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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2016.1.14. 선고 2011누40709 판결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사건

2011누40709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원고항소인겸피항소인

1. A

2. 재단법인 B

피고피항소인겸항소인

행정자치부장관

변론종결

2015. 6. 25.

판결선고

2016. 1. 14.

주문

1. 원고들 및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

2. 항소비용은 각자 부담한다.

청구취지및항소취지

1. 청구취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 7. 10. 망 C의 별지1 목록 기재 각 행위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호, 제13호, 제17호의 친일 반민족행위로 결정한 처분을 취소한다.

2. 항소취지

가. 원고들

제1심판결 중 원고들 패소부분을 취소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 7. 10. 망 C의 별지1 목록 순번 ①, ③ 기재 각 행위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호, 제17호의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처분을 취소한다.

나. 피고

제1심판결 중 피고 패소부분을 취소하고, 위 취소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이유

1. 처분의 경위

가) 망 C(이하 '망인'이라고 한다)는 D 출생하여 1914년 E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1915년경부터 F중학교를 인수 · 운영하였고, 1920년경부터 G사를 창립·운영하였으며, 1932년경부터 H학교를 인수 · 운영하다가 해방 이후 1955, 2. 18. 사망한 자이고, 원고 A는 망인의 증손자이며, 원고 재단법인 B는 망인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사업과 장학사업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법인이다.

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이 사건 위원회'라 한다)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족행위규명법'이라 한다)에 따른 조사를 거쳐 2009. 6. 29. 망인의 별지1 목록 기재 각 행위가 같은 법 제2조 제11호, 제13호, 제17호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각 해당한다고 결정하고, 같은 해 7. 10. 이를 원고들에게 통지하였다(이하 '이 사건 처분'이라 한다).

다) 원고들은 이 사건 처분에 대하여 이의신청을 하였으나 2009. 10. 23. 위 이의신청은 기각되었다.

라) 한편, 이 사건 위원회의 활동기간이 2009. 11. 30. 만료됨에 따라 피고가 이 사건 처분에 관계되는 권한을 승계하였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2, 3호증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본안전 항변에 관한 판단

가. 피고의 주장

1)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은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순수한 조사활동의 결과에 불과하여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나 원고들의 권리의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건 처분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

2) 이 사건 처분으로 인하여 사자(死者)인 망인의 법률상 이익이 침해되지 않았고, 조사대상자가 아닌 원고들은 그 법적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 이 사건 처분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없다. 따라서 이 사건 소는 원고적격이 없는 자에 의하여 제기된 것이다.

나. 판단

1) 처분성 존부에 관한 판단

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이라 함은 행정청이 행하는 구체적 사실에 관한 법집행으로서의 공권력의 행사 또는 그 거부와 그 밖에 이에 준하는 행정작용을 말하는 것으로서(행정소송법 제2조 제1항 제1호), 국민의 권리의무에 직접 영향이 있는 법적용행위를 의미한다.

반민족행위규명법 제4조는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의 선정, 조사대상자가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조사,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의 수집 및 분석, 조사대상자의 친일반민족행위의 결정에 관한 사항 등을 이 사건 위원회의 업무로 규정하여 이 사건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조사 및 결정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고, 같은 법 제25조에 의하면 이 사건 위원회는 위원회 활동을 조사보고서로 작성하여 매년 대통령 및 정기국회 기간 중 국회에 보고하여야 하며, 같은 법 제26조에 의하면 이 사건 위원회는 그 활동기간 이내에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사료를 편찬하여야 하고, 같은 법 제27조에 의하면 이 사건 위원회는 위 조사보고서와 사료를 공개하여야 한다.

한편, 헌법 제1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조항이 보호하는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 국민 개개인의 일반적 인격권이 보장된다.

나) 이 사건 위원회가 조사대상자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는 경우 조사대상자의 명예감정은 물론 그에 대한 사회적 평가인 명예가 손상을 입어 그 인격권이 직접적으로 침해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되면 그에 관하여 작성된 조사보고서와 사료가 대외적으로 공개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 사건 위원회가 한 친일반민족행위의 결정은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 결정된 조사대상자의 일반적 인격권을 제한하는 것이어서 이는 단순한 학술적 조사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의무에 직접 영향이 있는 법적용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다만 이러한 결정에 있어서 조사대상자의 대부분은 이미 사망하였을 것이 분명하나, 조사대상자가 사자(死者)인 경우에도 인격적 가치에 대한 중대한 왜곡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것이고, 사자에 대한 사회적 명예와 평가의 훼손은 사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인격상을 형성하고 명예를 지켜온 그 후손의 인격권, 즉 유족의 명예 또는 유족의 사자에 대한 경애 추모의 정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헌법재판소 2010. 10. 28. 선고 2007헌가 23 결정 참고).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친일재산귀속법'이라 한다) 제2조 제2호, 제3조, 제5조 제4항에 의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로부터 상속받은 재산도 일정한 요건 하에 국가에 귀속하도록 하고 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조사 및 선정에 있어서 이 사건 위원회가 조사한 결과를 원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위원회의 결정은 위와 같은 점에서도 국민의 재산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법적용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다) 따라서 이 사건 처분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처분에 해당한다 할 것이므로, 피고의 이 부분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2) 원고적격 존부에 관한 판단

가) 행정소송법 제12조에서 말하는 '법률상 이익'이란 당해 행정처분의 근거 법률에 의하여 보호되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익을 말한다(대법원 2010. 5. 13. 선고 2009두19168 판결 참조).

나) 살피건대, ① 반민족행위규명법 제19조 제2항은 조사대상자로 선정된 사실을 조사대상자, 그 배우자와 직계비속 또는 이해관계인에게 통지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제28조 제1항은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조사대상자, 그 배우자와 직계비속 또는 이해관계인에게 통지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같은 조 제4항은 통지를 받은 자는 위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점, ②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건 처분으로 인하여 조사대상자인 망인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고, 그 직계비속인 원고 A 및 망인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사업과 장학사업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원고 재단법인 B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라거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기리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되므로, 이 사건 처분은 망인에 대한 일반적 인격권에서 도출되는 사회적 명예와 평가를 저해하고, 망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스스로의 인격상을 형성하고 명예를 지켜온 원고들의 인격권 내지 사회적 명예, 망인에 대한 경애, 추모의 정을 제한하게 되어, 조사대상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아울러 그 유족 등의 헌법상 보장된 인격권을 직접적으로 제한하게 되는 점, ③ 조사대상자의 직계비속인 원고 A와 망인의 상속재산 중 일부가 출연되어 설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원고 재단법인 B는 이 사건 처분으로 인하여 친일재산귀속법에 따라 재산권을 제한받을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원고들은 이 사건 처분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이 부분 주장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3. 처분의 적법 여부

가. 원고들의 주장

이 사건 처분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위법하므로 취소되어야 한다.

1) 처분사유에 관한 사실오인

가) 매일신보 · 경성일보에 게재된 기사 등의 허위성

피고가 이 사건 처분을 함에 있어 그 근거자료로 사용한 것은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게재된 망인에 관한 기사이거나 망인 명의로 게재된 글이다. 그러나 일제 말기 전쟁동원기에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게재된 기사나 글들은 과장·왜곡되거나 허위로 날조된 일제의 선전·선동물에 불과한 것으로 망인에 관한 기사나 글은 망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제가 망인의 명의를 도용하여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그 기재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신빙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나 검증 없이 그 기재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여 이 사건 처분을 하였다.

피고가 이 부분 근거로 들고 있는 매일신보 · 경성일보 등에 게재된 망인 명의의 글은 「I」, 「」, 「K」 등 총 3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망인의 행적에 관한 보도기사인데, 이는 일제의 관변매체인 매일신보나 경성일보가 망인의 명의를 도용하여 조작한 것이거나 허위로 날조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망인은 당시 H학교의 교장으로서 부득이 일제에 의하여 Q대회와 R좌담회 등에 강제로 동원되었을 뿐이지 자발적으로 위 행사에 참석한 것은 아니므로, 이를 두고 망인이 학병 또는 징병을 주도적으로 선전·선동하였다고 볼 수 없다. 나아가 단순히 망인의 글이나 행적이 매일신보 등에 보도되었다.는 사정만으로 망인이 학병이나 징병을 전국적 차원에서 선전·선동하였다고 볼 수도 없다.

피고는, 망인이 S단체이나 T단체에서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해 아무런 주장이나 입증을 하지 못하고 있고, 망인의 라디오. 또는 강연회에의 참석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된 것이다. 또한 망인의 U 건조비 300원 헌납은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납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위 금액은 G사와 V 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망인의 입장에서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다. 나아가 망인이 출정군인 유가족 원호사업에 협력할 것을 주장한 바도 없고, 설령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사회복지대책을 촉구한 것에 불과하다.

망인은 W연맹, CO연맹 등 일제가 조직한 주요 외곽단체에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그 이름만 오른 것일 뿐 자발적으로 위 단체들에 가입하여 실질적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사실이 없다.

2) 종합적 판단 의무 위반

망인이 별지1 목록 기재 각 행위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각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하기 위해서는 해당 행위뿐만 아니라 망인의 전체적인 성향, 활동, 업적 등을 종합적 · 전체적으로 P하여 판단하여야 할 것인데, 1) 망인은 일제강점기에 3·1 운동을 주도하고, V 주식회사 · G사 · H학교 등을 운영하면서 기업, 교육·장학사업 등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선 점, ② 망인은 조선총독부의 귀족원의원 제의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시청으로부터 2등급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당하였던 점, ③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8년에 출간한 책자인 '친일파 군상'에서도 망인을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자'로 분류하고 있으며, 해방 직후 친일파 처단을 앞세우던 좌익 계열의 건국준비위원회 역시 망인을 X부장으로 선임하고 55명의 전국인민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며, 1948년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도 망인을 조사대상자로 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열사 및 독립운동자약전'에는 망인이 독립운동가로 기재되어 있기도 한 점 등을 P하여 보면, 이 사건 위원회는 망인의 민족 계몽운동 등을 종합적·전체적으로 P하지 않은 채 이 사건 처분을 하였으므로 위법하다.

3) 형평의 원칙 위반

이 사건 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라고 결정한 망인의 별지1 목록 기재 행위와 성격, 빈도, 주도성·적극성 등의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망인의 위 행위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는 AA 및 DM(이하 'AA 등'이라 한다)의 행위에 대해서는 친일반민족행위결정 기각처분이 내려졌는데, 이 사건 위원회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유사한 사안에 관하여 차별적인 이 사건 처분을 하였는바 이는 형평의 원칙에 반하여 위법하다.

나. 관계 법령

별지2 관계 법령 기재와 같다.

다. 판단

1) 처분사유에 관한 사실오인 주장에 대한 판단

가) 매일신보 · 경성일보에 게재된 기사 등의 신빙성에 관한 판단

갑 제5 내지 18, 26, 28, 41 내지 45, 77호증의 2, 갑 제78, 83, 99, 123, 129호증의 각 일부 기재, 제1심 증인 DF, 당심 증인 DN, DO, DP, DQ의 각 일부 증언 및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면, 일제 말기에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서 일제의 입장을 대변하고 통치정책을 선전하는 데 역점을 둔 매일신보나 경성일보가 부족한 전쟁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기 위하여 일부 조선의 유력인사들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명의를 도용하여 징병을 찬양하고 학병 동원을 독려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였거나 망인의 말이나 글의 일부를 윤색· 축소·과장 - 왜곡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을 제4, 6, 57, 145호증의 각 기재 및 아래 각 인정사실에서 거시한 증거들, 당심 증인 DR의 증언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위 신문사들에 게재된 망인 명의의 글이나 망인에 관한 기사들은 모두 망인이 작성하거나 망인의 행적들이 사실대로 보도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고, 원·피고가 제출한 서증(아래에서 배척하는 부분을 제외한다) 및 제1심 증인 DF, 당심 증인 DN, DO, DP, DQ의 각 일부 증언만으로는 위 신문사들에 게재된 망인 명의의 글이나 망인에 관한 기사들이 모두 망인의 명의를 도용하여 조작된 것이라거나 망인의 진정한 의사에 반하여 작성·보도되었다고 인정하기 어려우며, 이에 부합하는 듯한 위 각 증거의 일부 기재나 증언, 갑 제24 69, 74, 93, 119, 124호증의 각 기재는 믿지 아니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 따라서 매일신보, 경성일보에 게재된 망인 명의의 글이나 망인에 관한 기사가 그 명의를 도용하거거나 허위로 조작되었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원고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 게재된 망인의 글이나 망인에 관한 기사의 신빙성이 위와 같이 인정되는 이상 이 사건 위원회가 신빙성이 의심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게재된 기사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 사건 처분을 하면서도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한 아무런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아 행정절차법 제4조를 위반하였다는 취지의 원고들 주장은 이유 없다),

(1) 매일신보, 경성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이기는 하나 당시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일간지였다. 위 각 일간지는 일제 강점기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1차 사료로서 국내외 역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데, 매일신보 등의 보도내용을 보면 그 일시와 장소가 구체적이어서 일제가 이를 임의로 날조하였다고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망인의 동생인 김연수가 이사를 역임하기도 한 매일신보가 망인의 의사에 반하여 망인의 말이나 글을 무단으로 게재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2) 망인의 1940년 이전의 친일행위들에 대하여는 매일신보, 경성일보 외에 G, 조선일보에도 그에 관한 기사가 적지 않게 실려 있고(조선일보 BG자 조간, BR자 석간, DS자 조간, DT자 조간, DU자 석간, G BR자 석간, BT자 조간, DV자 조간, DU자 조간 등에는 망인의 1940년 이전의 친일행위가 보도되어 있다), G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1940. 8.경 이후에는 망인의 행적들이 매일신보, 경성일보 외에 총동원, 국민총력, 삼천리 등 다수의 매체에서도 나타난다.

(3) 0 전 P대 총장은 'DW(P대 출판부, 1977년)'에서 망인 명의로 작성된 학병 격려글은 당시 매일신보 기자인 DE가 대필하였다고 회고하고 있기는 하나, 설령 0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망인은 0의 감수를 전제로 매일신보 기자 DE에게 대필을 허락하여 「K」라는 글을 기고하였다는 것인데, 위 글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게재되었다고 하더라도 망인의 의사에 따라 작성된 글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이는 H학교에 있는 동안 글을 쓰지 않는 망인을 대신하여 강연원고, 훈시 등을 대필하였고, 망인은 이를 꼼꼼하게 검토하였다고 진술하였는데,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친 글들 역시 망인의 글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4) 원고들은 매일신보, 경성일보가 망인의 명의를 도용하거나 내용을 조작하여 기사를 게재하였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당시 매일신보 기자인 당심 증인 DN의 증언 및 BI의 'DX(1949년)', 당시 매일신보 기자인 DY의 'DZ'(박영사, 1975년), 'C전(B, 1976년)', 당시 경성일보 기자인 EA의 'EB(중앙공론사, 1977년)', 0의 'DW(P대 출판부, 1977년)', 당시 매일일보 기자인 EC 등의 'ED(한국신문연구소, 1978년)' EE의 'EF(G사, 1981년)', EG의 'EH(실천문학사, 1984년)', 당시 매일신보 기자인 EI의 'EJ(창, 1992년)', EK의 'EL(일조각, 1990년)', EM 등의 'EN(조광출판, 1995년)', EO의 'EP(암파서점, 1997년)', EQ . ER의 'ES(금성청년출판사, 2003년)', ET의 'EU(커뮤니케이션북스, 2005년)', EV의 'EW(신동아, 2005년)', EX의 'EY(민족문제연구소, 2007년)' 등에 나타난 망인과 동시대를 산 사람들의 진술 등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일반적 추상적으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일제 말기에 제대로 된 취재 절차를 거치지 않고 조선의 유력인사들의 명의를 도용하여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였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거나 망인과는 무관한 DK, DJ, EZ, FA 등에 대한 것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일부 증거들은 망인이나 원고들과 직·간접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단체에서 출판된 것이므로 그대로 믿을 수 없는바, 위 각 증거들 및 그 밖에 원고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매일신보나 경성일보가 망인의 동의나 감수 없이 망인 명의의 글을 함부로 작성하여 게재하였다거나 망인에 관한 허위의 기사를 보도하였다고 인정하기는 부족하다.

(5) 또한 원고들은 그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들로 당시 H학교의 학생이거나 학병이었던 DF(제1심 증인), DQ(당심 증인), DP(당심 증인), FB, FC, FD, FE 등의 진술을 내세우고 있으나, 그 진술 내용은 대부분 평소 언행(평소 글을 쓰거나 나서서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망인에 관한 어느 한 시점의 일화 및 망인으로부터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개인적 경험 등을 들어 망인이 위 신문들에 게재된 말을 하였거나 글을 썼을 리가 없다거나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는 의견을 밝힌 것에 불과하므로, 위 각 진술들을 근거로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 게재된 망인 명의의 글이나 망인에 관한 기사가 모두 허위라고 단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심 증인 DQ이나 DP을 비롯한 위 각 진술인들의 나이, 망인과의 관계, 다른 H학교 출신 학병의 진술 내용 등에 비추어 보면 그 진술을 그대로 믿기도 어렵다.

(6) 피고가 제출한 증거들에 의하면, 반민족행위규명법상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망인의 행위와 관련하여 망인의 실명이 포함되어 보도된 기사는 1937. 7.경부터 1945. 1.경까지 약 100여건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망인이 이에 대하여 항의하였다는 등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매일신보나 경성일보가 망인에 관하여 객관적 사실에 반하는 기사들을 지속적·반복적으로 게재하는 경우 그 조작 사실이 쉽게 드러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민심악화 등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공연하고 일상적으로 망인의 동의나 용인 없이 기사를 조작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7) 망인은 1932. 6.경부터 H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35. 6.경 사임하였고, 망인이 실질적으로 소유·운영하던 G사는 1936. 8.경 DG사건(DH의 사진에서 DI를 지운 사건)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망인은 1937. 5.경 H학교의 교장으로 복직하였고, 같은 해 6.경 G사에 대한 무기정간 처분이 해제되었는데, 이 사건에서 문제된 망인의 친일행위는 그 직후인 1937. 7.경부터 매일신보, 경성일보, 조선일보, G 등을 통하여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 망인의 1937. 7. 이전 친일행위에 관한 보도가 전혀 없는 사실을 더하여 보면, 망인은 H학교나 G사를 운영하기 위하여 1937. 7.경부터 일제에 협력하였고, 매일신보 등은 그와 같은 망인의 협력행위에 근거하여 망인 명의의 글이나 망인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였던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8) 매일신보 및 경성일보의 기사 가운데 「I」, 「」, 「K」 등 일부 기고문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망인의 말이나 행적이 기재된 보도기사이기는 하다. 그러나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의 기자들이 작성한 보도기사라고 하더라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망인의 구체적인 말이나 행적에 근거하였다고 봄이 상당한 이상, 보도기사의 성격상 왜곡 · 각색 · 과장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정만으로 그 신빙성을 모두 부인하기는 곤란하다.

나)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1호 해당 여부에 관한 판단

(1) 인정사실

(가) Q대회 참석

망인은 1942. 5. 23. 매일신보사가 전국적으로 주최한 Q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위 대회에는 조선총독부 관료와 경성부윤 등 관료가 참석하였고, 망인을 비롯한 Y, Z, AA 등 조선인 유력자가 대거 참석하였다. 위 대회를 보도한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B, 매일신보 AC자 조간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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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도의 산천초목까지도 광영과 감격에 잠기게 하는 이 징병제도가 실시된 것을

마음껏 축하함과 함께 다시 온 정성과 온 힘을 바쳐서 오로지 성스러운 황국의 간성이 된 책무를 완

수키를 다시 한 번 굳게 맹서기 위한 본사 주최의 'Q대회'는 맑은 5월의 훈풍 속에서 작() 23일

개최되었다.

(나) 징병·학병 찬양 및 선전·선동행위

망인은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사이에 전국적인 일간지였던 매일신보, 경성일보나 잡지인 AF에 징병과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게재하거나 징병에 관한 좌담회나 행사에 참여하여 같은 취지의 연설이나 발언을 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일신보AD자적간1면(징병제실시기념특집인‘AE'이라는제목의연재기사중하나로망

인의 사진이 함께 게재됨), 기고문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一方)으로

| 전 반도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 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상술한바 모든 병근(病根)을 일

거에 쾌치(治)하고 거일(去日) 생산할 제2의 양질(良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하리오.

「J」, AF, 48~49쪽, 기고문

이제 여(余)의 30여 년간 교육자 생활의 경험으로 보건대, 우리 반도청년의 소질로는 지력(智力)으로

|나 체력으로나 모든 것이 그다지 타인에게 낙오될 것이 없으며, 때로는 기다(幾多)의 장점도 불무(不

無)하나 오직 보편적으로 강의 과감(强毅果敢)한 정신과 인고단련(忍苦錢錄)의 기백(氣魄)이 부족한 감

(感)이 불무(不無)한 것은 오인(人)의 항상 통석(痛)히 여기던 바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인(人)

은 금후 제군(諸君)에게 일단(一段)의 인고(忍苦)와 일층(-)의 단련(銀鍊)을 요망하는 바이다.

「K」, 매일신보, AG자 1면, 기고문

나는 생각하건대 제군의 번뇌가 현재 이 점에 부딪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순간은 제군의

그와 같은 번민과 반문을 무시하고 각일각 추진되고 있다. 대동아의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

아볼 사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

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 때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일분자는 그만두고 황민(民)으로서 훌륭히

|제국(帝國)의 일분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제군이 위에 말한 의무를 다할 때에 비로소 제군은 제군

이 이 땅에 살아 있을 것이고 제국(帝國)의 일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빛나는 대우 즉 권리

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TAH」, 매일신보, AI차 2면, AU자 3면(1943. 11. 6. 개최된 R을 말하는 좌담회에 망인이 출석하여 언급

한 내용이 보도된 것임)

지금 연맹 사무총장도 말씀한 바와 같이 반도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왜 학도 전원이 용감

하게 지원하지 않는가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늘 말하는 바와

같이 너무도 문약에 흐르는 폐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분개하실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그렇습니다. 3백년 동안 조선 사람은 전장에 참가한 경험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평시에도 조선 사람은 피난소만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 못할 사실일 것입니다.

|피난에는 지리산이 좋다느니, 금강산이 좋다느니, 귀에 익도록 들어온 말인데 이것이 제이의 천성으로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퍽 부끄러운 일이나 사실이 사실인만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존망을 걸고 싸우는 이때 조선 사람은 냉담하게 이를 보고 있지나 않은지 내지

인 측에서는 분개할지도 모르나 사실은 여기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병정이 되면 죽는 것

|인 줄로 알고 겁을 먹는 자도 있는데, 결국 이런 것은 문약한 데서 오는 것이므로 먼저 그 의지를 굳

게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M」, 매일신보, AJ자 1면(A 부민관에서 열린 'CW' 행사에 망인이 출석하여 한 격려사 내용이 보도된

것임)

징병제도(徵兵制度)가 실시되어 조선청년(朝鮮靑年)도 명년明年)부터 광영(光榮)의 병역(兵役)에 나아

가기로 되었으나, 이미 징병(兵) 연령(年齡)을 초과한 제군(諸君)은 영구(永久)히 군문(軍門)에 들어

갈 기회가 없는 듯 보이더니, 이번 특별지원병의 무전(特典)이 허용되어 용약(第) 폐하(座下)의 고굉

(股城)으로서 1) 적(敵)과 총화(銃火) 가운데 상투(鬪)하게 된 제군은 부하(負荷)의 대임(大任)을

다할 결의(決意)에 불타고 있는 것을 확신(確信)하는 바이다. 돌이켜 생각건대 우리 반도인(半島人)은

문약(文弱)에 靈러(중략) 문약을 일삼게 이른 것이다. 이 점은 벌써부터 나의 통석(痛情)하여 마지 않

는 바였는데, 이때 제군의 출진(出陣)을 보게 된 것은 황국(皇國)의 일대□□(一大□□)일 뿐 아니라 실

(實)로 반도(半島) 제군의 적폐(積)를 일소(一掃)하고 2천5백만의 전도(前途)에 대광명(光明)을 가

져오는 것으로 축복하여 마지않는 바이며 제군의 □□□□를 진심으로 축원하는 바이다.

「N」, 매일신보, AK자 석간 2면 (AJ H학교 교장실에서 일본군 AL 대좌를 비롯하여 AM단체의 AN, AO,

AP 등이 임석하고, 학교 교직원들과 학부형들이 열석한 가운데, 교장인 망인은 아래와 같은 인사말

을 하였다고 보도됨)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번 광영의 임시 특별지원병에 반도 학도들도 채용될 수 있게 되었

으므로, 우리 학교에서는 여기에 응하려고 지금 만전을 다하고 있습니다. 시골에 계시는 학부형들에게

는 전부 전보로써 그 뜻을 전달하였으며, 경성에 계시는 여러 학부형들은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주시도

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국난을 당하여 한 사람인들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

의 자제들은 모름지기 군문(軍門)으로 달리도록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AQ」, 경성일보 AR자 1면 (H학 교장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음)

미지원자에 대해서는 목하 연락, 격려 중이다. 반도인은 이조시대에는 무관을 극력 경멸하여 오히려

천민층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의 지원제에도 부형측에서는 망설인 사람도 있었던 듯하다. 만약 한

명이라도 지원에서 빠비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원칙으로서 정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는 학무국의 지시가 있을 것이므로 우리들로서는 그것에 따를 뿐이다. 학교경영방침

의 변경은 지난 번 총독 각하의 훈시에 보여준 대로 문과를 이과계로 전환할 것인가, 혹은 문과계와

문과계 동지(同志)의 통합으로 할 것인가, 이 또한 학무당국의 지시에 따라서 이행한다. 그러나 완승

을 목표로 멸적(滅敵)의 투혼에 불타는 철 같은 오계(五體)의 청년 육성이 근본 요체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AS」, 매일신보 AT자 석간 2면 (망인의 사진이 함께 게재됨, 망인이 H학교의 학병 지원자들을 대상

으로 한 예비훈련 입소식에 참석하여 훈시한 내용이 보도된 것임)

생각하면 이 시대의 최고 광영은 젊은 청년과 학도들에게 있다. 나라의 흉융을 결하는 결전의 마당으

로 총을 메고서 돌격하는 그 열화와 같은 조국애와 동포애는 오직 젊은이들만이 가장 힘차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제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 수 있는 ‘검사의 날'이 우리 학도를 맞이하게 되었다.

궐연히 발분하여 학병을 지원하는 원서를 내고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 학도들의 가슴은 숭고스

러운 공을 끼고 있을 것이다. 날이 밝으면 각 검사장에 태양이라도 정복하려는 기개에 찬 젊은 학

도들의 약동하는 육탄군상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그들이 전부 ‘갑종'으로 합격하기를 축

수하는 바이다. (후략)

「AU」, 매일신보 AV자 3면(망인이 1943. 12. 17. H학교의 학병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한 예비훈련

입소식에 참석하여 훈시한 내용이 보도된 것임)

(전략) 이 곳 H학교에서도 17일부터 1주일간 군대생활 그대로의 훈련을 개시하였다. 이 곳 H학교에서

는 극소수를 제외한 전원 합격과 반 수 이상의 갑종 합격이란 미더운 성적을 나타내었는데 (중략) 입

소식은 오전 11시부터 국민의례에 이어 국가봉창, 북도가 있은 다음 C 교장의 훈시로 들어가 ‘제군은

세계무비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되었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서 규율 있는

생활을 하기 바란다'는 간단하고도 온정 넘치는 훈시가 있은 다음 (후략)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을 제8, 9, 11, 12호증, 을 제18호증의 1, 2, 을 제19, 20호증, 을 제95호증의 1, 5, 을 제99, 101, 104호증의 각 기재(가지번호가 있는 것 중 가지번호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가지번호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 변론 전체의 취지

(2) 판단

(가) 위 인정사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① 망인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사이에 Q대회, R을 말하는 좌담회에 참석하고 징병신체 검사장이나 학병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한 예비훈련 입소식에 참석하여 징병 ·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내용의 발언이나 연설을 하였고, 그 내용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보도된 점, ② 망인은 AD자 매일신문에 「I」는 글을, 1943, 9. AF에 위 「I는 글의 일부 내용을 요약 강조한 「J」이라는 글을, AG자 매일신보에 「K」 라는 글을 게재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 제3자에 의하여 대필되었다고 하더라도 망인의 대필 허락 및 감수가 있었던 이상 망인의 글이 아니라고 볼 수 없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점, ③ 위 각 기사나 글이 게재된 매일신보, 경성일보는 전국적인 일간지이었고 특히 매일신보는 당시의 유일한 우리말 일간지였던 점, ④ 망인은 당시 H학교의 교장이자 사회유력인사로서 학생들의 학병 지원 및 징병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⑤ 그 밖에 징병이나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 · 선동하는 망인의 행적에 관한 보도기사나 망인의 글 또는 발언 내용, 매일신보 등에 게재된 기간, 게재의 방식(일부는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음) 등을 종합하여 보면, 망인의 별지1 목록 순번 ① 기재 행위는 학병 · 지원병· 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행위로 봄이 상당하다.

(나)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망인이 일부 지역 행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참석한 사실이나 망인이 하였다는 말이 기사화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선동 등을 한 행위라고 평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나, 다음과 같은 제반사정, 즉 ① 매일신보 등은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일간지로서 매일신보 등에 보도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한 망인의 연설이나 발언은 '전국적 차원'의 요건을 충족한다고 할 것인데, H학교의 교장이자 사회유력인사였던 망인은 Q대회, R을 말하는 좌담회나 징병 신체검사장 예비훈련 입소식 등에서의 공개적인 발언이 매일신보 등에 보도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② Q대회는 매일신보사가 전국적으로 주최한 것이므로 비록 일부 지역에서의 행사에만 참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참석 행위는 징병이나 학병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선동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는 점, ③ H학교의 교장인 망인이 AG 매일신보에 「K」라는 글을 게재하여 징병 · 학병을 적극적으로 독려함으로써 H학교의 학병 지원율이 크게 높아진 것으로 보이는 점, ④ 'CW' 행사를 주최한 CO 연맹의 이사 겸 평의원이었던 망인은 전문학교장들을 대표하여 학병출진 격려사를 낭독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망인의 위 각 행사 참석이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한 행위라고 볼 만한 사정을 찾아볼 수 없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원고들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 따라서 원고들의 이 부분 주장은 이유 없다.

다)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호 해당 여부에 관한 판단

(1) 인정사실

(가) 라디오 및 AW 일대 시국강연

①) 조선총독부(학무국)는 중일전쟁에 즈음한 1937. 7.경부터 일반 민중에게 시국을 철저히 인식시키기 위하여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 중추원참의 등 사회유력자들을 동원하여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연 방송을 하게 하였고, 지방의 군청소재지를 중심으로 그 지방의 유력자와 관민 혹은 청년 등을 상대로 한 강연을 하게 하였다.

② 이에 따라 망인도 경성방송국에서 라디오. 시국강연 강좌를 하였고, 제2차 시국 강연대 AW반의 연사로 배정되어 1937. 9. 6.부터 같은 달 11.까지 AX, AY, AZ, BA, BB, BC, BD 등지에서 'BE' 등의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와 관련한 망인의 활동에 대한 당시의 신문 보도내용은 아래와 같다.

「BF, 조선일보 BG자 조간 2면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북지사변의 중대성에 비추어 일반 민중에게 시국을 철저히 인식시키고자 16일

오후 2시부터 민간유력자들을 총독부로 초치하고 여러 가지 협의한 바 있었거니와 이 협의 결과로

한편으로는 작일 석간 기보와 같이 중추원 참의들 중에 유세대를 선발하고 전 조선 각지로 파견하여

시국강연을 시키는 동시에 일방 시내에서는 라디오 시국 강좌를 설치하여 제일부에는 학무국장 이하

BH 등과 제이부에는 사회교육과장 이하 BI, BJ, BK, BL, C, BM 등 제씨가 19일부터 매일 번갈아

시국강좌를 개최할 것이요, 20일과 21일은 강연회가 있을 터로 일정은 다음과 같다. (후략)

「BN」, 매일신보 BG자 석간 2면

(전략) 시국강연은 20일부터 경성을 비롯하여 전선 각지에 강사를 파견하게 되었다는데 경성에서의

강연 일정은 다음과 같다. (중략) 그리고 라디오는 제1부는 학무국장 이하 (중략) BH 등이 또 제2부

는 사회교육과장 이하 BI, C, BJ, BL, BK, BM 등 제씨가 19일부터 매일 시국강좌를 개최한다는데

이것은 전부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주체로 총독부에서 후원을 하게 된 것이라 한다.

「금일의 프로그램」, 경성일보 BO자 조간 8면

제2방송 (중략) 오후 8시 시국강연 C (후략)

「금일의 프로그램」, 경성일보 BP 자 석간 4면

제2방송 (중략) 오후 8시 시국강연 C (후략)

「BQ, , 조선일보 BR자 2면

30일부터 시작한 각계 명사의 시국강연 방송은 여러 날을 계속할 모양인데 제2일인 금 2일은 H학교

장 C씨가 마이크를 통하여 시국에 대한 열변을 널리 전 조선에 방송하기로 되었다. 그 내용인 즉 일

본제국의 동아에 처하여 있는 세력적 지위를 철저히 인식하는 동시에 이번 북지사변과 비상시국의

철저한 각오를 환기하여 민심의 동요를 각각 자제하며 각각 그 업에 안정하여 총후봉공에 노력하는

것이 이 시국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도라는 것이다.

「BS」, G BT자 조간 2면

현하 시국은 더욱더 비상시 색채로 진전되어 가는데 비추어 BU은 시국순회 강연대를 조직하여 경향

각지의 민중에게 시국에 대한 인식의 철저 강화를 도모하고자 9월 6일부터 일제히 전조선 각지에

59명의 연사를 파견하여 일주일 내지 10일간씩 중요지를 순회하여 시국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각 도

에 배정된 연사는 다음과 같다.

▲ AW도 BV, BW, BX, C, AA, BY

「BZ」, 매일신보 CA자 3면

(전략) 지나사변이 전면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국제관계도 미묘한 동향을 하고 있는 차제 국민은 총

일체가 되어 거국일치 국난을 타개함이 무엇보다 필요함에 감(鑑)하여 본부에서는 반도민중에게 시

국에 대한 인식을 일층 더 심각케 하기 위하여 조선인 명사 40여명에게 위촉하여 각 도에 파견 제2

차로 순회 강연을 하기로 되었는데 이에 CB에서는 지난 6일 오후 8시부터 CC 공회당에서 전기 강연

회를 개최하였는바, 남녀 청중의 운집으로 장내장외는 정각 전부터 (중략) 대혼잡을 한 가운데

一. 지나사변 추이에 대하여 C

二. 지나사변의 전모 AA

이상과 如한 양씨의 열변으로 일반 청중을 감탄케 한 바 있었다.

「CD」, 조선일보 CE자 석간 7면

BD에서는 경성으로부터 H 교장 C씨와 CF 교장 AA씨를 초빙하여 읍민에게 시국에 관한 인식을

거듭 주기 위하여 지난 9일 오후 8시부터 BD 극장에서 CG씨 사회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청중이

천여 명에 달하였으며, 양씨의 힘 있는 부르짖음은 청중에게 많은 충동을 준 후 동 오후 11시경에 폐

회하였다.

「CH」, 매일신보 CI자 석간 3면

본부에서는 시국의 중대성에 감(鑑)하여 반도민중에게 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파악케 하고자 조

선인 명사 수십 명에게 위촉하여 제1회에 전선 각지에 파견하여서 시국에 관한 강연을 실시한 바 있

었는데 그 실적이 양호한 바 있었음으로 다시 四界의 □위자 사십여 명을 각 도에 파견, 제2차 시국

강연회를 개최키로 되었는데 이에 AW에서는 본부에서 파견된 강사를 四班에 分하여 左記와 如히 去

6일부터 11일까지 全 道에 하여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각 군 모두 청중의 운집으로 대성황을

呈하였다. 한다.

◇ 반별 급 개최지

A반 C씨 AA씨

AX, AY, AZ, BA, BB, BC, BD 각 군 (후략)

(나) 금품헌납행위

망인은 1937. 9.경 U 건조비로 300원을 헌납하였다.

(다) S단체 준비위원

S단체은 1941. 8. 24. Y, BM, Z, CK, CL 등을 중심으로 준비회를 개최하였는데, 위 준비회에서는 '유사 이래 미증유의 가장 중대한 시국에 직면함과 동시에 또한 가장 숭고존엄한 동아공영권 확립의 성업완수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금 우리들은 특별지원병 외에 일반적으로 병역에 복무하는 명예스러운 기회를 갖지 못하지만 모두 적성(赤誠)으로써,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장차 체력이 다하도록 총후봉공(銃後奉公)에 더욱 철저히 하여 충열한 장병의 분투에 대하여 황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내용의 설립취의서와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와 그것의 대책 결의, 근로보국의 실행' 등의 운동요망안을 채택하였다.

② 망인은 S단체의 60명의 준비위원 중 1인(경기도 지역 준비위원)이었다.

③ S단체은 실천사업으로 CM를 설치하고 청장년층의 훈련 등 적당한 애국사업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준비회 단계에서 같은 해 10월 CN단체와 함께 T단체으로 통합되었다.

(라) T단체의 발기인 · 감사

① T단체은 1941. 10.경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위해 CN 단체와 S단체이 통합되어 결성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로서, 그 강령은 '황국신민으로서의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의 통일을 기함, 전시체제에 기하여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함, 근로보국의 정신에 기초한 국민개로(國民皆勞)의 실을 거두기를 기함, 국가우선의 정신에 기초한 국채의 소화(消化), 저축의 여행(行), 물자의 공출, 생산의 확충에 매진하는 것을 기함, 국방사상의 보급을 도모함과 동시에 일조유사(一朝有事)의 때에 의용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함'이었다.

② 망인은 1941. 10.경 T단체의 발기인 겸 감사로 취임하였다.

③ T단체의 발기인은 전국적으로 1,163명이었고, 1942. 10.경 CO연맹으로 흡수되었다.

(마) 원호사업 협력행위 매일신보에는 망인이 출정 군인 유가족을 위한 원호사업에 협력할 것을 주장하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이에 대한 당시의 신문보도 내용은 아래와 같다.

「CP」, 매일신보 CQ자 석간 2면, CR자 5면

멀리 전선에 용약출전한 군인들이 만일 그 사투가 감행되는 결전장에서 고향에 남아 있는 외로운 어

머니나 또는 아내의 일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이 곧 전투에 영향되는 것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그래서 총후에서 상이장병들을 위하여 또는 출정 유가족을 위하여 행하는 원호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번 학병들이 출진함에 당하여 신문을 통하여 보더라도 가정사정이 여

러 가지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용약출진을 결행한 학도들의 수효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이러한 학

병들을 위하여 또는 징병제 실시에 따라 금후 출정할 반도 출신 장병들을 생각할진대 군인원호 역시

한층 확대 강화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데 이번 조선금융단에서 20만 원을 제공한 것은 일대 쾌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업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고서 원호사업에 절대 협력하여야 할 것을 더

욱 각오할 것이다.

「CS」, 매일신보 CT자 3면

어제 20일로서 우리 학병들을 전역에 보낸 우리 앞에는 이제 더 큰 징병이 있다. 이래서 학병을 보

낸 뒤의 총 반도 민중의 결의는 한층 더 국어야 하고 커야 할 것은 물론이요, 순충의 전열에도 병

사들을 내어놓은 영예의 가정을 우리가 책임지고 (중략) 원호하여 반도 징병에 만전을 기하지 않으

면 아니 될 것인데 누구에게도 미하지 않게 감루를 머금고서 학병들의 진즉에서 '잘 싸우라고 전

을 지은 학교장 C씨는 다음과 같이 결의를 말한다.

오직 한결같은 순충의 마음으로서 군문에로 들은 우리 학병들의 전도는 승리와 광영이 있을 뿐이다.

이제 대망의 징병이 실시됨에 따라 우리는 학생이 없는 가정이라도 적령기의 청년남아를 가진 집에

서는 모두 이 며칠 동안 반도 전역이 감격으로 환송하는 장쾌한 병역의 성사를 맛보게 될 것이다.

반도 출신의 젊은 병사들을 전열로 보내는 것은 실로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떠나는 병사, 보내

는는 부모형제, 이 광경은 이웃집의 일이 아니요,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머지않아서 내 앞에 당하

는 내일임을 이제 학병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로 미흡하거나 준비가 부족하였던 점도 점차 개선되어

징병의 길에 유감없이 될 것이다.

또한 그 동안 신문에도 많이 보도되었거니와 아들과 남편을 나라에 바치는 가정 중에는 가정 사정이

심히 곤란한 곳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정, 이러한 부모를 뒤에 남기고서 전열에 나가는

병사들로 하여금 '뒷일은 우리가 맡을 것이니 오직 잘 싸워달라'고 출정군인 유가족을 위한 여러 가

지 원호 사업에 또한 만전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당국에서도 일찍이 군인원호회 조선본부를 두고 각

도에 지부, 분회를 설치하여 각종 사업으로서 유가족의 직업보도 또는 의료, 교육 등 각 방면으로 원

호의 손을 뻗치고 있기는 하지만 반도에서 군인들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 원호사업도 더 확충하

여 가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업이야말로 반도 민중이 다 함께 키워나가도록 힘써 사우는 반도의 책

임을 완전히 수행하도록 할 것이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을 제22, 23, 25, 26, 54, 56, 69, 70, 72, 73, 86호증, 을 제87호증의 2, 4, 5, 을 제100, 133호증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판단

(가) 어떤 행위가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호 소정의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하기 위해서는 사회 · 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하면 족하고,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할 목적으로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직접 조직·운영할 것까지는 요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조 제10, 17, 19, 20호와의 문언상의 차이를 고려할 때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행위는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바, 적극(積極)은 '대상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주도(主導)는 '주동적인 처지가 되어 이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문제되는 행위의 내용이나 속성, 행위자의 지위, 행위의 의도나 횟수, 그 당시 보인 다른 행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 보았을 때, 단순한 가담이나 협조를 넘어서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주동하는 위치에서 이끄는 정도에 이른 경우에야 비로소 '적극 주도한 것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한편 '내선융화'는 일본과 조선이 서로 융화되어야 함을, '황민화운동'은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 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자는 모두 일본이 전쟁을 위해 조선인을 마음대로 동원·사용하고자 시행한 한민족말살정책으로, 반민족행위규명법이 제정된 배경, 일본 식민통치기의 역사적 상황 등에 비추어 볼 때, "내선융화와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하는 행위"는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 및 신사참배를 촉구하고 젊은이들의 징병 및 위안부 동원을 적극적으로 선전·선동하는 등 일본의 한민족말살정책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일체의 행위를 의미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나)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망인이 경성방송국과 AW 일원에서 시국인식 강연을 한 사실, 망인이 S단체의 준비위원으로 선정되고 T단체의 발기인 겸 감사로 취임한 사실, 망인이 1937. 9.경 U 건조비로 300원을 헌납하고 매일신보를 통하여 출정 군인 유가족을 위한 원호사업에 협력할 것을 주장한 사실은 앞서 인정한 바와 같으나, 위 법리나 앞서 든 증거, 갑 제80호증의 기재 및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망인의 별지1 목록 순번 ② 기재 행위가 사회·문화 기관을 통하여 일본제 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① 망인이 라디오 시국강연과 AW 일원에서 시국인식 강연을 한 것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로 볼 수 있음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위와 같은 행위가 조선총독부 학무당국의 주도와 파견하에 이루어진 점에 비추어 볼 때 망인이 이를 '적극 주도 하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②) 망인이 준비위원이나 발기인 · 감사를 맡았던 S단체이나 T단체 이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하기 위하여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또 위 단체 내부에서 망인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였는지에 관한 구체적 자료가 없다.

③ 망인이 U 건조비 300원을 헌납한 것은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조 소정의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망인의 재력이나 지위에 비추어 보아 그 금액 또한 미미할 뿐만 아니라 망인이 위와 같은 모금활동을 적극 주도하였다고 볼 자료도 없다. 한편, 망인이 1937. 7.경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1941, 12.경 종로경찰서에 2,000원을, 1943. 4.경 탄환 제작용으로 철대문, 놋그릇 등을 각 헌납한 사실은 피고가 당초 이 부분 처분 사유로 삼은 행위에 해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사정만으로 망인이 1937년 중일 전쟁과 1940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무렵 전쟁 물자의 공출을 적극적 · 주도적으로 선전·선동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① 망인이 매일신보를 통하여 출정 군인 유가족을 위한 원호사업에 협력할 것을 주장한 내용에 의하면, 위 주장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후방에서 일본군 징병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제에 협력한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가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조에 해당한다고 본 망인의 위 각 행위들을 망인이 적극 주도하였다고 볼 수 없어 위 규정에 해당하는 행위로 볼 수 없는 이상, 망인이 2회에 걸쳐 매일신보를 통하여 출정 군인 유가족을 위한 원호사업에 협력할 것을 주장하였다는 점만을 들어 망인이 사회·문화 기관을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6)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호는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 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하는 것을 요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피고가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1호에 해당하는 행위로 결정한 망인이 징병 또는 학병을 찬양하고 선전·선동하였다는 내용의 별지1 목록 순번 ① 기재 행위와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7호에 해당하는 행위로 결정한 망인이 1938년경부터 1944년 경까지 W연맹, CO연맹 등 일제제국주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다는 내용의 별지1 목록 순번 ③ 기재 행위는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다) 따라서 피고가 망인의 별지1 목록 순번 ② 기재 행위를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호의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은 위법하므로 이를 지적하는 원고들의 주정은 이유 있다.

라)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7호 해당 여부에 관한 판단

(1) 인정사실

(가) W연맹의 발기인 이사 · 위원 · 참사 등으로 활동

① W연맹(W聯盟)은 일제가 1938. 6.경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황국정신,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 경제정책 협력 등 전쟁지원을 목적으로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망라하여 만든 전시통제기구로서, 위 연맹은 '거국일치(擧國一致)·진충보국 (盡忠報國)·견인지구(堅引持久)'의 3개 목표를 내세웠다.

② 망인은 1938. 6. W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같은 해 7월에 이사를 맡았고, 1938. 10.경 위 연맹 내에 조직된 CU위원회의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을 각 맡았으며, 1939. 4.경 개편된 위 연맹의 이사에 재선임되는 한편 경성부 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의 자격으로 신설된 참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같은 해 7. 18.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한 간담회 등에 참석하였다.

(나) CO연맹의 상무이사 · 이사 · 참사 · 평의원 등으로 활동

① 조선총독부는 전쟁이 확대되어 가자 1940. 10.경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 수행에 총동원하기 위하여 W연맹을 전시 최대의 관변 통제기구인 CO연맹(CO聯盟)으로 확대 개편하였는데, 위 연맹은 '국체본의(國體本義)의 투철로부터 도의 조선(道義朝鮮)의 확립을 기도하여 2,500만 신민의 총력을 결집 연마하여 대동아전쟁 목적의 완수에 매진하고, 더불어 도래하는 징병제도 실시 준비에 유감없이 기한다'라고 운동방침을 천명한 후, 1944년경까지 궁성요배운동 전개, 국어(일어)상용운동 전개, 징병제실시 감사결의 선양운동 전개, 국민징용취지철저운동 실시 등 일본제국주의 말기의 식민지 지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② 망인은 CO연맹의 창립 당시 이사 겸 참사를, 1940. 11.경 위 연맹 사무국 산하 훈련부의 참사를, 1941. 5.경 위 연맹의 이사 겸 평의원을, 1942. 5.경 위 연맹의 이사, 평의원 겸 위 훈련부의 이사를, 1944. 6.경 위 연맹의 상무이사를 각 맡았고, 1943. 8. 25. 위 연맹 사무국에서 경성 거주 유력자들을 부민관에 초청하여 개최한 징병제실시기념사업협의회에 참석하여 징병제실시기념탑 및 연성도장 건립 등을 협의하였으며, 1943. 11. 8. 위 연맹 본부 및 경기도 연맹, 경성부 연맹의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CW'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낭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③ 망인이 위와 같이 CO연맹의 간부로 재직할 당시 망인 명의로 일제의 침략전쟁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을 역설하는 기사들이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CX」, 매일신보 CY자 3면(전시교육비상조치 방침에 따라 H학교가 CZ학교로 변경된 것에 대한 망

인의 담화문으로 망인의 사진이 함께 게재됨)

(전략) 지금 저에게는 아무런 감상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나아갈 길은 국가방침에 쫓아 전쟁에 싸워

이기기 위한 투철하고 힘찬 실전이 있을 뿐입니다. 전력증강 현재 우리에게는 오직 이 한 가지 뚜렷

한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진 학교를 갑자기 CZ학교라는 전혀 새로운 방향

으로 전환을 시키는 일은 적지 않은 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가 당면한

급선무이라면 이 위에 더 중대한 일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활양식이 시대에 따라 변천

하여 나아가는 것이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교육체제도 때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교육

자는 물론 학생과 학부형들도 일 억 국민이 각기 맡은 직장에서 싸워 이기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

을 엄청 더 깊이 각오하여 국난 돌파에 용왕매진할 뿐입니다. (후략)

「DA」, 매일신보 DB자 2면 (망인의 사진이 함께 게재됨)

DC을 수반으로 인재를 널리 구하야 국민이 기대하는 거국일치의 신내각 진용이 결정된 것은 실로

국가를 위하야 경행할 일이다. 신내각은 강력내각이라는 점에서 국민은 이에 전폭적인 신뢰를 바칠

수 있다. 덕망이 높고 정치적 수완이 큰 DC를 비롯하여 총리대신의 경력이 있는 DD의 해군 대신이며,

그 밖에 각 성 대신과 국무대신 등의 새 진용은 일억 국민을 이끌고 전쟁완수에 매진하기 위해 충분

한 강력적인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적을 격멸하여 성전을 완수할 태세는 이로써 완비된 것이므로

일 억은 이 기회에 비상한 결의로 총궐기해야 할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현 총독이 총리대신이 된 만큼 조선통치의 전도에 대해 배전의 광명이 있을 것을 확신

한다. 조선을 잘 알고 또 사랑하는 DC의 지도에 따라 금후 반도 이천 육백 만은 더 한층 지성봉공

해야만 할 것이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을 제27, 28, 55, 56,74호증의 1, 3, 4, 5, 을 제76, 77, 78, 79호증의 1, 을 제81, 83, 85호증, 을 제93호증의 1, 을 제96, 105호증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판단

(가)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망인이 1938년경부터 1944년경까지 지속적으로 W연맹, CO연맹에서 발기인, 이사(상무이사), 참사 및 평의원 등의 지위에 있었던 사실이 인정되고, 나아가 망인이 일제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인 W연맹, CO연맹 등의 간부로서 일제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는지에 관하여 살피건대, 앞서 인정한 사실, 앞서 든 증거 및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망인이 오랜 기간 동안 위 각 단체의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행위를 하였음이 충분히 추인된다고 할 것인바, 망인의 별지1 목록 순번 ③ 기재 행위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로 봄이 상당하다.

① W연맹 및 CO연맹은 황국정신,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경제정책 협력 등 전쟁지원을 목적으로 설립·개편된 조직으로서 망인은 위 조직이 창립될 당시 발기인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총 6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사, 참사, 평의원 등을 역임하였고 1944. 6.경에는 상무이사를 역임하였는데, 망인이 재선임 절차를 통하여 장기간 위 각 연맹의 간부로 재임할 수 있었던 것은 망인이 그와 같은 지위에서 실질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행위를 하였기 때문으로 보이고, 달리 망인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위 각 연맹에 이름만 등재하였다거나 위 각 연맹에서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이 없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

② 망인은 CO연맹의 이사 겸 평의원으로 재직하던 1943. 8. 25. 징병제실시기념 사업협의회에 참석하고, AI CW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낭독하는 등 1938년경부터 1944년까지 위 각 연맹의 주요 간부에 재직하면서 학병· 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는 행위를 하였는데, 이와 같은 행위는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7호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망인이 1943. 8. 25. 징병제 실시 기념사업협의회에 참석하고, 1943. 11. 8. CW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낭독한 행위가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1호에서 정한 친일 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이상 위 각 행위가 같은 조 제17호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에 중복하여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로 주장하나,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과 조사의 대상 · 방법에 관한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20조, 제21조의 규정에 비추어 보면,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각 호의 규정이 특별 · 보충 · 흡수 · 택일관계 등에 있어 어느 한 호에 해당하는 경우 다른 호의 규정이 배제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고, 각 호의 행위별로 조사방법이나 법적 효과를 달리 규정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므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학병 · 지원병 · 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경우에는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1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가 성립하는 외에 같은 조 제17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 역시 함께 성립한다고 할 것인바,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7호가 규정하는 "외곽단체의 간부로서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는 외관단체의 간부로서 소속 단체 명의로 하거나 간부의 직함을 표시한 협력행위 뿐만 아니라 외관단체의 간부의 지위를 가지는 동안 그 지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협력 행위까지도 포함한다고 할 것이므로 망인이 간부의 지위에 있는 기간 동안의 여러 행위들 가운데 외곽단체의 설립 목적 등과 관련이 있는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 협력행위는 같은 법 제17호에서 정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한데, 앞에서 살펴본 망인의 징병 · 학병 찬양 및 선전·선동 행위나 출정 군인 유가족을 위한 원호사업 협력행위 등에 비추어 보면, 망인이 W연맹 및 CO연맹의 간부로서 일본제 국주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구체적 행위를 하였다고 충분히 추인할 수 있다.

(나) 따라서 원고들의 이 부분 주장은 이유 없다.

2) 종합적 판단 의무 위반 주장에 대한 판단

가) 반민족행위규명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을 친일반 민족행위자로 규정지음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특정한 개별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조사·결정하여 왜곡된 역사와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이를 후세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행위는 외부적 압력과 내부의 양심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결과물이어서, 한 사람이 전 생애에 걸쳐 일관된 방향성을 견지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고 할 것이므로, 일시적으로 반민족행위규명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인정되는 사람도 인생 전반에 걸쳐 그와 같은 행위와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독립운동 지원행위 등을 하였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이와 같은 취지에서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0조는 조사대상자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에 참여 또는 지원한 사실이 있는 때에는 친일반민족행위와 함께 이를 조사하여 조사보고서 및 사료에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인지 여부와 그것이 주도적 내지 적극적인지 여부는 구체적으로 발표한 글이나 그가 소속된 단체의 목적이나 활동 등으로 표시된 의도 등 객관적인 행위 그 자체의 외부적 평가에 의하여야 할 것이므로, 조사대상자가 친일반민족행위와 더불어 독립운동 지원행위 등을 한 사실이 있더라도 그 행위의 종류와 내역에 비추어 그것이 조사대상자의 친일반민족행위의 주도성 · 적극성 등을 좌우할 정도의 것이 아닌 한 그와 같은 사정만으로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 위법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나) 살피건대, 원고들의 주장과 같이 망인이 3·1운동에 참여하고 G사나 H학교 등을 운영하면서 민족문화의 보존과 유지 및 발전에 기여한 성과가 적지 아니한 사정이 있다.

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정 및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1937년경부터 이루어진 망인의 별지1 목록 순번 ①, ③ 기재 친일 행적의 주도·적극성을 감쇄시킬 정도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다) 따라서 원고들의 이 부분 주장은 이유 없다.

3) 형평의 원칙 위반 주장에 대한 판단

가) 반민족행위규명법 제19조 제1항은 "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그 내용이 중대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의결로써 조사대상자를 선정하여 필요한 조사를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같은 법 제21조 제1항은 "위원회는 조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다음 각 호의 조치를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면서 각 호에서 '조사대상자 및 참고인에 대한 출석요구 및 진술청취', '조사대상자 · 참고인 등에 대한 관련 자료 또는 물건의 제출 및 열람 요구', '감정인의 지정 및 감정의 의뢰'를 규정하며, 같은 법 제25조는 "위원회는 위원회 활동을 조사보고서로 작성하여 매년 대통령 및 정기국회 기간 중 국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와 같은 규정의 문언이나 체제에 더하여 친일반민족행위의 조사 및 보고서의 작성은 역사고증 · 사료편찬 등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 사건 위원회 소속 위원들의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조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사건 처분은 행정청의 재량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고, 다만 이러한 재량을 행사함에 있어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오인하였거나, 비례 · 평등의 원칙에 위배하는 등의 사유가 있다면 재량권의 일탈·남용으로서 위법하다고 할 것이다.

나) 살피건대, 갑 제133호증의 1, 2, 갑 제135 내지 138호증의 각 기재에 의하면, 민족 문제연구소가 2009. 11.경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AA 등이 친일 행위자로 포함되어 있는 사실, 매일신보나 AF 등에는 AA 명의의 학병이나 징병을 선전·선동하는 내용의 말과 글들이 게재되어 있는 사실, AA이 W연맹 및 CO연맹의 참사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AW 일대에서 시국강연을 한 사실, DM가 공연 수익금 등으로 국방헌금을 내고 부대 방문 위문 공연 등을 한 사실은 인정되나, 위 각 증거 및 을 제150호증의 기재로부터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①) 친일인명사전은 민간 학술단체가 학문적 · 역사적 연구의 목적으로 총 4,389명을 반민족행위자나 부일 협력자 등으로 등재한 것으로서 그 편찬의 주체, 취지와 목적, 수록대상자 선정기준, 수록내용 등에서 반민족행위규명법에 따른 조사와 이의절차를 거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비록 AA 등이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 12.경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의 반민족행위자 또는 부일협력자로 등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행위가 곧바로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각 호의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는 점, ② AA은 CF학교장으로서 경성 소재 중·고등학교의 교장이 당연직으로 재직하게 된 W연맹 및 CO 연맹의 참사에만 재직하였을 뿐 나아가 이사나 상임이사로 재직하였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징병 · 학병의 찬양이나 선전·선동과 관련한 AA 명의의 글이나 기사는 약 5편 정도에 불과한 점, DM는 문화·예술계 인사로서 당시 사회적 영향력이 망인보다 크거나 같다고 보기 어럽고 매일신보 등에 DM 명의의 글이 게재된 바 없으며, DM에 관한 기사 내용도 대부분 공연이나 위문금 헌납에 관한 것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헌납 금액도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4호 및 같은 법 시행령 제2조에서 정하는 10만 원(당시 화폐 단위에 의한다)에 크게 미치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 위원회가 AA 등의 위 각 행위에 대해서는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각 호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음에 불구하고 망인의 별지1 목록 순번 ①, ③ 기재 각 행위에 대해서는 같은 법 제2조 제11호, 제17호에서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결정하여 이 사건 처분을 한 것이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어 재량권을 일탈·남용하였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다) 따라서 원고들의 이 부분 주장도 이유 없다.

4.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 중 별지1 목록 순번 ② 기재 행위를 반민족행위규명법 제2조 제13호의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부분은 이유 있어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기각할 것인바, 제1심판결은 이와 결론을 같이하여 정당하므로 원고들 및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재판장판사황병하

판사유헌종

판사김관용

주석

1) '□'는 판독이 어려운 글씨이다. 이하 같다.

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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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