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문]
【당 사 자】
청 구 인 1. 이○승 외 14인 (2000헌마238)
청구인들 대리인 변호사 정기승 외 1인
법무법인 사랑 담당변호사 나석호
법무법인 동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이진우
2. 정○화 외 332인 ( 2000헌마302 )
청구인들 대리인 변호사 전창열 외 3인
홍익법무법인 담당변호사 김영균
법무법인 사랑 담당변호사 나석호
법무법인 동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이진우
청구인들의 심판청구를 각하한다.
1. 사건의 개요 및 심판의 대상
가. 사건의 개요
(1) 2000헌마238
(가)청구인 박○주는 제주4·3사건 진압작전을 지휘 중이던 1948. 6. 19. 공산당 비밀요원이었던 부하사병에 의하여 피살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대령 박○경의 사후양자로 1954. 4. 30. 입양된 자이고, 청구인 정○휴는 제주4·3사건 당시 공산무장유격대원에 의하여 가족이 피살된 자이며, 청구인 이○승, 김○산, 문○제, 손○은 제주4·3사건 당시 반탁전국학생총연맹위원장, 위 연맹 제주도위원장, 서북청년회 총본부 위원장, 서북청년회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각 5·10 제헌국회 총선거지지활동을 전개한 자들이고, 청구인 강○훈, 최○희, 김○민, 채○신, 임○태, 백○진, 백○주, 양○식은 제주4·3사건 당시 진압작전에 직접 참여하였거나, 당시 군지휘부에 근무하면서 제주4·3사건 진압에 관여한 자들이며, 청구인 이○식은 일반시민이다.
(나)청구인들은 제주4·3사건이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 건설의 시발점이었던 1948. 5. 10. 제헌국회의원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북한 공산당 및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이라 한다)의 전략전술에 의거한 제주도 일원의 공산무장반란이고, 공산반란군에 의하여 경찰, 군인, 양민들이 피살되거나, 상해를 입고, 많은 재산상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 사건 법률조항이 공산무장유격대(자칭 ‘인민유격대’, 이하 ‘무장유격대’라고 한다)를 경찰, 군인, 양민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위령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헌법에 규정된 자유민주적기본질서, 평등권 등을 침해하였다는 이유로 2000. 4. 6.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2) 2000헌마302
(가)청구인 유○흥 외 6명은 제주4·3사건 진압에 직접 참여한 군인들이고, 청구인 박○주는 (1)의 (가)와 같은 경위로 피살된 박○경 대령의 사후양자이며, 청구인 정○화 외 161명은 6·25동란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이고, 청구인 김○태 외 162명은 6·25동란 이후에 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친 자들이며, 청구인들은 모두 대한민국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원들이다.
(나)청구인들은 위 2000헌마238사건에서 설시한 바와 같이 이 사건 법률조항으로 인하여 청구인들의 평등권등 헌법상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취지로 2000. 5. 10.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나. 심판의 대상
따라서 이 사건의 심판의 대상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0. 1. 12. 법률제6117호로 제정된 것, 이하 ‘법’이라 한다)의 제명(題名), 제1조, 제2조 제1호, 제2호, 제3조 제1항, 제2항, 제8조, 제9조 제1항, 제3항, 제11조(이하 ‘이 사건 법률조항’이라 한다)이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조(목적) 이 법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2.“희생자”라 함은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후유장애가 남아있는 자로서 제3조제2항제2호의 규정에 의하여 제주4·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자를 말한다.
3. 생략
제3조(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①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법에 의한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결정 및 명예회복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하에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라 한다)를 둔다.
② 위원회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심의·의결한다.
1.제주4·3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국내외 관련 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관한 사항
2.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결정에 관한 사항
3.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에 관한 사항
4.진상조사보고서 작성 및 사료관 조성에 관한 사항
5. 위령묘역 조성 및 위령탑 건립에 관한 사항
6.제주4·3사건에 관한 정부의 입장표명 등에 관한 건의사항
7. 이 법에서 정하고 있는 호적등재에 관한 사항
8.기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하여 대통령령이 정하는 사항
③ 생략
④ 생략
제8조(위령사업) 정부는 제주4·3사건 희생자를 위령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며 위령제례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다음 각호의 사업시행에 필요한 비용을 예산의 범위내에서 지원할 수 있다.
1. 위령묘역 조성
2. 위령탑 건립
3. 4·3사료관 건립
4. 위령공원 조성
5. 기타 위령관련사업
제9조(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 ①정부는 희생자 중 계속 치료를 요하거나 상시 개호 또는 보조장구의 사용이 필요한 자에게 치료와 개호 및 보조장구 구입에 소요되는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다.
② 생략
③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의 지급범위와 금액의 산정 및 지급방법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11조(호적등재) 제주4·3사건 당시 호적부 소실로 호적등재가 누락되거나 호적에 기재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된 경우 다른 법령의 규정에 불구하고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대법원 규칙이 정하는 절차에 의하여 호적에 등재하거나 호적의 기재를 정정할 수 있다.
다. 이 법 제4조의 심판대상 여부
청구인들은 관련조항인 이 법 제4조를 심판대상으로 삼고 있으나, 동 조항은 실무위원회에 관한 사항으로 실무위원회는 명예회복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사항을 처리하기 위하여 제주도지사를 위원장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불과하므로 심판대상에서 제외한다.
2. 청구인들의 주장 및 관계기관의 의견
가. 2000헌마238사건 청구인들의 주장
(1)청구인들은 제주 4·3사건의 진압에 직접 참여하였거나, 진압과정에서 순직한 군인의 유족 또는 6·25동란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건국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수호에 직접 기여하였다.
(2)1948. 4. 3. 제주도 일원에서 발생한 제주4·3폭동은 공산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남한에 공산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일으킨 공산무장반란사건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 법의 제명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국가공권력에 의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진압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국가공권력행사의 적법성 추정이 부인되도록 하였다.
(3)이 법 제1조에 입법목적을 ‘4·3사건의 진상규명’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저질러진 무장유격대의 전투행위를 마치 국가공권력의 정당한 집행행위와 혼동되도록 하고 있고, 이 법 제2조 제1호 및 제2호에 ‘희생자’의 개념을 불분명하게 규정하여 남로당 제주도당 소속 무장유격대원들과 동인들에 의하여 피살된 양민 및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군인들과의 구분을 곤란하게 하여 무장유격대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이로 인하여 진압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거나, 무장유격대원들에 의하여 가족이 피살된 청구인들의 명예를 훼손시켰다.
(4)이 법 제3조 제1항 및 제2항은 위원회에 희생자의 심사결정, 명예회복, 호적등재 등을 백지위임하여 위원회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포괄적위임입법금지원칙(헌법 제75조)을 위반하였다.
(5)이 법 제8조 및 제9조는 무장유격대원 및 그 연루자들을 희생자로 미화시켜 국가예산으로 위령사업을 지원하고,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동인들로부터 피
해를 당하였거나, 동인들의 진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던 청구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헌법 제10조)과 양심의 자유(헌법 제19조)를 침해하였고, 이 법 제11조는 제3조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라고 한다)의 결정만으로 호적에 등재하거나, 호적의 기재를 정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위원회의 결정이 호적법 등 다른 법령보다 우월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국회의 입법권(헌법 제40조)을 침해하고, 유죄판결을 받은 공산주의자 또는 명백하게 공산주의 활동을 한 자들까지 사법절차를 거침이 없이 위원회의 결정만으로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사법권을 침해하였다(헌법 제101조).
나. 2000헌마302 사건 청구인들의 주장
(1)2000헌마238사건 청구인들의 주장과 대부분 동일하나, 아래 기재부분을 추가로 주장하였다.
(2)제주4·3폭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필수적 과정이 되는 5·10제헌의회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남로당 지도하의 공산무장세력이 일으킨 반란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이 법은 그 제명(題名)을 제주4·3사건으로 표시함으로써 반란세력과 국가공권력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있다. 따라서 특별법의 제명을 ‘제주4·3폭동행위및그진압과정에서희생된무고한양민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으로 개정되어야 한다.
(3)이 법이 진압군경을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군복무자에 대한 불이익금지(헌법 제39조 제2항)를 위반하였다.
다. 관계기관의 의견
(1) 행정자치부장관의 의견요지
(가)이 법은 1948. 4. 3. 발생한 제주4·3사건의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음에도 지금까지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나)법령이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기 위하여는 구체적인 집행행위의 매개 없이 당해 법률에 의하여 직접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 현재 침해당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법에 의하여 청구인들의 기본권이 직접적으로 침해되는 것은 아니고, 이 법에 의한 희생자결정, 위령사업, 의료지원 및 생활지원 등 구체적인 집행행위가 이루어져야 청구인들의 기본권침해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구체적인 집행행위에 나아가지 아니한 현재 이 법률조항을 들어 심판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이 사건 헌법소원은 각하되어야 한다.
(2) 국회의장의 답변요지
위 행정자치부장관의 답변요지 (나)와 같은 취지이다.
(3) 대법원장의 답변요지
청구인들의 사법권침해주장에 대하여 특별한 의견이 없음을 개진하였다.
라. 이해관계인들의 의견요지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제주4·3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도민연대, 제주4·3연구소 등 4개 단체는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1)법령에 대한 헌법소원은 청구인의 기본권이 현재, 직접적으로 침해당한 경우에만 제기할 수 있다. 이 법은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희생당한 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법률이고,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2)1999. 12. 현재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희생된 것으로 신고된 자가 14,841명에 이르고 있으나, 그 중 무장유격대원은 약 500명에 지나지 않음을 감안하면 대다수의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가해자 분류에 의하면 토벌대 84%, 공산무장대 11%, 분류불능 5%로 나타나 토벌대의 과잉진압으로 대다수의 양민들이 희생된 것이 분명하다.
(3)제주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 또는 북한·소련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부가 제헌의원을 선출하는 ‘5·10선거’를 한반도 영구분단책략으로 판단하고, 이를 저지키 위하여 단독적으로 무장투쟁을 일으킨 것이다. 다만 1947. 3. 1.의 경찰관에 의하여 시위 중이던 민간인이 사망한 ‘3·1절 발포사건’,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미군정의 실정, 우익들의 과잉대응으로 인한 민심이반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용한 것이고, 이러한 민심이반이 격렬한 대중적 저항을 유발한 것이다. 따라서 제주4·3사건을 단순한 이데올로기갈등으로 파악하거나, 북한 공산세력과 연계된 조직적인 공산무장반란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4)이 법의 목적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진상조사 결과 억울한 희생이 밝혀지면 그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폭동의 주모자나 연루자까지도 희생자로 결정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이 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법해석이다.
(5)이 법은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하고 있으므로 위임입법의 한계를 일탈한 것이 아니고,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복지국가의 사회보장적 조치이며, 명예회복위원회의 희생자 결정은 확정판결을 취소하는 것은 아니므로 사법권독립(헌법 제101조)을 침해한 것도 아니다.
3. 제주4·3사건의 개요 및 피해상황
먼저 이 사건 판단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내에서 제주4·3사건의 개요 및 피해상황을 간략히 살핀다.
가. 제주4·3사건의 개요
(1)제주4·3사건 발발원인 및 진상에 대한 여러 견해
(가)제주4·3사건(명칭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으나 법률에서 정한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의 발생원인에 대하여는 사건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제주4·3사건은 ‘공산계열의 사주에 의한 무장폭동’으로 알려져 왔고, 일부 급진적 견해를 가진 측에서도 ‘궁극적인 목표는 반미 구국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에 두고, 단기적 목표는 남한의 단독정부와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투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1947. 3. 1. 봉기시 민간인 피해가 직접적인 원인이라던가, 미군정수립을 반대하는 것이 그 직접적인 동기라던가, 육지출신 공무원들에 대한 반감과 제주도에서 복무하는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그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고, 이러한 인자들이 종합된 민중항쟁이라고 보거나, 좌익계열의 모험적 도발과 미군정과 한국민주당의 과잉진압이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등 다각적인 각도에서 제주4·3사건에 접근하여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경향이 새롭게 나타났다. 결국 해방전후의 역사에 대한 인식차이와 당시 제주도의 여러 특수상황에 대한 고려정도에 따라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 및 성격을 달리 보고 있는 것이다.
(나)따라서 이 법도 제주4·3사건의 정확한 진상이 무엇이냐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법 제1조), 이를 위하여 위원회에 진상조사를 위한 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도록 하였다(법 제3조 제2항 제1호). 그리고 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실행하고 위원회에서 위임받은 사항을 처리하기 위하여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이하 ‘실무위원회’라 한다)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법 제4조). 나아가 위원회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야 하며, 진상보고서 작성에 있어 객관성과 작업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작성기획단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법 제7조). 따라서 이러한 진상조사기구를 통하여 그간 감추어지거나 왜곡되었던 제주4·3사건의 진실이 규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이 사건 판단을 위하여 변론에서 제출된 증거, 제주도의회4·3특별위원회·언론기관·전문가·학자·경험자 등이 발간한 각종 문헌자료 등을 확인·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2) 사건의 경과
(가) 1948. 4. 3. 이전의 상황
제2차세계대전 종료 후 제주도에서 흉작이 계속되고, 해외에 이주하였던 제주도민들이 귀국하면서 실업률이 증가한 반면 미군정의 ‘대일 교역 및 일본상품유통금지’에 따라 제주도의 경제가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도(道)로 승격된 속칭 ‘도제승격’에 따라 제주도민들의 부담이 증가하였고,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에 대하여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미곡수집저지운동을 주도하는 등으로 경제적 불안과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점차 심화되었다.
일본제국주의통치하에서도 지하조직을 유지하였던 세력은 1945. 9. 22. 이미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제주도 전역에 자치행정을 실시하여 오던 중 같은 달 28.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정이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통제하려고 하자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947. 초 남로당의 지시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던 3·1절 기념 대규모 집회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되었고, 기념행사 후 관덕정 광장을 향하여 가두시위 중 경찰의 발포에 의하여 제주도민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대한 항의표시로 제주도내의 관공서와 학교·직장에
서 납세거부 및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주도민의 반발에 대응하여 미군정과 경찰은 서북청년단 등 지원세력을 증원받아 이를 강경하게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산발적인 테러행위와 이를 저지하는 경찰의 예비검속 등 혐의자에 대한 체포, 구금이 계속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속칭 ‘종달리 사건’과 ‘2·7사건’에서 보듯이 상호 피해가 속출하였고, 경찰에 연행되었던 일부 청년들이 변사체로 발견되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다.
(나) 1948. 4. 3. 이후의 상황
1) 1948. 4. 3. 사건의 본격적인 발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 5. 10.에 실시되는 제헌국회의원선거 및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방해키 위하여 그 해 4. 3. 02:00 제주도내의 오름(기생화산)의 봉화를 신호로 일제히 제주도내 11개 경찰지서를 습격하였다(남로당 중앙당 및 북한과의 사전 공모여부에 대하여는 추후 진상보고기구를 통하여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습격으로 경찰관 사망 4명, 행방불명 3명, 선거관련인사 사망 12명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본격적인 제주4·3사건의 시발점이다(물론 위에서 본 것처럼 제주4·3사건의 원인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경우 그 발발시점을 1948. 4. 3.보다 앞선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위에서 본 자료들을 종합하면 1948. 4. 3. 동시다발적·조직적·대규모 기습공격이 최초로 이루어졌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남한에서의 단독정부수립 및 단독선거반대를 목적으로 이를 주도한 사실을 인정하기에 넉넉하다. 다만 무장유격대에 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역할, 무장유격대에 가담한 자들의 이념적 성향, 제주4·3사건의 확대과정과 그 이유 등에 대하여는 앞에서 본 진상조사기구를 통하여 자세히 밝혀질 것이다).
초기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는 위와 같은 사태를 ‘치안상황’으로 파악하고, 경찰을 증원하여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효율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초기 진압작전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무장유격대는 투표거부운동을 주도하면서 일본군이 남기고 가거나 경찰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고, 일본군이 설치하였던 군사시설과 천연동굴 및 한라산을 거점으로 삼고 기습공격을 통하여 경찰관리 및 제헌의회선거에 관여하거나 투표참가를 권유하였던 인물(이하 ‘경찰등’이라 한다)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고, 경찰지서, 학교 등 공공시설과 경찰 등의 주택에 방화하였다. 무장유격대의 이러한 공격과 투표거부운동으로 인하여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갑, 을 선거구는 투표자미달로 선거무효가 되고, 남제주 1개 선거구만 선거를 실시하는 등으로 선거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결국 북제주 2개 선거구는 1949. 5. 10. 재선거를 실시하였다.
2) 진압과정
경찰의 진압작전이 실패하자 미군정은 군(당시는 국방경비대)으로 하여금 경찰을 지원하도록 지시하였으나,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연대장 김○렬 중령)는 경찰과 제주도민들의 충돌로 판단하여 진압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렬중령은 무장유격대장 김○삼과 개인적인 평화협상을 벌여 상호 공격을 하지 않기로 하는 속칭 ‘4·28 평화협상’을 성사시키기도하였다.
그러나, 5. 1. 속칭 ‘오라리 방화사건’과 ‘5·3기습사건’등으로 상호 불신이 계속되던 중 미군정은 9연대장을 박○경 중령으로 교체하고, 5. 15. 11연대를 추가로 배치한 다음 9연대를 해체하여 11연대에 배속하고, 박○경중령의 지휘하에 진압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와
중에 동인은 6. 18.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부하 군인들에 의하여 피살되었고,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11연대를 위주로 한 군의 적극적인 관여와 경찰병력 및 서북청년단이 증원된 상태에서 군, 경, 민간인 합동으로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실시한 결과 무장유격대의 활동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는 진압경찰과 군을 증원하여 대규모 소탕작전을 준비하였고, 이에 맞서 무장유격대는 같은 해 10. 1. 소련혁명기념일을 기해 제주도 일원의 경찰지서와 진압군에 대하여 기습을 벌이는 등으로 대항하였다. 같은 달 11. 정부는 제주도에 군과 경찰을 통합적으로 지휘할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겸 대령)를 설치하고, 같은 달 17.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증원군을 보강한 후 같은 해 11.경부터 진압군은 제주도의 해안과 한라산 중간부분에 위치하면서 무장유격대의 은신처 및 물자보급기지로 사용되던 중산간지역에 대한 이른바 ‘초토화전술’을 채택하여 무장유격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인 대규모 진압작전을 펼친 결과 같은 해 12.경에는 진압군이 완전한 우세를 보였다. 다만 이 기간 중의 사망자가 다른 시점에 비하여 월등히 많아 무장유격대와 관련없는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는 과잉진압의 논란이 전개된다. 결국 1949. 3.경에는 무장유격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같은 해 5. 15.에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해체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6·25발발 후 북한군의 남침이 이루어지자 무장유격대는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인원 및 장비의 부족으로 그 활동세력은 미미하였다.
이러한 토벌과정에서 쌍방간에 적대세력, 그 가족 및 친인척들을 공격하여 상당수의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진압군은 단지 무장유격대와 연결되는 의심이 있다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공산주의활동을 한 자들에 대하여서까지 전력을 문제삼거나, 그들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별다른 이유 없이 주민들을 살해하고, 주민들은 이를 피하여 산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이들도 무장유격대원 또는 그 동조자들로 간주되어 진압군에 의하여 피살되는 무리한 진압이 빈발하였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고, 제주도의회4·3특별위원회의 피해조사보고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1954. 9. 21. 마침내 한라산에 대한 입산금지가 해제됨으로서 제주도 전체가 평시체제로 환원되었다. 다만 일부 잔존 무장유격대는 1956. 지서를 습격하는 등 간헐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57. 최후의 유격대원 오○권이 검거됨으로써 제주4·3사건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나. 제주4·3사건의 피해상황
(1)제주4·3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당시의 여러 자료들도 정확하게 일치하지 아니하고,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해방 직후 제주도로 되돌아온 주민들이 많았으며, 당시의 인구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한 탓으로 주민들의 거주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주된 원인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행방불명되었거나, 해외 특히 일본으로 밀항하는 등의 방법으로 제주도를 빠져나간 인원이 적지 않아 단순한 수적 비교만으로도 그 인명피해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도의회4·3특별위원회의 조사보고서를 비롯한 관련 서적과 자료 및 관련단체들의 주장에 의하면 진압군은 표선백사장, 함덕해수욕장, 제주비행장, 정방폭포, 조천면 북촌리,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많은 민간인들을 처형하는 등 무리한 진압작전을 실시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일시, 인원,
피해자 명단등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북제주군 구좌읍 속칭 ‘다랑쉬굴’에서 9세의 소년, 3명의 부녀자를 포함한 11명(나머지 7명은 2-30대 남자)이 입구 폭 60센티미터의 굴 안에서 장기간 거주하던 중 1948. 12. 18. 진압군에게 발각되었고, 진압군은 굴 입구에 연기를 피워 위 11명을 질식사시켰으며, 위 사실은 1992. 3.말경에야 발견되었다.
다만 당시의 주변 상황, 언론보도들을 종합하여 인명피해를 추산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하여도 여러 추정들이 있다. 즉 이른바 ‘3·1절 군중집회’사건인 1947. 3. 1.부터 한라산입산금지가 해제된 1954. 9. 21.까지 최대 8만여 명, 최소 2만여 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 중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이 집행되거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처형되거나 병사한 자가 약 2,000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1994. 2.부터 1999. 12. 31.까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피해신고를 받아 조사한 희생자의 수는 14,841명으로 나타났다. 그 어떤 경우를 상정하던 간에 당시 제주도민의 최대 추정인구가 약 27만명 내지 약 30만명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제주도민들의 인명피해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원회의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현재까지 희생자로 파악된 인원 중 적극적인 무장활동에 가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는 10세 미만 및 60세 이상의 유·노년층이 각 6%에 이르고 있어 민간인들의 피해가 상당하였음을 능히 엿볼 수 있다.
(나) 한편 인명피해가 이처럼 심각한 탓에 물적 피해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130여 개 중산간부락이 전소되었고, 소훼되거나 파괴된 세대수가 15,200세대, 건물수로는 35,900여 동에 이르며, 피습 또는 소실된 관공서가 228동, 교실이 224동이고, 기타 가축피해 6만여 두, 많은 곡류, 면화 등의 엄청난 재산상 손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4. 법의 제정경위와 목적
가. 법의 제정경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1960. 4. 19. 이전까지는 제주4·3사건은 남로당에 의하여 주도된 공산반란이고, 군경에 의하여 피살된 자는 모두 무장유격대원이거나 그 동조자라는 것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지 아니하였다. 예를 들면 1948. 8. 25. 무장유격대는 지하선거를 통하여 제주도민 85%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였고, ‘제1대 인민유격대장’으로 불리웠던 무장유격대 지휘자 김○삼은 제주도를 탈출한 다음 같은 달 21.부터 26.까지 해주에서 개최된 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제주도 대표로 참석하여 ‘제주도 인민무력 항쟁의 진상’이라는 보고를 하고, 참석자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4·19의거로 인하여 자유당정권이 몰락한 직후 1960. 5. 23. 국회는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단’ 구성을 결의하고, 6. 6 국회조사단이 제주도를 방문함으로써 사건 종결 6년만에 비로소 첫 조사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진상규명운동과 위령사업을 추진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태동하였다.
그러나, 1961. 5. 16. 군사정변에 의하여 이러한 움직임은 삽시간에 휴면상태로 들어갔고, 이후 제주4·3사건에 대한 일체의 논의가 금기시되었으며, 장기간 제주4·3사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역사 속으로 묻혀지는 듯 하였다. 그 후 민주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1987. 12.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제주4·3진상규명이 선거공약으로 제시되었으며, 1988. 4. 사건 발
생 5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다룬 소설, 논문들이 발간되는 한편 많은 추모모임들이 이루어졌다.
1990. 6. 제주4·3사건을 재조명하고, 억울한 원혼을 달래야한다는 현지 제주도민들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6.부터 1999. 8.까지 제주도의 한 일간신문이 특별기획으로 제주4·3사건을 연재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1993. 이후 제주4·3사건에 대하여 공식기관으로서는 30여 년만에 제주도의회와 국회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시도가 재개되었다. 제주도의회는 1993. 3. 20. 4·3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같은 해 10. 4·3특별법 제정과 특위 구성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1994. 2. 2. 여야의원 75명의 서명을 받아 ‘4·3사건 진상규명특위구성안’을 국회에 제출한 후 같은 달 7. ‘4·3피해신고실’을 개설하여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피해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1995. 5.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는『4·3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발간해 14,125명의 희생자명단을 밝히고 국회를 방문해 4·3특위 구성을 촉구하였으며, 계속하여 국회에 1996. 1. 19. 건의문을, 11. 12. 4·3특위구성 청원을 제출하였고, 제주도지사도 정부에 대하여 진상규명을 촉구하기도 하는 등으로 제주4·3사건진상규명을 공론화시키기 위하여 범도민적 해결의지를 보였다.
1998년 이후 마침내 제주4·3사건에 대한 정부가 주도하는 가시적 조치가 시작되어 제주4·3사건에 대한 공청회 및 국제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1999. 12. 7.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는 여야가 각각 제출한 ‘4·3특별법안’을 단일안으로 만들어 국회 본회의에 회부하였다. 12. 16.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을 한 명의 국회의원이 반대발언을 하고 퇴장한 것 외에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나. 법의 제정목적
이 법의 제안설명, 목적(제1조), 제정경위 등을 종합하면, 이 법은 제주4·3사건이 발발한지 50년이나 경과되었고, 그 원인과 억울한 희생자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전개되어왔음에도 국가차원에서의 진상규명이 없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조치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는 반성적 고려에서 제주4·3사건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새롭게 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무장유격대와 진압군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으고, 희생자의 유족들 역시 연좌제 등으로 극심한 정신적, 재산적 피해를 입었던 점을 중시하여 제주4·3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한 뒤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자는 것이다. 요컨대 억울한 희생을 신원(伸寃)하며, 화해를 통하여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인권신장 및 민주발전 그리고 국민화합과 민족의 단결에 기여하기 위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5. 판 단
가.우리 헌법에서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그 내용
이 사건 법률조항에 대한 판단에 앞서 관계되는 우리 헌법의 지도원리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대한민국의 주권을 가진 우리 국민들은 헌법을 제정하면서 국민적 합의로 대한민국의 정치적 존재형태와 기본적 가치질서에 관한 이념적 기초로서 헌법의 지도원리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헌법의 지도원리는 국가기관 및 국민이 준수하여야 할 최고의 가치규범이고, 헌법의 각 조항을 비롯한 모든 법령의 해석기준이며, 입법권의 범위와 한계 그리고 국가정책결정의 방향을 제시한다.
(2)먼저 우리 헌법은 전문에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고 선언하고, 제4조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헌법의 지향이념으로 삼고 있다. 즉 국가권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며 다양성을 포용하는 자유주의와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귀속되고, 국민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지는 것을 내용적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결합된 개념인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질서의 최고 기본가치로 파악하고, 이러한 헌법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적 가치를 ‘기본질서’로 선언한 것이다. 우리 재판소도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보호를 그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고, 그 내용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일인독재 내지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평등의 기본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을 의미한다”고 천명한 바 있다(헌재 1990. 4. 2. 89헌가113 , 판례집 2, 49, 64; 1994. 4. 28. 89헌마221 , 판례집 6-1, 239, 259-260 참조).
(3)또한 우리 헌법은 정당에 대하여도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정당활동을 보장하고 있다. 즉 헌법 제8조 제2항 및 제4항에 “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정당이 외형상 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강령 및 활동이 폭력적 지배를 추구함으로써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반되는 경우 우리 헌법 질서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4)한편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일부인 시장경제 및 사유재산권의 보장에 대하여도 제23조 제1항 전문에서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제119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각 규정하고 있다. 우리 재판소도 이를 구체화하여 “우리 헌법은 사유재산제도와 경제활동에 관한 사적자치의 원칙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국민 개개인에게 자유스러운 경제활동을 통하여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고 사유재산의 자유로운 이용·수익과 그 처분 및 상속을 보장해 주는 것이 인간의 자유와 창의를 보장하는 지름길이고 궁국적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증대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이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헌재 1997. 8. 21. 88헌가19 등, 판례집 9-2, 243, 257-258).
물론 우리 헌법은 그 전문에서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천명하고, 제23조 제2항과 여러 ‘사회적 기본권’ 관련 조항, 제119조 제2항 이하의 경제질서에 관한 조항 등에서 모든 국민에게 그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려는 이른바 사회국가의 원리를 동시에 채택하여 구현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국가의 원리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국민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보완하는 범위내에서 이루어 지는 내재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 재판소도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및 시장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위 질서들에 수반되는 모순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회국가원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근본이념을 가지고 있다”라고 판시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헌재
(5)따라서 우리 헌법은 폭력적, 자의적인 지배 즉 일인 내지 일당독재를 지지하거나, 국민들의 기본적 인권을 말살하는 어떠한 지배원리도 용인하지 않는다. 형식적으로는 권력분립·의회제도·복수정당제도·선거제도를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권력집중을 획책하여 비판과 견제기능을 무력화하고, 자유·비밀선거의 외형만을 갖춰 구성된 일당독재를 통하여 의회제도를 형해화하거나, 또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인정하지 아니함으로써 사유재산 및 시장경제질서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이나 집단은 우리 헌법의 이념과 배치되고, 이러한 이념을 추구한 정당 또는 단체와 그 구성원들의 활동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보호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이다.
(6)결국 우리 국민들의 정치적 결단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및 시장경제원리에 대한 깊은 신념과 준엄한 원칙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일관되게 우리 헌법을 관류하는 지배원리로서 모든 법령의 해석기준이 되므로 이 법의 해석 및 적용도 이러한 틀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 이 법에서의 ‘희생자’에 대한 개념 인식
(1)이 법은 제2조(정의) 제1호에서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 3. 1.을 기점으로 하여 1948. 4. 3.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 9. 21.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2호에서 “희생자라 함은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후유장애가 남아있는 자로서 명예회복위원회에 의하여 희생자로 결정된 자”로 각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법 제2조 제1호 및 제2호를 종합하면 이 법에 의한 제주4·3사건의 ‘희생자’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후유장애가 남아있는 자로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의하여 제주4·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자’로 정의된다. 그러나 위와 같이 희생자의 개념을 정의하더라도 법문 내용 자체가 불분명하여 희생자의 구체적인 범위를 어떻게 인정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2)먼저 군경의 진압과정이나 무장유격대의 공격에 의하여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거나 후유장애가 남아있는 자(이하 ‘사망자등’이라 한다) 중 무장유격대 또는 진압군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던 자들을 희생자로 보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3)그러나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이하 ‘사건기간’이라 한다)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의 사망자등 가운데 남한에서의 인민민주주의 국가건설을 내세워 무장유격대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였던 자들까지 희생자로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와 상충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살펴본다.
(가) 일부 다른 견해도 있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제주4·3사건은 넓게는 제2차세계대전 종료 후 파시즘에 공동대항하였던 미·소 양국간의 협력이 종료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대립이 시작되는 국제적 파고 속에서 국내적으로는 미국의 한시적 군정 중 생소한 좌우이데올
로기 및 통일국가에 대한 의견대립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건국을 앞두고 물리적 충돌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특히 제주도는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혈연적·집단적인 부락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탓으로 보복이 상승되고, 악순환되어 피해가 확대된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당시의 여러 정황을 참작하고, 사건 발생일로부터 반세기나 경과한 오늘에서 뒤돌아볼 때 무장유격활동에 가담하였던 자들도 잘못된 선택을 한 역사의 희생자로 보아 모두 희생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가 제기될 수 있다.
(나)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국에 필수적 절차였던 5·10제헌의회선거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며,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북한 공산정권을 지지하면서 미군정기간 공권력의 집행기관인 경찰과 그 가족, 제헌의회의원선거 관련인사·선거종사자 또는 자신과 반대되는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는 자와 그 가족들을 가해하기 위하여 무장세력을 조직하고 동원하여 공격한 행위까지 무제한적으로 포용할 수는 없다. 이는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로서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다)다만 희생자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법이 제주4·3사건의 혼란 중에 군과 경찰의 과도한 진압으로 인하여 무고하게 생명을 잃거나, 상해를 입은 자들을 신원(伸寃)하고, 화해를 통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민족화해와 민주발전을 도모하며,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제정되었고, 그 제정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을 감안하면 가능한 한 희생자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입법의 취지를 살리는 동시에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 및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되지 않는 조화로운 법률인식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사건기간 중 제주4·3사건과 관련한 사망자등 가운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이에 부수되는 시장경제질서 및 사유재산제도를 반대한 자 가운데 그 정도를 살펴 희생자 결정 대상에서 제외해나가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우리 헌법의 이념과 이 법의 입법목적에 부합할 것이다.
(라)결국 무장유격대에 가담한 자 중에서 수괴급 공산무장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제주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기타 무장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제헌선거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경찰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들은 결코 현재 우리의 헌법질서에서 보호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 법에서의 희생자의 범위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마)이 법문에 의하더라도 무력충돌과 진압으로 인한 모든 피해자를 희생자로 지칭할 것은 아니다. 즉, 희생자를 ‘주민’으로 특정하고 있고, 사망자등으로 신고된 자 중 위원회의 심사·결정이 이루어 진 자를 희생자로 규정하고 있다(제2조 제2호). 위원회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법무부장관·국방부장관·행정자치부장관 등 여러 장관들과 국무총리가 위촉하는 유족대표·관련전문가 기타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등 20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고(이 법 시행령 제3조), 구성원들의 인적구성과 그들의 지위·학식·경험에 비추어 볼 때 위원회가 단지 위 사건기간내에 제주4·3사건과 관련되어 사망하였는지 여부를 심사하는 형식적 권한만 있다고 보
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건 기간 중 제주4·3사건과 관련되어 사망한 자 중 자유민주적 기본질
서를 훼손하려고 하였던 자들을 제외할 수 있는 재량까지 위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원회가 단순히 사건기간내에 제주4·3사건과 관련하여 사망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결정만을 하는 것이라면 굳이 실무위위원회의 조사와(이 법 제4조) 위원회의 희생자심사·결정이라는 이중적인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고, 실무위원회의 조사에 대한 가부결정만으로 충분하며, 위와 같은 고위급 공직자와 학식 및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위원으로 구성할 필요성도 없기 때문이다.
다. 이 사건 심판청구의 적법여부
직권으로 이 사건 심판청구의 적법여부에 대하여 살펴본다.
(1) 직접성의 요건
우리 국민들은 헌법과 법률을 통하여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법령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재판소는 헌법에 규정된 삼권분립제도, 법령에 대한 헌법소원이 가지는 법적, 사회적인 광범위한 영향력을 고려하여 개개의 국민이 추상적인 법령의 헌법위반여부에 대한 심판청구를 허용하여 온 것은 아니다.
즉 입법권자의 공권력의 행사로 만들어진 법률에 대하여 곧바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려면 우선 청구인 스스로가 당해 규정에 관련되어야 하고, 당해 규정에 의해 현재 기본권의 침해를 받아야 하며, 그 침해도 법률에 따른 집행행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직접 당해 법률에 의하여 기본권침해를 받아야 할 것을 요건으로 한다. 여기서 법률에 의하여 직접 기본권의 침해를 받는다고 함은 집행행위에 의하지 아니하고 법률 그 자체에 의하여 자유의 제한, 의무의 부과, 권리 또는 법적 지위의 박탈이 생기는 경우를 말한다(헌재 1989. 7. 21. 89헌마12 , 판례집 1, 128, 129; 헌재 1991. 2. 2. 91헌마1 , 판례집 3, 7, 9; 헌재 1998. 2. 27. 96헌마134 , 판례집 10-1, 176, 182; 헌재 1998. 5. 28. 96헌마151 , 판례집 10-1, 695, 701 참조).
(2) 이 사건의 직접성 판단
위에서 본바와 같이, 이 법 제2조 제1호 및 제2호를 종합하면 이 법에 의한 제주4·3사건의 ‘희생자’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후유장애가 남아있는 자로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의하여 제주4·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자’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 법은 ‘희생자’의 범위를 스스로 확정적으로 규율하지 않고 있으며, ‘희생자’에 해당하는지 여부의 결정을 위원회에 위임하고 있다. 그 결과 ‘희생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위원회의 결정이라는 구체적 집행행위를 통하여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2001. 5. 31. 희생자신고의 접수가 마감되고, 희생자 여부에 관한 심의·결정의 전 단계로서 희생자신고서 및 구비서류의 기재내용 등에 관한 사실조사가 착수된 상태에 있다. 위원회가 장차 ‘희생자’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이 법의 해석 및 적용의 기준에 관하여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수괴급 공산무장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본격적인 제주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기타 주도적·적극적으로 살인·방화 등에 가담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본질을 훼손하였던 자들을 희생자로 결정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위원
회가 위와 같은 자들에 대한 희생자신청을 기각하는 경우에는 청구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청구인들의 명예권, 평등권 등 기본권침해의 문제가 야기될 수 없다. 설혹 위원회가 위와 같은 자들을 희생자로 인정하는 경우일지라도 청구인들이 주장하는 바의 기본권침해는 위와 같은 자들을 희생자로 결정한 위원회의 구체적 집행행위에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청구인들이 주장하는 기본권침해는 이 법 자체에 의하여 직접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위원회의 ‘희생자’ 결정이라는 구체적 집행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만으로는 직접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사건 심판청구는 법률에 대한 헌법소원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서 부적법하다.
이와 같이 이 사건 심판청구가 법률에 대한 헌법소원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여 부적법한 이상, 청구인들이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할 수 있는 자기관련성이 있는지 여부, 침해된 기본권의 존재여부, 입법권·사법권·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침해여부, 포괄위임입법금지원칙의 위배여부 등에 대한 판단은 더 나아가 따질 필요가 없다.
6. 결 론
따라서 아래 7.과 같은 재판관 권성, 재판관 주선회의 위헌의견이 있는 외에는 관여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7. 재판관 권성, 재판관 주선회의 위헌의견
우리는 이 사건 심판청구가 법률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요구되는 직접성요건을 결여하여 부적법하다는 다수의견에 반대하며, 이 심판청구는 적법하고 나아가 이 사건 법률조항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생각하므로 다음과 같이 반대의견을 밝힌다.
가. 적법요건에 대한 판단
(1) 직접성요건
다수의견은, 헌법의 기본이념 및 이 법의 조문들을 종합하면 위원회가 희생자 심사·결정 과정에서 무장유격대의 살인·방화 등에 주도적·적극적 역할을 한 자들을 희생자로 결정하지 아니할 재량이 있고, 위원회의 희생자결정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현상태에서는 청구인들의 기본권침해가 발생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하므로 법률에 대한 헌법소원의 적법요건인 직접성이 없어 이 사건 심판청구를 각하한다는 것이다.
(가) 그러나 이 법(제2조 제2호)은 ‘희생자’를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서 위원회가 희생자로 결정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 다수의견과 같이 무장유격대에 주도적·적극적으로 활동하였거나,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로 활동하면서 제주4·3사건의 발발에 대한 책임이 있거나, 살인·방화에 가담한 자를 희생자결정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법률적 근거규정을 두지 아니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위원회는 희생자로 신고된 자가 제주4·3사건과 관련하여 사망하였거나 행방불명되었거나 후유장애가 남아 있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할 권한만 가질 뿐이다. 즉 위원회는 희생자로 신고된 자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그 희생자신청을 기각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에 의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
는 한 제주4·3사건 관련 피해자는 공산무장유격활동에 어느 정도 관여하였는지를 불문하고
모두 희생자에 포함되고, 위원회가 정하는 방법에 의하여 동인들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다수의견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제주4ㆍ3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함과 아울러 건국초 좌우 이념대립의 혼란기에 미군정 및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반대하다가 희생된 자들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용서하고 포용함으로써 인권신장 및 민주발전 그리고 국민화합과 민족의 단결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이 법의 입법목적에 비추어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결국 이 법이 위원회의 희생자결정이라는 집행행위를 예정하고 있더라도 그 과정에서 공산무장유격활동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청구인들의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침해 가능성은 위원회의 희생자결정의 유무나 내용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나)무릇 법령에 대한 헌법소원에 있어서 ‘기본권침해의 직접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법령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집행행위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기본권을 침해하게 되므로 기본권의 침해를 받은 개인은 먼저 일반 쟁송의 방법으로 집행행위를 대상으로 하여 기본권침해에 대한 구제절차를 밟는 것이 헌법소원의 성격상 요청되기 때문이다(헌재 1998. 4. 30. 97헌마141 , 판례집 10-1, 496, 503). 그리고 구체적 집행행위가 존재한 경우라고 하여 언제나 반드시 법률자체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청구의 적법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즉 집행행위가 존재하는 경우라도 그 집행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구제절차가 없거나 구제절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권리구제의 기대가능성이 없고 다만 기본권침해를 당한 청구인에게 불필요한 우회절차를 강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경우에는 당해 법률을 직접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헌재 1997. 8. 21. 96헌마48 , 판례집 9-2, 295, 304). 또한 법규범이 집행행위를 예정하고 있더라도 법규범의 내용이 집행행위 이전에 이미 국민의 권리관계를 직접 변동시키거나 국민의 법적 지위를 결정적으로 정하는 것이어서 국민의 권리관계가 집행행위의 유무나 내용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된 상태라면 그 법규범의 권리침해의 직접성이 인정된다(헌재 1997. 7. 16. 97헌마38 , 판례집 9-2, 94, 104).
(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법의 입법목적에 비추어 볼 때 위원회의 희생자결정은 형식적인 심사과정으로 운영될 것이 예상되므로, 이를 집행행위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집행행위와는 관계없이 청구인들의 기본권침해 가능성이 이미 예정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원회의 결정에 대하여 청구인들이 행정소송 등 구제절차를 제기할 수 있는지 여부가 불분명하고, 제기한다 하더라도 원고적격 결여 등으로 권리구제의 기대가능성이 없고 다만 청구인들에게 불필요한 우회절차를 강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므로 청구인들의 기본권침해에 대하여는 이 사건 법률조항에 대하여 직접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 심판청구는 직접성요건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2) 기타의 적법요건
(가)헌법소원은 주관적 기본권보장과 객관적 헌법보장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권리귀속에 대한 소명만으로써 자기관련성을 구비한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헌재 1994. 12. 29. 89헌마2 , 판례집 6-2, 395, 407). 2000헌마238사건의 청구인 박○주는 부(父) 박○경이 국방경비대 내부의 공산무장유격대 동조자에 의하여 피살되었고, 청구인 정○휴도 무장유격대에 의하여 가족들이 피살되었다. 2000헌마238사건의 나머지 청구인 이○승 외 11명(일반시민인 청구인 이○식은 제외)은 모두 제주4·3사건의 진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자들이다. 2000헌마302 사
건의 청구인 유○흥 외 6명은 제주4·3사건 진압에 직접 참여한 군인이고, 청구인 박○주는 위
와 같다. 청구인 정○화 외 161명은 6·25동란에 직접 참여하여 제주4·3사건 기간 중 공산무장유격대의 활동 당시 이들과 이념적 연대를 가지면서 신생 대한민국을 침범한 북한공산군에 맞서 싸운 자들이다. 따라서 위 청구인들은 이 사건 법률조항으로 인하여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 침해되었다고 다투고 있고, 권리귀속에 대한 소명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므로 위 청구인들(일반시민인 청구인 이○식은 제외)의 자기관련성이 인정된다.
(나) 또한 이 법에 의하면 조만간(위원회는 2001. 5. 31. 희생자신고 접수를 마감하고 신고서 및 구비서류의 기재내용 등에 관한 사실조사에 착수한 상태이다) 공산무장유격대활동에 가담하였던 자들에 대한 희생자결정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으므로 기본권침해의 현재성 요건을 갖추었고, 청구인들은 이 법이 시행된 2000. 4. 13.로부터 60일 이내인 2000. 4. 6. (2000헌마238 사건), 같은 해 5. 10.( 2000헌마302 사건) 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으므로 청구기간을 모두 준수하였으며, 기타 권리보호의 이익도 있으므로 청구인들의 이 사건 심판청구는 적법하다.
나. 본안에 대한 판단
우리는 공산무장유격대나 진압군에 가담하지 아니하였음에도 군경의 진압과정이나 무장유격대의 공격에 의하여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거나 후유장애가 남아있는 자를 희생자로 인정하고, 동인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는 어떠한 헌법적 문제점도 없다고 보는 점에서 다수의견과 견해를 같이한다. 그러나 우리는 제주4·3사건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공산무장세력이 주도한 반란이었고, 이러한 반란행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자들은 모두 우리 헌법질서를 파괴하려던 자들이므로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청구인들의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고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며, 적법절차원칙에도 어긋나므로 위헌이라고 생각한다.
(1) 기본권의 침해
(가) 이 법은 이 법에서 정한 절차만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붕괴시키고 인민민주주의이념에 따른 국가건설을 주도하였던 무장유격대 가담자들을 희생자로 인정하여 명예가 회복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예산으로 그들에 대한 위령묘역 및 위령공원 조성, 위령탑 건립 등을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립당사자의 일방에 대하여 영혼을 위로하거나, 명복을 비는 것을 넘어서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반대 당사자의 명예에 대한 손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법에 의하여 공산무장유격대 가담자들의 명예가 회복된다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구한 대한민국의 건국 직전 또는 그 직후 국가의 명령에 의하여 또는 공산주의이념에 반대하여 공산무장유격대의 토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던 자 또는 그들에 의하여 피살되었던 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가 불가피하게 훼손된다고 할 것이다.
한편 우리 헌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기본권 보장의 종국적 목적으로 보고 있고, 우리 헌법재판소도 “헌법 제10조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로써 모든 국민은 그의 존엄한 인격권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생활영역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고(헌재 1997. 3. 27. 95헌가14 등, 판례집 9-1, 193, 204), “모든 권리의 출발점임 동시에 그 구심점을 이루는 인격권…”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헌재 1991. 9. 16. 89헌마163 , 판례집 3, 518, 524). 그런데 이 법은 공산무장
유격대 활동에 관여한 모든 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청구인들 중 공산무장유격대 활동에 관여한 자들의 토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거나 공산무장유격대 활동에 관여한 자들에 의하여 가족을 잃은 자의 명예에 관한 권리의 근원인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나) 다수의견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헌법의 기본원리로서 인정하고 있고, 이러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근거하여 평화로운 생존권을 향유하는 것은 자유민주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기본적 권리라고 할 것이다. 한편 우리 헌법은 국가로 하여금 범죄의 발생을 예방, 진압할 책임을 부담케 하면서 범죄가 발생한 경우 이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 및 피해자에 대한 사회보장적 성격의 피해자구제제도를 규정하고 있고(헌법 제30조), 이와 함께 형사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보장하고 있다(헌법 제27조 제5항).
그런데 이 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옹호하였던 청구인들의 부모와 가족을 살해하고 가옥을 방화하였던 집단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동조자들이 오히려 그들의 당시 행위가 ‘강요된 저항’이었고 미제국주의자와 그 하수인인 한민당 또는 이승만 정권의 무차별적인 탄압에 맞선 ‘자력구제행위’였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희생자로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예산으로 위령탑을 건립하는 등으로 추모하도록 함으로써 공산무장유격대원들에 의하여 가족들이 희생당한 청구인들의 헌법상 보장된 평화적 생존권과 피해자의 권리 및 재판절차진술권을 직접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 또한 이 법은 청구인들로 하여금 가해자들에 대한 위령과 추모를 강제함으로써 청구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였다. 즉 이 법에 의하면 용서와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제주4·3사건의 가해자와 희생자를 한꺼번에 위령하고 추모하도록 하고 있고, 이러한 위령과 추모는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청구인 박○경, 정○휴의 가족들을 살해하였던 공산무장유격대와 이념적으로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집단이 현재에도 우리와 대치하고 있으며, 그 집단은 공산무장유격대의 위와 같은 살상행위를 찬양하면서 일부 공산무장유격대장을 애국열사로 숭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해자였던 공산무장유격대원들과 그들에 의하여 살해당한 피해자들을 동일한 장소에서 위령한다거나 추모하도록 하는 것은 무장유격대원들로부터 살해당한 자들과 그들의 후손인 청구인들의 명예가 한꺼번에 훼손될 뿐만 아니라 후손들로 하여금 가해자에 대한 위령과 추모를 강제하는 것이 되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2)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위배
(가)헌법의 기본원리는 헌법의 이념적 기초인 동시에 헌법을 지배하는 지도원리로서 입법이나 정책결정의 방향을 제시하며 공무원을 비롯한 모든 국민ㆍ국가기관이 헌법을 존중하고 수호하도록 하는 지침이 되며, 구체적 기본권을 도출하는 근거로 될 수는 없으나 기본권의 해석 및 기본권제한입법의 합헌성 심사에 있어 해석기준의 하나로서 작용한다(헌재 1996. 4. 25. 92헌바47 , 판례집 8-1, 370, 380).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우리 헌법의 지도이념이고,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의 초석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헌법재판소는 “헌법상 통일관련 규정들은 통일의 달성이 우리의 국민적ㆍ국가적 과제요 사명임을 밝힘과 동시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헌법에서 지향하는 통일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바탕을 둔 통일인 것이다.” 라고 설시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이 이루어져할 할 것임을 밝힌 바 있다(헌재 2000. 7. 20. 98헌바63 , 판례집 12-2, 52, 62). 이러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우리 헌정사상 여러 차례 도전을 받았는데, 위에서 본 것처럼 제주4·3사건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립에 필수적이었던 제헌의회선거를 조직적으로 저지하려는 시도였고,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던 북한의 6·25 남침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결정적인 도전이었다.
(나) 우리 헌법재판소는 현단계에서의 북한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대남적화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전복을 획책하고 있는 반국가단체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헌재 1997. 1. 16. 92헌바6 등, 판례집 9-1, 1, 23-24), 이같은 시각은 “북한은 대남적화혁명노선을 변경함이 없이 그 노선에 따른 각종 공작과 도발을 여전히 자행하면서 대한민국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각종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라는 결정까지 계속 유지되어 왔다(헌재 1998. 8. 27. 97헌바85 , 판례집 10-2, 407, 415; 그밖에 1997. 6. 26. 96헌가8 등 판례집 9-1, 578, 592 참조). 북한의 위와 같은 대남적화전략이 변경되었다고 확신할 상황의 변화가 없고, 남북한이 엄연히 정전협정에 의하여 군사적 대치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북한이 6·25 도발에 대한 사죄와 민간인 학살 등 그 동안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반성의 태도를 전혀 나타내지 않고 있는 반면에, 우리 대한민국 내에서도 북한의 통일정책을 지지하는 일부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과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전복하려고 하였거나, 북한체제를 지지하였던 자들을 모두 역사의 희생자로 간주하여 무조건적으로 관용하고, 화해하는 방편으로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토대를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을 일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3) 적법절차원칙의 위반
(가) 우리 헌법 제12조 제1항 후문은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ㆍ구속ㆍ압수ㆍ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ㆍ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여 적법절차의 원칙을 헌법원리로 수용하고 있는바, 이러한 적법절차의 원칙은 비단 신체의 자유(헌법 제12조)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기본권보장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법치주의의 구체적 실현원리라고 할 것이다(헌재 1992. 11. 12. 91헌가2 , 판례집 4, 713, 722).
현행 헌법에 규정된 적법절차의 원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하여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적법절차의 원칙이 독자적인 헌법원리의 하나로 수용되고 있으며 이는 절차의 적법성 뿐만 아니라 절차의 적정성까지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인 절차 뿐만 아니라 실체적 법률내용이 합리성과 정당성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의미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이 적법절차의 원칙의 적용범위를 형사소송절차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국가작용에 대하여 문제된 법률의 실체적 내용이 합리성과 정당성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적용된다고 판시하고 있다(헌재 1998. 5. 28. 96헌바4 , 판례집 10-1, 610, 617- 618).
(나) 그러나 이 법은 위에서 본 것처럼 위원회로 하여금 희생자를 심사·결정하는 방법이나 구체적인 절차를 규율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누구든지 제주4ㆍ3사건과 관련하여 자유롭게 증언할 수 있다는 규정(제5조)만을 두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희생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희생자로 신고된 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가 피해사실을 신고한다든지 희생자신청이 된 자가 희생자로 지정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결정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할 권리 및 위 희생자 결정절차에 당사자로 참여하여 진술할 청문의 기회가 제공되지 아니하며, 따라서 변호인의 선정권이나 희생자로 신청된 자의 가해사실을 입증할 증인의 소환권 등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즉 이 법은 피해신고자의 신고 이후에는 실무위원회의 일방적인 조사와 위원회의 심의·의결에 의해서 희생자가 결정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희생자로 신고된 자로부터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충분한 권리구제 및 소명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헌법 제107조 제3항은 행정심판에 관하여 재판의 전심절차로서 행정심판을 할 수 있으며 행정심판의 절차는 법률로 정하되 사법절차가 준용되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행정심판에 있어서도 사법절차, 즉 대심적 심리구조와 당사자의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헌재 2000. 6. 1. 98헌바8 , 판례집 12-1, 590, 601 참조),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직접 관련된 제주 4ㆍ3사건의 희생자결정에 이해관계인의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고, 나아가 그 희생자결정에 대하여 이의가 있는 자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그 결정의 적법여부를 다툴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있지 않는 이 법은 결국 헌법상의 적법절차원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 결론 및 여론(餘論)
우리는, 헌법수호의 최후의 보루인 우리 헌법재판소가 국가정체성의 근간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관련된 이 사건에 대하여 정면으로 본안판단을 해야 하고 그 결과 이 사건 법률조항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되며 적법절차에도 어긋나 위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아울러 다음과 같은 점을 추가하고자 한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북한에서 이념대립으로 희생된 우익인사들을 희생자로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하거나, 추모한 사실을 들은 바 없다. 그리고 이념대립으로 인한 내전 중에 발생한 반대측의 인명피해에 대하여 정치적 선언을 하거나 또는 사망한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은 몰라도 용서와 화해의 차원을 넘어서 법률로 그들의 명예까지 회복시켜 준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위에서 설시한 것처럼 현재 남북한 관계는 대립과 화해라는 이중적 측면이 계속 유지되고 있고, 갈등과 대립은 휴화산처럼 그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러한 남북한관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념대립으로 인한 충돌로 발생하였던 상처의 치유는 이와 같은 갈등과 대립이 해소된 후에 이루어져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판관 윤영철(재판장) 한대현 하경철 김영일 권 성 김효종
김경일 송인준(주심) 주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