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위증][집30(4)형,173;공1983.3.15.(700)448]
가. 일본육군성 소유농지가 분배대상이 될 수 있는지 여부(적극)
나. 토지의 소재지 관서(영등포구청)가 아닌 농가 소재지 관서 (시흥군 동면) 작성의 상환대장이 토지의 농지분배에 관한 사항의 추정자료가 될 수 있는지 여부(적극)
다. 유죄를 인정하기 위한 증거의 증명력의 정도
라. 위증죄 소정의 허위진술의 고의가 없다고 한 사례
가. 해방 전에 일본 육군성이 군용지로 사용하고자 매수하여 그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친 농경지는 귀속농지로서 특단의 사정이 없는한 농지개혁법에 의한 분배대상이 될 수 있다.
나. 농지개혁법시행령 제32조 에 의하면, 농지소재지 구청장, 시장 또는 읍·면 장은 각 농별 분배농지일람표를 작성하여 농가소재지의 시·읍·면에서 이를 종람하게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시흥군 동면 거주자가 경작하는 영등포구 구로동 농지에 대하여는 농지소재지 관서인 영등포구청에서 작성한 분배농지일람표를 농가소재지 관서인 시흥군 동면에 송부하여 이를 종람하게 함으로써 분배농지로 확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분배농지로 확정된 토지에 대하여 시흥군 동면이 작성한 상환대장은 구로동 농지의 농지분배에 관한 추정자료가 될 수 있다.
다. 피고인을 유죄로 단죄하기 위한 증거의 증명력은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확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단지 반대증거보다 우월한 정도의 증명력으로서는 부족하다.
라. 위증죄로 공소제기된 피고인이 농지개혁법이 실지로 시행된 것이 1950.3.25 이후 임에도 불구하고 6·25사변 전 해에 농지분배되었다고 진술한 부분은 그 진술의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때 계쟁토지가 6·25 사변 전에 일반농지와 함께 농지분배절차에 의하여 분배된 사실을 증언하고자 한 취지이고 분배년도가 1949년도인 점에 증언의 목적이 아님이 분명하여 그 분배년도를 착각한 것으로 보여지므로 이 점을 들어 허위진술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 귀속재산처리법 제2조 나. 농지개혁법시행령 제32조 다. 형사소송법 제323조 , 형사소송법 제275조의 2 라. 형법 제152조 , 형사소송법 제308조
피고인 1 외 3인
검사(피고인 1에 대하여) 및 피고인 2, 3, 4
변호사 박승서, 용남진, 김윤행
원심판결중 피고인 2, 3, 4에 대한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 사건을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부에 환송한다.
피고인 1에 대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
1. 피고인 4, 변호인 변호사 용남진의 상고이유 제1 내지 5점을 함께 판단한다 (변호사 김윤행의 보충상고이유서는 상고이유서 제출기간 경과후에 제출된 것이므로 위 상고이유를 보충하는 한도내에서 판단한다).
(1) 1심 판결에서 인정된 피고인 4의 범죄사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피고인 4는 망 공소외 1과 공모하여 1964.3.31 변호사 용남진을 소송대리인으로 하여 나라를 상대로 서울민사지방법원에 군용지인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 314 답 3,458평중 652평 외 5필지(1심 판결첨부 제5목록기재 토지, 이하 이 사건 토지라 한다)를 농지개혁법의 시행에 따라 분배받아 상환을 완료하였다는 허위의 사실을 원인으로 하여 그 소유권이전등기절차 이행청구의 소를 제기한 다음, 변론과정에서 위 법원에 상환대장 등의 검증신청을 하여 망 공소외 1의 허위신고로 마치 위 토지들을 망 공소외 1이 분배받은 것처럼 허위기재가 된 폐기된 상환대장 등을 검증토록 한 끝에 그 정을 모르는 법원으로 하여금 분배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위 상환대장 등을 진정한 문서인 것처럼 오신케 하여 위 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선고받아 1968.4.16 위 판결이 확정됨으로써 240,000,000원(6,952평)상당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는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심은 1심이 증거조사를 거쳐 채택한 증거들을 기록과 대조하여 보면, 그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 4가 농지개혁법시행 당초부터 이 사건 토지가 농지분배에서 제외되어 분배되지 아니한 정을 알면서도 1심 판시와 같이 이를 편취할 범의아래 위 민사소송에 이르렀다고 인정하기에는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1심이 위 증거들만으로 그 판시 범죄의 성립을 위한 주관적 요건의 존재를 인정하였음은 위법하다고 판단하여 1심 판결을 일단 파기한 다음, 1심이 조사채택한 증거들에다가 환송후 원심에서 증거조사를 거친 제8차, 제11차 및 제14차 공판조서중 피고인 4의 일부 진술기재, 증인 노유복에 대한 증인신문조서의 각 기재, 75형 제40272호 사건의 기록검증조서 기재, 68형 제15100호 사건기록중 68압 제2209호의 증 제1, 2호에 대한 검증조서기재, 서울지방검찰청 주사 임병돈작성의 상환대장 사본 4매의 기재 및 검사의 피의자 망 공소외 1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의 진술기재 등을 모두어 보면, 이 사건 토지를 포함한 구로동 일대의 군용지는 분배된 일이 없는데 6·25사변시 농지관계 제반서류가 소실되어 수복후 영등포구청에서 군용지실태를 조사할 때에 피고인의 망부 망 공소외 1을 비롯한 그곳 주민들이 각각 분배받은 것처럼 허위신고를 하여 그 신고에 따라 농지분배가 된 것처럼 농지소표 및 상환대장이 작성된 사실이 인정되므로 결국 피고인 4에 대한 이 사건 범죄사실은 이를 인정하기에 넉넉하다하여 1심 판시와 같이 피고인 4를 유죄로 단정하였다.
(2) 그러나, 원심 확정사실과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토지는 8.15 해방전에 일본 육군성이 군용지로 사용코자 매수하여 그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친 토지로서 농지개혁법 시행당시 망 공소외 1이 경작하던 농경지인 사실이 인정되므로 위 토지는 귀속농지로서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농지개혁법에 의한 분배대상이 될 수 있는 토지였다고 할 것인바 ( 당원 1968.4.16. 선고 66다901 판결 참조), 기록에 의하면 농지개혁법 시행당시 위 토지소재지인 구로동은 영등포구청 관할이고 농가소재지인 망 공소외 1의 주소지도 구로동이어서 위 토지가 분배되었다면 그 분배농지확정과 상환등 분배사무는 영등포구청 소관이었을 터인데 6·25사변으로 영등포구청 비치의 농지분배관계 서류가 모두 소실되어 그 분배여부를 알 수 있는 6·25사변 전의 분배관계 문서는 영등포구청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이 사건 토지의 분배여부 및 6·25사변후 작성된 이 사건 토지에 대한 농지소표와 상환대장의 진정여부 등은 주로 농지개혁법 시행당시 분배사무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의 증언이나 참고진술과 6·25사변 후에 작성된 문서 등에 의존하여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인바, 원심이 유죄인정의 증거로 한 것들을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 피고인이 유죄라고 단정할만한 증거가 없거나 또는 증거에 관한 심리가 덜 되었다고 보여진다.
(가) 먼저 원심이 인용한 1심 채용의 각 증거를 보건대, 공소외 조중인, 지동엽, 유지소, 이재륜, 송천석, 한동각, 이천환등 6·25사변전 농지개혁법 시행당시 영등포구청이나 시흥군 동면 또는 서면에 재직하거나 농지관리사무에 관여하였던 자들의 1심 법정증인 또는 검찰진술에 보면 6·25사변 전에 영등포구 구로동 및 시흥군 소재 군용지에 대하여는 분배절차를 취한 기억이 없다거나 또는 취한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음이 인정되며, 특히 공소외 지동엽의 1심 법정증언과 검사의 동인에 대한 진술조서 기재에 보면 모든 군용지는 농지분배에서 제외키로 하였고, 6·25후 수복하여 군용지 관리업무를 귀속 농지관리국으로부터 국방부로 이관하였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고 있다(기록 538정 이하, 68형 제25251호, 수사기록 1905, 1997정).
그러나 원심이 인용한 증거중 6·25사변 전에 영등포구청 산업계장 또는 동계 농지분배사무 주무자로서 직접 이 사건 토지소재지인 구로동의 농지분배사무를 담당하였던 실무자들인 공소외 김용훈, 한태현에 대한 검사의 진술조서를 보면, 앞의 사람들과는 상반되는 내용의 진술을 하고 있는바, 이중 김용훈은 군용지도 분배된 것으로 기억된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고(68형 제25251호, 수사기록 2330, 2331정), 위 한태현도 군용지라고 특별취급을 함이 없이분배한 것으로 기억되고 영등포구청에서는 6·25사변 전에 농가별 일람표의 종람을 마쳤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음이 인정된다(위 수사기록 2350 내지 2353정).
또 위 지동엽의 진술처럼 군용지 전부가 분배에서 제외되고 수복후 관리업무가 정식으로 국방부에 이관이 되었다면 어찌하여 그 후인 1953년(단기 4286년)5월 및 7월경에 서울특별시장이 농림부장관 및 서울지구 계엄민사부장에게 발송한 " 군용지관리에 관한 건" (1심 민사기록 검증조서, 기록 2036정 이하)에서 구로동소재 군용지는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이미 분배를 완료하고 상환도중이라고 보고할 수 있었고 또 이와 같은 보고가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밖에 6·25사변으로 소실된 영등포구청 구로동 관계농지소표 및 상환대장 등의 재작성업무를 담당하였던 이한우는 1심 법정이나 검찰에서 구로동 군용지는 분배되지 아니하였는데도 경작자들이 분배받은 것처럼 허위신고 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농지소표의 상환대장 등을 작성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경작자들의 신고가 허위라는 것은 검찰조사시에 비로소 알았다고 하고 또 군용지가 분배되지 않았다는 것은 6·25전에 농지사무를 담당한 김용훈, 한태현으로부터 들어서 알았다는 것이며 특히 망 공소외 1의 상환대장 등은 동인이 작성치 아니하여 그 정당여부를 모른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는바(기록 2728정 이하, 68형 제25251호 수사기록 2074정 이하, 70형 제51095호 수사기록 1015정 이하), 동인이 전해들었다는 김용훈과 한태현이 위 이한우의 진술과는 상반된 내용의 진술을 하고 있음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나) 이와 같이 1심에서 조사 채택한 증인들의 증언 또는 참고인들의 진술기재가 서로 엇갈려 그 어느쪽을 진실한 내용이라고 선뜻 판가름 하기 어렵고, 그밖의 1심 채택의 증거들을 살펴 보아도 이 사건 토지가 분배대상에서 제외되고 망 공소외 1 명의로 작성 비치된바 있는 농지소표 및 상환대장 등이 허위작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4가 이를 알면서 이 사건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이 점에서 원심이 1심 채용의 증거만으로는 피고인 4를 유죄로 단정하기에 미흡하다고 판단한 부분은 정당한 설시라고 할 것이다.
(다) 그러므로 나아가 환송후 원심이 조사하여 추가한 증거들을 살펴보건대, 우선 증인 노유복의 증언에 보면 분배당시 작성된 시흥군 동면비치 농지분배문서에 구로동 소재 농지중 일반농지는 분배받아 상환완료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군용지는 한 필지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군용지는 분배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시흥군 동면(가리봉리 및 독산리)거주자들 중에서도 영등포구 구로동 소재 군용지를 경작하던 사람이 많이 있었음이 명백한 바, 이 사건 압수물중 상환대장(68형 제25251호 증 제82호, 제83호 및 제85호)을 보면 시흥군 동면 거주자들의 상환대장에 등재된 분배토지중 영등포구 구로동 소재 농지도 포함되어 있음이 인정되므로, 만일 위 노유복의 진술과 같이 위 상환대장이 6·25사변 전에 작성 기재된 것으로서 여기에 등재된 위 구로동 소재 농지가 군용지 아닌 일반농지이며 군용지는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위 상환대장이 비록 농지소재지 관서인 영등포구청 소관 문서는 아닐지라도 구로동 소재 군용지가 분배대상에서 전반적으로 제외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농지개혁법시행령 제32조 에 의하여 농지소재지 구청장, 시장 또는 읍·면장은 농지소표에 의한 대지조사를 기초로 각 농가별 분배농지일람표를 작성하여 농가소재지의 시, 읍, 면에서 이를 종람케 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시흥군 동면 거주자가 경작하는 구로동 농지에 대하여는 농지소재지 관서인 영등포구청에서 농지소표에 의한 대지조사를 거쳐 작성한 분배농지일람표를 농가소재지 관서인 시흥군 동면에 송부하여 이를 종람케 함으로써 분배농지로 확정하게 되는 것인데, 이와 같이 분배농지로 확정된 토지에 대하여 작성한 상환대장에 유독 군용지만이 빠져 있다면 이는 바로 영등포구청 소관 농지중 군용지는 당초부터 전반적으로 분배대상에서 제외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 시흥군 동면의 상환대장이 6·25사변 전에 작성기재된 것인지의 여부에 관하여, 동면 면장이었던 공소외 유지소는 1968년경 검찰조사시에는 6·25사변 전에 분배농지의 종람등 분배절차가 종료되었는지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였다가 1970년경 검찰조사시와 1심 법정에서는 압수된 상환대장이 6·25사변 전에 작성된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고(68형 제25251호 수사기록 1930정, 70형 제51095호 수사기록 2475정 및 기록 473정), 동면 농무계 주임이던 공소외 송천석도 검찰 및 1심 법정에서 동면은 6·25사변 전에 분배절차를 종료하고 분배농지대장과 상환대장을 작성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다(70형 제51095호 수사기록 1366정, 2464정 및 기록 479정)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시흥군 동면 거주자의 구로동 소재농지에 대한 종람등 분배농지 확정절차는 농지소재지 관서인 영등포구청에서 당해 농지에 대한 농가별 분배농지일람표 등을 농가소재지 관서인 시흥군 동면에 송부하지 않는 한 시행할 수 없는 것인데, 당시 영등포구 구로동 소재 농지분배사무의 직접 담당자였던 공소외 한태현은 검찰에서 관외 거주자에 대한 농지소표등 서류를 농가소재지 관서에 송부하지 아니하였으며 군용지라 하여 특별취급한 일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고(68형 제21521호 수사기록 2353정), 시흥군 동면 부면장이던 공소외 이재륜도 동면은 분배사무를 보다가 6·25사변으로 중단되어 종람을 마친 기억이 없고 영등포구청에서 농지소표 등을 송부받은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으며(68형 제25251호 수사기록 2145정), 경기도 농지과에 근무하던 공소외 김익수도 경기도 관내에서는 농가별 분배농지일람표에 의한 종람을 하기 전에 6·25사변이 나서 수복후 일람표를 재작성하여 분배사무를 보았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고(68형 제25251호 수사기록 2158정), 또 압수된 위 상환대장을 보면 동일인 필적으로 작성된 대장에 (양)이라는 도장이 압날되어 있는 것이 많은데 1심 증인 김학규는 위 필적과 도장은 6·25사변 후에 근무한 양선모의 필적과 도장이라고 진술하고 있다(기록 2897정).
위와 같은 각 진술에 비추어 보면 위 동면 비치 상환대장이 모두 6·25사변 전에 작성기재된 것이라는 위 유지소나 송천석의 진술과 환송후 원심증인 노유복의 증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므로, 결국 위 동면 비치 상환대장이 6·25사변 전에 작성된 것으로서 거기에 등재된 구로동 소재 농지에 관한 기재부분도 6·25사변 전에 등재된 것이라는 보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위 상환대장은 이 사건 구로동 군용지의 분배여부를 판가름할 만한 증거는 못된다고 할 것이다.
(라) 또 환송후 원심이 조사 채택한 증거중 검사의 망 공소외 1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보면 망 공소외 1은 6·25사변 후 구청당국에서 이 사건 농지에 대하여 상환양곡을 납부하면 분배하여 준다고 하여 상환양곡을 납부함으로써 분배받은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는바, 위 진술이 이 사건 토지에 대하여 6·25사변 전에 분배농지 확정절차가 없었다는 사실을 자백한 취지라고 까지 보기는 어렵고 다만 6·25사변 후 상환절차를 이행함으로써 분배농지의 소유권을 취득하였다는 의미로 새겨지므로 위와 같은 진술조서 기재만으로는 망 공소외 1의 분배사실을 부인할 만한 확증이 되지 못한다.
그밖에 환송후 원심이 조사 채택한 증거들을 살펴보더라도 대부분이 환송전 원심 당시까지 이미 제출되었거나 이미 제출된 증거에 관한 설명 또는 검사의 판단내용을 기재한 것이고 그밖의 것도 이 사건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확증이 될 만한 것이 없다.
(3) 무릇 피고인을 유죄로 단죄하기 위한 증거의 증명력은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확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단지 반대증거 보다 우월한 정도의 증명력으로서는 부족한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심에서 조사 채택한 증거와 환송후 추가된 증거들을 통틀어 살펴보아도 이것들만으로는 이 사건 토지가 분배대상에서 제외되고 망 공소외 1 명의의 농지소표 및 상환대장 등이 전혀 허위로 작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4가 이를 알면서 이 사건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한 자료가 되지 못한다고 하겠으니, 피고인 4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그 범죄의 증명이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달리 해석한 원심의 조치는 도저히 유지될 수 없다. 원심으로서는 위에서 지적한 증거관계를 좀더 심리하여 범죄의 증명유무를 판단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심의 민사사건 기록검증결과중 피고인이 진정하게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환대장(기록 1959정, 1960정)에 등재된 망 공소외 1의 분배농지(군용지)는 구로동 334 답2,300평, 같은동 327 답1,659평, 같은동 314의 2 답 652평, 같은동 323전 1,163평, 같은동 325의 1 전 1,117평, 같은동 336의 6 전62평, 같은동 337의 5 전 128평 및 같은동 337의 13 전 30평으로서 일부 분할된 지번으로 기재되어 있는 반면, 6·25사변 후 재작성된 농지관계서류를 근거로 작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1953.12.13자 영등포구청장의 서울특별시장에 대한 " 군용지에 대한 농지분배 상황조사의 건" (기록 2040정 이하)에 보면 망 공소외 1이 분배받은 군용지는 구로동 334 답 1,800평 같은동 327 답1,659평, 같은동 314 답790평, 같은동 323 전1,163평, 같은동 325 전1,198평으로서 위 상환대장과 지번 및 지적이 일부 상이하게 기재되어 있으며, 환송후 원심의 68형 제15100호 기록검증결과(기록 4491, 4492정)에 보면 피고인이 진정한 문서라고 주장하는 위 상환대장(상환증서번호 57호)외에 망 공소외 1 명의의 또 다른 상환대장(상환증서번호 47호)이 있고 오히려 이 후자의 상환대장상 분배군용지 표시가 위 " 군용지에 대한 농지분배 상황조사의 건" 에 기재된 토지표시와 일치함을 알 수 있는바, 어떠한 연유로 망 공소외 1 명의의 상환대장이 위와 같이 두가지나 작성되었는지 그 경위가 분명치 아니하고 또 영등포구청에 일시 비치되었던 상환대장이 위 피고인 주장과 같이 상환증서번호 57호의 상환대장(기록 1959, 1960정) 이라면 어찌하여 당시 비치문서를 근거로 작성되었을 위 " 군용지에 대한 농지분배 상황조사의 건" 에 게기된 망 공소외 1의 분배농지 표시가 위 상환대장 표시와 일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환송후 현출된 상환대장 표시와 일치하는지 의문이므로, 이런 점 등에 관하여 좀더 심리함으로써 망 공소외 1 명의의 위 각 상환대장의 진정여부를 밝혀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국 원심판결중 피고인 4에 관한 부분은 적법한 증거없이 사실을 인정하고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위법이 있으므로 파기를 면치 못한다고 할 것이다.
2. 피고인 2, 3 변호인의 상고이유 제1, 2점을 함께 판단한다.
(1) 기록에 의하면, 당원이 피고인 2 및 3의 위증죄에 관한 환송전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한 취지는 위 피고인들에게 원심판시 증언내용이 허위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관한 심리를 전혀 한바 없이 유죄로 인정하였음은 심리미진 및 채증법칙 위반이 아니면 사기죄와 위증죄의 주관적 요건에 관한 법리오해를 범한 것이라고 함에 있다.
그런데 환송후 원심은 환송취지에 맞추어 환송전 판결 당시까지 현출된 증거들 만으로서는 원심판시 농지들이 농지개혁법의 시행 당초부터 농지분배에서 제외되어 농지분배되지 아니한 정을 알면서도 그 판시와 같은 내용의 위증을 하였다고 단정하기에는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위 증거들 만으로 그 판시 범죄성립을 위한 주관적 요건의 존재를 인정하였음은 위법하다고 판단하여 1심 판결을 파기한 다음, 위 각 증거에다가 환송후 원심의 제11차 공판조서중 위 피고인들의 각 진술기재, 증인 노유복에 대한 증인신문조서중의 각 증인기재, 환송후 원심기록에 매어진 서울지방검찰청 주사 임병돈 작성의 시흥군 서면 박달리 등에 관한 " 군용지 농지분배에 관한 건 및 국유 군용지 추곡상환에 관한 건(각 시흥군수 작성명의)" 사본 중의 각 기재, 75형 제42702호 사건의 기록검증 조서기재 및 68형 제15100호 기록검증조서의 기재 등을 종합하면 결국 이 사건 공소사실이 넉넉히 인정된다고 판단하여 다시 피고인들에 대한 위증죄의 성립을 인정하고 있다.
(2) 그러나 환송후 원심이 추가한 증거내용을 살펴보건대, 우선 증인 노유복에 대한 증인신문조서기재는 주로 구로동 소재 군용지에 관한 것이며 위 피고인들의 위증부분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 그 진술로는 피고인들에게 허위진술의 인식이 있었다고 인정할만한 자료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서, 이 점은 환송후 원심의 75형 제42702호 사건 기록검증조서에 첨부된 위 노유복에 대한 진술조서를 보면 동인이 위 피고인들이 관련된 안양 박달리 소재군용지에 대한 소송관계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한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음에 비추어도 분명하고, 다음에 기록에 매어진 시흥군 서면 박달리 등에 관한 " 군용지에 대한 농지분배에 관한 건" 및 " 국유군용지에 대한 추곡상환에 관한 건" (기록 4231정 및 4237정)은 원심판결이 인용한 1심 채용증거중 압수된 기능명칭 분배농지 1책(68형 제25251호 증 제56호)과 같은 농지 1책(68형 제25251호 증 제90호)에 각각 편철되어 있는 문서들로서 새로운 증거가 아니라 이미 환송전에 현출된 증거들이며, 또 환송후 원심의 75형 제42702호 사건 기록검증조서에 첨부된 검사의 노유복에 대한 진술조서는 구로동 농지에 관한 것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 피고인들이 관련된 안양 박달리 군용지에 대한 소송관계는 모른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고, 또 불기소장은 대부분 환송전에 이미 현출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검사의 판단내용을 기재한 것으로서 새로운 사실인정의 자료라고 보기 어려우며, 그밖에 환송후 원심의 68형 제15100호 사건 기록검증조서는 피고인 4의 구로동 농지에 관한 내용으로서 위 피고인들과는 관련이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환송후 원심 제11차 공판조서에 보면 피고인 2는 농지개혁법이 실지로 시행된 것이 농지개혁법시행령의 공포시행일인 1950.3.25이후 임에도 불구하고 당해 민사법정에서 6 .25사변 전해(1949년)에 농지분배 되었다고 진술한 부분에 대하여 허위진술임을 시인한 듯한 취지의 기재가 있는바, 위 피고인이 위증죄로 공소제기된 이 사건 증언내용을 보면 " 농지분배당시 본건 토지도 일반농지와 같이 농지분배절차에 의하여 6·25사변 전해에 농지분배된 사실을 안다" 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음이 인정되기는 하나(기록 4159정, 4164정), 그 진술의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위 진술은 계쟁토지가 6·25사변 전에 일반농지와 함께 농지분배절차에 의하여 분배된 사실을 증언하고자 한 취지이고 분배연도가 6·25사변 전해인 1949년도인 점에 증언의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님이 분명하여 6·25사변 전해에 분배되었다고 한 부분은 그 분배연도를 착각한 것으로 보여지니 이 점을 들어 허위진술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밖에 환송후 원심 제11차 공판조서의 위 피고인들 진술기재중 위 피고인들의 범죄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3) 결국 원심은 환송전의 1심 채택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들의 허위진술에 관한 주관적 요건을 인정하기에 미흡하다고 하여 그 증명력을 배척하고 나서 범죄의 증명이 될 만한 별다른 새로운 자료도 없는 환송후 조사증거를 여기에 추가하여 허위진술에 관한 주관적 요건이 인정된다고 판단하고 있으니, 이는 증거가치의 판단을 그르치거나 증거판단에 관한 이유모순의 위법이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원심판결중 위 피고인들에 대한 부분도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3. 피고인 1에 대한 검사의 상고이유를 본다.
원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원심은 피고인 이소상 명의로 제기된 민사소송은 환송전 원심 공동피고인인 1, 2 등이 임의로 변호사에게 위임하여 제기한 것으로서 피고인이 제기하거나 원심공동피고인 1 등과 공모하여 제기하였다고 볼 수 없으며 그밖에 달리 이 사건 공소범죄의 성립을 위한 주관적 요건을 인정하기에 족한 증거가 없다 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는 바,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위와 같은 원심판단에 수긍이 가고 소론과 같이 채증법칙을 위반한 위법이 있다고 볼 수 없으니 논지는 이유없다.
4. 그러므로 원심판결중 피고인 2, 3, 4에 관한 부분을 파기하여 이 부분 사건을 다시 심리케 하고자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부로 환송하며 피고인 1에 대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기로 하여 관여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