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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_flag_2서울중앙지방법원 2010.2.3.선고 2007가합31728 판결

손해배상(기)

사건

2007가합31728 손해배상(기)

원고

1. A

2. B

3. C.

4. D

5. E.

피고

대한민국

변론종결

2010. 1. 13.

판결선고

2010. 2. 3.

주문

1. 피고는 원고 A, B에게 각 금 400,000,000원, 원고 C, D, E에게 각 금 4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한 2007. 4. 24.부터 2010. 2. 3.까지는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2. 원고들의 각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3. 소송비용 중 1/5은 원고들이, 나머지는 피고가 각 부담한다.

4.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 A, B에게 각 금 500,000,000원, 원고 C, D, E에게 각 금 5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이유

1. 기초사실

가. F의 군입대 및 복무관계

1) F(이하 '망인'이라고 한다)은 1983. 9. 28. 육군 제102보충대대로 입대하여 1983. 11, 13. 육군 G사단 H연대 1대대 3중대에 배속되었다.

2) 망인은 처음에는 화기 소대에 배치되어 탄약수로 근무하였으나 1984. 2. 4.부터 중대본부에서 중대장 I의 전령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나, 망인의 사망

망인은 1984. 4. 2. 11:00경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폐유류고 뒤에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이하 '이 사건 사고'라고 한다).

다. 군수사기관의 수사결과

1) 육군 제2군단 헌병대는 1984. 4. 24., G사단 헌병대는 1984. 4. 30., 1군사령부 헌병대는 1984. 5. 1. 각 망인이 자살하였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 후로도 육군 범죄수 사단이 1990. 2. 경, 육군본부 법무감실이 1995. 3.경 이 사건 사고를 다시 조사하였으나 모두 망인이 자살하였다고 판단하였다.

2) 군수사기관이 이 사건 사고에 관하여 조사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자살동기 망인은 평소 중대장 1의 가혹행위와 폭력, 괴팍한 성격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여 몇 차례 보직을 변경하여 소대로 배치해 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당하고 군 복무에 대한 심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망인은 1984. 4. 2. 08:00경 으로부터 전투복 상의가 잘못 다려졌다는 이유로 심한 꾸중을 들었고, 09:30경에는 철모가 잘못 관리되었다는 이유로 고참병이 폭행을 당하자 심한 강박감으로 복무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을 결심하였다.

나) 자살 전의 행동

망인은 1984. 4. 2. 09:50경 이 보급계 J을 대동하여 철책근무 순찰을 떠난 후 나무반 상황실 옆 총기 거치대에서 자신의 M16 소총과 실탄 30발(2탄창)을 꺼내들고 나와, 중대본부 남쪽 약 50m 떨어진 폐유류고로 갔다.

다) 자살방법 망인은 M16 소총에 실탄 1발을 장전한 후 조정간을 반자동에 놓고 오른손으로 소총의 윗덮개 부분을 잡고 총구를 오른쪽 가슴에 밀착시키고 구부린 자세에서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잡아당겨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이에 망인은 다시 왼손으로 총구를 잡아 왼쪽 가슴에 밀착시키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다시 한 발을 발사하였으나 역시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망인은 마지막으로 45° 각도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에서 총구를 오른쪽 눈썹 위에 밀착시키고 오른손 엄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고, 결국 두개골 파열에 의해 사망하였다.

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및 결과 발표

1)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라고 한다)는 2000. 12. 28. 망인의 아버지인 원고 A으로부터 이 사건 사고의 진상규명에 관한 진정(진정 제32호)을 접수하고 조사를 개시하여, 2002. 8. 20. 망인이 타살된 것이라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2002. 9. 10. 다시 이 사건 사고가 타살이라는 최종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2) 다만, 의문사위는 망인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한 것은 인정되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원고 A의 진정은 기각하였고, 아울러 군의문사 사건에 대한 수사를 전담할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기구를 설치할 것을 국가에 권고하였다.

3) 의문사위가 이 사건 사고에 관하여 조사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중대본부 내무반에서의 술자리 중대장 은 1984. 4. 1. 21:00부터 4. 2. 02:00 무렵까지 중대본부 내무반 내에 위치한 중대장실에서 3소대장인 중위 K의 진급을 축하하기 위하여 K과 19소초장 중사 L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의 전령이었던 망인은 안주를 준비하는 등 수발을 했고, 술자리 도중 안주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중대장실에서 으로부터 질책과 함께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나) 총기오발사고의 발생L은 술자리에서 I과 격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화가 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중대장실 문을 박차고 내무반으로 뛰쳐나와 대기 중이던 사병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발길질을 해 대며 화풀이를 하다가 급기야 탄창이 삽탄되어 있었던 자신의 M16 소총을 들었다. L은 중대장실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망인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는데 망인이 팔을 들어 이를 막았고, 그러자 L은 총을 쏘는 자세를 취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탄환 1발이 발사되었고 망인이 여기에 오른쪽 가슴을 맞아 쓰러졌다.

다) 사건 은폐를 위한 추가 사격 망인이 첫발을 맞은 후 은 대대 상황실로 망인이 자살했다고 허위로 보고하는 등 사건을 은폐했으며, 보고를 받은 제1대대 대대장 M은 보안대 담당 하사 N과 함께 아침에 중대본부로 왔고, M이 돌아간 뒤 은 N에게 사건 수습을 도와줄 것을 요구하여 N이 이에 승낙하였다. 100 J을 대동하여 철책 순찰을 나간 사이 중대본부 일부 요원들은 내무반에 흘려져 있던 망인의 피를 닦는 등 물청소를 하였고, 그때 10:00~11:00경 폐유류고 뒤에서 누군가 망인에게 차례로 왼쪽 가슴 및 오른쪽 머리에 M16 소총으로 2발을 더 쏘아 망인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마.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조사국방부는 의문사위의 중간조사 결과를 접하고 2002. 8. 26. 육군 중장 0을 단장으로 하여 특별조사단(이하 '특조단'이라고 한다)을 구성하고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하였고, 2002. 10. 29.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총기오발 사고는 없었다고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고, 2002. 11. 28. 다시 망인이 자살하였다는 내용으로 최종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바. 의문사위의 재조사 및 결과 발표

1) 한편, 특조단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이 사건의 진상을 놓고 의문사위와 특조 단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하였고, 감사원이 이에 대한 확인 조사를 벌이는 등이 사건의 진상을 놓고 다툼이 계속되었다.

2) 이에 의문사위는 원고 A이 2003. 9. 25. 1기 의문사위 결정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자 2003. 10, 14.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조사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조사재개 제35호), 새롭게 조사팀을 구성하여 사건을 재조사하였다.

3) 의문사위는 2004. 6. 28. 다시 망인이 제1기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와 같은 경위로 타살된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다만 망인의 사망이 민주화운동과 관련되었는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하였다.

사. 원고 A, B은 망인의 부모, 원고 C, D, E은 망인의 형제자매들이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1, 2호증의 1 내지 3, 갑 제4 내지 8호증, 갑 제9호증의 5, 8, 278, 갑 제10호증의 11, 12, 14, 159, 177, 178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당사자들의 주장

가. 원고들

망인은 의문사위 조사 결과와 같은 경위로 망인이 근무하던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하여 타살되었으므로 피고는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 불법행위 책임을 부담한다.

또 중대장, 대대장 등은 망인의 사망 경위를 상부에 허위로 보고하는 등 소속 부대원들은 사건을 은폐하였고, 헌병대 등 군수사기관과 특조단도 이 사건 사고에 관한 수사 과정에서 고의로 그 진상을 은폐, 조작하여 자살 사건으로 처리하였는바, 이러한 사인 은폐 및 조작은 불법행위를 구성하므로 피고는 이로 인하여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나. 피고망인은 군수사기관 및 특조단 조사 결과와 같은 경위로 자살한 것이며, 중대장 등 부대원들과 군수사기관, 특조단은 이 사건 사고의 진상을 은폐, 조작한 바가 없고 성실히 수사하여 망인이 자살하였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므로 피고에게는 손해배상책임이 없다.

3. 망인 소속 부대원이 망인을 살해하였다는 점에 관한 판단

가. 이 사건에서 제출된 증거 상황에 대한 검토이 사건 사고는 약 26년 전인 1984년에 발생한 후 지금까지 10여 회에 걸쳐 군수사기관, 의문사위 및 특조단 등에 의하여 조사가 이루어져 왔고, 지금까지의 조사과정에서 당시 이 사건 사고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자들의 진술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증거가 수집되었으나 이들 증거는 여러 가지 쟁점에서 일치하지 않고 있다. 망인이 어떤 경위로 사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를 조사한 각 국가기관이 내린 결론이 서로 다르다. 이 사건에서도 망인이 자살하였다고 주장하는 쪽도, 타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쪽도 위와 같은 조사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를 가지고 있고, 특히 당시 이 사건 사고 과정을 목격하였을 7명의 중대본부 요원들의 진술조차 상호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중대본부 요원들 중 P는 망인이 중대본부 내무반 내부에서의 총기오발사고 및 그 후 사건 은폐를 위한 추가 사격에 의하여 타살되었다고 진술하고 있고,1) 4중대 관측하사로서 이 사건 사고 당시 3중대로 파견근무를 나와 있었던 Q는 의문사위에서는 P와 같이 망인이 타살된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나 특조단 조사시에는 위 진술을 번복하였으 며,2) R, J, S, T, U 및 V은 의문사위의 조사를 받을 때부터 일관하여 총기오발 사고는 없었고 망인은 자살한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며, 이들 중 R, T, Q는 이 법정에서도 망인이 자살하였다는 취지로 증언하기도 하였다.

중대본부 요원들은 이 사건 사고를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한 자들로서 이들의 진술이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기억은 이미 수많은 조사 과정을 거치면서 이 사건 사고 당시 자신들이 실제로 경험하였던 사실과 조사과정에서 유입된 정보들이 혼합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만약 망인이 살해되었다고 할 경우에는 이들은 그 은폐 조작에 직, 간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고, 또 P의 경우 보상금을 목적으로 의문사위에서 허위로 진술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그 진술만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사실인정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미 이 사건 사고 발생으로부터 25년 이상이 경과한 현재의 시점에서 이와 같이 하나의 사실을 경험하고도 모순을 보이고 있는 각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것은 이들 진술보다 우월한 결정적인 증거가 새로 나타나지 않는 한 매우 어려운 작업이고, 또 앞서 본 바와 같이 중대요원의 일부가 사건의 은폐·조작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상 어느 한쪽의 주장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는 자의 수가 단지 많다는 이유로 선뜻 그들의 진술을 기초로 이 사건의 진상을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이 사건에서는 중대본부 요원들의 진술을 제외한 나머지 증거들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구성해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사건 사고에 관한 증거로서 조작 가능성이 낮고 가장 객관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망인의 사체에 난 상처와 이에 대한 법의학적인 검토를 통하여 망인의 사인에 관한 1차적인 사실을 확인해 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 사건에서는 중대본부 요원을 제외한 중대, 대대, 연대 소속의 지휘관 및 병사들의 진술 다수도 증거로 확보되어 있는데, 이들 증거는 연루 내지 조작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에서 비록 구체적이고 세세한 내용에서는 모순되는 점이 있을지라도 이들 사이에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 존재한다면 위 관계자들의 진술은 그 신빙성을 쉽게 배척할 수 없다. 따라서 위 관계자들의 진술을 종합하여 이 사건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①① 총성의 청취, ② 지휘관들의 사건 인지 시각, ③ 사고 발생 이후의 은폐 및 조작 정황 등 이 사건 사고에 관한 전후 상황을 판단해 보도록 한다.

나. 망인의 사체 상태와 이에 대한 법의학적 검토

1) 인정사실

가) 망인의 사체에 난 상처 등

(1) 오른쪽 흉부 총상 사입구는 오른쪽 젖꼭지에서 4시 방향으로 약 5cm 지점에 약 0.7㎝의 크기로 형성되어 있고 사입구 주위에 5.5×3m의 피하출혈이 있고 매연4)과 소운5)이 존재하며, 사체 발견 당시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사출구는 오른쪽 흉부 뒤쪽의 제8번과 9번 갈비뼈 사이에서 근육간 출혈이 동반된 3.5×1.5㎝의 크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총알이 흉부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제5번과 6번 갈비뼈 연골 부분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갈비뼈 사이 근육 내출혈이 발생하였고, 연이어 오른쪽 폐장 하엽과 횡격막의 파열, 간장의 앞쪽 중앙 상부 10×8m의 불규칙한 파열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입구와 사출구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오른쪽 가슴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방향으로 총알이 관통된 형상을 보이고 있다.

(2) 왼쪽 흉부 총상 사입구는 왼쪽 젖꼭지에서 9~10시 방향으로 약 4cm 지점에 약 0.7㎝의 크기로 형성되어 있고 사입구 주위에 6.5×4.5cm 크기의 피하출혈 및 매연이 존재하며 사체가 발견될 당시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사출구는 왼쪽 흉부 뒤쪽의 제6번 갈비뼈 부근에서 근육간 출혈 및 표피박탈을 동반하여 3×3.5㎝의 크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총알이 흉부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왼쪽 제4번과 5번 갈비뼈 연골 부분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갈비뼈 사이 근육 내출혈이 발생하였고 왼쪽 폐장 하단이 파열되었다. 사입구와 사출구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왼쪽 가슴에서 왼쪽 겨드랑이 방향으로 총알이 관통된 형상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 흉부 총상과 왼쪽 흙부 총상으로 인한 각 근육내 출혈은 비교적 균등하였다.

(3) 두부 총상 사입구는 오른쪽 전두부에 십자형으로 8.5×5cm 크기로 형성되어 있고 사입구 주위의 피부가 밖으로 찢어져 나와 있으며 사입구 주위 조직에 매연이 묻어 있고, 사입구 표피 안의 두개골에 화약흔이 존재한다. 왼쪽 전두부 및 두정부 쪽으로 광범위한 두개골 복잡골절 및 파열이 있고 대뇌조직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으며 사출구는 14×8cm 크기로 사출구 쪽 두부가 거의 개방되어 있다.

(4) 그 외의 상처

망인의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 부분에 피부가 2.8X1.5cm 크기로 파열되어 있는데, 상처 주위에 다량의 매연이 묻어 있다. 또 왼쪽 손목 안쪽에 발적흔(發赤痕)이 있는데 이 상처는 엄지와 검지 사이를 중심으로 시작하여 관절을 향하면서 일직선 형태로 나 있으며 윗부분으로 갈수록 점차 색깔이 흐려지고 있으며, 왼쪽 손목 바깥쪽으로는 외상이 없다.

(5) 기타 사항

망인의 장기에 200cc 가량의 출혈이 존재하고 위 내에 700cc 가량의 황백색 액체 내용물이 있다. 사체 발견 당시 망인이 입고 있던 야전 상의에는 왼쪽 흉부 총상 사입구 주위에 M16 소총의 소염기로부터 뿜어나온 것으로 보이는 방사(放射)형의 화약흔이 묻어 있고, 등 부위에 있는 2개의 사출구 주위에는 피가 배어 있으며, 야전 상의 허리 부분에 띠 모양으로 피가 배어 있다.

나) 망인의 사체에 대한 법의학적 소견

(1) 의문사위에서는 망인의 사체 부검의인 W를 비롯하여 해외 법의학자인 X, Y로부터 망인의 사체 부검사진 및 자료를 제공하고 법의학적 소견을 들었고, 특조단은 2002. 11. 25. 이 사건 사고에 관한 법의학자 대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국내 법의학자인 Z, AA, AB, AC, AD, AE가 토론자로 참가하였다.

(2) 이 사건 사고에 관해서 주로 논의가 된 법의학적 쟁점은 ① 오른쪽 흉부에 형성된 사입구는 검붉은색을, 왼쪽 흉부에 형성된 사입구는 선홍색을 띠고 있는데, 이러한 색깔 차이가 총상이 발생한 시간의 차이에 의한 것인지 또는 발사 거리의 차이에 의한 것인지 여부, ② 왼쪽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난 파열상이 총구를 손으로 지지한 상태에서 총이 발사되어 생긴 찰과총창인지 또는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생긴 방어흔인지 여부, ③ 왼쪽 손목 안쪽에 나 있는 발적혼이 개머리판 등으로 맞아서 생긴 피하출혈인지 또는 총이 발사될 때 입은 열상인지 여부, ④ 3발의 총상이 발생한 순서 및 그 시간적 간격, ⑤ 3발을 위 상처 부위에 각 발사하여 자살하는 것이 법의학적으로 가능한지 여부 등이었다.

(3) 법의학자들 대다수는 세 군데의 총상에 매연 부착이 있는 점을 근거로 하여 모두가 접사 또는 근접사에 의한 관통총창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4) 그러나 망인의 사인에 대하여는 AA, X은 스스로 상처 부위를 겨누어 발사할 경우 그 자세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지극히 부자연스러워 자살하는 자가 그런 자세를 취하였을지 의문이고, 좌측 엄지의 상처는 M16 소총의 소염기에 의한 파열창으로서 방어흔에 해당하여 타살의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밝혔고, ② 반면 Y, AD, AC, AF은세 군데의 상처 모두 생활반응7)이 나타나므로 세 군데의 상처는 연이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오른쪽 흉부의 상처가 까만 이유는 그 안으로 매연이 들어가서 피부에 침착했기 때문이나 왼쪽 흉부는 매연은 옷 사이로 빠져나가고 화염만 닿아 분홍빛을 띠고 있는 것이고, 왼쪽 손의 찰과상과 연기 침적은 총을 발사할 당시 총 끝을 머리에 고정하기 위해 손으로 잡고 있었던 것에 의한 것으로서 자살의 가능성이 크다는 소견을 밝혔다.

(5) 망인의 사체 부검의인 W는 ① 부검 당시에는 3군데의 총상에서 생활반응이 발견되므로 생존시 3발의 총알을 밀착 사격한 것으로 보이고, 왼손 엄지의 상처는 찰과총창이며 상처에 다량의 매연이 묻어 있는 점을 근거로 할 때 총구에 왼손이 밀착하여 있는 상태에서 흉부 및 두부의 총상이 형성될 때 동시에 형성된 것으로서 사인은 자살이라고 판단하였으나, ②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는 오른쪽 흉부의 총상과 왼쪽 흉부의 총상 색깔이 서로 다른 것은 오른쪽 총상을 먼저 입고 수 시간 후에 왼쪽 총상을 입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부검을 할 때에는 양쪽 총상 부위의 색깔에 차이가 미미하였는데 이는 사망한 후 건조현상에 의해서 색깔이 비슷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으며, 왼쪽 엄지의 상처에 대해서는 M16 소총의 소염기에 의한 파열창으로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고 방어흔으로 볼 수도 있으며, 사입구와 사출구의 각도를 볼 때 극히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나오는 등 종합적으로 볼 때 망인이 자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고 진술하였고, ③ 특조단 조사에서는 양쪽 흉부 총상의 색깔 차이는 시간 차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점에서 타살의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결론을 단정할 수는 없으며, 왼쪽 손에 난 상처가 방어흔인지 여부나 개머리판에 맞아서 생긴 상처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진술하였다.

【인정근거】갑 제9호증의 23, 85, 86, 128, 255, 264, 273, 274, 갑 제10호증의 46, 47, 52, 94, 106, 을 제3호증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2) 판단

위 인정한 망인의 사체 상태와 이에 대한 법의학적 검토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관계를 추인할 수 있다.

가) 양쪽 흉부 총상은 심장 등 주요한 장기를 관통하지 않았으므로 두부 총상이 치명상에 해당하고,8) 두부 총상은 사입구 주위 피부가 십자형으로 파열되어 있고 사입구 주위 조직에 다량의 매연이 존재하며 사입구 표피 안의 두개골에 화약흔이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접사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나) 양쪽 흉부 총상 흉벽의 출혈량이 비교적 균등한 점을 고려할 때 양쪽 흉부 총상은 비교적 가까운 시간 내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 망인의 야전 상의에 왼쪽 흉부 총창 사입구 주위로 M16 소총의 소염기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放射)형의 화약흔 이 묻어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왼쪽 총상은 사입구와 총구 사이에 약간의 간격이 있는 근접사에 의한 것으로서 화약은 옷에 침착되고 사입구 주변 피부에는 옷을 뚫고 나온 나머지 일부 매연만 침착된 관계로 왼쪽 흉부 총상의 사입구가 선홍색을 띠고 있었던 반면, 오른쪽 흉부 총상은 접사에 의한 것으로서 화약과 매연이 탄두와 함께 옷을 뚫고 지나가면서 사입구 주위 피부에 검게 침착되었기 때문에 검붉은색을 띠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양쪽 상처의 색깔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접사와 근접사라는 차이에서 생긴 것이고, 양쪽 총상이 발생한 시간상의 차이나 수상 후 생존기간의 차이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10)

다)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의 파열상은 세 곳의 총상이 모두 접사 또는 근접사인 점, 위 상처 옆에 검은색의 매연이 부착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는 총기를 휘두르는 과정에서 찢어졌다기보다는 총이 발사될 때 망인이 총구 부분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발사압력에 찢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11) 다만, 망인이 발사 당시 총기를 지지할 의사로 총구 부분을 붙잡고 있었다는 점은 앞서 본 망인의 사체상태나 법의학적 검토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고, 누군가가 망인의 머리 또는 가슴에 총을 밀착시키자 이에 반응하여 총구 부분을 붙잡은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총알이 발사되었거나 망인이 저항할 수 없는 압력하에서 붙잡은 총구부분을 치우지 못하고 있던 중 총알이 발사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라) 왼쪽 손목 안쪽에 나 있는 발적흔, 즉 피부가 붉게 변하고 부풀어 오른 상처가 개머리판에 맞아서 생긴 피하출혈인지 총이 발사될 때 총구를 잡고 있어 생긴 화상인지에 관하여는 이에 대한 정확한 부검 자료가 존재하지 아니하다.

다만, 이 상처의 형상이 관절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나 있고, 윗부분으로 갈수록 점차 색깔이 흐려지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상처가 화상이라 하더라도 망인이 자살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는 단정키 어렵다. 피고는 이 법원의 검증기일에서 망인과 유사한 신체 조건을 가진 대역 인물이 M16 소총을 가지고 자신의 흉부에 2발, 머리에 1발을 쏘는 자세가 가능하다는점을 설명하면서 왼쪽 손목 안쪽의 발적흔은 망인이 오른손으로 방아쇠를 잡고 왼손으로 총열을 감싸쥐고 흉부에 총기를 발사하는 과정에서 뿜어져 나온 매연에 의하여 열상을 입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피고가 제안하는 자세는 개머리판을 바닥에 고정하게 되나 현장에서 발견된 망인의 M16 소총 개머리판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점(갑 제10호증의 47), 앞서 본 바와 같이 양쪽 흉부총상의 사출구가 모두 사입구와 거의 수평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망인이 발사과정에서 상체를 아주 깊이 숙이고 있어야 할 것인데, 12) 가슴에 첫발을 맞은 상태에서 다시 망인이 상체를 깊이 숙이고 두 번째 총상을 가하였다는 것은 쉽게 수긍되지 않는 점, 오른쪽 흉부총상 사출구 부위에는 총알이 피부를 누른 흔적이 있어 발사 당시 망인은 누워 있는 자세를 취한 것으로 보이는 점(갑 제10호증의 47) 등을 고려하면 망인이 피고가 제시하는 자세로 자살하던 중 왼팔 발적상을 입은 것으로는 보이지 아니한다.

오히려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부 총상 당시 망인은 왼손으로 총구를 잡고 머리에 가까이 대고 있었으므로 발사 과정에서 분출된 화염이 두개골을 따라 나오면서 왼팔에 일직선 형태의 화상을 입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마) 다음 양쪽 흉부 총상과 두부 총상의 발생 순서에 관하여 본다.

망인이 자살하였다면 두부 총상이 치명상이므로 양쪽 흉부 총상은 그전에 입어야만 하는 논리적 관계에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피고는 3발의 총상에서 모두 생활반응이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두부 총상이 마지막 총상이라고 주장한다.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망인의 생활반응에 관한 자료가 있다.

①. 사입구와 사출구 주위에 있는 타박상과 찰과상은 피하조직과 근육조직의 출혈에 의한 것으로 생활반응이고, 이러한 현상은 모든 총상에서 보이고 있다(갑 제9호증의 128)13).

② 왼쪽 흉부 총상의 사입구가 선홍색인 것은 총에서 나온 일산화탄소가 조직과 결합하였기 때문으로 당시 망인이 살아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갑 제10호증의 47)14). ③ 세 총상 모두에서 근육이 위축되는 생활반응이 나왔다(을 제3호증).

그런데 사후 혈액이 응고될 때까지는 혈액이 나올 수 있으므로 채취한 조직에 대한 현미경 검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망인의 출혈을 생활반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갑 제10호증의 26, 46)15), 양쪽 흉부 내의 출혈량이 200cc 가량인데, 망인의 체격, 수상 부위 및 훼손장기 등을 고려해볼 때 살아있는 상태에서 입은 흉부 총상의 출혈량으로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아니하는 점, 앞서 본 바와 같이 왼쪽 흉부 총상과 오른쪽 흉부 총상의 색깔 차이는 발사 당시 총기가 망인의 몸에 밀착되어 있었는지 여부와 관계가 있고, 왼쪽 흉부 총상의 색깔이 반드시 일산화탄소와 조직이 반응한 결과라고 볼 만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는 점, 망인이 개체적으로는 사망하였더라도 세포사(細胞死)에 이르기까지는 근육이 충격에 반응할 수도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보면 세 총상 모두에게서 생활반응이 존재하였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16) 따라서 두부 총상이 치명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일 마지막에 발생한 것이라는 피고의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3) 소결론

앞서 본 법의학자들의 검토 결과는 망인의 사체를 직접 보고 관찰한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라 헌병대의 부검 사진, 현장사진 등 불충분한 일부 자료에 의한 간접적인 소견일 뿐이고, 부검 당시 망인의 사체에 난 상처 모두에 대하여 정밀한 조사가 행하여지지 못했으며, 어느 쪽의 견해도 망인의 사체에 난 상처를 모순 없이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상의 점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흉부 총상 2발은 근접한 시기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두부 총상이 치명상에 해당하나 마지막에 입은 총상이라고 단정키 어려운 이상 양쪽 흉부 총상과 발생한 시기가 다르다고 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고 판단된다.

다. 이 사건 사고와 관련된 전후 정황

1) 인정사실

가) 망인의 군생활 태도 및 휴가 준비

(1) 망인은 3중대 내에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모범 사병으로 다른 병사들에게 칭찬을 받아 왔고, 성격도 원만하여 군생활에 잘 적응한 편이었다. 그러나 망인은 중대장 전령을 맡게 되면서부터 중대장 1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종종 예전에 근무하던 화기소대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중대장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동료 병사들에게 하기도 하였다.

(2) 한편, 망인은 이 사건 사고 발생 다음날에 휴가를 나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 사건 사고 발생 전날에 AG(14소초원), AH(19소초원), AI(1소대장) 등에게 곧 휴가를 간다고 이야기하였고, AJ(19소초원)에게는 휴가복을 빌려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나) 이 사건 사고 발생 전날의 술자리

(1) 중대본부 막사는 중대장 및 망인을 비롯한 중대본부 요원들이 근무, 생활하던 건물로 크기는 약 13.6평이고, 출입문에서 들어와 바로 왼편으로는 중대장실, 오른편으로는 인사계실이 있었다. 침상은 중대장실 뒤쪽으로 왼편에 있으며, 인사계실 뒤로는 총기 거치대, 계원들 책상 2개와 상황책상 1개가 놓여있고, 오른쪽 벽에는 칠판이 걸려 있으며, 중대본부 안쪽에는 중앙 출입문과 마주보는 위치에 중대장 책상이 놓여 있었다.

(2) I은 2008. 4. 1. 21:30 경부터 중대본부 내 중대장실에서 3소대장 K의 중위 진급을 축하하기 위하여 K, 19소초장 중사 L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I과 L은 L이 수통에 담아 준비해 온 약 4홉 분량 소주의 대부분을 나누어 마셨다.

(3) 망인은 중대장 전령으로서 중대장실 밖에서 대기하면서 커피와 안주를 준비하거나 라면을 끓여오는 등 술자리의 수발을 들었는데, 으로부터 라면을 제대로 끓이지 못한다거나 안주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기도 하였다. 한편, I은 자신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중대본부 요원들이 취침을 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다른 중대본부 요원들도 신발을 신은 채로 침상에 누워 가면을 취하거나 책상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4) 그러던 중 L이 I에게 이 술집 접대부를 난잡하게 다루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들 사이에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이에 화가 난 L은 중대장실 문을 박차고 내무반으로 뛰쳐나와 내무반에 있던 중대본부 요원들에게 폭언을 하였고, 총기 거치대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M16 소총을 집어들고 중대본부 요원들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에 K은 L을 뒤에서 붙잡아 소란을 진정시킨 후 자신은 16소초로 귀대하였다.

다) 이 사건 사고 당일의 중대장 순찰

(1) 망인이 근무하던 육군 G사단 H연대 1대대 3중대는 1984. 2. 8.부터 GOP로 투입되어 주간에는 11개, 야간에는 31개의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중대본부 주변에는 동쪽으로는 19, 20소초가, 서쪽으로는 16, 14소초가 각 차례로 위치해 있었다.

(2) 그 중 16소초 소속 병사들은 주간에는 21, 18, 11번 세 곳의 대공초소에서 경계근무를 하였는데, 21번 초소는 중대본부와 19소초 사이에, 18번 초소는 중대본부와 16소초 사이에, 11번 초소는 16소초와 14소초 사이에 각 위치해 있었다.

(3) 1은 병사들의 GOP 경계근무 상황을 매일 순찰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중대가 GOP 내에서 경계근무를 시작한 이래 2개월 동안 단 한 차례도 순찰을 한 적이 없었다.

(4) 그런데 1은 이 사건 사고가 일어난 1984. 4. 2.에는 09:30경부터 자신의 전령이 아닌 J(중대본부 보급계)을 대동하고 16소초 순찰경계 끝점인 21번 초소 우측부터 시작하여 14소초 방향으로 11번 초소 부근까지 철책을 따라 이동하면서 철책근무 순찰을 실시하였다. 당시 16소초장이었던 K은 자신의 전령인 AK와 함께 1의 지시로 오전 08:00경 중대본부로 올라가서 대기하다가 1의 순찰에 동행하였다. 한편 당일 아침 중대본부에서 신병 전입신고, 분대장 이취임식, 외진환자 신고 등이 실시된 적은 없었다.

라) 순찰 도중 총성의 발발

(1) 이 초소 순찰을 하고 있던 오전 11:00경 17) 중대본부 쪽에서 총성이 들렸는데, 이날 오전 07:00경부터 대공초소 주간근무에 투입되었던 병사들 중 21번 초소에 있었던 AL, 18번 초소에 있었던 AM, AN와 11번 초소에 있었던 AO, AP는 모두 위 총성을 청취하고 각 16소초에 그 사실을 보고하였고, AO, AP는 중대본부 막사 쪽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들 중 AL, AM, AO, AP는 의문사위에서 2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진술하였고, AN는 2~3발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2) 같은 시간 16소초에서 상황근무를 하던 AQ, AR, 20소초에 있던 AS, AT, 14소초 내무반 밖에 나와 순찰을 대기하고 있던 AU, AV, AW도 총성이 나는 것을 들었고, 이들도 의문사위에서 모두 2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3) I을 수행하던 J은 1보다 앞서서 14소초 쪽으로 가 있다가 순찰 당시 메고 있었던 휴대용 무전기로 망인이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16소초 쪽으로 뛰어 내려오며 이 사실을 I에게 보고하였고, I은 이를 듣고 14소초쪽으로 가다가 급히 방향을 돌려 J과 함께 중대본부 쪽으로 돌아갔다.

마) 이 사건 사고 발생 이후의 정황

(1) 중대본부 내무반에서의 물청소 실시

(가) 중대본부 요원들 중 일부는 위 총성이 울린 시각에 중대본부 내무반 바닥, 침상 및 중대본부 출입문 앞 시멘트로 포장해 놓은 곳을 수세미와 걸레를 사용하여 닦는 등 물청소를 실시하였다.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직후 또는 그날 오후에 중대본부에 갔던 AV(14소초원), AJ(19소초원), AG(14소초원), AW(14소초원), AX(19소초 신병), AY(19소초원), AR(16소초원), AN(16소초원)는 의문사위에서 중대본부 요원들이 물청소를 하고 있는 장면과 중대본부 내무반 바닥이 흥건히 젖어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고, 특히 AV, AN, AR는 중대본부 내무반 침상 및 출입구 쪽에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나) 한편 중대본부가 위치한 곳은 별도로 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평소 중대본부 요원들은 16소초가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서 수통에 물을 길어 와 사용하여 왔던 까닭에 평소에 내무반에서 물청소를 대대적으로 실시한 적은 없었다.

(2) 중대장 I의 조작 지시

(가) I은 중대본부로 돌아온 후 중대본부 요원들에게 V, U이 13:00경 16소초로 중식을 추진하러 가다가 폐유류고 뒤에서 망인의 사체를 발견한 것으로 발견 경위를 조작하라고 지시하고 상황일지를 수정하는 한편, 망인의 관물함에서 물건을 꺼내어 그 중 일부를 소각하였다.

(나) I은 또 망인의 M16 소총에 남아있는 실탄의 개수를 확인하여 규정 휴대량을 맞추어 놓을 것을 지시하여 K이 현장에 있던 망인의 소총에서 탄창을 분리하여 S(중대본부 병기계)에게 건네 주었고, S는 탄창에 남아있는 실탄의 개수를 확인한 다음 1 발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여 사체 주변에 실탄 한발을 묻어 놓고 다시 소총에 탄창을 삽탄하였다.

(3) 헌병대의 현장 수사

(가) 헌병대 수사관들은 당일 13:00경 중대본부로 와 현장사진을 촬영하고 중대본부 요원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현병대가 촬영한 현장사진(이하 '이 사건 현장사진'이라고 한다)에 따르면, 망인의 사체는 가느다란 나무 여러 개를 가로, 세로로 얽어놓은 울타리 형태로 되어있는 폐유류고 주변에서 오른쪽 볼 부분을 바닥에 가까이 하여 얼굴 방향이 폐유류고 쪽을 향하여 모로 누워있었으며 다리도 폐유류고 쪽으로 조금 틀어진 상태였는데, 그곳은 약 40° 정도의 오르막 지형이었다. 또 망인의 오른팔은 옆으로 쭉 뻗어 있고 망인의 M16 소총이 방아쇠의 방향이 위로 향한 상태로 오른팔과 나란히 놓여있고, 총구는 오른쪽 가슴 부위에 맞닿아 있으며 소총 개머리판이 폐유류고 울타리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폐유류고 주변 토양은 밝은 색의 마사토이었는데, 망인의 머리 아랫부분에 피가 약간 고여 있을 뿐, 그 주변에 피, 뇌조직이나 골편 등이 보이지 않고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다.

(나) 한편, 망인의 사체 주위에서 2개의 탄피만 발견되자, 헌병대 수사관들은 나머지 1개의 탄피를 찾기 위하여 현장 주변에서 정밀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이 사건 사고 발생 당일에는 나머지 탄피 1개를 찾지 못했다.

바) 대대 및 연대 지휘관들의 이 사건 사고 인지 시각

(1) 1소대장 AI은 이 사건 사고 발생 당일 06:00경에 항상 실시하는 철책이상 유무를 에게 지휘보고하려고 수차례 전화연결을 시도하였는데 중대본부의 전화가 계속 불통이었다.

(2) I은 1984. 4. 2. 06:00~07:00경 대대에 유선으로 "병사 한 명이 총기로 자살했 다"고 보고하였고, 당시 대대본부에서 근무하던 AZ(부대대장), BA(대대 작전장교), BB (대대 특공중대장), BC(대대 통신병), BD(대대장 전령), BE(대대 통신선임하사)은 1984. 4. 2. 오전에 출근하여 늦어도 08:00 이전에 3중대에서 총기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3) 1대대 대대장 M은 아침 식사를 하기 전 BF(대대 운전병)이 모는 지프차를 타고 대대본부를 나가 3중대로 갔고, 대대에서는 대대장의 부재로 매일 오전 08:00경에 하던 상황회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한편, 1대대 담당 보안대 하사 N은 1984. 4. 2. 새벽에 M의 호출을 받고 대대 장실로 가 M으로부터 3중대에서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대대 내무반에 들어와 자신의 업무를 주로 보조하였던 통신병 BG에게 자신에게 먼저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면서 몹시 화를 낸 후 M이 내어 준 차를 타고 3중대로 갔다.

(5) 연대장 BH는 사건 당일 07:00경 사무실에 출근하여 3중대장 전령이 자살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BI(연대 인사과장), BI(연대 인사장교) 등 연대 소속 사람들도 오전에 이 사건 사고 발생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바) 기타 사항

(1) 대대장 M은 이 사건 사고 발생 후 이 월북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부대대장 AZ을 3중대로 보내 을 감시할 것을 지시하였고, 1중대장 BB은 M으로부터 AZ과 함께 I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여 연대본부로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다음날인 1984. 4. 3. I을 3중대본부에서 19소초로 내려오게 한 후 '가서 진술서만 작성하면 다시 3중대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속여 I을 연대로 데려갔으며, I은 그 직후 보직해임되어 약 1달간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았고 그 후 강제 전역을 당하였다.

(2) L도 이 사건 사고와 관련하여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어떤 징계를 받거나 불이익을 입은 사항은 없었다.

【인정근거】갑 제9호증의 12, 13, 15, 17, 18, 21, 27, 29, 34, 37, 39, 44, 50, 52, 53,57 내지 60, 63, 70, 76, 78, 81 내지 84, 91, 94, 100, 115, 116, 120, 122, 127, 131, 132, 148, 165 내지 170, 173 내지 175, 181, 188, 200, 216 내지 218, 223, 229, 갑 제10호증의 45, 100, 133, 149, 153, 155 내지 158의 각 기재, 증인 BH, R, K의 각 일부 증언, 변론 전체의 취지

【배척증거】갑 제9호증의 10, 19, 20, 22, 109, 110, 121, 125, 126, 153, 155, 160, 161, 182, 185, 197 내지 199, 202, 211, 220 내지 224, 227, 231, 234, 236, 237, 242, 251, 252, 256, 260 내지 262, 갑 제10호증의 131, 134, 141, 149의 각 일부 기재, 증인 R, T, K, BK 의 각 일부 증언

2) 판단

가) 위 인정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1) 이 사건 사고 당시 현장 주변에서 초소 근무를 하고 있던 병사 대다수가 중 대본부 쪽에서 2발의 총성이 나는 것을 들었다.

피고는 BL(14소초원), BM(16소초원), AT(20분초원) 등 사건 발생일 오전에 3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사람도 다수 존재한다고 주장하나, 이들은 다른 사람이 3발의 총성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거나, 3발 또는 3~4발의 총성이 울렸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갑 제9호증의 53, 114, 189), 앞서 2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진술한 자들은 대부분 당시 중대본부와 가까이 있는 11, 18, 21번 대공초소에서 근무하고 있었거나 소초 내무반 밖에 나와 있던 자들이고 정확히 2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총성이 난 후에 조치한 상황까지 진술하고 있어 그 신빙성이 높다고 보이는 점, I과 같이 순찰을 하던 K도 2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증인 K), 그 외에도 당시 현장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중 다수가 2발의 총성을 들었다거나 2발의 총성이 울렸다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진술하고 있고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곳은 산악 지대로서 당시 총성을 청취한 자들이 메아리에 의하여 3발의 총성으로 착각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대대 및 연대 소속 간부와 병사들은 이 사건 사고 당일 새벽 또는 오전(적어도 10:00 이전)에 망인이 자살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대대장 M과 보안대 하사 N이 위 보고를 듣고 오전에 직접 3중대에 다녀왔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M, N은 일관하여 자신들이 새벽에 3중대에 간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연대장 BH와 대대 병사 BD, BN, BF, BC, AZ 등의 진술은 착오에 기한 것이거나 잘못된 것이므로 대대 및 연대에서 이 사건 사고 발생 사실을 새벽에 알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취지로 다투고 있다.

그러나 M, N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사건 사고의 은폐·조작에 관계된 이해관계인으로 보이는 반면, BH와 대대 병사들은 이 사건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어 그 진술을 특별히 믿지 아니할 이유가 없고, 그 진술 내용도 전체적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사항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점을 참작하면 자신들의 기억의 정확성을 확신할 수는 없다는 태도는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에도 중대본부 요원 S는 실탄 1발을 망인의 사체 옆에 놓을 때 옆에 있던 N에게 자신이 실탄을 갖다 놓았다는 이유로 영창에 가는 것은 아니냐고 물어보았다고 진술한 점(갑 제10호증의 63), AP(16소초원)는 사건 당일에 오전 주간근무 교대를 하기 전에 중대본부로 지프차가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고, AN(16소초원)도 오전 주간근무를 하면서 중대본부 막사 앞에 지프차가 와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한 점(갑 제9호증의 72, 120) 등 이 점에 관한 다수의 진술에 비추어 볼 때 대대, 연대 등 3 중대의 상급 부대에서는 3중대에서 새벽에 총기사고가 있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비록 흉부 총상은 망인이 옷을 껴입고 있어 피가 튀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체 발견장소인 페유류고에서 망인이 두부에 개방성 총상을 입었다면 주변에 피, 뇌조직, 골편 등이 산재해 있어야 함이 상식에 부합하나, 망인의 사체가 놓여 있던 폐유류고 주변에 이와 같은 흔적이 거의 없었다(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헌병대 수사기록에는 사망자의 두부 좌전방 30cm~1m 일대에 골편이 산재해 있는바동 장소가 사건 현장임이 입증된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이 사건 현장사진에 의하면 망인 사체 주변에서 피, 뇌조직이나 골편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게다가 갑 제9호증의 58, 60, 111, 121, 125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해 보면, 의문사위에서 BO(19소초원)은 이 사건 사고 발생일 오전에 중대본부에 들렀다가 내무반 현관 우측 모서리에서 망인의 사체가 쭈그린 자세로 놓여 있고 그 주변에 상당히 많은 양의 피가 흘러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한 사실, AG(14소초원)은 총성이 들린 후 이 F의 신상명세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중대본부에 가는 길에 폐유류고에서 땅바닥에 정면으로 누운 채로 총을 안고 있는 망인의 사체를 보았다고 진술한 사실, BP(14소초원)는 총성이 울릴 당시 14소초 관할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폐유류고 부근이 아닌 중대본부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렸으며 중대본부 쪽을 바라보니 사람이 쓰러져 있었으며 그 주변에 1~2명의 사람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한 사실, BQ(연대 보안반장)은 중대본부에서 50~60m 가량 떨어진 곳에 평평한 마사토가 다소 움푹 패여 있는 곳에 사체가 누워 있었던 것 같고 주변에 나무는 없었다고 진술한 사실, 중대본부 요원인 R은 월경표지판 아래에서 얼굴은 하늘을 보고 누워있고 총구가 몸 바깥쪽을 향하고 개머리판이 몸쪽을 향해 있는 망인의 사체를 보았다고 진술한 사실, S는 폐유류고에 가서 사체가 정면을 향해 하늘을 보고 있었고 총은 몸통 위에 놓여있었던 것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갑 제10호증의 25의 기재에 따르면, 의문사위의 출장 조사에서 미국 뉴욕 및 로 스앤젤레스 경찰국 소속 수사관들은 두부의 사출구 형태로 보아 많은 피부조직, 골편,피, 뇌조직이 산재되어야 하나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사체를 이동시켰다는 소견을 밝힌 사실, 망인의 부검사진을 보고 자살 소견을 밝힌 법의학자 Y도 뇌조직이 땅에 스며들 수는 없고, 총구에 피가 묻어있지 않은 점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소견을 밝힌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자세로 망인의 사체가 놓여있는 것을 목격한 중대 병사들의 진술과 이 사건 현장사진에 관한 전문가의 의견을 고려해 보면, 누군가가 망인의 사체를 수차례에 걸쳐 이동하였고, 헌병대가 이 사건 현장 사진을 촬영하기 전에 그 자세를 이 사건 현장사진상의 자세인 모로 누운 자세로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나) 사실관계가 이와 같다면, 망인은 1984. 4. 2. 새벽(적어도 오전 06:00경 이전)에 폐유류고가 아닌 다른 곳에서 1발의 총상을 입은 다음 누군가가 그 사체를 폐유류고로 이동시켰던 것으로 보이고, 앞서 본 바와 같이 양쪽 흉부 총상은 동시에 발생한 것인데 11:00경에는 2발의 총성만 들렸던 점, 사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피, 뇌조직 및 골편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을 종합해 보면, 새벽에 발생한 총상은 두부 총상이고, 누군가가 11:00경에 망인의 양쪽 흉부에 2발의 총을 쏘았다고 봄이 경험칙에 부합한다. 원고들은 L이 술자리에서 M16 소총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서 총기가 발사되어 망인이 오른쪽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원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갑 제9호증의 209, 214, 215, 247, 248, 갑 제10호증의 86의 각 기재는, ① 앞서 본 바와 같이 새벽에 발생한 총상은 접사에 의한 두부 총상이고 망인의 왼손에 난 상처는 망인이 발사 당시 총구를 잡고 있었던 것에 의한 것으로 봄이 타당한데, L이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서 망인의 두부에 총구를 대고 있었다거나 망인이 그 총구를 잡고 머리에 대고 있었다고 볼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점(L이 난동 과정에서 총을 발사하였다는 P, Q도 망인의 가슴에 총을 발사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② L은 키가 약 159㎝로서 약 180cm인 망인보다 키가 훨씬 작기 때문에 L이 망인의 흉부에 총을 겨누어 발사하였다면 사출구가 사입구보다 높은 곳에 형성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아니한 점, 3 망인이 흉부에 총을 맞았다면, 치명상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중대본부 요원들이 즉각 의무대에 통보하여 망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경험칙상 상당한데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선뜻 믿기 어렵다.

라. 소결론

이상의 판단을 종합해 볼 때, 망인은 1984. 4. 2. 새벽에 중대본부 막사 안에서 두부에 1발의 총상을 입은 다음 누군가가 그 사체를 폐유류고로 이동시켜 11:00경에 망인의 양쪽 흉부에 총을 쏘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새벽에 발생한 두부 총상이 접사에 의한 것이고 망인은 그 당시 총구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망인이 스스로 새벽에 자신의 두부에 총기를 발사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 인정사실을 종합하여 찾아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 즉, ① 망인은 정기 휴가를 불과 하루 앞두고 있었고 다른 병사에게 휴가복을 빌리거나 휴가를 나가면 안부를 전해주겠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며, 비록 중대장 전령 업무를 힘들어하기는 하였으나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망인의 정신 상태가 극도의 불안상태에 이르러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우며 유서도 발견되지 아니한 점, ② 새벽에 발사된 사고 현장의 은폐를 위하여 중대본부 요원들이 막사 및 주변에서 핏자국을 닦아내기 위한 물청소를 실시하였던 점, ③ ②항에 비추어 망인의 사망은 중대본부 막사 안에서 이루진 것으로 보이는데, 망인이 중대본부 요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살하였을 것으로는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힘든 점, ④ 망인이 자살하였다면 망인이 사망한 지 수 시간 후에 중대본부 요원 중 누군가가 망인의 가슴에 다시 2발을 쏠 이유가 없는 점, ⑤ 부임 후 한 번도 철책 순찰을 하지 않던 중대장 이 이 사건 사고 당일에만 이례적으로 순찰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2발의 총성이 울릴 당시 자신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알리바 이를 만들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는 점, ⑥ 대대장 M은 이 월북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 사고 다음날 I을 연대본부로 데려왔고, 그 직후 이 보직해임되었다가 강제전역에 이르게 되었는바 이러한 에 대한 사후 조치는 사병의 자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점 등 제반 사정을 함께 고려해 본다면, 망인이 어떠한 경위에 의하여 새벽에 1발의 총상을 입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중대본부 막사 내에 있던 누군가가 망인의 머리에 총을 대자 이에 망인이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왼손으로 총구부분을 붙잡고 있던 중 그 과정에서 총을 발사하였거나, 또는 망인이 중대장 등으로부터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을 받은 상태에서 총기를 들고 왼손으로 총구부분을 붙잡아 머리에 대고 있던 중 망인의 의사에 기하지 아니하고 총이 발사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으로 보나 망인의 사망이 자살이라고는 할 수 없고, 망인의 소속 부대 군인 중 누군가에 의하여 타살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망인은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하여 타살되었는바, 이는 국가배상법 제2조에서 정한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 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에 해당한다 할 것이므로, 피고는 망인에 대하여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진다 할 것이다 4. 사건의 은폐, 조작으로 인한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판단

가. 소속 부대원에 의한 은폐, 조작3항에서 본 사실관계에 의하면, 중대장 I 및 병사들에 의해 사건의 발생 경위 및 사건 현장이 은폐·조작되었으며, 적어도 새벽에 망인이 첫 번째 총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중대로 와서 사건현장을 직접 목격하였을 대대장 M 및 보안대 하사 N이 이러한 은폐·조작 과정에 직접 관여하였다는 점도 인정된다.

나. 군수사기관에 의한 은폐, 조작

1) 인정사실

가) 육군 G사단 헌병대가 이 사건 사고 발생 당일인 1984. 4. 2. 작성한 인지보고에 따르면 인지 경위가 '1984. 4. 2. 14:00경 소속 연대 대령 BH의 유선 신고'로 기재되어 있고, 헌병대가 16:00경 현장에 도착하여 16소초원 AO 등 5명으로부터 10:50경 총성이 2발 울렸다는 진술을 들었다는 내용과 망인의 사체 주위에서 탄피 2개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당시 헌병대 수사관으로서 이 사건 사고를 주도적으로 수사한 BK, BR이 작성한 각 현장 약도에는 망인의 사체 주위에 탄피 2발만이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나) 또 헌병대 수사기록에는 '길과 주차장 이외에는 지뢰 미확인 지대로서 출입할 수 없으므로 타 곳에서 살해 후 사체발견 장소로 운반 가능 없음', '사망자의 두부 좌전방 30㎝~1m 일대에 골편이 산재해 있는바 동 장소가 사건 현장임이 입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 망인의 사체가 놓여있던 폐유류고 주변에서는 2개의 탄피가 발견되었는데,18) 총상은 3곳임에도 나머지 탄피 1개가 발견되지 않자 헌병대장 BS은 헌병대 수사관들에게 지시하여 사건 당일 현장에서 탄피 1개를 더 찾기 위하여 정밀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사건 당일에는 탄피를 찾지 못하였으며, 의문사위에서 부검의 W는 1984. 4. 4. 부검을 할 당시 헌병대 수사관들로부터 탄피를 2발밖에 찾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런데 헌병대 수사기록에는 '현장에서 유류된 탄피가 자살자 좌우 50cm 범위 내에서 발견되므로 동일 장소에서 3발이 발사된 것이 입증'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1984. 4. 2. M16 소총 1정과, 탄피 3개, 탄창 5개, 실탄 73발을 압수'라는 기재도 있는데, 나머지 탄피 1개를 누가, 언제, 어떤 경위로 발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헌병대 기록에 아무런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4) 중대본부 요원들은 헌병대로 소환되어 약 2주에 걸쳐 이 사건 사고에 관하여 조사를 받았는데, 주먹 또는 곤봉으로 구타를 당하거나, 물고문, 고춧가루를 주전자에 타서 물붓기, 철책에 매달아 놓기, 잠 안재우기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였다. 당시 헌병대 수사관들은 중대본부 요원들에게 10여 회에 걸쳐 진술서를 작성하게 하였는데, 일부 진술서는 수사기록에 편철하지 않고 찢어버리고 수사기록에는 2~4회 정도의 진술서만 편철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사관이 먼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한 후 피조사자로 하여금 그것을 그대로 옮겨 기재하는 방식으로 진술서가 작성되기도 하였다. 헌병대에서는 조사를 마칠 때에 중대본부 요원들에게 망인은 자살한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하면서 헌병대 내에서 있었던 일을 외부에 나가서 절대 발설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인정근거】갑 제9호증의 10, 14, 27, 52, 53, 60, 137, 171, 225, 255, 278, 갑 제10호증의 108, 132, 148, 152의 각 일부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배척증거】갑 제9호증의 139, 140, 162, 163, 254, 269, 갑 제10호증의 99, 101의 각 기재, 증인 BK, R의 각 일부 증언

2) 판단

가) 수사기관은 당해 사건에 있어서 수사를 개시하기에 족한 범죄의 혐의가 있는지의 여부를 성실히 판단하여야 하고 나아가 혐의가 인정되어 수사를 개시한 경우에는 법령의 규정을 준수하는 한편 필요하고 상당한 범위 내에서 관련된 제반 증거를 수집한 후 그에 대한 증거가치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여야 할 의무가 있고, 수사기관의 이러한 의무는 당해 사건의 피의자 내지 피고인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도 부담하는 것이고, 수사기관이 사건의 진상을 은폐·조작하는 등 의무를 고의로 저버리거나 게을리 한 경우에는 피해자의 가족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인격적 법익의 침해로 인한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것이다.

특히, 군대 내에서 범죄나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 군대는 국가의 직접 관리 하에 엄격히 통제되고 격리되어 있는 집단으로서 외부인의 접촉이 차단되고, 그 수사과정에 피해자의 이해관계인들의 참여가 감시가 보장되기가 힘든 점, 그에 관한 증거나 목격자들도 모두 군대 내부에 있어서 외부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점, 국민은 헌법상 부과된 병역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군입대하여 복무하는 것이므로 국가로서는 장병의 생명, 신체에 대한 보호와 배려의무를 부담하며 장병의 신상에 이상이 생긴 경우에도 국가는 그 내용과 원인을 철저히 밝히고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되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군대 내에서의 사고를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군수사기관으로서는 더욱 철저히 사건 현장을 보존하고 내용과 원인에 대한 엄정한 조사를 통하여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여야 할 직무상 의무의 정도가 더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러한 수사의 개시에 앞서 이루어지는 조사활동과 이에 기초한 범죄의 혐의가 있는가 여부에 관한 판단, 즉 수사를 개시할 것인가 또는 조사활동을 종결할 것인가의 판단은 수사기관이 제반 상황에 대응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적절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재량에 위임되어 있는 행위이므로, 조사활동과 그에 따른 수사의 개시 여부에 관한 수사기관의 판단이 위법하다고 평가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한 형사소송법 등의 관련 법령의 취지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수사기관이 그 권한을 행사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것이 현저하게 불합리하다고 인정되거나 또는 경험칙이나 논리칙상 도저히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인정되는 경우라야 할 것이다(대법원 2006. 12. 7. 선고 2004다14932 판결 등 참조).

나) 돌이켜 이 사건에 있어서 군수사기관이 수사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서 고의로 사건을 은폐 조작하였거나 현저히 불합리하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등 그 조사 과정 및 결론에 있어서 경험칙상 납득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는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앞서 인정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헌병대가 이 사건 사고를 인지하고 사건 현장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중대장 1은 M, N의 승낙 및 묵인 하에 상황일지를 조작하거나 중대본부 요원들에게 사체 발견 시각 및 발견 경위를 허위로 진술하도록 지시하였으며, S를 시켜 실탄을 추가로 사체 주위에 갖다 놓는 등 사건을 은폐 조작하여 두었던 점, 이러한 정황이 헌병대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게 된 점 등을 고려해 보면, 헌병대가 초기에는 나름대로 성실히 수사를 진행하여 소속부대원들에 의한 은폐, 조작의 정황을 발견해내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본 증거 및 사실관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인정된다.

①) 헌병대 수사관들은 중대장 I을 비롯하여 중대본부 요원 전부를 2주 이상 영창에 수감한 상태에서 조사를 진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러한 사전 은폐·조작 정황을 발견하였는바,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은폐 및 조작 지시 과정 및 그 동기도 충분히 인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② 수사 기록에는 처음에는 탄피가 2발이 발견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3발의 탄피가 삼각점을 이루고 떨어져 있었다는 내용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헌병대 수사관 BK, BR, BV와 헌병대 소속 사병 중 아무도 나머지 탄피 1개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경위로 발견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고 19) 이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으며, 2발의 총성을 들은 병사가 다수인데도 3발의 상처가 나 있는 데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음을 입증할 아무런 자료가 없다.

③ 당시 헌병대 수사관들과 함께 사건 현장에 갔던 헌병대 사병 BT과 헌병대와 비슷한 시각에 사건 현장에 도착한 감찰참모 운전병 BU는 모두 오전 중에 사건 현장으로 출발하였던 것 같으며 이 사건 현장사진과 같은 자세로 놓여있는 사체는 본 기억이 없고 사체가 양팔을 뻗고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고 M16 소총이 사체의 팔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갑 제9호증의 201, 203, BT은 당시 중대본부 현관문 왼쪽에서 물과 피가 섞여있는 것을 보았다고도 진술하고 있다) 등에 비추어 볼 때 헌병대가 사건의 진상을 알면서도 현장을 촬영하기 전에 망인이 마지막에 두부에 총기를 스스로 발사하였을 상황을 가정하여 사체의 위치를 그에 부합하게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4) 사체가 놓여있는 곳에 피나 골편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험칙상 사체가 이동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것임에도 이에 대한 아무런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⑤ 헌병대 수사관들은 수사과정에서 중대본부 요원들에 대하여 가혹행위를 하고, 요구하는 대로 진술을 하도록 하였으며 그 사실을 외부에 이를 발설하지 않을 것을 강요하였다.

⑥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당일 아침 8시경 연대장 BH는 사단장에게 망인의 사고 사실을 보고하였으므로(증인 BH의 증언), 군대조직의 특성상 사단의 헌병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봄이 상당한바, 그럼에도 이와 헌병대에서는 이러한 인지내용과는 모순되게 망인이 3발의 총을 발사하여 자살한 것으로 발표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헌병대는 초기에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수사를 시작하였다가 어느 순간에서부터 초기의 수사방향을 변경하여 이 사건 사고의 진상을 알면서도 이를 은폐하기로 하여 결국 망인의 사인을 자살로 처리하였다고 판단된 다.20)

다. 특조단의 사건 은폐·조작 여부에 관하여

원고들은 나아가, 특조단이 망인의 총기번호가 수정된 사실을 확인하고도 이를 무시, 은폐하였으며, 타살 정황을 진술한 참고인들을 상대로 위압적으로 집중 추궁하여 진술을 번복하게 한 다음 자살로 사건을 은폐, 조작하였으므로 이러한 행위 또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타살로 사인을 진술하였던 Q와 타살 정황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였던 몇몇 참고인들이 특조단 조사에서 기존 진술을 번복하였고 P는 특조단 조사를 한차례도 받지 아니하였던 점, 특조단이 주최한 법의학자 대토론회에서 다수의 법의학자가 자살 소견을 밝혔던 점(을 제3호증), L과 중대본부 요원들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 진실 반응이 나왔던 점(갑 제10호증의 65) 및 조사 과정에서 기존의 증거보다 우월한 가치를 갖는 결정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던 점 등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특조단의 조사과정 및 결과 발표는 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강한 의지에서 군에 유리한 증거들을 확대평가 하였다고는 할 수 있으나, 별도의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조작, 은 폐행위라고는 보기는 어렵다.

라. 소결

앞서 본 바와 같이 대대장 등은 처음에는 자살 사고로 보고를 받았다 할지라도 추후에 이 사건 사고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면 정확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할 의무가 있으면서도 이에 위배하여 소속 부대원들을 시켜 적극적으로 사건을 은폐· 조작하도록 지시하였고, 이 사건 사고의 수사를 담당한 헌병대는 사건의 진상을 수사과정에서 알게 되었음에도 사건의 진상을 은폐 · 조작하는 등 수사기관으로서의 의무에 위배하였고, 그 정도가 현저하게 불합리하거나 경험칙이나 논리칙상 도저히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인정되는 경우라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군수사기관과 소속 부대원들의 행위는 피해자의 가족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인격적 법익의 침해로 인한 불법행위가 성립하므로, 피고는 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5. 피고의 소멸시효 주장에 관한 판단

가. 피고의 주장

피고는, 원고들이 주장하는 불법행위가 발생한 날은 1984. 4. 2. 이므로 손해배상청구권이 발생한 날로부터 이미 5년이 경과하였고, 원고들이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의 시점은 의문사위에서 망인이 타살되었다고 결론 내린 2002. 9. 10. 무렵이라 할 것인데 이 사건 소는 그 시점으로부터 3년이 도과한 2007. 4. 16.에 제기되었으므로, 원고들의 이 사건에 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로 인하여 소멸하였다고 주장한다.

나. 판단

1)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가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거나,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로 소멸한다 할 것인데, 피고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이 사건 소는 망인이 사망한 날인 1984.4. 2.부터 5년이 훨씬 경과한 2007. 4. 16.에서야 제기되었음은 기록상 명백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모두 시효로 인하여 소멸하였다.

2)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이 사건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서 그 가해 당사자인 피고가 원고들의 이 사건 손해배상 청구에 대하여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거나 권리의 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이에 관하여 본다.

채무자의 소멸시효에 기한 항변권의 행사도 우리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또는 일단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하였거나, 채권자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의 변제를 수령하는 등의 사정이 있어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08. 5. 29. 선고 2004다33469 판결 등 참조).

살피건대, 앞서 든 증거와 갑 제6 내지 8호증, 갑 제10호증의 177, 178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해 보면, 이 사건 사고 발생 직후 G사단 헌병대에서는 망인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수사결과를 발표하였으나 원고 A은 망인의 사인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여 전면적인 재수사를 요구하여 온 사실, 이에 그 무렵부터 10여 년 동안 육군 G사단, 제2군단, 1군사령부의 각 헌병대, 육군 범죄수사단, 육군본부 법무감실 등 각종 군수사기관에서 이 사건 사고를 수차례에 걸쳐 재조사하였으나 그때마다 망인 이자살하였다고 결론을 내린 사실, 원고 A은 2002년 의문사위가 발족하자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진정을 접수하였고, 이에 따라 군수사기관과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 사고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 조사가 개시되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당시 망인이 소속된 부대에서 근무하였던 광범위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전 군수사기관에서 밝혀내지 못한 타살 관련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 사실, 그런데 의문사위가 2002. 8. 20. 타살로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자 국방부는 의문사위의 중간조사 결과에 크게 반발하며 진상을 확실히 파악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의문사위 조사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즉시 특별

조사단을 구성하여 2002. 8. 26.부터 재조사에 착수하였고, 특조단의 조사는 의문사위의 1차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로도 계속되어 2002. 11. 28.에야 다시 자살로 그 결과가 발표되기에 이른 사실, 특조단은 의문사위에서 P와 함께 망인이 타살되었다고 진술한 Q가 진술을 번복하였으며, 다른 주요 참고인들의 진술 또한 진실이 아니며 중대본부 요원들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조사결과 진실반응이 나왔다는 등의 근거를 제시하였고, 그 후로는 주요 참고인들이 조사를 받는 것을 회피하면서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실, 이 사건은 2002년 말부터 의문사위와 특조단 사이에 갈등으로 번지면서 2004년에는 감사원이 그 진상에 대하여 실지감사를 실시하였으며 각 언론사에서도 이를 앞다투어 취재하는 등 우리 사회에서 사건의 진상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일었던 사실, 의문사위는 2003. 10. 14. 원고 A의 이의제기에 따라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조사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기존 조사 결과에 대한 미진한 점을 정리하고 누락된 참고인들에 대한 조사 및 기존 참고인들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는 등 추가 조사를 통하여 2004. 6. 28. 망인이 타살하였다는 결과를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위 인정사실에 따르면,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후 의문사위의 최종 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피고에 대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최초 헌병대 조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군수사기관의 조사가 행해졌을 뿐이고, 2002년 실질적인 재조사가 처음으로 행해진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는 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특조단이 출범하여 의문사위가 조사한 내용에 대하여 다수의 의문점을 제기하면서 별도로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그 후 이 사건의 진상을 놓고 사회적 논란이 일다가 2004년에 이르러 다시 의문사위가 타살 결론을 발표하기에 이르게 된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면, 원고들은 적어도 1차 의문사의 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는 이러한 피고 산하 군수사기관의 형식적 조사로 인하여 이 사건 사고의 진상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고, 가사 원고들이 1차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에 이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피고 산하 특조단이 의문사위 조사 과정 중에 피고가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면서 재조사에 착수하여 다시 망인의 사인을 자살로 발표하고, 곧이어 2차 의문사위가 특조단의 조사 내용 및 1차 의문사위 조사 내용에 대한 재조사를 통하여 다시 망인의 사인을 타살로 발표하는 등 원고들로서는 위와 같은 피고의 행동으로 인하여 적어도 2차 의문사위 조사 발표일인 2004. 6. 28.까지는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 또 소멸시효 제도는 일정기간 계속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곤란하게 되는 증거 보전으로부터 구제하며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법적 보호에서 배제하기 위하여 인정된 제도인데,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 사고의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수차례 재조사를 요구하여 왔는바, 이러한 소멸시효에 대한 입법 취지와 원고들이 현재까지 취해 온 태도를 고려해 본다 하더라도 이 사건에서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비추어 허용되기 어렵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원고들의 권리 행사가 불가능했던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해소된 이후인 2004, 6. 28.부터 기산하여 5년이 경과하기 전인 2007. 4. 16.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사실은 기록상 분명하므로, 피고의 소멸시효에 관한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21) 6. 손해배상의 범위

가. 인정금액

나아가 피고가 지급하여야 할 손해배상액의 범위에 관하여 살피건대, 앞서 든 각 증거에 의하여 인정되는 아래와 같은 사정, ① 망인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헌법에서 부과하고 있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징집되어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국가로서는 장병이 건강한 상태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충분한 배려를 기울려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 할 것인데도 군복무 중에 망인이 타인에 의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점, ② 그럼에도 망인의 소속 부대에서는 망인이 자살한 것처럼 위 장하기 위하여 두 발을 추가로 발사하고 사체를 이동시키는 등 사건을 은폐, 조작한 점, ③ 망인의 가족인 원고들은 망인이 입대한 후 처음으로 정기휴가를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망인이 세 발의 총을 직접 쏘아 자살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점, ④ 원고들은 그때부터 망인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하여 오랫동안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망인의 죽음에 상당한 의문점이 있음을 알아내었으나 이 사건 사고는 군대 내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개인이 그 진상을 밝힌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모든 자료를 국가가 소지하고 있음에도 수차례에 걸쳐 형식적인 재조사만 이루어졌던 점, 5 망인의 소속부대원, 군 수사기관에 의하여 망인의 사망이 자살로 위장, 은폐됨으로써 그 진상을 밝히기까지 원고들이 받았던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하기 힘들 것으로 짐작되는 점 등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제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위자료로서 망인에게 금 500,000,000원, 원고 A, B에게 각 금 150,000,000원, 원고 C, D, E에게 각 금 40,000,000원을 인정함이 상당하다. 나.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원고 A, B은 망인의 위자료 금 500,000,000원을 각 1/2의 지분비율로 상속하므로, 결국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액은 원고 A, B은 금 400,000,000원(= 상속액 250,000,000원 + 위자료 150,000,000원), 원고 C, D, E은 각 금 40,000,000원이 된다. 따라서 피고는 원고 A, B에게 각 금 400,000,000원, 원고 C, D, E에게 각 금 40,000,000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한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 다음날인 2007. 4. 23.부터 이 판결 선고일인 2010. 2. 3.까지는 민법이 정한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7. 결 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이 사건 각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인용하고, 각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판사

재판장판사김흥준

판사김지영

판사임정윤

주석

1) 갑 제9호증의 77, 80, 107, 149, 150, 159, 164, 191, 195, 208, 209, 214, 215, 248, 갑 제10호증의 16, 62, 69, 80, 86

2) 갑 제9호증의 16, 101, 157, 190, 213, 249, 갑 제10호증의 69, 116

3) 갑 제9호증의 10, 19, 20, 109, 110, 121, 125, 126, 153, 155, 182, 185, 197, 198, 199, 202, 211, 220, 221, 222, 224, 227,

231, 234, 237, 242, 256

4) 그을음.

5) 피부가 타들어간 흔적.

6) 다만, 이 사건 사고 발생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1984. 4. 4.에 망인의 사체에 대한 부검이 이루어졌는데, 부검 당시에는 왼쪽

흉부, 사입구의 색깔이 오른쪽과 비슷한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7) 망인이 살아있었을 때 총을 맞았다는 것

8) 이 점에 대해서는 대다수 법의학자의 의견이 일치하였는데, 다만 Y 교수는 오른쪽 흉부 총상이 간과 폐를 관통하였으므로 두

부 총상과 같이 치명상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밝혔다(갑 제10호증의 47).

9) 법의학자 대토론회에 참여한 AD, Z, AC 교수도 이와 같은 전제에서 소견을 밝히고 있다.

10) AA 교수는 양쪽 흉부 총상이 초동수사 때 찍은 사진에서는 색깔 차이가 분명히 나다가 부검 사진에서는 색깔이 거의 같아

진 점, 발사 거리가 다르다면 두 상처의 크기가 달라야 하는데 거의 비슷한 점을 고려해 보면 양쪽 흉부 총상은 일정한 시간

차이를 두고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위와 같이 왼쪽 야전 상의에 화약이 부착되어 있고 왼쪽 사입구

주위의 상처가 조금 더 넓은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11) 피고는 이 상처가 지지흔이라고 주장하나, 이러한 사정만으로는 망인이 총을 발사하면서 총구를 지지하기 위하여 총구 부분

을 잡고 있었던 것이라고까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12) 망인이 앞으로 깊이 숙이지 않을 경우 사출구는 사입구보다 위쪽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고, 당시 망인이 누워 있던 지형이

약 40°의 오르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보면 더욱 그러하다.

13) 해외법의학자 Y의 감정서, 갑 제9호증의 255(부검의 W의 의문사위에서의 진술), 갑 제9호증의 264(해외법의학자 X의 소견

서), 을 제3호증(법의학 공개대토론회 중 국내법의학자 AA의 진술부분)에서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14) 해외법의학자 Y의 녹취록

15) 위 증거 중 재미법의학자 X의 진술부분

16) 그 외 망인의 부검 당시 흉강 내에 응혈이 혼재된 혈액의 저류가 확인된 바 있으나(갑 제9호증의 265 중 부검의 W의 1984.

5. 3.자 감정소견 부분), 이는 망인이 사망 후 혈관 내에 있는 혈액이 응고과정에 있다가 양쪽 흉부 총상을 입으면서 중력에

의하여 흉강 내로 흘러내린 것으로 설명할 있다.

17) 16소초에서 상황 근무를 하고 있던 AQ는 의문사위에서 초소 근무자로부터 총성 청취 보고를 받고 시계를 보니 그 시각이

10:52이었고, 이를 상황일지에 기재하였다고 진술하였다(갑 제9호증의 19, 115).

18) 다만, 현병대 소속 사병인 BT은 의문사위에서 탄피는 폐유류고가 있는 안쪽이 아니라 폐유류고 너머 뒤편에서 찾았던 것으

로 기억한다고 진술하였고, G사단 감찰참모 운전병인 BU는 사체에서 Im 정도 떨어진 곳에 2발의 탄피가 있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갑 제9호증의 201, 203).

19) 일부는 사체 주변 마사토 밑에 묻혀 있는 탄피를 발견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기도 하나, 이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손

명자가 묻어 놓은 실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 다만, 원고들은 헌병대가 총기 감정을 실시할 때도 망인 및 관련자의 총번을 임의로 수정하는 등 그 과정에 은폐, 조작이 있

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갑 제10호증의 40의 기재에 따르면, 1984, 4. 4. 현장에서 발견된 총기와 탄피에 대한 감정을 육군

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한 사실, 1984. 4. 9. 중대본부 요원 등 관련자 소지 총기 7개에 대하여 추가로 감정을 의뢰하였는데,

헌병대 수사관들이 작성한 감정용 증거품 송부증에는 증거품 취득일자가 1984. 4. 2. 13:00경으로 기재되어 있고, 망인의 총

번(BW)이 수기로 수정되어 있으며, 관련자 총기 감정에 관한 공문에도 T의 성명과 총번(BX), V의 총번(BY)이 수기로 수정되

어 있는 사실은 인정되나, 이러한 점이 단순한 오기에 기한 것인지 또는 헌병대가 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조작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21) 가사 원고들이 2차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통해 가해자를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때로부터 3년이 지나기 전에 이 사건 소

가 제기되었으므로 결론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