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보증금][공2014하,1837]
[1] 독립적 은행보증(first demand bank guarantee)의 의의와 특성
[2] 독립적 은행보증에서 보증인에 대한 수익자의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인정하기 위한 요건
[1] 은행이 보증을 하면서 보증금 지급조건과 일치하는 청구서 및 보증서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서류가 제시되는 경우에는 그 보증이 기초하고 있는 계약이나 이행제공의 조건과 상관없이 그에 의하여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즉시 수익자가 청구하는 보증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정하였다면, 이는 주채무에 대한 관계에서 부종성을 지니는 통상의 보증이 아니라, 주채무자인 보증의뢰인과 채권자인 수익자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독립되어 원인관계에 기한 사유로는 수익자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은행의 무조건적인 지급의무가 발생하게 되는 이른바 독립적 은행보증(first demand bank guarantee)이다. 이러한 독립적 은행보증의 보증인으로서는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보증의뢰인이 수익자에 대한 관계에서 채무불이행책임을 부담하게 되는지를 불문하고 보증서에 기재된 금액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이 점에서 독립적 은행보증에서는 수익자와 보증의뢰인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단절되는 추상성 및 무인성이 있다.
[2] 독립적 은행보증의 경우에도 신의성실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 원칙의 적용까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므로, 수익자가 실제로는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보증인에게 청구를 하는 것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할 때에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고, 이와 같은 경우에는 보증인으로서도 수익자의 청구에 따른 보증금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으나, 원인관계와 단절된 추상성 및 무인성이라는 독립적 은행보증의 본질적 특성을 고려하면, 수익자가 보증금을 청구할 당시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여 수익자의 형식적인 법적 지위의 남용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닌 한 권리남용을 쉽게 인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2] 대법원 1994. 12. 9. 선고 93다43873 판결 (공1995상, 437)
이스트 가스 시즈 인더스트리 컴퍼니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안세 담당변호사 이성환 외 3인)
주식회사 한국외환은행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한덕 담당변호사 안원모)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상고이유에 대하여 판단한다.
1. 은행이 보증을 함에 있어서, 보증금 지급조건과 일치하는 청구서 및 보증서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서류가 제시되는 경우에는 그 보증이 기초하고 있는 계약이나 그 이행제공의 조건과 상관없이 그에 의하여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즉시 수익자가 청구하는 보증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정하였다면, 이는 주채무에 대한 관계에서 부종성을 지니는 통상의 보증이 아니라, 주채무자인 보증의뢰인과 채권자인 수익자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독립되어 그 원인관계에 기한 사유로는 수익자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은행의 무조건적인 지급의무가 발생하게 되는 이른바 독립적 은행보증(first demand bank guarantee)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독립적 은행보증의 보증인으로서는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보증의뢰인이 수익자에 대한 관계에서 채무불이행책임을 부담하게 되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그 보증서에 기재된 금액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이 점에서 독립적 은행보증에서는 수익자와 보증의뢰인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단절되는 추상성 및 무인성이 있다.
다만 독립적 은행보증의 경우에도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적용까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므로, 수익자가 실제로는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보증인에게 청구를 하는 것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할 때에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은 경우에는 보증인으로서도 수익자의 청구에 따른 보증금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고 할 것이나 ( 대법원 1994. 12. 9. 선고 93다43873 판결 참조), 앞서 본 원인관계와 단절된 추상성 및 무인성이라는 독립적 은행보증의 본질적 특성을 고려하면, 수익자가 보증금을 청구할 당시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여 수익자의 형식적인 법적 지위의 남용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닌 한 권리남용을 쉽게 인정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2. 이 사건에 관한 원심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가. 먼저 원심은 그 채택 증거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였다.
(1) 이란에 소재하는 자동차부품 생산회사인 원고는 2007. 12. 31. 국내에 있는 주식회사 이엔케이(이하 ‘소외 회사’라 한다)로부터 자동차용 플레이트형 CNG(Compressed Natural Gas, 압축천연가스) 실린더(이하 ‘이 사건 실린더’라 한다) 5,000개를 1,075,000유로에 수입하는 계약(이하 ‘이 사건 수입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하였다.
(2) 피고는 2008. 3. 18. 소외 회사의 요청에 따라 수익자를 원고로 하여 이 사건 수입계약에 관한 이행보증서(이하 ‘이 사건 보증서’라 한다)를 발행하였는데, 위 보증서에는 ‘보증의뢰인인 소외 회사가 이 사건 수입계약을 불이행하였다고 원고가 판단하고 그 불이행 부분을 적시하여 서면으로 청구한 때에는 보증인인 피고가 조건 없이 107,500유로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원고가 청구하는 보증금을 지급하겠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건 보증서가 계약의 내용으로 원용하고 있는 국제상업회의소의 독립적 보증에 관한 통일규칙(Uniform Rules for Demand Guarantees, ICC Publication No. 458) 제2조에 따르면, ‘독립적 보증은 그 명칭이나 기재 내용에 관계없이 지급조건과 일치하는 지급청구서 및 보증서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서류가 제시되는 경우 보증은행 등이 금전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의 보증으로, 그 보증이 기초하고 있는 계약이나 이행제공의 조건과 아무 관련이 없고 그에 의하여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3) 이 사건 수입계약에 따라 소외 회사는 2008. 5. 원고에게 이 사건 실린더 1차 공급분 2,400개를 선적하여 발송하였다. 그런데 2008. 5. 4. 소외 회사가 이란의 다른 업체에게 공급한 파이프형 CNG 실린더가 폭발하는 사고(이하 ‘이 사건 사고’라 한다)가 발생하였다. 이에 소외 회사와 원고 사이에 2008. 6. 15. 소외 회사가 이 사건 실린더의 품질을 보장하고, 원고가 위 실린더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 그와 관련된 모든 비용을 소외 회사가 책임지기로 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4) 이란 국영업체인 가스 호드로 컴퍼니(Iran Gas Khodro Co., 이하 ‘IGKCO'라 한다)는 2008. 7. 27.경 위 사고의 원인이 규명될 때까지 소외 회사가 제작한 CNG 실린더의 수입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위 실린더가 관련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위 실린더의 이란 내 사용 및 판매를 금지한다는 취지의 공문을 발송하였다.
이에 원고는 2008. 11. 25. 피고에게, 이 사건 사고로 소외 회사가 제작한 실린더의 이란 내 사용·판매가 금지되어 손해를 입었다는 취지의 확인서를 제출하면서 이 사건 보증서에 기한 보증금(이하 ‘이 사건 보증금’이라 한다)의 지급을 청구하였다.
(5) 원고와 소외 회사는 2009. 5. 17.에 이르러 원고가 이미 공급받은 실린더 2,400개에 대한 원고의 손해액을 342,000유로로 정하고, 그중 142,000유로는 소외 회사가 원고의 청구를 받은 날부터 3일 이내에 지급하고, 나머지 200,000유로는 원고가 추가구매하기로 한 실린더 대금에서 공제하기로 합의하였다.
(6) 그 후 IGKCO는 2009. 8. 26. 플레이트형 실린더의 경우에는 제조자가 품질을 보증하면 이란에서 사용할 수 있음을 고지하였고, 원고는 2009. 9. 7.경 소외 회사로부터 수입한 플레이트형 실린더 2,400개를 사용하였으나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나. 원심은 위 사실관계를 토대로, 이 사건 보증은 보증의뢰인과 수익자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독립되어 그 원인관계에 기한 사유로는 수익자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보증인의 무조건적인 지급의무가 발생하게 되는 독립적 은행보증이나, 독립적 은행보증의 경우에도 수익자의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보증인이 수익자의 청구에 따른 보증금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사건 보증금청구 당시 원고는 ① 소외 회사로부터 수입한 플레이트형 실린더가 이 사건 사고와 무관하다는 점, ② 이란 내 수입·사용이 금지된 실린더는 파이프형 실린더에 한정되고 플레이트형 실린더는 재검사를 통하여 쉽게 이란 내 판매가 가능하다는 점, ③ 이러한 수입·사용금지는 소외 회사의 귀책사유와는 무관한 것이므로 소외 회사에게 이 사건 수입계약상 채무불이행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점, ④ 소외 회사가 원고에게 공급한 플레이트형 실린더 2,400개에 대한 원고의 손해와 관련하여 342,000유로를 지급하기로 합의한 것은 원고가 입은 손해를 342,000유로로 정하여 이를 소외 회사가 확정적으로 배상하겠다는 취지라기보다는 원고의 추가주문을 조건으로 원고에게 342,000유로를 지급하기로 하는 정지조건부 합의의 성질을 가진다는 점 등을 알고 있었으므로, 원고의 이 사건 청구는 원고가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독립적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한 청구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므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3. 그러나 원심의 위와 같은 판단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
가. 앞서 본 법리에 의하면, 독립적 은행보증에 기한 원고의 이 사건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소외 회사의 채무불이행이 인정되지 아니하여 원고의 소외 회사에 대한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원고가 소외 회사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잘 알면서 독립적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청구를 하는 것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한 경우이어야 할 것이다.
나. 그런데 원심이 인정한 사실관계와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 소외 회사가 이란에 수출한 CNG 실린더가 폭발하는 사고로 인하여 IGKCO는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소외 회사가 제작한 실린더의 이란 내 사용·판매를 일시 중지시켰던 점, ② IGKCO의 공문에서 사용·판매금지조치의 대상을 파이프형 실린더에 한정하고 있지 않은 점, ③ IGKCO가 2009. 8. 26. 플레이트형 실린더에 대하여는 소외 회사의 품질보증만으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통보함에 따라 원고는 2009. 9. 7.경에야 이 사건 실린더 2,400개를 사용한 점, ④ 원고가 실제로 이 사건 실린더를 사용한 결과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IGKCO의 사용 및 판매금지조치로 말미암아 원고가 이 사건 실린더를 사용하지 못한 이상 원고에게 그로 인한 손해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점, ⑤ 소외 회사 역시 이 사건 사고 이후 2008. 6. 15.과 2009. 5. 17. 두 차례에 걸쳐 원고와 피해보상에 관하여 합의한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원고가 피고에게 이 사건 보증금을 청구할 2008. 11. 25.경에는 소외 회사가 제작한 CNG 실린더에 대한 IGKCO의 사용·판매금지조치가 아직 해제되지 않은 상태였고, IGKCO가 소외 회사의 품질보증만으로 플레이트형 실린더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통보한 시점은 그 이후인 2009. 8. 26.이므로, 원심이 들고 있는 사정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원고가 소외 회사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잘 알면서 독립적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보증금을 청구하였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 그럼에도 원심은 그 판시와 같은 이유만으로 원고의 이 사건 청구가 독립적 은행보증의 추상성, 무인성을 악용하여 한 청구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므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으니, 이러한 원심의 판단에는 독립적 은행보증에서의 권리남용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할 것이다.
4. 그러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하기로 하여,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