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항소인
주식회사 하나은행 (소송대리인 변호사 채동헌 외 1인)
피고,피항소인
한국무역보험공사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유한) 바른 담당변호사 이현우 외 1인)
2020. 12. 17.
제1심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2019. 6. 27. 선고 2017가합537133 판결
주문
1. 제1심판결 중 아래에서 지급을 명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유로화 78,566,585유로 및 그중 유로화 39,782,765유로에 대하여는 2013. 2. 8.부터, 유로화 38,783,820유로에 대하여는 2013. 3. 8.부터, 각 2021. 1. 26.까지는 연 6%,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5%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 원고의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3. 소송 총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4. 제1항 중 금전지급 부분은 가집행할 수 있다.
제1심판결을 취소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유로화 78,566,585유로 및 그중 유로화 39,782,765유로에 대하여는 2012. 12. 7.부터, 유로화 38,783,820유로에 대하여는 2013. 1. 7.부터 각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까지는 연 6%,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5%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이유
1. 기초사실
가. 수출보증보험계약의 체결 및 보증신용장의 발행
1) 주식회사 신한(이하 ‘신한’이라 한다)은 2007. 9. 19. 리비아 인민사회주의 아랍공화국(이하 ‘리비아’라 한다)의 주택기반시설청(Housing and Infrastructure Board, 이하 ‘HIB’라 한다)과 사이에 리비아 트리폴리(Tripoli)시에 5,000세대의 주택 및 기반시설 등을 건설하는 공사계약(이하 ‘이 사건 제1공사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하였다.
신한은 원고(변경 전 상호 주식회사 한국외환은행)에 발주처인 HIB로부터 이 사건 제1공사계약에 따라 수령한 선수금(Advance Payment)의 환급 보증을 의뢰하였다. 원고의 보증을 위해 신한은 2008. 2. 21. 피고(변경 전 상호 한국수출보험공사)와 사이에 원고를 수익자로 하는 수출보증보험계약(이하 ‘이 사건 제1수출보증보험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하였고, 피고는 같은 날 원고에게 피보험자 원고, 보험금액 유로화 39,782,765유로, 보험기간 2008. 2. 21.부터 2011. 2. 21.까지로 한 수출보증보험증권(보증서)을 발행하였다.
이에 따라 원고는 2008. 2. 21. 수익자 ‘리비아 트리폴리 주택 및 공공시설 프로젝트 집행 관청(MESSRS HOUSING AND UTILITY PROJECTS EXECUTION AUTHORITY TRIPOLI-LIBYA)’, 보증금액 유로화 39,782,765유로, 보증기간 2011. 1. 31.까지, 신용장통일규칙(제6차 개정, UCP600) 적용의 선수금환급에 관한 보증서(Stand-By Letter of Credit, 보증신용장)를 HIB의 거래은행인 사하라뱅크(Sahara Bank)에 발행하였다.
사하라뱅크는 그 무렵 수익자인 HIB에 위 보증신용장이 개설되었음을 통지(advise) 및 확인(confirmation)하였다.
2) 또한 신한은 2007. 12. 15. 리비아 행정센터개발기구(Organization for Development of Administrative Centres, 이하 ‘ODAC’라 한다)와 사이에 리비아 자위야(Zawiyah) 지역에 5,000세대의 주택 등을 건설하는 공사계약(이하 ‘이 사건 제2공사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하였다.
신한은 원고에 발주처인 ODAC로부터 이 사건 제2공사계약에 따라 수령한 선수금의 환급 보증을 의뢰하였다. 원고의 보증을 위해 신한은 2008. 2. 25. 피고와 사이에 원고를 수익자로 하는 수출보증보험계약(이하 ‘이 사건 제2수출보증보험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하였고, 피고는 2008. 2. 27. 원고에게 피보험자 원고, 보험금액 유로화 38,783,820유로, 보험기간 2008. 2. 27.부터 2011. 2. 27.까지로 한 수출보증보험증권(보증서)을 발행하였다.
이에 따라 원고는 2008. 2. 27. 수익자 ‘리비아 행정센터개발기구(MESSRS ORGANIZATION FOR DEVELOPMENT OF ADMINISTRATIVE CENTRES)’, 보증금액 유로화 40,824,073유로, 보증기간 2011. 1. 31.까지, 신용장통일규칙(제6차 개정, UCP600) 적용의 선수금환급에 관한 보증서(Stand-By Letter of Credit, 보증신용장)를 ODAC의 거래은행인 사하라뱅크에 발행하였다.
사하라뱅크는 그 무렵 수익자인 ODAC에 위 보증신용장이 개설되었음을 통지(advise) 및 확인(confirmation)하였다.
3) 신한은 2008. 3. 11. 발주처인 HIB 및 ODAC(이하 합하여 ‘리비아 개발관청’이라 한다)의 보증문구 변경 요청에 따라 피고에 수출보증보험 내용변경 승인을 신청하였고, 피고는 2008. 3. 13. 이를 승인하였다. 당초 ‘신청인(신한)이 기본 계약에 따른 자신의 의무를 위반한 사실을 기재한 수익자(리비아 개발관청)의 서면에 의한 단순청구에 따라 사하라뱅크에 이 보증신용장의 지급이 이행됩니다’라고 되어 있던 보증신용장의 문구 중에서 ‘신청인이 기본 계약에 따른 자신의 의무를 위반한 사실을 기재한’이라는 부분이 삭제되는 등의 내용이다. 이에 따라 이 부분 문구는 ‘수익자의 서면에 의한 단순청구에 따라 사하라뱅크에 이 보증신용장의 지급이 이행됩니다(This Stand-by L/C is payable at Sahara Bank Counter’s against beneficiary’s first simple demand in writing)’로 수정되었다.
나. 공사 중단 및 보증보험 기간연장
1) 신한이 이 사건 제1공사계약 및 제2공사계약에 따른 공사(이하 합하여 ‘이 사건 각 공사’라 한다)를 진행하던 중 2011. 2.경 리비아 내전 상황이 악화되면서 각 공사현장에서 철수하였고, 이 사건 각 공사가 중단되었다.
2) 한편 이 사건 제1수출보증보험계약의 만기는 2013. 2. 21.로, 이 사건 제2수출보증보험계약의 만기는 2013. 1. 27.로 각 연장되었고, 원고 발행의 각 보증신용장의 만기도 2013. 1. 31.(이 사건 제1공사계약 관련) 및 2012. 12. 31.(이 사건 제2공사계약 관련)로 각 연장되었다.
다. 사하라뱅크의 지급청구 등
1) 사하라뱅크는 2012. 11. 20. 원고에게 이 사건 제1공사계약의 선수금 환급 보증에 관하여 스위프트(SWIFT) 전신문 통지로 보증신용장의 유효기간을 2013. 12. 31.로 연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급을 하라는 연장지급선택부(extend or pay) 청구를 하였다. 이에 원고는 2012. 12. 7. 피고에게 위와 같은 사하라뱅크의 청구 사실을 알리고, 만일 지급보증 기간 내에 피고가 보증한 보험증권의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를 대지급 발생 전 사전청구로 간주하라는 내용의 통지를 보냈다.
2) 사하라뱅크는 2012. 12. 20. 원고에게 이 사건 제2공사계약의 선수금 환급 보증에 관하여 동일한 내용으로 연장지급선택부 청구를 하였다. 이에 원고는 2013. 1. 7. 피고에게 마찬가지로 위 청구 사실을 알리고 보험증권의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를 사전청구로 간주하라는 내용의 통지를 보냈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1 내지 8, 21호증, 을 제1, 2, 3, 5, 6, 24, 25호증의 각 기재(가지번호 있는 것은 이를 포함한다), 변론 전체의 취지
2. 당사자들의 주장
가. 원고
1) 원고가 사하라뱅크에 발행한 각 보증신용장에 따른 수출보증(이하 ‘이 사건 각 수출보증’이라 한다)은 국제거래에서 널리 사용되는 추상성과 무인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독립적 은행보증’으로서, 사하라뱅크의 연장지급선택부(extend or pay) 청구는 적법한 지급 청구에 해당한다. 또한, 피고가 신한과의 이 사건 제1수출보증보험계약 및 제2수출보증보험계약(이하 합쳐서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이라 한다)에 기하여 원고에 발행한 수출보증보험증권에 따른 복보증도 마찬가지로 청구가 있으면 무조건적인 지급의무가 발생하는 독립적 은행보증이다. 피고가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의 만기를 연장하지 않음으로써 원고의 이 사건 각 수출보증도 연장되지 않았고, 원고로서는 각 보증신용장에 따른 보증금을 사하라뱅크에 지급해야 하는 보험사고가 발생하였다.
2) 신한의 이 사건 각 공사 관련 채무불이행 여부 등은, 독립적 은행보증의 원칙에 따르는 원고의 이 사건 각 수출보증이나 피고의 보험금 지급 요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리비아가 내전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하라뱅크의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없다. 내전 등의 사정을 알고 있거나 예상 가능한 상황에서 독립적 은행보증에 나아간 경우에는 이를 이유로 면책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이 미국 등 외국 판결에서도 다수 판시된 바 있고,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보고 있다.
3) 나아가 피고는 2015. 6. 2. 원고에게 보낸 공문에서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에 따른 원고의 피고에 대한 보험금청구권이 유효함을 확인함으로써 보험금 채무를 승인한 바 있다.
4) 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에서 정한 보험금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나. 피고
1) 연장지급선택부 청구는 적법한 지급청구가 아니다. 원고가 발행한 보증신용장의 준거법인 UCP600에서 요구하는 ‘일치하는 제시’가 없고, 전신문 통지가 ‘서면(in writing)’ 청구라고 볼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설령 연장지급선택부 청구가 허용된다고 할지라도, 사하라뱅크는 이후 2019년까지도 여전히 ‘연장 또는 지급(extend or pay)’ 문구를 적은 전신문을 반복적으로 보냈는데, 실질적으로는 보증기간 연장 요청에 불과하고 지급 청구가 아니다. 실제 원고의 보증신용장의 만기가 연장되지 않았다는 보험사고의 발생이 확인되지 않는다.
2)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의 약관 제3조에서 정한 손실이 원고에게 발생하였거나 손실의 발생이 확실시된다고 할 수도 없다.
3) 리비아 개발관청의 사하라뱅크에 대한 선급금 반환채권은 존재하지 않고, 사하라뱅크의 지급 청구는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하므로, 독립적 은행보증의 예외가 인정되어야 한다. 신한은 리비아 개발관청과 공사 재개에 합의한 바 있었으나 기성금도 못 받고 아직 공사 재개를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원의 가처분 사건에서 권리남용이 인정된 바 있고, 최근 싱가포르 법원에서도 리비아 내전을 이유로 권리남용을 인정한 사례가 있다
3. 청구원인에 관하여
가. 은행이 보증을 하면서 보증금 지급조건과 일치하는 청구서 및 보증서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서류가 제시되는 경우에는 그 보증이 기초하고 있는 계약이나 이행제공의 조건과 상관없이 그에 의하여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즉시 수익자가 청구하는 보증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정하였다면, 이는 주채무에 대한 관계에서 부종성을 지니는 통상의 보증이 아니라, 주채무자인 보증의뢰인과 채권자인 수익자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독립되어 원인관계에 기한 사유로는 수익자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은행의 무조건적인 지급의무가 발생하게 되는 이른바 독립적 은행보증(first demand bank guarantee)이다. 이러한 독립적 은행보증의 보증인으로서는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보증의뢰인이 수익자에 대한 관계에서 채무불이행책임을 부담하게 되는지를 불문하고 보증서에 기재된 금액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이 점에서 독립적 은행보증에서는 수익자와 보증의뢰인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단절되는 추상성 및 무인성이 있다( 대법원 2014. 8. 26. 선고 2013다53700 판결 등 참조).
나. 이러한 법리에 비추어 이 사건에 관하여 본다.
1)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의 당사자인 신한은 리비아 개발관청과 사이에 이 사건 각 공사계약을 체결하고 선수금을 수령하였고, 위 선수금 환급 보증에 관하여 원고가 각 보증신용장을 사하라은행에게 발행하였으며, 피고는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에 기하여 원고에게 수출보증보험증권을 발행하였다.
원고의 이 사건 각 수출보증은 주채무에 대한 관계에서 부종성을 지니는 통상의 보증이 아니라, 보증의뢰인 신한과 수익자인 리비아 개발관청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독립되어 그 원인관계에 기한 사유로는 수익자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은행의 무조건적인 지급의무가 발생하게 되는 이른바 독립적 은행보증에 해당한다. 그리고 위 각 보증신용장에 관해 적법한 청구가 있으면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에 따른 보험사고의 발생이 인정된다. 아울러 피고는 취소불가능하고 무조건적인 구상보증(irrevocable and unconditional counter guarantee, 갑 제1, 3호증의 각 제3면)을 한 보증인으로서 수익자인 원고의 적법한 청구가 있기만 하면 그 지급의무를 부담한다.
2) 기초사실 및 앞서 든 증거와 갑 제20, 22, 23, 24호증, 을 제19 내지 22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아래와 같은 사실과 사정들을 종합하면, 원고의 각 보증신용장에 관하여 적법한 청구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가) 독립적 은행보증은 원인거래 당사자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법률적 위험으로부터 금융거래를 단절하여 해당 금융거래의 결제에 관여하는 금융기관을 보호한다. 제도의 특성상 단일한 관련 법규가 존재하지 않고, 신용장통일규칙(현재 제6차 개정, UCP600), 보증신용장통일규칙(ISP98), 청구보증통일규칙(URDG) 등 여러 국제규칙이 개별 당사자의 합의에 따라 적용되는데, 위 국제규칙들은 강제성 있는 규범은 아니다. 보증신용장(Standby Letters of Credit)은 기존 화환신용장의 기능을 활용하여 물품거래가 아닌 다른 국제거래의 보증에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적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신용장통일규칙(UCP600)의 규정들이 적용될 수 있다. 신용장통일규칙(UCP600)은 신용장 거래의 독립 추상성에 관한 규정(제4조, 제5조)을 두고 있는데, 그 밖에 화물의 특정과 운송 등 화환신용장 거래를 전제로 하는 규정들이 다수 있다.
나) 나아가 앞서 본 바와 같이, 각 보증신용장 발행 직후인 2008. 3. 13. 피고의 승인을 거쳐 신용장 문구 중에서 ‘신청인(신한)이 기본 계약에 따른 자신의 의무를 위반한 사실을 기재한’이라는 이른바 불이행 진술 관련 부분이 삭제되고, ‘수익자의 서면에 의한 단순청구에 따라 사하라뱅크에 이 보증신용장의 지급이 이행됩니다(This Stand-by L/C is payable at Sahara Bank Counter’s against beneficiary’s first simple demand in writing)’로 수정되었다. 이로써 단순청구 이외에 원인관계를 확인할 서류는 물론 ‘신청인(신한)의 채무불이행’에 관한 수익자의 불이행 진술도 필요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따라서 신한이 이 사건 각 공사계약 관련하여 선급금을 반환해야 할 채무불이행을 실제 저질렀는지 확인하는 것은 원고의 보증신용장 대금 지급의무의 발생과 원칙적으로 무관하다.
한편 신용장통일규칙(UCP600) 제7조와 제15조 중에 결제 또는 매입 관련 조항이나 서류의 송부 관련 조항 등은 그 결제나 매입의 대상이 되는 선적서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보증신용장에 대해서는 성질상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위 규칙 제7조 제b항의 ‘신용장은 취소할 수 없다’는 취소 불가능성의 원칙은 보증신용장에도 적용된다고 할 것이나, 같은 조 제c항 및 제15조의 결제 또는 매입 및 서류 송부에 관한 부분을 들어 지급청구서 이외에 다른 서류의 제시가 요구된다고 할 수 없고, 보증신용장에 명시된 서면에 의한 단순청구로써 제7조의 ‘일치하는 제시(complying presentation)’ 요건을 충족한다. 이와 다른 전제에 선 피고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 또한 연장지급선택부(extend or pay) 청구는 보증신용장 또는 은행보증에서 만기 전에 수익자가 은행에 대하여 ‘해당 보증서의 보증기간을 연장하여 주든지, 아니면 본 청구를 만기에 있어 적법한 청구로 보고 해당 보증금을 지급하라’는 취지의 조건부 의사표시로서, 오늘날 전 세계 독립적 은행보증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거래 관행에 따른 청구의 형태이다. 대부분의 계약 당사자들은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아직 이행이 완료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이행을 요청하거나 추가적인 협상에 나서고자 하는 경우가 많은 점을 반영한 실무이다. 보증은행은 연장지급선택부 청구를 받으면 이를 주채무자에게 알리고, 이후 기간 내에 만기연장이 합의되면 그에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보증금의 지급의무가 발생한다. 보증신용장통일규칙(ISP98은 제3.09조 등에서 연장지급선택부 청구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등과 달리 신용장통일규칙에는 이에 관한 별도 언급이 없으나, 반대로 이를 금지하는 규정도 존재하지 않고, 당사자 사이에 이러한 방식의 청구를 불허하는 약정이 있었다고 볼 만한 자료도 없다.
라) 한편 원고의 각 보증신용장에는 ‘이 보증신용장은 수익자의 단순청구에 따라 연장 가능합니다(This Standby L/C is also renewable/extendable upon beneficiary’s first simple demand)’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대금을 청구할 수도 있고 연장을 청구할 수도 있는 수익자가 연장지급선택부 청구의 방식으로 청구하는 것을 특히 불허할 만한 다른 근거를 신용장 문면에서도 찾기 어렵다.
마) 사하라뱅크가 이후에도 원고에게 반복하여 연장지급선택부 청구를 한 사실은 인정되나, 이미 신용장의 만기가 연장되지 않고 도과한 이상 그에 따른 효과는 발생하였다. 연장지급선택부 청구라는 그 명시적 문언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청구의 효과의사를 배제하고 오로지 연장 요청의 의미만 부여하여 해석할 만한 근거도 없다. 따라서 이에 관한 피고의 위 주장도 이유 없다.
바)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의 약관 제3조에서 ‘피고는 피보험자인 원고가 수출보증 상대방으로부터 그 보증조건에 따른 보증채무의 이행을 청구 받아 보증채무를 이미 이행함으로써 입게 된 손실 또는 이행이 확실시됨으로써 입을 것이 예상되는 손실을 보상한다’고 정한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원고는 자신이 발행한 각 보증신용장에 관하여 적법한 이행 청구를 받았고, 이로써 원고의 신용장 대금 지급의무가 확정적으로 발생하였으므로, 그 ‘이행이 확실시됨으로써 입을 것이 예상되는 손실’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신한과 원고 사이의 지급금지가처분 사건에서 담보조건의 인용결정( 서울중앙지방법원 2012카합553, 2013카합61, 2013카합62 결정 )이 있었다고 하여 원고의 사하라뱅크에 대한 보증금 지급의무가 소멸하지 않는다.
사) SWIFT 주1) 에 의한 전신문 통지는 국제적으로 은행 간 거래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면 통지 방식으로서, 원고가 발행한 보증신용장에도 ‘SWIFT는 작동 수단으로 취급되어야 하고 어떠한 우편 확인도 없을 것입니다(This TLX/Swift is to be treated as an operative instrument and no mail confirmation will follow)’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하라뱅크의 전신문 통지가 실물 편지 우편 등이 아니라고 하여 이 사건 각 보증신용장에서 정한 서면에 의한(in writing) 청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피고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3) 그러므로 원고는 사하라뱅크에 신용장 대금을 지급할 의무가 발생하였고, 신한은 원고에게 구상의무를 부담하며, 피고는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에 따라 원고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적법한 청구가 있다고 본 이상, 2015. 6. 2.자 채무 승인에 관한 원고의 주장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다. 따라서 피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에게 보험금 합계 유로화 78,566,585유로 및 그중 이 사건 제1수출보증보험계약에 따른 보험금 유로화 39,782,765유로에 대하여는 보험금 청구일로부터 상당한 기간인 2개월이 경과한 2013. 2. 8.부터, 이 사건 제2수출보증보험계약에 따른 보험금 유로화 38,783,820유로에 대하여는 보험금 청구일로부터 상당한 기간인 2개월이 경과한 2013. 3. 8.부터, 각 피고가 이행의무의 존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이 법원 판결 선고일인 2021. 1. 26.까지는 상법에 정한 연 6%,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 정한 연 15%의 각 비율로 계산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원고는 각 보험금 청구일로부터 곧바로 상법에 정한 연 6%의 비율에 따른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나, 위 각 청구일로부터 상당한 기간인 2개월이 경과하기 전에 피고의 보험금 지급의무의 이행기가 도래하였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위 부분 지연손해금 청구는 이유 없다).
4. 권리남용 항변에 관하여
가. 독립적 은행보증의 경우에도 신의성실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 원칙의 적용까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므로, 수익자가 실제로는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보증인에게 청구를 하는 것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할 때에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고, 이와 같은 경우에는 보증인으로서도 수익자의 청구에 따른 보증금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으나, 원인관계와 단절된 추상성 및 무인성이라는 독립적 은행보증의 본질적 특성을 고려하면, 수익자가 보증금을 청구할 당시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여 수익자의 형식적인 법적 지위의 남용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닌 한 권리남용을 쉽게 인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위 대법원 2013다53700 판결 , 대법원 2015. 7. 9. 선고 2014다6442 판결 등 참조).
나. 위 법리에 따르면, 이 사건의 경우 원고가 사하라뱅크로부터 청구를 받을 당시 수익자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여 형식적인 법적 지위의 남용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인정될 수 있는지가 권리남용 여부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런데 앞서 든 증거와 을 제8, 9, 11, 12, 18, 23호증의 각 기재, 이 법원 증인 소외인의 증언, 이 법원의 신한에 대한 사실조회결과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실 및 사정에 비추어 볼 때, 피고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 위와 같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보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1) 앞서 본 바와 같이 2011. 2.경 리비아 내전이 악화되면서 신한이 이 사건 각 공사계약에 따른 공사 현장에서 철수하고 공사가 중단된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당시 철수 결정은 교민의 안전을 우려한 외교당국의 철수 지시와 여행 제한 조치 등 행정조치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 점, 이후 지체보상금 면제 및 공사 재개 여부를 두고 현지에서 협상이 이루어졌으나 기성고 대금 지급 및 공사재개 조건 등을 두고 다툼이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 점, 리비아의 내전과 소요사태 등 상황은 이미 그 전에도 있었던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전적으로 리비아 내전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으로 공사가 오래도록 중단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2) 설령 신한에 공사 중단에 관한 아무런 귀책사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사하라뱅크가 그러한 사정을 모두 인지하고서도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원고에게 연장지급선택부 청구를 하였다고 볼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고, 달리 사하라뱅크의 악의를 인정할 자료가 없다.
3) 결국 원고로서는 사하라뱅크로부터 연장지급선택부 청구를 받을 당시에 수익자인 리비라 개발관청에는 아무런 실체적 권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다거나 독립적 은행보증에 따른 형식적인 법적 지위의 남용을 별다른 의심 없이 인정할 수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4) 위 2011. 2.경 공사 중단 후에 사하라뱅크의 연장지급선택부 청구에 따라 이 사건 각 수출보증보험계약의 만기와 원고의 보증신용장의 만기가 각 연장된 바 있다(특히 을 제25호증의 작성일은 2012. 1. 3.로서 위 공사현장 철수 이후임이 분명하다). 당시 피고는 수출보증보험계약의 계약당사자인 신한을 통해서 또는 언론보도 등을 통해서 리비아의 내전 상황과 공사 중단 등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미 내전 등 불가항력의 사유가 발생하였거나 충분히 예상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적 은행보증에 나아간 경우에는, 보증은행이 나중에 그러한 사유를 들어 권리남용의 항변을 하거나 자신의 면책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상 허용되기 어렵다 할 것이다(신한과 원고 사이의 지급금지가처분 사건에서 담보조건부 인용결정이 있었으나 종국적으로 권리남용이 인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피고가 들고 있는 싱가포르 판결은 수익자의 채무불이행 진술을 청구 요건으로 한 사안으로서 그 진술이 허위임이 증명된 경우라는 점 등에서 참고 사례로 보기 어렵다).
다. 따라서 피고의 위 항변은 이유 없다.
5. 결론
그렇다면 원고의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기각하여야 한다. 제1심판결은 이와 결론을 달리하여 부당하므로 원고의 항소를 일부 받아들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주1)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unication의 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