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항소인
원고 1 외 1인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서초 담당변호사 박상기)
피고, 피항소인
법무부장관 (소송대리인 정부법무공단 담당변호사 김완기)
변론종결
2011. 11. 3.
주문
1. 제1심판결을 취소한다.
2.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09. 2. 26. 구리시 인창동 (주소 2 생략) 임야 3,226㎡ 및 같은 동 (주소 3 생략) 임야 1,948㎡에 대하여 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귀속처분을 취소한다.
3. 소송총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
청구취지 및 항소취지
주문 기재와 같다(청구취지 및 항소취지 기재 ‘(주소 2 생략) 5,226㎡’는 ‘(주소 2 생략) 3,226㎡’의 오기로 보인다).
이유
1. 처분의 경위
가. 소외 1(1867. 8. 22. ~ 1932. 9. 8.)은 고려조 호장공을 시조로 하는 반남박씨 종중의 23세손으로 1904년 2월경 러·일전쟁 개전 이후 관제의정소 위원, 농상공부 참서관, 서기관 등을 거쳐 1910. 10. 1.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에, 1921. 4. 28. 참의에 임명되어 1924. 4. 26.까지 중추원에서 근무하였다.
나. 소외 1은 1913. 11. 10. 경기 양주군 구리면 (주소 1 생략) 임야 4,329평을 사정받았고, 1958. 2. 12. 위 임야에 관하여 소외 1의 형인 소외 8의 장자(장자) 소외 9와 소외 1의 동생인 소외 10의 장자 소외 11 명의로 증여를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그 후 1981. 8. 21. 부동산소유권 이전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하여 소외 11의 손자인 원고 1과 소외 9의 손자인 원고 2 명의로 위 임야에 관한 소유권보존등기가 마쳐졌는데, 위 임야는 구리시 인창동 (주소 2 생략) 임야 3,226㎡ 및 같은 동 (주소 3 생략) 임야 1,948㎡ 등으로 분할되었다{이하 위 인창동 (주소 2 생략) 및 (주소 3 생략) 임야를 분할 전·후를 불문하고 ‘이 사건 임야’라고 한다}.
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이 사건 조사위원회’라고 한다)는 이 사건 임야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친일재산귀속법’이라고 한다) 제2조 제1호 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이하 ‘친일재산’이라고 한다)인지 여부에 관한 조사를 거쳐, 2009. 2. 26. 소외 1이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1호 가목 에서 정한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대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하고, 이 사건 임야는 같은 조 제2호 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 8. 15.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를 받은 재산’(이하 ‘친일재산’이라고 한다)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원고들에 대하여 이 사건 임야를 취득원인행위시에 소급하여 국가의 소유로 귀속시키는 결정을 하였다(이하 ‘이 사건 처분’이라고 한다).
라. 이 사건 조사위원회가 2010. 7. 12. 그 활동을 종료함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관련 소송업무 승계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피고가 조사위원회의 소송업무를 승계하였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1, 7 내지 9호증, 을 제1, 2호증(각 가지번호 포함)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이 사건 처분의 적법 여부
가. 원고들의 주장
원고들은, ① 이 사건 조사위원회가 친일재산으로 결정한 재산을 그 취득·증여 등의 원인행위시에 국가의 소유로 귀속되도록 규정한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 본문(이하 ‘이 사건 귀속조항’이라고 한다)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점, ②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 8. 15.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함으로써 그 재산의 소유자로 하여금 국가를 대신하여 당해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규정한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2호 후문(이하 ‘이 사건 추정조항’이라고 한다)도 헌법에 위배된다는 점, ③ 소외 1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의 조사주임으로 활동하면서 사료(사료) 수집 등의 업무만을 수행하였을 뿐이고 일본 제국주의를 위하여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어떠한 ‘능동적, 구체적 활동’을 한 바 없으므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는 점, ④ 토지·임야조사사업에 따른 사정(사정)행위는 사정명의인이 해당 토지나 임야에 대한 기존의 소유권을 재확인받는 절차에 불과하므로, 이 사건 추정조항의 ‘취득’에 포함되지 않는 점, ⑤ 설령 이 사건 추정조항이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임야는 러·일전쟁 개전 이전에 사망한 원고들의 선조의 분묘가 다수 설치되어 있었던 묘산(묘산)으로서 소외 1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고유재산이므로 추정이 깨어졌다는 점, ⑥ 원고들의 조부(조부)인 소외 9, 소외 11은 소외 1의 조카들로서 이 사건 임야를 증여받을 당시 친일재산임을 전혀 알지 못하였으므로 이 사건 임야는 친일재산에 해당하지 않는 점, ⑦ 원고들은 등기부취득시효의 요건을 구비하여 이 사건 임야를 시효취득하였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여 이 사건 처분이 위법하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나. 관련법령
별지 관련법령 기재와 같다.
다. 조선시대 토지·임야의 소유권 변동과 일제하의 사정
조선 전통사회에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가 있었는지에 관하여 종래 부정하는 견해가 주류였으나, 토지의 대부분이 사전이었고 영소작권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자유로운 토지 양도가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가 존재하였다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토지의 양도방법에 관해서도 경국대전에는 관청에 입안(입안)함으로써 소유권증명인 입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문기(문기)라는 사문서를 통한 소유권이전이 일반적이었으며, 근대적인 공시제도는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제는 통감부 시절부터 등기제도의 준비를 위하여 토지가옥증명규칙(1906. 10. 31.)을 실시하고, 지적공부작성과 지세징수를 위하여 결수연명부(1907), 지세징수대장(1908)을 작성하였으며, 국유지조사를 위하여 역둔토실지조사를 실시하여 역둔토대장과 국유지대장을 작성하였다. 일제는 경술국치 이후 1910년 9월경 대한제국이 토지조사를 위하여 설치하였던 토지조사국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으로 개편하고, 1912. 8. 13.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본격적인 조사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조사대상 중 임야가 포함되었으나 이는 전·답 사이에 산재해 있는 개재지(개재지)였고, 대규모 임야는 그 후 있었던 임야조사사업의 대상이었다. 전자는 일반적인 토지지번, 후자는 산지번을 각 부여하여 양자를 구별하였고, 실무상 전자를 토임야, 후자를 산임야라고도 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원칙적으로 소유자의 신고에 따랐는데, 사유지는 소재, 지목, 사표(위치) 등을 서면으로 신고하도록 하였고, 신고서의 내용을 일차적으로 결수연명부와 대조하도록 하였으나 신고된 내용대로 사정된 비율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토지가옥증명규칙, 조선부동산증명령(1912. 3. 22. 종래의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을 대신한 것으로 기존의 규칙들이 실질심사주의에 의하였다면 조선부동산증명령에 의해 형식주의로 전환되었다) 등에 따라 명백히 권리를 증명한 소유자들에게는 편의를 위하여 당해 신고서에 증명번호를 기재하도록 하여 달리 취급하였고, 토지조사부 적요란에 그와 같은 내용을 기재하였다. 임시토지조사국은 조사 후 지방토지조사위원회의 자문을 거친 후 그 결과를 공시하는 절차를 거쳐서 사정하였고, 이의신청이 없는 경우 공시된 내용대로 확정되었다. 사정에 불복하는 사람은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 재결을 구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08년 삼림법 시행 후 ‘삼림 산야 및 미간지 국유사유 구분표준’(이하 ‘표준’이라고 한다)을 시행하면서 일정한 경우 사유가 인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는데, 이는 삼림법 시행 당시 비로소 조선의 산림국유의 원칙이 변경된 것이 아니라 당시 산림 소유의 현실을 반영하여 사유 인정의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위 표준은 ①결수연명부에 등재되어 있거나 등재되지 않더라도 지세가 부과된 사실이 확실히 있는 곳, ②토지가옥증명규칙 시행 이전에 관청으로부터 사유로 인정받은 곳, ③토지가옥증명규칙 및 토지가옥소유증명규칙의 증명에 의하여 사유로 인정된 곳, ④토지조사령 처분에 의해 사유로 인정된 곳, ⑤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패지, ⑥관청이 환부·대여·양도한 증서가 있는 임야, ⑦융희2년(1908년) 칙령39호 이전에 궁내부에서 사인에게 환부·양여한 곳, ⑧영년수목을 금양한 곳, ⑨조선총독이 특별히 지정한 곳을 사유로 정한다. 위 표준 외에 ‘삼림법 시행 전 적법하게 점유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금양을 해 왔고, 현재 평균 입목도 3/10 이상에 달하는 곳’이라는 판정기준을 함께 적용하였다.
라. 판단
1) 이 사건 추정규정과 귀속규정의 위헌 여부
이 사건 추정규정과 귀속규정에 관하여 헌법재판소의 합헌결정( 헌법재판소 2011. 3. 31. 선고 2008헌바141 등 결정 참조)이 내려진 후 대법원도 다음과 같은 사유로 같은 취지의 판결( 대법원 2011. 6. 24. 선고 2010두3169호 판결 등 참조)을 계속하여 위 규정들의 합헌성을 구체적 사건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이상의 판단과 달리 위 규정들을 위헌이라고 할 만한 사유가 발견되지 아니한 이상, 위 규정이 위헌임을 전제로 한 원고들의 주장은 이유없다.
가) 먼저 이 사건 추정규정에 관하여 살피건대,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라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해방 이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사이에 한국전쟁 등이 발발하여 부동산의 소유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멸실됨으로써 어떠한 재산이 친일협력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인지 여부를 국가측이 일일이 증명하는 것은 심히 곤란한 상태인 반면, 일반적으로 재산의 취득자 또는 그 후손들은 재산취득과 관련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거나 그 재산의 취득내역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추정규정이 재산의 취득자 측에게 재산 취득 경위를 증명하도록 한 것이 현저히 부당하다고 볼 수 없고, 추정규정을 둘 현실적 필요성과 비교하여 그 추정을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에게 전가되는 증명책임의 범위나 부담은 여러 사정에 비추어 과도하다고 보이지 아니하므로, 추정규정이 일정한 증명책임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에게 분담시키고 있다고 하여 이를 두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였다거나 입법자가 자신의 재량을 일탈· 남용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하거나 적법절차의 원칙을 위반하였다고 볼 수 없다.
나) 다음으로 귀속규정에 관하여 살피건대, 이 사건 귀속규정은 진정소급입법에 해당하지만 진정소급입법이라고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국민이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거나 신뢰보호의 요청에 우선하는 심히 중대한 공익상의 사유가 소급입법을 정당화하는 경우 등에는 헌법상 허용된다고 할 것인데, 친일재산의 소급적 박탈은 일반적으로 소급입법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예외적 영역으로서 이 사건 귀속규정과 같은 진정소급입법에서 비롯되는 법적 안정성이나 신뢰에 대한 침해는 반드시 심각하다고 보기 어려운 반면, 이를 통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입법목적에 대한 헌법적 요청이나 공익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귀속규정이 진정소급입법이라는 이유만으로 헌법 제13조 제2항 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다) 또한 귀속규정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그 입법목적이 정당하고, 민법 등 기존 재산법 조항의 해석 및 적용에 의존하는 방법만으로는 친일재산의 처리가 어려운 점에 비추어 적절한 수단이며, 사안이 중대하고 범위가 명백한 네 가지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자의 친일재산으로 그 귀속대상을 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으로 조사위원회가 결정한 자에 대하여는 다시 예외를 인정하여 귀속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측은 그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여 국가귀속을 막을 수 있고 선의의 제3자에 대한 보호 규정도 마련되어 있는 등 헌법적 정당성에 기초한 입법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제한적으로 채택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여기에 헌법상 보장되는 재산권의 본질을 침해하는 요소가 있다거나 피해의 최소성 원칙,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는 점이 있다거나 헌법 제23조 의 재산권보장 원칙을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2) 친일반민족행위자 해당 여부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1호 가목 본문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족진상규명법’이라고 한다) 제2조 제6호 내지 제9호 의 행위를 한 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있고, 반민족진상규명법 제2조 제9호 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다만 친일재산귀속법 제2조 제1호 가목 단서는 “다만,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으로 피고가 결정한 자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규정을 종합하여 보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활동한 자는 그 자체로 일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되, 다만 그 중에서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으로 피고가 결정한 자만을 예외로 하기로 정한 것이다.
을 제1호증의 1 내지 3의 각 기재에 의하면, 소외 1은 1910. 10. 1.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된 이래 1921. 4. 28.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1924. 4. 26.까지 일하였는데, 1910년 당시 부찬의는 35인, 1921년 당시 참의는 65인으로 그 직에 선출된 사람이 소수였고, 소외 1이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을 위하여 일하면서 식민통치의 이론적 근거를 만드는데 조력하면서 수당도 지급받았던 사실, 소외 1은 그 공을 인정받아 다이쇼대례기념장까지 받았던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소외 1이 단지 중추원참의로 임명된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직에 맞게 활동하였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소외 1은 친일재산귀속법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3) 이 사건 추정규정의 적용범위
원고들은, 사정 이전에 매매·상속과 같이 소유권을 얻게 된 사유들이 친일재산귀속법상 취득에 포함될 뿐 단지 소유권의 존재를 확인하는데 불과한 사정은 위 취득의 개념에 포함될 수 없으므로, 이 사건에서는 소외 1이 이 사건 임야를 사정받은 시점이 아닌 그 이전에 상속받은 시점이 취득시점에 해당하고, 이는 러·일 전쟁 이전이므로 이 사건 추정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1986. 6. 10. 선고 84다카1773호 판결 이후 토지나 임야의 사정명의인이 해당 토지나 임야를 원시취득하는 것이고 기존의 권리관계는 모두 소멸되며 사정으로 인하여 소유권을 창설적으로 취득하는 것으로 일관되게 판단해 왔으므로, 사정 이전의 사유가 취득에 해당하고 사정 자체는 취득이 아니라는 원고들의 주장은 독자적인 견해에 불과하여 이유없다.
한편, 이 사건 추정규정에서 규정한 ‘취득’에 ‘사정’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원고들 주장은, 사정의 경우 추정의 번복이 사실상 불가능하여 친일재산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원고들 주장의 당부 판단을 위하여 위 규정의 문언적 의미, 입법취지뿐 아니라 실제로 친일재산 추정이 복멸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으므로, 이에 관하여 본다.
먼저 이 사건 추정규정은 법문 자체에서 위와 같이 취득의 형태를 구분하여 규정하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친일재산귀속법의 입법취지는 일제시대에 토지를 사정받았으나 소유권보존등기를 하지 못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이 친일재산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이와 같은 행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에 기초하여 일차적으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의 재산반환소송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제정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위 법의 제정과정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그대로 드러나 법제사법위원회 위원들 사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사정을 통하여 재산을 취득한 경우에도 무효로 하여야 한다는 점에 관하여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구체적으로 초안 제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취득행위’에 사법상의 법률행위 외에 공법상의 행위인 사정행위를 어떻게 포섭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었다.
앞서의 조선시대 토지 및 임야 사정과 관련된 내용에 비추어 보면, 1908년 삼림법 시행 후 마련된 표준에서 정한 요건을 구비할 경우 이를 사유지로 인정받는 것이 가능하였고, 임야의 경우에도 소유권 인정의 근거가 되는 계권의 발급대상이었으며 개재지의 경우 조선부동산증명령에 의한 입증 역시 가능하다. 이와 같이 사정받은 임야의 경우에도 그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 종래 사유재산의 소유권을 확인받은 것이라는 점 등을 증명하여 추정을 복멸시킬 수 있으므로 위 추정규정이 재산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간주규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대법원 2011. 6. 24. 선고 2010두3169호 판결 참조).
4) 이 사건 친일재산 추정의 복멸 여부
가) 판단기준
앞서 본 바와 같이 일제하에서 토지조사령의 시행에 따라 개재지인 임야를 사정함에 있어서 신고주의에 입각하여 이미 1908년 삼림법의 시행 등으로 사유로 인정받은 소유자 등에 대하여 그 소유권을 취득하게 하였다. 만일 당시 임야의 사정명의자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할 당시 1908년 삼림법이나 위 표준상의 사유요건을 갖춘 소유자였던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사정에 의한 임야 취득을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이 경우 앞서 본 친일재산귀속법상의 추정은 깨어진다고 할 것이다.
나) 인정되는 사실관계
(1) 이 사건 반남 박씨 종중은 21세손 소외 2가 후사가 없자 동생 소외 3의 장자 22세손 소외 4를 입양하여 종손으로 삼았고, 소외 4 역시 후사가 없자 동생 소외 5의 차남 23세손 소외 1을 입양하여 종손으로 삼았다.
(2) 이 사건 임야에는 반남 박씨 19세손 종손 소외 6과 그 처 해주 오씨, 20세손 종손 소외 7의 처 여산 송씨와 남양 홍씨, 21세손 종손 소외 2, 소외 1의 생부 22세손 소외 5와 그 처 동래 정씨 등 반남 박씨 종중에 속한 소외 1의 선조들 중 종손집안의 분묘 7기가 있었고, 이들 분묘는 족보에 나타난 묘주의 사망시기 등에 비추어 1784년경부터 1911년경까지 사이에 각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토지조사부상 이 사건 임야 부분의 적요란에 아무런 기재가 없다.
(3) 한편 이 사건 임야는 1정보 이내로 반남 박씨 종손가문의 위 분묘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벌목을 금지하고 나무를 기르는데 이용된, 지대가 낮은 이른바 토임야에 해당하고, 주변이 대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사건 임야에 인접한 토지인 구리시 (주소 4 생략) 대 1,114㎡는 반남 박씨 참판공파문중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가 마쳐져 있다. 위 분묘들 중 소외 1의 생부모인 소외 5, 동래 정씨의 분묘는 이 사건 임야 가운데 (주소 2 생략)에, 나머지 분묘들은 같은 임야 (주소 3 생략)에 산재해 있다가 2005년경 이 사건 임야가 공원부지로 편입되면서 이장되었다.
다) 판단
앞서의 판단기준에 위 인정사실들을 비추어 보면, 이 사건 임야에 인접한 토지가 종중의 소유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이 사건 임야를 바로 종중 소유로 단정할 수는 없고( 대법원 1996. 6. 14. 선고 96다2729 판결 ), 이 사건 임야는 우리의 전통적 사고에 따라 종손에게 물려 내려오던 묘산으로 보인다( 대법원 2003. 2. 11. 선고 2002다37320 판결 참조). 비록 이 사건 임야에 관한 토지조사부의 적요란에 기존의 소유관계를 증명하는 내용의 기재가 없고, 이 사건 임야가 소외 1 이후에는 종손이 아닌 후손들에게 소유권이 물려 내려 오기는 하였으나, 이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분묘의 설치·관리를 위하여 금양해 오던 것으로 보이는 임야는 사정 당시 이미 삼림법이나 표준상의 사유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므로, 사정에 의한 이 사건 임야 취득을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사건 임야에 관한 친일재산귀속법상의 추정은 깨어진다고 할 것이다.
5) 소결론
따라서 이 사건 임야에 관한 친일재산 추정이 깨어진 이상 원고들의 기타 주장에 관하여는 나아가 살펴 볼 필요가 없이 이 사건 처분은 위법하여 취소되어야 할 것이다.
3. 결 론
그렇다면 제1심판결은 부당하므로, 원고들의 항소를 받아들여 제1심판결 및 이 사건 처분을 모두 취소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별지 관련 법령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