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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법 2018. 9. 3.자 2017재고합4 결정
[내란실행·국방경비법위반] 확정[각공2018하,183]
판시사항

‘제주4·3사건’ 당시 내란실행 및 구 국방경비법 위반의 죄목으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군·경에 의하여 제주도 내 수용시설에 구금되었다가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된 후 일정 기간 수형인 신분으로 구금되었던 사람들이 재심대상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청구인들이 교도소에 구금된 근거로서 수형인명부, 재심청구인들 중 일부에 대한 범죄·수사경력회보, 군집행지휘서나 감형장 등의 수형(수형) 관련 문서만 남아 있을 뿐 교도소에서 구금생활을 한 것이 ‘판결’에 의한 형의 집행으로서 이루어졌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의 자료가 없는 사안에서, 재심대상판결에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 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있다는 이유로 재심개시결정을 한 사례

결정요지

‘제주4·3사건’ 당시 내란실행 및 구 국방경비법(1948. 7. 5. 남조선과도정부 법률로 제정되어 1948. 8. 4.부터 시행되고 1962. 1. 20. 군법회의법 제1004호로 폐지된 것) 위반의 죄목으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군·경에 의하여 제주도 내 수용시설에 구금되었다가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된 후 일정 기간 수형인 신분으로 구금되었던 사람들이 재심대상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청구인들이 교도소에 구금된 근거로서 수형인명부, 재심청구인들 중 일부에 대한 범죄·수사경력회보, 군집행지휘서나 감형장 등의 수형(수형) 관련 문서만 남아 있을 뿐 교도소에서 구금생활을 한 것이 ‘판결’에 의한 형의 집행으로서 이루어졌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의 자료가 없는 사안이다.

위 수형인명부의 기재 사항, 재심청구인들이 당시 자신들이 체포·구금된 후 육지로 이송되어 교도소에 구금되기까지의 경위와 관련하여 진술한 내용, 제주4·3사건의 진행 경위와 당시 상황에 관한 조사 내용을 담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발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기재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면, 당시 재심청구인들의 형벌법규 위반 여부 및 그 처우에 관한 ‘사법기관의 판단’이 있었고, 그에 의하여 재심청구인들이 육지로 이송되어 각 교도소에 구금되기에 이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며, 재심청구인들은 당시 법원이 발부한 사전 또는 사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구금되어 군법회의에 이르게 되었고, 재심청구인들 중 일부는 군법회의에 이르기까지 구 형사소송법(1948. 3. 20. 군정법령 제176호로 개정되어 1948. 4. 1. 시행된 것, 이하 같다)에 따라 구속영장이 발부된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는 기간의 최장기인 40일을 초과하여 구금되어 있었던 사실 및 당시 조사과정에서 폭행과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하였던 사실도 인정할 수 있으며, 재심청구인들에 대하여 이루어진 위와 같은 불법구금 내지 가혹행위는 제헌헌법구 형사소송법의 인신구속에 관한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서 구형법[1948. 3. 20. 군정법령 제176호로 개정되어 1948. 4. 1. 시행된 조선형사령에 의하여 의용된 일본 형법(1941년 법 제61호)을 말한다] 제194조의 특별공무원직권남용죄 또는 제195조 제1항의 특별공무원폭행·능학(능학)죄를 구성하고, 이미 그때로부터 70년에 달하는 세월이 흘러 그와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으며, 위 각 죄에 관한 공소시효도 이미 완성되었음이 명백하므로, 재심대상판결에는 각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 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있다는 이유로 재심개시결정을 한 사례이다.

피고인

별지 피고인 명단 기재와 같다.

재심청구인

피고인들

변호인

법무법인 해마루 담당변호사 임재성 외 1인

재심대상판결

별지 재심대상판결 기재와 같다.

주문

재심대상판결들에 대하여 각 재심을 개시한다.

이유

1. 기초 사실

이 사건 기록에 의하면 아래의 각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가. 재심청구인들은 제주도민들로서 제주4·3사건(이하에서 ‘제주4·3사건’이라 함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 가 정의한 바에 따라 “1947. 3. 1.을 기점으로 1948. 4. 3.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 9. 21.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이 진행 중이던 1948년 가을경부터 1949. 7.경 사이에 군·경에 의하여 당시 제주도 내에 설치된 수용시설에 구금되어 있다가 1948. 12.경 이후 1949. 7.경에 이르기까지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되어 이후 일정 기간 동안 수형인 신분으로 교도소에 구금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나. 당시 재심청구인들이 육지로 이송되어 교도소에 구금된 근거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재심청구인들의 이름과 당시 나이, 직업, 본적지, 항변 및 판정(판정), 언도(언도)일자, 형량 및 수감교도소가 재심청구인별로 각 하나의 열(렬)로 기재되어 있는 “단기 4281년 12월·단기 4282년 7월(군법회의분) 수형인명부”와 재심청구인 피고인 4, 피고인 5, 피고인 7, 피고인 9, 피고인 10, 피고인 12, 피고인 14, 피고인 15, 피고인 16에 대한 각 범죄·수사경력회보, 그 밖에 이 법원이 재심청구의 이유에 대한 사실조사의 일환으로 국가기록원 등 관계 기관에 대한 사실조회 내지 문서송부촉탁 등의 방법을 통하여 입수한 자료들인 재심청구인들 중 일부에 대한 군집행지휘서나 감형장 등의 수형(수형) 관련 문서만이 남아 있을 뿐, 이를 넘어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 재심청구인들이 위와 같이 육지로 이송되어 교도소에서 구금생활을 한 것이 ‘판결’에 의한 형의 집행으로서 이루어진 것임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아직 발굴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

2. 이 사건 재심청구의 적법성에 관한 판단

가. 재심대상판결의 존부와 관련하여

(1) 형사소송법 제420조 는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 “유죄의 확정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의 경우 수형인명부, 재심청구인들 중 일부에 대한 범죄·수사경력회보, 군집행지휘서나 감형장 등의 수형 관련 문서 이외에는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내지 판결문 등이 발견되지 아니할뿐더러, 당시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되기 전 재판을 받았는지 여부에 관한 재심청구인들의 진술을 보더라도 ‘재판을 받으러 간 것으로 기억하나, 형량은 육지에 있는 교도소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다’라거나 ‘재판을 받으러 갔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형량도 들었다’는 재심청구인들이 있는 반면, ‘당시 제주도에서 재판을 받은 일이 없으며, 나중에 육지로 이송된 후 형량을 알게 되었다’는 재심청구인들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도에서 재판을 받은 기억이 있다는 재심청구인들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재판’이란 것을 받은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그 진행 과정은 어떠했는지에 관한 진술이 서로 다른 까닭에, 과연 당시 재심청구인들이 육지로 이송되어 교도소에 구금된 것이 ‘유죄의 판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와 같은 판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아니함에도 군·경의 판단에 따른 임의적인 처분으로 재심청구인들을 마치 수형인인 양 교도소에 수용하는 불법적인 구금이 이루어진 것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이 있다.

(2) 살피건대, ‘유죄의 판결’이라 함은 구체적 사건에 관하여 특정인이 어떠한 형벌법규를 위반하였다는 사실을 확정하고 당해 위반 사실에 적용될 법률에 따라 그 위반자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는 사법기관의 유권적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일응 그와 같은 ‘사법기관의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인정되는 이상, 가사 대상 사건에 관한 판단 권한이나 그와 같은 판단에 이르게 된 과정 등에 실체적·절차적인 하자 내지 흠결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는 판결의 정당성이나 적법성에 관한 문제일 뿐, 이를 넘어 당해 판결의 성립 내지 존재를 부정할 사유는 되지 못하는 것인바, 비록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의 경우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 당시 재심청구인들에 대하여 ‘유죄의 판결’이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아니하였지만, 이 사건 기록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그 실체적 정당성이나 절차적 적법성 여부는 차치하고, 당시 재심청구인들의 형벌법규 위반 여부 및 그 처우에 관한 ‘사법기관의 판단’이 있었고, 그에 의하여 재심청구인들이 육지로 이송되어 각 교도소에 구금되기에 이른 사실은 이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형사소송규칙 제166조 는 “재심의 청구를 함에는 재심청구의 취지 및 재심청구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한 재심청구서에 원판결의 등본 및 증거자료를 첨부하여 관할법원에 제출하여야 한다.”라고 정하고 있는바, 위 규정이 ‘원판결의 등본’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취지는 재심법원이 재심대상판결의 존재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함에 있다 할 것이어서, 앞서 본 바와 같이 다른 제반 자료들에 의하여 과거 재심청구인들의 형벌법규 위반의 점에 관한 사법기관의 판단, 즉 ‘유죄의 판결’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고, 일응 그 판결의 특정이 가능하며, 다만 기록의 소실 내지 산일 등 당사자가 책임질 수 없는 불상의 사유로 말미암아 그 판결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이 사건에서, 재심청구인들이 위 규정에 따른 ‘원판결의 등본’을 제출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 사건 재심청구가 부적법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가) 수형인명부의 기재에 의하면, 재심청구인 피고인 3, 피고인 4, 피고인 7, 피고인 8, 피고인 10, 피고인 12, 피고인 13, 피고인 15, 피고인 16, 피고인 18은 1948. 11.경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인 같은 해 12월경 “죄과: 형법 제77조 위반, 범죄사실: 내란죄”의 죄목으로, 재심청구인 피고인 1, 피고인 2, 피고인 5, 피고인 6, 피고인 9, 피고인 11, 피고인 14, 피고인 17은 계엄이 해제된 이후인 1949. 7.경 “죄과: 국방경비법 제32조 , 제33조 위반, 범죄사실: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급간첩죄”의 죄목으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았다는 것인바, 1948. 11. 제주도를 ‘합위지경(합위지경)’으로 정하여 계엄을 선포한 근거가 되었던 일제의 계엄령( 제헌헌법 제64조 는 “대통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정하고 있었으나, 당시 계엄에 관한 법률은 아직 제정되지 아니하였던 까닭에, 제헌헌법 제100조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는 규정에 의하여 일제의 계엄령이 위와 같은 계엄 선포의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1조 내지 계엄 해제 이후 1949. 7.경 위 재심청구인 피고인 1 등에게 적용된 구 국방경비법(1948. 7. 5. 남조선과도정부 법률로 제정되어 1948. 8. 4.부터 시행되고 1962. 1. 20. 군법회의법 제1004호로 폐지된 것, 이하 같다) 제32조 , 제33조 의 각 규정 및 후술하는 바와 같은 사정들에 비추어 보면, 그 정당성의 여부는 논외로 하고, 당시 군법회의가 위 각 규정에 기하여 재심청구인들에 대하여 적용된 위 각 죄목에 관한 재판권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 수형인명부는 군법회의 설치명령과 공판장소, 대상 피고인 및 그 죄목 등을 기재하고 당시 제주에 주둔하였던 ‘제주도계엄지구사령부 사령관’ 또는 ‘수도경비사령부 보병 제2연대 사령관’의 직인이 날인되어 있는 각 “고등군법회의 명령”에 당시 그에 따라 해당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 본적지, 항변, 판정, 언도일자 및 형량 등이 함께 기재되거나 또는 별지로 첨부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바, 위와 같은 수형인명부의 구성 및 그 기재 내용과 함께, 제주4·3사건 당시에 육군본부에서 기록심사과장으로 근무했던 청구외 1(당시 육군중령)이 2005. 7. 6.과 같은 달 26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속 청구외 2 위원에게 ‘당시 군법회의가 이루어졌다. 제9연대는 1948. 12.에 계엄하에서 실시하였고, 제2연대는 1949. 6.~7.에 구 국방경비법에 의거 범법자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경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재판기록이 일단 육군본부 법무감실로 올라오면 본인이 기록을 확인하였고, 경무대에 직접 가서 결재를 받았으며 결재가 나면 전화로 사형을 집행해도 좋다는 연락을 해 주었다’, ‘나머지 무기수나 유기수의 재판기록은 이후에 접수되어 이를 보관하였다’, ‘6·25전쟁 당시 육군본부가 철수하면서 소송기록을 가지고 가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고, 이를 소각했거나 유기했다고 들었다’라는 취지로 진술하였던 점 및 아래 (다)항에서 보는 바와 같은 재심청구인들 중 피고인 3, 피고인 18, 피고인 12, 피고인 7, 피고인 8, 피고인 17, 피고인 14의 진술 등에 비추어 보면, 당시 군법회의가 그 근거 법령에 따라 적법하게 구성이 되어 법령이 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진 것인지 여부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실제로 당시 제주도에 군법회의가 설치·운영되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 재심청구인들은 당시 자신들이 체포·구금된 후 육지로 이송되어 교도소에 구금되기까지의 경위와 관련하여 이 법정에서 별지 ‘재심청구인들의 진술취지’ 기재와 같이 진술(다만 재심청구인 피고인 14의 경우 이 법정에서의 진술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이라는 책자에 수록된 진술에 의한다)한바, 비록 재심청구인들 중 약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들은 재판이라 할 만한 것을 받은 일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으나, ① 수형인명부에 기재되어 있는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형과 그 언도일자 및 복형(복형)장소 등(별지 ‘재심청구인들에 관한 수형인명부 기재사항’ 참조)이 앞서 본 바와 같은 재심청구인들의 진술 내용과 대부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재심청구인 피고인 4, 피고인 5, 피고인 7, 피고인 9, 피고인 10, 피고인 12, 피고인 14, 피고인 15, 피고인 16의 경우 그들에 대한 각 범죄·수사경력회보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과도 대체로 일치하는 점(일부 재심청구인들의 경우 수형인명부에 있는 언도일자와 범죄·수사경력회보에 기재된 처분일자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고 며칠 정도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죄명이나 형량이 일치하는 이상 그러한 정도의 사정만으로 수형인명부의 신빙성을 부인할 것은 아니다), ② 당시 제주도 내에 설치된 수용시설에 구금되어 있던 재심청구인들을 육지에 있는 형무소로 이송하여 수형자의 신분으로 수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를 가능하게끔 하는 유권적인 결정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점(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정부와 군 당국에서는 이들을 이전과 같이 즉결처분하지 않는 대신 별도로 관리하고자 했으나, 제주도에는 형무소나 집단수용 시설이 부족하므로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시켜 제주도로부터 격리하고자 하였다. 2,000명에 달하는 수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형무소로 보낼 수 있는 방편은 당시로서는 구 국방경비법 제32 · 33조 적용밖에 없었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군법회의에 의한 재판이 당시 수용인들을 육지에 있는 형무소로 이송·구금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재심청구인 피고인 16 또한 이 법정에서 “재판 받은 적 있나요?”라는 질문에 “재판 받았습니다. 육지로 가려고 하니까.”라고 대답한 바 있다), ③ 재심청구인들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재심청구인들은 대부분 ‘형무소에 도착한 이후 인솔자 등으로부터 자신들의 형량에 대한 고지를 받았다’는 것이고, 재심청구인들이 이송된 형무소 또한 대상자의 나이, 성별 및 형량에 따른 분류가 이루어져 이를 각 달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까닭에, 재심청구인들을 육지로 이송할 당시 이미 재심청구인들에 대하여 그 형량이 각 정하여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④ 이 법원이 재심청구의 이유에 대한 사실조사의 과정에서 입수한 자료들로서 재심청구인 피고인 11, 피고인 17에 대한 각 군집행지휘서, 각 수용자신분장, 각 감형장, 재심청구인 피고인 14에 대한 수용자신분장, 잔형집행지휘서, 각 감형장 등, 재심청구인 피고인 12에 대한 수사자료표 및 재심청구인 피고인 7에 대한 수사자료카드에 기재된 내용들 또한 재심청구인들에 관하여 위 수형인명부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과 일치하고, 특히 위 군집행지휘서나 감형장의 경우 해당 재심청구인들에 대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당시의 법령에 따른 ‘판결’의 존재가 전제되지 아니한 이상은 작성되기 어려운 문서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당시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공소의 제기나 공판기일의 진행 및 판결의 선고 등 제반 절차가 법령의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는 이를 별론으로 하고, 재심청구인들이 육지로 이송되어 형무소에 수형인으로 구금된 것은 재심청구인들에게 각 죄목에 따른 법령을 적용하여 수형인명부에 기재되어 있는 각 해당 형벌을 부과하기로 하는 군법회의의 유권적 판단이 그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 본안 판단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1) 이 사건의 경우 앞서 본 바와 같이 수형인명부나 범죄·수사경력회보, 수용자신분장, 수사자료표 등에 재심청구인들의 죄명이 각 기재되어 있고, 비록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그 과정에서 장기간의 구금과 가혹행위 등을 동반하였지만, 재심청구인들에 대하여 일응의 조사와 분류작업이 행하여져 이를 기초로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처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일부 재심청구인 진술에 의하면, 당시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 중에는 ‘산에서 무장대로 활동한 사람도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흙이나 파던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고, 재심청구인들 중에도 당시 남로당 당원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은 사람이나 간첩이란 혐의를 쓰고 지명수배를 받기도 한 사람, 1949년 군법회의에서 다른 재심청구인들보다 훨씬 무거운 무기징역형에까지 처하여졌던 사람, 한국전쟁으로 수감시설이 열린 후 북한군에 편입되어 이후 지리산 등지에서 포로가 되기에 이른 사람 등도 있는 까닭에, 그로부터 70년에 달하는 세월이 지나 재심청구인들의 주장이나 진술 외에는 과연 재심청구인들이 당시 그 처벌규정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특정 행위를 하였는지 아닌지 여부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고, 당시 국가가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처분의 기초로 삼았던 일체의 자료가 소실되어 재심절차가 개시된다고 하더라도 그 본안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하여, 재심절차의 개시 그 자체가 바로 재심청구인들의 신원 회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는 지금에 와서, 더구나 당시 재심청구인들의 경우와는 그 입장을 달리하여 남로당 무장대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후손들 또한 존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재심을 통한 재심청구인들의 신원 회복이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과거 국가기관이 당시 가지고 있었던 나름의 자료를 기초로 하여 판단한 바를 뒤집을 수 있는 절차인 재심을 개시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

(2) 형사소송법 제420조 는 ‘재심 이유가 있는 경우 유죄의 확정판결에 대하여 그 선고를 받은 자의 이익을 위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으므로, 형사소송법상 재심의 요건은 유죄의 확정판결과 재심 이유의 존부라 할 것이어서, 재심 청구를 받은 법원으로서는 위 요건의 충족 여부를 검토하여 재심개시 여부를 결정하면 되는 것이고, 유죄의 확정판결에 대하여 다시 본안 심리가 가능한지의 여부는 재심개시결정 이후 본안 재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인 까닭에, 유죄의 확정판결 및 형사소송법이 정하고 있는 재심 이유의 존재는 인정되나 수사기록 내지 소송기록의 멸실 등의 사유로 재심개시결정 이후의 본안 심리가 불가능한 경우라 할지라도, 현행 형사소송법상 공소사실의 특정과 그에 대한 입증은 검사가 해야 하는 것이어서 법원으로서는 재심개시의 요건이 충족된 이상 재심개시의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본안 재판을 진행하여야 한다.

나아가 위와 같은 우려가 있다 하여 재심개시결정을 거부하는 것은 형사소송의 기본이념에도 반한다. 형사소송의 기본이념인 실체진실주의라 함은 법원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그에 상응한 형벌을 부과하는 한편, 무고한 자를 국가의 형벌권 행사로부터 지켜주는 것을 말한다. 통상 그중 전자를 적극적 실체진실주의라 하고, 후자를 소극적 실체진실주의라 칭한다. 관념적으로는 위와 같은 실체진실주의의 두 요청이 서로 모순된다 할 수 없겠지만, 인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닌 까닭에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현실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두 개의 요청은 언제나 서로 갈등하고 저촉하는 형태로 발현되게 마련인바, 인류의 이성과 역사적 경험은 그중 소극적 실체진실주의를 형사소송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이는 흔히 “백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자를 처벌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명제로 표현되고, 형사소송을 담당한 법관들에게 주어진 화두이자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는 일차적 임무인바, 법률이 정한 재심 요건이 인정됨에도 앞서 본 바와 같은 우려가 있음을 들어 재심청구인들이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을 다투어 그 신원을 회복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법관들에게 부여된 위와 같은 임무를 외면하는 결과가 된다.

3. 재심 이유의 존부에 관한 판단

가. 형사소송법제420조 제7호 전단에서 “원판결, 전심판결 또는 그 판결의 기초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를 재심 이유 중의 하나로 정하고 있고, 제422조 전단에서 “전 2조의 규정에 의하여 확정판결로써 범죄가 증명됨을 재심청구의 이유로 할 경우에 그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다.”라고 정하고 있는바, 위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가 정한 직무에 관한 범죄의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되거나 범인이 사망하는 등 더 이상 그 범죄에 관한 유죄판결을 얻을 수 없는 사실상·법률상의 장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이는 위 형사소송법 제422조 가 정한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나. 제헌헌법 제9조 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 단, 범죄의 현행·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수사기관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후에 영장의 교부를 청구할 수 있다. 누구든지 체포, 구금을 받은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그 당부의 심사를 법원에 청구할 권리가 보장된다.”라고 정하고 있고, 구 형사소송법(1948. 3. 20. 군정법령 제176호로 개정되어 1948. 4. 1. 시행된 것, 이하 같다) 중 체포·구금과 관련한 규정은 별지 ‘형사소송법의 개정’ 기재와 같은바, 위 각 규정에 의하면 당시 사람을 체포·구금하기 위해서는 사전 또는 사후에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하고, 영장이 발부된 경우라 하더라도 수사기관에 의한 구속기간은 최장 40일을 초과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이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1948년 군법회의의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이는 일제의 계엄령은 위와 같은 영장주의의 예외에 관한 특별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아니하며, 1949년 군법회의의 근거가 되었던 구 국방경비법은 제63조 전단에서 “여하한 범죄피적용자를 불문하고 본법 조항에 해당하는 범죄 중 중대한 범죄로 인하여 기소당하는 경우에는 정황에 따라 감금 또는 금족함.”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위 “정황에 따라 감금 또는 금족”한다는 문언이 제헌헌법이 천명한 영장주의를 배제한다거나 또는 그 예외를 설정한 취지라고 볼 수는 없다.

다. 살피건대, 수형인명부에 의하면 1948. 12.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의 수는 총 871명, 1949. 7.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의 수는 총 1,659명에 달한다는 것인바, 이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한꺼번에 제주도 내의 수용 장소에 집단적으로 구금되어 재판을 받기에 이른 점,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2000. 9.경부터 2003. 2.경까지 장기간에 걸쳐 제주4·3사건에 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조사하였고, 이 법원도 국가기록원, 국방부 등 관계 기관에 사실조회나 문서송부촉탁 등의 방법을 통하여 재심청구인들에 관한 각종 자료들을 조회·확인하였으나, 재심청구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구속영장의 존재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으며, 영장이 발부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만한 기록조차도 발견되지 아니하는 점 및 제주4·3사건의 진행 경위와 당시의 상황에 관한 조사 내용을 담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12. 발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기재와 당시 자신들이 제주도 내 수용시설에 집단 구금되기에 이른 경위에 관한 재심청구인들의 진술 등을 종합하면, 재심청구인들은 당시 법원이 발부한 사전 또는 사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구금되어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당시 자신들이 군·경에 의하여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이후 재판을 거쳐 또는 재판을 거치지 아니하고 육지로 각 이송되기까지의 경위에 관한 재심청구인들의 진술(과거 일부 재심청구인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관하여 진술한 내용을 담은 채록집, 재심청구인들이 각 이 사건 재심 청구에 즈음하여 작성한 진술서 및 재심청구인들의 법정 진술은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주요한 면에서 일관되며, 그 일자 등에 있어서도 수형인명부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과 어긋나지 아니하고, 재심청구인들이 이 법정에서 진술에 임하는 모습·태도 및 진술의 뉘앙스 등도 꾸미거나 과장한다는 느낌이 없이 진솔하고 자연스러운바, 당시 자신들이 그 구금 및 조사과정에서 겪은 일들에 관한 재심청구인들의 진술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에 당시의 실태 등을 담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기재를 더하여 보면, 재심청구인들 중 피고인 1, 피고인 2, 피고인 5, 피고인 6, 피고인 17, 피고인 18은 군법회의에 이르기까지 구 형사소송법에 따라 구속영장이 발부된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는 기간의 최장기에 해당하는 40일을 초과하여 구금되어 있었던 사실 및 재심청구인들 중 피고인 3, 피고인 4, 피고인 5, 피고인 6, 피고인 7, 피고인 8, 피고인 11, 피고인 13, 피고인 14, 피고인 15, 피고인 16, 피고인 18은 당시 조사과정에서 폭행과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하였던 사실 또한 이를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

라. 재심청구인들에 대하여 이루어진 위와 같은 불법구금 내지 가혹행위는 앞서 본 제헌헌법구 형사소송법의 인신구속에 관한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서, 구형법[1948. 3. 20. 군정법령 제176호로 개정되어 1948. 4. 1. 시행된 조선형사령에 의하여 의용된 일본 형법(1941년 법 제61호)을 말한다] 제194조가 정한 특별공무원직권남용죄(“재판, 검찰, 경찰의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을 체포하거나 감금할 경우 6월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또는 제195조 제1항이 정한 특별공무원폭행, 능학(능학)죄(“재판, 검찰, 경찰의 직무를 행하거나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고인 기타의 자에 대하여 폭행 또는 능학의 행위를 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를 구성한다고 보아야 하고, 이미 그때로부터 70년에 달하는 세월이 흘러 그와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으며, 위 각 죄에 관한 공소시효도 이미 완성되었음이 명백한 이 사건의 경우, 재심대상판결에는 각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 가 정한 재심 이유가 있다.

4. 결론

그렇다면 재심청구인들의 재심 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형사소송법 제435조 제1항 에 따라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각 재심을 개시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별 지] 피고인 명단: 생략]

[[별 지] 재심대상판결: 생략]

[[별 지] 재심청구인들의 진술취지: 생략]

[[별 지] 재심청구인들에 관한 수형인명부 기재사항: 생략]

[[별 지] 형사소송법의 개정: 생략]

판사 제갈창(재판장) 정승진 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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