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기)
1. 피고는 원고 A에게 17,450,503원 및 이에 대하여 2014. 4. 3.부터 2014. 4. 24.까지는 연 5%, 그...
1. 인정사실 대구10월사건 대구10월사건은 해방 직후 미군정의 친일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및 강압적 식량공출 시행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 및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으로, 1946. 9. 하순경 일어난 노동자들의 전국적 총파업에 이어 1946. 10. 1.부터 그 다음날까지 사이에 대구 지역에서 주민봉기의 형태로 발생했다.
1946. 10. 1. 대구역 및 대구공회당 인근에 노동자 등 수천 명이 집결하여 경찰 100여명과 대치하면서 시작된 대구 지역의 시위는 미군정이 1946. 10. 2. 17:00경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했으나 1946. 10. 6.까지 경북지역으로, 1946. 12. 중순경까지 남한 전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대구경북 지역 주민 중 대구10월사건의 진압과정에서 검거된 7,500여 명은 취조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하거나 석방된 뒤 경찰 및 우익단체에 의해 가옥과 재산을 파괴몰수당하는 등의 보복을 당한 경우도 있고, 적법절차 없이 사살된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군경에 의한 진압이 강경하자 대구10월사건 참여자 중 일부는 잠적하거나 입산 후 야산대를 조직하여 빨치산유격대로 발전하였고, 이에 맞서 경찰은 수시로 빨치산 토벌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입산한 자들 뿐 아니라 주거지역에 있던 대구10월사건 관련자, 남로당 가입자와 그 가족들 또는 대구10월사건과 무관한 지역주민들 중 일부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칠곡군 F에 거주하던 G은 형 H(대구 철도 화물 조역)이 대구10월사건 관련자라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1949. 5.말경 지천지서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G을 포함한 마을 주민들을 칠곡경찰서로 강제연행하여 구금했다가 일부는 석방하고 일부는 석적읍 성곡리에...