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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웅, "입법부작위 위헌확인", 결정해설집 2집, 헌법재판소, 2003, p.261
[결정해설 (결정해설집2집)]
본문

- 문경ㆍ함평 양민학살사건의 피해보상에 관한 입법부작위 -

(헌재 2003. 5. 15. 2000헌마192등, 판례집 15-1, 551)

이 명 웅*

국군으로 추정되는 자들에 의하여 1949. 12. 24. 경북 문경군 석달동 및 1950. 11.부터 1951. 3. 사이 전남 함평군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이하, ‘문경학살사건’ 및 ‘함평학살사건’이라 한다)에 대하여 국회가 진상규명 및 피해보상을 하지 않고 있는 입법부작위의 위헌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을 각하한 사례

문경학살사건 및 함평학살사건의 진상조사와 피해배상 등을 위한 입법을 하지 않고 있는 피청구인(국회)의 부작위가 청구인들의 재산권 등을 침해한 여부

청구인들은 1949. 12. 24.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에서 국군에 의하여 학살된 주민들의 유족 또는 생존자들인바, 같은 날 11:00경 석달동

에서 국군 제3사단 제25연대 제3대대 제7중대 제2소대 및 제3소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군인 7, 80여명이 주민들에게 공비와의 내통혐의를 이유로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주민 86명(남자 41명, 여자 45명, 60세 이상 노인 13명, 15세 미만의 어린이 22명, 5세 미만의 유아 11명)을 살해하고 12명을 부상케 하였으나, 국가는 이 사건(이하 “문경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나 보상 없이 사건을 은폐하여 왔고 피학살자들의 호적에는 “공비출몰 총살로 인하여 사망”이라고 기재하였으며, 청구인들의 진상조사 및 피해보상 요구에 불응하거나 심지어 이를 탄압하여 왔다고 청구인들은 주장한다.

청구인들은 국가가 문경학살사건의 진상조사,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입법을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청구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 행복추구권, 알 권리, 배상청구권 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2000. 3. 18. 입법부작위 위헌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청구인들은 1950. 11.부터 1951. 3. 사이에 전남 함평군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등 3개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 제5중대로 추정되는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주민들의 유족 또는 생존 피해자들인바, 위 군인들이 1950. 12. 5. 동촌마을 주민 50여명과 장교마을 주민 20여명을 사살하고, 1950. 12. 7. 월야리 다래기마을 주민 200여명을 사살하고, 1950. 12. 9. 월야리 외치리마을 주민 21명을 사살하고, 1950. 12. 31.부터 1951. 1. 14.에 걸쳐 해보면 대창리 성대마을,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과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로부터 피난 가는 주민 각 50여명, 70여명, 50여명을 사살하고, 그밖에 주둔지에서 강간이나 가혹행위를 하였다고 청구인들은 주장한다.

청구인들은 국가가 이 사건(이하 “함평학살사건”)의 진상조사,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입법을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청구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 행복추구권, 알 권리, 배상청구권 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입법부작위의 위헌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심판을 2000. 8. 3. 청구하였다.

문경학살사건은 “국군에 의한 학살이며 의심의 여지 없이 가해자들은 기소되어 처형되어야”(증 제3호의3 미극동군 사령부 군무국장 전문 참조) 함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이들에 대한 조사와 형사처벌도 전혀 없었다. 이 사건은 공비에 의한 학살로 처리된 채 그 발생 자체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파묻혀 버렸다.

함평학살사건은 국군이 공비토벌을 이유로 하여 수개월에 걸쳐 여러 마을에서 아무런 조사나 확인절차를 거치지 않고, 저항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노인, 어린이, 여성들을 포함한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파괴한 사건으로 전형적인 국가공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대규모 인권유린행위였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이들 조직적인 인권유린행위는 인권의 보호책무를 지고 있는 국가 스스로 또는 국가의 후원을 바탕으로 국가기능의 일부를 수행하는 집단이 저지른다는 점에서 사인의 위법행위 또는 공무원 개인의 일반적인 불법행위와 구별된다. 일반 불법행위의 구제절차에서는 국가가 그 산하기관의 업무를 통하여 피해자에게 일정한 협력과 법적 조력을 제공하게 되지만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행위에 있어서는 그 유린행위의 주체가 국가공권력 자체이며 이를 통하여 체제유지 또는 정권유지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침해가 중대하고 대규모적임에도 불구하고 진상의 공개를 극도로 꺼려하고 오히려 이를 은폐하고자 하며 피해자들의 법적 구제절차 이용을 저지하거나 기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일반 불법행위의 경우에 인정되는 구제절차에 따라서는 피해자 및 유족으로서의 각종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이들의 권리구제를 위해서는 특별한 다른 구제방법이 필요하다.

또한 청구인들은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7조 위반행위의 피해자이기도 하다(유엔 인권이사회 결정 No. 107/1981 참조). 유족들의 진실을 알 권리를 비롯한 구제받을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로서 국제인권법의 원칙상 합의된 의무이므로 국가는 이 보호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헌법 제10조가 규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이 내포하는 여러 기본적 인권의 내용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생명권과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이러한 생명권 및 신체불훼손권을 침해당하였을 경우 침해당한 당사자 또는 그 유족으로서는 그 진상을 밝히고 원한을 풀 권리, 즉 생명권 및 신체불훼손권의 침해로부터 발생하는 신원권이 있다.

이들 사건의 경우 당시의 정부는 이들 사건이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않도록 조치하고 사망자들의 호적에 ‘공비 출몰 총살’이라고 기재하는 등 피해자와 국민들을 기망하면서 고의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 대표를 구금하는 등 이들의 진상규명노력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사건 발생 후 50여년 동안이나 피해자 및 유족들의 진실을 알 권리와 구제받을 권리의 행사를 가로막아 왔다.

국가가 직접 사건의 진상을 적극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한 이들 사건은 그 성질상 진상을 밝혀내기 어려우므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국가가 뒤늦게 진상조사에 나서기 위하여서는 그 근거 법령을 입법하는 것이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에 관한 입법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청구인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거창과 제주지역의 피해자들을 위하여 이미 특별법이 제정된 것과 비교할 때 국가의 이러한 입법부작위는 위 지역의 피해자들과 동일한 보호를 받아야 할 청구인들에 대하여는 전혀 그 보호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청구인들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1) 6ㆍ25를 전후하여 국군ㆍ경찰에 의해 희생된 소위 양민학살사건 관련 법률로는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1996. 1. 5. 법률 제5148호)과 제주4ㆍ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0. 1. 12. 법률 제6117호)을 들 수 있다. 후자는 제주4ㆍ3사건에만 적용되지만, 전자는 그 적용범위를 특별히 공간적으로 제한하고 있지 않아 동법은 거창사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경학살사건을 포함한 모든 유사 사건에 적용된다. 따라서 문경양민학살사건에 대한 명예회복 등 국가의 의무이행을 위한 입법부작위를 전제로 한 이 사건 청구는 잘못된 것이며, 거창특별조치법을 상대로 청구하였어야 할 것이므로 이 사건 청구는 부적법하다.

(2) 청구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생명권, 신체를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 평등권과 헌법의 원리인 국가의 기본권 확인 및 보장의무와 국제법 존중주의 등에 비추어 볼 때 헌법해석상 특정인에게 구체적인 기본권이 생겨 이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행위의무 내지 보호의무가 발생하였음이 명백하므로 일응 국회의 입법의무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지 50년 이상이 경과되어 사실관계를 확인하기가 대단히 곤란할 뿐만 아니라 6ㆍ25를 전후하여 경남 산청ㆍ함양, 고양금정굴, 전남 함평, 제주4ㆍ3사건, 거제, 동래, 울산, 충무, 구포, 마산, 대구, 전북순창 등 전국에 걸쳐 유사한 사건이 다수 발생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사건의 입법부작위가 국회의 입법의무 위반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유사한 모든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회는 사실관계의 확인 정도에 따라 대상사건에 대한 입법여부, 시기, 내용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입법형성의 자유 또는 입법재량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안은 입법기관이 국가작용의 어떤 영역에서 단순히 입법을 하지 않고 있는 단순 입법부작위의 경우로서 입법을 할 것인지 여부와 어떤 사항을 법규로 규율할 것인지 여부는 입법자가 결정할 사항이다.

청구인들 주장과 같이 생명권 및 신체의 불훼손권이 침해당하였다면 국가배상법민법의 일반원칙에 따라 배상신청이 가능하며 진상조사는 일반 검찰 및 군검찰권의 행사로도 가능한 것이므로 별도의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구인들의 기본권이 침해당했다고 할 수는 없다.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에는 명예회복 등 배상의 대상 범위를 거창사건에만 한정하지 않고 공비토벌과 관련한 피해에 확대 적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해당 위원회에 그 적용을 청구할 수 있으므로, 국회가 청구인들 주장과 같은 입법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청구인들의 평등권이 침해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1. 입법부작위가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려면, 헌법에서 기본권보장을 위해 법률에 명시적으로 입법위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경우 또는 헌법 해석상 특정인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가 발생하였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아무런 입법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경우이어야 한다.

2. 헌법국가배상법을 제정할 입법위임규정을 두고 있으나 문경학살사건 및 함평학살사건에 관한 특별법과 같은 법률을 제정해야 할 명시적인 입법위임규정은 두고 있지 않다.

헌법 제10조 제2문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고 이를 최대한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며 만약 국가가 불법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 그러한 기본권을 보호해주어야 할 행위의무를 진다. 그런데 비록 문경학살사건 및 함평학살사건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중대하고 피해자의 범위도 넓어 상당한 특수성이 있지만, 이미 수사제도 및 국가배상법제가 마련되어 있는 이상, 그 외에 청구인들이 주장하는바 이 사건의 진상규명이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가 헌법해석상 새로이 발생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3. 헌법 제11조 제1항의 평등원칙은 입법자에게 헌법적으로 구체적인 입법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며 입법자가 평등원칙에 반하는 입법을 하게 되면 이로써 피해를 입은 자는 당해 법률조항을 대상으로 평등원칙의 위반여부를 다툴 수 있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례이므로, 이 사건과 같은 입법부작위 헌법소원에서 평등권 침해 주장은 이유가 없다.

4. 그렇다면 형사소송법상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와 국가배상법상의 청구기간이 너무 짧거나 불완전하여 문경학살사건 및 함평학살사건과 같은 특수한 경우 효과적인 수사가 이루어질 수 없고, 손해배상청구권이 제대로 행사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다투는 것, 즉 그 불완전한 법규정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헌법위반이라는 적극적인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문경학살사건 및 함평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피해배상 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지 아니한 부작

위가 헌법에 위반된다는 헌법소원 청구는 부적법하다.

재판관 권 성의 반대의견

1. 전쟁이나 내란 또는 군사쿠데타에 의하여 조성된 위난(危難)의 시기에 개인에 대하여 국가기관이 조직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자행한, 또는 국가권력의 비호나 묵인 하에 조직적으로 자행된, 기본권침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절차에 의하여서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통상의 법절차가 제공하는 구제절차는 평상시의 일상적 분규에 의하여 야기된 권리침해 등에 대한 구제를 목표로 하여 제정된 것이므로 위난의 시기에 발생하는 국가조직에 의한 기본권침해와 같은 특수한 문제의 처리에 대하여는 그 규정이 제대로 들어맞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기본권침해의 사태를 야기한 국가권력이 집권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국가를 상대로 개인이 적기(適期)에 권리를 행사하거나 통상의 쟁송을 제기하여 구제를 받는 것이 대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이 사건은 국민을 보호하여야 하는 국가가 오히려 군병력을 통하여 무고한 아녀자와 노인까지 조직적으로 살해하였다고 의심받는 것으로서, 만일 그렇다면 이는 집단살해에 유사한 행위(genocide-like act)이므로 집단살해와 같이 취급되거나 반인륜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취급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국가배상법상의 소멸시효 제도와 같은 통상적인 법체계는 적용이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전후한 혼란한 시기에 국가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진 또는 그 비호나 묵인 하에 이루어진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개인의 기본권침해가 있었고 이에 대한 구제가 통상의 법체계에 의하여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한 법부재적 상황이 발생한 때에는 헌법 제10조 제2문의 기본권보장의무를 근거로 하여 그 구제를 위한 의회의 특별한 입법의무(특히 국가배상청구권을 실효적으로 보장할 의무)가 발생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고, 이 사건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3. 또한 의회의 보호의무 내지 입법의무에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의무뿐만 아니라 기존의 관계법률을 개정할 의무도 포함되어야 한다. 기존의 관계법률을 개정하지 않고는 기본권의 침해를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경우를

의회의 보호의무에서 제외하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별법의 제정의무이든 기존의 관계법률의 개정의무이든 이러한 입법의무를 정당한 이유 없이 게을리 하는 것은 모두 입법부작위에 해당하여 위헌확인의 대상이 된다.

4. 광풍노도와 같은 시련의 시기가 모두 지나가면 그 와중에서 불운을 겪은 일부 국민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보상하여 주는 것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문명국가의 마땅한 의무이고 이러한 의무는 의회와 정부의 책임으로 귀속된다. 전쟁으로 위축되었던 헌정질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의회가 처참한 불운과 불행을 겪은 국민들을 구제하는 입법을 하는 것은 국민을 다시 통합하고 국가를 전진시키기 위하여 의회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본적인 의무이다. 사건발생 후 50여년이 경과한 이 시점에서조차 계속 입법을 지연하여 우리 국민의 일부인 이들 피해자나 그 유족들의 고통과 좌절을 방치한다면, 이는 ‘정의를 부정하는 것’(Justice Denied)과 동일한 ‘정의의 지연(Justice Delayed)’으로 평가될 것이다.

진정입법부작위가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려면, ① 헌법에서 기본권보장을 위해 법령에 명시적으로 입법위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경우 또는 ② 헌법 해석상 특정인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가 발생하였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전혀 아무런 입법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경우이어야 한다(헌재 1989. 3. 17. 88헌마1, 판례집 1, 9, 17; 1989. 9. 29. 89헌마13, 판례집 1, 294, 296; 1994. 12. 29. 89헌마2, 판례집 6-2, 395, 405-406; 헌재 1998. 7. 16. 96헌마246, 판례집 10-2, 283, 299 참조).

(1) 이 사건의 경우 진정입법부작위가 존재하는지 여부

이 사건에서는 국가의 군부대 소속 군인들이 문경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

거나 상해를 입혀서 문경 마을 주민들의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 등을 침해하였기 때문에 국가에 의한 기본권침해가 문제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 문제되는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와 입법의무에 대해서 살펴본다.

헌법 제10조 제2문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함으로써, 소극적으로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타인의 침해로부터 보호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2)그러므로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는 ① 국가 스스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고 보호해야 할 의무와 ② 사인이나 환경공해 등에 의한 기본권침해를 예방하고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로 구분할 수 있다. 헌법 제10조 제2문의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고 이를 최대한 보호해야 할 의무를 국가에게 부과한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로부터 국가 자체가 불법적으로 국민의 생명권, 신체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주어야 할 국가의 행위의무가 도출된다. 다음으로 헌법 제10조 제2문은 사인이나 환경공해 등에 의한 기본권침해 위험이 있는 경우에 침해위험에 놓여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도 부과한다. 이 사건에서는 국가에 의한 기본권침해가 문제된다.

위와 같이 국가는 자신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경우에, 이에 대한 배상을 하여야 할 행위의무를 가지기 때문에, 헌법 제10조 제2문의 헌법해석상 이에 필요한 관련 법률을 제정해야 할 의무가 도출된다. 그리고 헌법 제29조 제1항 제1문(“공무원의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기본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위해서 필요한 입법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 헌법규정에 의해서도 국가는 관련 법률을 제정해야할 의무를 직접 가진다.

그렇다면 헌법 제10조 제2문의 해석상, 그리고 헌법 제29조 제1항 제1문에 의거하여 국가는 스스로의 불법행위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시, 그 손해를 배상하는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여야 할 입법의무를 가진다.

(2) 제헌헌법(1948. 7. 17. 헌법 제1호로 제정) 제27조 제3문(“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받은 자는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대하여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에 의거 국가는 1951. 9. 8. 법률 제231호로 국가배상법을 최초로 제정하였다. 그 후 헌법(1962. 12. 26. 개정된 것) 제26조 제1문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에 의거하여 국가배상법은 1967. 3. 3. 법률 제1899호로 구 국가배상법을 폐지하고 새롭게 제정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서 현행 헌법(1987. 10. 29. 개정된 것) 제29조 제1항 제1문(“공무원의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에 의거한 국가배상법(2000. 12. 29. 법률 제6310호로 개정된 것)이 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국가는 위 국가배상법의 제정을 통해서 국가 자체의 불법행위로 인한 기본권침해시 발생하는 손해를 배상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할 자신의 입법의무를 이미 이행하였다고 할 것이다.

문경사건과 함평사건에서는 국가가 불법적으로 문경군 및 함평군 마을주민 피해자들의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였다는 점이 추정된다. 그런데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위한 법률인 국가배상법이 1951년 제정되었으므로, 문경사건과 함평사건의 피해자들 및 이들 유족들은 국가배상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국가배상법 제8조(타법과의 관계)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손해배상의 책임에 관하여는 이 법의 규정에 의한 것을 제외하고는 민법의 규정에 의한다. 다만, 민법 이외의 법률에 다른 규정이 있을 때에는 그 규정에 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배상법 제8조(1951년 당시는 제1조)에 따라 준용되는 민법상의 시효규정인 민법 제766조(1951년 당시는 군정법령 제21호, 조선민사령 제1조에 의하여 의용되던 일본국민법 제724조)에 따르면, 시효기간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으로 되어있다. 따라

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위 민법상의 소멸시효가 경과되지 아니한 기한 내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예산회계법 제96조를 적용해야 할 경우는 그에 의한다.

이 사건에서 청구인들은 문경사건과 함평사건이 발생한 지 50년 이상의 기간이 지나도록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바가 없다.3)따라서 국가배상법 제8조에 의거 국가배상청구에 관한 소멸시효가 이미 경과되어, 이 사건 청구인들의 국가배상청구권이 이미 소멸되었다.

그런데 문경사건과 함평사건은 국가공권력의 조직적 개입에 의한 중대하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야기한 사실상의 집단살해 행위이자 반인륜 범죄행위이므로, 단순한 국가의 일반 불법행위와는 다른 특수한 사정이 존재한다. 문경사건과 함평사건과 같은 집단살해 내지 반인륜 범죄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경우에는 국가배상법상의 소멸시효 규정은 그 적용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이는 유엔협약상의 집단살해행위나 반인륜 범죄행위의 처벌에 관하여 국제법상 공소시효가 배제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국가배상법 제8조는 문경 및 함평사건과 같은 집단살해 내지 반인륜 범죄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아니한다는 예외조항을 전혀 두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배상법 제8조는집단살해행위나 반인륜 범죄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해서 소멸시효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불충분한 입법흠결이 있다고 보아 이를 다툴 수도 있다. 어쨌든 국가배상법 제8조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헌법위반이라는 적극적인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함은 별론으로 하고, 헌법상 입법의무가 있음에도 그에 관한 법률이 전혀 제정되지 아니하였음을 이유로 하는 진정입법부작위에 의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4).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제2조 제1호에서 “거창사건등”이라 함은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병력이 작전수행중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적용대상을 거창사건에만 한정한 것이 아니라 6ㆍ25동란과 관련된 사건 전체를 대상으로 입법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다. 만일 6ㆍ25동란과 관련된 민간인희생사건 전체를 대상으로 입법한 것이라면, 위 법이 진상조사, 명예회복 및 피해회복에 불완전하다고 다투는 것, 즉 그 불완전한 법규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헌법위반이라는 적극적인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문경 및 함평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호적정정, 피해회복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지 아니한 입법부작위 자체의 위헌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은 부적법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사건 결정상의 쟁점이 아니었으므로 여기서는 검토하지 않는다.

(1) 문경 및 함평사건이 발생한지 5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공소시효제도로 인하여 가해자의 처벌을 위한 수사를 할 수 없어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피해자들은 소멸시효제도로 인하여 손해배상청구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바, 문경 및 함평사건에 의한 피해는 그 특수한 성격상 피해자들이 적기에 국가에 대하여 가해자의 처벌을 요청하거나 배상청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므로 국가가 사후에 별도의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 및 총괄적인 배상방법을 모색하여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진정입법부작위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경사건 및 함평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피해자들의 생명권과 신체불가침권이 침해당한 극히 중대하고도 심각한 인권침해행위로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배상 등 총괄적인 구제방법이 필요하다.5)

둘째, 문경사건 및 함평사건은 사후적으로 국가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사건의 진상이 은폐되고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탄압 내지 방치되어 왔다.

셋째, 이 사건은 국가배상법의 입법 이전에 기본권이 침해된 경우로서 통상 불완전 또는 불충분한 입법에 의하여 입법이 이루어진 이후에 비로소 기본권이 침해되는 부진정입법부작위와는 경우를 달리 한다.

넷째, 국가배상법은 3년이라는 단기의 소멸시효를 규정하고 있는바, 당시는 전쟁중 또는 전쟁직후로서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지배하고 비이성적인 부역자재판이 진행중이어서, 이 사건 피해자들이 소멸시효기간을 도저히 준수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결국 이 사건에 대하여는 ‘명백히’ 불충분하고 부적절한 입법에 해당하여 전혀 입법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국가배상법의 관련조항들은 입법자들이 국가체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를 상정하여 제정한 것으로서 이 사건에서 규율되어야 할 문제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특별법에 의하여 구제되어야 한다.

여섯째, 이 사건에 대하여 국가배상법 등의 제정으로 일응 입법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제정 이후 극단적인 반공논리와 반민주적 조치로 정상적인 권리행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이는 보호의무를 이행하는 원래의 합헌적인 입법조치가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사후적으로 명백하게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하게 되었는데도 아무런 개선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개선의무의 위반으로서 입법부작위에 해당한다.

끝으로, 국가의 잘못으로 이미 공소시효, 소멸시효가 경과되어 피해자들에게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를 다툴 법적 구제수단이 없다면 법치국가의 원리에 정면으로 반한다.

(2) 입법자의 헌법상 입법의무가 존재하는지 여부

(가) 헌법에서 명시적인 위임이 있는지 여부

입법자의 헌법상의 입법의무는, 헌법이 그 개별규정에서 입법자의 입법의무의 내용 및 범위에 관하여 명백히 위임하고 있는 경우에 인정된다. 따라서 이러한 헌법위임이 인정되는 개념상의 징표로는 입법위임의 明白性과 限界劃定性이 요청된다.

청구인들을 비롯한 문경 및 함평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하여 국가가 금전배상 내지는 보상의무 등을 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지, 또한 그 가해자의 처벌을 통한 진상규명을 하여야 하는지를 구체화할 것을 입법자에게 독자적인 법률로써 규율할 것을 위임하는 헌법의 명문규정은 존재하지 아니한다(다만, 일반적인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의 배상에 대한 입법의무가 있음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러므로 헌법의 명시적인 입법위임의 존재를 이유로 이 사건 문경 및 함평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에 대한 입법부작위의 위헌확인을 헌법소원으로 청구할 수는 없다.

(나) 헌법해석상 국가의 행위의무 내지 보호의무가 발생하였는지 여부

헌법재판소는 “헌법해석상 특정인에게 구체적인 기본권이 생겨 이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행위의무 내지 보호의무가 발생하였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아무런 입법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가 입법부작위에 해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헌법해석을 통한 입법의무의 존재가능성을 인정

하고 있다(전술).

이 사건 가해자인 군부대는 사인인 제3자에 해당하지 않고 국가 공권력의 하부기관이므로 헌법해석상 사인의 기본권침해를 전제로 하는 보호의무의 존재가능성은 없으나 행위의무의 존재가능성에 대하여는 견해가 대립될 수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헌법해석상 행위의무에 기초한 입법의무를 광범위하게 인정하게 될 경우 입법부의 권한을 사실상 침해하게 되고 이는 우리 헌법상의 권력분립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할 것이다. 따라서 헌법에서 명시적으로 입법위임을 하는 경우(이른바 헌법위임)가 아닌 한 헌법 해석상 행위의무에 기초한 입법의무가 명백하게 도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건대, 헌법 제29조 제1항은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를 이어 받은 국가배상법제1조에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손해배상의 책임과 배상절차를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형법 제250조 제1항은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형사소송법 제195조군사법원법 제228조 제1항은 ‘검사, 군검찰관 및 군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생각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 및 증거를 수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가해자는 국방부 소속 군인으로서 국가 소속의 공무원이었으므로 문경 및 함평사건이 법적 근거가 없는 공권력의 남용행위였던 점이 인정된다면 국가는 그러한 범죄행위에 대한 수사를 하여 진상을 규명하여야 하고,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배상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형사소송법 제249조 제1항 제1호에 의하면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으로 되어 있어 사건이 발생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사실상 수사가 곤란하고, 국가배상법 상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 내에 행사하도록 제약하고 있다(동법 제8조, 예산회계법 제96조 제2항, 제1항). 그러나 이와 같은 학살사건에 의한 피해는 그 특수한 성격과 시대상황 때문에 피해자들이 적기에 국가에 대하여 가해자의 처벌을 요청하거나

배상청구를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국가가 사후에 별도의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 및 총괄적인 배상방법을 모색하여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국회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등에 관한 법률안’이 제안되었으나, 거창사건특별법 및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법률이 제정된 바는 없고, 특히 피해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바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법의 제정방향은 문경 및 함평사건의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의 법적 성격상 ‘범죄에 대한 수사제도’ 및 ‘공무원 내지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국가배상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비록 이로 인한 피해가 매우 중대하고 피해자의 범위도 넓어 상당한 특수성이 있어서 국회가 이에 대한 특별입법을 할 수는 있지만, 이미 수사제도 및 국가배상법제가 마련되어 있는 이상, 그 외에 청구인들이 주장하는 문경 및 함평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나 피해자들에 대한 특별한 배상을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가 헌법해석상 새로이 발생하였다고 할 수 없다.

참고로, ‘삼청교육대’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이미 국가배상법제가 마련되어 있는 이상 삼청교육피해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상을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가 헌법해석상 새로이 발생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시한바 있다(헌재 1996. 6. 13. 93헌마276, 판례집 8-1, 493, 497-498).

(다) 입법자의 개선의무위반이 있는지 여부

(1)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구체적인 입법의무가 인정되는 경우로 이미 언급한 보호의무 외에 입법자의 개선의무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즉 입법자가 어떠한 법률을 제정할 당시에는 헌법합치적인 것으로 보이는 법률규정이라 할지라도 그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정변경이 생기게 됨으로써 그 법률규정이 위헌적인 것으로 되어버린 경우에는 입법자에게 이러한 위헌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그 법률규정에 갈음하는 새로운 입법을 하여야 할 헌법상의 개선의무가 발생하고, 입법자가 그 개선을 위한 입법을 전혀 행하지 아니하면 개선의무를 위반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입법부작위는 헌법소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6)

예컨대 입법자가 개인의 생명 및 신체불가침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서 “비행소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경우에, 비행기운항상황의 변화(비행기의 운항횟수가 현격하게 증가하고, 제트엔진의 등장에 따라 비행기 운항에 따른 소음의 정도가 훨씬 강하게 됨)에 따라 현재의 입법이 개인의 신체불가침권을 충분히 보호할 수 없다면 입법자에게는 법률을 개선할 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7)그런데 여기서의 입법자의 개선의무는 헌법상 입법의무의 또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라 보호의무에서 파생되는 종속적 의무라고 할 것이다. 즉 입법자의 개선의무는 입법의 개선, 보완을 통하여 입법자의 보호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므로 보호의무의 영역에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8)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위 비행소음에 관한 법률의 사례의 본안판단에서 입법자가 개선의무의 부작위로 인하여 국가의 보호의무를 위반하고 그로써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인정되기 위하여는 개선의무위반이나 침해의 정도가 명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원래의 합헌적인 법률규정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상황의 변경이 생겨 헌법적으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상태가 발생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전혀 아무런 입법행위를 하지 않거나 또는 명백히 잘못된 개선조치를 취한 경우에 한하여만 보호의무 및 개선의무의 위반으로 인한 기본권의 침해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9)

독일의 개선의무 내지 보호의무이론을 종합하면, 첫째 헌법해석을 통하여 입법자에게 보호 또는 행위의무가 발생하는 경우는 무엇보다도 생명권 및 신체불가침권에서 나오는 국가의 보호의무가 주된 영역을 이루고 있어 헌법해석을 통한 입법자의 헌법적 입법의무를 인정하는 범위가 제한적이고, 둘째, 설사 보호의무의 존재를 인정하여 입법부작위에 대한 헌법소원의 적법성을 충족시킨다 하여도 본안판단에 들어가 보호의무의 위반을 인정하는 경우는 위반의 명백성요건 때문에 지극히 예외적이며, 셋째, 소위 입법

개선의무는 보호의무에서 파생하는 보호의무의 사후적 보완의무를 의미한다.10)

따라서 본안판단에서 보호의무의 위반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국한된다. 즉 입법자가 보호의무를 실현하기 위하여 전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거나 아니면 취한 조치가 명백히 불충분 또는 부적절하거나(원래의 보호의무의 위반), 아니면 보호의무를 이행하는 원래의 합헌적인 입법조치가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사후적으로 명백하게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개선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명백히 잘못된 개선조치를 취한 경우(개선의무의 위반)이다.

보호의무나 개선의무의 위반을 이유로 입법부작위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기 위한 적법성요건으로서는 첫째 헌법해석을 통하여 기본권에서 보호의무를 유출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입법자가 보호의무 내지 개선의무의 이행을 위한 아무런 입법을 하지 않은 진정부작위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개선의무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입법자가 제정당시로서는 합헌적인 법률을 제정하였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정변경이 생겨 추가적인 보호조치가 필요하게 된 경우이므로 논리필연적으로 개선의무의 이행에 대한헌법적 심사는 원칙적으로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되는 제정된 법률에 대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개선의무의 불이행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헌법소원의 청구기간이 도과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청구기간의 도과 후에는 입법부작위를 이유로 하는 헌법소원은 입법자가 원래 합헌적으로 간주된 규정을 개선할 헌법적인 의무를 그의 부작위에 의하여 위반했다는 관점에서 고려될 수 있다”고 하여 개선의무위반의 경우 입법부작위에 대한 헌법소원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또한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최근 몇 개의 결정에서 보호의무의 위반을 이유로 한 입법부작위에 대한 헌법소원의 문제를 다루었으나 적법성에 관한 결정을 유보하고 대신 본안판단에서 명백하게 이유 없다고 하여 헌법소원을 기각하였다. 즉 청구인이 주장하는 보호의무의 위반을 헌법재판소가

일반적으로 개선의무의 위반으로 해석함으로써 진정ㆍ부진정입법부작위를 구분할 필요없이 폭넓게 적법성을 인정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11)

2) 이 사건의 경우

이 사건의 경우, 청구인들이 법적으로는 1951. 9. 8. 제정된 국가배상법에 의하여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었으나, 문경이나 함평사건 발생 당시는 6ㆍ25 동란 발발 직전 내지 직후로서 국가체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웠던 시기였고, 게다가 좌ㆍ우익간의 적대감과 증오감은 전쟁으로 인해 증폭될 대로 증폭되었으며 남한의 경우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흑백논리가 팽배하게 되어서 문경 및 함평사건의 피해자들이 국군의 불법행위를 논할 수 있는 이성적인 분위기가 전혀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위 국가배상법상의 소멸시효기간 내에 국가에 배상청구를 할 수 없게 되어 국가배상청구권이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처음 국가배상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합헌적으로 간주되던 규정(소멸시효규정, 정확히 말하면 민법의 규정을 준용하기로 한 1951년 제정된 국가배상법 제1조 제1문)이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정변경으로 인하여 위헌적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입법자에게 이러한 위헌상태를 제거할 헌법적인 개선의무가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개선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므로 개선의무위반으로서 헌법소원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와 같은 특수한 상황, 즉 문경 및 함평사건의 피해자들이 소멸시효기간 내에 국가배상청구권을 사실상 청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이 과연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정변경이라고 할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개선의무에 있어서 사정변경이라 함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정변경으로 인하여 원래 합헌적으로 간주되던 규정이 위헌적으로 되어버린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 있어서 국가배상청구권에 소멸시효를 정하고 있는 규정이 사정변경으로 위헌적으로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오늘날 문경이나 함평사건과 같이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한다면, 그 피해자는 소멸시효기간 내에 충분히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과 같이 국가체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시기에

는 오히려 소멸시효기간을 정하고 있는 국가배상법 규정이 더욱더 합헌적으로 간주되기 쉽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 규정은 여전히 합헌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규정이고, 다만, 문경 및 함평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반공이데올로기 등 당시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였을 뿐이다.

요컨대, 문경 및 함평사건에 있어서 피해자들이 적기에 국가배상청구 등을 할 수 없었고, 더욱이 이를 피해자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상황, 즉 반공이데올로기 등 당시의 특수한 상황은 개선의무에서 말하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정변경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입법자에게 국가배상청구권에 소멸시효를 규정한 국가배상법 규정을 개선할 헌법상의 의무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할 것이고, 청구인들의 이 사건 심판청구는 개선의무 위반을 이유로 한 진정입법부작위 위헌확인청구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피해자들은 문경 및 함평사건으로 인한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법원에 제기한 후 이 사건의 특수한 성격상 소멸시효기간 내에 청구를 할 수 없었으므로 국가는 신의칙상 소멸시효를 원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12), 이 사건과 같은 국가에 의한 집단학살사건에 대하여는 소멸시효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여야 함에도 그러하지 아니한 국가배상법 제8조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위헌심판제청신청을 하거나, 또는 이 제청신청이 법원에 의해 기각된 후에는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2항에 의한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위 국가배상법 제8조의 위헌여부를 판단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형사소송법상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와 국가배상법상의 청구기간이 너무 짧거나 불완전하여 문경 및 함평사건과 같은 특수한 경우 효과적인 수사가 이루어질 수 없고, 손해배상청구권이 제대로 행사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다투는 것, 즉 그 불완전한 법규 자체

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헌법위반이라는 적극적인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문경 및 함평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입법과 그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내지는 보상입법의 부작위 자체를 이유로 입법부작위의 위헌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것은 허용되기 어렵다. 결국 이 사건 심판청구는 입법부작위에 대한 헌법소원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부적법한 것이다.

이 사건의 소수의견은 문경ㆍ함평 학살사건과 같은 국가의 조직적, 집단적 기본권침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절차에 의하여서 달성하기가 어렵고, 이 사건은 집단살해나 반인륜범죄로 취급되어야 하므로 국가가 특별히 헌법 제10조 제2문의 기본권보장을 위한 입법개선의무를 이행하여야 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게을리 한 것은 입법부작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헌의견은 다음과 같은 사실인식 및 법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 기록에 편철된 1950. 1. 16.자 미극동군 사령부(General HeadquartersFar East Command) 정보처(Military Intelligence Section)의 정보요약(Intelligence Summary)(문서번호: No. 2686)은 다음과 같은 민간인 학살(Civilians Massacred) 을 기술하고 있다.13)

『한국군인들이 1949. 12. 24. 경상북도 산간오지 석달마을에서 남한인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 98명을 학살했다. 그 사건은 제25연대 소속 부대가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을 한 곳에 집합시켜 주민들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일을 저질렀다. 마을 주민들은 그 누명을 부인했지만 군인들은 카빈, 소총, 수류탄, 휴대용대전차 발사포로 마을 주민들을 향하여 발포하였다. 유아 3명, 초등학생 9명, 남자 43명 그리

고 여자 43명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시신밑에 깔려 확인사살을 면한 12명은 병원에 입원중이다. 27호의 가옥중 23호가 군인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위 기술 중 피해자 수에 관해서는, 또 다른 미군측 자료에 의하면(이 사건 기록 61쪽), 사망자가 86명이고, 사망자 중에는 5세 미만이 9명, 10세미만이 4명, 15세미만이 10명이 포함되고 있다. 이러한 미군측 자료들은 청구인들이 재미 사학자 방선주(方善柱) 박사에게 「석달대학살」에 관한 자료 수집을 부탁하여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맥아더 기념관 문서관에서 수집한 자료들이라고 한다.14)

이 사건 청구인들은, 당시 사망자를 포함한 주민 모두는 비무장의 민간인이었으며, 사망자는 86인으로서 남자가 41명, 여자가 45명이었고, 60세 이상의 노인이 13명, 15세에서 59세까지의 남자는 15명,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22명인데 이 중 5세 미만의 유아가 11명 포함되었다고 한다.15)

한편 제2공화국 시절 국회에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진상조사를 한 일이 있는데 동 위원회는 1960. 6. 21. 국회에 군경에 의한 인명 및 재산 피해 사례를 보고하고(문경군의 경우 86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 행정부가 조속한 시일내에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시효의 저촉규정에 관계없이 특별법으로 가칭 「양민학살사건처리특별조치법」의 제정을 행정부에 촉구하는 건의안을 채택하였다(이 사건 기록 62-4쪽).

이 사건 기록에 편철된 위 미군측 자료들, 그리고 당시 그 군인들을 석달동으로 안내했고 학살행위를 직접 목격하였다는 노성근, 장성한의 진술(시사저널 1995. 3. 23.자, 이 사건 기록 67쪽 편철), 제2공화국 당시 국회의

진상조사 내용 등에 의하면, 문경학살사건은 공비가 아닌 국군이 다수의 어린이와 여성이 포함된 적어도 86인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라는 사실이 추정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로서는 이러한 사실관계를 여기서 확정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사실 추정을 전제하고 이 사건 입법부작위 사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반드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여야만 규범제정 미비의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 규범은 배상책임의 전제로서 사실조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에 대한 진상조사나 보상 없이 사건을 은폐하여 왔던 것으로 보인다. 문경학살사건은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않았고, 피학살자들의 호적에는 “공비출몰 총살로 인하여 사망”이라고 기재되었다(이 사건 기록 34쪽).

문경학살사건이 발생한 다음 해의 6.25 전쟁과 뒤이은 극도의 반공주의 환경 하에서 소위 피학살자측이 진상조사 및 피해보상 요구를 시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4.19 후 비로소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위와 같이 국회의 진상조사가 행해졌으나 곧 이은 5.16 쿠데타로 인하여 진상조사나 피해회복 요구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오히려 탄압당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위 시사저널 기사에 의하면 유족 대표 이시형과 채홍락은 5.16이후 포고령 제18조 위반죄로 2달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국방부는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사자료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국가 배상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의 경과로 적절한 배상이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여 왔다(이 사건 기록 78-79, 87-88쪽).

1993년에 들어서서 소위 문민정부 하에서 유족들의 진상규명 등 요구가 다시 등장하였다. 국회는 문경학살사건을 포함한 6.25.전쟁 전후 기간 동안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피해자 유족측 요구에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1996. 1. 5.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법률 제5148호)을, 1999. 12. 7.에는 제주4ㆍ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

특별법을 각 제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위 법률의 적용을 받지 못한 나머지 피해자들의 특별법 제정요구 등이 진행되어 왔다.16)

문경학살사건은 단순한 국가의 일반 불법행위와는 매우 다른 특수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구별되어야 한다.17)즉 그것은 사실상 집단학살을 구성하는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점에서 국가는 피해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의무를 지게되며, 따라서 기존의 법체계에 따른 시효제도를 다툴 수 있을 뿐 국가의 여하한 입법부작위도 다툴 수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집단학살 사건에까지 국가배상법상의 시효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기 어려우며18), 문경학살사건과 같은 집단학살죄에 있어서는 피해보상에 있어서 적어도 현행 국가배상법상의 소멸시효는 그 적용이 배제되거나 달리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제노사이드ㆍ반인륜범죄의 처벌에 관하여 국제법상 공소시효가 배제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그러한 범죄의 진상은 흔히 가려지게 마련이고 피해자들도 탄압받는 경우가 있으므로 공소시효를 적용하면 가해자가 처벌을 쉽게 면하게 되고 역사적이고 반인륜적인 그러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어렵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집단살해 후에 장기간의 시간이 경과하였지만 피해자의 피해보상 요구를 국가가 수용하지 않고 있다면 이는 입법부작위로써 다툴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집단살해 행위에

대한 특수한 법리의 필요성에 관하여 살펴본다.

세계적으로 20세기 후반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잔혹한 대량살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법 및 국내법적 노력이 이루어졌던 시기다. 2차대전 후 집단살해(집단학살) 혹은 인간성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19)를 새로이 범죄명으로 구성요건화 하고 이에 대한 국제적 연대로서 처벌과 방지책이 강구되었다. 이를 위해 공소시효와 같은 처벌 장애사유를 배제하는 국제법 원칙이 확립되었고 이는 각국의 국내법에도 수용되어 왔다.20)그 결과 세계 각국에서 과거청산 문제로서, 과거의 집단학살 내지 인간성에 대한 범죄의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배상을 인용하는 법원의 재판 등이 행하여졌다.

1948. 12. 9. 다수의 유엔 가입국들은 파리에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을 체결한 바 있다(1951. 1. 12. 발효). 우리나라도 1950. 9. 4. 국회 동의를 얻어 이 협약(조약)에 가입하였다(발효일 1951. 12. 12.

조약 제1382호). 이 협약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체약국은, 집단살해는 국제연합의 정신과 목적에 반하며 또한 문명세계에서 죄악으로 단정한 국제법상의 범죄라고 국제연합총회가 1947년 12월 11일부 결의 96(1)에서 행한

선언을 고려하고, 역사상의 모든 시기에서 집단살해가 인류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쳤음을 인지하고, 인류를 이와 같은 고뇌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는 국제협력이 필요함을 확신하고,

이에 하기에 규정된 바와 같이 동의한다.

제1조 체약국은 집단살해가 평시에 행하여졌든가 전시에 행하여졌든가를 불문하고 이것을 방지하고 처벌할 것을 약속하는 국제법상의 범죄임을 확인한다.

제2조 본 협약에서 집단살해라 함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서 행하여진 아래의 행위를 말한다.

(a) 집단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b) 집단구성원에 대하여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

(c)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과하는 것

(d) 집단내에 있어서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도된 조치를 과하는 것

(e) 집단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에 이동시키는 것

……

제5조 체약국은 각자의 헌법에 따라서 본 협약의 규정을 실시하기 위하여 특히 집단살해 또는 제3조에 열거된 기타의 행위의 어떤 것에 대하여도 죄가 있는 자에 대한 유효한 형벌을 규정하기 위하여 필요한 입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조약은 집단살해가 지니는 인간성 파괴와 잔혹성에 기인하여 이는 다른 일반 범죄에 비해 특별한 취급이 요청되어야 하며, 그러한 취급은 세계적인 연대와 협력 하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집단살해 문제에 대해서 국가가 이에 대한 책임자처벌, 피해보상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강구할 의무가 있다.21)만약 국가가 그러한 집단살해가 있었음에도 이를 방치하거나 피해자들이 피해회복 등을 추구할 수 없었던 상황임에도

단순히 기존 법체계상의 가해자처벌, 피해보상만을 주장한다면 이는 국가로서 해야 할 인권보호의무를 다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집단살해 혹은 집단학살(제노사이드)에 대한 법적 정의는 위 협약에서 규정되고 있다. 즉 “집단살해라 함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서 행하여진 집단구성원을 살해하는 등의 행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문경학살사건은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한 마을 주민 대부분을 학살하고 가옥을 소실시킨 행위인데, 이들 민간인들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공비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만을 받던 마을주민들 집단이란 점에서 위 협약상의 제노사이드 정의에는 포함되기 어렵다. 그러나 위 협약상의 제노사이드 개념은 위 협약 후에도 사실상 전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실제적 집단학살사건들을 제대로 포섭하기 위하여 좀더 포괄적으로 정의되어 왔다.22)

이들 제노사이드 개념에 의하면 공비에 협력하였다는 일방적 매도로 한 마을의 무고하고 저항 없는 민간인들 수십명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 잔인하게 살해한 국가의 공권력 행사는 쉽게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내의 6.25 전후 학살사건 조사자 내지 연구자들도 군경에 의하여 저질러진 많은 학살들은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23)

그러므로 문경학살사건은 하나의 국제법적인 제노사이드에 해당되거나 적어도 제노사이드 유사행위(genocide-like act)로서 제노사이드와 같이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에서 위 제노사이드 협약의 해석문제가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배상에 관한 입법부작위가 문제되는 것을 감안하면, 문경학살사건을 제노사이드와 유사하게 취급하여 입법부작위로서 다툴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무리한 법리라고 할 수 없다.

한편 문경학살사건은 단순한 제노사이드 이상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국가공권력의 조직적 개입에 의하여 어린이와 부녀자가 다수 포함된 한 마을 주민들 전체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는 국민을 무장공비들로부터 보호해야 할 물리력을 독점한 국가가 스스로 나서서, 공비와 내통했다는 증거도 없이(위 미극동군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피해자들은 전

에는 인근지역 공산주의자들을 도와준 것 같으나 최근에는 경찰에 협조했었다고 한다. 이 사건 기록 46쪽), 아무런 적법절차도 보장하지 않고, 무장하지 않은 어린이, 남녀노소의 마을 주민들 전체를 잔인하게 몰살시키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생명권의 박탈 등 중대하고 심각한 인권침해이고, 한 국가의 헌법질서 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당시의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를 감안하더라도 문경학살과 같은 사건들은, 한 국가가 민주주의 입헌국가를 표방하고, 기본권의 보호와 그 제한의 한계를 헌법에 규정하였다면 규범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사태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날의 보다 민주화된 한국 헌법현실에서 여전히 국가가 이 사건에 관련된 진실을 은폐하거나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피해보상 요구를 거부한다면 이는 국가가 모종의 헌법상의 작위의무를 위반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학살을 저지른 국가는 현재의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일반 사람들과 격리시키며, 공식 역사해석을 통해 그들의 기억을 조작한다.24)학살이라는 국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25)

문경학살사건과 같은 집단학살 사건도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실의 不在’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법적 조사권한을 갖고 있는 일반적인 조사기구가 존재하지 아니하여왔던 상황에서 사건이 일어난 지 50년이라는 장기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은 과거의 사건을 일깨우고 기억을 축적하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사실을 은폐하고 기억을 지워버리는 과정으로서 존재하였다. 장기간 망각 속에 사건이 묻혀있어야 하였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국가권력이 이를 은폐하고자 하거나, 적극적인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던 데에 있다. 군사정권의 기간동

안에는 학살사건의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장기간의 세월동안에 관련 당사자들은 사망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또한 사실 자체가 왜곡되어 허위사실을 기억 속에 강요함으로써(예컨대 문경양민학살사건에서 국군부대에 의한 학살은 공비출몰 총살로 인한 사망으로 왜곡되고 호적에 기재되었다) 일반인들의 관심밖에 밀려나 있음은 물론 강요된 허위사실로 인하여 생존한 피해자 유족들조차 아직도 증언을 꺼리는 분위기에 짓눌려 있다. 또한 ‘사실의 不在’를 초래한 원인은 학살사건이 전쟁직전, 또는 전쟁기간 중이라는 비상시기에 일어났고 그로 인하여 사실의 규명과 공개 자체가 어려웠다는 점에 있다. 사건에 관한 기록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 문서가 어디에 현존하는지, 어떠한 증거들이 남아있는지 자체를 힘들여 밝혀내어야 하는 작업으로 남아 있다.26)

그러므로, 피해자들이 국가배상법 등에 따라 適期에 국가에 대하여 배상청구 등을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들의 잘못에 돌릴 수 없으며, 여기서 국가가 사후에 별도의 특별법을 제정하여 총괄적인 배상방법을 모색해야만 할 요청이 생겨난다. 그러한 요청은 국가가 문경학살사건으로 인한 기본권 침해상태를 보호할 의무가 강하게 존재할수록 강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침해될 수 있는 기본권으로 거론되는 것은 생명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인격권), 신체의 자유, 재산권 등이다.

그런데 국회가 마땅히 피해보상 등에 관하여 입법할 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입법부작위 하였다면, 그러한 입법부작위로 인하여 침해될 수 있는 기본권은 국가배상청구권이라 할 수 있다(국가가 문경학살사건과 같은 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적절한 보상입법을 하지 않는 경우). 왜냐하면 국가에 의한 그러한 불법행위의 결과 당사자에게는 헌법상의 국가배상청구권이 발생할 것인데, 국가가 이를 실효성 있게 보호할 입법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극단적인 경우 그러한 부작위는 배상청구권을 침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타 나머지 기본권, 즉 인격권, 신체의 자유 등은 입법부작위 자체로 인

하여 침해되는 기본권이라 보기는 어렵다. 즉 이미 문경학살사건으로 인하여 침해된 인격권, 신체의 자유는, 그 후의 장기간의 입법부작위로 인하여 계속 침해된 상태로 있을 수는 있으나, 그러한 입법부작위 상태 자체로 인하여 새로이 침해될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27)

또한 평등권 침해주장은 입법부작위로 인하여 침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거창사건특별법, 제주4.3사건특별법에 의하여 침해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사건 입법부작위 청구에서 침해될 수 있는 기본권이라 할 수 없고, 청구인들로서는 이들 입법에 대한 적극적 다툼, 즉 부진정입법부작위 청구를 하여야 했을 사항이다.

한편 알 권리28)침해 주장은, 이 사건에서 청구인들은 결국 정부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관련 자료의 공개와 같은 적극적 요구를 하거나 이러한 요구에 대한 거부를 다투는 것이 아니므로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할 것이다(진실을 알 권리와 같은 추상적인 내용을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청구인들은 행복추구권29)침해도 거론하나, 이 사건 입법부작위 자체로

인하여 행복추구권이 침해될 수 있다고 보기 어렵고, 또 다른 기본권(배상청구권)의 침해성이 인정된다면 행복추구권까지 굳이 판단할 실익이 없다고 할 것이다.

입법부작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사가 가능한 범위에 대해서는 앞서 다수의견이 설시한 판례와 같다.

이 사건에서 문경학살사건에 대한 피해보상 등에 관한 입법을 하여야 할 헌법상의 입법위임 규정은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헌법 해석상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행위의무 내지 보호의무, 혹은 입법의무가 발생하였는지가 문제된다.

헌법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동 조항 후단부의 국가의 기본권 보장의무는 실은 헌법에 규정이 있든 없든 국가로서는 인권보장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므로 선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명시적인 규정이 있는 이상, 극히 예외적인 경우 그러한 의무위반시 헌법재판으로서 그 위반을 다툴 수 있는 것이

라 볼 것이다(아래 결정 참조).

이에 관해서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사건(헌재 1997. 1. 16. 90헌마110ㆍ136(병합), 판례집 9-1, 90)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었다.31)

그런데 헌법 제10조 후단에서 도출되는 기본권 보장의무는 독일 헌법해석상 발전되어 온 국가의 기본권보호의무(Grundrechtliche Schutzpflicht)보다는 더 광의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後者는 독일에서 기본권의 객관적 성격(즉, 주관적 권리일뿐 아니라 국가가 지켜야 할 객관적인 법규범성)으로부터 헌법해석상 도출되는 국가의 보호의무이론으로서, 私人인 제3자가 다른 국민의 기본권적 법익을 침해하였을 때 발생한다(예를 들어, 낙태에 있어서 태아의 생명권 문제). 그러므로 국가 자체에 의한 기본권 침해시를 대비한 보호의무에 관한 것이 아니다.32)

이에 비해 헌법 제10조 후단상의 국가의 기본권 보장의무는 私人에 의한 기본권침해에만 국한할 이유가 없고,33)당연히 이를 포함한다고 볼 것이며, 나아가 기본권 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국가의 기본권 보장과34), 더 나아가 국가에 의한 법익(기본권 등) 침해시 파생되는 해당 기본권(청구권적 기본권으로서 국가배상청구권 등)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의무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런 해석이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보호의무를 위반한 것이 명백한 경우에만 국가의 해당 작위나 부작위의 위헌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할 것이고, 헌법재판소의 통제의 강도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고 관련된 기본권적 법익의 중대성 등에 따라 개별적으로 보

아야 할 것이다(위 판례).

생명권, 신체의 자유는 헌법상 가장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이고 이 침해로부터 발생하는 피해자 및 유족의 구제받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대규모의 무차별적 양민학살은 국가성립과 존속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주권자에 대한 공격으로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조항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가 권력의 주체인 국민의 인권을 조직적으로 유린하는 행위로서, 국가권력의 중대한 남용이다. 국가는 사후에 이와 같은 국가권력의 유린행위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볼 것이다35).

헌법제29조 제1항에서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국가배상청구권은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으로서 불법행위를 당한 국민은 당연히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진다.36)다만 법률에 정한 절차와 한도 내에서 그러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한편 국가배상법(1951. 9. 8. 법률 제231호로 최초 제정)이 헌법 제29조 제1항에 따라 마련되어 있는데, 동법 제8조(1951년 당시는 제1조)에 따라 준용되는 민법상(제766조) 시효규정에 따르면, 시효기간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된다.37)따라서 현재

로서는 문경학살사건의 시효가 도과되었으며 달리 국가배상법에 의한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것이다.38)

그런데 문경학살사건은 집단살해 행위로서 국가공권력의 조직적 개입에 의한 중대하고 심각한 인권침해 상황을 초래한 것이므로, 국가로서는 그러한 침해 행위로부터 파생된 배상청구권을 최대한 보호해 줄 헌법적 의무를 진다. 집단학살 사건과 같은 경우 기존의 국가배상법에 의한 배상청구권의 보호는 시효제한으로 말미암아 매우 실효성이 없다. 학살사건은 국가권력의 조직적 인권유린행위로서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가 국가권력의 주체인국민들의 생명과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통상 실정법은 정부가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국가적 법익을 침해하는 개인의 위법행위나, 국가기관인 공무원 개인의 일반인에 대한 위법행위나, 개인과 개인간의 위법행위와 그로 인한 배상의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이러한 법체계는 적법한 위임에 의한 국가권력의 적법한 행사를 전제로 존재한다. 그런데 학살사건은 바로 수임자인 정치권력이 선량한 국민을 대량으로 학살한 행위로서 이는 통상적인 법체계가 예상하지 못한 비상한 위법상태의 문제이다.

또한 피해자들은 문경학살사건 후의 전쟁과 그 후의 반공이데올로기 정치상황 하에서 종전의 실정법에 따른 구제를 도모하기는 불가능했다고 봄이 상당하다. 집단학살 사건으로서 국가공권력에 의한 조직적 인권유린행위는 국가가 마련한 구제절차에 따라 구제받는 것이 사실상 혹은 법률상 불가능하다.39)이와 같이, 일반 불법행위의 경우에 인정되는 구제절차에 따

라서 동 피해자 및 유족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들의 권리구제를 위해서는 특별한 다른 구제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 청구인들의 배상청구권을 보호하는 유일한 법적 조치로서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 및 국가배상을 도모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법치국가는 인권이 침해된 개인으로 하여금 이를 사법적으로 다툴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상의 인권은 문언상으로만 존재하게 되며 그 규범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40)청구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잘못 아닌 국가의 잘못으로 이미 공소시효, 소멸시효가 경과되어,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를 다툴 법적 구제수단이 없다면, 이는 법치국가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청구인들은 그러한 인권침해로부터 파생한 배상청구권의 보장입법을 강제해 줄 것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하고 있는데, 여기서 헌법재판소가 이러한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청구인들의 권리구제가 사법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진다(다만, 입법부작위로 인한 손해배상(위자료) 청구가 가능하나 이는 권리구제에 간접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로서는 법리가 허용하는 한 적극적으로 법치국가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사법적 구제책을 도모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국가는 이 사건에서 집단살해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보장할 특별한 입법을 하여야 할 작위의무가 있다고 볼 것이다.41)그러므로 결국 이 사건 입법부작위 청구는 국가의 작위의무가 인정

되므로 적법한 것이다.

(1) 입법부작위 심판청구의 경우 적법요건에서 국가의 작위의무를 고찰하게 되므로 본안에서는 대체로 입법부작위 기간, 나아가 입법부작위로 인하여 기본권이 침해되는 것이 명백한가 하는 정도가 판단대상이 된다.42)

그런데 이 사건에서 침해된 기본권(배상청구권)과 입법부작위 간의 상관관계는 명백하므로 여기서는 입법부작위에 관련한 국회의 입법재량의 한계가 검토된다.

(2) “입법자가 입법의무를 지고 있다고 하여서 그 불이행의 모든 경우가 바로 헌법을 위반한 경우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즉 입법자에게는 형성의 자유 또는 입법재량이 인정되므로 입법의 시기 역시 입법자가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음이 원칙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입법자는 헌법에서 구체적으로 위임받은 입법을 거부하거나 자의적으로 입법을 지연시킬 수는 없는 것이므로, 가령 입법자가 입법을 하지 않기로 결의하거나 상당한 기간 내에 입법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입법재량의 한계를 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입

법부작위는 이와 같이 입법재량의 한계를 넘는 경우에 한하여 위헌으로 인정되는 것이다.”(헌재 1994. 12. 29. 89헌마2, 판례집 6-2, 395, 405)

(3) 이 사건의 경우: 심판 당시 국회 계류 중인 입법안 검토

기록에 의하면 청구인들의 반복된 입법청원 등에도 국회는 지난 수십년간 이 문제를 방치하여 왔다. 집단학살을 당한 이 사건 피해자들에게 그 피해보상을 위한 입법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결정 당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는 배기운 의원 외 16인이 제안한 “6ㆍ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안”(위원회 회부일 2001. 6. 2.)과 김원웅 의원 외 45인이 제안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안”(2001. 9. 1. 회부43))이 회부되어 있었으나, 아직 동 위원회에 상정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동 법률안들은 특별위원회를 통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고있으며 설사 진상규명이 되었다고 해도 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배상과 관련된 조항으로 김원웅 의원 안은 “생활지원금 및 의료지원금”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통상적인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국가배상책임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저소득층의 생계보호와 같은 사회보장적 입법 차원에 그치는 것이다.44)

그렇다면 이러한 입법안이 설사 상정되어 행정자치위원회를 통과하고 법제사법위원회 및 본회의도 통과한다고 해도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청구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45)

물론 우선 진상규명을 하고 사후에 다시 새로운 배상입법을 마련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전망은 지난 50년간 국가(국회)가 보여준 사건의 진상규명과 배상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볼 때, 가능성이 의문시된다.

무엇보다도 사건 후 50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당시의 생존자들의 생존여명이나 기타 제반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더 이상 국가배상을 늦출 수는 없는 상태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미 과도한 고통을 겪어 왔다. 그렇다면 위 입법안들이 해당 위원회에 제안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건에 관련된 국가의 입법의무가 가시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 사건에서는 위 입법안들에도 불구하고, 입법자는 헌법에서 보장한 국가배상청구권을 문경학살사건과 같은 집단학살의 피해자들에게 실효적으로 보호하여야 할 입법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여전히 방치하고 있고, 따라서 이로 인하여 문경학살사건의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침해하기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46)이상이 소수의견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결정은 입법부작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종전 법리를 재확인하고 있다. 즉 이미 배상입법이나 형사소송법이 마련되어 있는 한 그 입법들의 불완전성을 다투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입법부작위 자체를 청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법적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으나, 6.25 전후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헌법소원을 통한 사법적 구제는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6.25 전후의 대량 민간인 학살이 국가의 묵인 하에서 조직적,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수성’이 있다. 소수의견은 그러한 특수성을 반영한 법리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의 최후보루로써 기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헌법재판소는 심판대상 입법의 위헌 여부만을 심판하며, 그 위헌 여부는 통상 해당 국가행위 혹은 부작위가 “최소한”의 헌법적 정당성을 갖추었는지에 관한, 커트라인(cutline)의 준수 여부를 확인하는 심사이다. 따라서 입법자는 헌법재판소가 각하 혹은 합헌 결정을 하였더라도 헌법의 규범력을 실천하고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해당 법률에 대한 개선입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헌법재판소의 각하결정에도 불구하고 입법부는 소수의견의 취지를 반영하여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에 따라 6.25 전후 국가의 집단적 공권력 남용행위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를 구제하는 개선입법을 마련하여야 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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