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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등법원 2004. 5. 7. 선고 2001나15255 판결

[손해배상(기)][미간행]

원고(선정당사자), 피항소인 겸 부대항소인

원고 1외 5인(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우리들 담당변호사 박준석)

피고, 항소인 겸 부대피항소인

대한민국

변론종결

2004. 3. 26.

주문

1. 제1심 판결 중 원고(선정당사자)들에 대한 부분을 취소한다.

2. 원고(선정당사자)들의 청구(당심에서 확장된 청구를 포함)를 모두 기각한다.

3. 소송비용은 제1, 2심 모두 원고(선정당사자)들의 부담으로 한다.

청구취지 및 항소취지

1.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선정당사자, 이하 원고라 한다)들을 포함한 선정자들에게 별지 상속관계 및 청구금액 목록 중 각 청구금액란 기재에 해당하는 돈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부대항소 겸 청구취지확장신청서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5%의 비율에 의한 돈을 각 지급하라(원고들은 당심에 이르러 부대항소로써 청구취지를 확장하였다).

2. 항소취지

주문과 같다.

이유

1. 인정사실

다음 각 사실은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제1, 2, 3, 7 내지 12, 15, 17, 19, 22, 25, 28호증, 갑 제4호증의 1 내지 25, 갑 제5, 23호증의 각 1 내지 4, 갑 제6, 16, 18, 21, 24호증의 각 1, 2, 갑 제13호증의 1 내지 21, 갑 제14호증의 1 내지 28, 갑 제20호증의 1 내지 11, 을 제2호증의 9, 10, 11의 각 기재 및 영상, 제1심 증인 소외 2, 3, 4의 각 증언, 원고 1, 3 및 선정자 2, 32에 대한 각 본인신문결과, 제1심 법원의 현장검증결과에 변론의 전취지를 종합하면 이를 인정할 수 있다.

가.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의 발생

(1)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의 낙동강 도강작전 중에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어 인민군의 북상이 차단되자 그 패잔병들은 지리산 등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지방 빨치산세력(남해여단)과 합세하여 지리산 주변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후방교란작전을 시작하였다. 이에 피고는 1950. 12. 공비소탕작전을 전담할 육군 제11사단을 창설하여 사단사령부를 전남 남원에 두고, 그 예하부대로 전북 전주에 13연대, 전남 광주에 20연대, 경남 진주에 9연대를 배치하였으며, 9연대는 예하부대로 경남 함양군에 1대대, 경남 하동군에 2대대, 경남 거창군에 3대대를 배치하여 공비토벌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2) 육군 제11사단장 소외 5 준장은 공비토벌작전의 기본방침으로 ‘견벽청야(견벽청야)’라는 작전개념을 내세웠는데, 그 내용은 '반드시 확보하여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히 확보하고, 부득이 포기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하고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앰으로써 적이 발 붙일 수 없는 빈 들판만 남겨준다'는 것이었다.

(3) 한편, 1950. 12. 5. 공비들이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신원면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거창경찰서는 경찰병력으로 그 수복을 시도하였으나 계속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다.

1951. 2. 초순경 9연대장 소외 6 중령은 함양, 거창, 산청 등 지리산 남부에 출몰하는 공비 소탕을 위하여 연대합동작전을 결정하였는데, 그 작전 내용은 각 대대가 그 담당 지역에 있는 공비를 소탕하면서 산청 방면으로 진격하여 지리산 남부에서 합동작전을 편다는 내용이었다(그 작전을 위하여 신원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주민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4) 위 작전 개시에 앞서 연대장 소외 6 중령은 각 대대장을 불러 사단사령부에서 내려온 공비토벌작전의 기본방침인 ‘견벽청야’라는 작전개념과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시달하였고, 특히 3대대장 소외 7 소령에게 거창군 신원면에서 공비들의 지서습격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일대를 공비오염지구로 보아 공비를 철저히 토벌할 것을 지시하였다.

(5) 이에, 3대대장 소외 7은 1951. 2. 7. 3대대 병력을 이끌고 거창농업학교를 출발하여 신원면에 진입하였으나 공비를 발견하지 못하여 경찰과 청년의용대만을 남겨둔 채 연대합동작전을 위하여 산청방면으로 행군하였다.

그 다음날 9연대장 소외 6은 3대대를 찾아와 공비들이 신원면에 남겨둔 경찰과 청년의용대를 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3대대장 소외 7을 호되게 질책하였고, 이에 소외 7은 3대대 병력을 이끌고 다시 신원면으로 돌아가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6) 소외 7 소령이 이끄는 3대대는,

① 1951. 2. 9. 새벽 신원면에 들어가 거창읍으로 행군하던 중,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78세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 80여 명을 눈이 쌓인 마을 앞 논으로 강제로 끌어낸 다음 군용무기로 무차별 사살하였고(그 현장에서 선정자 80만 어머니의 시체 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② 그 뒤 거창읍으로 빠져나가 날이 저물자 재차 신원면으로 진입하여 내동마을과 오례마을에 주둔하던 중, 다음날인 1951. 2. 10. 신원면 소재지로 이동하여 과정리,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에 병력을 투입하여 전 민가에 방화하고, 대현리, 와룡리 주민들을 소개시킨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전 주민을 면 소재지로 집결시키던 중 날이 저물자 대열을 이루며 끌려가는 주민 중 노약자 20여 명을 강변도로에서 사살하고, 뒤에서 끌려가는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들 100여 명을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 계곡에 몰아넣고 역시 군용무기로 무차별 사살한 후 그 시체들 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기름을 뿌려 불을 질렀으며,

③ 1951. 2. 10. 오후 과정리, 중유리 전 주민과 대현리, 와룡리의 주민 등 합계 1,000여 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강제로 수용한 다음, 다음날인 1951. 2. 11. 주민들을 분류하여 군인가족,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청년당원가족은 귀가시키고, 남은 540여 명의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서 700m 가량 떨어진 박산 골짜기로 몰아넣은 후 그 중 12명을 주위에 대기시키고는 기관총과 개인총기로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하고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지른 뒤(그 현장에서 소외 8만이 큰 바위 밑을 결사적으로 파고 들어가 살아 남았다), 대기시킨 12명으로 하여금 희생자들이 모두 사망하였는지 확인하게 하고는 그 중 11명은 사살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소외 9가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자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위협한 뒤 그대로 철수하였다(이하 위 3곳의 민간인학살사건을 합하여 거창사건이라 한다).

(7) 1960. 5. 23.경 국회 진상조사단이 확인한 거창사건의 희생자는 1951. 2. 9. 청연골에서 희생된 84명, 1951. 2. 10. 탄량골에서 희생된 100명, 1951. 2. 11. 박산골에서 희생된 517명, 기타 지역에서 희생된 18명으로 모두 719명이었고, 연령별로는 10세 미만이 313명, 11세 내지 50세가 340명, 60세 이상이 66명이었으며, 성별로는 남자가 327명, 여자가 392명이었다.

나. 거창사건 은폐 시도와 국회조사단의 활동 및 관련자 처벌

(1) 거창사건 발생 후 경남지구계엄사령부 등은 원고들을 포함한 사건 현장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사건 현장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으나, 그 주변지역으로 거창사건에 대한 소문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그 무렵 원고 3 등이 헌병사령부에 제보를 하여 헌병대가 그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2) 그런데, 당시 국방장관이던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와중에 국군의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는 등의 이유로 거창사건을 적극 은폐할 것을 지시하였다.

(3) 그러나, 거창사건은 결국 외부로 전파되었고, 거창 출신 국회의원 소외 10이 1951. 3. 29.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사건을 폭로하여 급기야 1951. 3. 30. 국회가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와 합동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4) 국회조사단이 1951. 4. 7.에 거창사건 현장을 답사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거창사건을 은폐하고자 국회조사단이 내려오기 4 내지 5일 전쯤에 3대대장 소외 7로 하여금 부하장병 100여 명을 출동시켜 사건현장의 출입을 막고, 박산골 희생자 시체 가운데 윗부분에 있던 어린이들의 시체를 대충 가려내어 그 곳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홍동골로 옮겨 암매장하도록 지시하였다.

또, 경남지구계엄사령부 민사부장 소외 1 대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모의하여 사전에 학살현장을 은폐하고, 9연대 정보참모 소외 11 소령이 인솔하는 수색소대로 하여금 공비로 위장하여 신원면으로 통하는 수영더미 고개에 매복한 뒤 국회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조사를 저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국회조사단은 1951. 4. 7. 거창사건 현장으로 가기 위하여 위 수영더미 고개를 지나다가 공비로 위장한 위 수색소대로부터 일제 사격을 받고는 사건현장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5) 위와 같은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건 진상 은폐 기도에 따라, 1951. 4. 24. 이승만 대통령은 거창사건의 희생자는 187명으로서 모두 공비들과 통모하여 이들을 도와준 자들이고, 신원초등학교에 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하여 이들을 재판한 결과 187명 모두가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한 다음, 대대 정보장교로 하여금 신원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박산골에서 개별적으로 총살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 그 뒤 신성모 국방장관이 해임되고, 1951. 5. 14. 국회에서 거창사건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관련자를 처벌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거창사건에 대한 수사가 재개되었다.

1951. 7. 27.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거창사건 관련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1951. 12. 15. 군검찰관은 살인죄 등을 적용하여 9연대장 소외 6 대령에게 사형, 3대대장 소외 7 소령에게 사형, 정보장교 소외 12 소위에게 징역 10년, 경남지구계엄사령부 민사부장 소외 1 대령에게 징역 7년을 각 구형하였는데, 위 중앙고등군법회의는 1951. 12. 16. 소외 6에게 무기징역, 소외 7에게 징역 10년, 소외 1에게 징역 3년을 각 선고하였다{총살형을 집행하였다는 소외 12 소위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고, 소외 6 등은 국회조사단의 방문 무렵에 거창사건 당시의 연대 작전명령서 중 문제된 부분(작명 제5호 부록)을 임의로 수정하였다는 혐의로도 기소되었으나, 범의가 없거나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단순히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다. 유족들의 희생자 명예회복 등을 위한 노력

(1) 거창사건 희생자들의 시신은 3년 넘게 현장에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일부 국회의원과 유족들이 1954. 음력 3. 3. 사건현장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모았으나 그 신원을 알 수 없어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구분하여 화장을 하고, 박산골에 남자 합동묘, 여자 합동묘, 어린이 합동묘를 만들어 매장하였다.

(2) 1960. 5.경 국회조사단이 약 1개월간 거창사건을 현지 조사하였고, 1960. 11. 18.에는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박산 합동묘소 위령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3) 그런데, 이른바 5·16 군사혁명정부는 1961. 5. 18.경 원고 1 등 유족대표들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 등으로 구속하고, 1962. 6. 15.경 위 묘소의 위령비문에 국군을 모독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비문을 정으로 지워 땅에 파묻어 버리도록 하는 한편, 경남도지사 명의로 유족들에 대하여 희생자별로 개인묘를 쓰도록 개장명령을 하고, 합동분묘의 봉분을 파헤쳤다(1967년경 합동분묘가 다시 복구되었다).

(4)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거창사건의 유족이라는 이유로 공무원 등에 임용되지도 못하고, 또 거창사건을 언급하는 것조차 못하도록 감시를 받았는데, 1980년 이후에 와서야 유족들은 합동묘소 위령비 원상회복 및 거창사건 희생자 명예회복과 배상을 1982. 6. 1. 전두환 대통령에게, 1988. 1. 24. 노태우 대통령에게 반복하여 진정·호소하였으나, 국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유족들은 1988. 2. 15. ‘거창양민학살 희생자 위령 추진위원회 발족 및 궐기대회’를 열고 박산 합동묘소까지 가두행진을 하면서 전 국민에게 명예회복 및 손해배상에 관한 호소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1988. 11. 7.부터 3일간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 300여 명이 국회의사당, 통일민주당사, 평화민주당사 앞에서 각기 시위를 계속하여 각 당 대표들로부터 특별법 제정에 대한 약속을 받는 등 활동을 계속한 결과, 1989. 10. 17. 거창사건관련자의명예회복및배상에관한특별조치법안이 국회의원 162명에 의하여 발의되었으나 1992. 5. 29. 제13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되고, 그 뒤 유족대표 등이 수차례에 걸쳐 국회의원들을 면담하고 시위·청원 등을 함에 따라, 1995. 12. 18.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이하 거창사건특별법이라 한다)이 제정되었고, 거창사건특별법 및 그 시행령에 의하여 설치된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원회라 한다)에서 희생자 유족등록신청을 받아 이를 심의한 결과 1998. 2. 17. 거창사건으로 548명이 사망하였고, 그 유족은 785명이라고 결정하였다.

(5) 거창사건특별법은, 심의위원회로 하여금 사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에 관한 사항과 묘지단장, 위령제례 및 위령탑 건립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도록 하고( 제3조 ), 유족의 합동묘역관리사업이 추진되는 경우에 정부가 그 비용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제8조 )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고, 희생자나 유족들에 대한 보상은 규정하고 있지 않다.

(6) 피고는 거창사건특별법 제8조 에 따라 거창사건 합동묘역조성사업에 총 예산 174억 5,600만 원을 책정하여 1999년부터 재정지원을 하였고, 위 합동묘역조성사업은 피고의 재정지원 하에 2003. 6.경 완공되었다.

(7) 2000. 12. 1. 거창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하여 보상금 등을 지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거창사건특별법개정법률안(이하 개정법률안이라 한다)이 국회의원 31인에 의해 제안되어 2004. 3. 2.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으나, 같은 달 3. 25.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전쟁 중에 일어난 민간인 희생의 보상에 대해 아직 사회적 공감대가 폭 넓게 형성되지 않았고, 거창사건에 대한 보상이 향후 국가재정에 커다란 부담으로 적용할 것이 예상된다는 점 등을 이유로 위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라. 원고들 및 선정자들의 지위

원고들 및 선정자들(이하 합하여 원고들이라 한다)은 거창사건의 희생자들 중 별지 상속관계 및 청구금액 목록 중 각 ‘희생자(피상속인)’란에 기재된 희생자와 사이에 같은 목록 중 ‘희생자와의 관계’란에 기재된 것과 같은 친족관계에 있다.

2. 거창사건 자체로 인한 위자료 청구에 관한 판단

가. 당사자들의 주장

원고들은, 피고 예하의 국군에 의하여 자행된 거창사건으로 인하여 희생자들이 사망함으로써 희생자들 및 그 유족인 원고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피고는 원고들에게 희생자 1인당 각 5천만 원의 위자료 중 우선 2,500만 원에 대하여 상속지분에 따른 돈과 희생자 1인당 원고들 자신의 고유 위자료 각 3천만 원 중 우선 1,500만 원을 합한 돈을 각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함에 대하여, 피고는 거창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들 및 그 유족인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시효기간의 도과로 인하여 소멸하였다고 다툰다.

나. 판단

(1) 앞서 본 바와 같이 거창사건은 1951. 2. 9.부터 같은 달 11.까지 사이에 발생하였고, 그 학살 책임자 소외 7 등에 대한 형사판결이 1951. 12. 16. 선고되어, 원고들은 적어도 위 판결 선고 당시에는 거창사건으로 인한 손해 및 그 가해자를 알았다고 할 것이므로, 거창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위 판결 선고시로부터 3년이 경과한 1954. 12. 16.경 시효로 소멸하였다고 할 것이고( 의용민법 제724조 전문),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거창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5년이 경과한 1956. 2. 11.경 시효소멸되었다고 할 것인데( 1961. 12. 19. 법률 제849호로 폐지되기 전의 재정법 제58조 ), 이 사건 소가 2001. 2. 17.에 제기된 사실은 기록상 명백하므로, 피고의 시효소멸 주장은 이유 있다.

(2)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① 거창사건은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 공권력이 주권자인 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조직적인 생명 박탈, 인권유린행위로서 국내법 체계가 예상하지 못한 헌법 파괴적 상황이고, 앞서 본 유족들의 희생자 명예회복 등을 위한 계속된 노력으로 겨우 탄생한 거창사건특별법에 희생자나 그 유족에 대한 보상 규정은 들어있지 아니하였고, 그 후 보상 규정이 삽입된 개정법률안은 정부의 거부권행사로 발효되지 못하게 되는 등 거창사건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고려하면, 국가권력의 정상적인 법 운영 형태에서만 적용 가능한 소멸시효제도는 이 사건에서는 그 적용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위 주장 사실만으로 거창사건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하여 소멸시효제도가 배제된다고 할 수는 없다.

② 피고가 헌법상 정해진 절차에 따라 가입하여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7조 전문(어느 누구도 고문 또는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에 따라, 피고는 민간인학살사건의 희생자 및 그 유족에게 배상할 의무가 있고, 그러한 배상의무에는 소멸시효제도의 적용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살피건대, 위 규약에서 인정되는 권리 또는 자유를 침해당한 개인이라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등의 청구를 할 경우에는 국가배상법이나 민법 등 국내법에 근거하여 청구할 수 있을 뿐, 위 규약에 의하여 별도로 개인이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 등을 청구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가 창설된 것은 아니므로( 대법원 1999. 3. 26. 선고 96다55877 판결 참조), 그 소멸시효제도도 국내법에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위 규약상 민간인학살행위에 대하여 소멸시효제도의 적용을 배제한다는 명시적인 규정도 없으므로, 위 주장은 이유 없다.

③ 심의위원회에서 원고들을 희생자 유족으로 확정한 1998. 2. 17.까지는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이를 받아 들일 근거가 없다.

④ 공권력에 의한 불법행위를 자행한 국가인 피고가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의무를 이행하지도 않으면서 그 피해자나 유족의 손해배상청구에 대하여 시효소멸의 항변을 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되어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나, 국가가 거창사건에 관하여 입법조치 등을 통하여 적절한 피해배상을 해 줄 정치·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는 없다.

3. 거창사건 이후의 유족들 고유의 위자료 청구에 관한 판단

가. 원고들은, 그들이 거창사건과 관련한 권리회복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당국으로부터 유형·무형의 억압을 받아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므로, 피고는 원고들에게 이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앞서 본 바와 같이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원고들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등을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원고 1 등 유족대표들이 반국가단체조직 혐의 등으로 무고하게 구속되기도 하고, 군사혁명정부에 의하여 합동분묘의 봉분이 파헤쳐지기도 하였으며, 거창사건의 유족이라는 이유로 공무원 등에 임용되지도 못하는 등의 피해를 입은 사실이 있으므로 그로 인하여 정신적인 고통을 입었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나, 그로부터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인 5년( 예산회계법 제96조 제2항 )이 경과하였음이 역수상 명백한 2001. 2. 17. 이 사건 소가 제기되었으므로 위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소멸하였다고 할 것이고, 또 이 사건 소의 제기시로부터 소멸시효기간인 5년 이내에 원고들에 대한 피고의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다는 점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입증이 없으므로, 위 주장은 더 나아가 살필 필요 없이 이유 없다.

나. 원고들은 또, 피고가 지금까지 거창사건의 진상을 공식적으로 규명하지 아니하고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아니하였으며, 나아가 거창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손해배상에 관한 국가의 보호조치 등을 소홀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창사건특별법에 희생자나 유족들에 대한 손해배상규정을 두지 아니하여 손해배상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으로써 현재까지 국가에 의한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불법행위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법령에 명시적으로 공무원의 작위의무가 규정되어 있는데도 이를 위반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에 대하여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하는 것을 본래적 사명으로 하는 국가가 초법규적, 일차적으로 그 위험 배제에 나서지 아니하면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할 수 없는 경우에는 형식적 의미의 법령에 근거가 없더라도 국가나 관련 공무원에 대하여 그러한 위험을 배제할 작위의무를 인정하고 이를 위반하였다고 하여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가 있을 것이나, 그와 같은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가 아닌 한, 원칙적으로 국가나 공무원이 관련 법령대로만 직무를 수행하였다면 그와 같은 국가나 공무원의 부작위를 가지고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에 위반'하였다고 하여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할 것인데, 거창사건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거창사건의 진상을 공식적으로 규명하거나, 거창사건의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는 등의 보호조치를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형식적 의미의 법령이 존재하지 아니하였음은 명백하고, 또 국가가 그와 같은 보호조치를 소홀히 하였다고 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에 대하여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국가가 초법규적, 일차적으로 그 위험 배제에 나서지 아니하면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며, 나아가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가 다소 늦었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여 거창사건특별법까지 제정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국가가 희생자 유족들에 대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은 보호조치 등을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책임을 부담케 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또한 헌법에서 기본권보장을 위하여 법령에 명시적인 입법위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이거나, 헌법해석상 특정인에게 구체적인 기본권이 생겨 이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행위의무 내지 보호의무가 발생하였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아무런 입법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경우에 한하여 국가에 입법의무가 생긴다고 할 것인데, 거창사건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불법행위인 점은 명백하나, 이에 대한 국가의 배상에 관해 헌법이 명시적인 위임입법을 한 바는 없고, 앞서 본 바와 같이 거창사건의 진상규명, 명예회복, 손해배상 등에 관한 국가의 보호의무 등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려워, 헌법해석상 거창사건의 희생자나 유족들에 대한 특별한 배상 등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입법의무가 발생한다고도 할 수 없으므로, 거창사건특별법에 희생자나 유족들에 대한 손해배상규정을 두지 아니하였다거나 따로 배상을 명하는 입법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국가에게 그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부담케 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들의 주장은 이유 없다.

다. 원고들은 다시, 거창사건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손해배상규정이 들어 있는 거창사건관련자의명예회복및배상에관한특별조치법안이 1989. 10. 17. 국회의원들에 의하여 발의되어 국회에 제출되었고, 이는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이 유족들에게 특별법을 통해 손해를 배상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므로 이로써 유족들은 약속이 이행될 것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사실상의 기대를 넘어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이익인데, 위 법안이 회기 내에 입법이 안됨으로써 폐기되고, 그 후 거창사건특별법이 제정되고 그에 따라 1998. 2. 17. 거창사건의 사망자와 유족이 확정되었으나, 거창사건특별법에는 희생자나 유족에 대한 배상규정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유족들은 국가의 배상약속에 따른 신뢰이익이 침해된 데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를 1998. 2. 17.부터 할 수 있고, 그로부터 3년이 경과하기 전에 이 사건 소가 제기되었으므로, 위 손해배상청구권은 아직 시효소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희생자나 유족에 대한 손해배상규정이 들어 있는 거창사건관련자의명예회복및배상에관한특별조치법안이 국회의원들에 의하여 발의되어 국회에 제출되었다는 사정만으로 국가가 유족들에게 손해를 배상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위 주장도 더 나아가 살필 필요 없이 이유 없다.

4.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없으므로 이를 모두 기각할 것인바, 제1심 판결은 이와 결론을 달리하여 부당하므로 피고의 항소를 받아들여 제1심 판결 중 원고들에 대한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별지 상속관계 및 청구금액 목록 생략]

판사 윤인태(재판장) 김규태 이정일

심급 사건
-창원지방법원진주지원 2001.10.26.선고 2001가합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