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공2006.4.15.(248),685]
[1] 형사소송법 제254조 제4항 의 규정 취지 및 공소사실 중 범죄의 시일의 특정 정도
[2] 증명력에 한계가 있는 간접증거만이 존재하고,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자에게 범행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는 경우의 증거평가방법
[3]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을 위한 증거의 증명력 정도
[4] 여러 가지 간접증거가 피고인에게 살인 범행에 대한 혐의를 두기에는 충분하나, 여러 사정에 비추어 그것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피고인의 범행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간접증거만에 의하여 유죄로 인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한 사례
[1] 형사소송법 제254조 제4항 에서 공소사실의 특정요소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법의 취지는 피고인의 방어의 범위를 특정시켜 방어권 행사를 쉽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공소사실은 그 특정요소를 종합하여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실을 다른 사실과 식별할 수 있는 정도로 기재하면 족한 것이고, 위 법규정에서 말하는 범죄의 ‘시일’은 이중기소나 시효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기재하면 되는 것이므로 비록 공소장에 범죄의 시일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지는 않았더라도 그 기재가 위에서 본 정도에 반하지 아니하고, 그에 대한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지장이 없다고 보이는 경우에는 그 공소내용이 특정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2] 범행에 관한 간접증거만이 존재하고 더구나 그 간접증거의 증명력에 한계가 있는 경우,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자에게 범행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만연히 무엇인가 동기가 분명히 있는데도 이를 범인이 숨기고 있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간접증거의 증명력이 그만큼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것이 형사 증거법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하므로,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4] 여러 가지 간접증거가 피고인에게 살인 범행에 대한 혐의를 두기에는 충분하나, 우발적이거나 금품을 노린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치정이나 원한 기타 특수한 동기에서 유발되고 사전에 계획된 보복 범행으로 추단됨에도 범행 동기에 관하여 전혀 밝혀진 바가 없고, 피고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물품이 발견이 쉬운 상태로 허술하게 유기되어 있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하며, 사망 시각 즈음의 피고인과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하여 보면 피고인과 피해자가 함께 있을 시간이 없거나 매우 짧아서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의 여러 사정에 비추어 간접증거들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피고인의 범행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간접증거만에 의하여 유죄로 인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한 사례.
[1] 형사소송법 제254조 제4항 [2] 형사소송법 제307조 , 제308조 [3] 형사소송법 제308조 [4] 형법 제250조 제1항 , 형사소송법 제308조
[1] 대법원 2004. 3. 26. 선고 2003도8077 판결 (공2004상, 767) 대법원 2005. 9. 15. 선고 2005도4440 판결 대법원 2005. 12. 22. 선고 2003도3984 판결 (공2006상, 193) [3] 대법원 2003. 2. 11. 선고 2002도6110 판결 (공2003상, 856)
피고인
피고인
변호사 정재훈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으로 환송한다.
피고인과 국선변호인의 각 상고이유를 함께 판단한다.
1. 상고이유 제2점에 대하여
형사소송법 제254조 제4항 에서 공소사실의 특정요소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법의 취지는 피고인의 방어의 범위를 특정시켜 방어권 행사를 쉽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공소사실은 그 특정요소를 종합하여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실을 다른 사실과 식별할 수 있는 정도로 기재하면 족한 것이고, 위 법규정에서 말하는 범죄의 ‘시일’은 이중기소나 시효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기재하면 되는 것이므로 비록 공소장에 범죄의 시일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지는 않았더라도 그 기재가 위에서 본 정도에 반하지 아니하고, 그에 대한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지장이 없다고 보이는 경우에는 그 공소내용이 특정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 대법원 2005. 9. 15. 선고 2005도4440 판결 참조).
살피건대, 이 사건 공소장에서 이 사건 범행 시간을 2003. 11. 30. 20:00경부터 그 다음날 11:20경까지 사이로 기재하였음은 기록상 명백한바,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은 범행 일시의 기재가 이 사건 공소사실을 다른 사실과 식별할 수 없는 정도이거나 피고인의 방어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으로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고, 따라서 원심판결에 공소사실의 특정에 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는 상고이유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2.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가. 원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원심은 그 채용증거에 의하여 이 사건 피해자 공소외 1이 청산염 중독으로 사망한 사실, 피해자의 집 근처 하수구에서 피해자를 살해하는 데 사용된 청산염이 들어있는 100㎖ 컨디션 병이 발견된 사실, 위 100㎖ 컨디션 병은 75㎖ 컨디션 병과 함께 하나의 파란색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는데 위 75㎖ 컨디션 병에 묻어 있던 타액에서 검출된 DNA가 피고인의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진 사실, 그리고 피해자의 사체 옆 머플러 밑에서 파란 에세 담배 1개비가 발견되었고, 위 파란 에세 담배에 묻어 있던 타액에서 검출된 DNA도 피고인의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진 사실 및 피고인의 집 담 밑에서 피해자 소유의 수첩과 신용카드 5장이 발견된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위 인정 사실을 종합하면 피고인이 피해자로 하여금 청산염이 든 컨디션 음료를 마시게 하여 피해자를 살해하였음을 넉넉히 추단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위 인정의 컨디션 병이나 피해자 소유의 수첩 등이 위 각 장소에서 발견된 것은 누군가 피고인을 모함하기 위하여 일부러 꾸민 것이고, 사체 옆에서 발견된 담배 1개비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사체를 발견한 후에 그곳에서 물고 있던 것을 그대로 두고 나온 것이라는 피고인의 변소는 그 판시와 같은 이유로 믿을 수 없거나 납득할 수 없다고 배척함으로써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였다.
나. 원심이 인정한 위 각 사실은 모두 과학적 검사에 의하거나 현장 조사에 의해 습득한 증거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 사건 범행이 피고인의 소행임을 추단케 하는 유력한 간접사실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피고인의 변소 내용에도 일관성이 없거나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아니하여, 일응 피고인을 피해자 공소외 1을 살해한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는 것은 당연한 추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피고인이 모함을 주장하며 경찰 이래 원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여 범행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는 이 사건에 있어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여러 정황을 염두에 두고 약간만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위 간접사실에 의해 바로 피고인이 피해자 공소외 1을 살해하였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허점이 있다.
수사기록에 있는 실황조사서(수사기록 8쪽)와 부검에 관한 수사보고서(수사기록 44쪽)의 각 기재 내용에 의하면, 피해자 공소외 1은 그의 집 거실에서 완전 나체인 상태로 그 주검이 발견되었고, 팬티와 상의 및 하의는 각 그 주위에 흩어져 있었던 사실, 피해자는 청산염에 의해 살해되었음이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발견 당시 턱 아래와 목 주위에 칼로 찔린 자국이 26군데나 있었고 그 상처들은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에는 깊이가 8㎝와 5.5㎝ 정도나 되는 깊은 상처도 있었던 사실, 피해자가 반항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옷에도 혈흔이 묻어 있지 않았으며 그 현장에서는 피해자의 머플러 아래에 에세 담배 1개비와 라이터(담배는 불을 댕긴 적이 없는 온전한 1개비로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사체를 발견한 후에 라이터와 함께 그곳에 두고 왔다고 변소하는 물건이다.)가 발견된 점 외에는 지문 기타 증거가 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던 사실, 피해자가 착용하고 있던 금목걸이, 금반지, 금팔찌 등의 귀금속 장신구는 사체에 그대로 착용되어 있었고 작은 방의 장롱 위에 피해자의 금목걸이가 그대로 놓여져 있었던 반면 안방에 있는 화장대의 서랍은 난폭하게 빼어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더덕을 담은 술병도 깨어져 있었으며 실외용 샌달이 방바닥에 들어와 있었고, 작은 방의 장롱도 문이 열린 채 옷가지와 집기류 등이 방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던 사실, TV는 전원이 켜진 채로 있었고 현관문도 시정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사실 등을 엿볼 수 있다.
위 인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범인이 컨디션 음료로 가장한 청산염을 미리 준비하여 그것으로 피해자를 살해한 다음 다시 칼로 26군데나 찌르고, 귀금속 등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가구를 부수고 방을 어지럽히기도 한 점 등 엽기적인 범행 현장의 모습에 비추어, 이 사건 범행은 우발적 또는 금품을 노린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치정이나 원한 기타의 특수한 동기에 유발되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보복 범행으로 추단되고, 또한 피해자의 사체가 완전 나체이면서도 반항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피해자가 스스로 옷을 벗었거나 아니면 범인이 청산염으로 먼저 피해자를 살해한 다음 그의 옷을 벗긴 후 칼로 찔렀다고 보아야 할 터인데{피해자의 티셔츠에 혈흔이 없는 것으로 보아(수사기록 409쪽 참조) 옷을 입은 채로 칼에 찔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이 사건은 남자의 범행일 가능성이 높고, 후자의 경우라면 매우 잔인한 수법의 범행으로서 그러한 행동을 유발할 만한 강력하고 충동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 먼저, 이 사건 범행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고 범인이 살해 현장에 지문과 같은 작은 단서도 전혀 남기지 않을 정도로 용의주도하였음을 감안하면, 담배 1개비나 라이터와 같은 비교적 눈에 잘 띄는 물건을 현장에 유류하였다는 것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아니한다. 경찰에서의 압수조서(수사기록 52쪽, 56쪽, 152쪽)에 의하면, 범인이 범행에 사용한 컨디션 병과 칼은 범행 장소에서 불과 22m 떨어진 하수구(수사기록 190쪽)에 버려져 있던 것을 수사 경찰이 하수도 복개용 뚜껑 사이의 틈을 통해 발견하여 이를 수거하였고, 피해자의 수첩과 신용카드 등도 피고인의 집과 외벽 사이의 작은 공간에 노출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바, 이러한 물건은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물건인데 범인이 이를 발견되기 쉬운 상태로 허술하게 유기하였다는 점(소송기록 174쪽, 179쪽)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귀금속 등에 손도 대지 아니한 범인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피해자의 수첩이나 카드 등을 가지고 나와 자신의 집 담 안쪽 공간에 노출 상태로 버려두었다는 것은 극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위와 같이 발견된 증거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뿌리치기 어렵고, 이로써 그 증명력은 심히 훼손된다 할 것이다.
라. 피해자의 사체부검결과(수사기록 44쪽)에 의하면 피해자 사체 내에 남아 있던 미나리 등 음식물 상태로 보아 그가 사망한 시각은 대략 식후 1시간 정도 된 때로 추단된다고 하는바, 피해자가 위 음식물을 섭취한 것은 울산시 (상세 지명 생략) 소재 (식당명 생략)가든에서 열린 친목계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떠난 2003. 11. 30. 18:00경부터 19:30~40 경 사이인 것으로 보이므로(수사기록 571쪽 이하) 결국, 그의 사망 시각은 대략 같은 날 20:30 전후의 1시간 사이인 것으로 추단할 수 있다(이 사건 수사도 대략 그 시각 즈음에 피해자가 사망하였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시각 즈음의 피고인과 피해자의 각 행적을 추적하여 보면, 논리적으로 피고인과 피해자가 피해자의 집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거나 매우 짧아서 그 시간에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즉, 피해자는 그 날 저녁 위 친목계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19:30경 시각에 콜택시를 불러 혼자 그 자리를 빠져 나왔는데(수사기록 571쪽 이하), 그 택시기사 공소외 2의 진술에 의하면(수사기록 80쪽) 피해자는 계모임 자리를 급히 떠나는 바람에 소지품인 작은 고추(‘땡초’라고 함)를 두고 왔다가 이를 택시가 출발한 약 2분 후에야 알고(‘땡초를 두고 나왔다’는 피해자의 말을 들은 운전기사가 ‘다시 돌아갈까요?’하고 물어보았다는 진술에 비추어 그 때가 택시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어 그 시각이 출발 후 약 2분 정도 되었을 때라는 운전기사의 진술은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계모임에 남아있던 일행 중 한 사람인 공소외 3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모임이 파하면 위 땡초를 피해자의 집에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조회결과 그 통화 시각은 17:51으로 밝혀졌다(수사기록 204쪽). 피해자는 그의 주거지 근처에 있는 (약국명 생략)약국의 약 20m 못 미친 지점에서 택시를 내려 신원 미상인 여인과 합류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그곳에서 피해자의 집까지는(위 (약국명 생략)약국에서 약 98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수사기록 188쪽) 걸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위 (식당명 생략)가든에서 피해자의 주거지까지는 택시로 약 25분 내지 30분 소요되었다는 것이므로(수사기록 82쪽), 출발 약 2분 후에 택시 안에서 전화통화한 시각이 19:51이라면 피해자가 집에 도착한 시각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20:10이 넘어야 할 것이고 여유 있게 잡는다면 20:20이 넘어서야 도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피고인의 바로 앞집에 사는 공소외 4의 진술에 의하면(수사기록 104쪽, 588쪽 611쪽, 소송기록 90쪽 이하 등), 피고인은 그 날 밤 공소외 4의 집에 가서 자정이 넘는 시각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소주 4병을 나누어 마셨는데, 그들이 술안주로 하기 위해 인근 중국음식점에 전화로 음식을 주문한 시각이 20:40으로 밝혀졌고(수사기록 294쪽), 또 공소외 4의 집 바로 옆에 소재한 신발가게 주인 공소외 5의 진술에 의하면(수사기록 660쪽, 소송기록 119쪽) 피고인은 공소외 4의 집에 가기 직전에 위 신발가게에서 10분 내지 20분간 공소외 5의 외손자를 업어주며 놀다가 갔다는 것이므로 그 시각을 역산해 보면 빠르면 20:20경, 늦어도 20:30경에는 피고인이 위 신발가게에 있은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공소외 5는 20:20경 피고인이 그의 가게에 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 공소외 1의 집에서 위 신발가게까지는 약 265m 떨어져 있어 남자의 통상 걸음걸이로 약 3분(수사기록 187쪽, 소송기록 161쪽) 소요된다는 것이니(50대 여인인 피고인의 걸음 속도로는 이보다 더 걸린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지만 보통의 경우보다 빠른 경우를 상정해 본다), 피고인이 위 시각에 신발가게에 있기 위해서는 빠르면 20:17경, 늦어도 20:27경에는 피해자의 집을 나서야 한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 공소외 1의 사망 시각을 즈음하여 피고인과 피해자가 피해자의 집에 함께 있는 것이 가능한 시간은 최고로 길게 잡아 20:10경부터 20:27경까지 17분을 넘을 수 없고, 오히려 그보다 더 짧을 가능성이 농후한바, 이 사건 범행의 엽기성과 범행 현장의 상황, 피고인의 연령 등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이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혼자서 이 사건 범행과 그 전후의 과정을 모두 실행하고 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고, 위와 같은 시간적 배열관계로 보아 그 즈음에 피고인과 피해자가 함께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극단적 주장도 못할 바 아니어서, 과연 이 사건 범행이 피고인의 소행인지에 대하여 심히 의문을 가지게 하고 있다.
마. 그 위에, 피고인이 범인이라면 피해자가 완전 나체인 상태로 사망하고, 사체가 칼로 26군데나 잔인하게 찔려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범행에는 필시 매우 강하고 충동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피고인에게 그와 같은 동기가 있다는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고인은 사건 발생 얼마 전에 피해자와 알게 되어 그 동안 친구로서 가까이 지내온 사이임이 기록 곳곳에 나타나고 있고, 확인되지 아니한 신빙성 없는 소문 외에는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졌거나 원한관계가 있음직한 하등의 단서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이 사건과 같이 범행에 관한 간접증거만이 존재하고 더구나 그 간접증거의 증명력에 한계가 있는 경우,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자에게 범행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만연히 무엇인가 동기가 분명히 있는데도 이를 범인이 숨기고 있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간접증거의 증명력이 그만큼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것이 형사 증거법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것이고 , 따라서 별다른 동기도 없는 피고인이 잔인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하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무리한 추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피해자는 계모임의 도중에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는 것인바, 피고인과 피해자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평소에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바로 사건 발생 당일 낮에도 함께 만난 일이 있음을 감안하면(수사기록 24쪽, 88쪽 등), 피해자가 계모임을 다 마치지도 않고 중도에 떠나올 만큼 중요한 약속이 바로 피고인과 만날 약속이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라 하겠고, 나아가 피해자는 오래 전에 이혼한 다음 도박판에 돈을 대어주고 고리를 취하는 이른바 ‘꽁지’로 혼자 생활하여 온 여인으로서 그 사생활을 다소간 은비하며 살아 온 까닭에 주변이 베일에 가려져 있고, 그런 중에서도 도박판을 자주 벌이고 이성관계도 맺어온 흔적이 감지되는데도(수사기록 24, 29쪽, 68쪽 이하, 120쪽, 192쪽 등) 그 주변에 이 사건 범행의 또 다른 요인이 있는지에 관하여는 수사가 별로 이루어진 흔적이 없어 동기에 관한 의문을 더해주고 있다.
바.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하므로,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 대법원 2003. 2. 11. 선고 2002도6110 판결 참조). 이러한 법리를 염두에 두고 위에서 본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원심이 거시하는 여러 가지 간접증거는 피고인에게 이 사건 범행에 대한 혐의를 두기에는 충분하다 하겠으나, 그것만으로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피고인의 범행이 증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간접증거에 의해 피고인을 유죄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 범행이 발생한 당일 저녁의 피고인과 피해자의 행적을 보다 면밀히 조사하여 과연 피고인이 범행을 실행할 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지 여부, 피고인에게 피해자를 잔인하게 살해할 만한 동기가 있는지 여부, 범행이 위에서 본 시각과 전혀 다른 시각에 발생하였다고 볼 여지가 있는지 여부 등을 더 심리함으로써 이 사건 범행이 피고인의 소행이었다고 보기에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에 이르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조치에 나아감이 없이 위 간접증거만에 의하여 바로 피고인을 유죄로 인정한 원심판결에는 결국, 채증법칙 위반이나 심리미진으로 인하여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할 것이어서 이 점을 지적하는 상고논지는 이유 있다 할 것이다.
3. 결 론
그러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게 하기 위하여 원심법원으로 환송하기로 하여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