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위반(찬양·고무등)·음반및비디오물에관한법률위반(심의위반·공소취소)][하집1999-2, 850]
[1]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 제5항 의 적용 범위 및 이적표현물의 판단 기준
[2] 제주 4·3사건에 관한 비디오물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사례
[1]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 제5항 은 당해 행위 또는 표현물에 의하여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만 그 구성요건에 해당하여 처벌이 가능한 것으로 그 적용범위를 제한하여야 하며, 특히 표현물의 경우 그것이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그 내용이 실질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보호법익인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에 해당하는 경우라야 할 것이고 구체적 판단에 있어서는 그 작성의 동기 등과 아울러 표현행위 자체의 외형적 태양 및 외부와의 관련 사항, 표현행위 당시의 상황 등 제반 상황을 두루 참작하여 판단하여야 하며, 나아가 당해 표현물의 제작·반포 등 행위를 함에 있어 앞서 판시한 이적의 목적이 있어야 국가보안법 제7조 를 적용할 수 있다.
[2] 제주 4·3 사건에 관한 비디오물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사례.
[1][2] 대법원 1998. 3. 13. 선고 95도117 판결 (공1998상, 1113) [1] 헌법재판소 1990. 4. 2. 선고 89헌가113 결정 (헌판집2, 49) 대법원 1996. 12. 23. 선고 95도1035 판결 (공1997상, 559) 헌법재판소 1997. 1. 16. 선고 92헌바6·26, 93헌바34·35·36(병합) 결정 (헌공20, 202) 대법원 1997. 2. 28. 선고 96도1817 판결 (공1997상, 1026) 대법원 1997. 11. 25. 선고 97도2084 판결 (공1998상, 175) (2) 대법원 1992. 3. 31. 선고 90도2033 판결 (공1992, 1466)
피고인
피고인
법무법인 덕수합동법률사무소 담당변호사 최병모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
1.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1993. 2. 제주대학교 경상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3. 3.경 제주 4·3 연구소의 사무차장직을 맡은 이래 1994. 4.경부터 1995. 2.경까지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 4·3 피해조사요원으로 일하며 비디오물 제작업에 종사하여 왔는데, 북한공산집단이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로서 대남 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전술의 일환으로 1948. 4. 3. 제주에서 발생한 4·3 사건을 미제침략자들이 획책한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제주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반미구국 항쟁으로 규정하면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려는 제주도 인민들의 지향과 투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미제침략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인민봉기였다고 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4·3 사건에 관한 성격규정 및 선전·선동활동에 동조하여,
(1) 1996. 3. 일자 불상경 제주시청 부근에 있던 피고인 경영의 ‘스튜디오 21’ 사무실에서 4·3 사건의 발생경위와 성격, 진행경과 및 피해상황 등을 묘사하는 내용의 비디오물을 제작하기 위하여,
“해방 이후 진주한 미국은 전쟁에서 얻은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점령군으로서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던 인민위원회를 불법단체로 규정하여 탄압하였다. 미군정은 1947. 3. 1. 제주읍내에서 열린 3·1 기념대회의 참석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한 이후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라고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5·10 선거를 앞두고 검속에 시달린 도민들 사이에는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일어나서 살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유엔 임시 선거관리위원단이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함에 따라 5·10 선거가 조국의 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이 결의는 더욱 확고해졌다. 1948. 4. 3. 새벽 1시 한라산과 각 오름들에 올려진 봉화를 신호로 무장항쟁의 불꽃이 솟아올랐다.
4월 3일 오늘 당신의 아들, 딸 동생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결사적으로 거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에게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기를 들고 궐기했습니다. 2천여 명의 무장자위대와 비무장 민간인들은 5·10 단선 단정반대와 경찰 및 서북청년단의 추방을 요구조건으로 걸고 미군정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요인의 집을 공격하고 무기를 확보했다. 또한 분단을 영구화하는 5·10 선거를 기필코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선거 사무소와 투표장을 폐쇄하는 한편, 입후보자와 선거위원을 설득해 자진 사임토록 했다. 이러한 투쟁은 일반 민중투쟁으로 이어져 민중들은 마을 단위의 결의를 통해 5·10 선거일 당시 집단적으로 한라산으로 피해 단독선거를 원천적으로 거부해 버렸다. 이는 명백히 조국의 분단을 거부하는 제주민중의, 더 나아가 남한민중의 승리였으며 경찰과 백색테러에 민중들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민중자치투쟁의 승리이자 최초의 승리한 반미자주화 투쟁이었다. 제주 4·3 민중항쟁의 승리는 그 후 약 1년에 걸친 군경의 대토벌과 그로 인한 제주민중들의 대학살을 예고하는 것이다. 5월 1일 제주읍 외곽의 평화로운 오라리에 극우청년 30여 명과 경찰을 파견, 마을에 방화하고 주민을 살해한 다음 이것을 유격대의 짓이라고 덮어씌웠다. 미국에 의해 명령받은 박진경은 동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5월 중에만 무려 3,126명의 양민을 폭도라고 검거하였는데, 이 숫자는 6월이 되면 6천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박진경은 동족에 대한 무차별 학살의 대가로 9연대내 양심적인 군인들에 의해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양심적인 일부 군인들은 경비대를 탈영하여 유격대측에 가담하기도 했다. 항쟁지도부는 투쟁위원회를 지구별 유격대로 편성하고 토벌대의 공세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한라산 일대는 하나의 해방구였다. 제주도 유격대는 한 때 전국적으로 가장 용맹을 떨치는 유격대로 평가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가을이 되면서 미군사 고문단장 로버트의 지휘통제를 받는 최경록, 송요찬, 김상겸 등의 정부군 부대에 의한 강력한 토끼 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죽이고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 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삼진 작전이라는 전율할 대량 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민중들은 삶의 벼랑 끝에 몰려야 했다. 이승만은 말했다. 제주도에 휘발유를 뿌려서 전부 죽여 버려라. 제주도 도민들이 없어도 대한민국 수립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미제와 더불어 동족 살육에 나선 것이다. 미군 철모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총으로 무장한 정부군은 함병선과 유재흥의 지휘하에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을 전개하면서 계속하여 집단학살과 무차별 방화를 자행하였다. 정부군은 특히 정방폭포, 성산일출봉 그리고 도내 해수욕장 등의 절경을 배경으로 살인의 미학을 즐겼다. 역사의 대의와 민중의 보위를 위하여 적들과 끝까지 맞서 싸웠던 민중의 아들, 딸들이 동백꽃 같이 붉디붉은 선혈을 흘리면서 한라산의 이곳 저곳에서 쓰러져가야 했다. 예로부터 제주도민들은 이렇게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장두’라 하여 오랫동안 그 뜻을 기려왔습니다. 1949. 6. 7. 새벽 유격대 총사령관 이덕구는 한 전향자를 길잡이로 삼은 경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4·3 영령을 옳게 진혼하는 길은 음습한 그늘에 엉겨있는 그 슬픈 넋들을 대명천지에 불러내 공개적·집단적으로 진혼하고, 그럼으로써 민족통일과 반외세 자주화 민중항쟁으로 역사에 정당하게 자리매김하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해설대본을 작성한 다음, 관련 자료를 편집한 영상에 공소외 김광빈의 음성으로 대본내용을 녹음하여 ‘잠들 수 없는 함성 4·3항쟁’이라는 제호로 방영시간 56분의 비디오물(이하 ‘이 사건 비디오’라 한다) 1개를 제작한 후 3개를 복사하고 그 곳에 보관하여 제작·소지하고,
(2) 1996. 4. 초순 일자 불상경 ‘스튜디오 21’ 사무실에서 성명불상의 제주대학교 학생에게 이 사건 비디오 1개를 교부하여 반포하고,
(3) 1997. 2. 중순 일자 불상경, ‘스튜디오 21’ 사무실에서 이 사건 비디오 1개를 더 복사한 다음, 1997. 2. 21.부터 25.까지 다민족 국가의 약소민족에 대한 탄압 등을 주제로 대만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1997. 2. 21. 09:30경 김포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출국하면서 이 사건 비디오 복사본 3개를 소지하여 1997. 2. 24. 대만국 대북시의 심포지움 행사장에서 그 곳에 참석한 일본 산업대학 교수 공소외 후지나가 타케시에게 이 사건 비디오 2개를, 성명불상의 대만인에게 1개를 각 교부하여 반포하고,
(4) 1997. 5. 초순 일자 불상경 ‘스튜디오 21’ 사무실에서, 이 사건 비디오의 후속편으로 피고인이 제작 중인 4·3 사건 관련 비디오물의 제작비 조달을 위하여 후원인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찾아온 공소외 김인희로부터 2만 원을 받고 후원인으로 가입시킨 후 이 사건 비디오 1개를 복사·교부하여 반포하고,
(5) 1997. 9. 초순 일자 불상경 일본인 교수 후지나가 타케시가 피고인이 관여하는 제주시 이도동 소재 ‘제주 4·3 연구소’로 이 사건 비디오의 해설과 대사를 일본어로 번역한 대본 1부를 전송해 오고, 1997. 9. 중순경 우편으로 일본어 대본 2부를 우송해 오면서 그 대본에 따라 일본어로 해설과 대사가 삽입된 비디오물을 제작하여 달라는 의뢰를 받고, 1997. 9. 중순 일자 불상경 ‘스튜디오 21’ 사무실에서 (1)항과 같은 내용의 해설과 대사를 일본어로 처리한 비디오물 10개를 만든 다음 일본으로 보내주기 위하여 1997. 10. 8.경까지 그 곳에 보관하여 제작·소지하였다.
2. 원심의 판단
가. 원심의 사실인정
원심은 거시 증거를 종합하여 4·3 사건의 진상규명에 관한 그 동안의 경위, 피고인의 경력 등을 인정한 후 이 사건 비디오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사건 비디오는 실제 상영시간 45분 정도의 분량으로서, 제목은 ‘잠들 수 없는 함성, 4·3 항쟁’이다. 이 사건 비디오 제작에 필요한 대본은 피고인이 직접 작성하였고, 그 영상자료는 피고인이 관계 방송을 녹화해 두었던 자료와 관계자를 직접 만나거나 현장을 찾아가 취재한 자료를 토대로 편집한 것이다.
또 그 음성 부분은 피고인이 작성한 대본을 성우가 낭독하면서 4·3 사건의 원인, 진행과정, 사건의 성격 등을(이른바 나래이션 형식으로) 해설하고, 그 중간에 당시 목격자, 희생자의 가족, 현대사 연구자 등이 등장하여 당시의 목격담이나 4·3 사건의 원인, 진행경과 등을 증언하거나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건 비디오에서 피고인은 자신이 작성한 대본과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통하여 4·3 사건의 원인·진행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사건 공소사실과 관련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4·3 사건의 발생 원인과 관련하여, 이 사건 비디오는 미군을 점령군으로 규정한 다음, 점령군인 미군정 당국이 친일파를 등용하는가 하면 제주도민을 부당하게 탄압하고, 또한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들이 뇌물수수, 강매, 겁간 등의 악행을 일삼았는바, 이와 같은 비군정의 탄압·실정과 우익단체의 횡포가 4·3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둘째, 사건의 진행경과와 관련하여, 당시의 미군정 당국과 대한민국 정부를 ‘적’으로 규정하여 그들이 제주도민을 상대로 대량학살, 동족살육을 일삼았다고 하고, 심지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휘발유를 뿌려서 전부 죽여 버려라. 제주도민들이 없어도 대한민국 수립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제와 더불어 동족 살육에 나섰다라고 하며, “정부군은 정방폭포 등 절경을 배경으로 살인의 미학을 즐겼다.”라고까지 하여 대한민국 정부나 국군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당시 좌익세력에 의한 무장투쟁의 준비, 관청 및 경찰지서, 우익단체 등에 대한 무장대의 습격, 우익 민간인의 처형 등은 이를 은폐하거나 혹은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무장투쟁을 주도한 남로당 세력인 ‘항쟁지도부’에 대하여는 ‘가장 용맹스러운 유격대’로서 그들이 활동하는 한라산 일대는 ‘해방구’였다고 하고, 이들 항쟁 지도부는 역사의 대의와 민중의 보위를 위하여 적들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으며, 이들 유격대와 그 총사령관인 이덕구를 ‘장두’라고 하여 이를 미화·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4·3 사건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위와 같이 설명한 다음, 4·3 사건을 ‘민족의 통일과 반외세 자주화의 민중항쟁’으로 결론짓고 있는바, 그 문구의 표현이나 전체적인 논리전개 과정과 대비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민중항쟁이란 4·3 사건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이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고, 직접적으로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조국분단을 조장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5·10 선거에 반대하기 위한 민중들의 정당한 투정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나. 원심의 판단
원심은 위와 같이 사실을 인정한 후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다. 즉 이 사건 비디오는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이루어진 5·10 총선거를 조직적인 무장투쟁으로써 무산시키려고 한 남로당 등 일부 좌익세력을 미화 찬양하는 한편, 이에 반하여 미군정 당국 및 대한민국 정부·국군 등을 제주 민중을 학살한 폭력세력 내지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4·3 사건을 미국과 대한 민국 정부에 맞서 싸운 민족통일과 반외세 자주화의 민중항쟁으로 규정함으로써, 결국 4·3 사건을 미제침략자들이 획책한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제주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반미구국항쟁으로 선전함으로써 위 선거에 의하여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미제국주의자들과 현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북한공산 집단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판단될 뿐 아니라, 위에서 본 이 사건 비디오의 제작 및 반포 경위, 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의 이와 같은 행위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한 것이고, 나아가 이 사건 비디오는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물로서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 소정의 이적표현물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나아가 이 사건 비디오의 제작 경위나 피고인의 경력 등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에게 이적 목적이 있었음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으므로, 결국 이 사건 공소사실은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
3. 피고인과 그 변호인의 항소이유의 요지
가. 이적표현물에 관련한 사실오인 내지 법리오해 주장
피고인과 그 변호인은 이 사건 비디오가 국가보안법 소정의 이적표현물에 해당하고 이적 목적이 인정된다는 원심의 판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원심이 사실을 오인하였거나 법리를 오해하였다고 주장한다.
첫째, 4·3 사건의 성격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그 진상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동안 4·3 사건은 탄압에 의하여 그 진상이 은폐되고 왜곡되어 왔는데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폭동, 반란, 항쟁 등 진상규명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와 관련하여 제주도의회, 유족회, 4·3 사건 관련 단체에서 꾸준하게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요청을 정부와 국회에 제기하여 왔다. 또한 4·3 사건의 진상규명은 대통령의 공약사항이며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도 당내에 4·3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회에 4·3 특별위원회의 구성 및 특별법의 제정을 준비하여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학계 또한 4·3 사건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들이 통과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현대사 전공교수들이 ‘제주 4·3 연구’라는 공동 연구집을 내어 제주 4·3 사건은 항쟁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피고인이 제작한 이 사건 비디오 역시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그 동안 발굴된 자료와 연구성과 등을 기초하여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시각중에 하나를 담은 것일 뿐이고 특별히 좌편향적인 시각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다.
둘째, 원심판결은 4·3 사건의 발생원인에 관한 이 사건 비디오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는 취지로 판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을 점령군으로 표현한 것은 현대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미군 자신들이 그렇게 불렀고 미군정 당국이 친일파를 등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3·1절 시위사건 이후 잘못된 경찰의 발포와 테러, 우익단체의 만행과 탄압이 4·3 사건의 원인이 되었음은 공식문건인 ‘제주도지’와 제민일보사가 발행한 ‘4·3은 말한다’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군책임자인 제9연대장인 김익열 중령, 4·3 사건 관련 재판을 한 양일원 판사, 검찰관 등도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셋째, 원심판결은 4·3 사건의 진행경과와 관련하여 이 사건 비디오가 당시 미군정당국과 대한민국정부를 ‘적’으로 규정하여 그들이 제주도민을 상대로 대량학살, 동족살육을 일삼고, 정방폭포 등 절경을 배경으로 살인의 미학을 즐겼다고까지 하여 대한민국 정부나 국군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그러나 4·3 사건 당시 수많은 양민이 토벌대에 의하여 무고하게 집단 학살되었음은 3만 여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제주도지’나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작전의 수행으로 최소 80%가 토벌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미군정보보고서’에 의하여도 알 수 있다. 제주도의회에서 발행한 ‘제주도 4·3 피해조사’에서도 신고된 11,665명 중 83% 이상이 토벌대에 의하여 희생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당시 군경토벌대가 중산간 부락의 주민들을 죽이고 가옥과 가재를 소각하는 초토화작전을 수행하여 제주도민을 집단 학살하고 무차별 방화를 저지른 결과이다. 이 사건 비디오에서 ‘적’이라는 표현은 대한민국 정부나 국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불법적으로 양민을 학살한 행위세력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고 ‘동족살육과 살인의 미학’ 역시 그러한 비인도적, 비인간적 학살행위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넷째, 원심판결은 이 사건 비디오가 좌익세력에 의한 경찰, 우익단체 등에 습격 등을 은폐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고 나아가 무장투쟁을 주도한 남로당 세력인 지도부에 대하여 미화·찬양하고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 비디오의 전체적인 기조는 “4·3 사건 당시 사망한 수많은 사람들은 빨갱이(좌익세력)가 아닌 양민, 즉 제주도민인 민중들이었고 민중들의 정당방위적 행위였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무고하게 희생되었고, 그 진상이 밝혀져 명예회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원심판결은 제주도민들의 정당방위적 저항이었다는 표현을 좌익세력에 대한 미화로 오해하고 있고 민중이라는 개념을 북한에서 주장하는 인민과 같이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다만 군경토벌대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인도적, 인류적 차원에서 토벌대가 미군정과 경찰, 우익단체의 과오와 탄압에 대하여 저항하는 제주도민들에 대하여 양민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을 벌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원심판결은 이 사건 비디오가 4·3 사건의 성격을 민중항쟁으로 결론짓고 있다고 하며 ‘4·3 민중항쟁의 시각은 대한민국 정부에 맞서 싸운 것이고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 비디오는 저항의 원인으로 경찰의 잘못된 발포와 서북청년단의 테러와 탄압 등을 들고 있고, 체제를 부정하거나 북한을 지지하여 공산주의국가의 수립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은 없으며, 민중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위적 항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섯째, 원심판결은 이 사건 비디오가 4·3 사건을 미제침략자들이 획책한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제주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반미구국항쟁으로 선전함으로써 그 선거에 의하여 수립된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5·10 선거를 반대하면 곧 북한을 지지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1948년 당시 상황이 정부수립 이전이고 또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전국적으로 70% 내지 80%가 5·10 단선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던 당시 국민들의 열망을 고려하지 않은 견해이다. 최근의 역사학계는 제주도에서의 5·10 단선반대가 김구 선생의 단선·단정 반대와 같은 민족통일운동의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다.
나. 이적표현물 반포에 관한 사실오인 내지 법리오해 주장
피고인과 변호인은 원심판결 중 범죄사실 제4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원심판결은 피고인이 공소외 김인희에게 이적표현물인 이 사건 비디오를 1개 복사하여 교부하였다고 인정하고 있으나 이와 관련하여 피고인측이 증거로 동의하지 않은 김인희의 진술서 1장만이 있을 뿐 달리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이 이를 유죄로 인정함으로써 사실을 오인하였거나 법리를 오해한 것이다.
다. 양형부당 주장
피고인의 변호인은 피고인이 이 사건 비디오를 제작하게 된 동기, 이 사건 비디오의 내용 등에 비추어 원심의 형이 너무 무겁다고 주장한다.
4. 당심의 판단
가. 이 사건 기록에 의하면 다음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1) 4·3 사건과 관련된 근래의 사회동향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변환기의 한 장을 차지하는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무후무한 인명피해(1993년판 제주도지에서는 3만 명 정도까지로 추산하고 있다.)를 야기했고 오늘날까지 제주공동체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고 광범위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 논의가 금기시되어 사건 발생 40주년이 되는 1988년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논의와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국내학자들에 의하여 4·3 사건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고, 제주신문, 제민일보 등 지방언론사와 제주 4·3 연구소 등 사회단체들이 직접 사건 현장을 취재하고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4·3 사건의 발생원인과 진행경과, 희생자의 숫자 등 피해상황에 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에 대한 피해보상과 명예회복 문제를 꾸준하게 제기하여 왔다.
1993년에 이르러 문민정부라는 다소 열린 분위기 속에서 공공기관인 제주도의회가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위령사업 등을 진행하여 왔다.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는 1995. 5.경에 ‘제주도 4·3 피해조사 1차 보고서(증 제1호)’ 발간하여 1만 4천여 명의 희생자 명단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1997. 1.경에 이를 수정·보완하였는데, 그 보고서에 의하면 신고된 희생자 11,655명 중 82.93%인 9,674명이 군경토벌대측에 의하여, 11.26%인 1,314명은 무장대측에 의하여 희생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국회차원에서는 ‘제주도 4·3 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이 발의되기도 하였고, 1998년에는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제주도 4·3 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두 차례 공청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 4·3사건에 대한 근래의 연구동향
종래의 지배적 견해는 4·3 사건이란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소수의 남로당원이 주체가 되어 계획적, 조직적으로 일으킨 대규모의 공산폭동으로서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위한 극좌적 무장폭동으로 보아왔다. 이와 다른 입장에서 4·3 사건의 성격을 해석하는 견해는 해외에서 나온 한 두 편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으나 1988년부터 종래의 견해를 비판하는 국내 학자들의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박명림, 양한권, 고창훈 등 학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해석은 민중항쟁론이라고도 불리며 4·3사건의 주체가 제주일반도민, 즉 민중이라는 입장으로서 4·3 사건의 원인과 전개과정, 그 성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민중항쟁론은 우선 4·3 사건의 주된 원인을 미군정의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을 열망하는 민중들의 자위적 저항 내지 방어적 항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제주도민들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중앙정부로부터의 착취와 억압, 외세의 침략 등에 시달리는 동안 강력한 공동체의식과 분리주의, 독립주의 정신아래 여러 번 저항·봉기하였고 그러한 전통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한 단계 고양된 상태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제주도민들은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좌우연합적 성격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남한 지역에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려는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좌익민족운동세력을 지속적으로 탄압하여 나갔고 제주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도의 미군정은 초기에는 인민위원회와 협조적이었으나 점차 경찰력을 강화하고 우익단체를 지원하는 등 우익세력을 강화하여 나갔고, 그 동안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일본 등 해외 귀환자에 대한 금품탈취는 미군정, 경찰에 대한 도민의 반감을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군정이 1947. 3. 1. 시행된 28주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군중들에게 발포를 하여 사상자(6명 사망, 6명 중상)를 냄으로써 제주도민중과 좌익운동세력은 미군정과 대결의 길로 가게 되었다. 미군정은 이후 3·10 민관총파업이 단행되자 육지에서 응원경찰을 증파하고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를 투입하여 관련자를 검거하고 고문, 테러 등을 가하였다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탄압과 행패는 상당수 도민의 감정을 악화시켰고, 좌익지도자 등 많은 젊은 사람들이 탄압을 피하여 한라산으로 입산하고 자위적 항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결국 1948. 5. 10.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실시될 것이 명백해지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948. 4. 3. 봉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4·3 사건은 제주지역 남로당원 등 좌익 세력들이 조직화하여 일으켰지만 중앙의 남로당과는 아무런 연계 없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음으로 민중항쟁론은 4·3 사건의 전개과정의 초점을 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한 무차별적인 진압과 이에 대한 미군정 및 이승만 정부에 대한 책임론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견해는 4·3 사건의 발발에 이어 5·10 선거구 중 제주도 북제주군 2개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면서 미군정의 진압작전이 거세어졌고,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한 계엄령, 해상봉쇄령, 초토화 작전과 그에 따른 대량 집단학살과 중산간 지역 마을에 대한 방화가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자행됐다고 사례를 들며 밝히고 있다. 또 토벌의 성공이유를 ‘민간인 대량 살육 작전’에서 찾고 있고 사망자 15,000명 중 최소한 80%가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는 1949. 4. 1.자 미군정보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의 그러한 초토화 작전은 국제법상으로도 금지된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해당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민중항쟁론은 4·3 사건의 성격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본다. 첫째로 4·3 사건은 제주민중들이 처음부터 중앙 남로당의 교사를 받아 선제적 폭력혁명을 시도한 폭동이나 반란이 아니라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의 비인간적인 탄압에 대한 자위적 저항 내지 항쟁이라는 것이고, 둘째로 비극적인 민족의 분단 과정에 저항한 통일운동이며, 4·3 사건은 그 발생과 전개과정에서도 민중 수준에서는 북한정부를 지지하는 노선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고,
셋째로 4·3 사건은 2차 세계대전 후 전개되는 냉전시대에 미국이 추구해 온 세계전략에 충돌하여 저항한 반미투쟁이라는 것이다.
민중항쟁론은 종합적으로 4·3 사건은 거대한 민족통일운동이고 반제민족해방 운동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고 4·3 사건의 성격 등에 관한 현재 학계의 유력한 견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 입장은 나아가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 당시 특히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등을 주장, 촉구하고 있다.
(3) 피고인의 경력과 활동
피고인은 1987. 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대학교 경상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하여 1991년 초부터 ‘제주 4·3 연구소’ 편집위원 등으로 근무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 1993. 3.부터 그 연구소 사무차장직을 맡아 1997. 2.까지 일하였다. 피고인은 1994. 4.부터 1995. 2.까지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 피해 조사요원으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또 1995. 1.부터는 ‘스튜디오 21’이라는 상호로 비디오물 촬영, 편집, 제작업체를 설립하고 방송국 외주물 촬영, 회사 홍보물 제작 등도 하여 오고 있다.
피고인은 그 동안 4·3 사건과 관련하여 ‘제주도지방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1991. 2.)’, ‘4·3의 왜곡실태(1992. 4.)’, ‘제주 4·3 항쟁의 전개와 의미(1993.)’, ‘제주 4·3 항쟁 진압작전과 주민학살(1994. 1.)’, ‘4·3의 원인 및 결과, 해결방안(1995. 4.)’ 등의 소논문을 발표하기로 하고 ‘선흘리 낙선동 석성’ 등 15편 정도의 4·3 사건 현장 답사기를 잡지 등에 연재하기도 하였다(증 제13·14호 등).
피고인은 위 논문 등에서 4·3 사건의 발생원인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미군정이 친일파와 극우반공세력을 동원하여 인민위원회와 민족운동진영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1947. 3. 1. ‘3·1 운동 기념대회’에서 발포하고 ‘3·10 민관총파업’에 대하여 미군정과 경찰이 제주도를 빨갱이의 섬으로 규정하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대량 증파하여 무차별 검거와 무자비한 탄압을 감행함으로써 제주도민들이 공포를 느끼며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 우리 민족을 둘로 나누는 단독정부, 단독선거를 하겠다는 미국의 결정에 제주도민들이 통일을 위해 5·10 단선을 거부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4·3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쓰고 있다.
피고인은 또 4·3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대량의 민간인이 희생된 데 대하여 진상을 밝히고 제주도민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기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즉 피고인은 ‘4·3의 원인 및 결과, 해결방안’이라는 글에서 “어느 쪽이 희생됐든 모두가 피해자(피고인은 ‘제주 4·3 항쟁 진압작전과 주민학살’이라는 논문에서도 1만 5천명 중 최소한 80%가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사살되었다는 1949. 4. 1.자 미군정보보고서를 인용하면서도 “유격대의 학살과 보복도 적지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토벌공적비, 충혼비’라는 답사기에서도 “군경 역시 나라를 위해 고분 분투하다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라는 인식의 틀 안에서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진상을 규명하고 제주도민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4·3 치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4·3 희생자 중 80~90%는 군경토벌대에 억울하게 희생됐고, 빨갱이 범법자로 낙인찍혀 왔다. 이러한 낙인은 현재도 유족들을 옥죄고 있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한 누명을 벗겨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제주도민 모두의 책임이다.
이와 함께 4·3 특별법을 제정하여 제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적으로 보상이 있어야 하며, 현재 일부 유족(군경토벌대 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금을 받고 있는 것과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아울러 희생자들을 국가적으로 위무하기 위해 평화공원을 조성하여 위령탑을 세우고 후손들에게 역사적 전실을 알리기 위해 정사편찬 및 4·3 박물관건립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기술하고 있다(이러한 취지의 글은 ‘토벌공적비, 충혼비’라는 답사기에서도 나오고 있다).
피고인은 4·3 사건에 대한 종합평가로 4·3 사건은 미군정과 경찰의 무자비 한 억압에 대항했고 민족의 분단인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발생한 것이지 북한을 지지하여 항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 만큼 대한민국의 정통성도 문제될 것이 아니라고 그가 쓴 몇 개의 글에서 거듭 주장하고 있다.
(4) 이 사건 비디오의 제작과정과 그 내용
(가) 피고인은 앞서 본 바와 같이 평소 4·3 사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제주 4·3 연구소에서 일하며 4·3 사건과 관련한 글도 쓰고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 피해조사요원으로 일하면서 4·3 사건을 알리는 내용의 다큐멘타리 영상물인 비디오 제작을 기획하게 되었다. 피고인은 1993년에 제주 4·3 연구소에서 제작한 4·3 관련 영상물인 ‘다랑쉬의 슬픈 노래’라는 비디오의 제작에 관여하기도 하였는데, 1995. 5. ‘스튜디오 21’을 설립한 후 자신이 직접 4·3 사건에 관한 비디오를 제작하고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는 등 최종적으로는 국내·외에 4·3 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96. 3.경부터 이 사건 비디오의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나) 이 사건 비디오는 전체적으로 56분 정도의 분량으로서 피고인이 작성한 대본을 성우가 낭독하면서 제주도의 수난의 역사, 4·3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발생원인, 전개과정, 현재의 영향 등을 설명하고 그 중간 중간에 당시 목격자나 희생자 가족, 현대사 연구가 등이 등장하여 목격담과 4·3 사건의 원인과 진행경과 등을 증언하거나 설명하고 최종적으로는 4·3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싣고 있다. 그 시간적 배분은 제주도의 수난의 역사와 역사적 배경으로서 고려말 삼별초의 항쟁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민들의 저항과 항쟁 부분에 10분 정도, 4·3 사건의 직접적 발생원인으로서 미군정의 당시 정책과 3·1절 기념대회 발포 사건과 그 후의 전개과정 등에 관하여 10분 정도, 4·3 사건 발발 후 전개과정에서 5·10 단선 저지와 군경 토벌대에 의한 대량 학살을 중심으로 20분 정도, 4·3 사건과 연좌제 부분에 3분 정도, 나머지 13분이 희생자 명단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다.
이 사건 비디오의 대본은 피고인이 직접 작성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자신이 그 동안 발표하였던 글은 물론 박명림의 석사학위논문인 ‘제주도 4·3 민중항쟁에 관한 연구’, 제민일보사의 ‘4·3은 말한다’, 고창훈의 논문인 ‘4·3 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제주도지(1993년판)’, 강요배의 화보집인 ‘동백꽃 지다’ 등 그 동안에 발표된 4·3관련 자료들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특히 일부 대사 내용은 박명림의 논문이나 강요배 화보집에 있는 양한권의 글을 그대로 옮기거나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작성되었고 전체적인 윤곽과 구성내용은 ‘동백꽃 지다’와 매우 유사하게 되어 있다.
이 사건 비디오의 영상은 1993년에 피고인이 구성을 담당하여 제주 4·3 연구소에서 제작한 ‘다랑쉬의 슬픈 노래’의 일부 화면을 복사하여 사용한 것은 물론, 미군정이 촬영한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등 해방 전후의 자료화면과 제주지방 MBC와 KBS의 4·3 관련 프로그램에서 방송한 화면을 그대로 복사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사건 비디오에 나오는 증언자들의 목격담 장면 중 중반부의 4·3 사건 발발 원인에 대한 이운방의 증언, 후반부의 연좌제에 관한 이창우의 증언 부분은 제주 MBC가 제작한 4·3 기획집에서, 이 사건 비디오 도입부의 양민대량 희생에 대한 허원호의 증언, 전반부의 인민위원회의 성격에 대한 김남식의 증언, 중반부의 희생자 가족 고기정의 증언, 북촌리 사건에 관한 김석보, 현덕선의 각 증언, 후반부의 예비검속 희생자에 대한 김경욱의 증언 부분은 제주 KBS가 제작한 4·3 기획집에서 복사하여 사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개과정에서 MBC가 제작하여 방영한 드라마인 ‘여명의 눈동자’의 화면을 많은 부분 복사하여 사용하고 있고 중간 중간에 수시로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라는 화보집에 게재된 그림들을 복사하여 삽입하고 있다.
(다) 이 사건 비디오의 구체적인 구성 내용을 전개 순서에 따라 보면 우선 도입 부분에 4·3 사건의 참혹한 희생을 언급하며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어서 4·3 사건의 원인과 관련한 역사적 배경으로서 4·3 사건에 관하여 몇 개의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제주공동체가 경험한 항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전제하고, 고려말 삼별초의 항쟁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와 외세의 수탈에 따른 제주도민들의 수난과 이에 대한 저항에 대하여 구한말인 1901년에 발생한 이재수란과 일제시대 1932년에 일어난 해녀항쟁을 중심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다.
이 사건 비디오는 4·3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하여 앞서 본 민중항쟁론의 입장에 서서 제주도민들이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주적 통일독립국가의 건설을 희구하였으나 미군이 점령군으로 남한에 상륙하여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친일파를 재등용하고 추곡수집정책을 실시하는 등 제주도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인민위원회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여 탄압하던 중, 1947. 3. 1. 3·1절 기념대회에서 군중들에 대한 발포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항의하는 제주도민들의 3·10 민관총파업에 대하여 미군정이 제주도민들을 90% 이상 빨갱이로 몰고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물론 일반 주민들까지도 연행·투옥·고문하고, 본토에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대량 증파하였는데, 그들이 뇌물수수, 강매, 겁간 등의 악행을 일삼아 제주도민들 사이에 항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던 중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실시되고 조국 분단이 영구화 할 것이 명백해지자 그러한 배경하에서 4·3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4·3 사건 발발 당시 남로당 주도하의 무장대에 의하여 뿌려진 선전전단 중에서 “4월 3일, 오늘 당신의 아들, 딸, 동생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결사적으로 거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에게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기를 들고 궐기했습니다.”라는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4·3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하여 이 사건 비디오는 미군정과 군경토벌대에 의한 제주도민들의 대량 희생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즉 무장대가 5·10 선거가 치루어진 제주도 북제주군의 일부 선거를 무효화시킴으로써 승리하였지만 이에 대한 미군정과 반통일 세력들로부터 대학살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군정이 초토화작전을 거부하는 당시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열을 해임시키고 박진경으로 하여금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여 양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1948. 8. 15.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군이 중산간 마을을 불지르고 소개, 방화, 처형이라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자행했다고 설명하면서 당시 경험자들로부터 북촌리 집단 학살사건 등의 증언 내용을 들어 싣고 있고 정방폭포 등의 관광지 화면을 배경으로 하여 그러한 유명 관광지에서 있었던 학살의 참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 비디오는 그 중반 후반부에 유격대의 죽음과 4·3사건의 종식을 설명하고, 추가하여 6·25 전쟁 발발에 따른 예비검속에 의한 대량학살에 대한 증언도 싣고 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삽입되는 설명에 4·3 사건의 진압행위에 대하여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전율할 대량학살”, “집단학살, 무차별 방화”, “이승만이 말했다. 제주도에 휘발유를 뿌려서 전부 죽여버려라. 제주도민들이 없어도 대한민국 수립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들은 미제와 더불어 동족살육에 나선 것이다.”, “정부군은 특히 정방폭포··· 등의 절경을 배경으로 살인의 미학을 즐겼던 것이다.” 등으로 상당히 과격하고 편향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무장대에 대하여는 “제주도 유격대는 가장 용맹을 떨치는 유격대로 평가···”, “한라산 일대는 하나의 해방구”, “···적들과 끝까지 맞서 싸웠던···.” “장두” 등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사건 비디오는 후반부에 4·3 사건으로 인한 제주도사회에 끼친 물적, 정신적 피해를 언급하고 연좌제에 대한 희생자 가족들의 증언을 실으면서 4·3사건의 공론화와 민족의 통일과 반외세 자주화의 민중항쟁으로 역사에 자리매김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3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음성에 의한 설명 없이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가 작성·발표한 1만 4천여명 정도의 4·3 사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싣고 있는데, 그 화면은 좌익·우익을 가리지 않고 군경토벌대, 서북청년단에 의하여, 또는 무장대에 의하여 죽어간 사람들의 명단을 강요배의 ‘등백꽃 지다’와 표지 그림과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배경음악 아래 싣고 있다.
피고인은 1996. 3.경 위와 같은 내용의 이 사건 비디오 원본 1개, 복사본 3개를 제작·소지하고 있었는데, 그 즈음 일본 동아시아 국제심포지움 사무국에 일하는 일본인 후지나가 타께시 교수로부터 4·3 사건 자료요청을 받고 1997. 2. 24. 대만에서 열리는 동아시아 국제테러리즘 심포지움에 참석하여 그 일본인 교수를 만나 복사본 2개를 전달하고 나머지 복사본 1개는 그 심포지움 사무국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그 후 일본인 교수가 일본어로 번역한 대본을 보내와 1997. 9. 일본어판을 9개 제작하여 1997. 10.경 일본으로 보내려다 이 사건으로 압수당하게 되었다. 한편, 이 사건 비디오는 피고인이 후배 대학생에게 소감을 묻기 위하여 교부하였는데 그것이 제주대학교 총학생회로 유출되어 이후 1996년과 1997년에 걸쳐 전국 100여 개의 대학에 배포되어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에 의하여 일반 대학생 등에게 상영되었고, 그 상영 후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은 반미 자주화 조국통일 투쟁이었던 4·3 사건의 정신을 계승하여 반미투쟁에 나서자는 취지의 구호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나. 이 사건 비디오가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지 여부 및 피고인에게 이적 목적이 있었는지 여부 등에 대한 판단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 제5항 에서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 표현물을 제작·반포·판매 등을 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고, 그 동안 위 조항 내용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 등과 관련하여 그 위헌 여부와 존폐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와 대치하여 대남적화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고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획책하고 있음이 분명한 이상, 언론·출판·학문·예술 등 헌법상 표현의 자유는 그것이 비록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라 하더라도 헌법 제37조 제2항 에 따라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 그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제한할 수 있는 것이고,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국가보안법 제7조 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음을 여러 차례 확인하는 내용의 판결이나 결정을 하여 왔다.
즉 대법원은 표현물의 내용이 국가보안법의 보호법익인 국가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이라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나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하는 한편, 그에 덧붙여 당해 표현물에 그와 같은 이적성이 있는지 여부는 표현물의 전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제작의 동기는 물론 표현행위 자체의 태양 및 외부와의 관련 사항, 표현 행위 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결정하여야 할 것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대법원 1998. 3. 13. 선고 95도117 판결 등 참조).
헌법재판소 역시 당해 표현물이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소정의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 의 적용대상임을 명시적으로 판시하고 있고, 아울러 거기에서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의미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협·침해하고 영토를 침략하며 헌법과 법률의 기능 및 헌법기관을 파괴·마비시키는 것으로 외형적인 적화공작 등을 일컫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준다는 의미는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일인독재 내지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평등의 기본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의 내부체제를 파괴·변혁시키려는 것을 가리킨다고 판시하는 한편, 그러나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 은 국가보안법의 입법목적 등에 맞추어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줄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할 것이라고 거듭 판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1997. 1. 16. 선고 92헌바6 결정 , 1990. 4. 2. 선고 89헌가113 결정 등 참조).
결국, 위 법조항의 문언 내용과 관련 헌법 조항, 대법원 판결과 헌법재판소 결정의 취지 등을 종합하여 보면,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 제5항 은 당해 행위 또는 표현물에 의하여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만 그 구성요건에 해당하여 처벌이 가능한 것으로 그 적용범위를 제한하여야 하며, 특히 표현물의 경우 그것이 이적표현물에 해방하는지 여부는 그 내용이 실질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보호법익인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에 해당하는 경우라야 할 것이고 구체적 판단에 있어서는 그 작성의 동기 등과 아울러 표현행위 자체의 외형적 태양 및 외부와의 관련 사항, 표현행위 당시의 상황 등 제반 상황을 두루 참작하여 판단하여야 하며, 나아가 당해 표현물의 제작·반포 등 행위를 함에 있어 앞서 판시한 이적의 목적이 있어야 국가보안법 제7조 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2) 이 사건 비디오가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지 여부
앞서 보았듯이 피고인은 이 사건 비디오를 제작하기 전까지 제주 4·3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4·3 사건에 관한 글들을 여러 편 써 왔는데, 그러한 글들의 주요내용 내지 방향은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이념 지향적이기보다는 4·3 사건이 제주도민들의 겪은 수난과 항쟁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4·3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미군정측의 탄압에 있다고 보고 그러한 내용을 널리 알리고 특히 4·3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양민의 대량희생을 부각시킴으로써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 비디오의 제작·반포 역시 그러한 시도의 하나로서 4·3 사건을 널리 알려 여론화시키는데 일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우선 그 점에서 피고인의 변소는 일응 수긍이 간다.
이 사건에 있어서 피고인은 앞서 본 민중항쟁설의 입장에 서서 1996. 3.경 까지 4·3 사건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여 대본을 작성하고, 방송물 등의 영상, 화보집의 그림 등을 복사·편집하여 이 사건 비디오를 제작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사건 비디오에 담겨진 4·3 사건의 역사적 배경, 원인, 진행경과에 관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 그러한 자료들을 정리·종합한 수준의 것으로 보이며, 피고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표현 역시 독창적이라기보다는 다른 글이나 작품에서 그대로 베껴 옮기거나 다소 변형한 것이 대부분으로서, 한국의 현대사 연구논문에 종종 등장하는 미군에 대한 ‘점령군’이라는 표현은 접어 두고서라도 문제된 ‘적’, ‘장두’ 등의 표현 역시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에 실린 양한권의 글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어쨌든 원심판결이 판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사건 비디오가 정부수립 전·후로 이어지는 미군정을 ‘점령군’, ‘미제국주의자’, ‘탄압·실정’ 등으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한 제주도민들의 대량 희생을 ‘학살’, ‘살인의 미학’, ‘동족 살육’이라는 과격하고도 직설적인 용어로 그 잔학상을 강조하고, 나아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휘발유를 뿌려 전부 죽여 버려라. 제주도민들이 없이도 대한민국 수립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하면서 미제와 더불어 동족살육에 나섰다.”고 하여 당시 대한민국 정부 또는 정권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면서도 그 반면 당시 남로당 지도하의 좌익세력에 의한 무장투쟁의 준비, 좌익 무장대에 의한 관청, 경찰서, 우익 단체 등에 대한 습격과 테러행위, 우익 민간인 인사의 처형 등에 대하여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용맹을 떨치는 유격대’, ‘적들과 맞서 싸웠던’, ‘해방구’ 또는 ‘장두’ 등으로 표현하여 미화하고 있으므로 그 점에서 이 사건 비디오가 이적표현물이 아닌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개의 표현들은 앞서보았듯이 피고인이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특히 ‘점령군’이라는 표현은 당시 미군 자신이 사용했던 용어법이다.) 미군정보보고서나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의 보고서상에 나타난 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한 희생자의 수가 군경토벌대 측의 희생자 수에 비하여 현격한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4·3 사건의 종식 이후 5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경토벌대 유가족에 대하여는 명예를 세워 주고 보상도 해주어 왔음에 반하여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의 유가족들에 대하여는 아무런 보상도 없고 오히려 억울하게 남로당이나 그 밖에 공산주의자들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피해를 보고 있다는 관점에서 그러한 사람들의 희생과 어려움을 강조하고 극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다소 과격하고 직설적인 표현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일 뿐 그 개개의 표현 자체만을 들어 이 사건 비디오를 이적표현물로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이 사건 비디오 끝 부분에서 피고인이 4·3 사건의 희생자 명단에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무장대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들도 실어 장시간에 걸쳐 보여 주고 있는 사실과 피고인의 다른 글에서 무장대의 학살과 보복도 적지 않았다거나 군경토벌대 역시 나라를 위하여 고분 분투하다 희생되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원심판결은 이 사건 비디오가 당시의 미군정 당국과 대한민국 정부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4·3 사건의 지도부를 역사의 대의와 민중의 보위를 위하여 적들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 쓰러졌고, 유격대와 그 총사령관 이덕구를 ‘장두’라고 표현하여 미화 찬양하고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물론 ‘적’이라는 표현을 그 표현 자체의 문언적 의미만을 중심으로 해석한다면 원심판결과 같이 해석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피고인이 변소하는 바와 같이 양민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대량 희생되었다는 입장에서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데 대한 비인도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과격한 표현법을 쓴 것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또한 원심판결은 피고인이 이 사건 비디오를 통하여 4·3 사건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이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고 직접적으로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조국분단을 조장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기 위한 민중들의 정당한 투쟁, 즉 ‘민족의 통일과 반외세 자주화의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주장은 결국 5·10 단독선거에 의하여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미제국주의자들과 현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물론 앞서 본 민중항쟁설이 근래에 들어 힘을 얻어가고 있는 유력한 견해이고 그러한 견해의 타당성을 이 판결에서 논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민중항쟁설의 입장에서도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구성, 1947. 3. 1.의 발포사건과 그에 이은 민관 총파업, 1948. 4. 3. 새벽에 이루어진 지서 등에 대한 동시 습격, 5·10 선거 반대투쟁, 군경토벌대에 대한 조직적인 무장 대항 등의 일련의 과정에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조직적 관여가 있었던 점은 부인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피고인이 민중항쟁설의 입장에 서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사건 비디오에서 남로당의 관여 정도를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고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들은 미화하고 4·3 사건을 오로지 민중항쟁의 관점에서 반미구국항쟁으로 바라본 것은 반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으며, 또한 피고인이 4·3 사건으로 희생된 양민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목적으로 이 사건 비디오를 제작한 사정 등을 고려하더라도 다소간의 편향성과 사려 깊지 못한 용어 사용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48년 당시의 상황은 국민 대다수가 어쨌든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통일을 열망하는 분위기였음이 김구, 김규식 등 민족지도자들의 행보를 보더라도 알 수 있고 현재도 통일은 우리 민족의 염원인바, 그러한 제반 사정과 제주도민들의 4·3 사건에 대한 인식 내용 등을 고려하면 피고인이 이 사건 비디오에서 4·3 사건을 미제침략자들이 획책한 5·10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제주민중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으로 포장했고, 또 그것이 북한공산집단의 4·3 사건에 대한 이해 내지 평가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가 발간한 ‘력사사건’에 의하면 ‘제주 4·3 폭동’은 “미제침략자들이 날조한 5·10 망국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1948. 4. 3. 제주인민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으로 4·3 인민봉기라고 한다. 제주인민들의 4·3 봉기는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려는 제주도 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완강한 투지를 뚜렷이 보여 주었으며 미제침략자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고 설명되어 있는 반면, 원심 증인 서중석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전사 등에서는 박헌영이 주도하여 일으킨 폭동(조선말사전에 따르면 폭동은 ‘낡은 사회에서 주로 피압박인민대중이 지배계급이나 외래침략자들의 가혹한 억압과 착취에 폭력으로 항거하여 나서는 대중적인 폭력행동’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다.)으로서 박헌영의 무모한 정책으로 실패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 점을 들어 현재의 시각에서 5·10 단독선거의 반대가 바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에 직결된다거나 나아가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그러한 정통성이 없는 대한민국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오히려 피고인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명백히 수인하고 있고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음은 앞서 본 바이다.
물론 피고인이 이 사건 비디오에서 사용한 개개의 표현들을 이 사건 비디오의 전체 내용 내지 피고인의 의도와 분리하여 그 자체만을 떼어내 따로 부각시킨다면 그 집합체인 이 사건 비디오의 이적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앞서 판시한 바대로 이 사건 비디오의 전체 내용과 흐름을 조망하는 한편, 피고인이 이 사건 비디오를 제작, 반포한 주된 동기가 앞서 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당연한 전제로 삼아 그러한 정통성 있는 정부로부터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바라는 것에 있지 현재의 정권에 대한 타도를 결코 염두에 둔 것으로는 도저히 볼 수는 없는 점, 피고인이 북한공산집단이나 한총련 등 기타 이적단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피고인은 당심 제3회 공판기일에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본다고 진술하고 있다.) 등에 비추어 보면, 결국 이 사건 비디오의 내용에 4·3 사건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 등을 찬양·고무하거나 앞서 본 국가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을 담고 있고 그에 해악을 끼칠 명백하고 실질적인 위험성이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할 것이다( 대법원 1991. 4. 23. 선고 91도212 판결 과 1992. 3. 31. 선고 90도2033 판결 은 4·3 사건을 미국과 독재에 항거한 민중의 의지라고 한 교육내용, 미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의 궐기라고 표현한 책자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7조 를 적용하고 있으나, 그 각 사건에서 4·3 사건 관련 부분들은 극히 일부 내용에 불과하고 다른 이적표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4·3 사건 관련 표현만으로 유죄가 확정된 사건이 아니므로 이 사건과 사안을 달리한다).
(3) 이 사건 비디오를 제작, 배포함에 있어 이적 목적이 있었는지 여부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 에서의 목적은 제1항 , 제3항 또는 제4항 의 행위에 대한 적극적 의욕이나 확정적 인식까지는 필요 없고 미필적 인식으로 족하므로, 표현물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보아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선전, 선동 등의 활동에 동조하는 등의 이적성을 담고 있는 것임을 인식하고, 나아가 그와 같은 행위가 이적행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미필적 인식이 있으면 구성요건은 충족되는 것이며, 객관적으로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선전, 선동 등의 활동에 동조하는 등의 이적성을 담고 있는 표현물을 그와 같은 인식을 하면서 이를 제작, 반포하였다면 그 행위자에게는 이적행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미필적 인식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기는 하다( 1996. 12. 23. 선고 95도1035 판결 등 참조). 그러나 오로지 학문적인 연구나 영리추구 및 호기심에 의한 것, 또는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나 피해보상을 위한 것이라는 등의 사정이 인정되면 이적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이 사건의 경우, 이 사건 비디오가 1996년과 1997년에 걸쳐 전국의 100여 개의 대학가에 배포되어 한총련 산하 대학생들이 이를 일반대학생들에게 상영하고 4·3 사건을 찬양하고 그 투쟁정신을 본받아 반미투쟁에 나설 것을 선동하는데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피고인의 이 사건 비디오 제작의도가 애초 그러한 곳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고(비디오 제작 당시 그러한 세력과 어떠한 관련이 있었다고 볼 자료도 없다.) 오히려 한총련 산하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 사건 비디오를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사건 비디오가 대학가로 유출된 경위도 불분명한 바(피고인이 의도적으로 이 사건 비디오를 대학가로 배포했다고 볼 뚜렷한 자료도 없다. ), 그러한 사정과 피고인이 그 동안 제주 4·3 연구소에 재직하고 4·3 사건에 관한 글들 발표한 경력과 행적 및 그 내용, 앞서 본 이 사건 비디오의 제작동기, 비디오 제작의 최종목적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피고인에게 이적 목적이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이 사건 비디오를 이적표현물로 보지 않은 이상 이적 목적 여부에 관해서 살펴 볼 필요조차 없기는 하다).
(4) 여론(여논)
돌이켜 보면, 이는 이 사건 비디오가 민중항쟁설의 입장에서 4·3 사건에 대하여 서술하면서 과격하고 정리되지 않은 표현을 하고 서둘러 4·3 사건을 해석·정의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나, 그러한 역사 해석의 정당성 내지 타당성과 상관없이 이 사건 비디오의 내용과 수준정도로 4·3 사건을 논의하는 것은 우리 헌법이 수호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소의 시행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 현대사의 변혁 과정에서 불행하게 발생한 제주도 4·3 사건에 대하여 건강하고 열린 토론의 장이 마련될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각종의 4·3 사건 진상규명 노력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결국 그 동안 소외된 사람들을 포용하여 제주사람들에게 언제나 엄청난 무게로 다가서는 4·3 사건에 대한 갈등을 뛰어 넘어 제주공동체 의식을 복원하고 보다 낳은 제주사회를 건설하는 발전적인 길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5. 결 론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피고인을 유죄로 처단하였으니, 원심판결에는 사실을 오인하였거나 국가보안법 제7조 소정의 이적표현물, 이적 목적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에 형사소송법 제364조 제6항 에 따라 나머지 항소이유에 대하여는 판단함이 없이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변론을 거쳐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앞서 본 바와 같은데, 앞서 보았듯이 피고인의 행위는 죄가 되지 아니하거나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에 의하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