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기)][미간행]
원고 1외 2인(소송대리인 1. 법무법인 창조 담당변호사 이덕우외 6인)
대한민국
2001. 12. 20.
1.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원고들의 부담으로 한다.
피고는 원고 1에게 금 400,000,000원, 원고 2에게 금 400,000,000원, 원고 3에게 금 200,000,000원 및 각 이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부본송달 다음날부터 완제일까지 연 25%의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는 판결.
1. 기초사실
다음 사실은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1호증 내지 3호증, 7호증의 1, 7, 13 내지 17, 19, 24, 25, 28, 30 내지 34, 46, 을 2호증의 1 내지 5, 3호증의 1, 4호증의 2, 3, 11호증의 1, 2, 19호증의 20, 21호증의 28, 42, 22호증의 20, 21, 24, 23호증의 22, 26, 24호증의 8, 22, 26호증의 37, 30호증의 1 내지 7의 각 기재와 갑 7호증의 18, 을 10호증, 24호증의 27의 각 영상 및 당원의 현장검증결과에 변론의 전취지를 종합하여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다.
가. 사체발견상황 및 수사결과
(1) 원고 1은 소외 망 김훈의 아버지, 원고 2는 김훈의 어머니이고, 원고 3은 김훈의 동생인바, 위 김훈은 유엔(UN)사령부 공동경비대대 경비중대 2소대장으로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내 241GP(Guard Post)에서 근무하던 중, 1998. 2. 24. 12:20경 같은 소속 일병 소외 1에 의하여 위 GP내 3번 지하진지(bunker)에서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이하 ‘이 사건 사고’라고 한다).
(2) 육군 제1군단 헌병대는 미군 범죄수사대(CID)와 합동으로 1998. 2. 24.부터 1998. 4. 29.까지 이 사건 사고에 대한 수사를 수행하였고(이하 ‘1차수사’라고 한다), 위 수사기록을 송부받은 육군본부 검찰부는 1998. 6. 1.부터 1998. 11. 29.까지 이를 재수사하였으며(이하 ‘2차수사’라고 한다), 이후 국방부장관의 지시로 설치된 특별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이라 한다)은 1998. 12. 9.부터 이를 전면 재조사하여(이하 ‘3차수사’라고 한다) 1999. 4. 14. 그 수사결과(이하 ‘합조단 수사결과’라고 한다)를 언론에 발표하였는바, 모두 김훈이 지급받은 권총을 이용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 현장상황
(1) 241GP는 판문점으로부터 북동쪽으로 1.5㎞, 대대본부로부터 서북쪽으로 5.2㎞가량 떨어진 군사분계선 남측지역 최전방에 설치되어 있고, 그 내부에는 ① 지상시설로서 중앙부에 소대장실, 식당 및 아랫막사·윗막사가 있고 그 북쪽으로는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9번·1번·3번 관측소(tower)가 설치되어 있으며 ② 지하시설로서 상황실(TOC)과 16개의 지하진지가 지하통로를 따라 연결되어 있다. 이 사건 사고 현장인 3번 지하진지는 반지하로 된 가로 2.56m, 세로 2.50m, 높이 2.40m(내부높이는 2.20m)의 정방형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지하통로를 따라 상황실로부터 72m, 소대장실로부터 50m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입구 부근에 지상 3번 관측소로 나가는 통로가 설치되어 있다(이상 별지 도면 1. 참조). 이 사건 사고 당시 위 241GP에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 없다.
(2) 3번 지하진지의 내부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남쪽에 설치된 입구로 들어서면 남서쪽 및 북서쪽 벽에 접하여 시멘트블럭으로 쌓아 만든 가로 171㎝, 세로 167㎝, 높이 102.5㎝의 기관총(CAL-50) 거치대가 있고, 그 위에 모래주머니(가로 50㎝, 세로 30㎝, 두께 10㎝)가 2~3단 깔려 있으며, 남서쪽 및 북서쪽 벽에는 폭 30㎝인 총안구(firing port)가 가로로 길게 설치되어 있다. ② 기관총거치대를 제외한 남동쪽 및 북동쪽 바닥은 각 88㎝ 내지 85㎝ 폭의 ㄱ자형 통로로서 바닥에 모래주머니가 1~3단으로 깔려 있고, 북동쪽 벽에는 폭 32㎝의 지상관측용 창문이 가로로 길게 설치되어 있으며, 북동쪽 벽을 따라 바닥에는 목재로 된 폭 46㎝, 높이 38㎝의 장방형 예비총열박스가, 예비총열박스 위 동쪽 구석에는 탄약통이 각 위치하고 있다. ③ 한편 북동쪽 창문 밑 벽과 서남쪽 벽에는 크레모아 스위치박스가 6개 또는 4개씩 일렬로 설치되어 있다(이상 별지 합조단 수사결과 도면 2-1~4 참조).
다. 근무현황
(1) 위 김훈은 1996. 3. 1.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1998. 1. 5. 판문점 공동경비대대 경비중대로 전입하였으며, 2주간 소대장 교육을 받은 후 1998. 1. 20. 제2소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위 2소대는 1998. 1. 21.부터 5일 간격으로 순차 외박, 판문점(BRF)근무, 241GP 근무, 훈련, 외박, 판문점근무를 거쳐 1998. 2. 20.부터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같은 달 24.까지 241GP에서 근무하였으며, 같은 날 16:00 이후 4소대에 241GP 근무를 인계하고 기동타격대(QRF)로 이동하여 근무할 예정이었다.
(2) 위 2소대는 총원 46명, 3개 분대로 구성되어 있는바, 평소 241GP에서의 근무는 일출·일몰시 각 45분간 소대원 전원이 벙커투입(stand to)근무를 하나 그밖에는 분대별로 GP외부 수색정찰과 주·야간 GP내부 경계근무를 수행하며, 주간경계근무의 경우 상황실에 2명, 1번 관측소에 3명이 각 배치되고 나머지 분대원은 교대를 위하여 대기한다. 이 사건 사고 당시에는 소대원 중 정기휴가자 등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36명만이 241GP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라. 사고 발생후의 정황
(1) 소외 1은 김훈의 사체를 발견한 직후 상병 소외 2를 만나 함께 사고 상황을 재확인한 후 즉시 식당으로 가서 부소대장 중사 소외 3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그러자 소외 3은 곧바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김훈의 사망을 확인하고 소대원들에게 현장 출입통제 및 GP 자체비상을 지시한 후, 기관총거치대 위에 놓여 있던 김훈의 무전기로 GP상황실 근무 소대원에게 위 상황을 지휘계통에 따라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2) 대대장 소령 소외 4는 12:40경 이 사건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소외 3으로부터 김훈이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어 중대장 대위 소외 45가 241GP에 도착하였고, 대대 군의관 대위 소외 6이 도착하여 김훈의 사망을 확인하였으며, 그 후 대대 정보하사 소외 7이 정보장교 소외 8과 함께 도착하여 12:55경 현장사진을 촬영하였다.
(3) 한편 연합사 작전참모부 소속 중령 소외 24는 12:40경 미측 상황장교 소외 46으로부터 JSA지역 내에서 피아구분이 안되는 귀순자로 추정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 같다는 상황을 접수하고 JSA 상황실에 확인한 결과 “총성이 났고 장교들이 모두 현장으로 출동한 상태이며 JSA는 자체비상발령 중”임을 알게 되었고, 그 후 다시 소외 46으로부터 이 사건 사고가 김훈의 자살인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통보를 받고 14:20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이를 보고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 사건 사고 상황이 언론에 알려져 당일 석간신문에서 김훈이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4) 미군 범죄수사대 봉일천파견대장 중사 소외 9 외 5명은 사고 당일 15:30경 현장에 도착한 후 출입을 통제하고 현장 상황을 촬영하는 한편 도면(이하 ‘맥레이놀즈McReynolds 도면’이라 한다)을 작성하였는데, 당시 현장 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김훈은 머리 양쪽 관자놀이에 총창을 입고 동쪽 구석에서 남동쪽 벽에 등을 기댄채 양 발을 기관총거치대 동쪽 모서리 부근에 모으고 주저앉아 있는 자세이다. ② 주요 혈흔은 기관총거치대 동쪽부분 모래주머니 위에 1개, 북동쪽 벽 창문 높이에 2개, 남동쪽 벽 앉은 키 높이에 4개가 튀어 있다. ③ 김훈 오른발 앞 모래주머니 위에는 권총(M9 beretta 반자동 피스톨, 이하 ‘사고 권총’이라 한다)이, 그보다 멀리 통로 북쪽에는 탄피가 떨어져 있고, 탄착점은 남서쪽 벽 5피트 6½인치(=168.9㎝) 높이에 있으며 그 아래에는 탄두파편 4개(기관총거치대 위에 2개, 바닥 모래주머니 위에 2개)가 떨어져 있다. ④ 기관총거치대 위에는 가죽장갑 1켤레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흰 종이로 구성된 수색정찰계획표(patrol package)가 몇 장 넘겨진 상태에서 위 장갑과 일부 겹쳐지도록 비스듬이 놓여 있으며, 김훈 오른쪽 예비총열박스 위에 전투모와 크레모아 스위치박스 덮개 1개가 떨어져 있었다.
(5) 김훈의 사체는 당일 18:20경 대대 의무실로 옮겨진 후 22:25경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고, 현장에 비산된 혈흔은 19:00경 4소대에 의하여 세척되었으며, 소외 4는 1998. 2. 25. 미 범죄수사대의 승인하에 3번 지하진지 내부를 페인트로 도색하였다.
마. 합조단 수사결과의 주요내용
(1) 위 수사결과 중 “타살로 볼 수 없는 이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이 사건 사고현장은 공간이 협소하여 2명이 동시에 자유롭게 운신하기 곤란하고, 김훈이 서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와 벽과의 공간 85㎝중 김훈의 어깨넓이 50㎝를 고려할 때 나머지 30~40㎝공간에서 권총을 발사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두정부와 천장 사이가 20㎝로서 둔기로 내려칠 공간이 없다. ② 격투·반항흔적이 없고, 혈흔의 위치로 보아 김훈 좌·우에 아무도 없었으며, 공격을 받았다면 들고있던 무전기로 방어했을 것이나 무전기는 기능손상이나 파손이 없고, 전투모에 화약흔·혈흔이 없으므로 제3자의 발사충격으로 벗겨진 것이 아니다. ③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이 없고, 내부인의 경우에도 소대원 전원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소대원과의 원한·갈등요소가 없었고, 우발적으로 살인이 일어날 만한 급박한 동기도 없으며, 북괴군 사주에 의한 살해가능성도 없다.
(2) 위 수사결과 중 “자살로 판단하는 이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유서는 없으나 자살동기가 충분하다. ② 김훈에게 지급된 총기·실탄이 사용되었고, 총구를 오른쪽 관자놀이에 대고 거의 수직으로 발사하여 정확하게 왼쪽 관자놀이를 관통시켜 단 1발로 사망한 것은 권총 자살자의 전형적인 특징으로서, 왼손으로 반항했다면 두부를 수직으로 관통하기 어렵다. ③ 추운 날씨임에도 전투모와 장갑을 벗어 놓은 것은 총기조작을 위한 것이며, 장갑·수색정찰계획표·전투모·무전기 등 유류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복장상태가 깨끗한 것은 모든 자살자의 공통된 현상이다.
(3) 위 수사결과의 “종합판단”은, “김 중위는 전방 소대장경험 부족에 따른 중대장의 잦은 질책, 변용관 상위 귀순 이후 극도로 긴장된 JSA지역의 근무여건 등 급변해진 부대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평소 내성적인 성격관계로 타 소대장 및 소대원들보다 업무면에서 뒤지는 무력감과 소외감을 해소하지 못한 채 고민해오다가, 사고 다음날로 예정된 업무보고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자살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미화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통하여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고 사고장소인 한적한 3번 지하진지로 이동하여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장갑, 수색정찰계획표, 모자 등을 가지런히 기관총거치대 위에 올려놓은 후, 자신의 지급 권총에 실탄 1발을 장전한 뒤 좌측 손으로 권총을 감싸쥔 채 총구를 우측 관자놀이에 대고 우측 손으로 격발, 단 1발의 두부관통총창을 입은 상태로 비틀거리다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자세로 사망한 것임”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2. 본안전 항변에 대한 판단
원고들이 이 사건 소로써 이 사건 사고 수사를 담당한 군수사기관이 진상을 은폐·조작하여 자살로 몰아갔을 뿐 아니라 수사관계자가 공공연히 위 김훈과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주장하며 피고를 상대로 그 손해배상을 구함에 대하여, 피고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기 위하여는 미리 해당 배상심의회의 결정을 거쳐야 함에도 원고들은 이를 거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사건 소는 부적법하다고 항변한다.
살피건대, 이 사건 소제기일인 1999. 12. 8. 시행되던 구 국가배상법(2000. 12. 29. 법률 제6310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과 달리 이 사건 변론종결일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현행 국가배상법 제9조 는 “이 법에 의한 손해배상의 소송은 배상심의회에 배상신청을 하지 아니하고도 이를 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이상, 원고들이 배상심의회의 결정을 미리 거치지 아니한 채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소송요건의 흠결은 이미 치유되었다할 것이어서 이 사건 소는 적법하므로, 피고의 위 항변은 이유없다.
3. 수사상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판단
가. 당사자들의 주장
원고들은 합조단 등 군수사기관이 이 사건 사고에 관한 수사 과정에서 이미 자살로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진상을 은폐·조작하거나 요식적인 수사를 하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므로 피고는 손해배상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군수사기관은 이 사건 사고의 사인을 가리기 위하여 장기간 다수의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여 유족들이 해명을 요구하는 사항들 모두에 대하여 성실히 수사하여 온 이상 손해배상책임은 성립하지 아니하며, 불법행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구체적인 행위자가 특정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다툰다.
나. 배상책임 성립의 판단기준
일반적으로 수사는 범죄의 혐의 유무를 명백히 하여 공소제기와 유지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범인을 발견·확보하고 증거를 수집·보전하는 수사기관의 활동으로서, 국가로부터 공형벌권 행사의 기초가 되는 수사권 및 공소권을 독점적으로 위임받고 있는 수사기관으로서는 수사를 함에 있어 모든 국민의 법 앞에서의 평등권, 형사피해자의 재판절차에서의 진술권, 범죄피해국민의 구조청구권 등을 보장한 헌법정신에 저해되지 아니하고 공정한 수사권행사에 관한 국민적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사기관은 당해 사건에 있어서 수사를 개시하기에 족한 범죄의 혐의가 있는지의 여부를 성실히 판단하여야 하고 나아가 혐의가 인정되어 수사를 개시한 경우에는 법령의 규정을 준수하는 한편 수사비례의 원칙에 따라 필요하고 상당한 범위 내에서 관련된 제반 증거를 수집한 후 그에 대한 증거가치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실체적 진실을 구명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할 것인바, 국가가 이러한 의무를 고의로 저버리거나 게을리한 경우에는 위법성을 띠게 되어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하고, 한편 이처럼 위법성이 인정될 경우에는 그 수사가 다수인으로 구성된 국가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련의 절차임에 비추어 이에 관여한 개개의 행위자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아니하더라도 국가배상책임은 성립한다.
다만 수사기관이 위와 같은 직무상 의무를 게을리하였다는 이유로 배상책임의 성립을 인정하기 위하여는, 수사를 담당하는 요원들도 인간으로서 능력의 한계가 있는 이상 실체적 진실을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는 없다는 점, 당해 사건에만 인력과 장비를 무제한 소모할 수 없는 여건상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 수사관할권 내지 수사대상지역의 특수성 등에 비추어 수사방법상의 제한요소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증거가치의 평가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판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견해가 나뉠 수 있는 작용이라는 점, 수사기관의 활동 내지 판단이 일반의 여론 등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그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양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준사법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점 등에 비추어볼 때, 당해 수사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일반인 누구에게도 명백히 비상식적인 것이었다고 인정될 정도의 하자가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그 위법성을 인정할 수 있다할 것이다.
다. 은폐·조작 여부
먼저 이 사건 사고에 관한 군수사기관의 수사가 고의로 진상을 은폐·조작한 것인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1) 자살동기 조작주장
원고들은 합조단 수사결과에서 김훈이 이 사건 사고 당일 6:10경 소대장실 앞 난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임으로서 자살의 징후를 보였다거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발표한 부분은 사실과 다르게 진상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먼저 갑 3호증, 4호증, 을 31호증의 32의 각 기재 및 당원의 현장검증결과에 변론의 전취지를 종합하면 일병 소외 11이 3차수사 과정에서 이 사건 사고 당일 6:10경 김훈이 소대장실과 식당 사이의 철제난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을 2~3m 거리에서 목격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이에 따라 합조단은 수사결과 9.의 다. ‘김중위 사망전 특이행동’ 중 (1)항 ‘소대원에게 비춰진 김중위의 모습’에서 이러한 진술내용을 그대로 기재하였으나 이 사건 사고 당일 문산지역의 일출시간은 7:11이고 위 철제난간 부근에 별다른 조명시설이 없는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는바, 위와 같은 이 사건 사고 당일의 일출시간 및 조명상태에 비추어 소외 11의 위 진술은 신빙성이 부족하다할 것이나 소외 11이 위와 같이 진술한 것이 사실인 이상 합조단이 이를 ‘소대원에게 비춰진 김중위의 모습’으로 발표한 것을 가리켜 조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갑 4호증, 을 5호증의 6, 7의 각 기재에 의하면 1차수사 당시 상병 소외 14는 김훈이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하기 2일 전에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관하여 인간에 대한 섬세미가 넘친다고 평가하였다고 진술하였고 소외 2는 김훈이 평소 위 하루키의 작품을 추천하였다고 진술하였으며 합조단은 이를 토대로 수사결과에서 김훈이 자살을 미화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이 사건 사고 당일 김훈의 책상 위에는 일본 작가 나리와카 도요히코의 수필 ‘아침을 여는 3분 성공체크’가 놓여져 있었던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다.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김훈이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는 합조단의 판단은 다소 무리한 추측이라 할 것이나, 한편 갑 7호증의 86, 을 1호증, 5호증의 1 내지 3, 14호증, 19호증의 54, 22호증의 13, 23호증의 3, 26호증의 21 내지 29, 45의 각 기재에 의하면 합조단은 육군사관학교 훈육지도부 및 소대원들의 진술에 기초하여 김훈이 평소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평가하고, 김훈의 JSA소대장 선발경위와 관련하여 관련자들의 진술과 당시 선발기록을 근거로 김훈이 육군사관학교 동기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꼈을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중대장 대위 소외 45, 부중대장 중위 소외 47 등의 진술을 토대로 위 김훈이 평소 업무미숙으로 잦은 질책을 받음으로써 무력감을 느꼈던 점을 확인한 후, 이러한 점들이 자살의 주요 동기로 추정된다는 취지로 발표하는 과정에서 위 ‘노르웨이의 숲’을 자살의 계기로 언급하게 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는바,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보면 결국 합조단이 위 ‘노르웨이의 숲’과 관련하여 다소 무리한 추측을 하였다는 점만으로는 김훈의 자살동기를 조작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할 것이어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없다.
(2) 발사자세 등 조작주장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의 경우 사입구에 매연이 다량 부착되어 있고 탄도가 후상방이 아니며 권총을 발사하였다는 김훈의 오른손 대신 왼손바닥에 화약흔이 존재하는 등 자살자의 자세로 보기에 부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합조단 수사결과는 발사자세를 조작하여 자살로 결론지었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갑 7호증의 29, 35, 41, 62, 7호증의 43, 44, 8호증의 1, 2, 을 1호증, 25호증의 27, 26호증의 38, 39의 각 기재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 후 부검을 담당한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 법의감식관 소외 16은 사인을 접사에 의한 두부관통총창사로 판단하였고 미국방성 병리학연구소 법의관 스펜서(Jerry D. Spencer) 역시 접사에 의한 자살로 판단하였으며 이에 따라 1차수사는 김훈이 왼손으로 사고 권총을 감싸쥐고 밀착접사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사실, 그 후 미국 뉴욕주 법의관인 노여수는 ① 자살의 경우 총상의 기전은 통상 접사(접사, contact shot)인데 김훈의 경우 사입구 표피에 다량의 매연이 부착되어 있고 창강내 매연축적이 불분명하므로 접사가 아닌 근접사(근접사, near contact shot)로 보아야 한다는 점, ② 권총자살자의 경우 탄도는 대체로 후상방을 향하게 되는데 김훈의 경우 탄도가 거의 수평이라는 점, ③ 김훈의 경우 오른손에서는 화약흔이 발견되지 아니하고 왼손바닥에서만 화약흔이 발견되었으므로 이는 방어흔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④ 김훈의 두정부에 나타난 혈종은 둔기에 의한 타격의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타살의 소견을 피력한 사실, 합조단은 1998. 1. 15. 위 노여수, 소외 16 및 대한법의학회장 문국진,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수 이윤성, 고려대학교 법의학교수 황적준, 뉴욕시립대학교 법의학교수 노용면 등이 참석한 가운데 법의학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위 토론회에서 노여수를 제외한 나머지 법의학자들은 ① 김훈의 사입구가 파열상인 점 등에 비추어 총상의 기전은 접사이며 단발두부총창사로서 접사인 경우 대부분 자살이라는 점, ② 탄도는 머리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탄환이 두부를 수직으로 관통한 경우 자살로 보아야 한다는 점, ③ 피스톨을 발사한 손에서 화약이 발견되는 비율은 통계상 27% 내지 33%에 불과하고 왼손바닥의 화약흔은 뇌관잔재물로서 먼 거리에서 방어자세를 취한 경우에는 나타날 수 없으며 김훈의 경우 왼손바닥에 화상흔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으므로 결국 왼손으로 사고 권총을 잡고 오른손으로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④ 두부총창의 경우 두피하출혈이 자주 일어나는데 김훈의 경우 전두부에도 출혈이 있었고 두정부에는 총창으로 인한 골절선이 이어져 있으며 모상건막하 출혈일 경우 출혈부위가 넓게 퍼질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위 노여수와 달리 자살소견을 각기 피력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다.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합조단 수사결과는 이 사건 사고에 있어서 발사자세와 관련된 법의학적 문제점들 모두에 대하여 위 법의학토론회의 다수견해를 따른 것이라 하겠는데, 이 사건 사고의 경우 사입구 표면에 매연이 다량 부착되어 있는 점, 사고 권총의 크기와 김훈의 복장상태에 비추어 자살일 경우 탄도가 후상방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사고 권총의 경우 발사한 손에서 화약이 발견되는 빈도가 높다는 점, 왼손에 혈흔이 없고 화상흔의 존재 여부가 불분명한 점, 두정부 외표에 대한 사진촬영 여부가 불분명한 점 등 그와 같은 결론을 채택함에 있어서 의문의 소지가 없지는 않으나, 이처럼 합조단이 국내 권총사고 사례가 드문 현실에서 국내외 문헌과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아니한 가운데 법의학토론회를 개최하여 그 다수견해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기초로 발사자세를 추정한 이상 적어도 이를 가리켜 발사자세를 조작한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할 것이어서, 원고들의 위 주장도 이유없다.
(3) 사고현장 조작주장
원고들은, ① 당초 사고 현장에 김훈의 두정부를 타격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철모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 후 사라졌고, ② 현장 바닥의 모래주머니는 최초 1단이었는데 두정부를 타격할 공간이 부족함을 뒷받침할 목적에서 2~3단으로 변형되었으며, ③ 1차·2차수사는 권총과 사체와의 거리가 50㎝라고 결론지었는데 그 후 노여수가 자살자의 93%는 권총이 사체로부터 1피트 이내의 거리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하자 합조단 수사결과는 위 거리를 27㎝로 번복하였는바, 이러한 점들은 모두 사고현장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 먼저 철모의 경우, 을 7호증의 5 내지 7, 11호증의 1, 2, 21호증의 62, 22호증의 25의 각 기재(다만, 을 22호증의 25 중 뒤에서 믿지 않는 부분 제외) 및 을 10호증의 영상에 의하면 소외 7이 1998. 2. 24. 12:55경 이 사건 사고 현장을 최초로 촬영한 사진들 중 일부에서 위 김훈의 우측 발 앞에 미군용 철모(kevlar 타입) 1개가 뒤집힌 채 놓여 있는 장면이 나타나 있으나 같은 날 15:30 이후 미군 수사관들에 의하여 촬영된 사진과 비디오에는 위 철모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 소외 7의 사체주변 사진촬영 전에 대대군의관 소외 6이 자신의 철모를 벗어 김훈의 오른편에 놓고 김훈의 사체를 검안한 후 그대로 3번 지하진지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위 철모를 찾아온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이에 반하는 을 22호증의 25의 일부 기재 및 소외 17, 18의 각 증언은 믿지 아니하며 을 12호증의 기재는 위 인정에 방해가 되지 아니하고 달리 반증이 없는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최초 소외 7 사진에 촬영된 철모는 소외 6이 사체 검안을 위하여 벗어놓은 철모를 다시 찾아 나오기까지 사이에 사체 주변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것에 불과하다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소외 6이 철모를 벗어놓고 사체를 검안하였다면 그 위치상 철모를 깔고 앉아 검안을 하였다는 것이 되어 부자연스럽다고 주장하나, 철모는 둥근 형상이고 뒤집혀 있었음에 비추어 검안 후 위치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원고들은 위 철모가 낡았고 턱끈을 위로 묶었음에 비추어 한국군 하사관 내지 고참병의 것이고 위 철모의 밴드가 상단 ⅓지점까지 올라가 있음에 비추어 김훈의 두정부를 내려치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주장하나, 갑 4호증의 기재 및 소외 17, 18의 각 증언만으로는 위와 같은 주장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을 31호증의 14의 영상에 의하면 밴드의 위치는 사진의 촬영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으므로, 결국 위 철모와 관련하여 수사기관이 현장을 조작하였다는 원고들의 주장은 이유없다.
(나) 다음 권총과 사체와의 거리의 경우, 갑 3호증, 7호증의 2, 19, 을 3호증의 2, 4호증의 1, 18호증의 87, 21호증의 30, 61, 24호증의 28의 각 기재 및 갑 7호증의 18, 을 10호증, 24호증의 28의 각 영상에 의하면 맥레이놀즈 도면상 사고 권총의 위치는 기관총 거치대의 모서리를 기준으로 총구까지 17¾인치(=45.085㎝), 공이치기로부터 19¼인치(=48.895㎝)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소외 9는 같은 날 사고 권총이 김훈의 오른발로부터 19인치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고한 사실, 한국군 수사관은 미군측의 출입통제로 인하여 사고 당일 17:20경에야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10분간 약식으로 현장조사를 마쳤는데 당시 이미 권총 등 유류품이 수거되어 있어 이를 다시 현장에 위치시키고 사진을 촬영한 후 미군 수사관이 알려준 거리를 ㎝로 환산하여 도면을 작성하였으며 그 결과 작성된 한국군 수사관 작성 현장세부모양도 및 인지보고서는 김훈의 오른발과 권총 사이의 거리를 50㎝로 표시하고 있는 사실, 합조단은 1999. 4. 2.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현장사진을 통한 김훈과 사고 권총 사이의 거리판독을 의뢰하였으나 촬영 위치나 각도에 비추어 당시 촬영된 현장사진 2장만으로는 정확한 거리를 판독하기 곤란하다는 취지로 감정된 사실, 그 후 합조단은 맥레이놀즈 도면상 기관총거치대와 총구까지의 거리가 45.085㎝인데 소외 7 촬영사진상 김훈의 오른발 전투화가 거치대 모서리에서 ⅔이상 전진되어 있으므로 그 길이 18㎝를 뺀 27.085㎝가 김훈과 권총사이의 거리라고 판단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다.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한국군 수사관들은 현장을 실측하지 못한 채 도면을 작성하였다는 것이고 현장사진은 촬영 위치나 각도에 따라 실제 거리를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비록 소외 7이 김훈의 오른발과 권총과의 거리를 19인치로 보고하기는 하였으나 맥레이놀즈만이 현장 상황을 실측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가장 신빙성있는 자료는 맥레이놀즈 도면이라 할 것인바, 위 도면의 기재형상에 의하면 권총의 위치는 위쪽으로 2방향, 아래쪽으로 2방향 등 모두 4가지 방향에서 측정되었는데 위쪽 2방향은 기관총거치대의 북쪽 모서리를 기준으로 하였고, 아래쪽 2방향의 거리측정선이 기관총 거치대 동쪽 모서리를 향하고 있는데다 그 화살표 표시선 중 일부가 김훈의 발을 묘사한 선과 교차하고 있으며, 탄피의 위치 역시 벙커나 기관총거치대 모서리 등 고정된 지점을 기준으로 측정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결국 위 도면상 총구와의 거리 17¼인치(=45.085㎝)는 김훈의 오른발이 아닌 기관총거치대 모서리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고, 나아가 앞서 든 증거에 의하면 김훈의 오른발이 기관총거치대 모서리로부터 상당부분 나아가 있음은 비교적 명백하게 인정되는 이상 합조단이 위 45.085㎝에서 전투화 길이 28㎝ 중 일부를 차감하는 방식으로 권총과 오른발 사이의 거리를 추정하는 것은 합리성있는 판단이라 할 것이고, 따라서 이 부분 합조단 수사결과가 조작이라는 원고들의 주장 역시 이유없다.
(다) 또한 바닥 모래주머니의 경우, 갑 7호증의 18, 13호증의 1, 2의 각 영상 및 변론의 전취지에 의하면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사건 사고 당시 현장 바닥의 모래주머니는 입구부분 1단, 기관총거치대 인접부분 3단, 나머지 2단인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나아가 원고들이 최초 현장 바닥 모래주머니가 1단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갑 7호증의 19 중 맥레이놀즈 도면은 기관총거치대 위 모래주머니를 2단으로 표시하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갑 7호증의 18, 을 24호증의 28의 각 영상 및 변론의 전취지에 의하면 거치대 위 모래주머니는 대부분 3단인 사실이 인정되는바 이에 비추어 보더라도 위 도면 중 모래주머니 층수 부분은 신빙성이 없다할 것이어서, 합조단이 현장 모래주머니의 층수를 조작하였다는 원고들의 주장도 이유없다.
(4) 기타 주장
(가)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 권총이 김훈에게 지급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합조단이 이를 김훈에게 지급된 권총이라고 발표한 것은 사실의 은폐이거나 조작이라고 주장하므로 살피건대, 갑 7호증의 60, 64 내지 68, 80, 93, 을 19호증의 8, 29호증의 15의 각 기재(다만 갑 7호증의 60 중 뒤에서 배척하는 부분 제외)에 의하면 사고 권총의 일련번호는 1140865(총기관리번호 204)로서 이는 일병 소외 19의 권총이고, 김훈이 원래 지급받은 권총(일련번호 1140862, 총기관리번호 201)은 1998. 2. 20.경 수리를 위하여 무기고(arms room)에 반납되어 있었던 사실, 241GP 근무시에는 소대장·부소대장 및 운전병 2명 등 4명만이 권총을 소지하면 족하므로 김훈은 1998. 2. 20. 241GP 근무를 시작할 당시 무기고에서 부소대장과 운전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소대원들 중 가장 일련번호가 빠른 소외 19의 권총을 지급받은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는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사고 권총은 이 사건 사고 당시 김훈이 지급받아 소지하고 있던 권총임이 인정된다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갑 7호증의 60 중 1998. 2. 11.자 병기수불일지(deadline paper)의 기재에 비추어 김훈의 권총은 241GP 근무 이전에 이미 수리가 완료되어 김훈에게 지급되었다고 주장하나, 앞서 인정한 사실에 의하면 김훈의 권총은 김훈이 241GP 근무를 시작하던 1998. 2. 20.에도 수리 중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 이후 이 사건 사고일인 1998. 2. 24.까지 사이에 김훈이 위와 같이 대신 지급받아 소지하고 있던 소외 19의 권총을 반납하였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으므로, 결국 원고들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 원고들은 이 사건 사고 당시 소대원들 중 아무도 총성을 청취하지 못하였다는 합조단 수사결과는 진상을 은폐·조작한 것이라고도 주장하므로 살피건대 갑 7호증의 22, 25, 33의 각 기재에 소외 17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 사건 사고 직후 인근 1사단 상황일지 및 연합사 보고문서에서 총성이 청취되었다고 기재하고 있는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으나, 반면 갑 7호증의 63, 을 23호증의 14, 26호증의 28, 29의 각 기재에 변론의 전취지를 종합하면 이 사건 사고 당시 총성을 청취하였다고 진술한 소대원은 없는 사실, 1차수사 및 3차수사에서의 총성시험 결과 사고 당시 소대원이 있었던 1번 관측소와 식당에서 청취되는 총성이 크지 아니하여 바람소리(1번 관측소의 경우)나 비디오소리(식당의 경우) 등으로 인하여 이를 의식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사실, 이 사건 사고 직후 비상을 알리는 암호(code word)로 귀순자가 발생하였다는 의미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가 잘못 사용되었으나 이후 1사단 연락장교 중위 소외 27이 한국어로 연합사 등에 상황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총성이 났다’고 보고한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으므로, 의문의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위와 같은 수사내용에 비추어 합조단 수사결과가 조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할 것이어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없다.
(다) 원고들은 또한, 합조단은 1분대원 11명의 경우 이 사건 사고 당시 수색정찰을 하였으므로 이들의 알리바이가 입증된다고 발표하였으나 2소대는 이 사건 사고 전일까지 수색정찰예규에서 정한 수색정찰을 모두 완료하였고 이 사건 사고 당일의 수색정찰은 평소와 달리 인근 1사단에 통지되지도 아니하였으며 통상 주간수색정찰의 경우 5명만이 참가하는데 사고 당일의 수색정찰은 소대원 11명이 참가한 대규모였다는 점 등에 비추어 위와 같은 발표는 진상을 은폐·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을 17호증의 기재 및 소외 17의 증언만으로는 위와 같은 수색정찰이 없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고, 오히려 갑 7호증의 54, 71 내지 73, 을 13호증의 1 내지 9, 16호증의 1, 23호증의 21, 25호증의 12의 각 기재에 의하면 당시 수색정찰에 참여하였다는 분대원 11명 전원의 진술내용이 구체적이고 서로 일치하는데다 위 수색정찰에 참가한 중대정보병과 의무병의 각 진술도 이에 부합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으므로 이들 전원이 공모했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이상 원고들의 위 주장도 이유없다할 것이다.
라. 수사상 과실 내지 위법성 여부
위 다.항의 인정사실 및 판단을 종합하면 결국 이 사건 사고에 관한 군수사기관의 수사가 미리 자살로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고의로 진상을 은폐·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할 것이므로, 이하에서는 이 사건 수사상의 과실 존부 내지 그에 대한 위법성 여부에 대하여 살핀다.
(1) 이 사건 수사상의 의문점
(가) 유품정리행동 여부
합조단 수사결과는 이 사건 사고를 자살로 보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자살전 유품정리행동을 들고 있는바, 갑 3호증, 7호증의 13, 14, 16, 39, 40, 69, 78, 을 7호증의 10 내지 12, 19호증의 12, 14, 19, 23, 24, 22호증의 9, 11, 23호증의 19, 20, 30, 25호증의 16, 29호증의 18의 각 기재 및 갑 4호증의 일부 영상 및 변론의 전취지에 의하면 ① 소외 7이 현장사진을 촬영한 12:55 이후 이 사건 사고 현장은 기관총거치대 위에 가죽장갑이 있고 그 위에 수색정찰계획표가 몇 장 넘겨진 상태에서 장갑과 일부 겹쳐지도록 비스듬이 놓여져 있었으며 전투모는 예비총열박스 위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던 사실, ② 이 사건 사고 직후 기관총거치대 위에는 김훈의 무전기가 놓여 있었으나 소외 3이 상황전파용으로 사용한 후 계속 소지하고 있다가 다음날 부중대장에게 반납한 사실, ③ 소외 3은 1차·2차수사에서 일관하여 전투모가 예비총열박스 위에 떨어져 있었다고 진술하였으나 당시 전투모가 기관총거치대 위에 있었다는 소외 2, 1의 진술과 상반되자 3차수사에서 거치대 위에 있던 전투모를 자신이 떨어뜨린 것일 수 있다고 진술을 번복하였고 그 무렵 소외 1은 당시 전투모의 위치에 비추어 사람들이 왕래하다 떨어뜨릴 수 있다는 취지로, 일병 소외 32는 소외 3의 뒤를 따라 현장에 갔을 때 거치대 위에 전투모가 놓여 있었다는 취지로 각기 진술한 사실, ④ 합조단은 수사결과 기관총거치대 모래주머니 상단에 검정색 가죽장갑 1켤레와 수색정찰계획표가 포개어져 있고 그 위에 김훈의 전투모, 우측에 무전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소외 3이 지하진지에 들어가 김중위의 머리와 맥박을 살피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전투모를 우측 통로에 떨어뜨렸다가 이를 뒤늦게 발견하고 예비총열박스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다.
그러나 우선 위 인정사실에 의하더라도 위 수색정찰계획표는 몇 장이 넘겨져 당일 수색정찰지역의 지도가 펼쳐진 상태로서 가죽장갑 위에 비스듬이 겹쳐져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므로, 적어도 이를 가리켜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다(이를 자살자의 유품정리 행동으로 보려면 먼저 손에 들고 있던 수색정찰계획표를 내려놓고 그 위에 장갑을 벗어 얹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할 것이며, 이 사건의 경우는 실내에 들어온 김훈이 수색정찰계획표를 넘겨보기에 불편한 가죽장갑을 먼저 벗은 후 위 수색정찰계획표를 보고 있었다고 추정함이 더 타당하다할 것이다).
또한 전투모의 위치와 관련하여서는, 위 갑 4호증의 일부 영상 및 변론의 전취지에 의하면 당시 장갑과 수색정찰계획표는 기관총거치대 위의 모래주머니 1개 폭 이상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으므로 전투모가 장갑 위에 놓여 있었다 하더라도 소외 3이 사체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이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적은데다(합조단 수사결과는 소외 3이 지하진지에 들어가 김훈의 맥박을 살피는 과정에서 전투모를 떨어뜨렸다 하나, 기관총거치대의 높이와 장갑의 위치에 비추어 맥박을 살피는 과정에서 전투모를 떨어뜨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가벼운 재질의 전투모가 예비총열박스 위까지 날아가 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할 것이어서(합조단 수사결과는 소외 3이 통로바닥에 떨어진 전투모를 예비총열박스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나 소외 3은 전투모가 예비총열박스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진술하였을 뿐 위와 같이 전투모를 올려놓았다고 진술한 바 없다) 결국 소외 3의 위 번복진술 및 이를 뒷받침하는 소외 1의 각 진술은 신빙성이 부족하다할 것이고, 나아가 앞서 든 을 7호증의 11, 16, 22호증의 11, 23호증의 19, 20의 각 기재에 의하면 소외 2는 크기와 모양에 비추어 식별하기 쉬운 수색정찰계획표는 보지 못하고 대신 그 밑에 반 이상 가려져 있던 검은색 가죽장갑과 육군수첩만을 보았다는 것이어서 이 역시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합조단은 소외 3의 최초진술과 현장사진에 따라 전투모가 처음부터 예비총열박스 위에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것이며, 이와 달리 합조단이 소외 2, 32의 진술에 따라 전투모가 기관총거치대 위에 있었다고 판단하였다면 수색정찰계획표가 갑자기 나타나게 된 경위나 검은색 육군수첩의 행방에 관하여 수사를 함이 마땅하였을 것인데 그러한 수사조차 하지 아니한 것은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한편 갑 7호증의 18, 을 10호증, 24호증의 28의 각 영상에 의하면 현장에서 발견된 위 전투모의 위치와 모양, 흙먼지의 유무 등이 서로 달라 위 전투모는 적어도 1회 이상 변형된 것으로 보이는바, 이처럼 중요한 현장의 유류품에 대하여 보존조치를 소홀히 하였다는 점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 격투·반항흔적
또한 합조단 수사결과는 이 사건 사고가 타살로 인정될 수 없는 근거로서 사고 현장 및 김훈의 상태로 보아 격투·반항의 흔적이 전혀 없이 평온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갑 7호증의 35, 을 21호증의 53의 각 기재 및 갑 4호증, 7호증의 18, 을 24호증의 28의 각 영상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 현장 북동쪽 벽에 일렬로 설치되어 있던 6개의 크레모아 스위치박스 중 오른쪽으로부터 2번째, 일련번호 13번과 16번 사이에 위치한 스위치박스(2차수사 당시에는 15번으로 복구되었다)의 덮개가 파손되어 김훈 오른쪽 전투모와 탄약통 사이 예비총열박스 위에 엎어진 상태로 비스듬이 떨어져 있었던 사실, 이 사건 사고 당시 김훈이 왼손에 착용하고 있던 손목시계의 덮개유리 9시부분이 6㎜×4㎜ 크기로 파손되어 있었고 국방부과학수사연구소는 1999. 1. 8. 위 파손은 끝이 울퉁불퉁한 물체에 의하여 9시 방향 측면케이스부분이 타격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감정하였으나 부검감정서에 의하면 김훈의 왼손 손목부위에 별다른 외표소견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다.
살피건대, 크레모아 스위치박스의 번호는 덮개에 표시되어 있는데 위 스위치박스 번호가 일련번호 순으로 되어 있지 않으므로 덮개가 망실될 경우 당해 스위치박스의 번호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점, 귀빈방문 및 근무지 인수인계가 예정된 상황에서 위 스위치박스에 대한 수리요청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점, 파손된 스위치박스 덮개가 정리되어 있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예비총열박스 위에 엎어져 있었다는 점 등에 비추어보면 위 크레모아 스위치박스는 종전부터 파손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사고 당시 깨어져 떨어진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또한 김훈의 시계유리가 울퉁불퉁한 물체에 의하여 파손된 것임이 분명한 이상, 비록 위 시계유리의 파손시기가 명확하지 아니하고 부검감정서상 김훈의 왼손 손목에서 외표 소견이 발견되지 아니하였다고는 하나 시계유리의 파손이 소대장의 생활과정에서 통상 발생하기 쉬운 일이 아닌 점에 비추어보면 이는 격투의 정황증거로 판단함이 상당하다. 여기에 앞서 본 바와 같이 김훈의 전투모가 위 크레모아 스위치박스 덮개 바로 옆에 함께 떨어져 있었다는 점, 김훈의 왼손에서 검출된 뇌관화약성분이 반항흔으로 판단될 여지가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 사고 직전에 격투나 반항이 있었다고 의심할 여지는 매우 크다할 것이며, 따라서 격투·반항의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자살이라는 합조단 수사결과의 판단은 합리성이 부족하다할 것이다(나아가 합조단 수사결과는 김훈이 사용하던 무전기에 파손이나 기능손상이 없었다는 점에 비추어 격투·반항이 없었다고 하나, 위 무전기는 이 사건 사고 직후 소외 3이 사용하다 다음날 부중대장에게 반납하였으며 군수사기관은 위 무전기를 증거로 확보하여 조사한 바 없으므로, 위 판단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
(다) 알리바이 조사의 미비
합조단은 김훈의 사망추정시간 중 소대원들의 행적을 수사한 결과 아무런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발표하였는바, 갑 7호증의 16, 21, 22, 47 내지 53, 75, 을 19호증의 11, 13, 28, 37, 39, 41, 42, 44, 45, 48, 58, 59, 61, 70, 75, 77, 21호증의 32, 33, 60, 22호증의 17 내지 19, 23호증의 4, 19, 26호증의 1 내지 14, 29호증의 24, 31호증의 25의 각 기재에 의하면 김훈의 사망추정시간이 11:50경부터 12:20경까지 사이인 사실, 소대원들의 상호 진술로 위 시간 중 소대원들 행적이 대체로 확인되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이에 반하는 을 15호증의 1, 19호증의 30, 64, 79의 각 기재는 을 15호증의 5, 6, 19호증의 34, 35, 65 내지 67의 각 기재에 비추어 믿기 어려우며 달리 반증이 없다.
그러나 갑 7호증의 7, 을 19호증의 17, 21, 55, 23호증의 29, 30의 각 기재 및 소외 33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군 수사관은 이 사건 사고 당일 23:00경부터 소대원들 전원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진술서를 작성하도록 하면서 시간에 관하여는 서로 상의하여 작성하라고 독려한 사실, 최초발견자인 소외 1, 2, 3을 제외한 나머지 소대원들에 대한 신문은 사건 발생 후 한 달여가 지난 1998. 3. 31.경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사실, 한국군 수사관은 1998. 3. 3. 소외 9로부터 사고당일의 241GP 상황일지를 요구하여 받았으나 12:30경 비상이 걸렸던 것 외 특이사항이 없다고 보고한 후 이를 기록에 편철시키지 아니하였으며 이후 위 상황일지는 분실 또는 폐기된 사실이 인정되고 반증이 없는바, 결국 위와 같은 초동수사는 시간별 상황을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아니함으로써 사고 당일 241GP의 상황을 소대원들의 진술에만 의존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도록 하면서도 이러한 소대원들 진술의 신빙성 마저 스스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할 것이다.
더구나 소외 3에 대한 알리바이 수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문이 있다. 즉 갑 3호증, 갑 7호증의 13 내지 15, 39, 40, 50, 69, 70, 78 내지 80, 85 내지 87, 89, 90, 을 23호증의 30, 29호증의 22의 각 기재에 소외 18의 증언을 종합하면, 소외 3은 12:00경 소대장실 앞에서 소외 48 등으로부터 중대상병모임 복귀신고를 받고 함께 식당으로 갔다는 것이 합조단의 결론인데 소외 3은 위 상병모임 복귀신고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진술한 사실, 소외 3은 자신이 사고 당일 작업하였다는 컴퓨터 작업문서명이 “업무보고”라고 계속하여 진술하여 왔는데 그 후 위 “업무보고” 문서를 화면상 출력하여 촬영한 사진을 보고는 자신이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작성하였다는 문서의 파일명이 “업무보고”가 아니라고 진술을 번복하였는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조단은 별다른 추가조사를 하지 않은 채 수사결과에서 여전히 소외 3 작성문서가 “업무보고”였다고 발표한 사실, 합조단 수사결과에 의하면 소외 3은 위 업무보고문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이 사건 사고 전날 22:00경부터 사고 당일 4:00까지, 다시 사고 당일 10:00경부터 12:00경까지 작업에 열중하였다고 하는데 사진상 촬영된 “업무보고”는 실제 작업내용이 거의 없는 사실, 소외 3은 중대장의 지시에 의하여 1998. 3.경 위 컴퓨터를 중대장실로 옮겼다고 진술하였으나 사진상 촬영된 화면에는 1998. 5. 11.까지 계속하여 사용한 작업내용이 나타나 있는 사실, 중대장 대위 소외 45는 위 컴퓨터가 미군 재산이라는 이유로 위 컴퓨터를 수사기관에 제출하지 못하고 1998. 5. 11. 위 “업무보고”문서를 화면으로 출력하여 사진촬영하는 방법으로 수사에 협조하였던 것인데 소외 3은 1998. 6. 19. 한국군지원단 본부로 전출될 당시 위 컴퓨터를 가지고 나와 1999. 8.경 용산에서 하드디스크를 포맷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위 작업내용을 복구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군수사기관은 그 이후에야 위 컴퓨터를 압수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반증이 없는바, 이와 같은 중요 증거품의 확보지연 내지 알리바이 수사의 중단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할 것이다.
(2) 수사상의 과실 내지 위법성 유무에 대한 판단
(가) 초동수사
이 사건 사고에 관한 군수사기관의 수사는 군사법원법 제264조 에 의한 변사자검시 및 그에 이어지는 일련의 수사과정이었다 할 것이며, 그렇다면 변사자검시를 담당하게 된 군사법경찰관으로서는 사체의 상태 및 현장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 변사의 의심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 구 군검찰사무운영규정 제24조(2000. 4. 22. 대통령령 제16793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에 의하여 지체없이 현장을 보존함에 필요한 조치를 하고 관련된 증거를 수집·확보하는 등 필요한 조사를 하는 한편 이를 검찰관에게 보고하여 그 지시에 따라 필요한 처분을 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다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사고의 초동수사를 담당한 군사법경찰관은 현장 유류품의 위치를 실측하거나 보존하지 아니하고 크레모아 스위치박스의 파손 등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지도 못한 채 김훈의 업무수첩, 소대 상황일지, 현장에 있었다는 무전기 등 중요 물증을 확보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소대원들에 대한 수사 역시 형식적으로 진행하였다는 것이므로, 이러한 점들에 있어서 이 사건 초동수사가 미비함으로 인해 이후 수사에 어려움을 초래하였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유엔사의 작전관할지역에 속하는바 위 지역에서 벌어진 범죄행위의 수사관할권 문제에 관하여 유엔사와 피고 사이에서 명시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바 없고, 대한민국과아메리카합중국간의상호방위조약제4조에의한시설구역및대한민국에서의합중국군대의지위에관한협정 제22조는 주한미군의 지위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를 유엔사 작전관할지역에서 발생한 범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할 것인지에 관하여는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달리 위 지역에서의 수사에 관하여 확립된 수사관행도 없는 상태였다는 점, 이러한 상황에서 사고발생 초기 미군 범죄수사대에 의하여 현장조사가 이루어졌고 한국군 수사관측은 미군의 출입통제로 17:20경에야 현장조사를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이미 사고 권총 등 현장유류품이 수거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점, 권총사고 수사의 경험이 거의 없는 현실상 권총과 사체와의 거리 등 전문적 법의학지식에 기초한 현장조사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결국 위와 같은 초동수사의 내용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과실이 있다거나 위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할 것이다.
(나) 합조단 수사결과
한편 합조단 수사결과에 있어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류품의 위치 및 격투·반항흔적 유무, 알리바이 수사 등에 관하여 그 증거판단 등에 적절하지 못한 면이 있음은 인정된다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사는 그 진행과정에서 계속하여 심증을 형성하고 이를 보강하는 동적인 과정으로서 다수의 개별적인 증거와 그에 대한 판단들을 종합하여 수사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결국 수사상 판단의 위법성 여부는 수사과정에서 이루어진 개별적 판단들이 아니라 수사결과에서 나타난 종합적인 판단이 일반인의 상식에 비추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인가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인바, 이 사건 사고에 있어서 군수사기관이 전문가의 감정소견을 그대로 취신하여야 할 의무는 없으나 국내에서 흔하지 아니한 권총 사고에 관하여 이례적인 법의학토론회를 개최한 결과 다수 견해가 자살로 소견을 피력하였고 이후 계속되는 수사과정에서 이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타살의 증거 역시 발견되지 아니하는 상황이었다는 점, 이 사건 사고가 최전방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공개수사에는 한계가 있는데도 합조단이 원고들의 해명요구 항목들에 관하여 극히 이례적인 인력과 장비를 장기간 투입하여 수사를 계속하여 온 결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판단을 하였다는 점, 이 사건 사고를 자살로 단정짓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국방부 차원의 대대적인 수사가 장기간 계속되었음에도 제3자가 보기에 합리적인 의심없이 타살로 단정할만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터에 여전히 미제사건 내지 의문사로 결론을 내리는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보면, 결국 합조단 수사결과는 나름대로 불가피한 결론이었다고 보여지는만큼 피고로서는 위와 같은 수사로써 그 책임을 다하였다고 할 것이어서, 위 합조단 수사결과 역시 과실이 있다거나 위법하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다) 소결론
이 사건에 있어서 나타난 증거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느 증거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타살이라고 확신하는 측과 자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측이 나뉘어져 있다. 새로운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진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듯 하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앞서 본대로 피고의 과실이나 위법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점 외에도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는 근본적으로 김훈이 피살되었음을 전제로 하는바 비록 김훈이 자살하였다는 수사 결과에 선뜻 동의하지 않더라도 전체적인 증거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때 그가 피살되었다고 단정하기에도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 결국 피고에게 이 사건 사고 수사상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원고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4. 명예훼손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판단
원고들은 합조단장 중장 소외 10이 원고 1의 동기생들에게 “자살할 수 밖에 없는 가정이다”, “김훈을 국립묘지에 보내려고 억지를 쓰고 있다”는 등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살피건대, 소외 10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후 그 정당성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에게 김훈의 JSA소대장 전입경위 등을 설명한 사실이 있음은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으나, 나아가 소외 10이 구체적으로 원고들 주장과 같은 발언을 하였음을 인정할 증거는 없고, 또한 위와 같은 발언을 언제, 누구에게 하였는지에 관하여도 이를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으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없다.
5. 결 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이유없어 모두 기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