나 1988년 이후에 들어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권의 성격, 그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의 변화 등에 비추어 보면, 1988년 이후에는 원고들로 하여금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하였던 객관적인 장애사유는 이미 모두 소멸하였다고 볼 여지도 있다(원고들이 1988. 10. 6.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과 함께 서울지방검찰청에 최종길의 사망사건에 대하여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④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에서 원고들에게 1998년 이후에는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사정이 모두 제거되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⑤ 국가권력은 국민의 존엄한 신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는 국민에 대하여 신의성실을 가지고 공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 특히 국민이 생활의 기초로 삼는 공문서를 작성하는 공무원은 그 내용을 허위로 작성하여서는 아니 된다 할 것이며(민간인은 허위 내용인 사문서를 작성하더라도 처벌되지 않지만, 공무원이 허위 내용의 공문서를 작성하면 형법 제227조 에 따라 허위공문서 작성죄로 처벌된다.), 더욱이 국가가 자기의 손해배상책임이 분명한 경우에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가해행위에 관여한 것을 은폐하는 공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더욱 허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⑥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의 사망과정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감추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하고 7층에서 투신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외부에서 전혀 의심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조작한 관련 문서를 완비한 다음 이를 언론 등에 대대적으로 공표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고, 앞서 든 각 증거에 의하면, 이 때문에 심지어 원고들조차 처음에는 최종길을 원망하기도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특히,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이 유학 중 여자관계가 있다는 것까지 공표함으로써 가족들의 실망감을 더욱 부추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고들이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것이 법률상 불가능하였다고까지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행위를 이유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원고들의 잘못을 탓할 수는 없다(앞서 든 각 증거에 의하면, 최종길의 유족들은 최종길이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그 자리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주관하는 장례식에 말없이 참석하였으며, 오히려 최종길이 간첩이었다는 것을 공표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하였고, 그 이후 진상을 밝혀 주겠다는 외국 언론기관 등 외부의 조력이 있었음에도 이를 모두 거부하며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

한편, 이러한 사정은 당시 국가적인 분위기와도 관련되는 문제이다. 요즘에는 국가기관 등 공공기관의 발표나 정책에 대하여도 곧바로 의문이 제기되거나 이를 검증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으나,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당시에는 국가기관이 발표한 내용은 별도의 검증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곧바로 사실상 규범력을 가지고 국민들의 생활을 규율하였기 때문에 원고들로서도 일단 중앙정보부의 발표를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⑦ 또한, 2001년 위와 같이 의문사위에서 전면적으로 재조사를 하기 전까지는 이 사건은 완전히 가려져 있었고 그 전모가 전혀 밝혀지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모든 정보를 중앙정보부가 독점하고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 중앙정보부 감찰실이 작성한 감찰자료(존안자료)에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⑧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모든 사정이, 원고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에게 권리가 있는지 여부를 전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있었던 원고들에게, “왜 자신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그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가” 라고 질타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최종길은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한 가해자이고 국가는 피해자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가해자의 가족들이 피해자인 국가를 상대로, 도대체 어떠한 불법이 저질러졌는지도 모르는 행위를 이유로 무작정 손해배상청구를 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법이 개인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3) 채권자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지 여부

① 민사재판은 철저한 변론주의에 따라 운영되고, 입증책임의 분배는 권리의 발생을 주장하는 자, 즉 이 사건에서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손해배상책임을 주장하는 원고들이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행위 사실을 입증하여야 할 것인데, 이 사건처럼 모든 증거자료를 피고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고들의 독자적인 노력만으로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행위책임 요건을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불평등한 결과를 초래한다. 증명책임의 분배에 있어서 종래 법규의 형식에 중점을 두는 법률요건 분류설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면서, 손해의 원인이 가해자의 위험영역에서 발생한 경우에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책임의 객관적 요건 및 주관적 요건의 부존재에 대하여 증명책임을 져야 한다는 위험영역설이나, 증거와의 거리, 입증의 난이, 금반언 등을 기준으로 증명책임을 분배하여야 한다고 하는 증거거리설 등이 나타나는 것은, 위와 같이 변론주의의 한계에 대한 반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국가에 대하여 정당하게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절차가 도입된 것도 1996. 12. 31. 법률 제5242호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부터라 할 수 있다.

② 이러한 상황에서 증거수집능력이 현저하게 열악한 지위에 있는 개인은 국가의 공권력에 기대어 진실을 규명하여 달라고 요구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에 원고들은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완성되기 직전인 1988년 검찰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진정을 하였던 것이다.

③ 그런데 그 사건을 담당하였던 서울지방검찰청 소속 검사는 당시 최종길에 대하여 고문이 행하여졌다는 점 및 최종길에 대한 수사 서류가 사후에 조작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고 또 조금만 더 조사를 하면 그러한 자료를 더 확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아니한 채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사전에 짜 맞춘 허위 진술에 의존하여(당시 소외 10을 비롯한 소외 7, 11, 피고 2 및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중앙정보부 퇴직 직원들의 모임인 덕우회 사무실에 모여 검찰에서의 진술을 어떻게 할 것인지 사전 협의를 하였다.) 형식적인 조사만을 하였고, 그에 따라 “망인의 사망원인을 밝힐 수 없다.”는 취지의 내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하였는바(당시 검찰로서는 최종길 사건의 송치기록만을 확인하고, 부검감정서에 대하여 1인의 재감정의견만을 기초로 사건의 핵심 당사자들을 대체적으로 1회 정도만 소환하여 조사를 하였을 뿐, 중앙정보부 존안기록에 보존되어 있는 1973년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 기록을 전혀 검토하지 않은 결과 의문사위에서 밝혀진 내용과는 동떨어진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공권력의 최후 보루인 검찰이 진실을 전혀 규명하지 못한 상황에서 원고들에게 철저한 변론주의가 지배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잘못을 물을 수 없다 할 것이고, 이미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건에 대하여 다시 국가기관에 대하여 진정이나 고발을 통하여 재수사요구를 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없다.

④ 따라서 결국 원고들로서는 2000. 1. 15. 제정된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여 설치된 의문사위가 위와 같은 진상을 발표할 때까지는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⑤ 한편, 중앙정보부가 설치된 이래 중앙정보부 및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와 국가정보원이 체제수호 및 국가안보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 공로가 크다 할 것인지만, 그 업무수행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는 국가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업무의 성격상 일반적인 다른 국가기관의 일상적인 업무수행과정에서 공무원의 고의·과실로 입게 되는 피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각 개인이 대항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거대 국가권력에 의하여 희생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은 30년 동안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어 왔던 것이므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여 국민 개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며 국민으로 하여금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여야 할 임무가 있는 국가로서는, 그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 대하여 정정당당하게 그러한 불법행위 자체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다투는 것은 몰라도,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방어방식이라는 점에서도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은 허용될 수 없다( 대법원 1996. 12. 19. 선고 94다22927 전원합의체 판결 의 소수의견 참조).

⑥ 더욱이 국가로서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까닭에 국민은 국가를 믿고 국가가 취한 조치가 적법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와 같이 국가를 믿은 것에 어떠한 잘못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어서, 국가에 의한 어떤 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국민이 자진해서 국가의 행위에 대하여 위법을 문제 삼고 그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것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고, 국가도 국민의 국가에 대한 이러한 기대와 신뢰를 존중하고 그에 상응하기 위하여 국가의 위법한 조치로 인한 결과에 의하여 이미 형성된 생활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다가, 비밀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위와 같은 위법이 외부에서 거의 알아보기 힘든 경우에 일반 국민으로서는 국가의 그와 같은 조치에 전적인 신뢰를 둘 수밖에 없는 실정이며, 더구나 위법행위를 한 국가가 그 위법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그 위법을 몰랐던 원고들에 대해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⑦ 또한,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의 경우에는 나중에 재심을 통하여 명예회복을 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멸시효는 재심 사건의 확정시부터 진행된다 할 것이지만, 이 사건과 같이 처음부터 아예 유죄의 확정판결이 없어 재심의 여지가 없는 사건에서 민사소송의 길까지 막는 것은, 사법부의 판단을 통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봉쇄하는 것이므로, 이 사건의 경우에 시효소멸을 이유로 원고들의 청구를 배척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다.

⑧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경우 위법행위가 국가기관이 업무수행과정에서 통상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정도의 잘못을 넘어선 것으로서 그 위법행위가 지극히 조직적이고 억압적이며 비도덕적이어서 그 불법성이 중대한 때에 해당한다.

4)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국제법상의 원칙과 관련한 검토

1990. 7. 10.부터 우리나라에서 발효되기 시작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B규약)’ 제7조는 “어느 누구도 고문 또는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특히, 누구든지 자신의 자유로운 동의 없이 의학적 또는 과학적 실험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인권보장 원칙을 구현하기 위하여 인권범죄를 다루는 국제형사재판소는 고문 등 범죄에 대하여는 그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고 있으며{구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 지역의 인권침해 사건을 재판하고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TY와 ICTR)가 인권침해 범죄자들에 대한 형사재판을 하면서 견지한 원칙이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각국의 군사정권 아래에서 저질러진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중대한 침해에 대하여는 필요한 최장기간 동안 기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권고하는 등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나 고문과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에 관하여는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이 국제법의 일반원칙이다.

이와 같은 국제법적 원칙은 공소시효에 관한 논의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민사상 소멸시효를 적용할 때에도 동일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5) 소멸시효 제도의 입법 취지와 관련한 검토

일반적으로 소멸시효 제도는, 일정 기간 계속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곤란하게 되는 증거보전으로부터 구제하며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법적 보호에서 배제하기 위하여 인정된 제도이다. 즉, 시효제도는 원칙적으로 진정한 권리자의 권리를 확보하고, 변제자의 이중변제를 피하기 위한 제도이므로, 권리자가 아니거나 변제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 진정한 권리를 희생하면서까지 보호할 필요는 없다 할 것이다. 또한, 시효제도는 권리자로부터 정당한 권리를 빼앗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채무자에게 근거 없는 청구를 받았을 때 사실의 탐지 없이 방어할 수 있는 보호수단을 주려는 데 있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시효제도의 본질론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과 같은 경우에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에 대하여도 시효소멸을 인정하는 것은 시효제도의 취지에도 반한다.

다. 소 결

이 사건에서 원고들의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원칙적으로 시효기간의 종료로 소멸하였다 할 것이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원고들이 그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정이 있었거나 소멸시효를 인정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경우에 해당하므로, 피고 대한민국이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에 해당하므로 허용할 수 없다.

4. 손해배상의 범위

가. 재산상 손해

최종길은 1931. 4. 28.생으로 제1심법원의 서울대학교 총장에 대한 사실조회 결과에 의하면, 예상퇴직일은 1996. 8. 31.로서 퇴직급여 예상액은 210,721,920원인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이를 호프만수치를 적용하여 사망 당시의 현가로 계산하면, 98,391,557원(원 미만은 버림. 이하 같다)이 된다.

나. 위자료

(1) 인정 사실

앞서 든 각 증거에 의하면, 아래의 사실이 인정된다.

(가) 최종길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다른 형제들의 희생 아래 대학교육을 마치고, 오랜 기간 동안 힘들게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독일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울대학교의 민법 교수로 임용되고 2년간의 미국 유학을 통하여 대륙법과 영미법을 모두 섭렵한 전도유망한 소장학자이었는바, 사망하기까지 50여 편의 논문을 집필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법총칙 교과서의 초고를 거의 완성하여 출간을 앞둘 정도로 학문적 업적을 쌓아가고 정열적인 강의로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오던 중, 그 뜻을 펼쳐 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온갖 고문과 수모를 다 겪은 후 국가를 배신한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망하였다.

(나) 원고 2는, 자상한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이던 최종길이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한 사체가 되어 돌아왔을 뿐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남편이 북한에도 다녀오고 다액의 공작금을 받아쓰던 간첩이었다는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며,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조차 연락을 끊음으로써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70세에 이른 현재까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어린 자녀들과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였고, 주위에 간첩의 가족이라는 신분이 밝혀지는 경우에는 주소지나 자녀들의 학교를 수시로 옮겨야 하였으며,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기 위하여 오랫동안 노력하였으나 번번이 좌절되는 고통을 겪었다.

(다) 원고 1, 3은 9살,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위와 같이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오로지 어머니의 헌신에 의지하여 생활하면서 국가기관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에 시달려야 했고, 아버지가 간첩이었다는 것이 발각될까봐 수시로 전학과 이사를 반복하였으며, 간첩의 자식이라는 자괴감을 가지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성년이 된 이후에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그 기대가 무산되어 극심한 고통과 좌절감을 겪었다. 특히, 원고 3은 이로 인하여 현재까지도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라) 최종길의 형제자매들인 나머지 원고들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최종길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학업을 포기하고 뒷바라지를 하였는데, 최종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서 유학비용을 충당하고,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파렴치한 간첩이라는 공식발표를 듣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 이후 최종길의 형제자매들 중 일부는 간첩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쓰고 국내에서 정상적으로 살기 어려워 해외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원고 7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소환을 받은 최종길이 소환에 응할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자신이 출석하도록 설득하였고, 최종길이 출석할 때에도 동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최종길이 사망하는 데 일조하였다는 이유로 한동안 다른 형제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도 오랫동안 자책감에 시달렸고, 최종길 사망 직후에는 정신병을 가장, 입원하여 사고경위를 수기 형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2) 인정금액

위와 같은 사정에 원고들이 30년 동안 진상규명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번번이 그 노력이 좌절되었던 점, 이 사건 불법행위의 내용 및 정도, 원고들의 나이, 재산상태 등 모든 점을 종합하여 보면, 위자료로서 최종길에게 500,000,000원, 원고 2에게 400,000,000원, 원고 1, 3에 대하여는 각 300,000,000원, 나머지 원고들에 대하여는 각 50,000,000원을 인정함이 상당하다.

다.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1) 상속액

최종길의 재산상 손해 및 위자료를 합한 598,391,557원(= 98,391,557원 + 500,000,000원)을 원고 2, 3의 각 상속지분 1/5, 원고 1의 상속지분 3/5에 의하여 계산하면 아래와 같다(여자는 남자의 2분의 1이고, 장남은 0.5지분을 가산하는 최종길 사망 당시의 법정 상속분에 따른 것이다).

원고 2, 3 : 각 119,678,311원(= 598,391,557 × 1/5. 원미만은 버린다. 이하 같다)

원고 1 : 359,034,934원(= 598,391,557 × 3/5)

(2) 상속액 및 각자의 위자료를 합한 손해배상액

원고 1 : 659,034,934원(= 359,034,934원 + 300,000,000원)

원고 2 : 519,678,311원(= 119,678,311원 + 400,000,000원)

원고 3 : 419,678,311원(= 119,678,311원 + 300,000,000원)

나머지 원고들 : 각 50,000,000원

5. 피고 2의 명예훼손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책임 여부

원고들의 피고 2에 대한 청구의 내용 및 이에 관한 판단 부분은, 제1심판결 이유 중 36면 위에서 7째 줄부터 44면 아래에서 3째 줄까지와 같으므로, 민사소송법 제420조 에 의하여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다.

6. 결 론

그렇다면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 1에게 659,034,934원, 원고 2에게 519,678,311원, 원고 3에게 419,678,311원, 나머지 원고들에게 각 50,000,000원 및 이에 대하여 최종길의 사망일인 1973. 10. 19.부터 피고 대한민국이 그 이행의무의 존부와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이 사건 당심판결 선고일인 2006. 2.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고, 피고 2는 원고 2, 1, 3에게 위자료 각 5,000,000원, 나머지 원고들에게 위자료 각 1,000,000원 및 이에 대하여 불법행위일인 2002. 2. 20.부터 피고 2가 그 이행의무의 존부 및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이 사건 제1심판결 선고일인 2005. 1. 26.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때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므로, 원고들의 피고들에 대한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는 이유 없어 이를 기각할 것인바, 제1심판결 중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부분은 이와 일부 결론을 달리하여 부당하므로, 제1심판결 중 위에서 지급을 명한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 패소 부분을 취소하여 피고 대한민국에게 위 각 금원의 지급을 명하고, 제1심판결 중 피고 2에 대한 부분은 정당하므로, 원고들의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나머지 항소와 피고 2의 항소 및 원고들의 부대항소를 모두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조용호(재판장) 김환수 김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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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급 사건
-서울중앙지방법원 2005.1.26.선고 2002가합33637
참조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